YuKI_순정설 ['하루'를 참지 못했던 것은 비웃음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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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단편 순정 소설이구염 ^ㅡ^//
재미없으시더라도 끝까지 읽으시고 비평 좀요..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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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빛 노을이 수평선 끝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마치 태양이 바다로 잠긴 듯한 희귀한 광경을 지켜
볼 때면 나 또한 바다에 뛰어들어 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싶어진다. 지금 내 손에는 나체화 하나가 들
려있는데 곳곳에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나있다. 며칠 전 미술 실에서 볼 때는 분명히 이렇지 않았는데
오늘 굳은 결심을 하고 들고 나와보니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었다. 대충 누구의 소행인지는 짐작이 가
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날 나에게 있었던 그 불운한 일들을 생각한다면 지금 그녀의 반성
은 하찮은 지푸라기에 불과하지 않았다.
1년 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마음을 먹고 그녀를 찾아갔다. 하지만 집 근처 서성거리며 1시간 동
안 기다려도 봤고 그녀가 갈 만한 나이트도 가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이 일을 마치 일상 계획처럼 되
풀이 한지 3주쯤 되었던 날이었을까, 우연히 슈퍼를 들러 먹을 것을 들고 오는 도중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들고 있던 것 모두를 떨어 뜨려버렸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그녀는 나 아닌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있었고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남자가 바로 내
절친한 친구 중의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를 갈고 그녀에게 복수심을 느꼈던 이유는 그 날 그녀가 나를 보며 지나갈 때,
내 절친한 친구와 머리를 맞댄 체..
나를 비웃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진학 과정 중 나는 인문계와 예술 고 둘 중 어느 곳을 갈까 많은 고민을 했었다. 물론 나
의 재능 상 예술 고를 가는 게 올바른 선태이었지만 부모님께서는 이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인문계를 나와야 4년 제 대학을 간다. 그러니깐 인문계로 진학하거라."
인문계를 간다고 4년 제 대학을 나오는 것만은 아닌데, 어른들의 틀에 박힌 고정관념 때문에 나는 3
년 동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고 내신 또한 거의 바닥이 나올 수준에 이르렀다. 하
지만 수능시험이 닥치기 3개월 전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공부한 결과, 명문대에
원서를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점수를 받게되었다. 문제는 내신이었는데 이 바닥에 가까운 내신 성적으
로는 명문대는커녕 일부 평범한 대학교에도 원서 집어넣기가 무안했다.
고민 끝에 홍익대 미술과에 원서를 집어넣었고 무난히 합격했다. 4년 제 대학에 갔다는 소식은 부모
님을 기쁘게 했지만 미술과 라는 말을 들으신 후에는 며칠 동안 나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으셨다. 하지
만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지난 3년 동안 해오지 못한 예술, 특히 그림이라는 창작적인 예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영훈아, 이자식, 또 그림 그리고 있냐?"
나를 부르며 다가오는 이 녀석이 내 절친한 친구 '정현교' 라는 녀석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언제나 뒤통수를 치면서 다가오는 그림자 같은 친구였다.
"야, 저게 암석 옆에 기대어 서 봐봐."
당시 나는 교수님께서 내주신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사장에 주저앉아 바다의 노을 빛을 생생히
스케치하는 중이었다. 노을 빛에 물든 바다를 배경으로 산들바람에 날리는 나무들, 사랑의 속삭임을
하는 연인들, 그 위에 축복이라도 해주는 듯한 갈매기들을 내 스케치북에 담고 있었다. 현교는 내 뒤
에 서서 내 그림을 보더니
"와, 진짜 실물과 다를 게 없잖아, 역시 그림에는 도가 틴 녀석이라니깐.."
"그렇냐? 자식, 오랜만에 칭찬 한 번 듣는구나.."
당연히 이 그림은 A를 받았고 A를 받은 나로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친한 친구들을 모아 한턱 쏘
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이트로 가 춤을 추고 있는 우리, 춤에는 소질이 없었던 터라 나는 테이블에 앉아 술만 두어번 들
이키고 있었다. 벌써 친구들은 현란한 춤을 추며 여자들을 꼬시고 있었지만 평소 '쑥맥' 이라 듣던 나
로서는 여자를 꼬신다거나 사귄다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 녀석들.. 정말 춤 잘 추는데, 아.. 나도 끼고 싶지만 춤 실력이 되야 말이지.. 부럽다.. 자식들..'
이런 생각을 하며 술 한잔을 다 비우는 순간,
"저 앞에 앉아도 될까요?"
한 여자의 음성이 내 귀를 울렸다. 순수하며 청아한 이 목소리, 설마 나겠나 싶어 다른 곳을 주시하
자 한번 더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앉아도 되냐구요.."
다소 술기와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였지만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뭔가를 끌어드리는 듯한 이 목
소리, 순간 내 눈은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를 주시하게 되었는데..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예쁜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게 된 것이 고맙게 느
껴질 정도였는데, 그녀의 얼굴은 선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이 살짝 찐 큰 눈, 속눈썹 또한 대각선 방향으로 말아 올린 눈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였고 코 또한 약간의 날카로움을 감추고 있었다. 앵두 같이 빨갛고 자그마한 입은 어떤
남자가 그녀를 보면 꼭 한번 입맞춤을 하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아, 네, 물론이죠. 앉으세요."
나는 얼른 자리에 일어나서 내 앞에 자리에 손을 내밀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뇨. 앞에 말고요, 옆 에요."
"네?"
순간 당황했다. 내 옆이라니, 처음 본 여자인데 갑자기 내 옆에 앉는다는 것에 당황했지만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숙녀께서 괜찮으시다면 저 또한 괜찮죠."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 속에 나오는 한 대사가 불쑥 내 잎에서 흘러나왔다. 그 여자는 잎
을 막으며 키득거렸고 그런 말을 한 게 무안할 정도로 오랫동안 웃었다. 다행히 몇 분 뒤 웃음이 그치
자 그녀는 나의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같이 춤 추지 않을래요?"
난생 처음 내 옆에 여자가 앉은 것이었기 때문에 상기된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친구들이 춤추는 곳
을 주시했다. 그래서였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말을 무시한 탓이었는지 그녀가 불썩 일어나더니만 내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는 거
였다.
"아, 저 죄송합니다. 무슨 말했어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끌어올리더니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때
'Sexy'라는 음악이 틀어졌고 근처에 있는 여자들은 현란한 몸으로 매혹적인 춤을 추기 시작했다. 멍하
니 침을 흘리며 보고 있는 나를 깨워주는 여자가 있었는데 나를 끌고 왔던 그 여자였다.
"자, 저 잘 보세요.."
테이블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밝은 곳으로 오니 그녀의 옷이 굉장히 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자기 몸을 쓰다듬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섹시한 춤이 시작되었다. 마치 선녀가 나를
유혹하기 위해 손짓하는 것과 같았다. 이에 홀려 춤 솜씨가 없다고 여겨진 내 몸에서 나에게 가능하다
고 생각되지 않는 동작들까지 그녀와 함께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했고 친구들 또한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나이트에서 빠져 나올 무렵, 그녀가 나에게 메모가 담긴 쪽지를 건 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눈 깜
짝할 새 그녀의 친구들과 사라졌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이 자식, 저렇게 예쁜 여자를 꼬시다니! 실력이 장난 아니다!!"
"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이 녀석도 늑대잖아?"
친구들이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한마디씩 건 냈다. 나 또한 저런 여자를 건졌다는 사실에 흡족함
을 느꼈고 또 앞으로 저 여자와 사귀는 생각을 하니 꿈만 같았다.
그녀의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지현, 017-577-2469' 그녀의 이름과 핸드폰 전화는 나의 가
슴을 더욱 찡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날 나는 그녀에게 연락했고 그녀는 선뜻 나와 데이트까지 해주었
다. 만난 지 100일 째 되던 날은 지현의 생일이기도 했는데 나는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기 위해
고심 끝에 반지 두개를 샀다. 그것도 커플링으로..
"지현아, 우리 저거 타자!"
"어떤 거?"
내 손가락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거위 모양의 보트였다. 딱 두 명이 앉아 페달을 밟으며 움직이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고 쉽게 물위를 떠다녔다. 나뭇가지가 우거진 곳으로 보트를 옴 겼고
커플링을 꺼낼 준비를 했다.
"지현아, 우리 100일 그리고 생일 축하해!"
커플링을 꺼내 그녀의 검지에 넣는데 계속해서 손등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비라도 오나
싶어 고개를 들어올렸더니 그녀가 한쪽 손으로 입을 막으며 울고 있었다. 커플링을 마저 손에 꼽자말
자 그녀는 나를 껴 앉더니..
"고마워.. 영훈아.. 나 너만.. 너만 사랑할게.."
이 말을 하더니 나머지 커플링을 내보라는 것이었다. 선뜻 내주자 그녀가 내 검지 손가락에 커플링
을 끼워주었다. 나 또한 기쁨에 휩싸여 그녀에게 '고마워' 라는 말을 할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입술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약간 씁쓸하지만 들뜨는 느낌까지 들었는데, 눈을 살며시 또 보니 그
녀는 내 입에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 데이트를 했고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어느 날 교수님의 권유로 나는 처음으로 '나체화' 라는 것을 그려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체화'
그것은 한 사람의 벌거벗은 모습을 연필 또는 붓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예술로서 화가를 꿈꾸는 학
생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리고 싶어했다.
"야, 내가 우리 미술과에서 처음으로 나체화 그리는 학생이 됐다 이거 아니냐.. 좀 본 받아라!"
미술과 애들에게 자신감 넘친 목소리로 떠드니 애들은 엄지손가락을 내리며 야유를 보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교수님으로부터 저 많은 애들 중 내가 가장 먼저 인정받았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나체화를 그리는 특별 실이 따로 있었는데 나의 발걸음은 그 곳으로 향했
다. 지하라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혹시 불청객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가득 차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신감에 들떠있는 나에게는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별실의 문을 스르르 열자 천 하
나만을 두르고 있는 여자 한 명이 있었다.
"저, 제가 오늘 그림 그리는 학생인데요. 안녕하세요.."
그런데 그 여자는 내 목소리를 듣고 놀랐는지 얼굴을 가리며 말을 꺼냈다.
"...아...안녕하세요."
엇,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청아한 이 목소리는 분명 지현과 흡사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얼
굴 비슷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데 목소리 비슷한 사람이 없으랴 생각하고 화판이 놓여져 있는 의자
에 앉아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
"포즈 좀 취해주시겠어요?"
그 여자는 천을 서서히 벗더니 얼굴을 푹 숙인 체, 조금 실망스러운 포즈를 지었다. 하지만 난생 처
음 나체화를 그리는 거라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연필이 들려진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
음 그려보는 나체화에다가 남자라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성욕구가 발생해 손이 떨리기는 했지만 침
착함을 잃지는 않았고 2시간 뒤 그림은 거의 완성되었다.
"아, 다 그렸다. 저, 이제 다 그렸거든요? 이제 천 두르셔도 됩니다.."
"...네."
짧고 작은 목소리, 생각해보니 2시간 동안 그 여자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거 같았다. 나에게
얼굴을 숨기고 싶다는 그런 느낌도 받았지만 구지 얼굴을 보여달라고 할 것 같지는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 대신 악수라도 하기 위해 그 여자의 곁으로 간 순간, 그 여자 또한 내 얼굴을 무의식
적으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아, 갸름한 얼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눈,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2시간동안 내 나체화 모델을 해주고 있던 사람은 바로.. 지현이었다...
학교 밖,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왜 말하지 않았니, 너가 이런 직업 갖고 있다는 거..."
내가 갑자기 이런 것을 물어 당황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다소 나에게 화난 기색이 엿보였지만 보여
주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역했다.
"나이트에서 봤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어쩐지 순한 여자 같지는 않더니만..."
"그래서, 내가 이런 직업 갖고 있다는 게 불만이야?"
앙칼 짖는 듯한 목소리,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순간 묻는 순서가 잘못됐다 싶은 나는 사과를 하려고 커피를 건 내 주는 순간, 그녀는 커
피를 손등으로 치며 엎어버렸다. 그걸 따지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 그녀의 눈가에는 이
미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흐..흑.. 고작 너는 이 것 밖에 안 돼?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그런 것은 아예 물어보지도 않아,
너라는 애는.. 너라는 애는.. 흐흐흑..."
'바보야, 내가 다시 물어 볼려고 했던 거란 말이야. 그렇게 울면 말할 수가 없잖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녀의 울음은 그칠 생각이 없었고 나에 대한 화도 누그러질리도 없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수건을 꺼내자말자 그녀는 자신의 손등으로 눈물을 닦더니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지현아.. 지현아!!"
부를 용기는 있었지만 그녀를 붙잡을 용기는 없었다. 이미 내가 먼저 잘못한 일이었고 그녀의 상처
를 입힌 것도 나였다. 하지만 나에게 아무 말도 안한 그녀가 무심하게 느껴졌고 또 화까지 나게 했다.
이랬기 때문에 나의 잘못 보다는 그녀의 잘못을 더욱 탓하게 되었고 그 후 우리는 연락이 끊긴 채 여
러 달을 보내야 했다.
한 번은 내가 시청에서 주도하는 시 미술 전시회에 내 미술 작품을 전시한 적이 있었다. 시장님께
최우수작으로 뽑힌 나의 작품은 맨 중앙에 걸려 있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이 것은 앞
으로 미래의 내 운명을 점찍은 듯 했는데, 내 그림을 보며 감상에 빠져있을 때, 멀리서 나지막히 '영훈
아..' 하는 메아리 같은 목소리를 얼핏 듣게 되었다. 감상에서 깨어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는데 멀리
입구에서 빨간 샌드백을 어깨에 맨 체 걸어나가는 여자가 보였다. 뒷모습을 보아해 분명히 지현이가
틀림없었다. 전속력으로 뛰어 그녀를 쫓아갔지만 수십 미터나 되는 거리를 단 몇 초만에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입구에서 나갔을 때 이미 그녀는 사라진 뒤였고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나를 보지 않고 간 그녀를 원망만 했다.
"요새 왜 이렇게 그림이 엉망인가."
교수님의 핀잔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에 그림은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았고 내 성적 또
한 엘리베이터가 급강하하듯 그 속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방과 후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멀리서 내 절친한 친구, 현
교가 걸어오는 것이었다. 손을 흔들려고 손을 든 순간, 나는 그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현교 옆에
오는 여자를 봤기 때문이다. 익숙한 그 모습, 분명 지현이었다.
나는 근처 전봇대에 몸을 기대어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숨어버렸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태
정리를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 몸을 억제시키느라 경련이 일어나는 듯
했다. 그대로 30분이 지나고.. 겨우 진정시킨 채 집으로 돌아갔다.
"야, 영훈이가 현교한테 애인 뺏겼다며? 그 녀석, 애인 관리도 못 해? 완전 바보 아냐.."
"그러게 말이야.. 맨 날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깐 그렇지, 현교처럼 운동도 잘하고 잘 생겨봐. 애인이
떠나는지.."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뒤 아이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이렇게 수군덕거렸다. 이 수군덕거림에 의해
내 친한 친구들은 하나둘씩 나를 멀게 대했고 거의 '왕따'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다. 나는 수군덕거림
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학교에 휴학서를 썼고 집에 틀어박혀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되었다.
가까운 포장 마차 집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들어버렸다.
"하하하핫.. 나 현교랑 엄청 잘 지내, 너랑 비교도 안 될정도로 친절하고 좋은 걸? 너랑 왜 사겼는
지 모르겠다.."
"영훈아, 미안하다. 너보다는 지현이가 더 좋아. 너 애인 뺏은 것은 미안하지만 너가 다시 뺏을려고
해도 안 될꺼다.. 친구로서 미안한 말이지만 너가 잊어라.."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봐, 학생! 학생 일어나!!"
포장마차 주인 아줌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다 집으로 간 듯 했고 음식값을
내고 집으로 향했다. 도중 슈퍼에 들러 해장국 끓일 재료들은 사오는 데, 이 것은 또 무슨 운명의 장
난이란 말인가, 지현이 현교와 팔짱을 낀 채, 내 앞에 보라는 듯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핏 그들
이 수군덕거리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현교야, 솔직히 너랑 사귀기 잘한 것 같아. 김영훈 같은 애를 내가 왜 사귀었을까? 바보 같애.."
"그래 말야, 그 녀석, 솔직히 그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잖아? 너가 그런 모델이라는 이유만으
로 내차는 그딴 녀석은 잊어버려."
"그림은 무슨, 그 녀석 그림도 못 그려, 아마 지나가는 꼬마가 그 걔보다는 잘 그릴걸?"
순간 눈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녀로부터 비웃음을 당했다. 철저한 무시, 비웃음, 그것은 나의 이성
을 잃게 했다. 하지만 옛 애인과 옛 절친한 친구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내 발은 앞으로 나가지 않았
고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1년 뒤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매일 밤 그 둘이 나를 비웃으며 다정히 걸어가는 꿈을 꿀 때면
이성을 잃어 집안의 모든 것을 부수곤 한다. 이제 이 괴롭고 힘든 매듭을 풀고자 나는 지현의 나체화
를 들고 나왔고 나의 주머니에는 이 매듭을 풀고자 하는 물건이 들어있었다.
"이지현!! 나를 비웃지 말란 말이야!!"
나는 이렇게 외치며 바닷가로 뛰어들었다. 마치 광견에게 물리기라도 한 듯, 바닷가에서 미친 듯이
그림을 찢고 또 찢었다. 갈기갈기 찢긴 그림은 바닷가로 흘러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제 매듭을 푸는 일만 남았다. 나는 주머니에 있는 그 실마리의 물건을 꼭 쥔 채, 그녀가 자주 다
니는 골목 뒤에 숨었다. 그리고 그녀가 오기까지 기다렸다. 멀리서 그녀가 나타나자 나는 숨을 죽인
체 더욱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더 가까이.. 너가 빨리 올수록 매듭은 빨리 풀리게 된다..'
그녀가 내 근처까지 오자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 그녀의 배를 사정없
이 찔렀다. 피가 뿜어져 나오면서 내 몸에는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그녀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죽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서 피 묻은 그 물건을 집어던지고 웃었다.
"드디어, 드디어 매듭을 풀었다! 으하하하핫!!!"
웃음을 터뜨리자 말자 뒤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고 나는 혼절하고 말았다. 매듭을 풀었다는 사실
에 대해 미소를 지은 채 말이다.
정신이 들어보니 살인 미수 사건을 담당하는 제 1 형사반의 임시 감옥이었다. 내가 정신이 든 것을
안 형사는 수갑이 채워지는 나의 손을 끌어 당겨 강제로 의자에 앉히더니 다짜고짜 묻기 시작했다.
"왜 너는 그 여자를 죽였나, 또 그 여자와는 어떤 관계였나.."
나는 입을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뺨을 때리며 얘기하라는 형사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
고 꿋꿋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형사도 지칠 대로 지쳐 포기하자 나는 그대로 구취소로 끌려갔고 곧
이어 20년 징역이라는 무거운 벌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준비했다.
교도소 생활은 나름대로 편안했고, 세상의 낙원 같았다. 매듭을 풀고 난 후라 그런지 홀가분한 느낌
마저 들었다. 그녀를 죽였다는 죄책감 따위는 나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마저 드
는 것이었다. 이제 나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교도소 생활에 적응한 지 1주일 뒤였을까, 내가 절친하다고 여겼던 친구, 배신까지 하며 내 애인을
뺏었던 무심한 친구, 정현교가 면담을 왔다. 거부할려고 했었지만 옛 정을 생각해 얼굴만이라도 보여
주자 생각하고 면담실로 갔다.
"그 동안 잘 있었냐..."
"무슨 일이냐.. 니가.. 볼 일이라도 있는 거냐?"
나의 매정한 말투에 현교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이어 할 말을 이어갔다.
"사실 너에게 말할 게 있어.. 너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너한테 들을 것 없다. 그냥 가라.."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묻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은 수십개, 아니 수백개가 넘었지만 차마 체면상 그
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던 얘기라도 다 할 꺼라는 기대감에 자리를 뜨진 않았다.
"사실, 지현이는..."
"그 여자는 이미 죽었어! 입에 담지도 마라!"
거짓말, 내 잎에는 계속 거짓말만 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를 죽인 것은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한 때 사랑하고 애인으로까지 여겨왔던 여자였기 때문에 나와 헤어
진 후의 일이 궁금했다. 내가 입에 담지도 말라는 말에 현교는 다음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자 궁금함
에 못 이겨 내가 먼저 말하고 말았다.
"말해봐라.. 나랑 헤어지고 나서.."
"...어, 지현이가 나체 모델이었다는 것은 너도 잘 알 꺼야.. 그 날 너랑 있었던 그 일 이후, 지현은 3
일동안 밥을 먹지 않았대. 그래서 내가 찾아가서 한 마디 했지. 먼저 사과해라고.. 하지만 지현이는
안 받아들이는 거야.. 결국 설득 끝에 밥을 먹기는 했지만, 너에 대한 분노만은 더욱 커져갔어.. 나도
어쩔 수 없었지.."
"......"
잠시 머뭇거렸다. 몇분 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다시 현교가 입을 열었다.
"지현이가 내게 제안을 하는거야. 만약 안 들어주면 자살해버리겠다고 협박하기에 어쩔 수 없었지..
나중에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나로서는 지현의 제안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어. 그 제안이 뭐냐면..."
"잠시 자신의 애인 역할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였어.. 너 앞에 지나가면서 너 말고도 다른 남자는 얼
마든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 너에게 사과를 받을 작정이였대.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말
았지. 아마도 그녀가 너를 빈정거리는 게 너무 심했던 탓 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리고 너랑 만난 100일 째날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 '오늘까지 사과하러 안 오면 내가 먼저
사과하러 가야겠어.' 라고.. 내가 보는 앞에서도 계속 다짐을 했어. '내일 사과하자, 내일 사과하자,
예전으로 돌아가자...' 라고..."
아, 나는 그 때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죽일 날이 바로 그녀와 내가 100일 째를 맞이했던 딱 1년이
지났다는 것을..
"그러고는 지현이는 집으로 갔어.. 다짐을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그 다짐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 아마 천국에서라도 너에게 사과하고 있을거라 믿어.."
순간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하루만.. 하루만 참고 기달렸어도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은.. 단 하루만 지났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이때까지 느끼지 않던 죄책감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내 몸은 죄책감으로 인해
끓어올랐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일어나보니 교도소 병원의 침실이었다. 내 왼쪽 손에는 링겔이 꼽혀있었고 내 다리에는 따뜻한 이불
이 덮혀 있었다. '하루' 라는 기다림을 이기지 못한 나에게 살아있을 가치조차 없다고 느껴지자 왼쪽손
에 꼽혀진 링겔 바늘을 뽑았다. 그리고 링겔 바늘을 동맥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동맥을 향해 바늘을 찔러넣었다. 아, 그 때처럼 나른한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로 가고
있었다.
'하루' 라는 시간을 못 이긴 내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장소로 나는 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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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소설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ㅡ^/
이거 참고로 엔티님 2번째 콘티 때 올렸다가 떨어진거에욤..
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올려봤습니다..
댓글목록





Elegance™님의 댓글
Elegance™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흠....-_ -;;;; 우선 이 점은 분명히 해 두고 싶군요. 잘 쓰시긴 잘 쓰십니다. 저보단 월등히... 하지만, 이 글에 대한 비평은, 같은 소설작가로서의 관점이 아니라, 단순한 독자 관점이라는 것을 이해 해 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그 무언가'가 빠졌다는 킨진 님이나, 엔티 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는 것이 좀 걸리네요... 이 글의 주제가 궁금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었음에 대한 후회는, 소재에 불과하다고 보구요. 진실로 작가가 이 글로써 말하려고 했던 점... 그것이 궁금하군요. 뭐, 제가 도출하지 못한 점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_ -;;
다른 점에선... 전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남자가 여자를 찔러 죽여야만 했는지... 아무리 상처가 컸다 하더라도, 죽인다는 건 약간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물론, 남자의 살인이 더욱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겠지만. 어차피 이런 설정을 갖고 계셨던 거라면, 좀 더 자연스럽게 남자의 행동을 뒷받침 해 줬으면 하는, 그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문체도 자연스럽고 좋구, 비평이라서 그렇지 전개도 정말 좋은 편이십니다. 약간은 아쉬움이 남아서 그렇죠..^-^;; 그럼, 이번 콘티에도 건필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