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미르의 천계전쟁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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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스틴이 달에 재봉인 된 후 어느덧 3개월이란 시간이 지났다. 세월은 정말 유수가 흐르듯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울드와 스쿨드는 손상된 이그드라실의 복구 작업을 지원하러 천상계로 올라가고 집에는 나와 베르단디만이 남았다.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일깨우는 맑은 목소리..
"어머, 일어나셨어요 ? 케이 씨."
베르단디.. 언제나 나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주는 그녀...
나 때문에 여신의 직책을 거의 포기한 상태인데도 언제나 나에게 웃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응, 베르단디. 잘 잤어 ?"
"네. 아침 드세요. 지각하겠어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 그럼 잘 먹을게."
내 옆에 앉으며 살포시 웃음 짓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이대로 계속 그녀와 있을 수 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이라 해도 아깝지 않으리라... 그것이 설령 내 목숨일지라도..
식사를 마치고 시계를 본 나는 조금 놀랐다. 시계가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일어난 것만 같은데 벌써 7시 30분이 넘었다니.. 그녀와 같이 있으면 시간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베르단디, 그럼 갔다올게~!"
"네. 케이 씨, 잘 다녀오세요~"
그 순간.
쾅!!
무엇인가가 나의 앞에서 폭발했다. 그 충격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 나는 출근하는 길이었는데 ?'
눈을 뜬 내 앞에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고 있었다. 그녀는... 우는 모습마저도 아름답다.
내가 깨어난 것을 눈치 챈 것일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듯 그녀는 서둘러 눈가를 흝었다.
"케이 씨, 정신이 들어요 ?"
"아! 베르단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케이 씨가 출발하려 할 때 천계에 갔던 스쿨드가 근처로 내려왔어요. 그 여파로 인해 케이 씨가.... 미안해요..."
결국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그녀...
"미안해, 케이. 케이가 그곳에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
사과하는 스쿨드의 모습..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다.
"울지 마, 베르단디. 그건 네 탓이 아냐. 우연일 뿐이지. 그리고 스쿨드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괜찮아."
"그래, 그래. 그건 그렇지."
옆에서 말참견을 하는 백발의 미녀의 이름은 울드다. 건강해 보이는 갈색 피부에 잘 빠진 몸매, 그리고 무척 더러운 성격.
울드에게 대드는 일은 저승으로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벼락을 맞고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나마도 상당히 단순하기에 다행이지 지능적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다.
한동안 가라앉아있던 상황을 깨트린 것은 스쿨드였다.
"아, 맞아. 내가 지금 이곳에 내려온 것은 전할 말이 있어서야."
스쿨드의 말에 나는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
"스쿨드, 무슨 일이길래 그래 ? 급한 일이야 ?"
울드가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서운 일이지."
그러나 결국 본론은 말해주지 않는다.. 울드가 그럼 그렇지, 못말리는 건망증..
결국엔 스쿨드가 나서고야 만다.
"지금 천상계는 비상사태라구."
"설마,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니 ?"
베르단디가 말하는 일이 대체 무엇일까 ?
"응, 맞아. 현재 천상계는 다른 차원의 존재들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어."
"다른 차원이라니? 그럼 지금 여기 말고 다른 세상이 존재한단 말이야 ?"
"그래, 모르간 역시 다른 차원의 존재지. 그녀는 요정계에서 넘어온 거야."
다른 차원이라.... 그렇다는 말은..!!
"그렇다면 악마들과 싸우는 중인 거야 ?"
"역시 케이는 단순해. 악마정도와 싸운다면 비상사태일리가 없지. 우리가 현재 싸우는 존재는 다름아닌 신족이야."
"너희들도 신족이잖아. 서로 싸운다는 거야 ?"
"그들의 창조주는 저희의 창조주와 적대 관계에 놓여있어요."
"그럼 조물주란 존재도 여럿이 존재한다는 얘기야 ?"
"맞아요, 그들 역시도 더 많은 차원을 자신의 지배하에 놓기 위한 다툼을 벌이죠."
"그럴 필요 없이 차원을 생성하면 간단하잖아. 뭐하러 그런 힘든 싸움을 해야 하는 거지 ?"
"그런 차원은 소용이 없어. 조물주의 힘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지적 생명체의 수에 비례하거든."
"그래서 서로 싸움을 벌이는 거야 ?"
"그래... 차원을 하나도 갖지 못한 조물주는 소멸되고 새로운 조물주가 생겨나게 되는거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베르단디도 싸우러 가야 하는 거야 ?"
"예.. 저도 참전 명령이 내려왔어요."
"가지 않으면.... 안 되는거야 ?"
그녀의 속눈썹이 조금씩 흔들린다.. 제발 의무가 아니라고 말해주길....
"어쩔 수 없어요... 이것은 창조주의 의지..저는 거역할 수가 없어요..."
"그럴수가!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되찾은 행복인데... 난, 너를 보낼 수 없어~! 베르단디.. 난 네가 없으면 안 된단 말야!"
나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니길 빌고 싶다.. 세상은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는 것일까....?
어느샌가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정원으로 나왔다.
어째서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갈라놓으려 하는걸까..
우리는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걸까...
" 뭘 그리 열심히 생각해 ?"
"울드..."
"고민이 있으면 말해 봐, 이 울드님이 해결해 줄테니 말야."
"별 일 아냐."
내 맘을 풀어주려는 건 고맙지만, 난 지금 혼자 있고 싶어...
그러나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드는 말을 이었다.
"베르단디 일 때문이지 ?"
"휴우......."
그래.. 나는 어찌해야 하는건지 모르겠어.. 그녀의 마음도 이해할 수가 없고...
"베르단디도.. 너와 같이 있고 싶어해.. 하지만, 베르단디는 의무가 아니더라도 전쟁에 참여할 거야.."
"그렇다면 어째서... 전쟁에 참여하려 하는거야! 나와 같이 있고 싶다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베르단디... 어째서... 도대체 왜?!
"끝까지 똑바로 들어. 이 전쟁에서 패할 경우, 인간계는 소멸할 지도 몰라.
만약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창조주가 인간계를 장악할 경우
그가 인간의 지적 수준에 만족한다면 다행이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모든것이 끝나는 거야.."
그래서 그녀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던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렇다면 다른 차원으로 도망갈 수는 없는 거야 ? 나는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래.. 모르간처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후.. 차원 이동이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세계의 균형은 무너진지 오래지.
모르간, 그녀는 요정계에서도 상당한 고위 요정에 속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원 이동으로 거의 모든 힘을 상실했지.
그녀가 원래 힘으로 우리와 대적했다면 우리가 밀렸을 지도 몰라."
차원을 넘는다는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더군다나 창조주간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 막강한 권능으로 인해 차원들이 조금씩 좌표가 바뀌지.
잘못하다가는 차원의 틈새에 갇혀 영원히 떠돌게 될 수도 있어."
"울드.. 정말로 그녀를 보내지 않을 방법이 없는 거야 ? 내 모든 것을 잃어도 좋아.. 하지만 그녀만은.. 그녀만은!!"
그 말을 듣고 울드는 나에게 물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아 ?"
그래, 그녀만 무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거야."
울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방법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가르쳐 주겠어. 베르단디를 전쟁터로 내보내지 않는 유일한 길.
그것은..."
"언니! 안 돼요, 그 방법을 택한다면 저는 아마 후회하게 될 거에요."
베르단디, 그녀는 내 마음을 왜 몰라주는 걸까.... 나는 그녀를 희생시켜서까지 보호받고 싶지 않다는 것을... 왜 몰라줄까..
"베르단디, 나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그것을 택하지 않는다면 난 평생을 후회하게 될 거야.
나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가 없어.... 그리고 네가 희생해서 나를 지켜준다고 내가 기뻐할 거 같아 ?"
"하지만.. 케이 씨.. 그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길... 아직까지 그 누구도 사용한 적이 없었던 방법이에요..."
"그만. 됐어, 베르단디. 너도 케이의 맘을 이해해 주렴. 케이는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이럴 때에는 정말 울드가 언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워, 울드..
"울드, 그 방법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을 해줘."
"먼저 너는 한가지 의식을 시행해야 해, 그 의식이 끝나면 베르단디의 힘은 너에게로 전송될 거야.
그러면 베르단디는 사령부로 소속이 바뀌겠지. 그리고 네가 그녀 대신 신족 전투대에 편입되어 싸우는 거야.
다만 한가지 문제점은...."
"그로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겠죠.. 케이 씨, 괜찮겠어요 ? 1급신의 힘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에요.
신족들에게도 참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죠."
"걱정 마, 베르단디. 너를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참아내겠어!"
"좋아~! 케이. 바로 그 자세야, 그럼 의식을 시작하도록 하지."
울드와 베르단디는 바닥에 기이한 마법진과 도형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격계 신족인 울드는 주로 마법진을 그리고 머리가 좋은 베르단디는 마법식을 계산하는 듯 싶었다.
한참동안 마법진을 만들던 그녀들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felicitas cum amicis communicata est....."
듣고 있던 내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감미롭고 아름다운 노래였다....
그녀들의 노래가 끝나자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케이, 지금이야. 저 곳에 가서 베르단디와 마주 보고 서 있어."
울드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찢어지는듯한 느낌....
그러나 나는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빛이 사라지자 내 눈 앞에 눈물을 흘리는 베르단디가 보였다.
"케이 씨..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나는 그런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말을...
"베르단디..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야....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케이 씨..."
말문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어제의 전송의식 탓인지 베르단디는 무척이나 힘겨워 보인다.
피곤하면 조금 쉬는 게 나을텐데, 그녀는 집안 일을 다 끝낸 다음에야 휴식을 취할 것 같다.
"베르단디, 피곤한 것 같은데 좀 쉬어. 내가 대신 할게."
"괜찮아요, 그냥 제가 할게요."
그녀는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여자이니 곁에 있는 내가 챙겨줘야 하는 것이다.
"가끔 씩은 내가 할 때도 있어야지, 안 그래 ? 그러니 오늘은 좀 쉬라구."
"고마워요, 케이 씨."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건 오히려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응, 걱정 마. 내가 다 해 놓을게."
"후후, 알았어요. 그럼 잘 부탁할게요~."
내가 설거지를 시작하자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응 ? 케이가 설거지를 다 하네 ? 무슨 일이지 ?"
내가 설거지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
스쿨드인지 울드인지는 몰라도 정말 기분이 나쁜걸....
그 말에 기분이 상한 나는 아무 말 없이 하던 일에 열중했다.
'대꾸가 없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다른 데로 가겠지' 라는 일념하에..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의 발명품인 잡일군으로 해결해 주지, 스위치 온!"
스쿨드의 가벼운 손짓으로 인해 나의 일거리는 배로 늘어났다..
"기계가 폭주를 일으켰네.. 아하하.. 미안해, 케이."
겨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넘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가 ?
"아! 오늘 모터를 세일하는 날이었지 ? 난 바빠서 이만~"
모터를 산다며 밤페이를 타고 밖으로 나간 스쿨드.
그렇다는 얘기는....이것들을 모두 나 혼자 치워야 한다는 건가 ?
"스쿨드~~~~~!!!!!"
"무슨 일이에요 ?!"
베르단디가 자다가 놀라서 깨어났나 보다. 이 꼴을 보면 도와주겠다며 나서겠지...
"아무 일도 아냐, 스쿨드에게 물어볼 일이 있어 부른 거야. 그런데 지금 집에 없나 보네."
오늘은 절대로 베르단디에게 일을 시키지 않겠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울드는 집안일을 하는 나를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내가 평소에 어떻게 보였길래 다들 이런 반응을 보이나...
울드는 한참을 웃다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베르단디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피곤해서가 아니라 힘이 부족하여 그런것이야."
"내게 자신의 힘을 전송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 거야 ?"
"그래, 맞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힘이 없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생활에는 문제가 없을텐데...
그러나 곧 나의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사를 유지할 능력이 안 되는 거지."
그렇다면, 스쿨드의 경우처럼 잠시 봉인해 놓을 수 있는 게 아닐까 ?
"울드, 그렇다면 혹시 홀리벨을 천사의 알 상태로 봉인해 놓을 수 없을까 ?"
"우리도 그 생각을 해 봤지만 그런 일은 베르단디가 허락하지 않을거야, 나도 그런 일에는 찬성할 수 없고.
천사는.. 우리들의 분신이나 다름 없어, 우리는 우리들의 천사를 차마 가두어 둘 수 없어."
그래... 특히 베르단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용납치 않겠지....
이럴 땐,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내가, 너무 원망스럽기만하다.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짐만 되는 존재인가....
아니, 단 한번 있기는 하다. 린드의 천사를 받아 엔젤 이터와 대적했을 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천사를 넘겨 받는 일, 쉽지만은 않았다. 더욱이 남의 천사인 탓에 반발이 더 컸겠지...
천사를 넘겨 받는다 ? 그래, 바로 그거야.. 베르단디의 천사를 내가 맡아 준다면 ?
"울드! 드디어 찾았어!!"
"응 ? 뭘 찾았다는 거야 ? 아까부터 멍하니 앉아 말을 시켜도 대꾸도 않고... 대체 뭘 찾았다는 건데 ?"
"베르단디의 기력을 회복시킬 방법! 내가 그녀의 천사를 대신 맡는거야!!"
"그래! 지금의 너에게는 천사를 유지할 힘도 있고, 린드의 천사를 맡는 동안 천사 수용체도 생겨서 천사를 가질 수도 있어!
케이! 오랫만에 괜찮은 생각을 했는데, 그래 ? 그렇다면 당장 준비를 하자!"
"무슨 준비 ?"
"베르단디를 깨워야지!!"
"잠깐만, 그녀는 방금 잠들었.."
"베르단디~!! 일어나 봐~!!"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울드는 결국 베르단디를 깨우고야 말았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렇지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다니 울드는 예절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할 것 같다...
신족인지 마족인지... 차라리 마족을 택했다면 정말 잘 어울렸겠다...
"울드 언니, 무슨 일이에요 ? 마라가 쳐들어 오기라도 한 것인가요 ?"
"그게 아니고 너의 천사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
"천사의 알로 봉인하자는 제안이라면 저는 더이상 할 말이 없어요."
"그게 아니고 홀리벨을 케이에게 넘겨주는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케이 씨라면... 좋아요!"
베르단디는 내 앞에 서서 나와 이마를 맞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단지 천사를 건네주는 의식일 뿐이라고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나의 붉어진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올 줄 모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내 안으로 낯선 기운이 들어왔다. 따스하고 포근한... 그러나 강력한... 기운.. 이런 것이 바로 천사인가 ?
"이제 다 끝났어요. 케이 씨, 그녀를 한번 불러보세요."
"홀리.. 벨?"
그러자 나의 몸안에 들어왔던 기운이 등 뒤로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성공이에요, 케이 씨! 홀리벨을 잘 부탁해요."
"알았어, 베르단디. 책임지고 잘 돌봐줄게."
"미안해요. 내 일을 떠맡기기만 해서... "
"아니야. 나는 오히려 기뻐. 네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케이 씨."
말을 마치고 베르단디는 내 품에 안겨들어왔다. 오늘 하루가 피곤했던지 그녀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그녀를 방으로 옮겨 주며 생각했다.
그녀는 여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아픔을 겪어 왔겠지. 나는 그런 그녀의 마지막 쉼터가 되어주고 싶다...
천상계로 떠나기 3일전부터 울드와 스쿨드는 날 공간 이동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힘의 조절이 미숙하여 공간 이동 도중 엉뚱한 곳으로 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스쿨드가 먼저 그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다 됐어, 케이!! 이제 이 문을 통과하면 천상계가 보일거야."
어쩐지. 좀 불안하군. 공항에서 무기 소지 여부를 검사하는 문처럼 생긴게.. 흠...
"뭐야, 그 못 미덥다는 눈초리는!"
나는 그 말을 무시한 채로 문 너머로 책을 한권 던져 보았다.
툭!
"에구, 머리야... 못 미더울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책이 갑자기 낡아버리는 이유는 뭔데 ?
날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리려는 속셈이었던 거야 ?"
하하..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스쿨드도 말을 못 하는구나, 가끔 써 먹어야 겠다.
"후훗, 그런 고철 덩어리로 공간이동을 한다고 ?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그래서 울드가 꺼내놓은 물건은 한 장의 부적이었다. 이 부적을 머리에 붙이면 된다는 건가 ?
혹시 강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런지...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울드가 문에 부적을 붙이며 말했다.
"이 부적을 문에 붙이면 천상계로 통하게 되는 거야, 자~."
아무래도 불안한데? 이상한 곳으로 통하게 되는 건 아닌가 ?
조용히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갑자기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말을 안 들어, 어떻게 된 거지 ?"
"울드 언니, 혹시 그 주문은...."
베르단디가 말하는 주문이 대체 뭐길래.... 상당히 익숙한 느낌, 혹시 이것은..
"울드 특제 비술, 인체조종술!"
역시나 인체조종술이었어, 젠장...
그리고.. 결국 나의 몸은 의지를 무시한 채 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딸깍!
문이 열리자 보라색 빛이 새어나왔다. 나는 서서히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꼈다.
울드가 하는 일도 믿을 만한 게 못된다니까........그런데... 어째서 ?
내가 여신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저 웃고 있을 따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쿨드나 울드라면 몰라도 베르단디마저.. ? 어째서... ?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울드와 스쿨드는 손상된 이그드라실의 복구 작업을 지원하러 천상계로 올라가고 집에는 나와 베르단디만이 남았다.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일깨우는 맑은 목소리..
"어머, 일어나셨어요 ? 케이 씨."
베르단디.. 언제나 나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주는 그녀...
나 때문에 여신의 직책을 거의 포기한 상태인데도 언제나 나에게 웃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응, 베르단디. 잘 잤어 ?"
"네. 아침 드세요. 지각하겠어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 그럼 잘 먹을게."
내 옆에 앉으며 살포시 웃음 짓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이대로 계속 그녀와 있을 수 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이라 해도 아깝지 않으리라... 그것이 설령 내 목숨일지라도..
식사를 마치고 시계를 본 나는 조금 놀랐다. 시계가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일어난 것만 같은데 벌써 7시 30분이 넘었다니.. 그녀와 같이 있으면 시간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베르단디, 그럼 갔다올게~!"
"네. 케이 씨, 잘 다녀오세요~"
그 순간.
쾅!!
무엇인가가 나의 앞에서 폭발했다. 그 충격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 나는 출근하는 길이었는데 ?'
눈을 뜬 내 앞에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고 있었다. 그녀는... 우는 모습마저도 아름답다.
내가 깨어난 것을 눈치 챈 것일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듯 그녀는 서둘러 눈가를 흝었다.
"케이 씨, 정신이 들어요 ?"
"아! 베르단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케이 씨가 출발하려 할 때 천계에 갔던 스쿨드가 근처로 내려왔어요. 그 여파로 인해 케이 씨가.... 미안해요..."
결국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그녀...
"미안해, 케이. 케이가 그곳에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
사과하는 스쿨드의 모습..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다.
"울지 마, 베르단디. 그건 네 탓이 아냐. 우연일 뿐이지. 그리고 스쿨드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 괜찮아."
"그래, 그래. 그건 그렇지."
옆에서 말참견을 하는 백발의 미녀의 이름은 울드다. 건강해 보이는 갈색 피부에 잘 빠진 몸매, 그리고 무척 더러운 성격.
울드에게 대드는 일은 저승으로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벼락을 맞고 살아남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나마도 상당히 단순하기에 다행이지 지능적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다.
한동안 가라앉아있던 상황을 깨트린 것은 스쿨드였다.
"아, 맞아. 내가 지금 이곳에 내려온 것은 전할 말이 있어서야."
스쿨드의 말에 나는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
"스쿨드, 무슨 일이길래 그래 ? 급한 일이야 ?"
울드가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서운 일이지."
그러나 결국 본론은 말해주지 않는다.. 울드가 그럼 그렇지, 못말리는 건망증..
결국엔 스쿨드가 나서고야 만다.
"지금 천상계는 비상사태라구."
"설마,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니 ?"
베르단디가 말하는 일이 대체 무엇일까 ?
"응, 맞아. 현재 천상계는 다른 차원의 존재들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어."
"다른 차원이라니? 그럼 지금 여기 말고 다른 세상이 존재한단 말이야 ?"
"그래, 모르간 역시 다른 차원의 존재지. 그녀는 요정계에서 넘어온 거야."
다른 차원이라.... 그렇다는 말은..!!
"그렇다면 악마들과 싸우는 중인 거야 ?"
"역시 케이는 단순해. 악마정도와 싸운다면 비상사태일리가 없지. 우리가 현재 싸우는 존재는 다름아닌 신족이야."
"너희들도 신족이잖아. 서로 싸운다는 거야 ?"
"그들의 창조주는 저희의 창조주와 적대 관계에 놓여있어요."
"그럼 조물주란 존재도 여럿이 존재한다는 얘기야 ?"
"맞아요, 그들 역시도 더 많은 차원을 자신의 지배하에 놓기 위한 다툼을 벌이죠."
"그럴 필요 없이 차원을 생성하면 간단하잖아. 뭐하러 그런 힘든 싸움을 해야 하는 거지 ?"
"그런 차원은 소용이 없어. 조물주의 힘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지적 생명체의 수에 비례하거든."
"그래서 서로 싸움을 벌이는 거야 ?"
"그래... 차원을 하나도 갖지 못한 조물주는 소멸되고 새로운 조물주가 생겨나게 되는거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베르단디도 싸우러 가야 하는 거야 ?"
"예.. 저도 참전 명령이 내려왔어요."
"가지 않으면.... 안 되는거야 ?"
그녀의 속눈썹이 조금씩 흔들린다.. 제발 의무가 아니라고 말해주길....
"어쩔 수 없어요... 이것은 창조주의 의지..저는 거역할 수가 없어요..."
"그럴수가!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되찾은 행복인데... 난, 너를 보낼 수 없어~! 베르단디.. 난 네가 없으면 안 된단 말야!"
나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니길 빌고 싶다.. 세상은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는 것일까....?
어느샌가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정원으로 나왔다.
어째서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갈라놓으려 하는걸까..
우리는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걸까...
" 뭘 그리 열심히 생각해 ?"
"울드..."
"고민이 있으면 말해 봐, 이 울드님이 해결해 줄테니 말야."
"별 일 아냐."
내 맘을 풀어주려는 건 고맙지만, 난 지금 혼자 있고 싶어...
그러나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드는 말을 이었다.
"베르단디 일 때문이지 ?"
"휴우......."
그래.. 나는 어찌해야 하는건지 모르겠어.. 그녀의 마음도 이해할 수가 없고...
"베르단디도.. 너와 같이 있고 싶어해.. 하지만, 베르단디는 의무가 아니더라도 전쟁에 참여할 거야.."
"그렇다면 어째서... 전쟁에 참여하려 하는거야! 나와 같이 있고 싶다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베르단디... 어째서... 도대체 왜?!
"끝까지 똑바로 들어. 이 전쟁에서 패할 경우, 인간계는 소멸할 지도 몰라.
만약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창조주가 인간계를 장악할 경우
그가 인간의 지적 수준에 만족한다면 다행이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모든것이 끝나는 거야.."
그래서 그녀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던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렇다면 다른 차원으로 도망갈 수는 없는 거야 ? 나는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래.. 모르간처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후.. 차원 이동이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세계의 균형은 무너진지 오래지.
모르간, 그녀는 요정계에서도 상당한 고위 요정에 속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원 이동으로 거의 모든 힘을 상실했지.
그녀가 원래 힘으로 우리와 대적했다면 우리가 밀렸을 지도 몰라."
차원을 넘는다는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더군다나 창조주간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그 막강한 권능으로 인해 차원들이 조금씩 좌표가 바뀌지.
잘못하다가는 차원의 틈새에 갇혀 영원히 떠돌게 될 수도 있어."
"울드.. 정말로 그녀를 보내지 않을 방법이 없는 거야 ? 내 모든 것을 잃어도 좋아.. 하지만 그녀만은.. 그녀만은!!"
그 말을 듣고 울드는 나에게 물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아 ?"
그래, 그녀만 무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거야."
울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방법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가르쳐 주겠어. 베르단디를 전쟁터로 내보내지 않는 유일한 길.
그것은..."
"언니! 안 돼요, 그 방법을 택한다면 저는 아마 후회하게 될 거에요."
베르단디, 그녀는 내 마음을 왜 몰라주는 걸까.... 나는 그녀를 희생시켜서까지 보호받고 싶지 않다는 것을... 왜 몰라줄까..
"베르단디, 나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그것을 택하지 않는다면 난 평생을 후회하게 될 거야.
나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가 없어.... 그리고 네가 희생해서 나를 지켜준다고 내가 기뻐할 거 같아 ?"
"하지만.. 케이 씨.. 그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길... 아직까지 그 누구도 사용한 적이 없었던 방법이에요..."
"그만. 됐어, 베르단디. 너도 케이의 맘을 이해해 주렴. 케이는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이럴 때에는 정말 울드가 언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워, 울드..
"울드, 그 방법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을 해줘."
"먼저 너는 한가지 의식을 시행해야 해, 그 의식이 끝나면 베르단디의 힘은 너에게로 전송될 거야.
그러면 베르단디는 사령부로 소속이 바뀌겠지. 그리고 네가 그녀 대신 신족 전투대에 편입되어 싸우는 거야.
다만 한가지 문제점은...."
"그로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겠죠.. 케이 씨, 괜찮겠어요 ? 1급신의 힘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에요.
신족들에게도 참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죠."
"걱정 마, 베르단디. 너를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참아내겠어!"
"좋아~! 케이. 바로 그 자세야, 그럼 의식을 시작하도록 하지."
울드와 베르단디는 바닥에 기이한 마법진과 도형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격계 신족인 울드는 주로 마법진을 그리고 머리가 좋은 베르단디는 마법식을 계산하는 듯 싶었다.
한참동안 마법진을 만들던 그녀들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felicitas cum amicis communicata est....."
듣고 있던 내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감미롭고 아름다운 노래였다....
그녀들의 노래가 끝나자 마법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케이, 지금이야. 저 곳에 가서 베르단디와 마주 보고 서 있어."
울드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찢어지는듯한 느낌....
그러나 나는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빛이 사라지자 내 눈 앞에 눈물을 흘리는 베르단디가 보였다.
"케이 씨..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나는 그런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말을...
"베르단디..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야....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케이 씨..."
말문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어제의 전송의식 탓인지 베르단디는 무척이나 힘겨워 보인다.
피곤하면 조금 쉬는 게 나을텐데, 그녀는 집안 일을 다 끝낸 다음에야 휴식을 취할 것 같다.
"베르단디, 피곤한 것 같은데 좀 쉬어. 내가 대신 할게."
"괜찮아요, 그냥 제가 할게요."
그녀는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여자이니 곁에 있는 내가 챙겨줘야 하는 것이다.
"가끔 씩은 내가 할 때도 있어야지, 안 그래 ? 그러니 오늘은 좀 쉬라구."
"고마워요, 케이 씨."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건 오히려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응, 걱정 마. 내가 다 해 놓을게."
"후후, 알았어요. 그럼 잘 부탁할게요~."
내가 설거지를 시작하자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응 ? 케이가 설거지를 다 하네 ? 무슨 일이지 ?"
내가 설거지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
스쿨드인지 울드인지는 몰라도 정말 기분이 나쁜걸....
그 말에 기분이 상한 나는 아무 말 없이 하던 일에 열중했다.
'대꾸가 없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다른 데로 가겠지' 라는 일념하에..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의 발명품인 잡일군으로 해결해 주지, 스위치 온!"
스쿨드의 가벼운 손짓으로 인해 나의 일거리는 배로 늘어났다..
"기계가 폭주를 일으켰네.. 아하하.. 미안해, 케이."
겨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넘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가 ?
"아! 오늘 모터를 세일하는 날이었지 ? 난 바빠서 이만~"
모터를 산다며 밤페이를 타고 밖으로 나간 스쿨드.
그렇다는 얘기는....이것들을 모두 나 혼자 치워야 한다는 건가 ?
"스쿨드~~~~~!!!!!"
"무슨 일이에요 ?!"
베르단디가 자다가 놀라서 깨어났나 보다. 이 꼴을 보면 도와주겠다며 나서겠지...
"아무 일도 아냐, 스쿨드에게 물어볼 일이 있어 부른 거야. 그런데 지금 집에 없나 보네."
오늘은 절대로 베르단디에게 일을 시키지 않겠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울드는 집안일을 하는 나를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내가 평소에 어떻게 보였길래 다들 이런 반응을 보이나...
울드는 한참을 웃다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베르단디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피곤해서가 아니라 힘이 부족하여 그런것이야."
"내게 자신의 힘을 전송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 거야 ?"
"그래, 맞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힘이 없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생활에는 문제가 없을텐데...
그러나 곧 나의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사를 유지할 능력이 안 되는 거지."
그렇다면, 스쿨드의 경우처럼 잠시 봉인해 놓을 수 있는 게 아닐까 ?
"울드, 그렇다면 혹시 홀리벨을 천사의 알 상태로 봉인해 놓을 수 없을까 ?"
"우리도 그 생각을 해 봤지만 그런 일은 베르단디가 허락하지 않을거야, 나도 그런 일에는 찬성할 수 없고.
천사는.. 우리들의 분신이나 다름 없어, 우리는 우리들의 천사를 차마 가두어 둘 수 없어."
그래... 특히 베르단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용납치 않겠지....
이럴 땐, 힘들어 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하는 내가, 너무 원망스럽기만하다.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짐만 되는 존재인가....
아니, 단 한번 있기는 하다. 린드의 천사를 받아 엔젤 이터와 대적했을 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천사를 넘겨 받는 일, 쉽지만은 않았다. 더욱이 남의 천사인 탓에 반발이 더 컸겠지...
천사를 넘겨 받는다 ? 그래, 바로 그거야.. 베르단디의 천사를 내가 맡아 준다면 ?
"울드! 드디어 찾았어!!"
"응 ? 뭘 찾았다는 거야 ? 아까부터 멍하니 앉아 말을 시켜도 대꾸도 않고... 대체 뭘 찾았다는 건데 ?"
"베르단디의 기력을 회복시킬 방법! 내가 그녀의 천사를 대신 맡는거야!!"
"그래! 지금의 너에게는 천사를 유지할 힘도 있고, 린드의 천사를 맡는 동안 천사 수용체도 생겨서 천사를 가질 수도 있어!
케이! 오랫만에 괜찮은 생각을 했는데, 그래 ? 그렇다면 당장 준비를 하자!"
"무슨 준비 ?"
"베르단디를 깨워야지!!"
"잠깐만, 그녀는 방금 잠들었.."
"베르단디~!! 일어나 봐~!!"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울드는 결국 베르단디를 깨우고야 말았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렇지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다니 울드는 예절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할 것 같다...
신족인지 마족인지... 차라리 마족을 택했다면 정말 잘 어울렸겠다...
"울드 언니, 무슨 일이에요 ? 마라가 쳐들어 오기라도 한 것인가요 ?"
"그게 아니고 너의 천사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
"천사의 알로 봉인하자는 제안이라면 저는 더이상 할 말이 없어요."
"그게 아니고 홀리벨을 케이에게 넘겨주는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케이 씨라면... 좋아요!"
베르단디는 내 앞에 서서 나와 이마를 맞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단지 천사를 건네주는 의식일 뿐이라고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나의 붉어진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올 줄 모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내 안으로 낯선 기운이 들어왔다. 따스하고 포근한... 그러나 강력한... 기운.. 이런 것이 바로 천사인가 ?
"이제 다 끝났어요. 케이 씨, 그녀를 한번 불러보세요."
"홀리.. 벨?"
그러자 나의 몸안에 들어왔던 기운이 등 뒤로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성공이에요, 케이 씨! 홀리벨을 잘 부탁해요."
"알았어, 베르단디. 책임지고 잘 돌봐줄게."
"미안해요. 내 일을 떠맡기기만 해서... "
"아니야. 나는 오히려 기뻐. 네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었으니까...."
"고마워요, 케이 씨."
말을 마치고 베르단디는 내 품에 안겨들어왔다. 오늘 하루가 피곤했던지 그녀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그녀를 방으로 옮겨 주며 생각했다.
그녀는 여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아픔을 겪어 왔겠지. 나는 그런 그녀의 마지막 쉼터가 되어주고 싶다...
천상계로 떠나기 3일전부터 울드와 스쿨드는 날 공간 이동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힘의 조절이 미숙하여 공간 이동 도중 엉뚱한 곳으로 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스쿨드가 먼저 그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다 됐어, 케이!! 이제 이 문을 통과하면 천상계가 보일거야."
어쩐지. 좀 불안하군. 공항에서 무기 소지 여부를 검사하는 문처럼 생긴게.. 흠...
"뭐야, 그 못 미덥다는 눈초리는!"
나는 그 말을 무시한 채로 문 너머로 책을 한권 던져 보았다.
툭!
"에구, 머리야... 못 미더울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책이 갑자기 낡아버리는 이유는 뭔데 ?
날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리려는 속셈이었던 거야 ?"
하하..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스쿨드도 말을 못 하는구나, 가끔 써 먹어야 겠다.
"후훗, 그런 고철 덩어리로 공간이동을 한다고 ?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그래서 울드가 꺼내놓은 물건은 한 장의 부적이었다. 이 부적을 머리에 붙이면 된다는 건가 ?
혹시 강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런지...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울드가 문에 부적을 붙이며 말했다.
"이 부적을 문에 붙이면 천상계로 통하게 되는 거야, 자~."
아무래도 불안한데? 이상한 곳으로 통하게 되는 건 아닌가 ?
조용히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갑자기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말을 안 들어, 어떻게 된 거지 ?"
"울드 언니, 혹시 그 주문은...."
베르단디가 말하는 주문이 대체 뭐길래.... 상당히 익숙한 느낌, 혹시 이것은..
"울드 특제 비술, 인체조종술!"
역시나 인체조종술이었어, 젠장...
그리고.. 결국 나의 몸은 의지를 무시한 채 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딸깍!
문이 열리자 보라색 빛이 새어나왔다. 나는 서서히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꼈다.
울드가 하는 일도 믿을 만한 게 못된다니까........그런데... 어째서 ?
내가 여신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저 웃고 있을 따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쿨드나 울드라면 몰라도 베르단디마저.. ? 어째서... ?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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