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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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따사롭지만은 않은 햇살이 수풀사이로 내리꽃힌다. 짙은 녹음... 숨막힐정도로 강렬하던 여름의 향기. 첫 번째로 본 순수한 눈망울.
소년.
"...를 기억하고야 말거야."
소년은 웃고 있다. 웃고 있으면서도 웃고 있지 않다.
약속... 약속은 지켜야 해요. 그때 당신이 원하던 것은 무엇이었죠?
손바닥이 소년의 이마에 대어지는 순간, 소년의 얼굴이 희미해진다.
[장마]...<3>
어느덧 희미해진 비구름을 뚫고 미약한 새벽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직 무더위를 불러오기엔 습기나 열이 충분하지 않아 그럭저럭, 선선한 바람이 졸고 있던 준혁의 정신을 현실로 복귀시킨다.
준혁은 눈을 떴다.
비 때문인지, 유달리 차가웠던 대청이다... 쓰러진 베르단디를 부랴 부랴 치운 안방에 데려다 놓고, 이불 한 장도 없이 마루에서 자고 나니 몸이 욱신거린다-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에겐 의외로 단벌의 이불이 걸쳐져 있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간신히 간신히일 정도로 악화되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어제 일이 혼란한 기억속을 비행한다. 버림받음- 그저 인지한것에 불과하지만- 비, 번개, 그리고... 여신.
번개 하니까 생각났다.
"...공중전화기는?"
그게 얼마짜리더라? 준혁은 순간적으로 몸을 당겨 일으켰다. 바람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이지만 주머니 얇은 고학생은 현실에 민감하다. 긴장된 근육이 무리로 인해 근육통을 호소하고, 암적응 기간도 없이 빛과 맞닥뜨린 눈이 아릿하지만 그는 어제의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하늘은 물결치는 구름과 빛의 향연. 조금은 눅눅한 바람은 제멋대로 자라버린 풀을 이리저리 춤추게 만든다. 여기 저기 고여 있는 물웅덩이 사이로 비추어지는 푸른 빛 위엔 순수를 엮어 만든것만 같은 광휘가 지배하는 것만 같다. 여신은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결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지, 그렇게 까지 밝은 표정은 아니었으나 그녀 주위의 공기는 정화가 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가 서있는 마당 한켠과 그가 반쯤 몸을 일으킨 대청과는 단 몇걸음에 불과했지만, 그 몇걸음이 범접할수 없는 성지가 된 느낌. 긴 심호흡이 몇 번에 걸쳐 끝을 맺자 그녀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준혁씨. 몸은 좀 어떠세요?"
"...아, 예. 괘. 괜찮습니다."
까닭없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베르단디는, 물구덩이를 피해 조심스럽게 그가 있는 마루로 다가왔다. 준혁은,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로 정지해 있다가- 갑작스럽게 좌정하는게 보통 긴장한 것이 아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준혁씨는 좋은 사람이군요."
미소지으며 말하는걸 듣고 있자면, 정말 걱정해 주고 있구나. 정말 생각해 주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 하며 힘없이 미소지어 보였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웃으면서도 무언가 말하기 어려워 하고 있었다. 떠난다는 이야긴가. 그전에 몇마디 더 하고 싶은데.
"...저, 죄송하지만, 조금 더 남아 있으면 않될까요?"
여신은 잠시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잇살씩이나 먹어놓고 준혁은 한동안 대답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내리친 번개로 인해 여신의 지원시스템은 상당한 문제가 생겼거든요. 물론, 힘이라던지, 그런것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귀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당분간 돌아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준혁은 고민했다. 다시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갈대도 아닌데 자꾸만 꺾인다.
"물론, 당분간 머물 곳을 만드는 것은 별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무언가를 만든다면, 아마도 단속이 나오겠죠. 개발 제한 구역이니까요... 그렇다고 딱히 다른 분을 찾아갈수도 없고... 시스템이 복구될때까지 다른 일도 불가능하고..."
대강 이해는 하고 있다... 도시도 별 다르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는 그녀의 일이 "연기"된 상태인데다 천계의 소원 접수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러 다닐수도 없다. 그러니까, 당분간 여기 있는 것이 났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에게 있어 폐쇄적이기 마련이고,
아직 준혁은 그녀가 진실로 누구인지 잘 모른다.
피해갔던 선택, 선택, 선택이 다시금 그의 목을 욱죄운다. 잠시, 주위에 누군가를 두고 있어도 될까? 식구들이 오면 어떻게 하지? 그녀의 생활은?
고물 시계가 울린다. 벌써 일곱시. 백수가 아니라 재수생. 그것도 스스로 벌어야 하는 고학생인 그는 조금 후에 다시금 일상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학원에 가서, 재수생용 강의를 듣고- 점심때 나와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저녁까지. 끝나고 나와 도서관에서 복습을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한다. 선택은, 선택은... 이번엔 도망칠수 없다. 결론은 짧고 간단하다.
"저... 학원 때문에 일찍 나가봐야겠네요. 나중에... 이야기 하죠."
"그런가요..."
회피다. 도망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선택이란 것은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삶의 무게다. 대답도 듣지 않고 지하수가 나오는 세면장에서 급하게 세면을 끝내고 주혁은 주섬 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 아침이야 그래도 조금 먹는 주의지만 그래봐야 설익은 밥에 라면이니 이런땐 조금 걸러도 괜찮을 것이다. 급하게 가방을 싸고 다시금 그 무거운 가방을 둘러멘다. 이 자리는 피하는게 좋겠어. 피하는게...
그리고 준혁은 어제의 깨진 거울 조각을 보았다. 깨어진 면 사이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어설프고 추하다.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언제까지 넌 도망만 치는거지?
낡은 대문 앞에서,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녀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베르단디는 그 자리에 있지 않고 그와 조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조금은, 슬픈표정?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이 자리를 피하는것인가. 미안할 필요 없어요. 난, 당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 한달을 고민해야 하는 놈이라고. 준혁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대문 너머 세상이 보인다. 조금 있으면 첫 버스가 온다.
기다린 끝에 버스를 탔다.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오후의 도시라는 것은 음울하다. 준혁은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도서관을 향해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무의미한 삶의 반복이란 것은 언제나 힘겹다. 우유부단에, 무능력자에, 자기 존재감이 존재치 않는 모순적인 인물이란 것은 삶이 무가치 하지 않더라도 힘겹게 느낀다. 똑같은 하루다. 언제나 똑같이 학원의 재수생용 총정리를 들으며 머릿속에 공식과 연혁을 박아넣는다.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진도를 따라가는데 벅차다. 학습 시간이 끝나고, 집이나 도서관, 독서실, 고시원을 향하는 다른 재수생과 달리 식당을 찾아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마늘을 찣고, 파를 다듬고, 접시를 닦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택이란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하루다.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엔, 그제야 도서관을 찾아가 막차가 올때까지 혼란 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막차를 타고 낡은 한옥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는다. 부엌이야 있고 부모님이 가져다 주신 반찬도 있기야 있지만 주로 해먹는건 라면. 그렇게 시간 시간이 반복된다. 물론 어제는 예외다.
그는 베르단디를 떠올렸다. 이제 준혁은 돌아가서 선택을 해야 한다. 무슨 선택을? 일단 그녀를 빗속에서 건져내었다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어려운 선택의 처음이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까지 어려운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집에 둔다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그후가 두려워진다.
누군가를 두고 있어도 될까? 부모님은? 집에서 무얼 잘 먹지 않아서, 아직 반찬이랑 밥은 좀 있지만 그녀의 생활은 어떻게 해결하지? 그녀가 있는 상황에서 집주인이 나가라고 한다면?
"...겁쟁이."
"오오,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준혁은 수그렸던 고개를 쳐들었다. 그 앞엔, 화려하게 머리를 물들인 잘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자존감, 자신감. 명문대생이란 간판.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녀석이다. 고등학교때 그의 반으로서 그를 친구가 아닌 종처럼 부려먹은 전적이 있는 놈이라 가급적 피해 다녔는데, 이렇게 길거리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아... 오랫만이네. 병학아."
무거운 가방을 추스르며 현재도 현재진행형으로 잘 나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듯한 옛 친구를 바라다 본다. 진정한 친구라기엔 어폐가 있겠지만. 이병학은 좀더 스스로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음인지 손을 당겨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미모의 여자를 앞으로 끌어당긴다.
"아, 얘가 내가 그전에 이야기 하던 꼬봉이야. 시키는대로 참 잘하던 녀석이지."
"어머~ 그랬어?"
순간적으로 준혁은 그와 그의 관계가 어떤식으로 종말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병신같은 부림. 부림을, 능력없고 내성적이란 이유로 당하던 지배의 종말은 싸움이었고, 발악적으로 달려들어 부모님이 학교로 출두하셔서 이병학의 치료비를 내셔야 했다. 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어, 재수했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요즘도 하고 있냐? 이번엔 삼수겠네?"
"...뭐 성적이 안나오니까."
"그래, 계속 공부해서 열심히 살아라~ 네 얘기 들어봐야 칙칙한 소리밖에 못들을 테니까 난 애인이랑 간다. 오늘 [이거]하기로 했거든. 아 넌 당연히 동정이겠지? 여자 손목은 잡아 봤냐?"
"자기야 그만해~"
비웃듯 웃어보이고는 엄지와 검지를 맞댄다. 그래. 넌 성공자니까. 성공자니까 나같은 패배자를 짓밟으셔야지. 그래, 남녀관계도 성공의 지표라니까 열심히 성공하는거냐. 준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해서 어디 전문대라도 가~ 이건 순수한 충고라니까. 요즘은 학벌이 간판이 못되요. 간판이! 그러니까... 응?"
쳐버릴까...를 고민하며 주먹을 그러쥐었지만, 날아가기 전에 그녀석의 말이 멈췄다. 멈추어버린 녀석의 시선을 따라 보이는 것은 서서히 뜨기 시작하는 달. 도시의 광기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을 울릴건만 같다.
그리고, 그 아래엔 도시락을 품에 안은... 베르단디가 있었다. 준혁은, 완연히 고개를 돌렸다. 숨막힐듯한 순수와 고결함이, 타락한 도시의 공기를 꿰뚫고 광휘光輝를 전달한다. 이병학은 잠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베르단디만 바라보다가 그의 애인에게 호된 따귀를 맞았다. 말도 끝내지 못하고 허겁지겁 애인을 좇아갔다.
준혁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신은, 한발 한발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힘없이 웃어보인다.
"점심을 싸 보았는데... 준혁씨를 찾기가 어려워서요."
점심? 지금은 저녁이다. 하지만 준혁은 망부석처럼 그저 못박혀 있는다. 이젠 식어버린 도시락이지만, 그것을 통해 무언가가 느껴진다. 누군가를 위해준다는 것.
"저, 그럼 가볼게요."
어디로?
"가... 가본다니?"
여신은 역시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준혁씨가 어려워 하시는것 같아서..."
다시금 선택이 욱죄어 온다. 하지만, 준혁은 어느정도 마음을 굳혔다. 조용한 정적 끝에, 떨어질것 같지 않던 그의 입이 떨어졌다. 고개를 수그린채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괜찮아요. 있어줘요."
하늘은 비구름 때문에 별도 보이지 않는다. 달만이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 가운데, 도시의 나트륨 등에 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만들어낸 인공의 빛이 도시를 메워나간다. 그 중심에 서있던 베르단디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며 그의 손을 떼 내었다. 고개를 수그린 준혁의 조금은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어올리자, 살포시 웃어보인다.
"고마워요"
그와 그녀는 같이 걷기 시작했다. 조금 서둘러서. 장마니까, 비가 올것이다. 오늘 아니면 내일. 하지만 준혁은 상관 없다. 두고 두고 꺼내어 볼수 있는 좋은 기억이 하나 생겼으니까. 좋은 기억...
버스가 거친 외곽도로를 타고 달리며 작게 튀어오른다. 앞좌석과 뒷자석에 단 둘만을 태운 버스의 기사는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 함인지 상당히 거칠게 차를 몰고 있었고, 여신은 그때마다 무언가 돌아오려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 좋은 기억...
-약속이다!
약속?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억수 같았고, 순식간에 세상이 환하게 변한다. 번개.
"어이쿠, 이제 완연히 장마구만... 번개도 치고."
버스 기사가 읆조렸다.
----------------
...늦었습니다요. 재미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늦어버리다니;;; 음.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일단 열편 써놓고 보자~ 하고 결정을 내려버렸다죠.;;; 아, 물론 팬픽의 요체는 작품에 대한 애정입니다만.;;;; 음, 그럼 나도 오로지 애정이었소~ 할수 있는것인가.;;;
소년.
"...를 기억하고야 말거야."
소년은 웃고 있다. 웃고 있으면서도 웃고 있지 않다.
약속... 약속은 지켜야 해요. 그때 당신이 원하던 것은 무엇이었죠?
손바닥이 소년의 이마에 대어지는 순간, 소년의 얼굴이 희미해진다.
[장마]...<3>
어느덧 희미해진 비구름을 뚫고 미약한 새벽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직 무더위를 불러오기엔 습기나 열이 충분하지 않아 그럭저럭, 선선한 바람이 졸고 있던 준혁의 정신을 현실로 복귀시킨다.
준혁은 눈을 떴다.
비 때문인지, 유달리 차가웠던 대청이다... 쓰러진 베르단디를 부랴 부랴 치운 안방에 데려다 놓고, 이불 한 장도 없이 마루에서 자고 나니 몸이 욱신거린다-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에겐 의외로 단벌의 이불이 걸쳐져 있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간신히 간신히일 정도로 악화되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어제 일이 혼란한 기억속을 비행한다. 버림받음- 그저 인지한것에 불과하지만- 비, 번개, 그리고... 여신.
번개 하니까 생각났다.
"...공중전화기는?"
그게 얼마짜리더라? 준혁은 순간적으로 몸을 당겨 일으켰다. 바람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이지만 주머니 얇은 고학생은 현실에 민감하다. 긴장된 근육이 무리로 인해 근육통을 호소하고, 암적응 기간도 없이 빛과 맞닥뜨린 눈이 아릿하지만 그는 어제의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하늘은 물결치는 구름과 빛의 향연. 조금은 눅눅한 바람은 제멋대로 자라버린 풀을 이리저리 춤추게 만든다. 여기 저기 고여 있는 물웅덩이 사이로 비추어지는 푸른 빛 위엔 순수를 엮어 만든것만 같은 광휘가 지배하는 것만 같다. 여신은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결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지, 그렇게 까지 밝은 표정은 아니었으나 그녀 주위의 공기는 정화가 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가 서있는 마당 한켠과 그가 반쯤 몸을 일으킨 대청과는 단 몇걸음에 불과했지만, 그 몇걸음이 범접할수 없는 성지가 된 느낌. 긴 심호흡이 몇 번에 걸쳐 끝을 맺자 그녀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준혁씨. 몸은 좀 어떠세요?"
"...아, 예. 괘. 괜찮습니다."
까닭없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베르단디는, 물구덩이를 피해 조심스럽게 그가 있는 마루로 다가왔다. 준혁은,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로 정지해 있다가- 갑작스럽게 좌정하는게 보통 긴장한 것이 아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준혁씨는 좋은 사람이군요."
미소지으며 말하는걸 듣고 있자면, 정말 걱정해 주고 있구나. 정말 생각해 주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 하며 힘없이 미소지어 보였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웃으면서도 무언가 말하기 어려워 하고 있었다. 떠난다는 이야긴가. 그전에 몇마디 더 하고 싶은데.
"...저, 죄송하지만, 조금 더 남아 있으면 않될까요?"
여신은 잠시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잇살씩이나 먹어놓고 준혁은 한동안 대답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내리친 번개로 인해 여신의 지원시스템은 상당한 문제가 생겼거든요. 물론, 힘이라던지, 그런것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귀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당분간 돌아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준혁은 고민했다. 다시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갈대도 아닌데 자꾸만 꺾인다.
"물론, 당분간 머물 곳을 만드는 것은 별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무언가를 만든다면, 아마도 단속이 나오겠죠. 개발 제한 구역이니까요... 그렇다고 딱히 다른 분을 찾아갈수도 없고... 시스템이 복구될때까지 다른 일도 불가능하고..."
대강 이해는 하고 있다... 도시도 별 다르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는 그녀의 일이 "연기"된 상태인데다 천계의 소원 접수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주러 다닐수도 없다. 그러니까, 당분간 여기 있는 것이 났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에게 있어 폐쇄적이기 마련이고,
아직 준혁은 그녀가 진실로 누구인지 잘 모른다.
피해갔던 선택, 선택, 선택이 다시금 그의 목을 욱죄운다. 잠시, 주위에 누군가를 두고 있어도 될까? 식구들이 오면 어떻게 하지? 그녀의 생활은?
고물 시계가 울린다. 벌써 일곱시. 백수가 아니라 재수생. 그것도 스스로 벌어야 하는 고학생인 그는 조금 후에 다시금 일상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학원에 가서, 재수생용 강의를 듣고- 점심때 나와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저녁까지. 끝나고 나와 도서관에서 복습을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한다. 선택은, 선택은... 이번엔 도망칠수 없다. 결론은 짧고 간단하다.
"저... 학원 때문에 일찍 나가봐야겠네요. 나중에... 이야기 하죠."
"그런가요..."
회피다. 도망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선택이란 것은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삶의 무게다. 대답도 듣지 않고 지하수가 나오는 세면장에서 급하게 세면을 끝내고 주혁은 주섬 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 아침이야 그래도 조금 먹는 주의지만 그래봐야 설익은 밥에 라면이니 이런땐 조금 걸러도 괜찮을 것이다. 급하게 가방을 싸고 다시금 그 무거운 가방을 둘러멘다. 이 자리는 피하는게 좋겠어. 피하는게...
그리고 준혁은 어제의 깨진 거울 조각을 보았다. 깨어진 면 사이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어설프고 추하다.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언제까지 넌 도망만 치는거지?
낡은 대문 앞에서,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녀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베르단디는 그 자리에 있지 않고 그와 조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조금은, 슬픈표정?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이 자리를 피하는것인가. 미안할 필요 없어요. 난, 당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 한달을 고민해야 하는 놈이라고. 준혁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대문 너머 세상이 보인다. 조금 있으면 첫 버스가 온다.
기다린 끝에 버스를 탔다.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오후의 도시라는 것은 음울하다. 준혁은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도서관을 향해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무의미한 삶의 반복이란 것은 언제나 힘겹다. 우유부단에, 무능력자에, 자기 존재감이 존재치 않는 모순적인 인물이란 것은 삶이 무가치 하지 않더라도 힘겹게 느낀다. 똑같은 하루다. 언제나 똑같이 학원의 재수생용 총정리를 들으며 머릿속에 공식과 연혁을 박아넣는다.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언제나 진도를 따라가는데 벅차다. 학습 시간이 끝나고, 집이나 도서관, 독서실, 고시원을 향하는 다른 재수생과 달리 식당을 찾아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마늘을 찣고, 파를 다듬고, 접시를 닦는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택이란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하루다.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엔, 그제야 도서관을 찾아가 막차가 올때까지 혼란 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막차를 타고 낡은 한옥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는다. 부엌이야 있고 부모님이 가져다 주신 반찬도 있기야 있지만 주로 해먹는건 라면. 그렇게 시간 시간이 반복된다. 물론 어제는 예외다.
그는 베르단디를 떠올렸다. 이제 준혁은 돌아가서 선택을 해야 한다. 무슨 선택을? 일단 그녀를 빗속에서 건져내었다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어려운 선택의 처음이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까지 어려운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집에 둔다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그후가 두려워진다.
누군가를 두고 있어도 될까? 부모님은? 집에서 무얼 잘 먹지 않아서, 아직 반찬이랑 밥은 좀 있지만 그녀의 생활은 어떻게 해결하지? 그녀가 있는 상황에서 집주인이 나가라고 한다면?
"...겁쟁이."
"오오,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준혁은 수그렸던 고개를 쳐들었다. 그 앞엔, 화려하게 머리를 물들인 잘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자존감, 자신감. 명문대생이란 간판.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녀석이다. 고등학교때 그의 반으로서 그를 친구가 아닌 종처럼 부려먹은 전적이 있는 놈이라 가급적 피해 다녔는데, 이렇게 길거리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아... 오랫만이네. 병학아."
무거운 가방을 추스르며 현재도 현재진행형으로 잘 나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듯한 옛 친구를 바라다 본다. 진정한 친구라기엔 어폐가 있겠지만. 이병학은 좀더 스스로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음인지 손을 당겨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미모의 여자를 앞으로 끌어당긴다.
"아, 얘가 내가 그전에 이야기 하던 꼬봉이야. 시키는대로 참 잘하던 녀석이지."
"어머~ 그랬어?"
순간적으로 준혁은 그와 그의 관계가 어떤식으로 종말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병신같은 부림. 부림을, 능력없고 내성적이란 이유로 당하던 지배의 종말은 싸움이었고, 발악적으로 달려들어 부모님이 학교로 출두하셔서 이병학의 치료비를 내셔야 했다. 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어, 재수했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요즘도 하고 있냐? 이번엔 삼수겠네?"
"...뭐 성적이 안나오니까."
"그래, 계속 공부해서 열심히 살아라~ 네 얘기 들어봐야 칙칙한 소리밖에 못들을 테니까 난 애인이랑 간다. 오늘 [이거]하기로 했거든. 아 넌 당연히 동정이겠지? 여자 손목은 잡아 봤냐?"
"자기야 그만해~"
비웃듯 웃어보이고는 엄지와 검지를 맞댄다. 그래. 넌 성공자니까. 성공자니까 나같은 패배자를 짓밟으셔야지. 그래, 남녀관계도 성공의 지표라니까 열심히 성공하는거냐. 준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해서 어디 전문대라도 가~ 이건 순수한 충고라니까. 요즘은 학벌이 간판이 못되요. 간판이! 그러니까... 응?"
쳐버릴까...를 고민하며 주먹을 그러쥐었지만, 날아가기 전에 그녀석의 말이 멈췄다. 멈추어버린 녀석의 시선을 따라 보이는 것은 서서히 뜨기 시작하는 달. 도시의 광기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을 울릴건만 같다.
그리고, 그 아래엔 도시락을 품에 안은... 베르단디가 있었다. 준혁은, 완연히 고개를 돌렸다. 숨막힐듯한 순수와 고결함이, 타락한 도시의 공기를 꿰뚫고 광휘光輝를 전달한다. 이병학은 잠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베르단디만 바라보다가 그의 애인에게 호된 따귀를 맞았다. 말도 끝내지 못하고 허겁지겁 애인을 좇아갔다.
준혁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신은, 한발 한발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힘없이 웃어보인다.
"점심을 싸 보았는데... 준혁씨를 찾기가 어려워서요."
점심? 지금은 저녁이다. 하지만 준혁은 망부석처럼 그저 못박혀 있는다. 이젠 식어버린 도시락이지만, 그것을 통해 무언가가 느껴진다. 누군가를 위해준다는 것.
"저, 그럼 가볼게요."
어디로?
"가... 가본다니?"
여신은 역시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준혁씨가 어려워 하시는것 같아서..."
다시금 선택이 욱죄어 온다. 하지만, 준혁은 어느정도 마음을 굳혔다. 조용한 정적 끝에, 떨어질것 같지 않던 그의 입이 떨어졌다. 고개를 수그린채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괜찮아요. 있어줘요."
하늘은 비구름 때문에 별도 보이지 않는다. 달만이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 가운데, 도시의 나트륨 등에 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만들어낸 인공의 빛이 도시를 메워나간다. 그 중심에 서있던 베르단디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며 그의 손을 떼 내었다. 고개를 수그린 준혁의 조금은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어올리자, 살포시 웃어보인다.
"고마워요"
그와 그녀는 같이 걷기 시작했다. 조금 서둘러서. 장마니까, 비가 올것이다. 오늘 아니면 내일. 하지만 준혁은 상관 없다. 두고 두고 꺼내어 볼수 있는 좋은 기억이 하나 생겼으니까. 좋은 기억...
버스가 거친 외곽도로를 타고 달리며 작게 튀어오른다. 앞좌석과 뒷자석에 단 둘만을 태운 버스의 기사는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 함인지 상당히 거칠게 차를 몰고 있었고, 여신은 그때마다 무언가 돌아오려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 좋은 기억...
-약속이다!
약속?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억수 같았고, 순식간에 세상이 환하게 변한다. 번개.
"어이쿠, 이제 완연히 장마구만... 번개도 치고."
버스 기사가 읆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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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요. 재미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늦어버리다니;;; 음. 부족해 부족해 부족해~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일단 열편 써놓고 보자~ 하고 결정을 내려버렸다죠.;;; 아, 물론 팬픽의 요체는 작품에 대한 애정입니다만.;;;; 음, 그럼 나도 오로지 애정이었소~ 할수 있는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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