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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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도화지에 검은 펜으로 빗금을 치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 배경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무엇인지 좀처럼 알게 되기는 어렵다.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것은 차가운 물방울.
어둠이 비쳐 어두워보였던 물방울은 녹색의 풀잎과 부딪혀 녹색으로 비산했다.
비가 쏟아진다.
다닥 다닥하는 은은한 리듬감, 한옥의 기와 사이로 넘쳐 떨어지는 낙수. 그리고 점점 짙어져 가는 식물의 짙은 내... 그리고 그 접점 안에는, 그녀가 있다.
단편 [장마]
2.
"놀라지마세요, 윤준혁씨. 저희 여신들은 당신들과 같이 곤경에 처해 있으신분들을 구제하는일을 하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살짝 웃음을 짓는것이 꽃이 만개하는듯 하다. 비는 밤하늘의 어두움을 담아 지상까지 물들이려 하는듯 했지만 베르단디와 접촉해서는 오히려 물방울 본연의 순수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투명함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증폭시킨다.
젖어버린 옷에, 젖어버린 마음에,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만 멈추어 있다. 인생에서 중요 하다 생각되던것을 몇번이나 포기당했던 남자는 무언가를 새로이 알았을때 조심스러워 질수 밖에 없다. 하물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소녀야.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눈물 자국을 지우지 못한 그는 예기치 않은 경우의 보편적인 행동인 "왜?"를 읆조리고 있었다.
왜 나지? 왜 그녀가 나를 도와준다는 것이지? 왜 그녀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고민할 시간보다는 상황이 그를 압박한다.
"아...? 나는 집에 전화 연결을 할 생각으로..."
"전화 연결로 좋겠습니까? 그밖에 어떤 것도. 준혁씨가 원하는 것 한가지를 들어드릴수 있습니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선택을 묻고 있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준혁은 축축한 웃옷의 감각을 애써 잊으려 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음울한 상황에서 탈출할수 있다는건가? 그 인척, 친척, 동생, 친구, 부모님. 그래 다 잊혀져 버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모습에서 탈피할수 있다는 이야긴가?
하지만 어떻게?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준혁에겐 지나치게 원하는것이 넘치고 있었다. 과연 이룰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지만. 사랑. 돈. 명예. 지위... 절대로 잊혀질수는 없는 총체적 성취. 무의미의 반복으로 끝나버릴수 없는 화려한 삶.
사치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하지만 선택할수 있는것은 하나뿐이다. 준혁은 대청 마루밑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느덧 비는 장대비의 수준을 넘어 폭우가 되려 하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 생각할 시간이란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녀의 말, 쥐푸라기 하나도 잡을수 없는 그의 입장에선 신뢰할수 밖에 없는 마지막 동아줄이 되었다.
"전화 연결로 할까요?"
생각에 잠겨있는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호기심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여신의 밝은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화들짝 놀란 그가 뒤로 물러나자, 그녀는 그를 쳐다 보기 위해 굽힌 허리를 피고는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아... 아니..."
말을 하면서, 그는 더 기다리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는, 지금 퍼붓고 있다. 그나 그녀나, 이 자연의 일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잡고 있는 미망을 떨칠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여신의 구원이란 것은 어찌보면 동정이다. 나락이든, 슬픔이든.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인간들에게 손을 뻗쳐 구원해준다는 것은. 구호의 손길에 무언가 조건을 붙인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주제넘은짓이다. 하지만.
윤준혁은 조심스레 올려다 보았다. 그 앞에서 비와, 패배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여신을.
선택의 시간에 비해 짧고도- 단순한 질문이었다.
"혹시... 저, 한달쯤 뒤에..."
"예?"
"다시 물어보라는 소원은 안됩니까?""
베르단디의 미소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
잠시간의 통화가 끝난후에, 베르단디는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천계 사무소에 물어보았는데, 이번에 한해서 수리된다고 하네요. 전례가 없던 일이니까요..."
애써 미소지었지만, 쉬웠던 것은 아닌 듯 했다. 준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의 미소를 받아들였다. 순수하게 누군가를 받아들일수 없을정도로 일그러져 있는 그였지만, 여신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그리고 무언가 초자연적인 모습을 보여준 소녀의 순수는, 그리고 성실은 알수 없는 상실감을 그에게 안겨주고 있다.
"다음에는 선택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음. 다음... 다음번 선택.
하지만 일단 선택은 끝났다. 한달. 그 후에, 과연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수 있을지. 그 자신도 파앆하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그 소원의 성취라는 것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상황이지만 어쨌든 잠시의 유예 기간을 얻었다.
점점 더 심해져 앞을 구분하기 힘들다. 비와 비구름, 장마 전선과 장마 전선, 비구름과 비구름. 호우주의보라도 내려진 것일까? 여름이니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는, 광풍과 함께 번개까지 동반하고 있다. 더이상 마당에 나와 있다는것은 누구나 위험하다. 준혁은 이만 들어가고, 그녀도 다시 천계로 돌아가 한달 뒤에 다른 여신이 소원을 이루어 주려 올것이라 한다.
"이번 일 하나로 천계의 규정을 바꿀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준혁씨에게 다시 나타나면, 그것은 이중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려요."
아련한 듯 다시금 아쉬움이 몰아닥친다. 쏟아지는 장대비에 흠뻑 젖은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다 보지 않으려 했다. 다시 볼수는 없는건가? 다른 여신이 온다 하더라도 그녀 같을까?
하지만 성공. 성공. 그래 성공해서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은 준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인사했다. 잠시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는 돌아간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 익숙한 솜씨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예. 일단 연기 된 것으로 했습니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수화기 너머 사이로 들리는 소리. 그리고 빗소리. 준혁은 선택이란 것을 제대로 해낸 것일까? 단순히, 회피한 것이 아닐까?
검은 먹구름 두어개가, 광풍에 휘말려 부딪혔다. 그동안 축적되어 있던 전자는, 갑자기 팽창된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쏟아내는 것으로 안정성을 획득했다. 방전. 노란 빛줄기.
...번개가 쳤다.
엄청난 빛이었다. 그리고 고열, 괴로움, 순식간에 한옥의 기왓장이 제 위치를 이탈하고, 건물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우릉거린다. 준혁도, 대청 안에 올라서던 중이 아니었다면, 죽었을지 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리하고도 남은 전류는 천계의 회선과 접속된 전화선을 타고 천계의 시스템, 유드그라실의 일부분을 폭주시켰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잡초들은 이리 저리 그슬려 있었고, 공중 전화기는 이리 저리 녹아버린 것이 한동안 전화 쓰기는 그른 듯 싶다.
비가 쏟아진다.
다닥 다닥하는 은은한 리듬감, 한옥의 기와 사이로 넘쳐 떨어지는 낙수. 그리고 점점 짙어져 가는 식물의 짙은 내... 그리고 그 접점 안에는, 정신을 잃은 그녀가 쓰러져 있다.
"...어?"
준혁은 어느새 일어서서 내려와, 그녀의 입가에 손을 올려 보았다. 미약한 숨결이, 그의 투박한 손을 자극한다. 그는 감전의 두려움도 떨쳐버리고 그녀를 들쳐 업었다- 선택의 두려움에 떨던 한 청년의 선택이었다.
어둠이 비쳐 어두워보였던 물방울은 녹색의 풀잎과 부딪혀 녹색으로 비산했다.
비가 쏟아진다.
다닥 다닥하는 은은한 리듬감, 한옥의 기와 사이로 넘쳐 떨어지는 낙수. 그리고 점점 짙어져 가는 식물의 짙은 내... 그리고 그 접점 안에는, 그녀가 있다.
단편 [장마]
2.
"놀라지마세요, 윤준혁씨. 저희 여신들은 당신들과 같이 곤경에 처해 있으신분들을 구제하는일을 하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살짝 웃음을 짓는것이 꽃이 만개하는듯 하다. 비는 밤하늘의 어두움을 담아 지상까지 물들이려 하는듯 했지만 베르단디와 접촉해서는 오히려 물방울 본연의 순수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투명함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증폭시킨다.
젖어버린 옷에, 젖어버린 마음에,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만 멈추어 있다. 인생에서 중요 하다 생각되던것을 몇번이나 포기당했던 남자는 무언가를 새로이 알았을때 조심스러워 질수 밖에 없다. 하물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소녀야.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눈물 자국을 지우지 못한 그는 예기치 않은 경우의 보편적인 행동인 "왜?"를 읆조리고 있었다.
왜 나지? 왜 그녀가 나를 도와준다는 것이지? 왜 그녀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고민할 시간보다는 상황이 그를 압박한다.
"아...? 나는 집에 전화 연결을 할 생각으로..."
"전화 연결로 좋겠습니까? 그밖에 어떤 것도. 준혁씨가 원하는 것 한가지를 들어드릴수 있습니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선택을 묻고 있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준혁은 축축한 웃옷의 감각을 애써 잊으려 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음울한 상황에서 탈출할수 있다는건가? 그 인척, 친척, 동생, 친구, 부모님. 그래 다 잊혀져 버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모습에서 탈피할수 있다는 이야긴가?
하지만 어떻게?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준혁에겐 지나치게 원하는것이 넘치고 있었다. 과연 이룰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지만. 사랑. 돈. 명예. 지위... 절대로 잊혀질수는 없는 총체적 성취. 무의미의 반복으로 끝나버릴수 없는 화려한 삶.
사치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하지만 선택할수 있는것은 하나뿐이다. 준혁은 대청 마루밑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느덧 비는 장대비의 수준을 넘어 폭우가 되려 하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 생각할 시간이란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녀의 말, 쥐푸라기 하나도 잡을수 없는 그의 입장에선 신뢰할수 밖에 없는 마지막 동아줄이 되었다.
"전화 연결로 할까요?"
생각에 잠겨있는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호기심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여신의 밝은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화들짝 놀란 그가 뒤로 물러나자, 그녀는 그를 쳐다 보기 위해 굽힌 허리를 피고는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아... 아니..."
말을 하면서, 그는 더 기다리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는, 지금 퍼붓고 있다. 그나 그녀나, 이 자연의 일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잡고 있는 미망을 떨칠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여신의 구원이란 것은 어찌보면 동정이다. 나락이든, 슬픔이든.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인간들에게 손을 뻗쳐 구원해준다는 것은. 구호의 손길에 무언가 조건을 붙인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주제넘은짓이다. 하지만.
윤준혁은 조심스레 올려다 보았다. 그 앞에서 비와, 패배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여신을.
선택의 시간에 비해 짧고도- 단순한 질문이었다.
"혹시... 저, 한달쯤 뒤에..."
"예?"
"다시 물어보라는 소원은 안됩니까?""
베르단디의 미소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
잠시간의 통화가 끝난후에, 베르단디는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천계 사무소에 물어보았는데, 이번에 한해서 수리된다고 하네요. 전례가 없던 일이니까요..."
애써 미소지었지만, 쉬웠던 것은 아닌 듯 했다. 준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의 미소를 받아들였다. 순수하게 누군가를 받아들일수 없을정도로 일그러져 있는 그였지만, 여신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그리고 무언가 초자연적인 모습을 보여준 소녀의 순수는, 그리고 성실은 알수 없는 상실감을 그에게 안겨주고 있다.
"다음에는 선택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음. 다음... 다음번 선택.
하지만 일단 선택은 끝났다. 한달. 그 후에, 과연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수 있을지. 그 자신도 파앆하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그 소원의 성취라는 것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상황이지만 어쨌든 잠시의 유예 기간을 얻었다.
점점 더 심해져 앞을 구분하기 힘들다. 비와 비구름, 장마 전선과 장마 전선, 비구름과 비구름. 호우주의보라도 내려진 것일까? 여름이니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비는, 광풍과 함께 번개까지 동반하고 있다. 더이상 마당에 나와 있다는것은 누구나 위험하다. 준혁은 이만 들어가고, 그녀도 다시 천계로 돌아가 한달 뒤에 다른 여신이 소원을 이루어 주려 올것이라 한다.
"이번 일 하나로 천계의 규정을 바꿀수는 없으니까요... 제가 준혁씨에게 다시 나타나면, 그것은 이중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려요."
아련한 듯 다시금 아쉬움이 몰아닥친다. 쏟아지는 장대비에 흠뻑 젖은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다 보지 않으려 했다. 다시 볼수는 없는건가? 다른 여신이 온다 하더라도 그녀 같을까?
하지만 성공. 성공. 그래 성공해서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은 준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인사했다. 잠시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는 돌아간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 익숙한 솜씨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예. 일단 연기 된 것으로 했습니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수화기 너머 사이로 들리는 소리. 그리고 빗소리. 준혁은 선택이란 것을 제대로 해낸 것일까? 단순히, 회피한 것이 아닐까?
검은 먹구름 두어개가, 광풍에 휘말려 부딪혔다. 그동안 축적되어 있던 전자는, 갑자기 팽창된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쏟아내는 것으로 안정성을 획득했다. 방전. 노란 빛줄기.
...번개가 쳤다.
엄청난 빛이었다. 그리고 고열, 괴로움, 순식간에 한옥의 기왓장이 제 위치를 이탈하고, 건물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우릉거린다. 준혁도, 대청 안에 올라서던 중이 아니었다면, 죽었을지 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리하고도 남은 전류는 천계의 회선과 접속된 전화선을 타고 천계의 시스템, 유드그라실의 일부분을 폭주시켰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잡초들은 이리 저리 그슬려 있었고, 공중 전화기는 이리 저리 녹아버린 것이 한동안 전화 쓰기는 그른 듯 싶다.
비가 쏟아진다.
다닥 다닥하는 은은한 리듬감, 한옥의 기와 사이로 넘쳐 떨어지는 낙수. 그리고 점점 짙어져 가는 식물의 짙은 내... 그리고 그 접점 안에는, 정신을 잃은 그녀가 쓰러져 있다.
"...어?"
준혁은 어느새 일어서서 내려와, 그녀의 입가에 손을 올려 보았다. 미약한 숨결이, 그의 투박한 손을 자극한다. 그는 감전의 두려움도 떨쳐버리고 그녀를 들쳐 업었다- 선택의 두려움에 떨던 한 청년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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