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의 공간 - 에피소드 2. 외전 : 악마를 달래는(?)소녀, 바바리안 타운에 어서 오십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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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근쌔근.
한 소녀가 편안한 얼굴을 한 채 잠들어 있다.
바로 날 구해낸 꼬맹이었다. 아직도 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조금전보다는 나았기에
나는 내 갑주에 붙어 있는 망토를 덮어주었다. 흠~!
이렇게 보니 갑옷에 달린 망토라기보단 검정색 이불같은데?
그러다 나는 소녀의 손에 꼬옥 쥐어진 붉은색 하트 모양의 안대를 보고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 안대소녀의 직업은 검성 쪽에 가깝다?”
검성 : 기사처럼 육신과 검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는 달리, '검(劒)' 그 하나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추구해온 존재들을 일컫는다. 그들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우며, 검은 매우 날카롭다. 잘 단련된 파이터의 갑옷이라도 그들의 검 앞에서는 자칫하면 일격에 잘려나가기 쉽상이다. 그만큼 강하면서도 빠른 검술을 추구해온 그들은 검객처럼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진다. 하지만 검을 이용한 현란한 기술들은 적들의 공격을 무효화 시키고, 나아가 적들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검의 달인이라고 볼 수 있다.
[디나- 그렇습니다. 다만 본인의(지유가 아닌 쥬베이)설명대로
검기 대신 검파로 대신한다고..]
“쳇. 그거나, 이거나 똑같잖아!”
나는 깊이 잠들어 있는 소녀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디나에게 핀잔을 늘여놓았다.
세상에 마력도 없는 저 꼬맹이가 실은 대단한 능력자라니!!
뭐 검성? 언제 업데이트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하다.
저 아이에게 분별력만 있다면 나의 혁명단 소속으로 이끌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원한에 충실히 살아가는 자는 나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원한에 충실한 나와는 달리 저 소녀는 정 반대의 길을 걷는 자라고...
“그나저나 나노하나 지유.”
나는 하루 내내 너무 무리했는지 살짝 코까지 골며 자는 귀여운 소녀를 응시했다.
왠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무시했다.
“넌..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네가 말한대로 나의 동료일까?
아니면...나의 적일까?
그러나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낮은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뿐.
-제로스 대륙에서 디스지에라 제국의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요?
만약 당신이 대륙의 누군가를 붙잡고 이런 질문을 한다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3곳을 자세히 답할 것이다.
-바바리안 타운 네트워크, 자유무역 지역, 엘프들의 숲(혹은 마을)
이 3곳은 가장 조용하고, 또 가장 부유한 3대 명소이기도 하다.
제일 유명한 곳은 자유무역지역들이다. 수백 개가 넘는 관리시청,마탑 들을 중심으로
마법 도구 상점들과 여러 상업지구들이 들어선 이 도시는 제국 소유이나, 제국의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무역지역에 속하는 곳 중 가장 대표적인 제국의 도시에는 달다이라가 있다. 오히려 이곳의 시민들은 제국의 수도 사람들보다
더 수입이 높다고 한다. 또 이곳은 마법사들과 대륙을 여행하는 모험가들에게 있어
꼭 한 번씩은 들려야 하는 성지이다. 이 도시의 마법 도구 생산량은 대륙의 전체 생산량의
5할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 중부지역의 대표도시에서는 제국의 건설에 도움을 준 수많은
대마법사들을 배출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시아와 태상, 설경 등등 신규 유저들이
본거지로 활동 중인 곳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유명한 지역은 엘프들의 숲. 현재 다크엔과 베르, 피카냐 등 아타락시아의 4괴인
중 3명이 보금자리를 튼 이곳은 보기엔 크기만 클 뿐 별 볼일 없는 엘프들의 마을이다.
엘프들의 숲에 널리고 널린 신기한 약초들과 과일나무들, 그리고 가끔씩 엘프들이 생산하는
미스릴 옷감은 대륙에서도 최상품. 레어 7급에 해당된다. 오죽하면 과장을 좀 보태서 도시
하나를 팔아야 값어치 있는 미스릴 옷을 입을 수 있다고들 할까!
그 때문에 제국 황실과 몇몇 부유한 자들만이 엘프들과 거래를 틀고 옷감을 산다.
또한 이런 이유로 인해 이 마을은 암묵적인 평화지역이다.
그러나 엘프들의 미모를 통해 돈을 벌려는 조직적인 인신매매단의 습격이 잦아 근래에
들어서는 조금 치안이 불안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점은 어느 도시를 가도
똑같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하드 스노우 산. 통칭 ‘설산’에 위치한 바바리안 타운 네트워크의 경우 이들과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8개가 넘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뭉쳐서 성벽으로 둘러싼 뒤 일개의 군으로 거듭난
이 마을의 주요 수입원은 고랭지 채소 재배와, 쿠하텍 토벌에 달려 있다.
설산의 악마 쿠하텍(레어 5~6급)의 비늘과 발톱을 덧댄 무기, 방어구는 미스릴검으로도
부술 수 없다는 강력한 강도를 지니고 있어 부유층들의 비싼 소유물이 된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고랭지 채소는 타 지역의 채소보다 더 크고, 양질이어서 이곳의 특산품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또 최근에는 산지의 마을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상업과 공업활동에 전념해 수입량이 늘고 있으나 이곳은 자유무역지대도, 귀족들이 정한 평화지역도 아니었다.
이곳은 과거 제국의 침략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민들과, 중소상인들, 엘프, 리자드맨, 바질리스크인들과 같은 어둠의 종족들이 뭉쳐서 살고 있는 곳이었다.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과 같은 반역자들이 모여 만든 이 도시를 좋게 보기 힘들다.
그래서 최근에는 페이렌과 에스펠리오, 제국군의 습격을 받아 불안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국에 대한 증오로 뭉친 엘프, 인간, 오크, 리자드맨, 바질리스크인들이 모인 이
도시는 벌써 몇 년째 잘 버티고 있다.
최근에는 블랙 울프스사의 지원을 받아 자유독립연방으로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쿠르르르. 덜컹 덜컹.
“음?”
눈부셔.
따가운 햇살에 잠을 깬 나노하나 지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게 솟아오른 산지.
히말라야 그림이라도 그린 듯 빽빽이 쌓인 눈과 울창한 숲.
지유는 멍하니 눈 덮인 산맥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의 몸이 덜컹거리며 들썩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조금 허전하다는 사실도...
“앗! 내 옷 어디 갔지?!”
자신이 입고 있던 교복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지유는 경악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다 앞장서서 걷고 있는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를 발견하였다.
그의 복장은 조금 웃겼는데, 꼭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본 스타워즈란 영화속에서 나온
악당이 입은 갑옷과 비슷했다. 그가 내뿜고 있는 숨소리도 너무 똑같아 지유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제다이는 어디 있죠? 지유는 이렇게 물으려다 꾹 참았다.
“이거 받도록.”
턱.
“이건 제 옷이잖아요?!”
이런 변태! 라고 잔뜩 비난을 쏟으려던 지유는 저 괴상망측한 검은 갑옷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괴물로부터 지켜줬던 때를 기억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오히려 폐를 끼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교복은 금방 세탁을
하고 드라이클리닝까지 했는지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지유는 서둘러 속옷차림의 몸 위에 내복과 교복을 갈아입었다.
꾸벅.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체온이 장난 아니더군. 네가 타고 있는.
그...다목적 소형 정찰무인 탱크의 냉각수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냉각수요?”
베이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괴이한 가면 때문에 웃음을
지었는지 알길이 없지만 굉장히 기쁜 듯 했다. 지유는 베이더의 알 수 없는 영어가
들어간 흥얼거림을 무시한 채 자신이 앉아 있는 물체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베이더가 정찰 무인 탱크라고 소개한 그것은 푹신한 소파와 기계의 몸체에
전쟁영화에서나 볼법한 탱크의 무한궤도(케터필러)가 달려 있었다.
낮은 엔진음이 지유의 귀를 간질였다.
“고것이 작지만 힘 하나는 좋다. 여중생은 물론 공간만 늘린다면 나도 태울 수 있고,
위급할 때는 에로우 타워를 달아서 지원용 석궁 발사 로봇이 될 수도 있지. 뿐만 아니라
이름 그대로 정찰용으로도 쓸 수 있는 녀석이라. 내가 만든 발명품들 중에서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지. 뭐...어제 일로 몇 개는 부서졌지만.“
“우와. 이걸 혼자 만들었어요?”
지유가 신기하다는 듯 베이더를 바라보았다. 베이더는 그녀의 눈길에 찔끔 몸을 떨며
그녀를 무시한 채 앞장 서서 걷기만 했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돌려 지유 쪽을 바라보았다.
참고로 그의 눈길은 그녀의 얼굴과, 희한한 머리스타일, 그리고 가슴 쪽에 쏠려 있었다.
“아니. 나랑 엘프마법사 녀석, 그리고 덜프 영감놈.”
“아.”
지유는 그게 누군지도 모르면서 맹한 얼굴로 감탄사를 토해냈다.
정말 멍하다 못해 딱 바보라 표현할 수 있는 여중생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는 동안 베이더와 지유는 설산 중턱에 위치한 ‘함정의 바위’에
도달했다. 어제 베이더가 사냥을 하던 곳이고, 또 그녀가 다시 야규 쥬베이로
변신을 하여 싸웠던 곳이기도 했다. 주위에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나간 부품들과, 함정 조각들, 무인탱크들의 잔해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저기. 어제 그...공룡은?”
쿠하텍의 행방을 묻는 지유의 질문에 베이더는 뒷머리(검은색 투구를 긁적이며)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흐흠. 글쎄. 네 정도 능력자라면...당연히 죽였겠지? 안 그래. 안대소녀??”
“누, 누가 안대소녀예욧!”
베이더가 히죽거리며 농담을 던지자 지유는 하트표 안대를 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 생각해봐도 대체 2년 동안 어떻게 이런 문장이 달린 안대를 하고
싸울 수 있었을까? 지유는 이 안대를 남긴 쥬베이란 남자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
“왜 그리 시무룩해? 졸업식에 못 가서 그래? 걱정마라. 사신 녀석을 족치는 한이 있어도
내가 널 반드시 보내...“
“그것 때문이...아녜요.”
내가 드디어...검으로...죽여 버렸다.
지유는 자신(쥬베이로 변신했던 자신)이 괴물의 머리에 검을 꽂아 넣은 일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검은 원한, 원망과 원념만을 죽이는 검이었다.
그런데 동물과는 관련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공간에서..너의 그 안대는 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줄 것이다.후후후. 나의 공간에 초대받지 못한 자에게 소환된 능력자여!
‘그 자.’
그자의 설명대로 내가 더 강해져서 이런 것인가?
지유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안대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혹시라도 이 검은 이곳 사람들에게 겨눈다면?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맹한 표정이 풀리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베이더는 어리둥절하며 그녀를 살폈다.
“......”
“어이 배고파서 그래? 가다가 사슴 한 마리 잡아서 구워줄테니까 쫌만 참..”
꼬르르르르르르르르륵.
그때 산맥을 무너뜨릴 것 같은 엄청난 배꼽시계의 비명이 들려왔다.
지유와 베이더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배를 움켜쥐고 으윽! 고통에 신음했다.
어제 점심부터(베이더와 지유 둘 다.)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들이었기에
고통은 더욱 심각했다. 지금까지 안 울린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젠장! 이 멍텅구리 책 디나!! 당장 내가 만든 믹서기로 갈아버리기 전에 과일나무
아무거나 찾아!”
[디나- 전방 10m 앞에 빈속껍질 열매 ‘토루’가 있습니다. 마침 잘 익었군요.]
디나라 불린 베이더의 설명가이드북은 베이더보다 더욱 뛰어난 시력을 뽐내며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았다. 혀를 끌끌 차며...
[20분 뒤.]
“살것 같다! 때마침 지나가는 토끼 고기도 있고. 우히히히히힛!”
배를 탁탁 두드리며 마지막 남은 토루 열매를 입 속에 집어넣어 오드득 씹는 베이더를
바라보며 지유는 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두 눈동자를 바라본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이. 왜 그래? 내가 준 토루 열매가 혹시 맛없냐? 어이~토끼 고기 구이 다 식는다.”
“.....”
그러나 지유 특유의 맹한 표정은 절대 풀리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뭔 생각인 겨!! 베이더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끙끙 앓았다.
이 녀석! 지금 나랑 장난하는 것이냐.
“토루 열매는 지금이 기회야. 요즘 시기가 아니면 평생 먹을 수 없는 열매란다.”
“.........”
여전히 말이 없지만 베이더는 자신의 마을이 내놓는 특산품의 설명을 계속 이었다.
“속이 아무것도 없지? 그리고 생긴 것도 검은 게 이상하지? 하지만 그것은 인식의 차이일 뿐이야. 이것은 속이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지만. 껍질을 먹는 열매인 것이다. 한번 씹어 먹어봐. 아몬드 초콜릿을 먹는 듯한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맛이 날거야!”
“......”
“물론 지금 먹기 싫다면. 안 먹어도 된다. 그치만..일단 배는 채워야 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냐?”
“....네.”
맹한 표정을 풀고 힘없이 토루 열매와 고기를 씹는 지유를 보며 베이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온천에서 나눴던 검사를 떠올렸다.
저 녀석..원래 현실세계에선 평범한 여중생이자, 희한한 힘을 가지게 된 검사였다지?
“혹시. 어제 전투 때문에 그러냐?”
“...아뇨.”
뭐가 아냐! 딱 보기에도 네라고 써 있구만.
베이더는 속으로 어이없음을 털어내며 지유의 맹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베이더의 시선에 지유는 어리둥절해했다.
“어제 살려준 것은 고맙다. 아 물론 오해는 하지마! 어제와 같은 그 위험한 일의 시작은
네가 먼저 했으니까.“
“.아. 하.”
“왠 감탄사냐? 어쨌든 멍한 표정은 풀어라. 그렇게 멍해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나도 예전에 엄청 멍해서 광학 기능사란 자격증 딸 때도, 회사에서 일할 때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 이제 여고생이 될 녀석이 열심히 공부도 해야 되는데 그런 표정을 지으면 쓰나!?“
“아 네.”
물론 끝내 멍한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베이더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 남아 있는 고기조각을 뜯어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어쨌든 고맙다. 어제 전투가 자꾸 신경 쓰이나 본데...넌 그 힘이 싫다고 했지?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물론 사람을 베는 힘은 나쁘지. 하지만.“
그 힘만 있다면 넌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단다. 꼬맹아.
베이더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곤 한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지유는 멍하니 그의 설명을 듣다가 뒤늦게 맞은 부위를 주무르며
아얏하고 소리를 쳤다.
“물론 넌 악마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열심히 해봐. 지금 생각해보니 네가 참 부럽다.
그런 힘만 있으면 넌 주위사람들을 구할 수 있단다. 생각해보렴. 네가 그 안대를 손에
넣은 것이 2년 전이었다며? 그동안 그 힘 덕택에 구해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많아요.”
베이더가 어깨를 탁탁 치며 옳거니 소리를 쳤다.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겁내지 말아라. 요 꼬맹아.
“이상하다 분명히 이 근처였는데.”
베이더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주 짜증스런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젠 많이 나아졌지만
걸어야 할 길이 제법 멀어서 정찰 탱크의 시트 위에 짱박아둔 저 가슴 큰 소녀(...)가
다가와서 왜 그러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그렇게 말했는데도
생각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이냐? 여전히 맹한 표정이다.
“아무것도.”
쿠하텍의 발톱에 상처가 난 대지와 바위조각들, 부서진 함정, 자전거 부품들. 어젯밤
쥬베이의 말로는 분명 이 근처에서 계속 싸워서 이겼다고 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절벽을 뒤져보고, 언덕 위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살아 있다는 소리인데...베이더는 가슴을 팡팡 치며 답답해했다.
“머리가 뚫렸다고 했는데.”
이 여자가! 이 안대 아가씨가 사기 친 거 아냐?
베이더는 멍한 눈을 한 채 자전거 부품들을 집고 있는 지유를 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지유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봤으나 멍하다 못해 맹함으로 발전한
그녀는 베이더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크와오오오오오-
“꺄악!”
제길슨! 베이더가 희한한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에 널린 나무판자와 그물조각, 쇳조각을 잡았다.
“로보틱스! 더블 브레이크 체인 써!”
우웅 우우우우우우웅.
푸른색 빛이 일렁이더니 그의 손에 커다란 전기톱 두 개와, 드릴이 교차하며 돌아가는
괴이한 물건이 생겨났다. 베이더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써먹어야 할 로보틱스란
능력으로 만들어낸 이 무기는 과거 단검이나 낡은 검을 통해 만든 전기톱보다는 강하고,
위력적인 무기였지만 지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설산의 악마 쿠하텍의 비늘과
가죽을 뚫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케논 프레셔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야! 안대 소녀!! 여긴 내가 맡을테니. 당장 하산해!!”
그러나 베이더의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지유는 멍한 눈을 한 채 한발자국씩
다가오는 쿠하텍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너무 늦었나.
베이더는 톱에 더욱 강력한 힘을 주며 달려갔다. 그러나 괴물은 벌써 지유 곁에 다가와
낮은 숨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큰 거구에 가려져 지유를 못 본 것이었나?
베이더는 괴물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 소리를 질렀지만 괴물은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젠장!”
우우우우웅
“이야아아아아압!!”
‘저 쿠하텍은 어제의 그 놈이군.’
얼굴이 잔뜩 깨지고 정수리에 깊게 패인 칼자국, 길게 찢어진 날개막과 뿔을
본 베이더는 확신을 가졌다. 쿠하텍은 매우 성질이 포악하고, 머리도 좋아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자의 주위에 머물며 두리번거리다가 틈을 노려 복수를 한다고 했다.
마을 사냥꾼들의 조언을 뒤늦게 깨달은 베이더는 자괴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젠장! 안대를 써 안대를 쓰라고. 지유에게 달려가며 외쳤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쿠하텍이 그 커다란 입을 벌리고 지유에게 향하고 있었다.
“안 돼!!!!”
콰우우우~~할짝 할짝 쩝쩝.
“꺄아악! 간지러워~”
할짝 할짝 할짝 쩝.
쿵.
쿠하텍이 하는 행동에 어이가 없어진 베이더는 톱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이런 제길슨!! 이게 뭐야?! 베이더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지유와 쿠하텍이 하는
행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고통에 비명(이 맞나?)을 지르는 소녀와 맛이라도
보듯. 아니 친한 사이라도 되는 듯 진득한 침을 지유의 온 몸에 묻히고 있는
저 쿠하텍의 모습에 베이더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 쿠하텍. 북부의 악몽. 설산의 악마라고 불리는 저 몬스터가...’
“지유. 안대 꼬맹이를 핥고 있네?”
그것도 마치 강아지처럼...
베이더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지유를 혀로 간질이며 지유를 간지럽혀 웃겨 죽이는
장면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아직 중독이 덜 풀려서 꿈을 꾸나?’
베이더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순간 이 톱으로 내 머리를 두들기면 낫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헤에~검으로 뱄다고? 그 설산 악마를??’
‘그래 베었다.’
‘크큭. 잘되었구만. 1만 골드는 아니지만. 6천 골드는 벌었군.’
‘내 검은...마음을 벤다?’
‘엉 뭐라고?’
‘.....’
제길슨 이 여자!! 설명을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마음만 벤다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저 꼬맹이.."
정말 보통 능력자가 아니었구만.
한 소녀가 편안한 얼굴을 한 채 잠들어 있다.
바로 날 구해낸 꼬맹이었다. 아직도 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조금전보다는 나았기에
나는 내 갑주에 붙어 있는 망토를 덮어주었다. 흠~!
이렇게 보니 갑옷에 달린 망토라기보단 검정색 이불같은데?
그러다 나는 소녀의 손에 꼬옥 쥐어진 붉은색 하트 모양의 안대를 보고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저 안대소녀의 직업은 검성 쪽에 가깝다?”
검성 : 기사처럼 육신과 검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는 달리, '검(劒)' 그 하나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추구해온 존재들을 일컫는다. 그들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우며, 검은 매우 날카롭다. 잘 단련된 파이터의 갑옷이라도 그들의 검 앞에서는 자칫하면 일격에 잘려나가기 쉽상이다. 그만큼 강하면서도 빠른 검술을 추구해온 그들은 검객처럼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진다. 하지만 검을 이용한 현란한 기술들은 적들의 공격을 무효화 시키고, 나아가 적들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검의 달인이라고 볼 수 있다.
[디나- 그렇습니다. 다만 본인의(지유가 아닌 쥬베이)설명대로
검기 대신 검파로 대신한다고..]
“쳇. 그거나, 이거나 똑같잖아!”
나는 깊이 잠들어 있는 소녀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디나에게 핀잔을 늘여놓았다.
세상에 마력도 없는 저 꼬맹이가 실은 대단한 능력자라니!!
뭐 검성? 언제 업데이트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하다.
저 아이에게 분별력만 있다면 나의 혁명단 소속으로 이끌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원한에 충실히 살아가는 자는 나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원한에 충실한 나와는 달리 저 소녀는 정 반대의 길을 걷는 자라고...
“그나저나 나노하나 지유.”
나는 하루 내내 너무 무리했는지 살짝 코까지 골며 자는 귀여운 소녀를 응시했다.
왠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무시했다.
“넌..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네가 말한대로 나의 동료일까?
아니면...나의 적일까?
그러나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낮은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뿐.
-제로스 대륙에서 디스지에라 제국의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요?
만약 당신이 대륙의 누군가를 붙잡고 이런 질문을 한다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3곳을 자세히 답할 것이다.
-바바리안 타운 네트워크, 자유무역 지역, 엘프들의 숲(혹은 마을)
이 3곳은 가장 조용하고, 또 가장 부유한 3대 명소이기도 하다.
제일 유명한 곳은 자유무역지역들이다. 수백 개가 넘는 관리시청,마탑 들을 중심으로
마법 도구 상점들과 여러 상업지구들이 들어선 이 도시는 제국 소유이나, 제국의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무역지역에 속하는 곳 중 가장 대표적인 제국의 도시에는 달다이라가 있다. 오히려 이곳의 시민들은 제국의 수도 사람들보다
더 수입이 높다고 한다. 또 이곳은 마법사들과 대륙을 여행하는 모험가들에게 있어
꼭 한 번씩은 들려야 하는 성지이다. 이 도시의 마법 도구 생산량은 대륙의 전체 생산량의
5할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 중부지역의 대표도시에서는 제국의 건설에 도움을 준 수많은
대마법사들을 배출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시아와 태상, 설경 등등 신규 유저들이
본거지로 활동 중인 곳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유명한 지역은 엘프들의 숲. 현재 다크엔과 베르, 피카냐 등 아타락시아의 4괴인
중 3명이 보금자리를 튼 이곳은 보기엔 크기만 클 뿐 별 볼일 없는 엘프들의 마을이다.
엘프들의 숲에 널리고 널린 신기한 약초들과 과일나무들, 그리고 가끔씩 엘프들이 생산하는
미스릴 옷감은 대륙에서도 최상품. 레어 7급에 해당된다. 오죽하면 과장을 좀 보태서 도시
하나를 팔아야 값어치 있는 미스릴 옷을 입을 수 있다고들 할까!
그 때문에 제국 황실과 몇몇 부유한 자들만이 엘프들과 거래를 틀고 옷감을 산다.
또한 이런 이유로 인해 이 마을은 암묵적인 평화지역이다.
그러나 엘프들의 미모를 통해 돈을 벌려는 조직적인 인신매매단의 습격이 잦아 근래에
들어서는 조금 치안이 불안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점은 어느 도시를 가도
똑같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하드 스노우 산. 통칭 ‘설산’에 위치한 바바리안 타운 네트워크의 경우 이들과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8개가 넘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뭉쳐서 성벽으로 둘러싼 뒤 일개의 군으로 거듭난
이 마을의 주요 수입원은 고랭지 채소 재배와, 쿠하텍 토벌에 달려 있다.
설산의 악마 쿠하텍(레어 5~6급)의 비늘과 발톱을 덧댄 무기, 방어구는 미스릴검으로도
부술 수 없다는 강력한 강도를 지니고 있어 부유층들의 비싼 소유물이 된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고랭지 채소는 타 지역의 채소보다 더 크고, 양질이어서 이곳의 특산품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또 최근에는 산지의 마을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상업과 공업활동에 전념해 수입량이 늘고 있으나 이곳은 자유무역지대도, 귀족들이 정한 평화지역도 아니었다.
이곳은 과거 제국의 침략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민들과, 중소상인들, 엘프, 리자드맨, 바질리스크인들과 같은 어둠의 종족들이 뭉쳐서 살고 있는 곳이었다.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과 같은 반역자들이 모여 만든 이 도시를 좋게 보기 힘들다.
그래서 최근에는 페이렌과 에스펠리오, 제국군의 습격을 받아 불안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국에 대한 증오로 뭉친 엘프, 인간, 오크, 리자드맨, 바질리스크인들이 모인 이
도시는 벌써 몇 년째 잘 버티고 있다.
최근에는 블랙 울프스사의 지원을 받아 자유독립연방으로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쿠르르르. 덜컹 덜컹.
“음?”
눈부셔.
따가운 햇살에 잠을 깬 나노하나 지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게 솟아오른 산지.
히말라야 그림이라도 그린 듯 빽빽이 쌓인 눈과 울창한 숲.
지유는 멍하니 눈 덮인 산맥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의 몸이 덜컹거리며 들썩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조금 허전하다는 사실도...
“앗! 내 옷 어디 갔지?!”
자신이 입고 있던 교복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지유는 경악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다 앞장서서 걷고 있는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를 발견하였다.
그의 복장은 조금 웃겼는데, 꼭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본 스타워즈란 영화속에서 나온
악당이 입은 갑옷과 비슷했다. 그가 내뿜고 있는 숨소리도 너무 똑같아 지유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제다이는 어디 있죠? 지유는 이렇게 물으려다 꾹 참았다.
“이거 받도록.”
턱.
“이건 제 옷이잖아요?!”
이런 변태! 라고 잔뜩 비난을 쏟으려던 지유는 저 괴상망측한 검은 갑옷차림의
남자가 자신을 괴물로부터 지켜줬던 때를 기억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오히려 폐를 끼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교복은 금방 세탁을
하고 드라이클리닝까지 했는지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지유는 서둘러 속옷차림의 몸 위에 내복과 교복을 갈아입었다.
꾸벅.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체온이 장난 아니더군. 네가 타고 있는.
그...다목적 소형 정찰무인 탱크의 냉각수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냉각수요?”
베이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괴이한 가면 때문에 웃음을
지었는지 알길이 없지만 굉장히 기쁜 듯 했다. 지유는 베이더의 알 수 없는 영어가
들어간 흥얼거림을 무시한 채 자신이 앉아 있는 물체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베이더가 정찰 무인 탱크라고 소개한 그것은 푹신한 소파와 기계의 몸체에
전쟁영화에서나 볼법한 탱크의 무한궤도(케터필러)가 달려 있었다.
낮은 엔진음이 지유의 귀를 간질였다.
“고것이 작지만 힘 하나는 좋다. 여중생은 물론 공간만 늘린다면 나도 태울 수 있고,
위급할 때는 에로우 타워를 달아서 지원용 석궁 발사 로봇이 될 수도 있지. 뿐만 아니라
이름 그대로 정찰용으로도 쓸 수 있는 녀석이라. 내가 만든 발명품들 중에서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지. 뭐...어제 일로 몇 개는 부서졌지만.“
“우와. 이걸 혼자 만들었어요?”
지유가 신기하다는 듯 베이더를 바라보았다. 베이더는 그녀의 눈길에 찔끔 몸을 떨며
그녀를 무시한 채 앞장 서서 걷기만 했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돌려 지유 쪽을 바라보았다.
참고로 그의 눈길은 그녀의 얼굴과, 희한한 머리스타일, 그리고 가슴 쪽에 쏠려 있었다.
“아니. 나랑 엘프마법사 녀석, 그리고 덜프 영감놈.”
“아.”
지유는 그게 누군지도 모르면서 맹한 얼굴로 감탄사를 토해냈다.
정말 멍하다 못해 딱 바보라 표현할 수 있는 여중생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는 동안 베이더와 지유는 설산 중턱에 위치한 ‘함정의 바위’에
도달했다. 어제 베이더가 사냥을 하던 곳이고, 또 그녀가 다시 야규 쥬베이로
변신을 하여 싸웠던 곳이기도 했다. 주위에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나간 부품들과, 함정 조각들, 무인탱크들의 잔해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저기. 어제 그...공룡은?”
쿠하텍의 행방을 묻는 지유의 질문에 베이더는 뒷머리(검은색 투구를 긁적이며)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흐흠. 글쎄. 네 정도 능력자라면...당연히 죽였겠지? 안 그래. 안대소녀??”
“누, 누가 안대소녀예욧!”
베이더가 히죽거리며 농담을 던지자 지유는 하트표 안대를 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 생각해봐도 대체 2년 동안 어떻게 이런 문장이 달린 안대를 하고
싸울 수 있었을까? 지유는 이 안대를 남긴 쥬베이란 남자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
“왜 그리 시무룩해? 졸업식에 못 가서 그래? 걱정마라. 사신 녀석을 족치는 한이 있어도
내가 널 반드시 보내...“
“그것 때문이...아녜요.”
내가 드디어...검으로...죽여 버렸다.
지유는 자신(쥬베이로 변신했던 자신)이 괴물의 머리에 검을 꽂아 넣은 일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검은 원한, 원망과 원념만을 죽이는 검이었다.
그런데 동물과는 관련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공간에서..너의 그 안대는 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줄 것이다.후후후. 나의 공간에 초대받지 못한 자에게 소환된 능력자여!
‘그 자.’
그자의 설명대로 내가 더 강해져서 이런 것인가?
지유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안대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혹시라도 이 검은 이곳 사람들에게 겨눈다면?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맹한 표정이 풀리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베이더는 어리둥절하며 그녀를 살폈다.
“......”
“어이 배고파서 그래? 가다가 사슴 한 마리 잡아서 구워줄테니까 쫌만 참..”
꼬르르르르르르르르륵.
그때 산맥을 무너뜨릴 것 같은 엄청난 배꼽시계의 비명이 들려왔다.
지유와 베이더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배를 움켜쥐고 으윽! 고통에 신음했다.
어제 점심부터(베이더와 지유 둘 다.)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들이었기에
고통은 더욱 심각했다. 지금까지 안 울린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젠장! 이 멍텅구리 책 디나!! 당장 내가 만든 믹서기로 갈아버리기 전에 과일나무
아무거나 찾아!”
[디나- 전방 10m 앞에 빈속껍질 열매 ‘토루’가 있습니다. 마침 잘 익었군요.]
디나라 불린 베이더의 설명가이드북은 베이더보다 더욱 뛰어난 시력을 뽐내며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았다. 혀를 끌끌 차며...
[20분 뒤.]
“살것 같다! 때마침 지나가는 토끼 고기도 있고. 우히히히히힛!”
배를 탁탁 두드리며 마지막 남은 토루 열매를 입 속에 집어넣어 오드득 씹는 베이더를
바라보며 지유는 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두 눈동자를 바라본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이. 왜 그래? 내가 준 토루 열매가 혹시 맛없냐? 어이~토끼 고기 구이 다 식는다.”
“.....”
그러나 지유 특유의 맹한 표정은 절대 풀리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뭔 생각인 겨!! 베이더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끙끙 앓았다.
이 녀석! 지금 나랑 장난하는 것이냐.
“토루 열매는 지금이 기회야. 요즘 시기가 아니면 평생 먹을 수 없는 열매란다.”
“.........”
여전히 말이 없지만 베이더는 자신의 마을이 내놓는 특산품의 설명을 계속 이었다.
“속이 아무것도 없지? 그리고 생긴 것도 검은 게 이상하지? 하지만 그것은 인식의 차이일 뿐이야. 이것은 속이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지만. 껍질을 먹는 열매인 것이다. 한번 씹어 먹어봐. 아몬드 초콜릿을 먹는 듯한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맛이 날거야!”
“......”
“물론 지금 먹기 싫다면. 안 먹어도 된다. 그치만..일단 배는 채워야 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냐?”
“....네.”
맹한 표정을 풀고 힘없이 토루 열매와 고기를 씹는 지유를 보며 베이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온천에서 나눴던 검사를 떠올렸다.
저 녀석..원래 현실세계에선 평범한 여중생이자, 희한한 힘을 가지게 된 검사였다지?
“혹시. 어제 전투 때문에 그러냐?”
“...아뇨.”
뭐가 아냐! 딱 보기에도 네라고 써 있구만.
베이더는 속으로 어이없음을 털어내며 지유의 맹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베이더의 시선에 지유는 어리둥절해했다.
“어제 살려준 것은 고맙다. 아 물론 오해는 하지마! 어제와 같은 그 위험한 일의 시작은
네가 먼저 했으니까.“
“.아. 하.”
“왠 감탄사냐? 어쨌든 멍한 표정은 풀어라. 그렇게 멍해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나도 예전에 엄청 멍해서 광학 기능사란 자격증 딸 때도, 회사에서 일할 때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 이제 여고생이 될 녀석이 열심히 공부도 해야 되는데 그런 표정을 지으면 쓰나!?“
“아 네.”
물론 끝내 멍한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베이더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 남아 있는 고기조각을 뜯어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어쨌든 고맙다. 어제 전투가 자꾸 신경 쓰이나 본데...넌 그 힘이 싫다고 했지?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물론 사람을 베는 힘은 나쁘지. 하지만.“
그 힘만 있다면 넌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단다. 꼬맹아.
베이더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곤 한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지유는 멍하니 그의 설명을 듣다가 뒤늦게 맞은 부위를 주무르며
아얏하고 소리를 쳤다.
“물론 넌 악마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열심히 해봐. 지금 생각해보니 네가 참 부럽다.
그런 힘만 있으면 넌 주위사람들을 구할 수 있단다. 생각해보렴. 네가 그 안대를 손에
넣은 것이 2년 전이었다며? 그동안 그 힘 덕택에 구해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많아요.”
베이더가 어깨를 탁탁 치며 옳거니 소리를 쳤다.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겁내지 말아라. 요 꼬맹아.
“이상하다 분명히 이 근처였는데.”
베이더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주 짜증스런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젠 많이 나아졌지만
걸어야 할 길이 제법 멀어서 정찰 탱크의 시트 위에 짱박아둔 저 가슴 큰 소녀(...)가
다가와서 왜 그러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그렇게 말했는데도
생각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이냐? 여전히 맹한 표정이다.
“아무것도.”
쿠하텍의 발톱에 상처가 난 대지와 바위조각들, 부서진 함정, 자전거 부품들. 어젯밤
쥬베이의 말로는 분명 이 근처에서 계속 싸워서 이겼다고 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절벽을 뒤져보고, 언덕 위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살아 있다는 소리인데...베이더는 가슴을 팡팡 치며 답답해했다.
“머리가 뚫렸다고 했는데.”
이 여자가! 이 안대 아가씨가 사기 친 거 아냐?
베이더는 멍한 눈을 한 채 자전거 부품들을 집고 있는 지유를 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지유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봤으나 멍하다 못해 맹함으로 발전한
그녀는 베이더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크와오오오오오-
“꺄악!”
제길슨! 베이더가 희한한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에 널린 나무판자와 그물조각, 쇳조각을 잡았다.
“로보틱스! 더블 브레이크 체인 써!”
우웅 우우우우우우웅.
푸른색 빛이 일렁이더니 그의 손에 커다란 전기톱 두 개와, 드릴이 교차하며 돌아가는
괴이한 물건이 생겨났다. 베이더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써먹어야 할 로보틱스란
능력으로 만들어낸 이 무기는 과거 단검이나 낡은 검을 통해 만든 전기톱보다는 강하고,
위력적인 무기였지만 지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설산의 악마 쿠하텍의 비늘과
가죽을 뚫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케논 프레셔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야! 안대 소녀!! 여긴 내가 맡을테니. 당장 하산해!!”
그러나 베이더의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지유는 멍한 눈을 한 채 한발자국씩
다가오는 쿠하텍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너무 늦었나.
베이더는 톱에 더욱 강력한 힘을 주며 달려갔다. 그러나 괴물은 벌써 지유 곁에 다가와
낮은 숨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큰 거구에 가려져 지유를 못 본 것이었나?
베이더는 괴물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 소리를 질렀지만 괴물은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젠장!”
우우우우웅
“이야아아아아압!!”
‘저 쿠하텍은 어제의 그 놈이군.’
얼굴이 잔뜩 깨지고 정수리에 깊게 패인 칼자국, 길게 찢어진 날개막과 뿔을
본 베이더는 확신을 가졌다. 쿠하텍은 매우 성질이 포악하고, 머리도 좋아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자의 주위에 머물며 두리번거리다가 틈을 노려 복수를 한다고 했다.
마을 사냥꾼들의 조언을 뒤늦게 깨달은 베이더는 자괴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젠장! 안대를 써 안대를 쓰라고. 지유에게 달려가며 외쳤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쿠하텍이 그 커다란 입을 벌리고 지유에게 향하고 있었다.
“안 돼!!!!”
콰우우우~~할짝 할짝 쩝쩝.
“꺄아악! 간지러워~”
할짝 할짝 할짝 쩝.
쿵.
쿠하텍이 하는 행동에 어이가 없어진 베이더는 톱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이런 제길슨!! 이게 뭐야?! 베이더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지유와 쿠하텍이 하는
행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려움과 고통에 비명(이 맞나?)을 지르는 소녀와 맛이라도
보듯. 아니 친한 사이라도 되는 듯 진득한 침을 지유의 온 몸에 묻히고 있는
저 쿠하텍의 모습에 베이더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 쿠하텍. 북부의 악몽. 설산의 악마라고 불리는 저 몬스터가...’
“지유. 안대 꼬맹이를 핥고 있네?”
그것도 마치 강아지처럼...
베이더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지유를 혀로 간질이며 지유를 간지럽혀 웃겨 죽이는
장면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아직 중독이 덜 풀려서 꿈을 꾸나?’
베이더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순간 이 톱으로 내 머리를 두들기면 낫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헤에~검으로 뱄다고? 그 설산 악마를??’
‘그래 베었다.’
‘크큭. 잘되었구만. 1만 골드는 아니지만. 6천 골드는 벌었군.’
‘내 검은...마음을 벤다?’
‘엉 뭐라고?’
‘.....’
제길슨 이 여자!! 설명을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마음만 벤다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저 꼬맹이.."
정말 보통 능력자가 아니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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