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죽여야 하는 남자, 사랑을 해서는 안되는 여자 - [중] > 소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소설

사랑을 죽여야 하는 남자, 사랑을 해서는 안되는 여자 - [중]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카이얀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댓글 2건 조회 333회 작성일 02-12-17 21:22

본문

[중]



“누구시죠?”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여자는 한철호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
었다.

“알아서 뭐하게.”

한철호는 냉소 가득 섞인 대답으로 자신의 경계심이 강한 마음을 표출해내었
다. 그의 오른손은 바지 주머니 속에 가 있었다.

“당신은 민군인가요? 아니면 정부군인가요?”

여자는 그의 신상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20mm구경의 6연발 매그
넘을 꺼내들며 말했다.

“그 무엇도 아니다.”

그는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방아쇠만 당기면 언제든지 여
자의 머리통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여 왔
던 그가 웬일인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신비스럽게 보이는
여자를 쏘자니 영 내키지 않은 것일까?

결국 한철호는 매그넘을 거두어 버렸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
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잔 구름이 떠 있는 푸른 가을 하늘을 보다가 담배를
던져 버렸다.

“준법정신이 없으시네요.”

“그쪽은 민간이 출입금지구역에 있으면서.”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한철호는 여자의 태도에 고개를 숙여 이마를 짚으며 혀를 끌끌거렸다. 그리고
는 여자의 눈동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뭐냐?”

“채선혜에요. 그쪽은요?”

채선혜는 자기의 이름을 말해주며 한철호에게 물었다.

“한철호. 나이는 33세.”

“제 나이는 28살이에요. 일단은 자리에 앉아서 얘기해요.”

한철호는 채선혜에게 이끌려 공터에 앉았다. 그리고는 서로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철호 씨. 직업이 뭐에요?”

“어째서 친한 척하는 거지?”

“왠지 인연이 강한 것 같아서 그래요. 당신을 처음 볼 때 당신과 전 뭔가 통하
는 게 있는 것 같다고 느꼈거든요.”

“…….”

“철호 씨.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무서워 보여요. 안 그래도 무서워 보이는
얼굴인데…….”

“그, 그런가?”

“철호 씨 직업이 뭐에요?”

그녀의 질문에 한철호는 잠시 뜸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백수…….”

백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채선혜 앞에서 나는 송골매부대
소속 정부군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한다면 바로 기겁하며 도망쳐버렸을 것이
다.

“백수라고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은데…… 매그넘은 어디서 나셨어요? 민군
이세요?”

“백수야. 매그넘은 전 재산을 털어서 산거고.”

“그렇군요. 요즘은 실업자들이 많고 하니까…… 어디 사세요?”

“북구 쪽.”

“그래요? 그 지역이 전국적으로 민군 진압을 끝낸 정부군이 모여들어 그 지역
을 차지하던 민군들을 다 죽였다던데…….”

한철호는 순간적으로 뜨끔했다. 그러나 곧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무뚝뚝한 표
정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철호 씨 입에서 소주냄새가 나네요. 살 길이 없다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건 안 좋은 거에요.”

채선혜는 한철호의 등을 다독여주며 위로해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누나가 마
음의 상처를 받은 동생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한철호는 그녀의 손에서 어머
니와 비슷한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었다. 채선혜는 왼팔에 채여 진
심플한 디자인의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어느 덧 5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파랗
던 하늘이 점점 붉은 물감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요즘 시간이 너무 빨리 가네요. 벌써 오후 5시라니. 철호 씨. 시간 있으면 내
일 정오에 이 장소에서다시 만나요. 시간 있죠?”

한철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좋은 꿈꾸세요.”

채선혜는 한철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광장의 뒤쪽에 위치한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가 버리자 한철호는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 한 개비를 또 입에 물고 불을 붙여 피웠다. 그는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내던져 버렸다.

“저 여자…… 어째서 죽일 수 없는 것일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군용택시를 잡아타고
서둘러 울산 시청으로 돌아갔다.



시청에 도착한 한철호는 시청의 지하에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갔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술을 오지게 퍼마셔대어 퍼질러 자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
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민군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던 정부군이 아니라 술
에 중독된 주정뱅이 같았다.

깽판 같은 꼬락서니에 그는 바보 천치 같은 놈들. 좀 퍼마셔도 정도껏 퍼마셔
라며 속으로 외쳐대고는 바깥으로 나가 자가용 장갑차로 갔다.

그의 자가용 장갑차는 군인들을 싣는 장갑차보다 작았다. 당연할 수밖에. 한
사람 싣는 차가 여러 사람 싣는 차보다 큰 경우를 봤는가? 딱 하나 예외가 있다
면 봉봉주니어란 승용차 정도는 같잖게 깔아뭉개는 거대한 경주용 자동차일
것이다.

어쨌든, 한철호는 짐칸에 이불과 담요를 꺼내어 이부자리를 펼쳐 놓고 일찍
잠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낮에 만났던 채선혜란 여자 생각으로 쉽사리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려 하면 그녀의 얼굴이 생생히 떠올라 닫혀있던
눈꺼풀을 절로 올려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수면제나 먹어야겠군.”

한철호는 주머니에서 매그넘을 꺼내어 짐칸에서 파란색 약과 물통을 꺼냄과,
동시에 매그넘을 넣어 두었다. 그는 물통 뚜껑을 열어 수면제와 함께 물을 삼
키고 물통 뚜껑을 닫아 짐칸에 넣어버리고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
는 수면제를 먹어도 눈꺼풀이 잘 감기지 않았다. 30여분동안 눈감기 운동을 해
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새벽 5시가 다되어갈 무렵. 한철호는 기지개 대신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났다. 그의 이마에는 때 아닌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악몽을 꾼 건가…… 하필이면 죽은 부모님이 나타나는 꿈을 꾸다니…….”

그는 짐칸에서 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나
는 지금 심기가 매우 불편하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또렷이 써져 있었다.

이부자리를 정리한 그는 사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어 바깥으로 나가 새벽
의 신선한 공기를 쐬었다. 신선한 공기라 해봤자 허름해진 건물의 먼지와 저
멀리 온산공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이 섞여 호흡기 질환을 유발시키는 탁
한 공기로 둔갑해버린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은 온산공단의 공장들이 문을 닫으므로 먼지만이 신선한
공기와 섞인다. 단순히 미량의 먼지에 의해서 피해를 본다. 그 피해가 인체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일 따름이다.

한철호는 숨쉬기 운동을 한 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몸을 다 풀
고 난 그는 시청 주변의 화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청 바깥을 조금만 넘어
서면 전쟁을 황폐화된 파괴의 기운이 물씬 풍기지만, 시청 안의 화원을 둘러보
면 생명의 기운이 몸 전체에 전해진다. 바깥의 살기는 저리가라는 느낌이었
다. 그만큼 시청 안과 바깥은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에 빗대어 표현해도 손색
이 없었다.

한철호는 화원들 둘러보다가 따로 잘 가꾸어진 하얀색 국화가 심어진 화분을
발견했다. 그는 화분 앞에 쭈그려 앉아 화분을 유심히 보았다.

“…….”



약 10개월 전이었다. 한철호가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에서 울산으로 이사를 가
고 50을 훌쩍 넘긴 백발노인이 된 부모님을 홀로 모시며 살고 있었다. 그는 홀
로 부모님을 모시는 게 힘이 들긴 했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공수부대 전우들
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실업자이긴 했지만 부모님을 모시는 지극정성한 마음만큼은 한국
제일 기업의 사장이었다. 부모도 자기들을 지극정성으로 공경해주는 한철호
를 엘리트 사원을 대하듯이 끔찍이 아꼈다.

한동안은 편안했다.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는……

한철호의 부모님은 실업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식의 일자리를 구해보기 위해
공업탑 근처에 있는 직업소개소로 가려고 46번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 때 당
시는 한창 불경기라 전국 곳곳에 있던 실업자들이 정부의 과도한 정책에 반발
하여 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울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로 젊은이들이
모이는 대학가 근처에서 불같은 혈기를 발산하여 말썽이 일어나곤 했다.

한철호의 부모는 버스를 타며 한시라도 빨리 가서 자식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어서 빨리 버스가 공업탑 근처로 가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버스가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말았다. 버스 운전기사가 시
청 근처에 다다를 때 핸들을 틀더니 버스를 시청 쪽으로 돌진시켰다. 버스가
시청의 담벼락에 들이받는 순간, 엄청난 폭발과 함께 주위의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시청의 담벼락도, 버스도, 운전기사도, 승객들도, 그리고 한철호의 부
모님도……

이 사건은 짧은 시간에 대중매체를 통해 울산 전역에 급격히 퍼졌다. 허름한
단칸방의 집에서 살던 한철호는 80년대식 고물 라디오를 통해 그 소식을 접하
게 되었다.

“속보입니다. 오늘 오전 10시쯤에 울산 98 더 1375 46번 버스가 울산 시청 근
처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시청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재산피해는 버스
한 대와 시청의 담벼락이 무너진 것으로 끝났지만, 버스 안에 탑승한 모든 사
람들은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을 최근 전국적으로
과격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민군이란 단체의 소행으로 보고 있으며, 앞으로 이
들이 폭탄을 실은 버스를 이용한 자폭 테러를 시시때때로 감행할 것이라며 충
고하고 있습니다. 조사진들에 의하면 버스에서 폭약성분으로 밝혀진 약품이
검출되어 버스를 이용한 테러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버스 테러로 인한 사망자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철호는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그 때, 그 많은 이름들 중에서 한철호의 부모님
이름이 나왔다.

한철호는 그 순간, 라디오를 꺼 버렸다. 우리 아들 직업을 마련해주겠다면 큰
소리치고 직업소개소로 가던 그의 부모님은 숨을 거두기 전에 황천길로 가 버
렸다.

한철호는 그 사실을 차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
다. 그는 2일이 흘러서야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사실을 겨우 수긍했다.

그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술을 아무리 마셔대도 그
의 마음을 채우기는커녕, 오히려 텅텅 비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텅빈 마음속
에는 민군이란 존재에 대한 증오가 중금속처럼 쌓여갔다.

그가 이런저런 생활로 세월을 썩고 있을 무렵에 전우들로부터 정부가 민군을
제압해줄 군인을 모은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철호는 조건이고 뭐고 간에 당장
에 정부군에 입대했다. 부모를 죽인 민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는 뼈아픈 옛 기억을 되뇌며 부모님이 좋아하시던 하얀색 국화꽃을 떠올렸
다. 그는 마구잡이로 칼에 긁힌 듯한 흉터가 있는 오른손으로 순결하기 그지없
는 하얀색 국화꽃을 어루만졌다. 그의 오른손의 흉터는 송골매부대에 입대하
기 전의 피와 살이 깎이고 절망과 고통의 땀방울을 마신 흔적을 잘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다.

한철호는 이 상처를 자신의 소대원이나 상사 같은 군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이 상처를 보여주는 것은 곧 자신의 뼈아픈 기억을
떠벌리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 어느 누가 자신
의 뼈아픈 기억을 아무에게나 떠벌리고 다니겠는가? 다 숨기기에 급급할 뿐이
지.

어찌 되었거나, 한철호는 시청 광장에 세워져 있는 시계탑에 고개를 돌렸다.
시계의 시침이 어느 새 6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은 우중충한 검은색에서
연한 하늘색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는 어김없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요즘 따라 그는 담배를 피
우는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점점 한 개비씩 증가하다가 결국에는 하루에
한 갑을 다 날려버릴 정도로 변해버렸다. 그는 부모의 죽음이란 쓰라린 기억
을 담배연기와 함께 날려 버리고 싶어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이제 알콜 중독자
에서 흡연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그가 어제 다 피우다 만 담배 한 갑을 완전히 비우고 벤치에 앉아 잠깐의 여유
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땅딸보 같은 울산시장이 올가미를 피해 도망치는 돼지
처럼 허겁지겁 뛰어오며 손에 있던 무전기를 들고 오며 말했다.

“소장님이 당신을 바꿔 달랍니다.”

시장은 허리를 굽히며 공손한 태도를 갖추었다. 옛날은 시장이 군인에게 허리
를 굽힌 적이 없었다. 군인 역시 시장 같은 공무원에게 허리를 굽힌 적도 없었
다. 그러나 지금은 희한하게도 민군들은 제압할 힘이 없는 공무원들은 정부군
에게 허리를 연신 굽혀대야 했다. 그에 반해 송골매부대 출신의 군인들은 온
갖 귀한 대접을 받으며 새로운 귀족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현재 방위를 제외
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군인들이 송골매부대 소속이었다. 송골매 하면 옛날 스
타일을 고수하며 록큰’롤 음악을 부르는 그룹 이름으로 떠올릴 것이다. 배철수
가 송골매 멤버였다는 사실은 웬만한 중년층을 다 알 것이다.

그런 것은 고사하고, 송골매부대의 송골매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었
다. 송골매는 매과의 조류로서 4km나 떨어진 사물을 볼 수 있는 뛰어난 시력
과 먹이를 낚아채면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는 날카로운 발톱과 먹이를 사정없
이 물어뜯는 날카로운 부리를 가지고 있는 새다. 이 송골매의 타겟에 걸리는
생물들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만큼 송골매가 빠르고 정확하게 사냥한다
는 뜻이다. 송골매부대란 이름도 이러한 송골매같은 군인이 되자는 뜻에서 지
은 것이다.

어쨌든 간에, 지금은 한철호 같은 군인의 입김이 상당히 강했다. 어느 정도냐
면 별 2개를 단 소장이 장관급 되는 정치인의 힘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별 4개는 뻔하다. 대통령과 맞먹는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하지만 군인은 어디까지나 군인이었다. 상사의 명령에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
이 있다 하더라도 묵묵히 입 닥치고 거침없이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 바로 군
인이었다.

소대장이 한철호도 그런 전형적인 군인들 중 하나였다. 조금 무식한 면이 있
긴 하지만 한평생 남들 앞에서 거짓말은 가끔씩 했지만, 군대에서 거짓말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한철호는 시장이 주는 무전기를 받았다.

“한철호 소대장. 잘 있었나?”

무전기를 받던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충성! 소장님께서 친히 제 이름을 불러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괜찮네. 그보다도 그쪽 사정은 어떤가?”

“양호합니다!”

“다행이군. 요즘 들어 자네의 공적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네. 나중에 기회
가 된다면 중대장으로 승진시켜달라고 군부에 건의하겠네.”

“충성!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하하하! 태도가 아주 좋군. 내가 자네에게 말할 게 몇 가지 있네.”

그는 벤치에 편안히 앉았다.

“말씀하십시오.”

“일단은 자네가 있는 울산 쪽이 온산 화학공단을 비롯한 그 주위의 공업단지
들에 있는 민군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의 민군들은 그 뿌리를 모조리 뽑았
다는 것이네. 온산공단 쪽은 자칫하면 울산이 모조리 날아가 버리는 대참사가
발생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은 아직까지 놔두고 있는 상태네. 일단은 전
국적으로 진압을 끝낸 군대가 각 지역에 주둔하는 일부 군인들을 제외하고 곧
울산으로 집결할 것이네. 자네는 울산시청을 지키면서 주위에 민군이 없나 수
색해보게. 그것만 하면 되네. 그동안 틈틈이 쉬는 것도 자네와 대원들을 위해
서 좋을 것 같네. 나는 이쯤에서 말을 끝내지. 만약에 연락할 일이 있으면 다
시 연락하겠네. 아마도 다시 연락할 때가 12월쯤일 걸세.”

“네! 충성!”

한철호는 무전기를 끊는 순간까지도 상사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그는 시
장에게 무전기를 주며 물었다.

“소대원들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아직도 나이트 클럽에 있습니다.”

그는 말없이 시청의 지하에 있는 나이트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트클럽 안
에는 군인들이 모여 수다를 떨어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어수선해보였
다.

그런 그들의 꼬락서니를 눈꼴사납게 지켜보던 한철호는 천지를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군인들에게 외쳤다.

“모두 10행 10열로 집합!”

군인들은 술기운에 절인 듯한 표정으로 약간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들은 아마도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즐긴 모양이었다.

그들은 한철호의 명령에 따라 10행 10열로 맞추며 집합했다. 한철호는 그들
을 하나씩 세밀하게 살펴보고는 약간 거슬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듣는다! 방금 소장님으로부터 우리 소대가 시처오가 그 주
변만 수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소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우리
는 또다시 민군을 죽이러 가야 된다! 그 전까지 우리 소대에서 10명씩 교대하
며 주변을 수색할 것이다! 만약 교대를 해주지 않거나 농땡이 피우는 녀석들
은 내가 특별지도를 해주겠다! 하루에 10명씩 주변을 수색하며 고대하고 그 나
머지 90명은 편히 쉰다! 알았나!”

“네!”

“좋다. 그럼 오늘부터 시행한다! 순서는 너희들이 알아서 정하도록!”

한철호가 나가자 군인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누가 먼저 수색하러 갈지 순서를 정하느라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시청 밖으로 나온 한철호는 유리창을 보며 외모를 정리하고 자가용 장갑차 안
으로 들어가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도로로 나서 군용택시를 잡았다. 그런
데 공교롭게도 어제 만났던 그 운전기사가 그를 반기며 손을 흔들어댔다. 운전
기사는 씨익 웃으며 한철호가 공업탑  로타리 근처의 명성음악사로 데려달라
고 하자, 히이하~ 하는 괴성을 질러대며 폭주운전을 했다. 한철호는 역시나 팔
짱을 낀 채 묵묵히 운전기사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택시가 엄청난 속도로 단시간에 명성음악사에 도착했다. 요금은 2000원으로
어제보다 200원 더 싸게 나왔다.

한철호는 조금이라도 더 싸게 요금을 낸 것에 대해 별 다른 기쁨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운전기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물어보았다.

“궁금한 게 있다. 왜 넌 운전할 때마다 괴성을 질러대는 거지?”

운전기사는 마치 뇌성마비 장애자를 흉내내는 것처럼 이유 없이 히쭉거리며
말했다.

“킥킥. 그건 이유가 있죠. 제 나이가 올해 서른 일곱입니다. 한 3년 전이었던
가? 그때 당시에 실업자였거든요. 직장에서 짤리기 전 까지는 금속을 부품 따
위로 제조하는 일을 했었는데, 일하다가 재수 없게도 파편조각이 튀어서 제 머
리에 박혔죠. 그래서 응급실에 실려 가서 수술을 받았거든요. 아 근데 뇌는 멀
쩡했는데 돌팔이 의사X끼가 치료비 더 받아 쳐 먹으려고 레이저로 수술해버
렸지 뭡니까! 그 X발 X끼 때문에 수술비를 무려 3천만 원이나 뜯겼습니다! 세
상에 뇌수술 한번 하는데 그렇게나 쳐 받아먹습니까?”

“요즘은 눈 달려도 는 떼여가는 세상이다. 하물며 그런 사기 따위는 말할 나위
도 없지.”

한철호는 운전기사의 하소연이 담긴 말을 냉정히 받아들였다. 운전기사는 혼
자서 욕질을 해대며 택시를 몰고 가 버렸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묵묵한 태도를 취하며 건널목 맞은편에 있는 꽃가게
를 향해 걸어갔다.

꽃가게로 들어선 그는 꽃다발들을 예쁘게 장식하고 있는 주인아줌마에게 하
얀 국화꽃 한 다발을 달라고 했다. 옛날에 꽃가게는 꽤 번창했었지만, 요즘은
죽은 자를 위로하기 위해 꽃을 사가는 사람들밖에 오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소중한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한철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하얀
국화꽃을 사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꽃을 가져다 놓을 부모님의 묘가 없었
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국화꽃을 산 것일까? 그것은 오늘 정오에 만날
채선혜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한철호는 하얀 국화꽃이 가득 담긴 꽃다발을 들고 울산대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채선혜를 만난다는 설레이는 마음과 주위의 허름한 건물에 민군
이 있을까 하는 경계적인 마음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울산대공원의 입구에 도착한 그는 어제 보았던 공원의 생태계를 손톱보다 작
은 들개를 하나씩 세듯이 세밀히 관찰했다. 자연이란 것은 변화 없는 순환의
연속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를 보라! 끊임없는 변화와 뒤틀림과 왜곡과 축소와 제동
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이것들은 발전된 문명을 안겨주지만, 자기가 좋
은 문명을 누리기 위해 헐뜯고 죽이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지금 한국의 꼴을
보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
는 정부와 민간인. 어느 한 쪽이 양보하여 서로 타협한다면 서로 피를 흘려가
며 죽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철호는 꽃다발을 들고 어제 채선혜와 만났던 콜로세움형의 광장의 빈자리
에 앉아 이어폰을 빼고 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정오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정오가 되었다. 한철호는 따스하게 비치는 햇살 아래에 고개를 숙이고 잠들
어 있었다. 날카로운 비수같이 변해버린 찬 바람에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났다.

“떠는 모습이 조금 불쌍하게 보이네요.”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같이 잔잔한 맑은 목소리였다.

한철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눈빛이 조금 흐리멍텅했
다.

“…….”

“기다리시느라 잠드셨나보네요. 일찍 온 모양이죠? 그런데 그 하얀 국화꽃은
어디서 나셨어요?”

채선혜가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철호에게 물었다. 한철호는 꽃다발을
그녀에게 주며 말했다.

“꽃가게에서 일을 도와준 대가로 얻은 거야.”

그는 돈을 주고 샀다는 말을 쏙 빼고 그렇게 말했다. 하얀 국화꽃이 가득 담
긴 꽃다발을 받은 채선혜의 얼굴이 햇빛처럼 밝아졌다.

“저를 위해서 이런 걸…… 고마워요. 우리 같이 공원 산책이나 할까요?”

“…….”

한철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꽃다발을 든 채선혜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
기면서 공원을 산책했다. 중천에 떠 있는 태양도 이들의 분위기보다 밝을 수
는 없었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NTZ™님의 댓글

NTZ™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앞쪽 부분이 몽실언니 어느부분에 나오는 장면 가탕 ㅜ_ㅜ;;

profile_image

GodOfGods님의 댓글

GodOfGods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ㅡㅡ;; 몽실언니에서 나오는 것이랑 달라여 -_-..;;(앞쪽 부분이 그렇다구염 ㅡㅡ?;; 전 별로 ㅡㅡ;;)

Total 2,713건 146 페이지
소설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538 카이얀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61 12-17
537 후우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64 12-17
열람중 카이얀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34 12-17
535 카이얀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35 12-17
534 ♡베르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8 12-17
533 카이얀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77 12-17
532 빛과 소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90 12-17
531 카리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4 12-17
530
순환 05 댓글4
ksodi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6 12-17
529 ★귀폭★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621 12-15
528 빛과 소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99 12-15
527 ★귀폭★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60 12-15
526 NTZ™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582 12-15
525 빛과 소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369 12-15
524 커스리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98 12-15

검색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접속자 집계

오늘
885
어제
919
최대 (2005-03-19)
1,548
전체
780,538
네오의 오! 나의 여신님.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