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G '아앗 이건 나만의 이야기!' [블라디보스톡 점령 & 특명!! 베르단디를 구해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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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가 많이 누그러진 정원은 고요했다. 안나의 끝없는 설득과, 소고집 덕택에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철회해야만 했다. 울드가 계속 억지를 쓰며 끝까지 저항해보려 했지만 상대방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베르단디와 안나, 케이이치, 페이오스만 그 병을 맞이해야한다는 투로 말하였기에 조금 화가 났지만 안나의 고집을 차마 꺾진 못했다. 그녀의 말이 너무 옳았기 때문이다.
“베르단디씨는 정말 아름답고, 성격도 좋은 분이다. 하지만 병에 걸린 자신을 걱정한다고 달려든 언니한테 자신의 병이 옮는 것을 보면. 과연 좋아라 할까?”
“하, 하지만.”
“시끄럽다. 넌 어떻게 네 엄마와 그리 똑같나?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말아야 할 때 가리지 않고 움직이질 않나.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야지. 황소고집을 피우지 않나?”
‘그건 댁도 만만치 않거든?’
안나의 이어지는 따가운 질책에 울드는 정신이 반쯤은 멍해져 옴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베르단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역시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돌보겠다고 나섰다가, 도리어 전염되는 장면은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베르단디의 간호를 포기한 울드는 안나에게 이 엉뚱한 마법진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안나는 기뻐하며 끝내 수락하고 만 울드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고맙다. 반드시 베르단디는 내가 치료하고 말겠다.”
“아아. 그런데...1급신인 페이오스는 괜찮은 거냐? 1급신을 주로 노려서 전염시킨다며?”
“이 어둠귀신의 알+는 분명 1급신에게 붙는 매우 특수한 놈이긴 한데. 한번 1급신의 몸에서 기생하다가 떨어져 나오면 다시 1급신에게 붙는 행동을 하진 않아. 힘이 모자라거든, 대신에 좀 더 쉬운 상대에게 붙지. 예를 들자면 저기~~모 여신이 번개를 내리치며 깽판 칠까봐 두려워서 철제방패(?)뒤로 숨어버린 스쿨드같은 초급여신이랄지.”
“............”
울드는 안나가 가리킨 곳에 스쿨드가 몸을 웅크린 채. 밤페이의 철모로 온몸을 가리고 쭈그리고 앉아 눈만 빼꼼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울드는 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는 무언의 협박이 담겨져 있어 스쿨드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웃음이 끝나기 무섭게 안나가 입꼬리를 올리고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새하얀 눈 색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힘이 넉넉하지만. 2급이라서 제한을 받고 있는 여신, 기타 내 잡것 같은 부하들.”
“잡것이라니요! 너무해요 까삐딴.”
“잡것. 아닙니다. 빵입니다.”
안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반이 미소를 지으며 참호에서 빠져나왔고,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 있던 옌지는 의미 해석 불가능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빵을 손으로 흔들어 보이며 나왔다. 그 두사람의 몰골은 정말 눈밭에서 작전 지시에 따라 움직이다 철수하는 병사들의 옷 같았다. 온통 흙먼지와 눈으로 뒤덮인 그들의 몰골을 보고 울드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당연하고 말고.’
안나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울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건성으로 안나의 말을 받아주며 일어섰다. 울드는 처음 보는 다양한 패턴의 제스처를 몇 번 취하며 평범한 인간들은 거의 들어본 적 없는 고어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팔과 이마에서 푸른색 섬광이 번쩍 튀어나와 바닥을 뒤덮기 시작했다. 1급신 못진 않으나 그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섬광이 뒤덮인 눈밭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모조리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신사 주위는 온통 하얀 벌판이었으나, 케이일행의 집만큼은 싱그러운 풀밭과, 황토색 흙이 드러나 보이는 완벽한 정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쿨드는 울드의 마술능력을 바라보며 큰 충격에 휩싸였다.
‘난. 언제쯤 저렇게 될까?’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자신의 능력에 본인이 익숙지 않은 스쿨드는 기가 죽어 정말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쀼루퉁해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베르단디가 아프다는 사실도 잊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씨만 따뜻해진다면 가을 날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신사는 정말 싱그러운 풀냄새가 늘씬 풍겨왔다. 땅바닥도 젖은 바닥이 아니라 발로 차면 탁탁. 둔탁한 소리를 울리는 그런 바닥이었다.
“이 정도면 법술진을 그리는데 지장은 없군. 좋아! 스쿨드!! 이리와!!”
“어?”
“진 그리는데 좀 도와줘.”
“아, 알았어.”
스쿨드는 낮은 한숨을 내쉰 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달려갔다. 울드의 오라며 흔드는 손짓이 유난히 크고, 늠름하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번에 베르단디가 깨어나면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마법과, 여러 기술의 이론을 배워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행히 문제는 해결되었나 보네?”
하얗고, 빠질 데는 잘 빠지고, 들어갈 곳은 또 잘 들어간 베르단디의 전신을 허공에 띄워놓고 이리 저리 둘러보던 페이오스가 중얼거렸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문 두드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마당 쪽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울드의 “그쪽이 아니잖아!” 라는 핀잔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쿨드의 “울드나 잘봐! 그거 거꾸러 들었잖아?”라며 바로 받아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강력한 힘에 의해 땅바닥이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묘한 힘의 기운도 느껴졌다.
“문제없습니다. 케이씨께서는 인터넷 접속에 성공하셨답니까?”
“당신이 가리고 있는 문 뒤편에 있을 케이 씨한테 물어보셔~”
페이오스가 어깨를 도도하게 으쓱하며 베르단디의 허벅지를 관찰하는데 신경 쓰자 안나는 눈 하나만 보일정도로 살짝 문을 열고 복도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표정을 하고 침을 연신 꿀꺽 삼키며 무릎을 꿇고 차가운 바닥에 정좌하고 있는 케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나는 혹시 베르단디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는지 속으로 거리계산을 하며 그를 관찰했다. 케이는 안나의 갈색 머릿결이 포착되자 곧바로 다가와 베르단디의 상태를 지켜보려 했다.
“베르단..커헉!”
퍼퍽.
케이의 외침이 도중에 끊겼다. 문을 드르륵 열고 베르단디를 부르는 케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안나는 문을 그대로 옆으로 확 밀어버렸고, 덕택에 케이는 하얀 몸매를 과시한 채 허공에 잠들어 있는 베르단디를 간발의 차이로 보지 못했다. 그의 머리는 문 사이에 끼여 끔찍한(?)고통을 주었다. 안나는 자신이 밀고 있는 미닫이문에 더욱 힘을 세게 쥐며 협박조로 내뱉었다.
“당장 안 나가욧?!!”
“아, 알았어!”
케이는 아직도 끔찍한 고통이 울려 퍼지는 머리를 소중히 매만지며 오만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저렇게도 걱정이 될까? 안나는 케이의 맑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호기심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과 묠니르에 대해서 또 한 번 떠올렸다. 지금은 일 때문에 매번 잊고 살지만 그녀는 절대 묠니르를 포기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아플 때나,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항상 곁에 있었지만 저런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다. 단지 걱정이라는 감정이었을 뿐. 자신의 심장도 쥐어 뜯겨지는 것 같다는 케이의 입장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가득 누르며 안나가 눈살을 찌푸린채 말했다.
“당신 쫓아낸 이유가 따로 있으니까. 그리 알아둬.”
“왜?”
“어둠귀신의 알+는 눈에 잘 띄지 않기 위해 머리가 아닌 허벅지를 택했거든, 더군다나 나와 울드는 지금 그녀의 몸을 일일이 확인해야할 참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옷은 벗겨져야 하기 마련. 그런 곳에 미쳤다고 남자를 들여보내겠는가? 이거 이~거 아까 동무는 베르단디 걱정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문을 무작정 열고 날 돌파하려 했지만 나 없었으면 어쨌겠어?”
안나의 설명에 케이는 심장 약한 자신은 베르단디의 적나라한 바디를 바라보고 그대로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며 농담 반이 담긴 쓴웃음을 토해냈다. 한편으론 그녀의 알몸이란 소리에 왠지 모를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케이의 생각을 그대로 읽기라도 했는지 안나가 주먹을 쥐고 살짝 그에게 알밤을 먹였다. 탱~하고 머릿속이 맑게 울리며 온갖 잡생각과, 베르단디의 적나라한 바디(??)가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 안나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트워크 접속 상태는 어떻게 되었어?”
“우리 집은 무선랜 형식과, UTP 케이블을 이용한 케이블이야...일반 가정집들처럼 광랜(광통신)으로 깔려 있지는 않으니까. 여러 모로 애를 먹고, 좀 느리지만 충분하지 않을까?”
“그거면 충분해. 집주인양반. 아~혹시 채팅 칸으로 들어가자마자 낯선 언어가 눈에 비춰지지 않았나?”
“아아....아랍어 같은 것?”
케이는 조금 전 인터넷으로 접속해 그녀가 알려준 그라스나야(붉은)넷에 접속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랍어는 분명 아니었으나 서남아시아 사람들의 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아랍어로 착각할 아프가니스탄 언어가 난무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케이는 독일어에는 관심 있어도, 이런 나라의 언어는 처음이었기에 그저 이슬람 언어인가 보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프간인들이 쓰는 고유언어였다.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덕택에 과거 무지한 까례이스키(한국인, 혹은 고려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의 게릴라들에게 잡혀간 인질들을 구한다고 통역을 담당할 아랍어 교수를 찾지 않았던가? 그런 무지한 자들이 있었음을 떠올린 안나는 케이의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그건 아랍어가 아냐. 만약 그 언어들이 45줄 정도 떴으면 곧 바로 영어, 혹은 우리 러시아어로 미르(농촌 공동체를 의미. 여기서 안나가 밝힌 미르란 인터넷 상의 그라스나야 대원들간의 공동체를 의미)라고 쓰인 설정란을 찾아서 클릭. 이 작업들이 다 끝났으면 곧바로 채팅에 들어가요.”
“뭐라고 해야 하는데?”
케이가 눈만 껌뻑이며 채팅을 요구하는 안나에게 물었다. 안나는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물론 혹시라도 케이가 베르단디의 알몸을 보게 될 우려 때문에 문을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을 풀지는 못했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약물 같으니! 좀 더 강한 진정제는 없나? 안나는 이 약을 만든 이에게 저주 아닌 저주와 불만을 토로하며 그리웠던 이름을 꺼냈다. 안나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케이이치도 놀라게 만들었다.
“당장 묠니르 소환 준비 하라고 하세요. 큭! 바이러스 관련 데이터도 전부 가져오고....”
“아, 알았어. 그런데 괜찮은 거야? 지금 몸이 비틀거리고 있어.”
훗! 이 남자. 왜 그렇게 여신들이 좋아서 환장(?)하는지 알만 하군. 자기 자신은 잘 모르지만 이런 남자의 귀여운(?)면모에 여자들이 푹 빠질 만 하군. 저 바보 같은 이반과 동격의 얼굴만 빼면 말이다. 안나는 속으로 실소하며 항상 무표정의 묠니르와 대조를 해보며 혼자 키득거렸다. 케이는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 했나 싶어 어리둥절해 있었다. 베르단디와 케이의 관계를 떠올리며 조금 부러운 눈빛을 하고 그를 바라보던 안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문을 닫았다.
드르르륵.
페이오스는 여전히 베르단디의 하얗고, 잘 빠진 몸매에 감탄하며 부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안나 또한 베르단디의 성격과 몸매를 떠올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여성인데도 너무도 다른 그녀의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한편으론 지금 이렇게 잠자는 숲속의 공주 마냥 깨어나길 기다리며 자고 있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페이오스는 두 눈에 안쓰러움을 집어넣은 채 안나를 응시했다. 안나는 머리를 감싼 채 털썩 주저앉아 벽에 기댔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정말로 이런 괴물 같은 병은 안 만들테니...아니 안 만들고 있어요.”
“...............”
“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만 둬요. 나도 그걸 매우 잘 알고 있고, 적에게 이런 것이 넘겨질 것을 두려워해서...분명히 폐기처분시켰어요.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과거 천계의 어두운 구석을 정복하고, 담당하는 비밀의 해결기관인 외인부. ‘정보부’에서 근무했던 안나는 페이오스에게 털어 놓았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들추어냈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베르단디의 상태에 대한 걱정 때문일까? 이 어둠귀신의 알+는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 수 있다는 치명적인 능력과 한번 기생을 하면 숙주는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은밀성(?) 덕택에 과거 그쪽 세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안나의 지휘 하에 비밀리에 만들어진 대마계전용 전자병기였다. 새로운 천마대전이 일어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마계의 시스템 ‘니드백’을 파멸시키고 온 악마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계획 하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병기였다. 물론 이 능력을 알게 된 신이 무기를 폐기처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결국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어떻게?
“어떻게 RLO(러시아 해방 단체)따위에게 넘어간 것일까요?”
“그것보단. 어떻게 그럼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된 무장단체(?)가 그걸 가지고 있느냐지. 너희들이 싸우고 있다는 적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아야 돼.”
“............”
안나는 이해 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페이오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리어 부디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설명이라도 해달라는 안나의 애절한 눈빛에 페이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베르단디의 왼쪽 허벅지로 시선을 돌렸다. 허벅지의 주위는 시퍼렇게 멍이 든 것처럼 잔뜩 물들여 있었고, 이 멍의 중심에는 평범한 어둠귀신의 알들과는 뭔가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암모나이트란 고생물을 닮은 어둠귀신의 알과는 다르게 이 어둠귀신의 알은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러나 안나가 자신에게 설명한 모든 것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막 좁쌀 크기에서 메추리 알 크기로 조금씩 3차 변형을 일으키고 있는 그 꿈틀거리는 알의 생김새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어둠 귀신의 알이라든지, 건강에 치명상만 끼치지 않으면 자신이 만든 자연제초제로 죽여버릴텐데...페이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페이오스는 이런 천계의 구시대의 병기(안나의 말에 의하면)를 지닌 RLO에 대한 의문심을 떨치지 못하고 그녀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안나. RLO에 대해서 설명 해봐요. 아직 치료는 못하고 있잖아요?”
페이오스의 물음에 안나는 길게 끌 것도 없다는 듯 조금 신경질이 담겨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약기운이 조금 풀려 금단증상같은 것이 몰려오는 마약환자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페이오스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넘어 갔다. 오히려 분노하는 안나로 돌아온다는 생각에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안나는 오늘처럼 진지하고, 가출도 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눈살을 찌푸려도 이런 자연적이 모습이 낫다고 판단했다.
“내 말 듣고 있는 겁니까? 페이오스??”
“아 미안. 잠깐 딴 생각을...”
안나는 이런 안좋은 상황에 미소를 드리운 페이오스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RLO는 표면적으로는 체첸과 그루지야(현재 러시아와 독립을 중심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분쟁지역), 그리고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단체입니다. 목적은 체첸과 그루지야, 시베리아를 무력을 통한 러시아로부터의 영향에서 해방.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국가 탄생. 그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얘기가 다르지.”
“?? 실상?”
안나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RLO는 세계를 떡 주무르듯 주무른다는 미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묘한 단체였다. 이 신비감을 팍팍 풍기는 단체는 미국도 잘 알지 못하는 병기로 무장하고 있고, 자신들 아래 있는 몇몇 신흥방산기업들을 통해 여러 분쟁지역과, 강대국에 최첨단 무기와, 구식 무기들을 팔고 있었다. 미국에서 아는지, 모르는 척 하는지 모르나, 그들은 과거 러시아를 지배했던 노몐끌라뚜라(고급 당원층)들과 마피아들이 주 세력이고, 기타 미국&러시아에 저항하는 반군출신들로 이뤄져 있다고 표면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병력 구성은..킥! 러시아가 그토록 자랑하던 키로프급과, 지금은 많이들 잊은 야마토, 아이오와같은 재래식 병력, 수호이와, 미그, 기타 방공모함등으로 이뤄져 있기도 하고,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병기를 가지고 있죠.”
“듣도, 보도 못한 병기?”
끄덕 끄덕.
“문제는 이 병기가...과거 마족들이 개발한 대테러병기라는 사실입니다.”
“뭐야 그건. 신마대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야?”
“그렇게 볼 수 있군. 어쨌든 그런 거지.”
반말과, 존칭이 혼란스럽게 오가는 안나는 더욱 아파오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며 페이오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계속 설명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젠장! 망할 두통만 아니라면. 안나는 애꿎은 벽에 주먹을 놀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 세계의 테러리스트 단체라고 보기는 굉장히 힘든 무기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킥! 방공모함이라니 이정도면 아예 국가 수준이라고 봐도 되죠. 허나 문제는..이런 거대 병기들을 숨길만 한 장소가 디멘션3에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놈들은 우리와 똑같은 다른 차원계의 녀석들입니다. 그것도 게이트를 통하지 않고, 힐드처럼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시공통로가 있는 녀석들. 지금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는 녀석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RLO...”
“.........”
“그리고 그들은 이 디멘션3뿐만 아니라 천계에도 크렉킹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걸까? 페이오스.”
“.............”
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RLO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끝내자 페이오스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다리를 꼬며 생각에 잠겼다. 오직 천계와 마계만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을 지니고 있으며, 굉장히 커다랗고 강대한 국가(페이오스의 생각 속에 자리잡은 러시아의 이미지는 이러했다.)의 병력을 저렇게 쪽도 못 쓰고 묵사발로 낼 정도라면? 막강한 병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인데....게다가 세레스틴도 겨우 해냈던 베르단디를 통한 유그드라실 공격..RLO란 작자들은 디멘션 3에서의 자신들의 입지 확장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천계와 마계 또한 노리고 있었다. 자살하고 싶은 이들이 아니라면 함부로 신과, 악마를 도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도발하고 있다. 그것도 디멘션 3를 통하는 통신망까지 완전히 마비시켜가며...그들은 무얼 원하는 것일까?
“그럼 안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죠?”
“그건....”
드르르륵!
“안나! 접속 OK!!! 방금 막 묠니르가 답변을 보냈어!! 지금 안나의 부하들과 함께 어떤 군 기지에 있...아!”
이런 젠장!! 왜 하필 이런 때에?! 안나는 경악하며 케이가 보고하러 온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몸을 일으켰다. 저 바보 같은 남자가 드디어 사고를 치고 만 것이었다. 케이는 얼굴이 빨갛게 익어 증기를 내뿜을 정도로 멍하니 서서 베르단디의 전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페이오스는 자신의 온 몸을 훑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의 시선을 보고 똑같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살림용 에이프릴(앞치마)로 급하게 몸을 가려보지만....
“미, 미안 보, 보고 싶어 본 것이...”
“쵸르트(빌어먹을 자식)!!!이런 자본주의 변태성인동영상에 물든 변태자식아!! 네 이 자식 일부러 보고한답시고 쳐들어온 거지! 젠장!!”
얼굴이 홍당무가 된 케이에게 곧이어 안나의 분노가 가득 담긴 욕설이 튀어나왔다. 러시아어, 일본어 할 것 없어 온갖 언어가 혼합이 된 안나의 분노는 케이의 정신을 더욱 멍하게 만들었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졌다. 이제 안나는 케이의 잘못을 모든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로 증폭시켜 탓하며 그에게 사회주의의 참맛(?)을 세뇌시키는데 이르고 있었다. 물론 이미 멍해진 케이에겐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분명 자신도 모르게 베르단디의 알몸에 취해 멍하니 상상만 하고 있을 것이다.페이오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물론 저 소심한 남자(?)는 너무도 기쁜 마음에 저런 변태로 딱 몰릴 행동을 미처 생각도 못해보고 했을 것이다. 케이는 그런 남자였다. 베르단디에 관한 일이라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그런 남자였다...페이오스는 계속 야단을 맞고 있는 케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본모습으로 돌아온 안나는 매우 기쁘다는 듯 친히 그를 밟아주겠다(?)는 용의를 밝히고 있었지만 몸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다.
'그냥 저런 변태. 확 밟아버리지는.'
페이오스는 베르단디의 온몸을 훑어내린(?)케이의 시선을 떠올리며, 베르단디가 들었으면 무지 슬퍼할 말을 내뱉었다. 겉으론 드러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베르단디씨는 정말 아름답고, 성격도 좋은 분이다. 하지만 병에 걸린 자신을 걱정한다고 달려든 언니한테 자신의 병이 옮는 것을 보면. 과연 좋아라 할까?”
“하, 하지만.”
“시끄럽다. 넌 어떻게 네 엄마와 그리 똑같나?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말아야 할 때 가리지 않고 움직이질 않나.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야지. 황소고집을 피우지 않나?”
‘그건 댁도 만만치 않거든?’
안나의 이어지는 따가운 질책에 울드는 정신이 반쯤은 멍해져 옴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베르단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역시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돌보겠다고 나섰다가, 도리어 전염되는 장면은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베르단디의 간호를 포기한 울드는 안나에게 이 엉뚱한 마법진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안나는 기뻐하며 끝내 수락하고 만 울드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고맙다. 반드시 베르단디는 내가 치료하고 말겠다.”
“아아. 그런데...1급신인 페이오스는 괜찮은 거냐? 1급신을 주로 노려서 전염시킨다며?”
“이 어둠귀신의 알+는 분명 1급신에게 붙는 매우 특수한 놈이긴 한데. 한번 1급신의 몸에서 기생하다가 떨어져 나오면 다시 1급신에게 붙는 행동을 하진 않아. 힘이 모자라거든, 대신에 좀 더 쉬운 상대에게 붙지. 예를 들자면 저기~~모 여신이 번개를 내리치며 깽판 칠까봐 두려워서 철제방패(?)뒤로 숨어버린 스쿨드같은 초급여신이랄지.”
“............”
울드는 안나가 가리킨 곳에 스쿨드가 몸을 웅크린 채. 밤페이의 철모로 온몸을 가리고 쭈그리고 앉아 눈만 빼꼼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울드는 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는 무언의 협박이 담겨져 있어 스쿨드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웃음이 끝나기 무섭게 안나가 입꼬리를 올리고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새하얀 눈 색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힘이 넉넉하지만. 2급이라서 제한을 받고 있는 여신, 기타 내 잡것 같은 부하들.”
“잡것이라니요! 너무해요 까삐딴.”
“잡것. 아닙니다. 빵입니다.”
안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반이 미소를 지으며 참호에서 빠져나왔고,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 있던 옌지는 의미 해석 불가능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빵을 손으로 흔들어 보이며 나왔다. 그 두사람의 몰골은 정말 눈밭에서 작전 지시에 따라 움직이다 철수하는 병사들의 옷 같았다. 온통 흙먼지와 눈으로 뒤덮인 그들의 몰골을 보고 울드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그렇게 무서웠나?’
‘당연하고 말고.’
안나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울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건성으로 안나의 말을 받아주며 일어섰다. 울드는 처음 보는 다양한 패턴의 제스처를 몇 번 취하며 평범한 인간들은 거의 들어본 적 없는 고어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팔과 이마에서 푸른색 섬광이 번쩍 튀어나와 바닥을 뒤덮기 시작했다. 1급신 못진 않으나 그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섬광이 뒤덮인 눈밭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모조리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신사 주위는 온통 하얀 벌판이었으나, 케이일행의 집만큼은 싱그러운 풀밭과, 황토색 흙이 드러나 보이는 완벽한 정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쿨드는 울드의 마술능력을 바라보며 큰 충격에 휩싸였다.
‘난. 언제쯤 저렇게 될까?’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자신의 능력에 본인이 익숙지 않은 스쿨드는 기가 죽어 정말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쀼루퉁해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베르단디가 아프다는 사실도 잊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씨만 따뜻해진다면 가을 날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신사는 정말 싱그러운 풀냄새가 늘씬 풍겨왔다. 땅바닥도 젖은 바닥이 아니라 발로 차면 탁탁. 둔탁한 소리를 울리는 그런 바닥이었다.
“이 정도면 법술진을 그리는데 지장은 없군. 좋아! 스쿨드!! 이리와!!”
“어?”
“진 그리는데 좀 도와줘.”
“아, 알았어.”
스쿨드는 낮은 한숨을 내쉰 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달려갔다. 울드의 오라며 흔드는 손짓이 유난히 크고, 늠름하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번에 베르단디가 깨어나면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마법과, 여러 기술의 이론을 배워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행히 문제는 해결되었나 보네?”
하얗고, 빠질 데는 잘 빠지고, 들어갈 곳은 또 잘 들어간 베르단디의 전신을 허공에 띄워놓고 이리 저리 둘러보던 페이오스가 중얼거렸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문 두드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마당 쪽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울드의 “그쪽이 아니잖아!” 라는 핀잔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쿨드의 “울드나 잘봐! 그거 거꾸러 들었잖아?”라며 바로 받아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강력한 힘에 의해 땅바닥이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묘한 힘의 기운도 느껴졌다.
“문제없습니다. 케이씨께서는 인터넷 접속에 성공하셨답니까?”
“당신이 가리고 있는 문 뒤편에 있을 케이 씨한테 물어보셔~”
페이오스가 어깨를 도도하게 으쓱하며 베르단디의 허벅지를 관찰하는데 신경 쓰자 안나는 눈 하나만 보일정도로 살짝 문을 열고 복도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표정을 하고 침을 연신 꿀꺽 삼키며 무릎을 꿇고 차가운 바닥에 정좌하고 있는 케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나는 혹시 베르단디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는지 속으로 거리계산을 하며 그를 관찰했다. 케이는 안나의 갈색 머릿결이 포착되자 곧바로 다가와 베르단디의 상태를 지켜보려 했다.
“베르단..커헉!”
퍼퍽.
케이의 외침이 도중에 끊겼다. 문을 드르륵 열고 베르단디를 부르는 케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안나는 문을 그대로 옆으로 확 밀어버렸고, 덕택에 케이는 하얀 몸매를 과시한 채 허공에 잠들어 있는 베르단디를 간발의 차이로 보지 못했다. 그의 머리는 문 사이에 끼여 끔찍한(?)고통을 주었다. 안나는 자신이 밀고 있는 미닫이문에 더욱 힘을 세게 쥐며 협박조로 내뱉었다.
“당장 안 나가욧?!!”
“아, 알았어!”
케이는 아직도 끔찍한 고통이 울려 퍼지는 머리를 소중히 매만지며 오만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저렇게도 걱정이 될까? 안나는 케이의 맑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호기심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과 묠니르에 대해서 또 한 번 떠올렸다. 지금은 일 때문에 매번 잊고 살지만 그녀는 절대 묠니르를 포기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아플 때나,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항상 곁에 있었지만 저런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다. 단지 걱정이라는 감정이었을 뿐. 자신의 심장도 쥐어 뜯겨지는 것 같다는 케이의 입장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가득 누르며 안나가 눈살을 찌푸린채 말했다.
“당신 쫓아낸 이유가 따로 있으니까. 그리 알아둬.”
“왜?”
“어둠귀신의 알+는 눈에 잘 띄지 않기 위해 머리가 아닌 허벅지를 택했거든, 더군다나 나와 울드는 지금 그녀의 몸을 일일이 확인해야할 참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옷은 벗겨져야 하기 마련. 그런 곳에 미쳤다고 남자를 들여보내겠는가? 이거 이~거 아까 동무는 베르단디 걱정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문을 무작정 열고 날 돌파하려 했지만 나 없었으면 어쨌겠어?”
안나의 설명에 케이는 심장 약한 자신은 베르단디의 적나라한 바디를 바라보고 그대로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며 농담 반이 담긴 쓴웃음을 토해냈다. 한편으론 그녀의 알몸이란 소리에 왠지 모를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케이의 생각을 그대로 읽기라도 했는지 안나가 주먹을 쥐고 살짝 그에게 알밤을 먹였다. 탱~하고 머릿속이 맑게 울리며 온갖 잡생각과, 베르단디의 적나라한 바디(??)가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 안나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트워크 접속 상태는 어떻게 되었어?”
“우리 집은 무선랜 형식과, UTP 케이블을 이용한 케이블이야...일반 가정집들처럼 광랜(광통신)으로 깔려 있지는 않으니까. 여러 모로 애를 먹고, 좀 느리지만 충분하지 않을까?”
“그거면 충분해. 집주인양반. 아~혹시 채팅 칸으로 들어가자마자 낯선 언어가 눈에 비춰지지 않았나?”
“아아....아랍어 같은 것?”
케이는 조금 전 인터넷으로 접속해 그녀가 알려준 그라스나야(붉은)넷에 접속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랍어는 분명 아니었으나 서남아시아 사람들의 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아랍어로 착각할 아프가니스탄 언어가 난무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케이는 독일어에는 관심 있어도, 이런 나라의 언어는 처음이었기에 그저 이슬람 언어인가 보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프간인들이 쓰는 고유언어였다.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덕택에 과거 무지한 까례이스키(한국인, 혹은 고려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의 게릴라들에게 잡혀간 인질들을 구한다고 통역을 담당할 아랍어 교수를 찾지 않았던가? 그런 무지한 자들이 있었음을 떠올린 안나는 케이의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그건 아랍어가 아냐. 만약 그 언어들이 45줄 정도 떴으면 곧 바로 영어, 혹은 우리 러시아어로 미르(농촌 공동체를 의미. 여기서 안나가 밝힌 미르란 인터넷 상의 그라스나야 대원들간의 공동체를 의미)라고 쓰인 설정란을 찾아서 클릭. 이 작업들이 다 끝났으면 곧바로 채팅에 들어가요.”
“뭐라고 해야 하는데?”
케이가 눈만 껌뻑이며 채팅을 요구하는 안나에게 물었다. 안나는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물론 혹시라도 케이가 베르단디의 알몸을 보게 될 우려 때문에 문을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을 풀지는 못했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약물 같으니! 좀 더 강한 진정제는 없나? 안나는 이 약을 만든 이에게 저주 아닌 저주와 불만을 토로하며 그리웠던 이름을 꺼냈다. 안나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케이이치도 놀라게 만들었다.
“당장 묠니르 소환 준비 하라고 하세요. 큭! 바이러스 관련 데이터도 전부 가져오고....”
“아, 알았어. 그런데 괜찮은 거야? 지금 몸이 비틀거리고 있어.”
훗! 이 남자. 왜 그렇게 여신들이 좋아서 환장(?)하는지 알만 하군. 자기 자신은 잘 모르지만 이런 남자의 귀여운(?)면모에 여자들이 푹 빠질 만 하군. 저 바보 같은 이반과 동격의 얼굴만 빼면 말이다. 안나는 속으로 실소하며 항상 무표정의 묠니르와 대조를 해보며 혼자 키득거렸다. 케이는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 했나 싶어 어리둥절해 있었다. 베르단디와 케이의 관계를 떠올리며 조금 부러운 눈빛을 하고 그를 바라보던 안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문을 닫았다.
드르르륵.
페이오스는 여전히 베르단디의 하얗고, 잘 빠진 몸매에 감탄하며 부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안나 또한 베르단디의 성격과 몸매를 떠올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여성인데도 너무도 다른 그녀의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한편으론 지금 이렇게 잠자는 숲속의 공주 마냥 깨어나길 기다리며 자고 있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페이오스는 두 눈에 안쓰러움을 집어넣은 채 안나를 응시했다. 안나는 머리를 감싼 채 털썩 주저앉아 벽에 기댔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정말로 이런 괴물 같은 병은 안 만들테니...아니 안 만들고 있어요.”
“...............”
“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만 둬요. 나도 그걸 매우 잘 알고 있고, 적에게 이런 것이 넘겨질 것을 두려워해서...분명히 폐기처분시켰어요.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과거 천계의 어두운 구석을 정복하고, 담당하는 비밀의 해결기관인 외인부. ‘정보부’에서 근무했던 안나는 페이오스에게 털어 놓았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들추어냈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베르단디의 상태에 대한 걱정 때문일까? 이 어둠귀신의 알+는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 수 있다는 치명적인 능력과 한번 기생을 하면 숙주는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은밀성(?) 덕택에 과거 그쪽 세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안나의 지휘 하에 비밀리에 만들어진 대마계전용 전자병기였다. 새로운 천마대전이 일어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마계의 시스템 ‘니드백’을 파멸시키고 온 악마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계획 하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병기였다. 물론 이 능력을 알게 된 신이 무기를 폐기처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결국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어떻게?
“어떻게 RLO(러시아 해방 단체)따위에게 넘어간 것일까요?”
“그것보단. 어떻게 그럼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된 무장단체(?)가 그걸 가지고 있느냐지. 너희들이 싸우고 있다는 적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아야 돼.”
“............”
안나는 이해 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페이오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리어 부디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설명이라도 해달라는 안나의 애절한 눈빛에 페이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베르단디의 왼쪽 허벅지로 시선을 돌렸다. 허벅지의 주위는 시퍼렇게 멍이 든 것처럼 잔뜩 물들여 있었고, 이 멍의 중심에는 평범한 어둠귀신의 알들과는 뭔가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암모나이트란 고생물을 닮은 어둠귀신의 알과는 다르게 이 어둠귀신의 알은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러나 안나가 자신에게 설명한 모든 것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막 좁쌀 크기에서 메추리 알 크기로 조금씩 3차 변형을 일으키고 있는 그 꿈틀거리는 알의 생김새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어둠 귀신의 알이라든지, 건강에 치명상만 끼치지 않으면 자신이 만든 자연제초제로 죽여버릴텐데...페이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페이오스는 이런 천계의 구시대의 병기(안나의 말에 의하면)를 지닌 RLO에 대한 의문심을 떨치지 못하고 그녀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안나. RLO에 대해서 설명 해봐요. 아직 치료는 못하고 있잖아요?”
페이오스의 물음에 안나는 길게 끌 것도 없다는 듯 조금 신경질이 담겨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약기운이 조금 풀려 금단증상같은 것이 몰려오는 마약환자의 심정(?)을 잘 이해하는 페이오스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고 넘어 갔다. 오히려 분노하는 안나로 돌아온다는 생각에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안나는 오늘처럼 진지하고, 가출도 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눈살을 찌푸려도 이런 자연적이 모습이 낫다고 판단했다.
“내 말 듣고 있는 겁니까? 페이오스??”
“아 미안. 잠깐 딴 생각을...”
안나는 이런 안좋은 상황에 미소를 드리운 페이오스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RLO는 표면적으로는 체첸과 그루지야(현재 러시아와 독립을 중심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분쟁지역), 그리고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단체입니다. 목적은 체첸과 그루지야, 시베리아를 무력을 통한 러시아로부터의 영향에서 해방.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국가 탄생. 그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얘기가 다르지.”
“?? 실상?”
안나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RLO는 세계를 떡 주무르듯 주무른다는 미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묘한 단체였다. 이 신비감을 팍팍 풍기는 단체는 미국도 잘 알지 못하는 병기로 무장하고 있고, 자신들 아래 있는 몇몇 신흥방산기업들을 통해 여러 분쟁지역과, 강대국에 최첨단 무기와, 구식 무기들을 팔고 있었다. 미국에서 아는지, 모르는 척 하는지 모르나, 그들은 과거 러시아를 지배했던 노몐끌라뚜라(고급 당원층)들과 마피아들이 주 세력이고, 기타 미국&러시아에 저항하는 반군출신들로 이뤄져 있다고 표면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병력 구성은..킥! 러시아가 그토록 자랑하던 키로프급과, 지금은 많이들 잊은 야마토, 아이오와같은 재래식 병력, 수호이와, 미그, 기타 방공모함등으로 이뤄져 있기도 하고,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병기를 가지고 있죠.”
“듣도, 보도 못한 병기?”
끄덕 끄덕.
“문제는 이 병기가...과거 마족들이 개발한 대테러병기라는 사실입니다.”
“뭐야 그건. 신마대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야?”
“그렇게 볼 수 있군. 어쨌든 그런 거지.”
반말과, 존칭이 혼란스럽게 오가는 안나는 더욱 아파오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며 페이오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계속 설명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젠장! 망할 두통만 아니라면. 안나는 애꿎은 벽에 주먹을 놀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 세계의 테러리스트 단체라고 보기는 굉장히 힘든 무기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킥! 방공모함이라니 이정도면 아예 국가 수준이라고 봐도 되죠. 허나 문제는..이런 거대 병기들을 숨길만 한 장소가 디멘션3에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놈들은 우리와 똑같은 다른 차원계의 녀석들입니다. 그것도 게이트를 통하지 않고, 힐드처럼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시공통로가 있는 녀석들. 지금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는 녀석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RLO...”
“.........”
“그리고 그들은 이 디멘션3뿐만 아니라 천계에도 크렉킹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걸까? 페이오스.”
“.............”
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RLO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끝내자 페이오스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다리를 꼬며 생각에 잠겼다. 오직 천계와 마계만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을 지니고 있으며, 굉장히 커다랗고 강대한 국가(페이오스의 생각 속에 자리잡은 러시아의 이미지는 이러했다.)의 병력을 저렇게 쪽도 못 쓰고 묵사발로 낼 정도라면? 막강한 병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인데....게다가 세레스틴도 겨우 해냈던 베르단디를 통한 유그드라실 공격..RLO란 작자들은 디멘션 3에서의 자신들의 입지 확장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대담하게 천계와 마계 또한 노리고 있었다. 자살하고 싶은 이들이 아니라면 함부로 신과, 악마를 도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도발하고 있다. 그것도 디멘션 3를 통하는 통신망까지 완전히 마비시켜가며...그들은 무얼 원하는 것일까?
“그럼 안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죠?”
“그건....”
드르르륵!
“안나! 접속 OK!!! 방금 막 묠니르가 답변을 보냈어!! 지금 안나의 부하들과 함께 어떤 군 기지에 있...아!”
이런 젠장!! 왜 하필 이런 때에?! 안나는 경악하며 케이가 보고하러 온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몸을 일으켰다. 저 바보 같은 남자가 드디어 사고를 치고 만 것이었다. 케이는 얼굴이 빨갛게 익어 증기를 내뿜을 정도로 멍하니 서서 베르단디의 전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페이오스는 자신의 온 몸을 훑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의 시선을 보고 똑같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살림용 에이프릴(앞치마)로 급하게 몸을 가려보지만....
“미, 미안 보, 보고 싶어 본 것이...”
“쵸르트(빌어먹을 자식)!!!이런 자본주의 변태성인동영상에 물든 변태자식아!! 네 이 자식 일부러 보고한답시고 쳐들어온 거지! 젠장!!”
얼굴이 홍당무가 된 케이에게 곧이어 안나의 분노가 가득 담긴 욕설이 튀어나왔다. 러시아어, 일본어 할 것 없어 온갖 언어가 혼합이 된 안나의 분노는 케이의 정신을 더욱 멍하게 만들었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졌다. 이제 안나는 케이의 잘못을 모든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로 증폭시켜 탓하며 그에게 사회주의의 참맛(?)을 세뇌시키는데 이르고 있었다. 물론 이미 멍해진 케이에겐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분명 자신도 모르게 베르단디의 알몸에 취해 멍하니 상상만 하고 있을 것이다.페이오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물론 저 소심한 남자(?)는 너무도 기쁜 마음에 저런 변태로 딱 몰릴 행동을 미처 생각도 못해보고 했을 것이다. 케이는 그런 남자였다. 베르단디에 관한 일이라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그런 남자였다...페이오스는 계속 야단을 맞고 있는 케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본모습으로 돌아온 안나는 매우 기쁘다는 듯 친히 그를 밟아주겠다(?)는 용의를 밝히고 있었지만 몸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다.
'그냥 저런 변태. 확 밟아버리지는.'
페이오스는 베르단디의 온몸을 훑어내린(?)케이의 시선을 떠올리며, 베르단디가 들었으면 무지 슬퍼할 말을 내뱉었다. 겉으론 드러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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