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Moon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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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라!
말도 안돼는 소리!
도망쳐라!
가능성은 5%미만!
도망쳐라!
그건.. 못해.. 못해!!!
"이제는 도망쳐주지 않는거네. 시키."
"유..미..즈..카.."
말을 마치는 순간 유미즈카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이전처럼 밝은 목소리로..
"불공평하다구. 난 시키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잖아? 그러니까 시키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줘."
아아.. 기억이 난다. 그랬었지. 그녀는 나에게 이름을 불러달라면서 울부짖었었다. 그래.. 그런 기억이 있었다.
내가 그녀의 점을 찌르기 전에..
"어서 나를 불러줘. 시키.."
"사츠.. 키.."
순간 주위가 환해졌다. 그리고 나의 눈에 비취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색의 공간에 오로지 그녀만이 존재하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입가에는 나도 모르는 미소가 걸린채로.. 나는 그렇게 한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예의 우리학교 교복이 정말로, 잘 어울린다고 표현될 정도의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나를 봐줬구나. 시키."
===================================
"으응. 단지, 나와 토오노군은 내일부터 같은 통학로가 되는구나 해서"
정말 기쁜듯이, 그녀는 웃었다.
그 미소는 장식이 없어서, 보고 있는 이쪽까지 기뻐진다.
===================================
"사츠키.. 어째서.."
"왜? 시키 무엇이라도 문제있어?"
장식이 없는 미소. 보는 사람 마저도 기뻐할 것만 같은 미소인데도, 그런데도.. 지금은 기뻐지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이것은 내가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는데, 내가 죽인 클레스메이트가.. 사실은 꿈속의 일이어서 다시금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었는데..
===================================
"나는, 그때 생각했어. 학교에는 의지되는 사람은 잔뜩 있지만, 정작 중요한때 도와주는 사람은 토오노군같은 사람이라고"
===================================
"괜찮아. 시키가 핀치 일때는 내가 도와줄테니까. 그러니까.. 같이 있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차가운 감촉, 그러나 이내에 따스하게 변하는 체온이 느껴졌다. 단지 꿈이 아니라 실제로 느껴지는 이 감촉에 나는 지나칠 정도로 흥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이내에 아찔하는 느낌과 함께 허리가 숙여졌다.
거부한다. 무엇을? 그녀를?
거부한다. 내가 바라던 그녀를?
거부한다. 젠장! 거부하지 않아!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크윽!"
강렬하게 이 사실을 부정하는 이성은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밀쳐버렸다. 순간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두가지의 의식이 충돌하며 내부가 뒤틀려버리는 듯한 감각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러나.. 시선만은 사츠키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키.."
===================================
"설마, 그건 과대평가야. 자, 병아리가 처음으로 본 사람을 부모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우연히 내가 도와줬다라는 것뿐인 이야기잖아."
"그렇지 않아....! 나, 그때부터 토오노군이라면 어떤 일이든 당연한 듯이 도와줄거라고 믿고 있어."
===================================
"핀치구나? 내가 도와줄께. 시키.. 이번에는 정말로 도움이 될꺼야."
라면서 나의 손을 더욱 꼬옥 붙잡아 주는 사츠키. 굽혀진 허리가 펴지며 모든 고통은 깨어지듯이 한구석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찾아오는 무감각, 그리고 그 꼬리를 물고 스멀스멀 피어나는 극한의 흥분..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품에 안겼다.
"착하지. 시키."
스윽~
옷끼리 부딫히는 소리와 함께 사츠키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러다가 점차 그녀의 얼굴이 내 시야의 왼쪽 아래로 사라져갔다. 그와 함께 목근처에 느껴지는 그녀의 상기된 숨소리..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만.. 나는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
"유미즈카상, 그거 과대평가야. 나는 그렇게 믿을만한 녀석이 아닌데.."
"괜찮아. 내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믿게 해줘."
===================================
피슛!
하는 날카로운 파육음이 잠깐 울려퍼지고, 이내에 모든 것이 빨려나가는 느낌이 온몸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다시금 나를 감싸던 극한의 흥분이 해체되어 버렸다. 빠르게 돌아오는 이성은 뇌내를 장악하던 감정을 억누르고서 다시금 계산을 시작했다.
빠져나갈 방법은. 나이프. 그렇다면 어떻게. 찌른다. 어느부위가 효과적인가. 점.
".....!!"
순간의 계산이 이뤄지는 동안 갑작스레 주위의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유미즈카는 실책하는 눈빛으로 나와 그리고 전봇대위를 바라보았다. 유미즈카의 시선을 따라 전봇대로 얼굴을 돌리자, 그곳에는 달빛의 배경을 등진채로 푸른 눈빛을 번쩍이는 사람이 서있었다. 그 푸른 눈빛은 정말이지.. 차갑고도 뜨거워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이이!! 또 방해받았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정말이지 취미가 좋지 못한 사람이군요."
그와 함께 유미즈카는 사라져버렸다. 단지 잠깐의 붉은 빛의 잔영들이 유미즈카가 있었다고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
갑작스레, 온몸의 실이 서서히 끊어지듯이 쓰러져가려고 했다. 그런 나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으십시요. 오늘일도, 어제의 일도.."
***
"후아암! 좋은 아침!"
방금 방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히스이를 향해서 인사를했다. 히스이는 매우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무표정한 눈으로 돌아가서는 들어와서 방문을 닫고서는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주무셨습니까? 시키님."
"에.. 응."
"그러면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히스이가 나간후, 나는 시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시간은 오전 5시 30분. 정말이지 대혁명적인 기록이었다. 어제의 6시의 기록을 무려 30분씩이나 앞당긴 놀라운 성과라고 볼 수 밖에.. 이대로라면 3시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건 아닐까나? 라는 망상을 하는 동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도록해. 히스이."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히스이가 아니었다. 아키하는 방문을 열다가 말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아키하 무슨일이야?"
"에.. 그냥. 히스이가 오라버니의 옷을 가지러 건조실로 향한다기에 와봤습니다."
"그렇구나. 음.. 하지만 곤란한데, 난 아직 잠옷이고."
"..그건 그렇군요. 그럼 가보겠습.."
"아하하! 아키하 장난이라구."
"..시덥잖은 이야기라면 거실에서 들어드리겠습니다."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말이 있다. 왠지 오늘은 그 말의 뜻이 쉽게 이해가 되어갔다. 아키하가 쿵쾅거리며 나가자, 곧 히스이가 문을 열고서 다시 들어왔다.
"옷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시키님?"
"에.. 왜 그래요?"
뭔가, 히스이의 분위기에 압도당해서인지, 존대어로 대답하게 되어버렸다. 히스이는 별다름 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키하님과 잘 지내주십시요."
"아.. 알겠습니다."
히스이가 나자가 방안의 분위기가 다시금 어두워졌다. 왠지 오늘은 거실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
"그렇게 해서 양식으로 하죠."
"그렇지만, 난 일식이.."
째릿!
그녀의 시선이 훨씬 더 강하게 얼굴로 꽂혀왔다. 우음, 예전의 아키하라면 분명히 저런 얼굴을 할 수 없었다. 저건 분명히 누군가가 아키하의 탈을 쓰고서 연기하는 것이다. 그래! 그것은 분명..
"말씀드리겠지만, 8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습니다."
"예."
이 집에는 분명히 도청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정확히 내 말의 사점(死点)을 짚어낼 수 있을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서는 있을 동안 코하쿠는 양식이군요. 라고 말하면서 부엌으로 사라져버렸다. 아키하는 나에게 꽂던 시선을 풀면서 찻잔을 들고서는 천천히 마셨다. 그 동안 할일이 없어진 나는 잠시 소파에 몸을 묻은채로 잠을 청했다. 곧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퍼져나왔지만, 나는 그냥 꿈속으로 다시금 빠져 들었다.
***
"유미----즈카......!!"
"응, 바이바이 토오노군. 고마워----그리고, 미안해"
삭.
한줌의 재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듯이.
유미즈카 사츠키는, 이 눈 앞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유미즈카의 모습은, 마치 환상이었던 것 처럼, 깨끗히 사라져버렸다.
"-------"
어지러움만이, 남았다. 그저 그런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과거따윌 기억해 내고 싶은게 아냐. 난 그저 그녀와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 평범했던 학교 생활을 바라보고 싶었다. 학교행사에 참석해 있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배드민턴부였던 그녀를 구출해내는 장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만이..
추억? 그런 것을 기억할만큼 만만한 녀석이 아니란걸 알고 있잖아?
***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이었다. 그대로 잠들어서 쓰러졌던 것인가? 모처럼만에 일찍 일어났었는데, 왠지 모르게 허탈해졌다. 가만히 몸을 일으키려고 한 순간, 몸을 조절하던 실이 헤어져 끊어지는 것처럼 갑작스레 힘이 빠져 버렸다. 단지 움직인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져 버렸다. 고개를 간신히 돌려보니, 창가로 별이 하나, 둘 반짝이고 있었다.
"한심하네.. 뭔가."
이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한심했다. 죽음에 가까운 몸은 가끔씩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서 쓰러졌다.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그 운명이 싫었다.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아키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계속 이자리를 지킨 것처럼 피곤한 음색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서 아키하를 바라보았다.
"조금 무리한 걸까나? 이런 곳에서 의식을 잃을 줄이야. 하하하.."
"오라버니. 부탁이니까. 학교 같은 곳에는 다니지 마세요."
"에.. 그럴 수는.."
"오늘 오라버니의 친구분께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에서도 자주 쓰러지신다고요?"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쉴 정도까지는 아냐."
"아니요. 일단은 제가 학교에 전화해서 1주일간은 쉴 수 있도록 조치해놓았습니다. 부탁이니까 편히 쉬어주세요."
평소의 아키하와는 달리, 무언가 불안에 휩싸인 아키하는 예전의 어린 아키하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급작스레 다시금 의식이 멀어졌다. 뭔가, 머릿속을 휘젓는 듯한 느낌이 강해지면서 결국은 의식을 놓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
토오노가의 창문을 바라보면서 그림자는 다시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잊으십시요. 오늘일도.."
말도 안돼는 소리!
도망쳐라!
가능성은 5%미만!
도망쳐라!
그건.. 못해.. 못해!!!
"이제는 도망쳐주지 않는거네. 시키."
"유..미..즈..카.."
말을 마치는 순간 유미즈카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이전처럼 밝은 목소리로..
"불공평하다구. 난 시키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잖아? 그러니까 시키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줘."
아아.. 기억이 난다. 그랬었지. 그녀는 나에게 이름을 불러달라면서 울부짖었었다. 그래.. 그런 기억이 있었다.
내가 그녀의 점을 찌르기 전에..
"어서 나를 불러줘. 시키.."
"사츠.. 키.."
순간 주위가 환해졌다. 그리고 나의 눈에 비취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색의 공간에 오로지 그녀만이 존재하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입가에는 나도 모르는 미소가 걸린채로.. 나는 그렇게 한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예의 우리학교 교복이 정말로, 잘 어울린다고 표현될 정도의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나를 봐줬구나. 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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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단지, 나와 토오노군은 내일부터 같은 통학로가 되는구나 해서"
정말 기쁜듯이, 그녀는 웃었다.
그 미소는 장식이 없어서, 보고 있는 이쪽까지 기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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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키.. 어째서.."
"왜? 시키 무엇이라도 문제있어?"
장식이 없는 미소. 보는 사람 마저도 기뻐할 것만 같은 미소인데도, 그런데도.. 지금은 기뻐지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이것은 내가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는데, 내가 죽인 클레스메이트가.. 사실은 꿈속의 일이어서 다시금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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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생각했어. 학교에는 의지되는 사람은 잔뜩 있지만, 정작 중요한때 도와주는 사람은 토오노군같은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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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시키가 핀치 일때는 내가 도와줄테니까. 그러니까.. 같이 있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차가운 감촉, 그러나 이내에 따스하게 변하는 체온이 느껴졌다. 단지 꿈이 아니라 실제로 느껴지는 이 감촉에 나는 지나칠 정도로 흥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이내에 아찔하는 느낌과 함께 허리가 숙여졌다.
거부한다. 무엇을? 그녀를?
거부한다. 내가 바라던 그녀를?
거부한다. 젠장! 거부하지 않아!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크윽!"
강렬하게 이 사실을 부정하는 이성은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밀쳐버렸다. 순간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두가지의 의식이 충돌하며 내부가 뒤틀려버리는 듯한 감각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러나.. 시선만은 사츠키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키.."
===================================
"설마, 그건 과대평가야. 자, 병아리가 처음으로 본 사람을 부모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우연히 내가 도와줬다라는 것뿐인 이야기잖아."
"그렇지 않아....! 나, 그때부터 토오노군이라면 어떤 일이든 당연한 듯이 도와줄거라고 믿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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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구나? 내가 도와줄께. 시키.. 이번에는 정말로 도움이 될꺼야."
라면서 나의 손을 더욱 꼬옥 붙잡아 주는 사츠키. 굽혀진 허리가 펴지며 모든 고통은 깨어지듯이 한구석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찾아오는 무감각, 그리고 그 꼬리를 물고 스멀스멀 피어나는 극한의 흥분..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품에 안겼다.
"착하지. 시키."
스윽~
옷끼리 부딫히는 소리와 함께 사츠키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러다가 점차 그녀의 얼굴이 내 시야의 왼쪽 아래로 사라져갔다. 그와 함께 목근처에 느껴지는 그녀의 상기된 숨소리..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만.. 나는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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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즈카상, 그거 과대평가야. 나는 그렇게 믿을만한 녀석이 아닌데.."
"괜찮아. 내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믿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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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슛!
하는 날카로운 파육음이 잠깐 울려퍼지고, 이내에 모든 것이 빨려나가는 느낌이 온몸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다시금 나를 감싸던 극한의 흥분이 해체되어 버렸다. 빠르게 돌아오는 이성은 뇌내를 장악하던 감정을 억누르고서 다시금 계산을 시작했다.
빠져나갈 방법은. 나이프. 그렇다면 어떻게. 찌른다. 어느부위가 효과적인가. 점.
".....!!"
순간의 계산이 이뤄지는 동안 갑작스레 주위의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유미즈카는 실책하는 눈빛으로 나와 그리고 전봇대위를 바라보았다. 유미즈카의 시선을 따라 전봇대로 얼굴을 돌리자, 그곳에는 달빛의 배경을 등진채로 푸른 눈빛을 번쩍이는 사람이 서있었다. 그 푸른 눈빛은 정말이지.. 차갑고도 뜨거워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이이!! 또 방해받았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정말이지 취미가 좋지 못한 사람이군요."
그와 함께 유미즈카는 사라져버렸다. 단지 잠깐의 붉은 빛의 잔영들이 유미즈카가 있었다고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
갑작스레, 온몸의 실이 서서히 끊어지듯이 쓰러져가려고 했다. 그런 나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으십시요. 오늘일도, 어제의 일도.."
***
"후아암! 좋은 아침!"
방금 방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히스이를 향해서 인사를했다. 히스이는 매우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무표정한 눈으로 돌아가서는 들어와서 방문을 닫고서는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주무셨습니까? 시키님."
"에.. 응."
"그러면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히스이가 나간후, 나는 시계를 바라볼 수 있었다. 시간은 오전 5시 30분. 정말이지 대혁명적인 기록이었다. 어제의 6시의 기록을 무려 30분씩이나 앞당긴 놀라운 성과라고 볼 수 밖에.. 이대로라면 3시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건 아닐까나? 라는 망상을 하는 동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도록해. 히스이."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히스이가 아니었다. 아키하는 방문을 열다가 말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아키하 무슨일이야?"
"에.. 그냥. 히스이가 오라버니의 옷을 가지러 건조실로 향한다기에 와봤습니다."
"그렇구나. 음.. 하지만 곤란한데, 난 아직 잠옷이고."
"..그건 그렇군요. 그럼 가보겠습.."
"아하하! 아키하 장난이라구."
"..시덥잖은 이야기라면 거실에서 들어드리겠습니다."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말이 있다. 왠지 오늘은 그 말의 뜻이 쉽게 이해가 되어갔다. 아키하가 쿵쾅거리며 나가자, 곧 히스이가 문을 열고서 다시 들어왔다.
"옷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시키님?"
"에.. 왜 그래요?"
뭔가, 히스이의 분위기에 압도당해서인지, 존대어로 대답하게 되어버렸다. 히스이는 별다름 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키하님과 잘 지내주십시요."
"아.. 알겠습니다."
히스이가 나자가 방안의 분위기가 다시금 어두워졌다. 왠지 오늘은 거실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
"그렇게 해서 양식으로 하죠."
"그렇지만, 난 일식이.."
째릿!
그녀의 시선이 훨씬 더 강하게 얼굴로 꽂혀왔다. 우음, 예전의 아키하라면 분명히 저런 얼굴을 할 수 없었다. 저건 분명히 누군가가 아키하의 탈을 쓰고서 연기하는 것이다. 그래! 그것은 분명..
"말씀드리겠지만, 8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습니다."
"예."
이 집에는 분명히 도청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정확히 내 말의 사점(死点)을 짚어낼 수 있을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서는 있을 동안 코하쿠는 양식이군요. 라고 말하면서 부엌으로 사라져버렸다. 아키하는 나에게 꽂던 시선을 풀면서 찻잔을 들고서는 천천히 마셨다. 그 동안 할일이 없어진 나는 잠시 소파에 몸을 묻은채로 잠을 청했다. 곧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퍼져나왔지만, 나는 그냥 꿈속으로 다시금 빠져 들었다.
***
"유미----즈카......!!"
"응, 바이바이 토오노군. 고마워----그리고, 미안해"
삭.
한줌의 재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듯이.
유미즈카 사츠키는, 이 눈 앞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유미즈카의 모습은, 마치 환상이었던 것 처럼, 깨끗히 사라져버렸다.
"-------"
어지러움만이, 남았다. 그저 그런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과거따윌 기억해 내고 싶은게 아냐. 난 그저 그녀와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 평범했던 학교 생활을 바라보고 싶었다. 학교행사에 참석해 있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배드민턴부였던 그녀를 구출해내는 장면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만이..
추억? 그런 것을 기억할만큼 만만한 녀석이 아니란걸 알고 있잖아?
***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이었다. 그대로 잠들어서 쓰러졌던 것인가? 모처럼만에 일찍 일어났었는데, 왠지 모르게 허탈해졌다. 가만히 몸을 일으키려고 한 순간, 몸을 조절하던 실이 헤어져 끊어지는 것처럼 갑작스레 힘이 빠져 버렸다. 단지 움직인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져 버렸다. 고개를 간신히 돌려보니, 창가로 별이 하나, 둘 반짝이고 있었다.
"한심하네.. 뭔가."
이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한심했다. 죽음에 가까운 몸은 가끔씩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서 쓰러졌다.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그 운명이 싫었다.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아키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계속 이자리를 지킨 것처럼 피곤한 음색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서 아키하를 바라보았다.
"조금 무리한 걸까나? 이런 곳에서 의식을 잃을 줄이야. 하하하.."
"오라버니. 부탁이니까. 학교 같은 곳에는 다니지 마세요."
"에.. 그럴 수는.."
"오늘 오라버니의 친구분께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에서도 자주 쓰러지신다고요?"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쉴 정도까지는 아냐."
"아니요. 일단은 제가 학교에 전화해서 1주일간은 쉴 수 있도록 조치해놓았습니다. 부탁이니까 편히 쉬어주세요."
평소의 아키하와는 달리, 무언가 불안에 휩싸인 아키하는 예전의 어린 아키하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급작스레 다시금 의식이 멀어졌다. 뭔가, 머릿속을 휘젓는 듯한 느낌이 강해지면서 결국은 의식을 놓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
토오노가의 창문을 바라보면서 그림자는 다시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잊으십시요. 오늘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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