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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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part 2.-
제21화 - 대폭주! 광란의 전투생물 -
-"지하 조제구역의 영상입니다."
클라우드 게이트의 중앙 통제실에서 신은 지하 조제구역의 현재 상황을 스크린으로 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상황실에서 영상으로만 보던 것과는 달리 지하 조제 구역은 완전히 초토화 돼있었다. 수많은 조제통들이 박살나 있었고 바닥에는 강력한 열선이 지나간 듯 한 깊은 고랑이 패여 있었다. 피해의 규모로 봤을 때 이정도 빔의 위력이라면 가이버의 메가 스매셔라고 봐야 했다. 아까 계측됐던 미진동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정도의 피해라면 진작 눈치 챘어야 했지만 '침입자'가 조제 구역의 모든 감시 카메라를 마비시키고 이전에 녹화돼 있던 영상을 대신 올리는 방법으로 상황실을 감쪽같이 속인 것이다.
-"다음은 최하층 저수지의 영상입니다."
신의 명령에 따라 보안 요원들은 지하의 모든 시설을 직접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지하 저수지에서도 큰 일이 벌어졌었다. 현장에서 근무를 서던 당직 요원 두 명이 피살된 상태였고 저수지의 수조 안 벽면에는 외부에서 뚫고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구멍까지 발견되었다. 아마 침입자는 이곳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가이버가 여기로 침투해 온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혼자서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가장 경계가 취약하던 저수지로 부터의 침투와 조제 시설 쪽의 경비 시스템을 마비시킨 것으로 보아서는 이곳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자가 함께 온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어쨌든 중요한 건 신의 예상대로 그 동안 통제실은 눈뜬장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놈들이 이 기지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데 왜 놈들을 발견 못한 거냐!"
신은 경비 책임자에게 역정을 내었다. 이번일만 마무리되면 이놈은 반드시 문책하리라고 마음먹은 신이었다. 경비 책임자는 당황해하면서 신에게 보고하였다.
"죄...죄송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점이 발견됐습니다."
"뭔가? 그저 변명을 늘어놓는 거라면 널 용서치 않을 거다."
"경비 시스템을 총점검해 봤는데 놈들의 침투로로 예상되는 지점의 감시 시스템이 전부 다 다운된 상태였습니다."
"뭐라고?!"
경비 책임자가 보고하는 내용이 뭔가 이상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아 가이버들은 건물 중앙의 대형 환기통로를 주 침투로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그 지역 역시 이미 감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없었지만 특별 경계령이 내려지면서 오늘 오후에 새롭게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다 다운되었다? 오늘 새로 설치한 기계가 고장 난다는 것 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침투 예상로에 배치된 기계 전부가 다 먹통이다? 이건 누가 일부러 그랬다고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고장 자체도 미심쩍은 게 감시 시스템은 통제실에 정기적으로 상태 정상 신호를 보내도록 조작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누군가가 가이버들의 이동을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당했다! 쿨메그닉 들은 지금 어디 있나!!"
누군가가 조직적으로 은폐 시도를 했다고 한다면 지금 이 기지 내에서 그런 짓을 할 만한 놈들은 쿨메그닉, 자빌, 카브라알 이 세 신장 밖에는 없었다. 일본에 온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모든 짓들이 전부 다 수상쩍은 것들뿐이었으니까. 일단 이들은 신에게 VIP 실에 얌전히 있기로 약속은 했었다. 그런데 VIP 실을 조사한 관제원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보고하였다.
"지금 VIP룸에는 안계십니다. 그런데 정확히 어디로 가셨는지는 확인이 안 됩니다."
신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놈들이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은 황급히 관제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level 4 실험실 상황은 어떤가! 어서 비춰봐!"
통제실의 대형 스크린에 level 4 실험실의 영상이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실험실 내부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앱톰도 묶여 있는 그대로고 누군가의 침입 흔적도 없었다. 아직 가이버들이 저기까지 도착하지 못한 것일까? 그 때 관제원이 황급히 외쳤다.
"이...이건 가짜 영상입니다! 확인 결과 녹화된 영상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재는 실시간 화면이 전송되지 않고 있습니다!"
"97층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보안 요원들 전부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신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가이버들의 침투 예상시간으로 미루어 볼 때 놈들은 이미 실험실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게다가 97층을 경비하고 있던 요원들 전부가 응답이 없다? 이건 지금 97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이 황급히 소리쳤다.
"비상! 비상을 걸어라!! 하이퍼 조아노이드 보안부대를 즉시 level 4 실험실로 급파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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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젠장!! 우리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케이와 하야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절규하였다. 베르단디 역시 흐느끼고 있었다. 이들의 목숨을 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앱톰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굳어있는 상태 그대로였다면 어떻게 되살릴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었겠지만 저렇게 박살이 나면 그 가능성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조...좋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피하고 보자.'
-슈웅
그 때 케이에게 들켜서 부상을 입은 가슈탈이 다시 스텔스 모드를 가동시켜 몰래 도망치려 하였다. 사실 그는 앱톰이 저렇게 될 거라는 건 전혀 몰랐다. 다만 그는 자빌에게서 여기까지 가이버들이 중앙 통제실에 들키지 않고 몰래 오게만 하라는 명령만 받았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어쨌든 그의 임무는 여기까지였고 자기 힘으로는 가이버에 맞설 수 없으니까 일단은 몸부터 피해야 했다. 스텔스 모드 덕분에 가슈탈의 몸은 다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
"왜 그래?"
그 때 케이의 헤드 센서에 어떤 반응이 나왔다. 그 반응은 아주 미약했지만 틀림없이 감지 되었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반응이었다. 케이의 표정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물론 강식장갑의 마스크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지만)
"걱정 마세요, 하야미씨. 앱톰은 안 죽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케이씨?"
"저길 봐."
케이가 어느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의아해 하던 그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뭔가가 나타났다.
"우으으윽!!!"
-슈웅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아까전의 스텔스 조아노이드, 가슈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스텔스 모드로 다시 도망치려던 놈이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그리고 가슈탈의 행동 자체도 어딘가 수상했다. 어디가 아픈지 무척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케이가 자른 팔 때문이 아니라 온 몸이 아프다는 듯이 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뭐...뭐지?! 몸이 움직이지가 않아...!"
가슈탈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가슈탈의 몸에 이변이 일어났다. 잘린 왼팔 부위에서 뭔가가 꿈틀 대더니 새로운 팔이 순식간에 솟아 나왔다.
-푸아악!!
"히...! 뭐..뭐야!!"
가슈탈에게는 이런 식으로 부상 부위를 순식간에 회복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 역시 잘린 부위에서 새 팔이 돋아나자 공포에 질렸다. 게다가 돋아난 팔도 조아노이드의 팔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팔이었다. 변화는 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오른 어깨 쪽에서 뭔가 혹 같은 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히...히아아악!!!"
자라난 혹은 이내 어떤 형태를 갖추었다. 바로 앱톰의 얼굴이었다! 이윽고 가슈탈의 몸은 서서히 앱톰의 육체로 변화돼 가기 시작했다. 앱톰의 체세포에 육체를 침식당한 것이다. 하야미와 베르단디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해 할 때 케이가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아까 전에 돌로 된 앱톰의 몸에 고전압의 전기 충격이 가해졌을 때 그 때 앱톰이 다시 되살아난 거에요."
"다시 되살아나다니?"
"돌덩어리 안에 그때까지 돌로 변하지 않고 있던 약간의 체조직이 전기 충격으로 활성화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체조직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조아노이드의 육체에 침투해 들어간 거죠."
앱톰의 체조직은 아주 약간의 살점조차도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마치 아메바와 같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물론 약간의 체조직 만으로는 뇌가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지만 원래 그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에 따라 앱톰의 세포는 조아노이드를 잡아먹기 위해 움직이게 된다. 돌로 된 육체 안에 갇혀있던 앱톰의 체조직은 돌이 깨지면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근처에 있던 가슈탈을 본능적으로 탐지해 내서는 바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끼이이...! 끼...."
-슈욱, 슈우우...
이윽고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가슈탈의 머리조차도 새롭게 구축된 앱톰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앱톰의 완전한 부활이었다. 세 사람은 기쁨에 겨워 앱톰에게 다가갔다.
"앱톰!"
"앱톰씨! 다행이에요. 무사하셨군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앱톰이 갑자기 손을 뻗어서는 가까이 다가간 케이의 얼굴을 꽉 움켜쥐었다.
-턱!
"윽! 애...앱톰?!"
케이는 앱톰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지 못해 순간 당황하였다. 케이의 얼굴을 움켜 쥔 앱톰의 얼굴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 베르단디와 하야미는 앱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하며 앱톰을 말리기 시작했다.
"앱톰! 대체 왜 이래?!"
"앱톰씨! 이러시면 안돼요! 그 손 놓으세요!! 케이씨라고요!"
하지만 앱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케이는 앱톰을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앱톰의 체조직이 케이의 강식장갑으로 침투를 시도하였다. 케이를 융합포식 하려는 것이다!
"아...안돼!! 앱톰!!"
-파지지직!!
위기의 순간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이 방어 기능을 작동시켜 앱톰을 강제로 떨어지게 하였다. 컨트롤 메탈은 이렇게 외부에서 이물질이 침투를 시도할 경우 그것을 격퇴시키는 기능도 있다. 강한 충격에 놀란 앱톰이 황급히 케이에게서 떨어졌다. 다행히 케이의 몸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케이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앱톰이 다짜고짜 자기를 흡수하려고 시도했을까?
-꾸욱! 끼리릭!!
그 때 앱톰의 오른손이 뭔가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전부 뒤 쪽으로 넘어가면서 가시 비슷한 모양으로 변화되었고 손바닥에는 무슨 렌즈 같은 것이 돋아났다. 그것을 본 케이들은 깜짝 놀랐다. 저건 생체 열선포다! 앱톰의 생체 열선포에 에너지가 모이기 시작했다.
"피...피해!!!"
-퍼어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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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나가노구의 한 아파트 발코니에 두 남자가 한창 사진 촬영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들의 피사체는 바로 클라우드 게이트. 망원렌즈로 보이는 클라우드 게이트 주변은 서치라이트의 불빛으로 대낮처럼 밝았다. 무슨 쇼를 벌이는 건 절대로 아니다. 분명 뭔가 큰 사건이 생긴 것이다. 이들 두 남자는 바로 얼마 전에 푸르크슈탈의 죽음의 진상을 목격했던 잡지사 기자들인 아소와 다이라였다. 이들이 한창 클라우드 게이트의 관측에 열중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발코니로 나왔다. 그 남자의 양 손에는 커다란 머그컵 하나씩이 들려 있었다. 바로 이 집의 주인이자 아소의 친구인 시바다였다. 원래 같이 언론계에 뛰어든 동기 지간이었지만 시바다는 개인적 사정으로 예전에 기자 생활을 접고 지금은 자영업을 하고 있었다. 시바다는 손수 탄 뜨거운 커피를 아소와 다이라에게 나눠 주었다.
"커피라도 한 잔 들라고."
"아, 고마워."
"자, 자네도 들게."
"아! 가...감사합니다!"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언론인으로서 선배격인 시바다가 주는 커피를 신참내기인 다이라는 황송하다는 듯이 받아 들었다. 12월의 차가운 바람을 계속 맞으면서 밤을 새는 건 상당히 고된 일이다. 그럴 때 이렇게 뜨거운 커피 한 잔이 몸을 녹이는 데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집안으로 들어가는 거지만.
아소는 다이라를 데리고 저녁 늦게 갑자기 시바다의 집으로 들이 닥쳤다. 시바다가 이유를 물으니 클라우드 게이트의 상황을 촬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원래 목표가 생기면 막가파가 돼 버리는 아소의 성격을 아는 시바다는 맘대로 하라며 자기 집 발코니를 흔쾌히(?) 빌려 주었다. 어차피 시바다는 부인과 이혼 후 혼자 살고 있으니 잔소리할 사람도 없다. 시바다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각 가정별로 상당히 넓은 발코니가 있는데 흔히 생각하기 쉬운 아파트의 좁은 발코니 같은 곳이 아니라 여기서 대여섯 명 정도가 바베큐 파티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시바다의 집은 가장 위층인 8층. 게다가 이 건물에서 클라우드 게이트와 도쿄 신도청의 모습을 가리는 높은 건물이 없으니 시야도 좋다. 공간도 넓고 시야도 확보되고 여차하면 안에 들어가서 밤참이라도 꺼내 먹을 수 있고(물론 집주인인 시바다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교대로 안에 들어가서 잠도 잘 수 있기도 하니 밤샘 관측지점으로서는 최고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단점만 제외하면.
"그런데 이거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망원렌즈도 별 도움 안 되지 않아?"
시바다가 가장 큰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 말 그대로 여기서 클라우드 게이트 까지는 너무 멀었다. 높이가 400m에 달한다는 빌딩이 여기서 보면 어른 손 크기 정도로만 보일 정도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한밤중. 아무리 도심의 불빛이 휘황찬란해도 태양만큼의 조명효과는 주지 못했다. 덕분에 아소가 가지고 있던 것들 중 최대 배율의 망원 렌즈의 배율을 최대로 당겨도 건물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아소 역시 이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앞에서 열거한 장점들 같은 건 이렇게 거리가 너무 멀다면 다 의미 없는 것들일 뿐이다. 아소라고 왜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지 않겠는가.
"오늘밤에는 통제국 놈들이 아주 살기등등해. 신주쿠 주변에서 카메라 같은 거 가지고 어슬렁 거렸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를 지경이야."
아소는 신주쿠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 분한지 툴툴 거렸다. 물론 요즘은 디카도 많이 보급돼 있고 거의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수준뿐만 아니라 전문 촬영용의 디카도 많이 보급된 만큼 단순히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잡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 클라우드 게이트가 있는 신주쿠 주변은 통제국의 불심검문이 굉장히 삼엄했고 경찰도 평소보다 훨씬 많이 배치돼 있었다. (경찰은 크로노스가 지구를 제압한 이후 거의 모든 인력을 자기네 인원으로 교체했으니 사실상 크로노스의 하부 조직처럼 돼 버린 상태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카메라뿐만 아니라 망원렌즈에 기타 필요한 장비 등을 다 가지고 클라우드 게이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누구라도 염탐꾼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기념사진이나 셀카 찍으려 했다고 하기에는 이들의 장비가 너무 거창하니까. 그래서 아소는 어쩔 수 없이 통제국의 경계권 밖인 이 곳 시바다의 아파트로 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차라리 여기가 더 나을 수도 있지."
"그건 또 뭔소리야?"
"너무 가까이 근접하면 관측 범위가 좁아지게 돼. 나무만 보고 숲은 제대로 못 보는 것처럼. 차라리 이렇게 멀리서 전체를 다 보는 것이 상황 파악에 더 유리할 수도 있어."
아소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고 시바다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도대체 뭘 보려고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소가 뭔가에 이렇게 열중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옛날 현역 시절에는 이런 아소 때문에 여러 차례 곤욕도 치렀었다. 은퇴한 지금에 와서는 아련한 추억이지만. 뭐 어쨌든 이렇게 해서 아소가 특종을 잡는다면 좋은 일 아닌가.
그는 따로 메고 온 보온 용기를 발코니에 있던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뭐 열심히들 해보라고. 여기 커피 더 담아놨으니까 마시고 싶으면 따라 마셔. 난 이만 들어가서 자야겠어."
그렇게 말한 후 시바다는 하품을 하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시바다가 문을 열은 그 때 아소가 나직하게 시바다를 불렀다.
"시바다."
"왜?"
"미안해. 갑자기 들이닥쳐서."
"됐네, 이 사람아. 감기나 안 걸리게 조심하라고."
-드르륵
시바다가 들어간 이후 한동안 아소와 다이라는 그저 조용히 클라우드 게이트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12월의 찬바람을 그것도 바람을 가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파트 최상층 발코니에서 계속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무척 추울 테지만 아소는 그런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매서운 눈으로 클라우드 게이트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라만큼은 달달 떠느라 고생하고 있었지만. 다이라는 잔뜩 웅크린 채 아소에게 물었다.
"저...선배님. 정말 가이버가 클라우드 게이트에 갈까요?"
"그래. 그들이라면 반드시."
다이라가 왠지 허탕 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질문했지만 아소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다이라는 아소 선배가 뭘 믿고 저렇게 확신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크로노스의 뻔 한 함정에 제 발로 뛰어들까?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이것도 기자의 감이란 말인지.
"그런데, 다이라. 넌 가이버가 뭐라고 생각하지?"
"예? 뭐냐뇨?"
"가이버의 정체 말이야."
"뭐...그야 외계인 아닐까요?"
"바보 녀석! 그건 통제국의 발표잖아!"
다이라는 아소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이버의 정체가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가이버 같은 건 이전까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는데. 그러니 다이라로서는 외계에서 온 테러리스트라는 통제국의 발표를 그냥 믿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아소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난, 가이버가 인간이라고 생각해."
"예?! 인간이요?"
인간?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가이버의 외모는 전혀 인간 같지 않았다. 인간처럼 직립보행이란 점과 팔 두개, 다리 두 개 라는 것 빼고는 도대체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게다가 하늘도 날아다니고 이상한 광선도 쏘는데 어떻게 그게 인간이란 말인가. 다이라가 어째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아소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저길 봐!! 클라우드 게이트의 상층부!"
그 소리에 다이라는 서둘러 카메라에 눈을 가져갔다. 그의 눈에 클라우드 게이트의 상층부에서 한줄기 빛이 뚫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냥 빛은 아니고 강력한 위력을 가진 레이저 빔이었다. 그것도 클라우드 게이트의 두터운 외벽을 뚫고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은 금세 흥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클라우드 게이트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아소의 예상대로 정말 가이버가 온 것이다!
"크으...! 역시 여기서는 제대로 보이질 않아!"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여기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소는 당장이라도 신주쿠 쪽으로 달려가고 싶어 했다. 그는 애타는 눈으로 클라우드 게이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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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드 게이트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건 그 두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클라우드 게이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느 빌딩 옥상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둘 다 이마에 묘한 형태의 빨간색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마족인 베루더와 마라였다.
"이봐, 베루더. 너 정말 싸울 꺼야? 가이버 I이랑?"
"글쎄....."
"글쎄라니! 너 정말 이길 자신은 있는 거야? 가이버랑 싸워서?"
"마라, 정면대결을 암살이라 하진 않아. 암살이라는 단어의 뜻부터 되새겨 보라고."
베루더는 마라에게 가볍게 핀잔을 주면서도 눈은 계속해서 클라우드 게이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베루더는 아키토에게서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의 암살을 지시 받자마자 곧바로 게이트를 통해 여기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 덕분에 그는 크로노스 일본지부가 내보낸 가이버 일당 포획 기자회견을 볼 수 있었다. 그 뒤로 그는 곧장 마라와 함께 여기에 도착해서는 줄곧 잠복해 있던 것이다. 가이버 I이 동료를 구하러 여기로 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여유 있게 싱글거리던 베루더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의 눈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마라는 잔뜩 긴장한 채로 베루더에게 다시 물었다.
"하지만 가이버 III 가 너보고 가이버 I을 죽이라고 했다면서! 그렇다면 그 녀석을 어떻게 죽일 건지 작전을 짜야...!"
"케이란 남자를 죽일 지 살릴 지는 내가 결정해."
베루더는 아키토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따를 생각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제까지 그의 조직에 들어가서 아키토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던 이유는 정보 수집이라는 본연의 임무 때문이었다. 크로노스 최대의 적으로 성장한 가이버 III, 마키시마 아키토의 행동은 마계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그의 조직원이 된 베루더의 보고는 마계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루더 자신도 과감한 아키토의 작전에 따라 다니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였고. 그러나 이번 임무만큼은 어딘지 꺼림직 해서 따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키시마 아키토는 진심으로 케이를 죽일 생각은 없을 거야."
"어째서?"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베루더는 손가락 두개를 펼쳐 보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우선 첫째, 가이버 I은 아직은 이용가치가 있다. 비록 기간틱의 주도권을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가이버 I 역시 여차하면 기간틱으로 변신할 수 있다. 그런 상대가 비록 지구 반대편이지만 어쨌든 설쳐댄다면 크로노스 입장에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것이다. 즉 모리사토 케이는 '중요한 전력'으로서가 아니라 '미끼'로서 쓸만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케이를 죽이게 되면 적의 모든 전력이 아키토에게 집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직 한창 세를 키우고 있는 아키토의 조직으로서는 심각한 위협이 된다.
둘째, 아키토는 의지력에서 케이를 압도하고 있다. 케이가 먼저 기간틱을 불렀다고 해도 언제든지 아키토의 의지로 기간틱을 뺏어올 수 있다. 그러므로 굳이 힘들여가며 가이버 I을 제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가이버 I 제거 임무를 맡겼어. 그것도 나 혼자서만 하라고 하면서. 그렇다는 것은 이제 아키토에게는 내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거지."
"시선이 부담스러워? 뭔 소리야?"
"내가 봐서는 안 되는 어떤 작전을 수행하려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당장 급하지도 않은 가이버 I 제거 임무를 핑계로 날 여기로 보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쫓아낸 거지."
암살 명령을 받은 베루더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명령을 받았던 그 때 아키토는 헤커링의 방에서 환희에 들뜬 표정으로 나왔고 그 뒤에 바로 헤커링이 당황해하며 아키토를 따라 나왔다. 그리고 그 때 베루더는 분명히 들었다. 헤커링이 '자네 정말 거길 갈 껀가'라고 하는 말을. 거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키토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 곳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곳은 마족인 베루더에게는 절대로 보여줘서는 안 되는 곳이고. 그러니 자기를 이렇게 암살을 구실로 여기로 보낸 것이다. 심지어 아키토는 베루더가 확실히 미국을 떠나는지 확인하려고 미행까지 붙였었다. 그냥 모르는 척 하긴 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거기 남아 있었어야지!! 놈의 목적을 알아 내는 게 네 임무잖아!!"
베루더의 설명을 들은 마라는 얼굴이 시뻘게져 가며 소리쳤다. 확실히 마라의 말은 틀린 점은 없다. 마계 지휘부에서 베루더에게 내린 명령은 가이버 III, 마키시마 아키토의 감시 및 동향 보고. 그렇다면 무슨 핑계를 대거나 아니면 몰래 미행해서라도 그가 어디로 가는지 따라갔어야 했다. 일단 이건 베루더의 직무 유기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루더는 마라를 한심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면 난 어떻게 될까? 그랬다간 아키토는 주저 없이 날 죽일 거야. 난 가이버 III 만이라면 몰라도 기간틱과 맞짱뜨는 미친 짓은 안 해. 게다가 그리셀더나 리베르타스들까지 날 찢어 죽이려 들걸?"
"미행하면 되잖아!!"
"가이버의 헤드 센서를 우습게보지 말라고. 내 존재는 금방 눈치 챌 거야."
처음엔 분신채만이라도 보내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것도 포기했다. 분신채는 몸의 일부분을 보내는 거니 기척이 아주 작지만 그래도 기척을 아주 없앨 수는 없다. 만에 하나 자기를 미행했다는 것을 아키토가 알게 되면 그 때는 베루더는 두 번 다시 조직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된다. 이미 마족이란 사실을 들켜서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드러낸 거지만) 자기를 견제하고 있을 것이 뻔 한데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베루더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힐드 역시 베루더에게 아키토를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명령을 내린 상황. 아예 확실한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짓은 (아직은) 해서는 안됐다. 그렇다면 일단은 물러나는 것이 상책. 아키토가 뭘 노리고 있는지는 나중에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리사토 케이란 남자를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마침 잘 된 셈이지."
"만나봐서 뭐하게? 그 별 볼일 없는 남자를."
"가이버 I 이 별 볼일 없다라.... 너 굉장히 강해진거 같다? 마라."
베루더의 비아냥에 마라는 금방 얼굴을 찡그렸다. 베루더는 다시 클라우드 게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마라랑 실랑이 벌일 생각은 없었다. 이제 곧 클라우드 게이트에서 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피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정보부원으로서는 실격이라 할 수 있는 '무모한 전투'가 그의 생활이니까. 그가 느끼기에 지금 클라우드 게이트에는 조아로드가 네 명이나 있다. 이런 강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야 말로 그가 줄곧 찾아다니던 최악의 전장 아닐까. 물론 이렇게 되면 정면 승부시 승산은 거의 0% 이지만.
"그리고 그 케이란 남자와 같이 있다는 베르단디란 여신도 한 번 보고 싶고 말이지. 굉장한 미인이라며?"
갑자기 마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흥!! 걔보다 내가 훨씬 더 예뻐!"
"훗, 넌 지금 네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거냐? 미숙하군."
"뭐라고!!!!"
-쿠우우웅!!
그 순간 클라우드 게이트 쪽에서 폭음이 울려 펴졌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언쟁을 중단하고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강력한 열선이 클라우드 게이트 상층부 외벽을 뚫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혹시 가이버의 메가 스매셔 아닐까? 어쨌든 이제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마라는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고 베루더는 흥분된 표정으로 자기의 주 무기인 톰슨 기관단총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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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우우웅!!
"뭐, 뭐냐! 이 진동은!!"
level 4 실험실로 달려가고 있던 하이퍼 조아노이드 부대는 97층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자 다들 당황해 하였다. 이 크고 견고한 건물을 이렇게나 진동 시킬 정도라면 굉장히 큰 폭발이 있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날 만한 곳은 바로 이들의 목적지인 level 4 실험실뿐이다. 이들은 서둘러 실험실 쪽으로 달려갔다.
하이퍼 조아노이드 부대는 드디어 level 4 실험실 부근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실험실 외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니 실험실 외벽뿐만이 아니다. 그 맞은편의 벽면에도 똑같은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주 강력한 열선이 벽들을 관통해 나간 것이다.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은 그 구멍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실험실 쪽 구멍에서 누군가가 튀어 나왔다.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처음 보는 조아노이드이고 다른 한 명은 다름 아닌 가이버 I 이였다! (베르단디는 너무 작은 몸이라서 이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찾았다!! 가이버다!!"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이 가이버 I에게 달려들었다. 가이버들은 하이퍼 조아노이드들과 교전을 하는 대신 맞은 편 구멍 쪽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하긴 기간틱이라면 몰라도 보통의 가이버로서는 한 번에 삼십 명이나 되는 하이퍼 조아노이드를 상대할 수가 없을 테니 도망치는 게 정상일 것이다.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은 즉시 가이버들을 쫓아갔다. 아니, 가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 앞질러가서 놈들의 도주로를 차단하라! 동쪽의 B반에게도 미리 연락해!!"
리더 격인 하이퍼 조아노이드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바로 그 순간 실험실 안쪽에서 이들을 노리고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가 밖으로 나와서는 리더의 목을 움켜잡았다. 바로 앱톰이었다. 리더가 그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앱톰의 체조직과 리더의 몸이 융합되기 시작했다.
-슈욱! 슈우욱!!
"끄...끄어어!!"
"대장!!"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이 리더를 구하기 위해 앱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앱톰의 몸에 손을 댄 이들은 그 즉시 앱톰의 체조직에 융합되기 시작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앱톰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촉수가 자라나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서 그 근처에 있던 모든 하이퍼 조아노이드를 칭칭 감았다. 마치 문어처럼 촉수로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을 포획한 앱톰은 그대로 그들을 융합포식하기 시작했다.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을 잡아먹는 앱톰의 얼굴은 광기를 띄고 있었다.
<크하하하!!!>
"끄아아아!!!"
"커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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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탁탁!!
케이와 하야미, 베르단디는 열심히 앱톰의 열선포가 만들어낸 통로를 따라 뛰고 있었다. 상상외로 아주 강력한 열선이었다. level 4 실험실뿐만 아니라 빔의 진행 방향에 있던 벽이란 벽은 모조리 다 뚫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달리기 아주 좋은 길이 생기긴 했지만. 어쩌면 혹시나 클라우드 게이트의 외벽까지 다 뚫어 버렸을 수도 있다. 잘만하면 이대로 밖으로 달아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여기는 지상에서 400m나 위쪽이지만 케이가 하늘을 날 수 있으니 탈출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까 전에 케이들은 실험실을 나서자마자 하이퍼 조아노이드 보안 부대에게 들키고 말았다. 당연히 놈들이 쫓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이 추격해 오지 않았다. 케이는 바로 그 점이 불안했다. 혹시나 지름길로 앞질러 가서 미리 함정을 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케이들은 지금 원래 있던 통로를 따라 가고 있는게 아니라 앱톰의 열선포가 벽들을 뚫어서 만들어진 최단 코스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길 이외에 지름길이란 건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케이의 헤드센서에도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의 반응이 감지되지 않았다.
-끼릭!
"응?"
"케이씨?"
케이가 달리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하야미와 베르단디도 그 자리에 멈췄다. 한시가 급한데 케이는 지금 뭐하는 걸까? 케이가 멈춘 이유는 헤드 센서에 아주 강력한 생명 반응이 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반응. 바로 그 순간 이들의 뒤 쪽에서 뭔가가 바닥을 울리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앱톰이었다!
-쿠쿠쿠쿠!!
<크워어어어!!!!>
"애...앱톰?!!"
그러나 평소의 앱톰의 모습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사인중 버전의 잘 정돈된 전투 형태가 아니라 수십 마리의 조아노이드를 아무렇게나 한꺼번에 뭉쳐놓은 것만 같은 혼돈스러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앱톰의 몸 여기저기에는 미처 다 흡수되지 못한 조아노이드들의 머리며 팔, 다리 등이 어지럽게 달려 있었다. 하이퍼 조아노이드 보안부대가 왜 안 쫓아오나 했더니 앱톰이 전부 다 자기 육체로 흡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앱톰의 얼굴은 광기로 가득차 있었다. 눈동자는 뒤집힌 채 흰자위만 보이는 것이 의식이 있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저럴 수가!! 저게 진짜 앱톰 맞아?!"
하야미는 저 지경의 앱톰을 보자 가짜 아닐까 의심도 해 봤지만 상대를 융합 포식하는 능력은 앱톰 밖에는 없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세 사람은 앱톰을 피해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무튼 지금의 앱톰은 의식이 전혀 없어 보이고 마땅히 저지할 방법도 없으니 그저 달아나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을 많이 융합 포식한 상태라서 그의 몸은 평소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 몸이 벽에 뚫린 구멍보다 더 커서 앱톰이 달릴 때마다 벽면이 박살나고 있었다.
"도대체 앱톰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에요?!"
달아나면서 베르단디는 케이와 하야미에게 물었다. 그녀로서는 앱톰의 저런 폭주 상태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 수가 없는 건 하야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케이는 조금이나마 짐작은 갔다. 어쩌면 지금의 앱톰은 의식불명 상태에서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는 건 아닐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원래 전투 생물의 본능, 즉 상대를 잡아먹어서 더욱 더 강해진다는 본능이 지금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요! 가이버의 무의식 전투처럼 말이죠!"
가이버 역시 저것과 비슷한 특성이 있으니 케이는 그런 추측을 한 것이다. 가이버도 식장자가 어떤 일로 인해 의식을 잃었을 때 식장자의 의식이 일정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게 되면 컨트롤 메탈이 강식장갑을 직접 통제해서 주위의 모든 적을 쓰러트리는 자기 방어 모드로 들어가게 된다. 바로 그 기능 때문에 케이의 아버지, 케이마가 목숨을 잃기도 했었다. 앱톰 역시 그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즉 아직 뇌의 복원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앱톰은 의식 불명 상태고 그 상태에서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 앱톰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하야미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만약 그 말대로 지금의 앱톰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거라면 아까 실험실에서 하야미는 왜 융합포식하지 않았을까? 먹잇감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째서? 게다가 케이를 융합 포식하는데 실패하자 바로 생체 열선포를 전개해서 발사까지 하지 않았는가. 생체 열선포는 그저 본능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니다. 상당히 복잡한 발생 기관을 가지고 있어 사용자는 특히 주의를 요망하는 물건이다. 게다가 그저 본능뿐이라면 가이버를 재차, 삼차 흡수하려고 시도했어야 한다. 본능이 지배하고 있는 몸이 한 번 실패했다고 일단 물러서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는 없으니까. 저게 정말 앱톰의 본능때문일까?
-휘이이잉~~
"다 왔어! 외벽이야!!"
한동안 뛰던 이들은 클라우드 게이트의 외벽에 도착하였다. 도착해 보니 외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 너머로 도쿄의 야경이 보였다. 워낙 높은 층인지라 강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앱톰이 발사했던 열선포는 결국 건물 전체를 다 관통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쉽게 밖으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 탈출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앱톰을 구하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앱톰이 저렇게 마구 폭주해대고 있으니 문제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앱톰을 구출할 수 있을까?
-쿠콰쾅!!
그 때 바로 뒤에서 벽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폭주 상태의 앱톰이 케이들을 바짝 쫓아 온 것이다. 케이와 베르단디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던 그 순간 갑자기 하야미가 건물 밖으로 뛰어내렸다.
"하야미씨!!"
-휘잉!
케이와 베르단디는 갑작스러운 하야미의 돌발 행동에 황급히 밖으로 뛰어내렸다. 케이는 중력 제어구를 조종해서 아래로 낙하중인 하야미를 따라 잡았다. 공중에서 하야미를 안아 든 케이는 그대로 위로 상승하였다. 케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야미는 하늘을 나는 능력이 없다. 그런데 뭘 믿고 97층에서 뛰어 내린단 말인가. 케이가 바로 쫓아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하야미씨! 대체 무슨 짓이에요? 큰일 날 뻔 했잖아요!"
"미안.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널 앱톰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어."
하야미가 이런 짓을 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케이가 앱톰을 구출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머뭇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자기 몸을 던져 케이를 밖으로 끌어낸 것이다. 지금의 앱톰은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앱톰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푸슝!
하늘에 떠 있는 케이들의 옆으로 두 줄기의 레이저 광선이 스쳐 지나갔다. 깜짝 놀란 케이는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클라우드 게이트 97층의 아래쪽의 외벽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열린 곳에는 생체 열선포 장비형 조아노이드인 바모아 무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신의 명령에 따라 바모아 부대가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앱톰 문제에 정신이 팔려 그만 다른 적들의 존재를 간과하고 만 것이다.
-푸슝! 푸슝!!
"윽!"
곧장 다른 바모아들까지 케이들을 노리고 사격을 개시했다. 케이는 황급히 클라우드 게이트에서 멀어지려고 하였다. 하야미를 안은 채로 바모아 부대에 반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우선은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그러나 위협은 바모아뿐만이 아니었다.
"케이씨! 위에도 있어요!!"
베르단디가 위쪽을 가리키며 경고하였다. 그러자 마치 박쥐처럼 생긴 비행형 조아노이드 무리가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초기경계용 비행 조아노이드 '비카르르'였다.
<비카르르 부대여! 초음파를 방사하라. 목표는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이다!>
그 때 신의 사념파가 비카르르들에게 방사되었다. 그러자 비카르르들의 복부에 있는 초음파 방사기관에서 초음파가 방사되었다. 그러자 컨트롤 메탈에 스파크가 일면서 장애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케이에게도 가해졌다.
"우....우아아악!!!"
"케이씨!"
"케이! 왜 그래!!"
케이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였다. 잠시 버티던 케이는 그만 정신 집중이 풀리면서 중력 제어구를 컨트롤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곧 하야미를 안은 채로 아래로 돌덩어리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행 조아노이드인 비카르르는 조아노이드로 변신하면서 안구가 소실된다. 눈앞이 안 보이는 대신 복부에 초음파 방사기관이 생기면서 그걸 이용해서 전방의 상태를 살피게 된다. 박쥐가 눈이 거의 안 보이는데도 초음파 덕에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과 원리적으로는 같았다. 그런데 이 초음파가 뜻밖에도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비카르르의 초음파는 원래 무기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이버에게는 아주 잘 통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바람의 정령이여! 그대의 손길로 이들을 안아주오!"
-휘이이잉!!
베르단디가 황급히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그러자 추락중인 케이와 하야미의 몸 주변에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덕분에 케이의 추락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베르단디는 바람의 정령을 조종해서 케이들을 클라우드 게이트 바로 옆에 있던 도쿄 신도청 남탑 옥상위에 내려놓았다. 가이버 자체에게는 법술이 통하지 않지만 대신 그 주위에 바람의 정령을 둘러서 추락 속도와 추락 방향을 조종하는 것은 가능했다.
"케이씨! 괜찮으세요?"
"우...으...괘....괜찮아. 머리가 좀 아프지만..."
케이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함께 떨어진 하야미 역시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베르단디가 옆에서 바람의 정령으로 받쳐 주지 않았다면 둘 다 크게 다칠 뻔 했다. 하야미 같은 경우에는 아예 죽었을 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베르단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우웅!!
그러나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이들을 쫓아 앱톰이 도청 옥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상공에 떠 있던 비카르르 몇 마리를 잡아먹어 그 날개를 사용해서 천천히 날아서 내려오고 있었다. 여섯개의 박쥐 날개까지 달린 앱톰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 같아 보일 정도였다. 케이들은 바짝 긴장한 채 앱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앱톰은 케이들의 바로 앞 쪽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케이는 잔뜩 긴장하였다. 지금 이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앱톰은 마구잡이로 폭주하고 있고 클라우드 게이트의 벽면에는 바모아 부대가 케이들에게 생체 열선포를 겨누고 있다. 상공에는 비카르르들이 케이들의 머리 위를 견제하고 있었다. 탈출이 지극히 어려운 상태였다.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앱톰의 자아를 각성시켜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음, 그래. 바로 이거야.>
-슈우우
그 때 앱톰이 말을 했다. 말을 했다는 것은 의식을 회복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직후 앱톰의 몸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몸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여러 조아노이드를 마구잡이로 합쳐 놓은 듯 한 혼돈스러운 모습에서 균형 잡힌 체구로 변하기 시작했다. 앱톰이 의식을 회복한 것이 틀림없었다.
"애...앱톰?"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변신을 완료한 앱톰의 모습은 이전에 즐겨 쓰던 사인중 형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른팔에는 커다란 집게팔을 가지고 왼쪽에는 손대신 철퇴 비슷하게 생긴 추가 달렸으며 오른쪽 가슴은 뭔가 구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설마 아까 전에 흡수한 하이퍼 조아노이드들이 이전의 사인중 보다 더 전투력이 좋아서 바꾼 걸까?
<이제야 알겠어. 조아노이드와는 요령이 상당히 다르군. 크크크.>
이상한 건 또 있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달랐다. 케이들이 알고 있던 앱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처음 들어보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설마 변신하면서 목소리도 바꾼 걸까? 하지만 목소리와 전투력은 전혀 상관없는 문제. 그리고 이제까지 앱톰이 여러 형태로 변신을 했었지만 목소리 자체는 바뀐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꿀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애....앱톰? 정말 앱톰이야?"
<크크크, 천만에. 난 앱톰이 아니다. 애송이들아.>
"그렇다면 넌 누구냐!"
<내 이름은 카브라알. 12신장 멤버인 조아로드 카브라알님이시다.>
"뭐....뭐라고?!"
케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12신장 카브라알이라고? 그렇다는 것은 지금 앱톰의 몸은 카브라알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건가? 그렇게 본다면 아까까지의 앱톰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었다. 조종당하니까 케이들을 공격할 수밖에.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앱톰의 육체는 사념파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조아로드가 앱톰의 몸을 조종한단 말인가.
<전에는 한 번 놓쳤지만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가이버 I, 각오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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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다!! 리엔쯔이!!!"
-쿠우웅!!
아키토는 전속력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와펠다노스의 신모 드릴이 가르쳐 준 -와펠다노스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절단면의 위치로 날아갔다. 아키토는 주저 없이 바로 그 곳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차키잉!
아키토가 막 절단면을 통과한 직후 그제야 절단면이 차단되었다. 아키토는 간발의 차로 절단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비록 눈에는 절단면이 보이지 않았지만 위치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대로 절단면을 통과해 가다 보면 결국 리엔쯔이를 따라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바로 육탄전이다! 아키토는 그대로 풀 가속으로 절단면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아키토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졌다가 엉뚱한 방향에 나타나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 모습을 본 세 신장은 경악하였다. 특히나 리엔쯔이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이...이럴 수가! 절공참에 의한 도약의 궤적을 파악했다는 거냐?!!"
리엔쯔이는 양 팔의 절공도로 공간을 맘대로 열 수가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서 그 자신 역시 마음대로 공간 이동을 할 수가 있다. 그는 절공참을 시도하면서 아키토의 추격을 막기 위해 절공참을 구성하는 세 개의 점을 구성할 때 통상적인 이동을 한 것이 아니라 공간면을 열어서 공간이동을 해 가며 점을 구성하였다. 그러니 그냥 리엔쯔이를 눈으로 쫓으며 달려들어서는 절대로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 가 봐야 엉뚱한 장소로 순간이동될 뿐이다. 그런데 아키토는 바로 그 트릭을 간파해 낸 것이다. 그것도 아이러니하게도 와펠다노스의 신모 드릴 덕분에.
-쿠우우우!!!
아키토가 맹렬한 속도로 절단면들을 통과하고 있었다. 아키토는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절단면이 닫히는 순간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그는 리엔쯔이와의 거리를 착실히 좁히고 있었다. 리엔쯔이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그는 격투 전에는 극히 약한 타입의 조아로드였다. 이대로 기간틱 다크와 격투전이 벌어지게 되면 리엔쯔이의 패배가 확실했다.
그러나 리엔쯔이에게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그래, 어서 오너라. 여기까지 왔을 때가 너의 최후다!'
사실 리엔쯔이의 바로 앞에는 또 하나의 절단면이 열려 있었다. 물론 리엔쯔이는 이것을 아직 통과하지 않았다. 절단면이 닫히는 것은 어떤 물체든지 간에 그 면을 통과하던가 리엔쯔이의 의지에 따라서 닫히게 되는 때다. 절단면이 열린 모습은 리엔쯔이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지금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아키토 역시 이 절단면이 보이지 않는다. 리엔쯔이를 다 따라잡은 줄 알고 돌진해 온 기간틱 다크는 바로 이 절단면에 의해 리엔쯔이를 사정권에 둔 시점에서 전혀 엉뚱한 장소로 이동되게 된다. 그리고 그 절단면의 출구가 있는 곳은 바로!
<와펠다노스...! 부탁해!>
<그래, 걱정 마.>
-키이이잉!!
리엔쯔이가 와펠다노스에게 텔레파시로 절단면의 출구를 알려주었다. 와펠다노스는 즉시 절단면의 출구가 있는 곳에 자신의 신모 드릴을 대기 시켰다. 리엔쯔이의 바로 앞에 있는 절단면으로 기간틱 다크가 들어가게 되면 출구로 나오는 즉시 신모 드릴에 온 몸을 꿰뚫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두 사람의 마지막 카드였다. 발카스 역시 잔뜩 긴장한 채로 이 작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리엔쯔이와 와펠다노스의 체력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이쪽이 불리했다. 하지만 어찌됐든지 간에 이제 곧 승부가 갈릴 것이다.
-투우웅!!!
"빠져나왔다!! 마지막 절단면! 각오해라, 리엔쯔이!!!!"
드디어 아키토가 '마지막 절단면'을 빠져 나왔다. 그의 눈에 드디어 리엔쯔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이대로 리엔쯔이에게 돌진해서 육탄전을 걸게 되면.... 반드시 이긴다! 리엔쯔이는 지친건지 아니면 체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정지해 있을 뿐이었다. 아키토는 순식간에 리엔쯔이의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
'후후...그럼 잘 가거라. 기간틱 다크.'
맹렬히 날아오는 걸 보니 역시나 아키토는 또 하나의 절단면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와펠다노스의 신모 드릴의 이동을 보고 절단면의 도약 궤적을 파악해 낸 것은 확실히 놀랍기는 하지만 리엔쯔이라고 그런 것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리엔쯔이는 속으로 쾌제를 불렀다. 이제 승부가 난다!
-휘이이잉!!
"엔쯔이!! 뒤를 조심해!!"
바로 그 순간 와펠다노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리엔쯔이가 뒤를 돌아본 그 순간 그를 향해 뭔가 검은 색의 물체가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리엔쯔이가 그것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그 물체는 바로 등 뒤까지 날아왔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리엔쯔이의 등에 부딪혔다.
-투웅!
"우왓!!"
정체불명의 물체가 부딪힌 덕분에 리엔쯔이는 그 반동으로 앞으로 튕겨졌다. 바로 그 순간 맹렬히 날아오고 있던 아키토가 부스터를 끄고 중력 제어구를 조종해서 곧장 그 자리에 정지하였다. 리엔쯔이의 바로 코앞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앞으로 튕겨진 리엔쯔이의 몸이 기간틱 다크와 충돌하는 대신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로 절단면이었다. 아키토를 잡기 위해 쳐둔 함정에 자기가 먼저 빠진 것이다!
-키이이잉!! 퍼퍼퍽!!!
"커허헉!!"
절단면의 출구로 빠져나온 리엔쯔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와펠다노스의 신모 드릴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리엔쯔이가 먼저 빠져나오는 바람에 미처 드릴을 치우지 못한 것이다. 순식간에 리엔쯔이의 온 몸에 와펠다노스의 드릴들이 박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와펠다노스와 발카스가 경악하였다.
"엔쯔이!!"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큰 부상을 당한 리엔쯔이는 그대로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절단면이 닫히기 시작했다! 리엔쯔이가 통과하는 바람에 절단면의 차단 스위치가 작동한 것이다. 그의 몸은 절단면의 입구와 출구 사이에 그대로 걸쳐졌다. 그러나 부상의 정도가 심한 리엔쯔이는 절단면이 닫히기 전에 그 곳을 빠져나올 힘이 없었다.
-차키이이이잉!!!!
"엔쯔이이이이!!!!"
와펠다노스의 비명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결국 리엔쯔이가 빠져 나오기 전에 절단면은 닫혀 버렸고 그 바람에 리엔쯔이의 몸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동강난 그의 육신이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아키토는 리엔쯔이를 비웃었다.
"그러 길래 내가 말했잖아, 리엔쯔이. 각오하라고."
리엔쯔이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와펠다노스가 신모를 조작해서 그를 받아 내었다. 그리고 우라누스의 성궤 위로 올려서 발카스의 바로 앞에 내려놓았다. 발카스는 황급히 리엔쯔이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엔쯔이! 정신 차리게!"
"우....우......"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리엔쯔이는 조아 크리스털의 힘 덕분에 아직 숨은 간신히 붙어 있었다. 그러나 몸이 완전히 두 토막이 나 버렸고 잘린 부위가 너무 위쪽이라서 심장까지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상태였다. 리엔쯔이는 상반신 일부와 오른팔, 머리만이 남은 상태였다. 지금 이 상태로는 얼마 살지 못한다. 어서 빨리 조제실로 데려가서 응급 처치를 해야 했다.
"후후후, 그런 뻔 한 수법은 나한테는 안 통한다고 했었을 텐데."
아키토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카스와 와펠다노스는 분노의 눈길로 아키토를 쏘아 보았다. 그런데 아키토의 주위를 어떤 검은색 물체가 빙빙 돌고 있었다. 저게 바로 아까 리엔쯔이를 절단면으로 밀어 넣은 물체였다. 그런데 저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물건일까?
"이게 뭔지 궁금하지?"
아키토가 비아냥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 순간 물체가 회전을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회전이 멈추고 물체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자 발카스와 와펠다노스는 경악하였다. 그 물체는 바로 아까 잘린 기간틱 다크의 오른 다리였다! 오른 다리는 그대로 잘린 부위에 붙었고 순식간에 잘린 부위가 치료되기 시작했다.
기간틱의 전신에는 에너지 앰프가 분포돼 있다. 이 에너지 앰프는 기간틱이 폭발적인 괴력을 낼 수 있게 해 주는 에너지원이지만 동시에 신체 각 부를 컨트롤 하는 제어 장치의 역할도 수행한다. 가이버의 신체는 어느 한 부분이 잘려 나가게 되면 그 조직은 컨트롤 메탈의 제어에서 해방되므로 원래의 강식생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어차피 영양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조직은 얼마안가 괴사하게 된다. 하지만 기간틱은 조금 다르다. 어느 한 부분이 잘려 나간다 해도 잘려나간 부분의 에너지 앰프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조직은 괴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방금 전처럼 잘려 나간 부분을 기간틱의 듀얼 컨트롤 메탈로 통제해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있다. 맨 처음에 절공참에 당했던 왼쪽 어깨 장식은 에너지 앰프가 망가져서 곧 괴사했지만 스스로 잘랐던 오른쪽 다리는 에너지 앰프가 무사했기 때문에 이렇게 아키토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난 팔 다리 하나쯤 잃는다고 해서 전투력이 격감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오히려 이렇게 찬스를 이끌어낼 도구로서 쓸 수도 있어."
저렇게 기간틱에 대한 설명을 적에게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아키토의 여유에 와펠다노스와 발카스는 기가 막혔다. 어차피 그 광경을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기능에 대한 건 적에게는 숨겨야 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도 자기 입으로 술술 불었다는 것은 너희들은 어차피 들어도 이걸 역이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아키토는 두 신장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와펠다노스가 다시 신모 드릴들을 일제히 전개하였다.
"이노오옴!!! 그렇다면 이번에야 말로 내 마창으로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 주마!!"
-키이이잉!!
와펠다노스의 신모 드릴들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키토는 그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흥, 절공참에 의한 변칙적인 기습이 없는 신모 드릴 따위로는 날 절대 못 이겨."
사실 따지고 보면 와펠다노스 혼자서는 기간틱 다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신모가 아무리 강인하고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해도 고주파 소드나 소닉 버스터등의 공격에는 무력하고 또한 신모를 완전히 전개하게 되면 와펠다노스는 바리어를 칠 에너지가 남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기간틱의 강력한 빔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된다. 지금까지 와펠다노스가 기간틱 다크와 대등한 대결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리엔쯔이와의 합동 공격 덕분이었다. 그것이 무너진 지금 와펠다노스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맘대로 지껄여봐라!! 애송아!!!!"
-키이이이잉!!!
와펠다노스의 신모가 전부 총동원 되었다. 신모들은 이리저리 뭉쳐져서 강력한 위력의 신모 드릴이 되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아까보다 훨씬 많았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아키토의 주위를 완벽하게 둘러쌌다. 머리 위나 발아래, 양 옆. 아키토 주위 360도 전부를 신모 드릴이 차단하였다.
"어떠냐! 이것이 바로 나의 필살기, '마창 포위진'이다!! 360도 전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이 마창들을 피할 수 있겠느냐!!"
신모 드릴들이 맹렬히 회전하면서 아키토에게 돌진해 왔다. 아키토는 이번 만큼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신모 드릴이 모든 방향을 완전히 에워싼 채 동시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는 한 쪽을 고주파 소드로 베어버려서 포위진을 뚫는다고 해도 다른 쪽에서 순식간에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리어로 버텨 볼까? 그러나 버티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신모 드릴의 파괴력으로 볼 때 바리어가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모 아니면 도다! 한 쪽을 무너트려서 즉시 풀 가속으로 탈출하면..... 응?!'
-키이이이!! 키이이.....
그 때 갑자기 신모 드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금방이라도 덮쳐올 듯이 맹렬하게 회전하던 신모들이 공격을 멈추자 아키토는 의아해 하였다. 멈출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 뿐 만이 아니라 신모의 움직임 그 자체가 아주 멈췄다. 마치 죽은 것처럼. 그리고 신모에서 갑자기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연기는 이내 더욱 짙어져서 주위 시야를 뿌옇게 하였다. 설마 무슨 연막 같은 걸까? 아니, 연막은 절대 아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는 것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는 연막 보다는 그냥 드릴로 덮치는 게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타임 리미트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신모의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와펠다노스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발카스에게 말했다. 사실 신모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와펠다노스의 에너지가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격이 멈춘 것이다. 와펠다노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카스는 신음성을 흘렸다. 이제 다 끝났다. 와펠다노스마저 전투력을 상실해서 이제 더 이상 기간틱 다크를 상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놈에게 우라누스의 성궤가 유린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아니.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어떠한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놈에게 그걸 넘겨줄 수는 없어!'
발카스는 사념파를 방출하였다. 이 사념파는 평소에 조아노이드를 통솔할 때 쓰던 방식과는 다른 주파수대의 사념파였다. 발카스가 이 사념파를 방출하는 것은 아주 최악의 사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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