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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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part 2.-
제14화 - 세 신장의 함정 -
도쿄 중심가의 어느 빌딩 옥상 위에 세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들은 바로 12신장 멤버들로서 한 명은 다부진 체격에 얼굴에 특이한 문양을 새겨 넣은 흑인인 쿨메그닉, 또 한명은 검은 터번에 마찬가지로 검은 색 망토로 온 몸을 두른 자빌, 마지막은 아주 조그만 체구의 노인인 카브라알이었다. 특이하게도 카브라알은 가부좌를 튼 채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해서 다른 두 사람과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것 같았다.
"괜찮을까? 푸르크슈탈의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말하면 그 녀석이 그러라고 허가해 줄 거 같아? 이런 일을?"
지금 이들은 도쿄 한 가운데서 그들이 세운 모종의 계획을 시도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반 시민의 피해가 매우 클 것이 뻔했기에 일본 지부 최고 책임자인 푸르크슈탈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 뻔했다. 자빌은 바로 그 점을 염려했지만 쿨메그닉은 그저 콧방귀만 뀌었다.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작전은 꼭 필요했고 푸르크슈탈에게 이걸 얘기해봐야 방해만 놓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푸르크슈탈에게는 일언반구 없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지금 푸르크슈탈은 이들이 미국에 가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노사(老師 : 1. 나이 많은 중을 높여 이르는 말. 2 나이 많은 스승. ≒옹사.). 노사까지 이 일에 관심을 가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빌이 작은 체구의 노인, 카브라알에게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카브라알은 그저 허허 웃기만 하였다.
"허허, 뭐 나이 먹어갈수록 호기심만 늘어서 말이야."
카브라알은 그냥 저렇게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그 역시 가이버에 관해 흥미가 동했음은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자칫 잘못하면 알칸펠의 분노를 뒤집어 쓸 지도 모르는 이 계획에 동참한 것이리라. 이들 세 신장은 지금 알칸펠과 발카스가 그렇게도 신경 쓰는 가이버의 비밀을 벗겨내기 위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마침내 발카스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쇼를 시작하려면 일단 가이버를 불러내야겠지?"
미국에 나타난 검은 기간틱이 가이버 III라고 한다면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가이버는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라는 남자다. 그리고 그 남자에 대한 조사는 이미 다 완료된 상태다. 인상착의부터 시작해서 성격까지. 그리고 그의 성격은 아키토와는 달리 아주 여린 성격이란 것도 다 조사해 뒀다. 그렇다면 목표는 바로 가이버 I이다. 그리고 가이버 I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블랑카이 삼형제!"
쿨메그닉이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순식간의 그들 세 신장의 등 뒤에 세 명의 남자가 휙 나타나서는 무릎을 꿇었다. 이들이 바로 쿨메그닉이 말한 블랑카이 삼형제였다. 쿨메그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작전은 계획대로다. 실행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삼형제는 절도 있게 대답한 다음 곧장 어딘가로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세 신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선은 떡밥부터 던져놓는 것이 낚시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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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도쿄 시내는 예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12월의 찬바람이 행인들의 몸을 움츠려들게 하였다. 그 날 오후도 평소처럼 흘러가는 듯싶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긴 머리의 미인과 그녀를 수행하는 비서 한 명이 있었다.
"아가씨, 다음 일정은...."
"됐어. 흥미 없으니까 그건 나중으로 미뤄."
"저....하지만 그건 좀...."
"미루라면 미뤄!"
사요코는 비서에게 대뜸 화를 냈다. 비서는 더 이상 사요코에게 뭐라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비서의 옆에는 사요코가 구입한 명품 옷이나 장신구등이 담긴 쇼핑백이 잔뜩 있었다. 지금 사요코가 쇼핑한 물건들의 가격을 다 합치면 웬만한 봉급쟁이 몇 명의 일 년 연봉을 가볍게 넘어서는 수준이지만 일본 내에서 10대 재산가에 속하는 집안의 딸인 사요코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사요코가 정말로 사고 싶어서 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즉흥적으로 눈에 띄니까 산 것일 뿐이었다.
두어 달 전 요코하마의 아오시마 호텔 개관식에 참석했다가 죽을 뻔 했던 사요코는 그 이후 삶의 의욕이 떨어졌다. 그 때 기간틱 다크와 무라카미의 전투 도중 무라카미가 전개한 유사 블랙홀로 인해 바로 블랙홀 앞에 있던 아오시마 호텔은 큰 타격을 입었다. 호텔은 전체의 3분의 1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버렸고 남은 3분의 2도 블랙홀의 강력한 흡입력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안전진단결과 보수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판정을 받고 결국 개관한지 하루도 안 된 호텔을 철거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건물 자체가 좀 과장되게 말해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지경인지라 현재 조심스럽게 철거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로 인해 아오시마 그룹이 입은 금전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금전적 손실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개관 기념파티에 참석했던 각개 각층의 유명 인사들 전원이 죽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호텔에 투숙했던 사람들도 대부분이 희생됐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고 이로 인해 호텔 측에서 요코하마 시내에 큰 일이 벌어졌음에도 손님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다는 비난이 집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측근들의 권유를 받고 혼자 미리 대피한 도시유는 결국 살아남는 바람에 큰일이 벌어진걸 알았음에도 저만 살겠다고 혼자 도망쳤다는 비난까지 가세해서 아오시마 그룹은 도덕성에 크나 큰 상처까지 입고 말았다. 지금 도시유는 그 때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진단을 받고 현재 요양 중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해서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 사요코도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사요코 역시 블랙홀의 영향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지만.
하지만 그 사건 이후의 후유증을 겪기는 사요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알 수 없는 무기력이 온 몸을 휘감았고 어떤 일에도 흥미를 느끼질 못했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둬버리고 지금은 이렇게 의미 없는 쇼핑이나 하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부디 사요코씨 만큼은 진실을 봐 주셨으면 해요.'
왜 이때 베르단디의 말이 떠오를까. 자기보다 인기가 훨씬 많았던 그 얄미운 여자의 말이. 그 때 사요코의 오피스텔에서 마지막으로 베르단디를 본 이후 그 때의 말이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요코하마 사건 이후로 베르단디를 다시 만나봐서 베르단디가 말한 진실이란 것이 뭔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의 행방은 지금 오리무중이었다. 사요코가 수배해 줬던 원룸은 '원인모를' 화재로 잿더미가 돼 버렸고 그 이후로 베르단디 역시 사요코 앞에 나타나질 않았다. 설마 죽은 걸까?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걸까. 왠지 오늘따라 베르단디의 얼굴이 더 생각나는 사요코였다.
-콰아아앙!!!
사요코의 상념은 어딘가에서 들려온 폭음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웬 자동차 한 대가 어느 건물 벽면에 처 박힌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교통사고일까?
"꺄아아악!!"
그 때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또 뭔가 싶어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 쪽에 거대한 황색의 거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조아노이드?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모습은 크로노스 통제국에서 방송했던 우주의 테러리스트라고 하던 '가이버 기간틱'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저건 가이버? 게다가 그 때 베르단디는 가이버가 바로 케이라고 얘기했었다. 그렇다면 설마...
"케...케이? 저게 케이야?"
-푸슝!
그 때 가이버 기간틱의 이마에서 강력한 빔이 발사되었다. 그 빔은 진로 상에 있던 몇 명의 사람의 몸을 증발시키면서 도로변에 세워져있던 자동차에 명중하였다. 자동차는 그대로 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차가 폭발하는 것을 신호로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이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손에서 강력한 빔을 또 발사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폭사시켰다. 그 모습을 보며 사요코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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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드 게이트의 최상층부, 최고 간부 집무실인 클라우드 헤드 안에는 푸르크슈탈이 한창 집무 중이었다. 그러나 왠지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건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요 근래 들어 계속 그래왔었다. 어딘가 계속해서 마음 한 쪽 구석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기간틱 다크가 미국 애리조나 주의 본부 기지를 습격한지 벌써 한 달이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이 조용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다고나 할까. 분명 가이버 III는 뭔가 손에 넣으려고 본부 기지를 습격했을 거고 그걸 손에 넣었으니 본부 기지를 끝장내지 않고 철수한 것일 것이다. 분명 놈은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길....결국 주도권은 놈이 가지고 있는 거군.'
이쪽은 마키시마 아키토의 아지트를 알지 못하니 먼저 선공을 걸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결국 놈이 먼저 공격을 걸어오기 전 까지는 이쪽은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각지의 중요 시설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는 것 이외에는 할 게 없었다. 푸르크슈탈은 이런 상황이 정말 짜증났다.
-삐익! 삐익!
그 때 책상의 인터폰이 시끄럽게 울려대었다. 푸르크슈탈은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하는 푸르크슈탈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뭐야?! 가이버 기간틱이 나타났다고!!"
통화를 계속 하는 푸르크슈탈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 그로서는 놀라운 얘기뿐이었다. 가이버 기간틱이 오후에 갑자기 도쿄 시내 한 가운데에 나타나서는 일반 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장의 보고에 따르면 황색의 기간틱, 가이버 I의 기간틱 형태라는 것이었다. 가이버 I 이라면 모리사토 케이다. 여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모리사토 케이가 일반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한다니?
"이...일단 조아노이드 일개 대대를 현장으로 급파해라! 기간틱에게서 일반 시민을 최대한 지켜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에 회선을 연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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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부품만 더 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자기 방에서 한창 기계 제작에 열중하던 스쿨드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 그녀는 린드의 주 무기인 고주파 엑스의 계량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 유적 기지에서 급하게 제작한 고주파 엑스는 스쿨드의 예상대로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가이버의 고주파 소드와 같은 원리로 물체의 분자 결합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 어떠한 물체도 단숨에 베어버리는 능력을 발휘한 고주파 엑스는 분명 린드의 공격력을 한층 더 상승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도 노출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사용시간이 짧다는 점. 격투 무기로서의 내구성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린드가 사용하기에 편한 크기로 맞추려다 보니 배터리에 쓸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부족했고 그 덕분에 사용 시간이 겨우 20분 정도밖에 안 됐던 것이다.
단시간 승부라면 모르겠지만 저번처럼 승부가 길어지게 되거나 적들이 끊임없이 증원돼서 어쩔 수 없이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이쪽이 너무 위험했다. 린드는 얼마 전에 엔자임 III들과의 전투에서 이 점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래서 스쿨드에게 이 부분의 개선을 요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크로노스의 눈을 피해 숨어사는 처지, 옛날처럼 맘 편히 밖에 나가 부품을 사오거나 모아올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로 누군가에게 배달을 시킬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 집은 외부에는 빈집으로 알려져 있으니 사람이 출입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는 것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있는 거 가지고 최대한 어떻게 해 보는 것뿐이다.
"하다못해 천계에라도 갔다 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게이트는 왜 막은 거야!"
게이트는 봉쇄 중이었다. 천계에서는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크로노스의 천계 침공을 우려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지상에 남은 신족(베르단디들 이외에도 몇몇 신족들이 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띠고 지상계에 체류 중이었다)들이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긴급 귀환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급 귀환 코스를 이용하게 되면 다시 지상계로 오는 것이 극히 힘들어진다. 천계 지휘부는 지상이 현재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지상계로 가도 된다는 허가 자체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스쿨드는 언니와 울드등을 두고 혼자서만 천계로 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계량 작업은 잘 돼가나?"
그 때 린드가 스쿨드의 방으로 들어왔다. 린드의 질문에 스쿨드는 그저 입술만 삐쭉였다. 잘 안되고 있다는 의사 표시다. 린드 역시 현재 여건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린드로서는 어서 빨리 고주파 엑스의 완성형을 천계로 보내고 싶어 했다. 울드와 베르단디가 시도했던 대 조아노이드용 법술 공격은 이전의 엔자임 III 들과의 싸움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반면 고주파 엑스는 천계의 전사들 모두에게 쥐어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물체든지 단 한 번에 잘라버릴 수 있으니까.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만들어 주기 바란다. 그 뒤에 이것의 샘플과 설계도를 천계로 보내면 그 쪽에서도 대량 생산을 할 수 있을 거다."
"우웅.....글쎄..."
스쿨드는 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무기를 개발한다는 것과 그것을 균일한 품질을 유지해가며 대량 생산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스쿨드의 고주파 엑스는 린드의 의뢰를 받고 만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스쿨드가 개인적인 취미삼아 만든 '작품'에 가까웠다. 대량 생산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과연 천계의 기술부가 스쿨드의 이런 설계를 양산에 적합한 수준으로 수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작업은 잘 돼가니?"
그 때 베르단디가 스쿨드의 방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손수 만든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그 것을 본 스쿨드는 일손을 멈추고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언니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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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콜록! 콜록!!"
울드의 방으로 들어선 베르단디가 본 것은 짙은 연기에 휩싸여 콜록거리는 울드의 모습이었다. 또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단디는 바람의 정령을 살짝 움직여서 연기를 환기구 쪽으로 밀어내었다. 지하실인 관계로 외부와 통하는 창문이 없는 이곳에서 유일한 환기 시설은 각방의 천정에 위치한 조그만 환기구뿐이었다. 건강에는 절대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언니, 괜찮으세요?"
"콜록, 아 고마워 베르단디. 에잉! 또 실패했어."
베르단디는 웃으면서 울드에게 홍차를 권했다. 울드는 실패한 것이 분하다는 듯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잠시 숨을 고른 울드는 베르단디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쳇. 벌써 몇 번째 실패한 건지도 모르겠어. 한 고비만 넘기면 될 것도 같은데."
"언니, 실험도 좋지만 좀 쉬어가면서 하세요. 이런 연기 계속 맡으면 몸에 안 좋아요."
"그럼 연기 안 나게끔 하면 되지. 성공하면 연기 안 난다고."
울드의 오기에 베르단디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엔자임 III 와의 대결 이후 위기감을 느낀 건 린드만은 아니었다. 울드 역시 그 동안 베르단디와 함께 준비했던 대 조아노이드용 법술이 엔자임 III 에게 통하지 않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물론 엔자임 III는 생물로서의 균형을 무시하고 비정상적으로 신진 대사 능력을 높여 전투 중에 받는 데미지 이상의 회복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 특별 제작품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울드로서는 크로노스의 무시무시한 고성능 조아노이드의 출현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그 어떠한 조아노이드라도 박살낼 수 있는 새로운 법술 체계를 연구 중이었다. 단순히 법술 공식의 배열 패턴을 바꾸거나 추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각종 약물의 조합등도 같이 연구하고 있었다.
"그 딴 놈들에게 그렇게나 밀리다니. 이건 이 울드님의 자존심 문제라고! 조아로드까지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최소한 조아노이드 정도는 우리도 쉽게 잡을 수 있어야지."
규오나 무라카미등이 보여줬던 조아로드의 전투력은 자존심 강한 울드조차도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그 부하인 조아노이드에게까지 밀린다는 건 울드의 자존심이 용납치가 않았다.
-덜컹!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깜짝 놀란 울드와 베르단디가 보니 핫세였다. 핫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두 사람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저...저기 선배! 빨리 나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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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2시경 도쿄 마루노우찌 오피스가에 나타난 가이버는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가했습니다. 이로 인해 길 가던 시민 다수가.....>
모두는 거실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TV 뉴스 속보를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거리 한 복판에 '가이버 기간틱'이 나타나서 시민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사망자만 무려 48명이 사망하고 중상자도 73명에 이르는 대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앵커의 멘트가 흘러나오면서 화면이 바뀌어서 당시 어떤 시민이 촬영한 테러 현장이 방송되었다. 그 화면에 나온 모습은 틀림없이 기간틱이었다. 화질이 그다지 좋지 않긴 했지만 형태는 분명히 가이버 기간틱이었다.
"세상에! 케이! 넌 오늘 줄곧 여기 있었잖아!"
"물론이죠! 전 아니라고요!"
지로의 말에 케이 역시 흥분돼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확실히 케이는 아니다. 그는 요 근래 밖에는 전혀 나가지 않았고 테러가 벌어졌을 시간에는 베르단디와 함께 거실에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에 가 있는 아키토가 일본으로 돌아와서 저런 짓을 벌였을 리도 없었다. 냉혹한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런 테러 행위를 벌일 인물도 아닌데다가 자료 화면에 나온 기간틱의 색깔은 틀림없이 황색이었다. 아키토의 기간틱 형태는 검은색이기 때문에 한 눈에 구별된다. 그렇다면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가짜다."
린드는 바로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이 아니라면 뻔할 뻔자다. 크로노스가 만들어낸 가짜 가이버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아,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가이버가 또 다시 출현했다고 합니다!>
그 때 뉴스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앵커는 흥분된 표정으로 속보를 전했다.
<장소는 네리마구 아카리가오카 파크시티라고 합니다. 고층 아파트가 밀집된 베드타운인지라 큰 피해가 예상됩니다. 현재 경찰과 통제국 요원들이 즉시 출동해서....>
아카리가오카는 수많은 아파트가 밀집된 곳이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그 곳에서 가짜 가이버가 날뛴다면 인명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거기까지 들은 케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뛰어나가려 하였다. 케이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깜짝 놀란 베르단디가 케이를 말렸다.
"케이씨! 잠깐만요! 이건 이상해요!"
"케이! 기다려! 이건 함정이다. 널 끌어내려는 함정이야!"
린드도 나서서 케이를 말렸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가짜 가이버를 내세워서 일반 시민을 인질삼아 케이를 끌어내려는 흉계였다. 지금 현장으로 나간다면 놈들의 흉계에 말려들게 된다. 게다가 베르단디나 린드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재 기간틱의 주도권은 아키토에게 있다. 기간틱을 먼저 식장해도 언제 어디서 아키토의 의지로 기간틱이 강제 해제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였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내가 안 나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돼!"
그러나 케이는 이미 각오를 굳혔다. 아키토라면 이 상황에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겠지만 케이는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베르단디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케이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
가이버로 변신한 케이는 은신처를 나섰다. 하늘로 떠오른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출동해도 괜찮을까? 베르단디들의 말대로 이건 케이를 끌어내려는 함정이 뻔했다. 만약 현지에 가서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마키시마 선배가 기간틱을 소환하게 되면 과연 나는 기간틱을 안 뺏길 수 있을까? 만약 기간틱을 전투 도중 빼앗기게 되면..... 케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함정이라도 자기가 빨리 가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그 문제는 그 때 가서 생각하자!
"가이버! 기간틱!!!"
-투우웅!!
케이의 등 뒤에 번데기가 공간 이동해왔다. 그리고 껍질이 열리면서 기간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간틱은 여러 조각으로 분리 되서는 순식간에 케이에게 달라붙었다. 마지막으로 듀얼 컨트롤 메탈이 가이버 I의 컨트롤 메탈과 합체하는 것으로 모든 변신이 마무리 되었다. 듀얼 컨트롤 메탈이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키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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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저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만...."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크로노스 미국 지부의 최고 간부 집무실에서 신은 애리조나 본부기지의 발카스와 화상 통신 중이었다. 이들은 지금 일본의 푸르크슈탈이 전해 온 긴급 사태에 대해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푸르크슈탈의 급보가 전해져 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일본 현지 시간은 오후 2시 반 경) 놀랍게도 가이버 기간틱이 일반 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가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황색의 기간틱, 아마도 가이버 I의 기간틱이라는 것이었다. 검은 기간틱, 기간틱 다크의 가이버 III라면 혹시 모른다. 크로노스가 파악하고 있기로는 마키시마 아키토는 냉혹, 무자비한 인물로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는 마음이 여리고 타인의 희생을 두려워하다 시피 하는 인물이라고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번 사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이 여리다는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반 시민들을 학살하고 다닌다?
"일단 푸르크슈탈이 보내온 영상을 보면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겉모습만 보자면 말이죠."
-"으음...하지만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군. 가이버 III라면 또 모르겠지만.... 하지만 달리 생각할 여지는 없군."
"그리고 또 한 가지 걸리는 게 좀 있습니다."
-"이번엔 또 뭔가?"
"저랑 같이 미국에 있던 카브라알, 자빌, 쿨메그닉. 이들 세 명의 소재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어디 간다는 언질도 없었고요."
물론 명색이 최고 간부라는 12신장 멤버들이 무슨 애들도 아니고 어디 갈 때마다 나 어디 간다고 일일이 신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기간틱 다크가 본부 기지를 뒤집어엎다시피 한 게 불과 한 달 전이고 기간틱 다크가 언제 신장 멤버들을 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언제든지 서로 지원할 수 있도록 서로의 소재를 수시로 알리기로 해 놓고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사라지다니. 게다가 그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 일본에서 가이버 I의 기간틱이 날뛰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어딘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드는 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발카스도 마찬가지였다.
-"흐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하이퍼 조아노이드의 추가 재조제 보고가 올라왔었지. 별거 아닌 일이라고 하기에 그냥 허가해 줬었는데....."
"뭔가 짚이시는 데라도 있으신지요?"
-"그 보고가 올라온 곳이 바로 아프리카의 애브저 조제센터였어."
"아프리카! 그렇다면 그 하이퍼 조아노이드는...!"
-"그래, 쿨메그닉의 부하야. 블랑카이 삼형제라고 하더군."
이미 한 번 조제를 받은 조아노이드를 또 다시 재조제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조아노이드의 조제는 원래의 유전자를 극단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미 그 완성도가 충분히 입증된 조아노이드라 할지라도 기본 소재가 될 인간의 상태에 따라 실패하거나 전혀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친 조아노이드의 유전자를 또다시 변형 시키는 건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다. 때문에 특별히 고성능으로 만들어져서 중요한 전력인 하이퍼 조아노이드의 재조제의 경우에는 무조건 작업 전에 애리조나 본부기지로 재조제 사실을 보고해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최종 결재자가 발카스임은 물론이다.
-"그 때는 하도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어서 나도 좀 귀찮은 마음에 그냥 허가해 줬지만.....이제 보니 어딘가 좀 수상하군. 뭘 어떻게 했는지는 조사해 봐야겠지만. 그것보다 신."
"예,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 일본으로 가 주지 않겠나? 푸르크슈탈이 걱정이야."
사실 신은 당장이라도 일본으로 가고픈 마음뿐이었다. 그 역시 일본에 혼자 남은 푸르크슈탈이 걱정됐던 것이다. 푸르크슈탈의 성격상 일반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가이버 기간틱을 저지하려 할 거고 자칫 잘못하면 가이버 기간틱과 1:1로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가 기간틱이라면 1:1은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고 그래서 이렇게 발카스에게 출동 허락을 받을 생각으로 먼저 통신을 한 것이다. 다행히 발카스가 먼저 그 얘기를 꺼냈으니 허락은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신은 왠지 불안했다. 바로 이 곳 미국에 남아 있을 가이버 III의 존재가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애리조나 본부기지를 덮친 이후 한 달간 녀석은 별다른 행동 없이 아주 조용했다. 오히려 그게 더 불안했다. 마치 지금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가 워싱턴을 비운 직후 또 다시 기간틱 다크가 본부기지에 쳐들어가면.....
-"그건 걱정 말게. 이번엔 나도 나름대로 대비해 뒀으니까. 그것보다 자넨 어서 빨리 일본에 가 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전 지금 당장 일본으로 떠나겠습니다."
-"아, 그리고 쿨메그닉 녀석들을 조심하게. 전부터 불온한 언동들이 많았던 녀석들이라 걱정이야. 이번 일에 녀석들이 관계돼 있을지도 모르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신은 발카스와의 화상 통신을 종료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일반 민항기를 이용하면 지구 반대편의 일본까지는 13~15시간이나 걸린다. 그러나 고위 간부 전용의 초음속 여객기를 이용하면 2~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12신장 멤버인 신이라면 언제든지 탈 수 있다. 그는 비서에게 급히 여객기를 준비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출발 준비를 하면서 신은 잔뜩 긴장하였다. 마침내 시작되었다. 신과 푸르크슈탈, 발카스가 우려하던 12신장 내부의 붕괴라는 최악의 사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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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콰쾅!!
아카리가오카의 고층 아파트 밀집 지구 여기저기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가이버 기간틱'이 바로 이곳에 나타나서 여기저기를 마구 파괴하고 다녔던 것이다. 베드타운으로서 고층 아파트가 잔뜩 들어서 있던 아카리가오카는 순식간에 이곳을 탈출하려는 피난민들로 대 혼란에 빠졌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 및 크로노스 통제국 요원들은 성난 물소떼처럼 마구 쏟아져 나오는 민간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도로는 이미 차도나 인도의 구분이 없었다. 사람들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쏟아져 나왔다.
"카메라 저리 치우지 못해! 언론의 자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피난에 방해 되잖아!"
또 한 곳에서는 크로노스 요원들이 취재 나온 각 언론사 취재팀을 현장에서 강제로 끌어내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고 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특종'을 건지려고 하는 기자들은 오히려 가이버가 날뛰고 있다는 현장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들이 피난민들의 길을 가로막는 형국이 됐던 것이다. 몇몇 기자들은 항의도 해 봤지만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통제국 요원들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할 수도 없었다. 지상뿐만 아니라 상공에도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방송국 취재 헬기들과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날아오른 비행형 조아노이드 부대 간에 술래잡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통제국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질서정연하게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베드타운으로서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인지라 이들을 다 대피시키는 것도 오늘밤이 다 가기 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교통수단은 전부 다 마비된 상태라서 사람들은 순전히 각자의 두 다리만으로 '뛰어서' 대피해야 했고 이 인파 속에서 그 속도는 뻔 할 뻔자였다.
"제 6소대 통신 두절!!"
"기간틱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조아노이드는 전혀 상대가 안 됩니다!"
"젠장!! 녀석은 괴물이냐!"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의 안전을 최대한 지키려면 별 수 없이 기간틱과 교전을 해서 놈이 움직이는 범위를 최소한으로 좁혀두어야 했다. 그러나 워낙에 전투력의 격차가 큰 지라 오히려 손실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기간틱은 그를 저지하는 조아노이드들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그 파괴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있었다. 현장의 임시 지휘소에는 기간틱과 교전에 들어갔다가 부대가 전멸했다는 비보만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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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 신나게 날뛰고 있구먼."
쿨메그닉과 자빌, 카브라알은 어느 아파트 옥상에서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이버 기간틱으로 변장한 쿨메그닉의 직속 부하인 블랑카이 삼형제가 날뛰고 있는 모습이 잘 보였다. 지금 블랑카이 형제들은 마음껏 날뛰라는 쿨메그닉의 명령을 아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녀석이 안 나타나지?"
"혹시 이대로 안 오는 거 아냐?"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는 바로 진짜 가이버 기간틱인 케이였다. 이들은 케이를 은신처에서 끌어내기 위해 가이버 기간틱처럼 겉모양을 꾸민 블랑카이 삼형제로 하여금 일반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시킨 것이다. 강식장갑의 비밀을 풀자면 일단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을 손에 넣어야 하고 그러자면 우선은 가이버를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가이버 III, 마키시마 아키토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아마도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함정이란 것은 누구나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아키토는 이들의 계획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누가 얼마나 죽던 간에 절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는 다르다. 함정이란 것을 알기는 하겠지만 일반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바로 달려올 것이다. 이들이 파악하고 있던 케이의 성격으로 보자면 틀림없었다.
물론 이 작전은 일반 시민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런 걸 일본지부장인 푸르크슈탈이 허가할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그들은 푸르크슈탈 몰래 일본에 들어와서는 역시 푸르크슈탈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푸르크슈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불같이 화를 낼게 뻔했지만 그건 나중에 가서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세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해서 가이버 기간틱을 잡으면 더욱 더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호오? 저기 오는데."
쿨메그닉이 하늘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구름을 뚫고 아래로 급속도로 하강하는 물체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진짜 가이버. 가이버 I의 기간틱, 모리사토 케이였다. 드디어 주연 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쿨메그닉이 사념파로 블랑카이 삼형제에게 명령을 내렸다.
<놈이 왔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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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는 아파트 단지에서 테러를 벌이고 있는 가짜 기간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방 역시 케이의 접근을 감지했는지 케이 쪽으로 다가왔다. 둘은 곧 근처의 아파트 옥상에 내려 앉아 대치하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버 기간틱. 보기 좋게 걸려들었구나."
가짜 기간틱이 모든 게 뜻대로 됐다는 듯이 케이에게 말했다. 가짜 기간틱은 크기와 전체적인 윤곽, 몸의 색깔만 비슷했을 뿐 가이버 기간틱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짜 티가 났다. 아마도 크기가 기간틱과 비슷한 조아노이드를 다시 재조제해서 기간틱의 모양을 흉내 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가이버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충분히 가이버 기간틱으로 오인되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감히 이런 비열한 수를 쓰다니!!"
-위잉!
케이는 일반 시민들을 공격한 가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며 메인 헤드빔포에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즉시 가짜를 향해 헤드빔을 발사하였다.
"더 이상 네 놈들 뜻대로는 안 된다!!"
-푸슝!!
기간틱의 강력한 헤드빔이 가짜 기간틱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헤드빔이 명중하기 직전 가짜 가이버가 갑자기 셋으로 분리되었다! 빔이 명중해서 산산조각이 난 것은 아니다. 틀림없이 스스로 셋으로 나눈 것이다.
"아니!!"
-휘익! 휘리릭!!
셋으로 나눠진 가짜 기간틱의 각 부분은 빠른 속도로 케이 주변을 맴돌았다. 전혀 뜻밖의 상황에 케이는 당황해 하였다. 당황해하는 케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주변을 맴돌던 가짜 기간틱의 각 부분은 이윽고 한 곳에 모였다. 그리고 다시 하나로 합체 하였다.
"자, 어떠냐! 우리 블랑카이 삼형제의 진짜 모습이!"
"우리들은 삼위일체의 능력을 가진 하이퍼 조아노이드."
"우리 삼형제가 모이면 그 전투력은 백만 배가 된다!"
자기들이 무슨 겟타 로보(...)라도 되는 듯이 허풍을 떨어대는 블랑카이 삼형제였다. 이들은 원래 친형제들로서 하나하나의 능력은 별로 대단치 않지만 하나로 합체 했을 경우 비행능력도 생기며 강력한 열선포와 압축 작열탄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쿨메그닉들의 이번 계획을 위해 합체했을 경우 가이버 기간틱처럼 보일 수 있도록 외형을 바꾸는 추가 조제를 받았다. 삼형제 중 장남이 머리와 어깨 부분, 차남이 팔과 가슴, 막내가 하반신을 구성하게 된다.
<블랑카이 삼형제. 적당히 데리고 놀거라.>
그 때 쿨메그닉의 사념파가 이들 삼형제에게 내려져왔다. 명령을 수신한 이들은 곧장 다음 행동을 개시하였다. 블랑카이 삼형제가 오른 팔을 들어 옆쪽의 다른 아파트를 겨냥하였다.
"이곳은 수도권 최대의 인구 밀집지역. 사람들이 전부 대피하려면...."
-우웅!!
블랑카이 삼형제의 팔이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바닥에 위치한 발사구가 열렸다. 그 것을 본 케이는 저 놈들이 지금 뭔가를 발사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채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파앙!
-콰콰쾅!!!
케이가 그걸 막기 위해 달려들기도 전에 블랑카이 삼형제의 팔에서 강력한 압축 작열탄이 발사되었다. 발사된 작열탄은 그대로 그 쪽 방향에 있던 다른 아파트의 벽면에 정통으로 명중하였다. 폭발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육중한 콘크리트 파편들이 아래쪽에서 도망치고 있던 사람들 머리 위를 덮쳤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말았다. 블랑카이 삼형제는 곧장 다른 손을 들어 반대편을 겨냥하였다.
"이번엔 이쪽이다."
"그만둬!!"
케이가 블랑카이 삼형제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삼형제는 다른 아파트를 겨누던 손을 돌려 케이에게 곧장 압축 작열탄을 발사하였다. 케이의 허점을 유도하기 위한 페이크였던 것이다.
"멍청한 놈!"
-파앙!! 콰쾅!!!
"으아악!!"
압축 작열탄을 복부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케이는 그대로 뒤로 튕겨나가 아파트 아래로 추락하였다. 케이는 그대로 바로 아래에 있던 자전거 보관소 위에 떨어졌다. 물론 기간틱의 장갑 외피는 매우 강력하기에 이 정도 공격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지만 그래도 충격이 만만치 않은지라 케이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으윽..! 이런 실수를...! 응?"
그 때 케이의 눈앞에 일단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른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아이 한 명이었다. 아무래도 가족인 것 같았는데 무슨 사정으로 아직도 대피를 못한 것 같았다. 이들은 자기들 바로 눈앞에 그 흉포하다는 '가이버 기간틱'이 떨어져 내리자 공포에 질려서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본 케이는 깜짝 놀랐다. 그 남자 아이는 케이도 알고 있는 아이였다.
"세...센다?! 네가 여길 어떻게...."
"에? 나...나를...알아요?"
센다는 가이버 기간틱이 자기 이름을 한 번에 알아맞히고 아는 체를 하자 크게 놀랐다. 물론 케이야 스쿨드의 남자 친구(...)인 센다를 모를 리가 없었지만 지금 케이는 기간틱으로 변신해 있는 상태였으니 센다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케이는 몰랐지만 센다네 가족은 이 곳 아파트촌에 살고 있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그 순간 케이는 그만 자기가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센다에게 자기 정체를 알리면 자칫 센다까지 크로노스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케이는 어떻게 이를 수습할지 고민이 되었다.
-끼릭!
"앗! 이건!"
그러나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헤드 센서가 지금 이 쪽을 향해 공격을 퍼부으려는 존재를 감지하고 경고를 보내왔다. 바로 상공에 떠 있는 블랑카이 삼형제였다. 블랑카이 삼형제는 케이에게 다시 압축 작열탄을 발사하려고 하였다. 지금 여기서 그 공격을 피하면 이 자리에 있는 센다네 가족이 위험해진다!
-파아앙!
-콰아아앙!!!
블랑카이 삼형제는 인정사정없이 압축 작열탄을 발사하였다. 작열탄은 그대로 케이들이 있던 곳에 명중해서 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로 인해 일어난 먼지 때문에 잠시 현장이 보이질 않았다. 블랑카이 삼형제는 잠시 그 자리에서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먼지 구름이 서서히 가라 앉아 갔다.
-우우웅!
그러나 놀랍게도 가이버는 건재했다. 아니 가이버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민간인 셋도 무사했다. 작열탄이 떨어지기 직전에 가이버 기간틱이 재빨리 바리어를 전개한 것이다. 제대로 맞았다면 만만찮은 타격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블랑카이 삼형제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폭발이 일어나자 죽는 줄로만 알고 공포에 질려 있던 센다네 가족은 자기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케이는 간신히 타이밍을 맞추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바리어를 거두고는 센다네 가족에게 말했다.
"여긴 위험합니다. 어서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케이는 블랑카이 삼형제를 격퇴하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케이가 쫓아오자 블랑카이 삼형제는 즉시 어딘가로 날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센다네 가족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전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가이버 기간틱이 둘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중에 한 명이 틀림없이 자기들을 구해준 것이다. 특히나 센다는 가이버 기간틱이 자기를 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까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았다.
"가이버는 우리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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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후, 드디어 날파리가 거미줄에 걸려들었군."
아파트 옥상 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세 신장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적당한 때를 봐서 자기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 상대는 그 강력하다는 가이버 기간틱이다. 그러나 이쪽에는 조아로드가 세 명이나 모여 있고 게다가 이곳은 수도권 최대의 인구 밀집지역. 아직 사람들이 다 대피하려면 멀었다. 이런 곳에서는 빔 한번 잘못 날렸다가는 그대로 수십 명이 떼죽음 당하기 딱 좋았다. 그런 상황에서 케이가 마음 먹은 대로 싸우기는 힘들었다.
"응? 저게 누구야?"
그 때 쿨메그닉이 하늘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하늘 위에서 현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세 신장은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푸르크슈탈이었다. 현장의 조아노이드 부대가 도저히 가이버 기간틱을 막을 수 없다고 본 푸르크슈탈이 측근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직접 현장으로 날아온 것이다. 세 신장은 일이 재밌게 됐다는 듯이 웃었다.
"좋아 마침 잘 됐군. 그럼 먼저 푸르크슈탈의 실력을 좀 감상해 볼까?"
아무리 상황이 케이에게 불리하다 해도 상대는 기간틱. 기간틱과 싸우다가 누구 한 명이라도 어디가 잘못되면 그건 큰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때맞춰 푸르크슈탈이 나타나 줘서 다행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푸르크슈탈이 기간틱과 싸워서 놈의 힘을 빼 줄 것이고 그러면 이쪽이 싸우기가 한결 더 쉬워질 것이다. 뭐 거의 초죽음을 만들어주면 더 좋고. 어쨌든 그들이 필요한 건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이니까 나머지 몸이 어찌되든지 상관없었다.
"싸움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지."
"노사께선 음흉하세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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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이럴 수가!!"
현장에 도착한 푸르크슈탈은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아카리가오카 아파트촌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가이버 III라면 몰라도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가 이런 무차별 테러를 저지르다니. 정말 그가 파악하고 있는 그 케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콰콰쾅!!
저 멀리서 새로운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기간틱은 그 쪽에 있는 것만 같았다. 푸르크슈탈은 황급히 그 쪽으로 날아갔다. 폭발은 한 지점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가면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하하!! 왜 그래? 기간틱! 우리를 빨리 막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돼!"
블랑카이 삼형제는 도망치면서 여기저기에다 대고 무차별적으로 압축 작열탄을 난사하였다. 작열탄에 맞은 아파트 건물 여기저기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커다란 파편들이 바로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덮쳤다. 희생자가 점점 늘어나자 케이는 더욱 더 당황해 하였다.
"그...그만 둬!!"
케이의 절규에 블랑카이 삼형제는 그저 콧방귀만 뀌었다.
"히히히! 이 재밌는 걸 왜 그만 둬?"
"억울하면 기가 스매셔라도 쏴 보시지 그래!"
"쏠 베짱이 있다면 말이야! 하하하하!!!"
하긴 멈추란다고 멈출 놈들이라면 애초에 이런 짓을 안했겠지. 이제 승부를 지을 순간이 왔다. 케이는 주먹을 꽉 쥐고 주먹의 에너지 앰프에 힘을 모았다. 상당히 비행속도가 빠른 놈들이긴 하지만 이 기간틱이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기가 스매셔 같은 건 저 따위 녀석들에게는 에너지 낭비다. 케이의 컨트롤 메탈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 쪽 가슴에 위치한 중력 제어장치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투우우웅!!!
그 순간 기간틱의 등 부분에 자리 잡고 있던 고속 추진용 부스터가 가동되었다. 마치 전투기의 애프터버너처럼 기간틱은 등 부분의 부스터를 가동시켜 순간적으로 그 거체를 가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케이는 순식간에 블랑카이 삼형제를 따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놈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이야아아압!!!"
"아..아니! 부스터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간틱의 능력에 블랑카이 삼형제는 공포에 질렸다. 기간틱이 너무 빨리 다가와서 합체를 풀어 피할 여유조차 없었다.
-퍼어어엉!!!
케이는 급가속으로 블랑카이 삼형제에게 파고들어 기간틱의 그래비티 펀치(Gravity Punch)를 날렸다. 기간틱의 강력한 주먹에 얻어맞은 블랑카이 삼형제는 그 자리에서 셋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무리 셋이 모여 백만 파워라고 떠벌려도 조아노이드 따위는 기간틱의 상대가 아니었다. 케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 희생자는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앗!"
그 순간 케이는 자신의 바로 앞 쪽에 강력한 에너지 반응을 느꼈다. 케이의 앞에 어떤 남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보통 인간은 분명히 아니다. 게다가 저 얼굴, 예전에 TV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크로노스 12신장 멤버 중 한명이고 현 일본지부 총독인 푸르크슈탈이다! 드디어 진짜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Next episode 제15화 '맹격! 뇌신(雷神) 푸르크슈탈" coming soon.....
제14화 - 세 신장의 함정 -
도쿄 중심가의 어느 빌딩 옥상 위에 세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들은 바로 12신장 멤버들로서 한 명은 다부진 체격에 얼굴에 특이한 문양을 새겨 넣은 흑인인 쿨메그닉, 또 한명은 검은 터번에 마찬가지로 검은 색 망토로 온 몸을 두른 자빌, 마지막은 아주 조그만 체구의 노인인 카브라알이었다. 특이하게도 카브라알은 가부좌를 튼 채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해서 다른 두 사람과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것 같았다.
"괜찮을까? 푸르크슈탈의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말하면 그 녀석이 그러라고 허가해 줄 거 같아? 이런 일을?"
지금 이들은 도쿄 한 가운데서 그들이 세운 모종의 계획을 시도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반 시민의 피해가 매우 클 것이 뻔했기에 일본 지부 최고 책임자인 푸르크슈탈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 뻔했다. 자빌은 바로 그 점을 염려했지만 쿨메그닉은 그저 콧방귀만 뀌었다.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작전은 꼭 필요했고 푸르크슈탈에게 이걸 얘기해봐야 방해만 놓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푸르크슈탈에게는 일언반구 없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지금 푸르크슈탈은 이들이 미국에 가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노사(老師 : 1. 나이 많은 중을 높여 이르는 말. 2 나이 많은 스승. ≒옹사.). 노사까지 이 일에 관심을 가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빌이 작은 체구의 노인, 카브라알에게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카브라알은 그저 허허 웃기만 하였다.
"허허, 뭐 나이 먹어갈수록 호기심만 늘어서 말이야."
카브라알은 그냥 저렇게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그 역시 가이버에 관해 흥미가 동했음은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자칫 잘못하면 알칸펠의 분노를 뒤집어 쓸 지도 모르는 이 계획에 동참한 것이리라. 이들 세 신장은 지금 알칸펠과 발카스가 그렇게도 신경 쓰는 가이버의 비밀을 벗겨내기 위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마침내 발카스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쇼를 시작하려면 일단 가이버를 불러내야겠지?"
미국에 나타난 검은 기간틱이 가이버 III라고 한다면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가이버는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라는 남자다. 그리고 그 남자에 대한 조사는 이미 다 완료된 상태다. 인상착의부터 시작해서 성격까지. 그리고 그의 성격은 아키토와는 달리 아주 여린 성격이란 것도 다 조사해 뒀다. 그렇다면 목표는 바로 가이버 I이다. 그리고 가이버 I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블랑카이 삼형제!"
쿨메그닉이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순식간의 그들 세 신장의 등 뒤에 세 명의 남자가 휙 나타나서는 무릎을 꿇었다. 이들이 바로 쿨메그닉이 말한 블랑카이 삼형제였다. 쿨메그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작전은 계획대로다. 실행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삼형제는 절도 있게 대답한 다음 곧장 어딘가로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세 신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선은 떡밥부터 던져놓는 것이 낚시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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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도쿄 시내는 예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12월의 찬바람이 행인들의 몸을 움츠려들게 하였다. 그 날 오후도 평소처럼 흘러가는 듯싶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긴 머리의 미인과 그녀를 수행하는 비서 한 명이 있었다.
"아가씨, 다음 일정은...."
"됐어. 흥미 없으니까 그건 나중으로 미뤄."
"저....하지만 그건 좀...."
"미루라면 미뤄!"
사요코는 비서에게 대뜸 화를 냈다. 비서는 더 이상 사요코에게 뭐라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비서의 옆에는 사요코가 구입한 명품 옷이나 장신구등이 담긴 쇼핑백이 잔뜩 있었다. 지금 사요코가 쇼핑한 물건들의 가격을 다 합치면 웬만한 봉급쟁이 몇 명의 일 년 연봉을 가볍게 넘어서는 수준이지만 일본 내에서 10대 재산가에 속하는 집안의 딸인 사요코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사요코가 정말로 사고 싶어서 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즉흥적으로 눈에 띄니까 산 것일 뿐이었다.
두어 달 전 요코하마의 아오시마 호텔 개관식에 참석했다가 죽을 뻔 했던 사요코는 그 이후 삶의 의욕이 떨어졌다. 그 때 기간틱 다크와 무라카미의 전투 도중 무라카미가 전개한 유사 블랙홀로 인해 바로 블랙홀 앞에 있던 아오시마 호텔은 큰 타격을 입었다. 호텔은 전체의 3분의 1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버렸고 남은 3분의 2도 블랙홀의 강력한 흡입력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안전진단결과 보수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판정을 받고 결국 개관한지 하루도 안 된 호텔을 철거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건물 자체가 좀 과장되게 말해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지경인지라 현재 조심스럽게 철거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로 인해 아오시마 그룹이 입은 금전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금전적 손실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개관 기념파티에 참석했던 각개 각층의 유명 인사들 전원이 죽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호텔에 투숙했던 사람들도 대부분이 희생됐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고 이로 인해 호텔 측에서 요코하마 시내에 큰 일이 벌어졌음에도 손님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다는 비난이 집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측근들의 권유를 받고 혼자 미리 대피한 도시유는 결국 살아남는 바람에 큰일이 벌어진걸 알았음에도 저만 살겠다고 혼자 도망쳤다는 비난까지 가세해서 아오시마 그룹은 도덕성에 크나 큰 상처까지 입고 말았다. 지금 도시유는 그 때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란 진단을 받고 현재 요양 중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해서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 사요코도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사요코 역시 블랙홀의 영향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지만.
하지만 그 사건 이후의 후유증을 겪기는 사요코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알 수 없는 무기력이 온 몸을 휘감았고 어떤 일에도 흥미를 느끼질 못했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둬버리고 지금은 이렇게 의미 없는 쇼핑이나 하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부디 사요코씨 만큼은 진실을 봐 주셨으면 해요.'
왜 이때 베르단디의 말이 떠오를까. 자기보다 인기가 훨씬 많았던 그 얄미운 여자의 말이. 그 때 사요코의 오피스텔에서 마지막으로 베르단디를 본 이후 그 때의 말이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요코하마 사건 이후로 베르단디를 다시 만나봐서 베르단디가 말한 진실이란 것이 뭔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의 행방은 지금 오리무중이었다. 사요코가 수배해 줬던 원룸은 '원인모를' 화재로 잿더미가 돼 버렸고 그 이후로 베르단디 역시 사요코 앞에 나타나질 않았다. 설마 죽은 걸까?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걸까. 왠지 오늘따라 베르단디의 얼굴이 더 생각나는 사요코였다.
-콰아아앙!!!
사요코의 상념은 어딘가에서 들려온 폭음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웬 자동차 한 대가 어느 건물 벽면에 처 박힌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교통사고일까?
"꺄아아악!!"
그 때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또 뭔가 싶어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 쪽에 거대한 황색의 거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조아노이드?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모습은 크로노스 통제국에서 방송했던 우주의 테러리스트라고 하던 '가이버 기간틱'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저건 가이버? 게다가 그 때 베르단디는 가이버가 바로 케이라고 얘기했었다. 그렇다면 설마...
"케...케이? 저게 케이야?"
-푸슝!
그 때 가이버 기간틱의 이마에서 강력한 빔이 발사되었다. 그 빔은 진로 상에 있던 몇 명의 사람의 몸을 증발시키면서 도로변에 세워져있던 자동차에 명중하였다. 자동차는 그대로 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차가 폭발하는 것을 신호로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이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손에서 강력한 빔을 또 발사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폭사시켰다. 그 모습을 보며 사요코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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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우드 게이트의 최상층부, 최고 간부 집무실인 클라우드 헤드 안에는 푸르크슈탈이 한창 집무 중이었다. 그러나 왠지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건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요 근래 들어 계속 그래왔었다. 어딘가 계속해서 마음 한 쪽 구석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기간틱 다크가 미국 애리조나 주의 본부 기지를 습격한지 벌써 한 달이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이 조용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다고나 할까. 분명 가이버 III는 뭔가 손에 넣으려고 본부 기지를 습격했을 거고 그걸 손에 넣었으니 본부 기지를 끝장내지 않고 철수한 것일 것이다. 분명 놈은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길....결국 주도권은 놈이 가지고 있는 거군.'
이쪽은 마키시마 아키토의 아지트를 알지 못하니 먼저 선공을 걸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결국 놈이 먼저 공격을 걸어오기 전 까지는 이쪽은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각지의 중요 시설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는 것 이외에는 할 게 없었다. 푸르크슈탈은 이런 상황이 정말 짜증났다.
-삐익! 삐익!
그 때 책상의 인터폰이 시끄럽게 울려대었다. 푸르크슈탈은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하는 푸르크슈탈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뭐야?! 가이버 기간틱이 나타났다고!!"
통화를 계속 하는 푸르크슈탈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 그로서는 놀라운 얘기뿐이었다. 가이버 기간틱이 오후에 갑자기 도쿄 시내 한 가운데에 나타나서는 일반 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장의 보고에 따르면 황색의 기간틱, 가이버 I의 기간틱 형태라는 것이었다. 가이버 I 이라면 모리사토 케이다. 여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모리사토 케이가 일반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한다니?
"이...일단 조아노이드 일개 대대를 현장으로 급파해라! 기간틱에게서 일반 시민을 최대한 지켜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에 회선을 연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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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부품만 더 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자기 방에서 한창 기계 제작에 열중하던 스쿨드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 그녀는 린드의 주 무기인 고주파 엑스의 계량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 유적 기지에서 급하게 제작한 고주파 엑스는 스쿨드의 예상대로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가이버의 고주파 소드와 같은 원리로 물체의 분자 결합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 어떠한 물체도 단숨에 베어버리는 능력을 발휘한 고주파 엑스는 분명 린드의 공격력을 한층 더 상승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도 노출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사용시간이 짧다는 점. 격투 무기로서의 내구성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린드가 사용하기에 편한 크기로 맞추려다 보니 배터리에 쓸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부족했고 그 덕분에 사용 시간이 겨우 20분 정도밖에 안 됐던 것이다.
단시간 승부라면 모르겠지만 저번처럼 승부가 길어지게 되거나 적들이 끊임없이 증원돼서 어쩔 수 없이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이쪽이 너무 위험했다. 린드는 얼마 전에 엔자임 III들과의 전투에서 이 점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래서 스쿨드에게 이 부분의 개선을 요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크로노스의 눈을 피해 숨어사는 처지, 옛날처럼 맘 편히 밖에 나가 부품을 사오거나 모아올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로 누군가에게 배달을 시킬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 집은 외부에는 빈집으로 알려져 있으니 사람이 출입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는 것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있는 거 가지고 최대한 어떻게 해 보는 것뿐이다.
"하다못해 천계에라도 갔다 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게이트는 왜 막은 거야!"
게이트는 봉쇄 중이었다. 천계에서는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크로노스의 천계 침공을 우려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지상에 남은 신족(베르단디들 이외에도 몇몇 신족들이 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띠고 지상계에 체류 중이었다)들이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긴급 귀환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급 귀환 코스를 이용하게 되면 다시 지상계로 오는 것이 극히 힘들어진다. 천계 지휘부는 지상이 현재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지상계로 가도 된다는 허가 자체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스쿨드는 언니와 울드등을 두고 혼자서만 천계로 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계량 작업은 잘 돼가나?"
그 때 린드가 스쿨드의 방으로 들어왔다. 린드의 질문에 스쿨드는 그저 입술만 삐쭉였다. 잘 안되고 있다는 의사 표시다. 린드 역시 현재 여건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린드로서는 어서 빨리 고주파 엑스의 완성형을 천계로 보내고 싶어 했다. 울드와 베르단디가 시도했던 대 조아노이드용 법술 공격은 이전의 엔자임 III 들과의 싸움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반면 고주파 엑스는 천계의 전사들 모두에게 쥐어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물체든지 단 한 번에 잘라버릴 수 있으니까.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만들어 주기 바란다. 그 뒤에 이것의 샘플과 설계도를 천계로 보내면 그 쪽에서도 대량 생산을 할 수 있을 거다."
"우웅.....글쎄..."
스쿨드는 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무기를 개발한다는 것과 그것을 균일한 품질을 유지해가며 대량 생산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스쿨드의 고주파 엑스는 린드의 의뢰를 받고 만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스쿨드가 개인적인 취미삼아 만든 '작품'에 가까웠다. 대량 생산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과연 천계의 기술부가 스쿨드의 이런 설계를 양산에 적합한 수준으로 수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작업은 잘 돼가니?"
그 때 베르단디가 스쿨드의 방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손수 만든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그 것을 본 스쿨드는 일손을 멈추고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언니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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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콜록! 콜록!!"
울드의 방으로 들어선 베르단디가 본 것은 짙은 연기에 휩싸여 콜록거리는 울드의 모습이었다. 또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단디는 바람의 정령을 살짝 움직여서 연기를 환기구 쪽으로 밀어내었다. 지하실인 관계로 외부와 통하는 창문이 없는 이곳에서 유일한 환기 시설은 각방의 천정에 위치한 조그만 환기구뿐이었다. 건강에는 절대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언니, 괜찮으세요?"
"콜록, 아 고마워 베르단디. 에잉! 또 실패했어."
베르단디는 웃으면서 울드에게 홍차를 권했다. 울드는 실패한 것이 분하다는 듯 홍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잠시 숨을 고른 울드는 베르단디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쳇. 벌써 몇 번째 실패한 건지도 모르겠어. 한 고비만 넘기면 될 것도 같은데."
"언니, 실험도 좋지만 좀 쉬어가면서 하세요. 이런 연기 계속 맡으면 몸에 안 좋아요."
"그럼 연기 안 나게끔 하면 되지. 성공하면 연기 안 난다고."
울드의 오기에 베르단디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엔자임 III 와의 대결 이후 위기감을 느낀 건 린드만은 아니었다. 울드 역시 그 동안 베르단디와 함께 준비했던 대 조아노이드용 법술이 엔자임 III 에게 통하지 않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물론 엔자임 III는 생물로서의 균형을 무시하고 비정상적으로 신진 대사 능력을 높여 전투 중에 받는 데미지 이상의 회복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 특별 제작품이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울드로서는 크로노스의 무시무시한 고성능 조아노이드의 출현에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그 어떠한 조아노이드라도 박살낼 수 있는 새로운 법술 체계를 연구 중이었다. 단순히 법술 공식의 배열 패턴을 바꾸거나 추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각종 약물의 조합등도 같이 연구하고 있었다.
"그 딴 놈들에게 그렇게나 밀리다니. 이건 이 울드님의 자존심 문제라고! 조아로드까지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최소한 조아노이드 정도는 우리도 쉽게 잡을 수 있어야지."
규오나 무라카미등이 보여줬던 조아로드의 전투력은 자존심 강한 울드조차도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그 부하인 조아노이드에게까지 밀린다는 건 울드의 자존심이 용납치가 않았다.
-덜컹!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깜짝 놀란 울드와 베르단디가 보니 핫세였다. 핫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두 사람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저...저기 선배! 빨리 나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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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2시경 도쿄 마루노우찌 오피스가에 나타난 가이버는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가했습니다. 이로 인해 길 가던 시민 다수가.....>
모두는 거실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TV 뉴스 속보를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거리 한 복판에 '가이버 기간틱'이 나타나서 시민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사망자만 무려 48명이 사망하고 중상자도 73명에 이르는 대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앵커의 멘트가 흘러나오면서 화면이 바뀌어서 당시 어떤 시민이 촬영한 테러 현장이 방송되었다. 그 화면에 나온 모습은 틀림없이 기간틱이었다. 화질이 그다지 좋지 않긴 했지만 형태는 분명히 가이버 기간틱이었다.
"세상에! 케이! 넌 오늘 줄곧 여기 있었잖아!"
"물론이죠! 전 아니라고요!"
지로의 말에 케이 역시 흥분돼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확실히 케이는 아니다. 그는 요 근래 밖에는 전혀 나가지 않았고 테러가 벌어졌을 시간에는 베르단디와 함께 거실에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에 가 있는 아키토가 일본으로 돌아와서 저런 짓을 벌였을 리도 없었다. 냉혹한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런 테러 행위를 벌일 인물도 아닌데다가 자료 화면에 나온 기간틱의 색깔은 틀림없이 황색이었다. 아키토의 기간틱 형태는 검은색이기 때문에 한 눈에 구별된다. 그렇다면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가짜다."
린드는 바로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이 아니라면 뻔할 뻔자다. 크로노스가 만들어낸 가짜 가이버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아,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가이버가 또 다시 출현했다고 합니다!>
그 때 뉴스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앵커는 흥분된 표정으로 속보를 전했다.
<장소는 네리마구 아카리가오카 파크시티라고 합니다. 고층 아파트가 밀집된 베드타운인지라 큰 피해가 예상됩니다. 현재 경찰과 통제국 요원들이 즉시 출동해서....>
아카리가오카는 수많은 아파트가 밀집된 곳이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그 곳에서 가짜 가이버가 날뛴다면 인명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거기까지 들은 케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뛰어나가려 하였다. 케이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깜짝 놀란 베르단디가 케이를 말렸다.
"케이씨! 잠깐만요! 이건 이상해요!"
"케이! 기다려! 이건 함정이다. 널 끌어내려는 함정이야!"
린드도 나서서 케이를 말렸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가짜 가이버를 내세워서 일반 시민을 인질삼아 케이를 끌어내려는 흉계였다. 지금 현장으로 나간다면 놈들의 흉계에 말려들게 된다. 게다가 베르단디나 린드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재 기간틱의 주도권은 아키토에게 있다. 기간틱을 먼저 식장해도 언제 어디서 아키토의 의지로 기간틱이 강제 해제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였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내가 안 나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돼!"
그러나 케이는 이미 각오를 굳혔다. 아키토라면 이 상황에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겠지만 케이는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베르단디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케이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
가이버로 변신한 케이는 은신처를 나섰다. 하늘로 떠오른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출동해도 괜찮을까? 베르단디들의 말대로 이건 케이를 끌어내려는 함정이 뻔했다. 만약 현지에 가서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마키시마 선배가 기간틱을 소환하게 되면 과연 나는 기간틱을 안 뺏길 수 있을까? 만약 기간틱을 전투 도중 빼앗기게 되면..... 케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함정이라도 자기가 빨리 가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그 문제는 그 때 가서 생각하자!
"가이버! 기간틱!!!"
-투우웅!!
케이의 등 뒤에 번데기가 공간 이동해왔다. 그리고 껍질이 열리면서 기간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간틱은 여러 조각으로 분리 되서는 순식간에 케이에게 달라붙었다. 마지막으로 듀얼 컨트롤 메탈이 가이버 I의 컨트롤 메탈과 합체하는 것으로 모든 변신이 마무리 되었다. 듀얼 컨트롤 메탈이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키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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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저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만...."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크로노스 미국 지부의 최고 간부 집무실에서 신은 애리조나 본부기지의 발카스와 화상 통신 중이었다. 이들은 지금 일본의 푸르크슈탈이 전해 온 긴급 사태에 대해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푸르크슈탈의 급보가 전해져 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일본 현지 시간은 오후 2시 반 경) 놀랍게도 가이버 기간틱이 일반 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가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황색의 기간틱, 아마도 가이버 I의 기간틱이라는 것이었다. 검은 기간틱, 기간틱 다크의 가이버 III라면 혹시 모른다. 크로노스가 파악하고 있기로는 마키시마 아키토는 냉혹, 무자비한 인물로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는 마음이 여리고 타인의 희생을 두려워하다 시피 하는 인물이라고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번 사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이 여리다는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반 시민들을 학살하고 다닌다?
"일단 푸르크슈탈이 보내온 영상을 보면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겉모습만 보자면 말이죠."
-"으음...하지만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군. 가이버 III라면 또 모르겠지만.... 하지만 달리 생각할 여지는 없군."
"그리고 또 한 가지 걸리는 게 좀 있습니다."
-"이번엔 또 뭔가?"
"저랑 같이 미국에 있던 카브라알, 자빌, 쿨메그닉. 이들 세 명의 소재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어디 간다는 언질도 없었고요."
물론 명색이 최고 간부라는 12신장 멤버들이 무슨 애들도 아니고 어디 갈 때마다 나 어디 간다고 일일이 신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기간틱 다크가 본부 기지를 뒤집어엎다시피 한 게 불과 한 달 전이고 기간틱 다크가 언제 신장 멤버들을 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언제든지 서로 지원할 수 있도록 서로의 소재를 수시로 알리기로 해 놓고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사라지다니. 게다가 그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 일본에서 가이버 I의 기간틱이 날뛰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어딘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드는 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발카스도 마찬가지였다.
-"흐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하이퍼 조아노이드의 추가 재조제 보고가 올라왔었지. 별거 아닌 일이라고 하기에 그냥 허가해 줬었는데....."
"뭔가 짚이시는 데라도 있으신지요?"
-"그 보고가 올라온 곳이 바로 아프리카의 애브저 조제센터였어."
"아프리카! 그렇다면 그 하이퍼 조아노이드는...!"
-"그래, 쿨메그닉의 부하야. 블랑카이 삼형제라고 하더군."
이미 한 번 조제를 받은 조아노이드를 또 다시 재조제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조아노이드의 조제는 원래의 유전자를 극단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미 그 완성도가 충분히 입증된 조아노이드라 할지라도 기본 소재가 될 인간의 상태에 따라 실패하거나 전혀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친 조아노이드의 유전자를 또다시 변형 시키는 건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다. 때문에 특별히 고성능으로 만들어져서 중요한 전력인 하이퍼 조아노이드의 재조제의 경우에는 무조건 작업 전에 애리조나 본부기지로 재조제 사실을 보고해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최종 결재자가 발카스임은 물론이다.
-"그 때는 하도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어서 나도 좀 귀찮은 마음에 그냥 허가해 줬지만.....이제 보니 어딘가 좀 수상하군. 뭘 어떻게 했는지는 조사해 봐야겠지만. 그것보다 신."
"예,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 일본으로 가 주지 않겠나? 푸르크슈탈이 걱정이야."
사실 신은 당장이라도 일본으로 가고픈 마음뿐이었다. 그 역시 일본에 혼자 남은 푸르크슈탈이 걱정됐던 것이다. 푸르크슈탈의 성격상 일반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가이버 기간틱을 저지하려 할 거고 자칫 잘못하면 가이버 기간틱과 1:1로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가 기간틱이라면 1:1은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고 그래서 이렇게 발카스에게 출동 허락을 받을 생각으로 먼저 통신을 한 것이다. 다행히 발카스가 먼저 그 얘기를 꺼냈으니 허락은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신은 왠지 불안했다. 바로 이 곳 미국에 남아 있을 가이버 III의 존재가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애리조나 본부기지를 덮친 이후 한 달간 녀석은 별다른 행동 없이 아주 조용했다. 오히려 그게 더 불안했다. 마치 지금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가 워싱턴을 비운 직후 또 다시 기간틱 다크가 본부기지에 쳐들어가면.....
-"그건 걱정 말게. 이번엔 나도 나름대로 대비해 뒀으니까. 그것보다 자넨 어서 빨리 일본에 가 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전 지금 당장 일본으로 떠나겠습니다."
-"아, 그리고 쿨메그닉 녀석들을 조심하게. 전부터 불온한 언동들이 많았던 녀석들이라 걱정이야. 이번 일에 녀석들이 관계돼 있을지도 모르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신은 발카스와의 화상 통신을 종료하였다. 그리고 서둘러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일반 민항기를 이용하면 지구 반대편의 일본까지는 13~15시간이나 걸린다. 그러나 고위 간부 전용의 초음속 여객기를 이용하면 2~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12신장 멤버인 신이라면 언제든지 탈 수 있다. 그는 비서에게 급히 여객기를 준비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출발 준비를 하면서 신은 잔뜩 긴장하였다. 마침내 시작되었다. 신과 푸르크슈탈, 발카스가 우려하던 12신장 내부의 붕괴라는 최악의 사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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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콰쾅!!
아카리가오카의 고층 아파트 밀집 지구 여기저기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가이버 기간틱'이 바로 이곳에 나타나서 여기저기를 마구 파괴하고 다녔던 것이다. 베드타운으로서 고층 아파트가 잔뜩 들어서 있던 아카리가오카는 순식간에 이곳을 탈출하려는 피난민들로 대 혼란에 빠졌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 및 크로노스 통제국 요원들은 성난 물소떼처럼 마구 쏟아져 나오는 민간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도로는 이미 차도나 인도의 구분이 없었다. 사람들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쏟아져 나왔다.
"카메라 저리 치우지 못해! 언론의 자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피난에 방해 되잖아!"
또 한 곳에서는 크로노스 요원들이 취재 나온 각 언론사 취재팀을 현장에서 강제로 끌어내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고 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특종'을 건지려고 하는 기자들은 오히려 가이버가 날뛰고 있다는 현장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들이 피난민들의 길을 가로막는 형국이 됐던 것이다. 몇몇 기자들은 항의도 해 봤지만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통제국 요원들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할 수도 없었다. 지상뿐만 아니라 상공에도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방송국 취재 헬기들과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날아오른 비행형 조아노이드 부대 간에 술래잡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통제국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질서정연하게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베드타운으로서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인지라 이들을 다 대피시키는 것도 오늘밤이 다 가기 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교통수단은 전부 다 마비된 상태라서 사람들은 순전히 각자의 두 다리만으로 '뛰어서' 대피해야 했고 이 인파 속에서 그 속도는 뻔 할 뻔자였다.
"제 6소대 통신 두절!!"
"기간틱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조아노이드는 전혀 상대가 안 됩니다!"
"젠장!! 녀석은 괴물이냐!"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의 안전을 최대한 지키려면 별 수 없이 기간틱과 교전을 해서 놈이 움직이는 범위를 최소한으로 좁혀두어야 했다. 그러나 워낙에 전투력의 격차가 큰 지라 오히려 손실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기간틱은 그를 저지하는 조아노이드들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그 파괴 범위를 점차 넓혀가고 있었다. 현장의 임시 지휘소에는 기간틱과 교전에 들어갔다가 부대가 전멸했다는 비보만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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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 신나게 날뛰고 있구먼."
쿨메그닉과 자빌, 카브라알은 어느 아파트 옥상에서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이버 기간틱으로 변장한 쿨메그닉의 직속 부하인 블랑카이 삼형제가 날뛰고 있는 모습이 잘 보였다. 지금 블랑카이 형제들은 마음껏 날뛰라는 쿨메그닉의 명령을 아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녀석이 안 나타나지?"
"혹시 이대로 안 오는 거 아냐?"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는 바로 진짜 가이버 기간틱인 케이였다. 이들은 케이를 은신처에서 끌어내기 위해 가이버 기간틱처럼 겉모양을 꾸민 블랑카이 삼형제로 하여금 일반시민을 상대로 무차별 테러를 시킨 것이다. 강식장갑의 비밀을 풀자면 일단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을 손에 넣어야 하고 그러자면 우선은 가이버를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가이버 III, 마키시마 아키토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아마도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함정이란 것은 누구나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아키토는 이들의 계획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누가 얼마나 죽던 간에 절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는 다르다. 함정이란 것을 알기는 하겠지만 일반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바로 달려올 것이다. 이들이 파악하고 있던 케이의 성격으로 보자면 틀림없었다.
물론 이 작전은 일반 시민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런 걸 일본지부장인 푸르크슈탈이 허가할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그들은 푸르크슈탈 몰래 일본에 들어와서는 역시 푸르크슈탈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푸르크슈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불같이 화를 낼게 뻔했지만 그건 나중에 가서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세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해서 가이버 기간틱을 잡으면 더욱 더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호오? 저기 오는데."
쿨메그닉이 하늘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구름을 뚫고 아래로 급속도로 하강하는 물체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진짜 가이버. 가이버 I의 기간틱, 모리사토 케이였다. 드디어 주연 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쿨메그닉이 사념파로 블랑카이 삼형제에게 명령을 내렸다.
<놈이 왔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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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는 아파트 단지에서 테러를 벌이고 있는 가짜 기간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방 역시 케이의 접근을 감지했는지 케이 쪽으로 다가왔다. 둘은 곧 근처의 아파트 옥상에 내려 앉아 대치하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버 기간틱. 보기 좋게 걸려들었구나."
가짜 기간틱이 모든 게 뜻대로 됐다는 듯이 케이에게 말했다. 가짜 기간틱은 크기와 전체적인 윤곽, 몸의 색깔만 비슷했을 뿐 가이버 기간틱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짜 티가 났다. 아마도 크기가 기간틱과 비슷한 조아노이드를 다시 재조제해서 기간틱의 모양을 흉내 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가이버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충분히 가이버 기간틱으로 오인되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감히 이런 비열한 수를 쓰다니!!"
-위잉!
케이는 일반 시민들을 공격한 가짜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며 메인 헤드빔포에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즉시 가짜를 향해 헤드빔을 발사하였다.
"더 이상 네 놈들 뜻대로는 안 된다!!"
-푸슝!!
기간틱의 강력한 헤드빔이 가짜 기간틱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헤드빔이 명중하기 직전 가짜 가이버가 갑자기 셋으로 분리되었다! 빔이 명중해서 산산조각이 난 것은 아니다. 틀림없이 스스로 셋으로 나눈 것이다.
"아니!!"
-휘익! 휘리릭!!
셋으로 나눠진 가짜 기간틱의 각 부분은 빠른 속도로 케이 주변을 맴돌았다. 전혀 뜻밖의 상황에 케이는 당황해 하였다. 당황해하는 케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주변을 맴돌던 가짜 기간틱의 각 부분은 이윽고 한 곳에 모였다. 그리고 다시 하나로 합체 하였다.
"자, 어떠냐! 우리 블랑카이 삼형제의 진짜 모습이!"
"우리들은 삼위일체의 능력을 가진 하이퍼 조아노이드."
"우리 삼형제가 모이면 그 전투력은 백만 배가 된다!"
자기들이 무슨 겟타 로보(...)라도 되는 듯이 허풍을 떨어대는 블랑카이 삼형제였다. 이들은 원래 친형제들로서 하나하나의 능력은 별로 대단치 않지만 하나로 합체 했을 경우 비행능력도 생기며 강력한 열선포와 압축 작열탄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쿨메그닉들의 이번 계획을 위해 합체했을 경우 가이버 기간틱처럼 보일 수 있도록 외형을 바꾸는 추가 조제를 받았다. 삼형제 중 장남이 머리와 어깨 부분, 차남이 팔과 가슴, 막내가 하반신을 구성하게 된다.
<블랑카이 삼형제. 적당히 데리고 놀거라.>
그 때 쿨메그닉의 사념파가 이들 삼형제에게 내려져왔다. 명령을 수신한 이들은 곧장 다음 행동을 개시하였다. 블랑카이 삼형제가 오른 팔을 들어 옆쪽의 다른 아파트를 겨냥하였다.
"이곳은 수도권 최대의 인구 밀집지역. 사람들이 전부 대피하려면...."
-우웅!!
블랑카이 삼형제의 팔이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바닥에 위치한 발사구가 열렸다. 그 것을 본 케이는 저 놈들이 지금 뭔가를 발사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채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
-파앙!
-콰콰쾅!!!
케이가 그걸 막기 위해 달려들기도 전에 블랑카이 삼형제의 팔에서 강력한 압축 작열탄이 발사되었다. 발사된 작열탄은 그대로 그 쪽 방향에 있던 다른 아파트의 벽면에 정통으로 명중하였다. 폭발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육중한 콘크리트 파편들이 아래쪽에서 도망치고 있던 사람들 머리 위를 덮쳤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말았다. 블랑카이 삼형제는 곧장 다른 손을 들어 반대편을 겨냥하였다.
"이번엔 이쪽이다."
"그만둬!!"
케이가 블랑카이 삼형제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삼형제는 다른 아파트를 겨누던 손을 돌려 케이에게 곧장 압축 작열탄을 발사하였다. 케이의 허점을 유도하기 위한 페이크였던 것이다.
"멍청한 놈!"
-파앙!! 콰쾅!!!
"으아악!!"
압축 작열탄을 복부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케이는 그대로 뒤로 튕겨나가 아파트 아래로 추락하였다. 케이는 그대로 바로 아래에 있던 자전거 보관소 위에 떨어졌다. 물론 기간틱의 장갑 외피는 매우 강력하기에 이 정도 공격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지만 그래도 충격이 만만치 않은지라 케이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으윽..! 이런 실수를...! 응?"
그 때 케이의 눈앞에 일단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른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아이 한 명이었다. 아무래도 가족인 것 같았는데 무슨 사정으로 아직도 대피를 못한 것 같았다. 이들은 자기들 바로 눈앞에 그 흉포하다는 '가이버 기간틱'이 떨어져 내리자 공포에 질려서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본 케이는 깜짝 놀랐다. 그 남자 아이는 케이도 알고 있는 아이였다.
"세...센다?! 네가 여길 어떻게...."
"에? 나...나를...알아요?"
센다는 가이버 기간틱이 자기 이름을 한 번에 알아맞히고 아는 체를 하자 크게 놀랐다. 물론 케이야 스쿨드의 남자 친구(...)인 센다를 모를 리가 없었지만 지금 케이는 기간틱으로 변신해 있는 상태였으니 센다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케이는 몰랐지만 센다네 가족은 이 곳 아파트촌에 살고 있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그 순간 케이는 그만 자기가 실수를 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센다에게 자기 정체를 알리면 자칫 센다까지 크로노스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케이는 어떻게 이를 수습할지 고민이 되었다.
-끼릭!
"앗! 이건!"
그러나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헤드 센서가 지금 이 쪽을 향해 공격을 퍼부으려는 존재를 감지하고 경고를 보내왔다. 바로 상공에 떠 있는 블랑카이 삼형제였다. 블랑카이 삼형제는 케이에게 다시 압축 작열탄을 발사하려고 하였다. 지금 여기서 그 공격을 피하면 이 자리에 있는 센다네 가족이 위험해진다!
-파아앙!
-콰아아앙!!!
블랑카이 삼형제는 인정사정없이 압축 작열탄을 발사하였다. 작열탄은 그대로 케이들이 있던 곳에 명중해서 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로 인해 일어난 먼지 때문에 잠시 현장이 보이질 않았다. 블랑카이 삼형제는 잠시 그 자리에서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먼지 구름이 서서히 가라 앉아 갔다.
-우우웅!
그러나 놀랍게도 가이버는 건재했다. 아니 가이버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민간인 셋도 무사했다. 작열탄이 떨어지기 직전에 가이버 기간틱이 재빨리 바리어를 전개한 것이다. 제대로 맞았다면 만만찮은 타격을 줄 수 있었을 텐데. 블랑카이 삼형제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폭발이 일어나자 죽는 줄로만 알고 공포에 질려 있던 센다네 가족은 자기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케이는 간신히 타이밍을 맞추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바리어를 거두고는 센다네 가족에게 말했다.
"여긴 위험합니다. 어서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케이는 블랑카이 삼형제를 격퇴하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케이가 쫓아오자 블랑카이 삼형제는 즉시 어딘가로 날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센다네 가족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전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가이버 기간틱이 둘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중에 한 명이 틀림없이 자기들을 구해준 것이다. 특히나 센다는 가이버 기간틱이 자기를 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까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았다.
"가이버는 우리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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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후, 드디어 날파리가 거미줄에 걸려들었군."
아파트 옥상 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세 신장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적당한 때를 봐서 자기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 상대는 그 강력하다는 가이버 기간틱이다. 그러나 이쪽에는 조아로드가 세 명이나 모여 있고 게다가 이곳은 수도권 최대의 인구 밀집지역. 아직 사람들이 다 대피하려면 멀었다. 이런 곳에서는 빔 한번 잘못 날렸다가는 그대로 수십 명이 떼죽음 당하기 딱 좋았다. 그런 상황에서 케이가 마음 먹은 대로 싸우기는 힘들었다.
"응? 저게 누구야?"
그 때 쿨메그닉이 하늘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하늘 위에서 현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세 신장은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푸르크슈탈이었다. 현장의 조아노이드 부대가 도저히 가이버 기간틱을 막을 수 없다고 본 푸르크슈탈이 측근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직접 현장으로 날아온 것이다. 세 신장은 일이 재밌게 됐다는 듯이 웃었다.
"좋아 마침 잘 됐군. 그럼 먼저 푸르크슈탈의 실력을 좀 감상해 볼까?"
아무리 상황이 케이에게 불리하다 해도 상대는 기간틱. 기간틱과 싸우다가 누구 한 명이라도 어디가 잘못되면 그건 큰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때맞춰 푸르크슈탈이 나타나 줘서 다행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푸르크슈탈이 기간틱과 싸워서 놈의 힘을 빼 줄 것이고 그러면 이쪽이 싸우기가 한결 더 쉬워질 것이다. 뭐 거의 초죽음을 만들어주면 더 좋고. 어쨌든 그들이 필요한 건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이니까 나머지 몸이 어찌되든지 상관없었다.
"싸움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지."
"노사께선 음흉하세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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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이럴 수가!!"
현장에 도착한 푸르크슈탈은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는 아카리가오카 아파트촌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가이버 III라면 몰라도 가이버 I, 모리사토 케이가 이런 무차별 테러를 저지르다니. 정말 그가 파악하고 있는 그 케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콰콰쾅!!
저 멀리서 새로운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기간틱은 그 쪽에 있는 것만 같았다. 푸르크슈탈은 황급히 그 쪽으로 날아갔다. 폭발은 한 지점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가면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하하!! 왜 그래? 기간틱! 우리를 빨리 막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돼!"
블랑카이 삼형제는 도망치면서 여기저기에다 대고 무차별적으로 압축 작열탄을 난사하였다. 작열탄에 맞은 아파트 건물 여기저기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커다란 파편들이 바로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덮쳤다. 희생자가 점점 늘어나자 케이는 더욱 더 당황해 하였다.
"그...그만 둬!!"
케이의 절규에 블랑카이 삼형제는 그저 콧방귀만 뀌었다.
"히히히! 이 재밌는 걸 왜 그만 둬?"
"억울하면 기가 스매셔라도 쏴 보시지 그래!"
"쏠 베짱이 있다면 말이야! 하하하하!!!"
하긴 멈추란다고 멈출 놈들이라면 애초에 이런 짓을 안했겠지. 이제 승부를 지을 순간이 왔다. 케이는 주먹을 꽉 쥐고 주먹의 에너지 앰프에 힘을 모았다. 상당히 비행속도가 빠른 놈들이긴 하지만 이 기간틱이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기가 스매셔 같은 건 저 따위 녀석들에게는 에너지 낭비다. 케이의 컨트롤 메탈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 쪽 가슴에 위치한 중력 제어장치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투우우웅!!!
그 순간 기간틱의 등 부분에 자리 잡고 있던 고속 추진용 부스터가 가동되었다. 마치 전투기의 애프터버너처럼 기간틱은 등 부분의 부스터를 가동시켜 순간적으로 그 거체를 가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케이는 순식간에 블랑카이 삼형제를 따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놈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이야아아압!!!"
"아..아니! 부스터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간틱의 능력에 블랑카이 삼형제는 공포에 질렸다. 기간틱이 너무 빨리 다가와서 합체를 풀어 피할 여유조차 없었다.
-퍼어어엉!!!
케이는 급가속으로 블랑카이 삼형제에게 파고들어 기간틱의 그래비티 펀치(Gravity Punch)를 날렸다. 기간틱의 강력한 주먹에 얻어맞은 블랑카이 삼형제는 그 자리에서 셋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무리 셋이 모여 백만 파워라고 떠벌려도 조아노이드 따위는 기간틱의 상대가 아니었다. 케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 희생자는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앗!"
그 순간 케이는 자신의 바로 앞 쪽에 강력한 에너지 반응을 느꼈다. 케이의 앞에 어떤 남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보통 인간은 분명히 아니다. 게다가 저 얼굴, 예전에 TV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크로노스 12신장 멤버 중 한명이고 현 일본지부 총독인 푸르크슈탈이다! 드디어 진짜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Next episode 제15화 '맹격! 뇌신(雷神) 푸르크슈탈"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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