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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Moon - 1, 2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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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달빛이 비취고 있다. 검은 실루엣으로 이루어진 숲 사이로 한 소년의 모습만이 보여진다. 소년은 숲에 난 외길을 가로질러 넓은 공터에 도착한다. 그리고 달빛이 걸린 메마른 나뭇가지의 실루엣과 그리고 검붉게 물든 대지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소    년 : [뭔가에 홀린 듯한 목소리로] 예쁜 달이다..

 달빛을 바라보는 소년의 그림자를 끝으로 화면은 어두워져 간다. 그리고 다시 새하얗게 밝아진 화면으로 소년과 소녀가 보인다. 소년은 그저 멍한 눈빛으로 그리고 소녀는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으로 서있다. 때마춰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발 속에서 소년은 소녀에게  말을 건내어 준다.

 소    년 : 빨리 집에 돌아가서 잡자(雜煮)라도 먹는게 어때.

 소    녀 : [계속 떨면서] 응..

 그리고 다시 화면은 어두워 진다. 그리고 다시 어스름한 달빛이 떠오르고 직각의 빌딩이 실루엣이 되어 펼쳐진다. 마치 야수의 눈빛처럼 흘러나오는 빌딩의 빛속에서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소    년 : [눈빛을 피하면서] ----미안. 나는, 유미즈카를 구해 줄수 없어.

 소    녀 : [평온한 목소리로] 그런가----역시 함께 가주지 않는 거구나, 토오노군. 하지만, 기뻤어. 아주 잠깐이었다고 해도, 시키군은, 나를 선택해 주었으니까... 응, 이거라면 이대로 죽어버려도 나쁘지 않을까나. 그만큼 잔뜩 있던 아픔도 없고, 무서운 기분도 마법같이 사라져버렸고----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소녀의 무릎까지 재가 되어서 휘날리고 있다. 화면은 그에 맞춰서 희미하게 밝아져가고 있다.

 소    녀 : [기쁜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게다가, 지금은 조금 따듯해. 헤헤, 이거 토오노군의 체온일까나?

 소녀의 말에 소년은 몸을 부들부들 떤다.

 소    년 : [화를 참는 것처럼] ----미안. 나는----무력하고, 최저다.

 소    녀 : 아하. 토오노군 울고있구나... 상냥하구나. 나, 나쁜 짓 잔뜩 했는데, 그래도 울어주는구나... 응, 그런 점, 누구보다도 좋아했어. 중학교부터 계속 토오노군만을 봐왔으니까-----그런 아무도 모르는 일까지도, 나는 전부 알수있었으니까.

 소녀는 마치 자랑스러워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소녀의 몸은 이제 상반신의 조금만이 남아 있다. 소년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소    녀 : ..나, 좀더 토오노군과 얘기하고 싶었어. 실은 보통으로, 아무것도 아닌 클래스메이트같이 얘기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지금 죽어 버리는 것은 정말 싫어.

 소    년 : 하지만..

 소녀는 마지막으로 팔을 당겨서 소년의 뺨에 자신의 뺨을 기댄다.

 소    녀 : 하지만, 분명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거야. -----그러니까, 울지말아줘, 토오노군. 당신은 올바른 일을 해줬으니까.

 소년의 나이프가 툭 떨어져 내린다. 소녀의 몸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소년의 떨림이 서서히 멈춰간다.

 소    녀 : [한숨을 크게 내쉬고서는] 아, 이제 소리를 내는것도 못할 것 같아. 그럼, 나는 집이 이쪽이니까. 슬슬 작별이네.

 소    년 : [살며시 얼굴을 치켜들고서] 유미----즈카......!!

 소    녀 : 응, 바이바이 토오노군. 고마워----그리고, 미안해.

 바람이 부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소년은 한동안 말 없이 뒷 골목을 지키고 앉아있다.

***

 "흐어억!"

 뭔가가.. 끊어져 버릴 듯한 기억이 기억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왔다. 그것은 유미즈카라는 클래스메이트의 추억. 생각하면 아련하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한심했었던 기억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자신이 스스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던 추억이다.

 "또 생각해버린 걸까?"

 소년은 옆에 놓인 물잔을 잡아서는 거칠게 마신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연다. 10시 이후로는 이동이 금지된 저택이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보다도 이 타오르는 듯한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서 부엌으로 향한다. 아무도 없는 부엌의 전등을 켜고서 냉장고문을 열고서 차가운 물을 꺼내서 컵에 따라 부었다. 그러나 전등을 키는 것이야 말로 누군가를 불러들이기에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시키씨?"

 "아.. 코하쿠씨."

 "아아 안돼요 시키씨. 이러다가 아키하님께 걸리면 혼난단 말이에요."

 "미안. 너무 목말라서 그만."

 그러자 코하쿠씨는 다시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헤에.. 그러면 됐어요. 일단은 방에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내일부터는 히스이에게 시키씨 방에 물병을 놓아두라고 전해 줄께요."

 "응, 고마워요. 코하쿠씨.."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 방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엇인가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을 찾아 어둠속으로 손을 뻗어갔다. 그리고 닿은 곳은 나의 가슴..

 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아프다.
                아프다.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
 아프다.                              그것은 붉다.

 "이건.. 무.. 하아.. 하아.."

 또 인가.. 의식이 희미해진다. 계단의 난간을 붙잡아 보지만 소용이 없다. 이미 손은 내 명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속절 없이 계단에서 굴러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의 몸을 잡아주는 붉은 머릿결의 소녀가 있었다. 그것은 아키하였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눈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했고, 무엇보다도 검고 윤기나는 머릿결이 왠지 모르게 차가운 붉은 빛으로 보이는 것은.. 그렇게 마지막으로 의식을 놓치기전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그것은 분명히 아키하의 목소리였다.

***

 하얀 햇살이 눈가를 비집고 들어오는 통에, 나의 의식은 거의 강제적으로 깨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나의 침대 곁에서 나의 옷가지를 들고서 무표정하게 서있는 메이드 복장의 소녀도.. 나의 몽롱한 의식을 완전히 일깨워 버렸다. 안경을 집어들고서는 그런데로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인사했다.

 "안녕? 히스이씨.."

 "안녕하십니까. 시키님.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아키하님께서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히스이의 표정이 뭔가 반쯤은 불안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 히스이는 곧장 옷가지를 옆쪽 책상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서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음.. 그러고 보니까 6시에 일어난 셈이로군. 오늘따라서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지는 것은 분명히 기분 탓이다.

 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는 아키하가 그리고 그 오른쪽 뒤에는 코하쿠가 여전히 웃고 있었고, 히스이는 한쪽 벽에 떨어져서 인형처럼 서 있었다. 여전히 어색한 풍경, 아니 어색한 관계였다.

 "여.. 아키하, 코하쿠씨 모두다 안녕?"

 "좋은 아침이네요. 시키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침 차려드릴께요."

 코하쿠는 웃으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은 일찍이군요. 오라버니. 그렇게 서있지만 마시고 앉아주세요."

 아키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알겠어. 그런데 웃는 모습은 여전히 어릴때와 똑같구나."

 그러자 아키하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예. 하지만 오라버니는 항상 그런 저의 볼을 잡아당기셨죠."

 음.. 이제서야 뭔가 아키하 다워졌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납득을 하는동안 아키하는 다시 찻잔을 들고서는 차를 마시는데 열중해 버렸고, 납득을 마친뒤의 나는 할일이 없어서 고개를 돌려가면서 거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나무장작 대신 가스불이 타오르는 벽난로와 그리고 벽난로 위에 나무로 만들어진 민무늬 액자에는 토오노 마키히사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키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제와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뭐하지만, 그 사진이 아마도 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일꺼에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 어느 신문에도 저 사진 외에는 다른 사진은 없었다. 하긴 문명의 이기를 몹쓸 것으로 여기는 아키히사가 사진을 찍게 나뒀을리가 없을테니까..

 "시키씨~ 아침 다됐어요!"

 밑빠진 코하쿠의 밝은 목소리가 그나마 침울했던 분위기를 날려버렸다. 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키하도 주춤주춤 일어나다가 곧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밥 먹고 올께.."

***

 일찍 일어나자 몇가지 메리트가 나에게 주어졌다. 일단은 느긋한 등교시간과 그리고 아키하에게 듣던 잔소리가 조금 줄었다는 것. 이정도면 일찍일찍 일어나는 버릇을 들여 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동안 정말 우연으로, 아니 신이 일궈낸 최초의 실수였을 일이 벌어져 버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녀석이 달려오는 듯한 먼지가 휘날리는, 아마도 그 녀석이 아니면 결코 불가능할, 이펙트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우랴아아아아아아~"

 라는 촌스럽지만 이보다 더욱 어울릴 말이 없을 정도의 강력한 대사, 그리고 마침내 몸을 공중으로 띄워 깔끔하게 두다리를 내 뻗는 드롭 킥의 모습은.. 분명히.. 날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 끝마무리가 안 어울렸지만, 이것은 분명한 신의 실수다. 그 녀석이 왜 이 시간에 저기서 달려온단 말인가?

 "퍼억! 데굴데굴데굴~ 풀썩.."

 완벽한 드롭 킥의 연출에 걸맞는 함께 먼지를 일으키며 뒹구르기를 선사하였다. 이걸로 빚진 것도 없으니.. 라면서 옷을 털고서는 난 녀석을 바라본다. 아니 노려본다. 물론 녀석도 옷을 다 털었는지 날 마주한다. 하나, 두울~

 "어째서 이런 시간에 네 녀석이 나타나는 거냐?"

 "토오노! 이 자시익! 사고 쳤구나!!"

 사고 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시간에 네 녀석이라는 존재를 만난것 자체가.. 어?

 "무슨 사고를 쳤다는 거야?"

 그러자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의심의 눈초리부터 쏘아보낸다. 그리고는 나에게 거짓이 없음을 확인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우훗훗훗.. 난 말이지. 어제 저녁즈음에 네 녀석이 유미즈카와 공원을 걷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말이다."

 "유미즈카와 공원에서 무슨... 엑?"

 무.. 말도 안돼.. 유미즈카는.. 그러니까.. 내 손으로 죽였어..

 그녀는 죽었다. 깔끔하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대기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그것은 이 직사의 마안으로 깨끗이 죽였다는 것..

 "무슨 헛소리야?"

 말을 더듬지 않은 것이 더 신기하지만 일단은 내심을 들키지 않을 수는 있었다.

 "음! 안타까운 것은 걷기만 했을뿐, 그대로 빠이빠이~ 였다는 거야. 그런데 그 얼빠진 얼굴은 뭐야. 당사자도 모른다는 거냐? 차하! 이 자식! 연극은 이제 그만 막을 내려줘라. 이 형님은 다 봤다는 것 아니냐!"

 아리히코의 말에 거짓은 없어보였다. 녀석이 이정도로 뻔뻔하게 남의 사생활을 들출 정도면 그만한 증거를 갖추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잘못 본거겠지. 난 어제 분명히 집에 있었어."

 확실하다. 코하쿠도 날 보았고, 그리고 아키하도.. 보았었나? 뭔가..

 하지만 그 꿈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바로 이틀전의 그 일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쿡 찌르는 느낌에 나도 모를 섬찟함이 느껴진다.

 "흐음.. 그런가? 뭐 본인이 완전히 모르는 일 같아 보이는데, 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리히코는 그렇게 수긍해 버리고서는 다시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재빨리 관심사를 돌려야지..

 "그런데 이런 시간에 등교라니? 요즘에야 일찍 잠이 든다고 해도 이건 뭔가.. 그래 핀트가 어긋났다라는 느낌일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서 일까? 아니면 녀석이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것일까? 아무튼 아리히코는 걸어가면서도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글쎄? 뭐랄까? 그냥 일찍일어난거지... 나라고 늦잠 자란법이 있냐?"

 그렇다... 녀석은 이유 생성에 실패했던 것이었다.

***

 어느덧 2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사내에 울려퍼졌다. 노트를 하는 동안에도 떨쳐내지 못했던 생각은 아직도 떨어져 나갈 줄을 몰랐다.

 그것은 내가 한 일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

 죽음을 완벽하게 갈라버렸다. 나의 의지로 말이다.

 그런데 살아있다. 죽음을 가른다는 것은.. 죽음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와아아아아악!"

 귀로부터 전해져오는 강렬한 파동의 물리력에 나는 퍼득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오랜지 색의 망아지가 낮잠에서 깨어나는 소리였다. 커다란 비명속에서 은연중에 느껴지는 늘어짐과 나른함은 그 누구도 거부가 불가능한 이미지 각인을 부추기고 있었다.

 "여어.. 좋은 아침. 토오노."

 "아침이 아니고 11시 14분을 지나고 있는 엄연한 오후라고 정정해주고 싶구나. 친구여."

 "째째하게 따지지마. 12시 이전은 어디까지나 오전이라고 명명되어있다구."

 그건 네녀석의 생각이지! 라고 외쳐준 뒤에 복도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서는 운동장을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내 어깨를 툭 치는 손이 있었다. 자연스레 몸을 돌리며 예의 아리히코에게 던지는 말을 꺼냈다.

 "귀찮게 하지마 아리히코.. 지금 그럴 기분.. 선배!?"

 "여어~ 토노.. 라고 해줄껄 그랬나요? 후후후.."

 왠지.. 이 사람은 날 놀려먹는 재미에 의의를 두고 하급생 반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으니 자동적으로 오랜지 색의 망아지가 난동을.. 아니 제 3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아마도 무척이나 평범하고 모범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나의 눈가는 자동적으로 얇아진다.

 "아하하! 오늘도 이곳까지 오셨군요. 시엘 선배."

 "오늘도 실례하겠습니다. 이누이군."

 "물론이죠. 시키정도야 언제든지 무료로 이용하시면 좋습니다."

 이봐요. 당사자는 말이지. 눈꼽만치도 동의한적도 없고, 또 어울려줄 의사는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텐데 말야.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창가에 기댄채로 가만히 교실을 바라보았다. 교실은 변함없어 보였다. 그런 것이 바로 현실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나 토오노 시키라는 개인의 공간이 아니고, 여러가지 사람들이 지나치는 공간이니까.

 "토오노군은 어때요?"

 "아.. 응!? 미안하지만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하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거에요? 우리 점심은 옥상에서 어떨까 해서요."

 선배가 허리에 손까지 얹어가면서 말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수차례 말을 걸었던 모양이다.

 "좋죠. 저야 어디든지.."

 "그럼 나중에 점신시간이 되면 뵈요~"

 "옛써! 또 오십쇼! 시엘 선배!"

 오랜지색 망아지가 군대식으로 경례를 표하자 선배도 역시나 장난스럽게 손을 이마에 대고서는 그대로 계단위로 뛰어 올라가 버렸다.

 "우훗훗.. 드디어 절호의 찬스이로군! 나에게도 드디어 봄날이 오는 것일까!"

 녀석의 기대에 가득 차오른 목소리가 왠지 귓가를 심하게 자극했다.

 "아아.. 뻔질나게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날씨로군. 봄날이란거 말야.."

***

 다시 1시간이 지나고 종이 울림과 동시에 나는 아리히코에게 팔뚝을 붙잡힌 채로 옥상까지 순식간에 이동해 버렸다. 매점에 들러가는 시간도 아깝다는 아리히코의 의견에 따라서 카레빵은 이미 3개씩이나 접수해둔 상태였다.

 너무 일찍 와서인지 한 10분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목에서 슬슬 무리가 오고 있었다.

 "늦었죠! 수학 선생님이 공식 하나를 설명하신다고 끝까지 잡는 바람에.."

 선배가 허둥지둥 옥상문을 정리하고서는 아리히코와 나에게 다가왔다. 메뉴는 어김 없이 나는 카스테라, 녀석은 딸기크림, 그리고 선배는 카레빵이었다. 셋은 나란히 옥상의 화분에 앉아서 봉지를 잡아 뜯고서 빵을 한입씩 배어 물었다. 정말이지 늘어지도록 한가한 오후의 햇살아래에서 한가한 점심식사였다. 물론 선배와 나 사이의 오렌지색 망아지는 의외로 침착하게 난동을 부렸다. 물론 이 역시 제 3자의 눈으로 본다면 평범하게 잡업중인 성실한 남학생으로 보일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토노군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자주하세요?"

 "아.. 그런게 있어서요."

 "후훗! 그런거라니. 이렇게 된김에 선배에게도 말해주자구. 토노."

 뭔가 이 녀석의 눈초리가 사악하달까? 아니면 음흉하달까?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남자에게 지긋이 바라보여지기 싫은데 말야..

 "뭔데요? 뭔가 비밀인가요?"

 더욱이 선배는 너무도 순진한 얼굴로 이녀석에게 자백의 욕구를 밀어넣고 있었다. 왠지 녀석의 눈가에는 '자백해라! 토노!'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간신히 그녀석이 어깨에 걸친 팔을 때어 놓으면서 말했다.

 "비밀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요. 어젯밤 이녀석이 착각한 거니까."

 "오옷! 착각이라니! 난 분명히 지켜보았단 말이야!"

 녀석은 없었던 일을 사실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기친다.' 라는 거잖아. 아리히코. 라고 눈으로 말해봤지만, 선배의 마지막 말이 녀석의 자백욕구를 완전하게 각성시키고 말았다.

 "비밀인가요? 어쩔 수 없죠. 조금더 두분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싶었는데.."

 깨끗한 K.O.다. 이미 아리히코녀석의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자백욕구가 아니다. 뭐, 그렇다고해서 없던일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지만, 없던 일이 있었던 것처럼 위장 될 수는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클레스메이트와의 데이트라는 것도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난 더 이상 말리는 것은 포기하고 다시 빵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사실은요. 선배. 토노와..."

 그렇게 귓속말로 하지 않아도 뻔한 내용인데 말야. 라지만 왠지 선배의 얼굴이 점점기상천외하게 변해가더니 종시에는 완전히 새빨게 져서는 자리에서 벌덕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서는 왠지 매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음산한 저음으로 말했다.

 "토노군은 단순한 오타쿠였군요."

 "엑!? 뭐!?"

 그렇게 말하고서 선배는 옥상문을 거칠게 열고서는 쿵쾅거리면서 내려가 버렸다. 나는 뭔가의 설명을 오렌지색 망아지에게 요구했다. 그러자 녀석은 키득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에 있는 철창으로 다가갔다.

 "간단하잖아. 그냥 밤중에 읽는 만화책 때문에 저렇게 멍한거라고 했지. 뭐 그 내용이 약간 위험하다고 이야기 했지만 말야."

 그러니까 순화시켜서 내게 말했겠지만, 어쨌든 선배가 오해하기엔 딱 좋을 만큼의 소재였다.

 "어이~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시키."

 "내가 화를 내고 않내고는 내 맘인데 말야."

 "솔직히 이렇게 해두는게 낳지 않겠어? 네 녀석이 어제 유미즈카와 밤거리를 같이 다녔다고 말하면 어떨까? 그거야 말로 더욱 위험한 소잿거리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듣고보니 그렇기도하다. 더욱이 요즘같이 흉흉한 밤에 같이 다닌다고 하면 이것은 이미 보통 사이가 아닌 것으로 오해받기 쉽상이다. 게다가 실종이라고 여겨졌던 유미즈카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분명히 선배의 성격으로는 유미즈카를 다시 학교로 데려와서 면학을 시켜야 한다고 난리를 칠지도 모른다.

 "그렇군.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말야. 그런 내용말고 다른내용으로 선배에게 말해 줄 수도 있지 않냐?"

 그러자 녀석은 손바닥을 탁 치면서 말했다.

 "그렇구나."

 "......"

 "하긴 소설은 언제나 사실에 기초를 두는 거라나 뭐라나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자고 시키."

 뭔가 이 녀석과 오랫만에 치고받고픈 맘이 불타오른다.

***

 퇴근시간이 조금 지나가 거리는 금새 한산해졌다. 아무래도 연쇄살인마의 여파가 크긴 큰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조금 있기는 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봐야지. 히스이에게는 오후 7시 까지는 돌아간다고 말했으니까, 조금 서둘러야 할 상황이다.

 "탁! 탁! 탁!"

 경쾌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오르막길을 올랐다. 어느정도 오르막길을 오르자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게 변했다. 이제부터는 천천히 걸어가도 안전하게 세이프를 할 수 있다. 하늘에 남겨진 노을의 여운이 거의 가셔갈 무렵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약간 침울해 보였다. 가만히 길을 걷다가 문득 길거리 옆쪽의 놀이터를 바라봤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내가 알고 있는 뒷모습이 그네에 앉아서 삐그덕거리면서 누군가를 기다는 듯이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가방을 용케 놓치지 않고서 잡고 있는게 신기했다. 이성은 조용히 이 자리를 빠져나가자 라고 했지만, 몸은 정반대로 놀이터의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탁.. 탁.. 탁.."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리고 그네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닮은 뒷모습의 사람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죽었다.

 하지만 저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웃는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완전히 바라보고서 인식했다.

 "유미.. 즈.. 카.."

 "좋은 저녁이야. 토노군."

추신// 지난번 올렸었지만, 둘을 합쳐서 다시올립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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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밥♡님의 댓글

카렌밥♡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토노군은 단순한 오타쿠였군요." 에서 대폭소 -ㅅ-!
X 로 배치한 시각적 효과에서 감탄. 네기씨가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늬앙스인가 이건?
사실 지금은 눈이 아파서..읽긴 읽었는데 제대로 못읽었습니다. ㅜㅡ text 파일로 mp3에 넣고 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올렸던 것과 다른 점은...ㅜㅡ? (중복 이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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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더경님의 댓글

베이더경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ㅋㅋㅋ 그런데 위에 있는 시나리오체같은 부분은 좀 수정해주시는게...

시나리오체는 여기 소설방에서 금지된 방식이라서.[소설의 부류에 포함이 안된다고 보시면 될듯...]

어쨌든 재미있는 유머센스에 한표!!

ㅋㅋ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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