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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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part 2.-
제12화 - 아키토의 책동 -
"정말 심하게 당했군."
"특히 실험 개발 구역의 피해는 심각하군요. 당분간은 쓸 수 없겠습니다."
기간틱 다크, 마키시마 아키토가 본부기지를 휩쓸고 간 이후 이 소식을 들은 12신장 멤버들이 본부 기지에 모였다. 본부기지 최하층 12신장 전용 회의실인 '천구의 방'에는 모두 9명의 신장 멤버들이 모였다. 나머지 세 사람 중 이마카람은 부상이 아직 낮지 않았고 푸르크슈탈은 만약을 대비해서 일본에 남아 있었다. 총수인 알칸펠은 이번에도 소식조차 없었다. 한 자리에 모인 신장 멤버들은 기지의 피해 기록을 보며 심각한 표정들을 지었다.
자이언트 셔터 5개 중 4개가 파괴되었고 기지내의 관제 시스템과 감시 시스템도 상당수가 파괴돼서 지금 본부기지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감시하는 능력이 격감한 상태였다. 조아노이드 전투원도 기간틱 다크와의 전투로 인해 총 683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병력 손실도 막심한데다가 실험 개발 구역에 까지 기간틱이 설치고 다닌 덕분에 시설 거의 대부분이 파괴돼서 병력 보충도 어려웠다. 현재 기지는 외부의 공격에 무척 취약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죄송합니다, 닥터 발카스. 저 만이라도 평소처럼 워싱턴에 있었다면 즉시 달려올 수 있었을 텐데...."
급보를 받고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온 신은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발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몰라. 만약 놈과 싸웠다가 자네를 잃게 되기라도 한다면 나도 알칸펠님을 뵐 면목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발카스는 비어있는 알칸펠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기지가 침공당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알칸펠에 대한 섭섭함 보다는 기간틱 다크가 멋대로 설치는 걸 막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송구스러운 발카스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알칸펠의 사정을 알고 있는 발카스와 신뿐이고 나머지 신장 멤버들은 알칸펠의 행동에 점점 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본부기지가 습격을 당했는데도 오는 건 고사하고 소식조차 없다니.
"뭐 아무튼 간에 녀석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동감이야.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야 할 것 같군."
아프리카 지부장 쿨메그닉이 먼저 호기 있게 말하자 자빌이 거기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지금 이런 대담한 짓을 한 기간틱 다크와 한 판 붙어보고 싶어 했다. 크로노스의 안전을 위해 적을 제거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는 강한 상대가 나타났으니 한 번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발카스가 기겁하며 벌떡 일어섰다.
"쿨메그닉! 자빌!! 제발 부탁인데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게!"
발카스는 다른 신장멤버들이 가이버와 접촉하는 사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약 그러다가 알칸펠 이외에 다른 신장 멤버가 가이버 유니트를 손에 넣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걸로 조직은 붕괴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발카스는 그저 자네들이 다칠까봐 걱정되니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쿨메그닉과 자빌은 그런 발카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피식 웃으며 대답하였다.
"걱정 마십시오. 닥터 발카스. 단독으로 기간틱과 싸우는 짓 같은 건 안합니다."
"아무렴요. 이마카람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해도 발카스는 내심 불안했다. 이들이 예전의 규오처럼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신장 멤버들의 결속이 완전히 깨져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발카스는 사면초가임을 느꼈다. 자기 혼자서는 모든 신장 멤버들을 단속할 수가 없었고 신과 푸르크슈탈 두 사람이 도와준다 해도 내부 단속과 동시에 가이버 기간틱과 싸우는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알칸펠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래야 각자의 생각을 품고 있는 신장 멤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알칸펠은 여전히 시라 섬에 틀어박힌 채 요지부동이었다.
"뭐, 그건 그렇고 기간틱 다크 녀석은 대체 여길 왜 온 걸까?"
카브라알이 분위기도 바꿀 겸 화제를 돌렸다. 그의 말에 모두들 같은 의문을 표시했다. 녀석은 대체 여길 왜 온 걸까. 이 기지를 파괴할 생각이 없었다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으니까 온 것일 거다.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이 기지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을 텐데도.
"...."
발카스 역시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가 알고 있는 마키시마 아키토는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나중에 보고 받은 바로는 기간틱 다크가 이 기지를 빠져 나갈 때 그 녀석이 수송용 컨테이너 한 개를 가지고 나가는 것을 전투원 한 명이 목격했다고 한다. 뭔가 이 기지에서 '필요한 것'을 가지고 나간 것이다. 도대체 그게 뭘까?
'넌...도대체 뭘 노리는 거냐. 마키시마 아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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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시마 아키토는 어떤 사람인가?"
"응? 어떤 사람이냐니?"
뜬금없는 린드의 질문을 받은 지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린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린드의 표정으로 봐서는 뭔가 농담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지난 1년간 같이 지내보고 지로가 내린 결론은 린드는 농담의 '농'자도 모를 것 같은 여신이란 것이었다. 지로는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너무 막연한 질문이라 어디부터 대답해야 할지 감 잡을 수가 없었다.
"글쎄....뭐 마키시마가 내 후배였기는 하지만....같이 부활동 한건 1년 정도밖에는 안 돼. 마키시마는 부활동은 1년 정도만 하고 그만뒀거든. 그 뒤로는 가끔 얼굴이나 보는 정도?"
"그래도 아는 데로 말해줬으면 한다."
"음....뭐랄까. 한마디로 말해서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고나 할까?"
아키토는 지로에게는 일 년 후배였다. 원래는 유명 제약회사였던 맥스 제약 사장 마키시마 겐죠의 아들이었다. 물론 양아들이었다는 건 나중에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알게 되었지만. 제약 회사 사장 아들이 왜 제약과는 관련도 없는 공대에 입학했느냐는 질문에는 아키토는 그저 다른 걸 좀 해보고 싶었다는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었다. 그 때 당시 지로는 그냥 대기업 아들들이 흔히 겪는 자신의 꿈과는 상관없는 장래를 걸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쯤으로만 생각하였다.
지로가 기억하는 아키토는 좀 붙임성이 없는 성격이고 어딘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면이 있는 모습이었다. 자동차부(그 때 당시에는 아직 단순한 동호회 수준. 학교에서 인정하는 정식 부는 아니었다) 부원들과도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다들 아키토와 어울리는 걸 꺼려했다. 물론 선배이자 자동차부 부장이었던 지로는 아키토가 왕따당할까봐 친근하게 말도 걸고 여러 가지로 신경도 써주고 그랬었다. 대기업 사장 아들이란 신분차이 같은 건 지로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지만 그러나 아키토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로에게도 그다지 마음을 열었던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마키시마 씨는 외로운 대학 생활을 보내셨군요."
뜨개질을 하던 베르단디가 안타깝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케이에게 줄 스웨터는 이제 거의 완성단계였다. 베르단디의 말에 지로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그 녀석, 나중에는 한 건 크게 터트려 줬지."
"크게 터트리다뇨? 그게 뭐죠?"
"사이드카 레이스 말이야. 나랑 거기 나가서 보란 듯이 일등을 먹었지."
자동차 동호회가 정식 부로 승격되는 첫 단추가 됐던 사이드카 레이스 대회에서 지로는 아키토와 페어를 이루어 참가하였다. 학교 측의 예산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거의 구걸하다시피 해서 빌린 중고 머신으로 레이스에 잔뼈가 굵었던 다른 여타 대학 레이스 팀들을 꺾고 당당하게 1위를 한 것이다. 아키토가 드라이버, 지로는 조수석에 올라 그들은 부족한 머신의 성능을 순전히 각자의 기량과 환상적인 팀워크만으로 보충하였다. 이 사건은 그 뒤로 레이스 계에 두고두고 회자되게 되었다.
"정말 재밌었어. 그 녀석 언제나 말없이 지내고 좀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그런 열정적인 모습도 보여줄 줄은 몰랐어."
지로는 그 때의 추억이 생각난다는 듯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일을 계기로 네코미 공대 측도 자동차 동호회의 활동에 주목하였고 명색이 공대에서 자동차 관련 부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여론까지 겹쳐 이들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정식 부로 승격되게 되었다.
"그런데 녀석은 부로 승격된 이후 사정이 생겼다며 그대로 부를 그만뒀지 뭐야.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저 할 일이 있다고만 말했어. 뭐 그래도 학교까지 그만둔 건 아니고 정상적으로 졸업까지 했지. 그 다음부터는 나도 만나보지 못했었어."
아키토의 학창 시절은 자동차부에 있던 1년간을 제외하면 지로도 잘 알지는 못했다. 대기업 사장 아들이라는 간판과 잘 생긴 마스크 덕분에 여학생들의 관심이야 한 몸에 받았지만 왠지 접근하기 힘든 그의 분위기 때문인지 학창 시절 내내 애인 한명 없었다. 본인도 그런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외에 사생활 부분은 지로는 전혀 몰랐다. 어쨌든 보통 사람들과는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열정적으로 부활동을 하기는 했어. 그 사이드카 레이스도 그렇고 그 뒤로 있던 몇 건의 레이스 대회에도 꼬박꼬박 참가했고 부에서 머신 제작이라도 하게 되면 빠짐없이 참석해서 밤 늦게 까지 기름범벅이 되기도 했지. 하지만..."
"하지만?"
"뭐랄까, 녀석의 관심은 전혀 다른데 있는 것만 같아 보였어. 지금의 부 활동은 그냥 취미수준이고 진짜 녀석의 목표는 다른 데 있다고나 할까?"
지로의 말에 린드는 더욱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 목표가 뭔가?"
"내가 어찌 알겠어. 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거지."
린드의 질문에 지로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하였다. 린드는 잠시 그 자리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이해할 수 없는 린드의 행동에 지로와 베르단디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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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시마 아키토의 행동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케이의 방에 들른 린드는 곧장 케이에게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케이는 그 때까지 그저 pc로 인터넷을 하면서 뭔가를 검색하고만 있었다. 케이는 린드의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날 밤 마키시마는 네가 기간틱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에게서 그것을 강제로 벗겨 내었다."
그 점은 케이도 알고 있었다. 당시 앱톰과의 짧은 전투에서 케이는 이렇다 할 큰 데미지도 입지 않았고 사용시간도 짧았다. 앱톰과의 전투가 기간틱의 해제에 영향을 끼쳤을 리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 상황에서 일부러 거인식장을 풀 케이도 아니었다. 결론은 단 하나, 똑같이 기간틱의 컨트롤 권한을 가지고 있는 아키토가 기간틱을 소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그 뒤로 마키시마 선배를 불러봤지만...."
케이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가이버끼리는 일종의 텔레파시 비슷한 능력으로 상호간에 교신이 가능하며 그것은 거리와는 무관하다. 식장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등에 난 부스럼 모양의 조직 (이것은 강식장갑을 부르는 일종의 호출기다)으로 상호 교신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키토가 케이의 호출 메시지를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키토는 케이의 교신 요청에 전혀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무슨.....?"
"놈은 널, 아니 우리 모두를 배신한 거다."
린드의 말에 케이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린드의 말이 너무나 충격적으로 들려왔다. 케이는 잔뜩 당황해 하면서 린드에게 말했다.
"린드! 그건 너무 성급한 결론이야. 혹시 모르잖아? 그 때 당시 마키시마 선배도 급해서 그런 게 아닌지..."
"그렇다면 그가 기간틱을 부르기 전에 너에게 양해를 구했나?"
그 말에 케이는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물론 아키토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기간틱을 가져갔다. 만약 정말 급해서 어쩔 수 없이 가져간 거라면 나중에라도 사정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키토는 여전히 교신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놈이 가져간 유적 기지의 자료들 역시 아직까지 묵묵부답이다."
아키토는 이곳 일본을 떠나면서 레지스탕스 연구진들에게 연구시킬 거라며 오다기리 주임 등이 탈출 직전까지 열심히 모은 강림자와 크로노스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전부 가지고 갔다. 앞으로 크로노스와의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질 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는 것들이어서 린드는 그 자료들을 서둘러 천계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아키토는 당장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나중에 카피본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는 그것들을 전부 가지고 서둘러 미국으로 떠났다. 그게 벌써 한 달도 더 됐다. 보내고도 남았을 시간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다. 아키토의 조직에 큰 일이 생겨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돌아가는 사정을 볼 것 같으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일부러 안 보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녀석은 우리 천계도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것들을 안 보내줄 리가 없지."
"왜! 왜 마키시마 선배가 천계를 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
케이는 아직까지 린드의 말에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하긴 그건 당연했다. 이 날 이때까지 함께 크로노스에 싸워 온 동지가 아닌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배신이라니. 그러나 린드는 케이보다 훨씬 냉정했다.
"그 남자의 야망이야 모르겠지만,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가 없다."
"괜한 억측일 뿐이야!"
"그 남자에게 우리는 이제 이용가치가 없는 것이다. 너에게서는 기간틱을, 우리에게서는 유적기지의 데이터들을 빼앗았으니까."
"그럴 리 없어!"
케이는 화를 버럭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확 열어 젖혔다. 그런데 그런 그의 눈앞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을 본 케이와 린드가 그 자리에서 깜짝 놀랐다.
"베...베르단디?"
"케이씨...저..저는..."
베르단디는 잔뜩 당황해 한 채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잘 포장된 꾸러미 하나가 들려 있었다. 케이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말을 더듬기만 하였다.
"여..여긴 어..어쩐 일이야...?"
"네? 아..저....이것을 드리려고요. 이제 막 완성돼서....."
케이는 쭈뼛거리며 선물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포장을 벗겨내었다. 포장을 벗겨내자 손으로 짠 털스웨터 한 벌이 나왔다. 베르단디가 케이를 위해서 손수 만든 스웨터였던 것이다. 케이는 그것을 펼쳐 보았다. 척 보기에도 베르단디의 정성이 확 와 닿는 것만 같았다. 평소 같으면 베르단디에게서 이런 선물을 받으면 아주 좋아 죽을 케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고...고마워, 정말 기뻐 베르단디."
"맘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케이는 여전히 쭈뼛거리며 대답하였고 베르단디 역시 어딘지 좀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을 뿐이다. 케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베르단디 역시 린드와 케이의 대화를 모두 다 들은 것이다. 물론 베르단디 성격에 일부러 엿들으려 했던 건 아니다. 케이에게 스웨터를 전해 주려고 왔다가 우연히 듣고 만 것일 거다. 이 사실 만큼은 모두에게, 베르단디에게는 절대로 숨기고 싶었다. 괜한 걱정을 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나...나 좀 잠깐 나갔다 올께....."
케이는 베르단디가 준 스웨터를 들고는 베르단디를 지나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뒤를 베르단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베르단디는 다시 린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베르단디의 눈을 본 린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까 케이와 나의 대화, 다 들었나?"
"죄송해요....일부러 들으려 했던 건 아니고....."
린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베르단디도 알아둬야 될 필요가 있었다. 베르단디는 케이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연인 아닌가. 게다가 크로노스에 같이 맞서 싸우는 동지이기도 하고. 린드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베르단디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케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 원인이 무었때문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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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씨. 여기 계셨어요?”
베르단디는 서재로 쓰이는 작은 방에서 케이를 찾았다. 케이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베르단디가 들어오자 더욱 더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케이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 들었지? 린드에게서.....”
“네. 저....아까는 죄송했어요. 전 일부러 엿들으려 했던 건 아니고 그저 케이씨를 찾아 왔다가 그만....”
베르단디의 사과에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베르단디 잘못이 아니다. 케이에게 손수 만든 스웨터를 주려고 왔다가 우연히 듣게 된 것 뿐이다. 잘못이 있다면 그런 중요한 사실을 숨기기만 한 케이에게 있다.
“난..... 그 때 베르단디와 모두를 위기로 몰고 갔어. 내가 좀 더 독하게 마음먹고 무라카미씨와 싸웠다면 그럴 일은 없었을 텐데....”
“........”
“하지만 마키시마 선배는 달라. 선배는 자신만의 확고한 의지가 있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싸웠고 그리고 이겼어. 그리고 결국은 기간틱의 주도권까지....”
케이의 말을 듣기만 하던 베르단디는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케이씨. 전 케이씨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케이는 베르단디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케이에게 베르단디는 여전히 환한 웃음을 지은채로 말했다.
“무라카미 씨께서 왜 우리의 적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믿고 있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오실 거라는 걸요.”
“베르단디.....”
“하지만 그 때 케이 씨가 무라카미 씨를 죽였다면 두 번 다시 그럴 기회는 없겠죠. 그리고 케이 씨 역시 죄책감에 괴로워하실 테고요.”
그러나 그 때 케이의 선택으로 인해 모두의 목숨이 위험하게 됐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케이는 선택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려고만 했을 뿐 뭘 어떻게 하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기간틱의 주도권은 확고한 의지를 가진 아키토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베르단디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기간틱은 아마도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기다려? 무었을?”
“케이씨의 성장을요.”
베르단디는 린드의 말을 듣고 기간틱의 소환 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식장자의 강렬한 의지에 반응해서 그 힘을 이끌어 내는 기간틱. 따라서 더 강한 의지를 가진 자가 사용의 우선권이 있는 것이다.
“힘은 그것을 사용하는 자에게 크나 큰 책임을 요구해요. 기간틱은 분명 지금 케이씨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거에요.”
“책임....?”
“케이씨가 1년 만에 돌아오셨을 때, 전 분명히 기억해요.”
베르단디의 외침에 번데기에 든 채로 일본으로 돌아온 케이는 기간틱의 모습으로 젝토올과 싸웠고 그리고 승리했다. 그 때 케이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그래서 기간틱의 컨트롤 메탈이 자체 방어기능을 가동시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 때 당시 무의식 전투 중이던 가이버 기간틱은 이전의 가이버의 무의식 전투 당시에는 없던 행동이었던 ‘타인을 지켜주는’ 행동을 하였다. 베르단디는 이 점에 주목하였다.
“분명 기간틱은 케이씨의 마음,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을 인식한 거에요. 그리고 그런 케이씨의 마음이 기간틱을 만들어 낸 원천이고요.”
“그래, 만든 건 나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베르단디는 케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기간틱을 만든 케이씨의 마음이야 말로 진정으로 강한 힘이에요.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 대상에는 무라카미 씨도 포함돼요. 기간틱은 누구를 해치는 검이 아니라 모두를 지켜주는 강인한 방패라고 전 생각해요.”
“베르단디.....”
“지금 기간틱은 케이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케이 씨가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를 가지게 되기를. 지금의 상황은 기간틱이 케이 씨에게 부여한 일종의 시련이라고 생각돼요. 철은 아주 뜨거운 불 속에서 담금질 돼서 더욱 더 강인한 소재로 만들어지죠. 시련이 없이는 성장도 없어요.”
케이는 베르단디의 말을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다. 기간틱이 아키토에게 간 이유는 그의 확고한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단디의 말대로 지금의 상황이 기간틱이 케이에게 내리는 일종의 시련이라면 이것을 극복해 내어야 했다. 그래야 베르단디들도 지켜 줄 수 있고 무라카미도 구출해 올 수 있다. 크로노스도 물리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이룰려면 자신만의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했다. 이전처럼 그저 눈앞의 적만 보며 싸우고 이전 동료가 배신을 했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 결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모든 건 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건가.....”
“네. 그리고 전 케이 씨가 이 시련을 훌륭하게 극복해 내실 거라고 믿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케이 씨는 저에게 그런 강인한 모습들을 수 없이 많이 보여 주셨어요.”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부끄러운걸....”
“케이 씨는 그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옆에서 이제까지 지켜본 케이 씨는 충분히 그런 분이에요. 그리고 그런 케이 씨이기에....... 제가 좋아하게 된 거고요.”
베르단디의 얼굴에 어느새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케이 역시 느닷없는 베르단디의 말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만약 너무 힘이 드신다면..... 혼자서 모든 짐을 지려고만 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도울 수 있다면 같이 나눠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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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보스."
하얗게 눈이 덮인 로키 산맥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바로 그 곳의 수많은 산들 중 한 곳의 초입부근에서 베루더와 아키토가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검은 긴 생머리를 한 청초한 분위기의 여성, 시즈도 함께 동행하였다. 아키토와 시즈는 둘 다 트렌치코트 차림이었다. 처음 오는 로키 산맥의 풍경에 시즈는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런데 보스, 이 분은...."
베루더가 처음 보는 여성이 아키토와 같이 오자 의아해 하였다. 설마 애인인가? 하지만 오늘은 레지스탕스의 비밀 기지의 부지를 보러 온 것인데 그런 중요한 자리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여성인가? 베루더가 의문을 품는 동안 시즈는 베루더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시즈라고 합니다."
베루더 역시 가볍게 미소 지으며 화답하였다. 베루더는 시즈의 오른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였다.
"베루더라고 합니다. 마드모아젤."
그냥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해도 될 것을 이런 식으로 손등에 키스를 한 건 일종의 장난기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대게 동양여자들은 이런 식의 손등 키스에 좀 민감한 편이라고 하던데 시즈는 이런 건 익숙한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별로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난 이후 베루더가 본격적으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주문하신 장소를 구하기가 그리 쉽진 않더군요.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까 꽤 괜찮은 매물을 건졌습니다."
아키토는 크로노스 본부기지 공격 작전을 마친 후 베루더에게 다음 지령을 내렸다. 아니 사실 지령이라기보다는 잔심부름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베루더는 군말 없이 수행하였다. 아키토가 지시한 것은 다름 아닌 '어떤 장소'를 물색하라는 것. 조건은 상당히 넓은 공간, 자재 운반 차량이 드나들기 쉬운 도로망, 그러면서도 크로노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외진 지역. 그 조건에 맞춰 베루더가 찾아낸 곳이 바로 오늘 이 세 사람이 가볼 장소였다.
"저깁니다."
고개 하나를 넘자 낡은 창고 하나가 나왔다. 사람이 최근에 드나든 흔적은 없어 보였고 지은 지 꽤 오래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낡아 보였다. 베루더는 이곳은 원래 군의 차량 격납고 및 정비소로 쓰였던 곳이지만 크로노스의 지구 제압이후 군대가 해체되면서 주인을 잃고 방치돼왔던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비교적 싼 값에 살 수 있었습니다. 일단 관청에는 내년 봄쯤에 목재 재제소로 쓸 거라고 신고해 뒀습니다."
베루더는 창고의 슬라이드식 대문에 걸려있던 자물쇠를 열고는 문을 열었다. 아키토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안에는 곳곳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원래 쓰던 장비들은 싹 다 치웠는지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아키토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이가 약 100m 는 될 듯 한 널찍한 공간이라면 그가 원하는 설비를 갖추고도 남을 듯싶었다.
"그래, 수고했네. 베루더."
"별 말씀을. 아, 그리고 한 가지 빼먹을 뻔 했는데...."
"뭔가?"
"그 사람 있잖습니까. 보스를 만나보고 싶다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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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누군데?"
베루더는 레지스탕스 기지에서 살짝 빠져 나와 마라와 접선하고 있었다. 이번에 접선 장소는 게임센터였다. 센터 내의 수많은 게임기들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들 때문에 바로 옆 사람과도 대화가 힘들 지경이었다. 마라와 베루더는 서로 게임에 열중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받아랏! 필살! 풍신권!! 아, 이번에 납치해 온 아저씨 말이야."
"치사해! 내가 한눈파는 사이에!! 그러니까 그 아저씨란 사람이 누구냐고!"
"누가 한눈팔래?! 해커링, 닥터 알프레드 해커링이라고 하더군."
이들은 지금 '철권5'라는 대전액션 게임을 하면서 정보를 주고받았다. 물론 두 사람 다 게임에 정신이 팔린지라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게임을 끝낸 후 잠시 쉴 겸 게임 센터 내에 있는 조그만 휴식 공간으로 이동하였다. 참고로 결과는 다섯 게임을 해서 10:0으로 베루더 승리. 완패 당한 마라는 볼이 잔뜩 부어 있었다.
"젠장! 넌 어째서 항상 접선을 이상한 데서 하자고 하는 거야! 여긴 너무 시끄럽다고!!"
휴식공간이라고는 하지만 게임 센터 안에 있기 때문에 시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도 차분한 대화는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베루더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라, 마라. 그러니까 넌 안 돼는 거야. 으슥하고 조용한 곳은 오히려 들키기 쉽다는 거 몰라? 이렇게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에서는 최신의 도청장치라도 남의 말을 엿들을 수가 없다고."
베루더가 자기를 깔보듯이 말하자 마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뭐라 소리 지르려 하였다. 바로 그 직전에 베루더가 먼저 선수치고 들어가면서 마라의 말을 끊었다.
"닥터 알프레드 해커링. 크로노스 조제국의 No.2 이자 발카스의 오른팔격인 조제 기술 분야의 권위자이지. 몇몇 조아로드의 조제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는 최고 권위자야."
베루더가 내민 사진에는 흰 가운을 입은 노인의 모습이 있었다. 나이가 상당히 많은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는데 그나마도 사진속의 얼굴은 뭐가 불만인지 잔뜩 찡그린 표정인지라 주름살이 더 많아 보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깔끔한걸 좋아하는 성격인지 수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 이 사람의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베루더의 말 그대로 그는 크로노스 조제국에서 실질적인 No.2로 공인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발카스를 도와 그 동안 수많은 조아노이드 및 하이퍼 조아노이드의 조제를 도왔으며 그가 독창적으로 개발에 성공해서 제식 채용된 조아노이드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규오와 이마카람 밀리비너스를 포함해서 몇몇 조아로드의 조제에도 참가했으며 방주 계획에도 발카스를 도와 핵심적인 일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존재는 크로노스의 1급 비밀기술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내 임무는 바로 그를 납치하는 것이었지. 그래서 가이버 III가 기지를 휘저을 동안 내가 멋지게 성공했단 말씀."
"양동작전...이냐?"
"빙고! 너도 이제 슬슬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구나."
"너....계속 날 약 올리면....!"
마라가 또 화낼 조짐을 보이자 베루더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달랬다. 물론 자기가 잘못했다고 반성해서 이러는 건 아니고 열 받은 마라가 함부로 마술식 같은걸 써서 소동을 일으킬까봐 그러는 것뿐이었다. 베루더는 콜라 한 캔을 더 뽑아 마셨다. 맥주를 마시고 싶긴 하지만 (기왕이면 보드카면 더 좋고) 게임 센터는 주류 반입 금지라서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지금 모처에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어."
"마키시마 아키토는 왜 이 사람을 납치해 온 거지?"
"자기만의 군대를 만들 생각이야."
"군대? 그건 이미 레지스탕스 조직이 있으니까...."
마라의 반문에 베루더는 쯧쯧 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레지스탕스 멤버들은 보통 인간들. 조아노이드 상대로는 개똥보다 쓸모없어."
베루더는 신랄하게 현재의 레지스탕스를 비판하였다. 표현이 거칠지는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저번에 크로노스의 조아노이드 전투부대가 아지트를 급습했을 당시 그건 확실히 드러났다. 인간은 역시나 조아노이드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 이런 조직이라면 아키토에게는 플러스가 되긴 커녕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마키시마 아키토는 자기만의 조아노이드 군대를 만들어 낼 생각이야."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베루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게 모두 다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대충 계획은 그래."
"그...그게 가능해?"
"아아, 그 해커링이란 사람만 있다면야 충분히 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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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셨습니까, 해커링 박사님."
새로 마련한 아지트에서 아키토는 닥터 해커링이라 불리는 한 노인을 만났다. 해커링은 지금 아지트로 들어오는 각종 조제 관련 설비들에 대한 검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건 중간 관리직이 맡는 거지만 레지스탕스 조직 내에는 조아노이드의 조제에 정통한 인재는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해커링이 직접 나서서 물품들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레지스탕스 조직이 요새 재정비 중이라서 인원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우리 조직의 과학자들은 조아노이드 조제에 관해서는 잘 모르니까요. 전적으로 박사님만 믿고 있습니다."
아키토가 계속해서 정중하게 말을 걸었지만 해커링은 그냥 무시하고는 묵묵히 자기 할일을 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아키토는 얼굴 한 번 안 찡그리고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원래 좀 외골수고 신경질적인 해커링의 성격을 아키토는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반입되는 부품들을 검토하던 그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상당히 좋은 품질의 부품들이군. 게다가 기타 소모성 자제들도 빠짐없이 갖춰졌고. 자네 부하들, 생각보다 수완만큼은 좋구먼."
"별 말씀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해커링의 말은 듣는 이에 따라서는 비꼬는 말로 들릴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아키토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하였다. 이런 괴팍한 성격의 노인네 다루는 법을 모르지도 않거니와 어차피 우위는 아키토 자신에게 있으니까 해커링에게 꼼짝도 못한 채 끌려 다닐 일도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여유 있게 대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럼 언제부터 작업이 가능하겠습니까?"
"조제설비 설치 작업은 자제 반입이 마무리되면 바로 착수할 거고 그러면 보름쯤이면 조제실험을 할 수 있을 거야."
"2교대 24시간 설치 작업을 하겠습니다. 조립만이라면 우리 멤버들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럼 5일 후 실험개시네."
해커링의 말에 아키토는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서둘러 군세를 갖춰야 할 때였다. 그래야 다음 단계의 작전으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키토는 해커링에게 가능한 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성패는 모두 이 늙은 과학자 한 사람에게 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키토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해커링의 표정은 여전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모든 게 박사님 덕분입니다. 덕분에 우리 조직은 더욱 더 강해질 수 있게 됐습니다."
"흥, 애리조나 본부 기지에서 부하를 시켜 날 강제로 납치해 오고서는 왁찐을 내세워서 협박에 가까운 의뢰를 했으면서 말은 잘하는군."
베루더와의 합동 작전으로 본부 기지에서 해커링을 납치해 온 아키토는 기지를 빠져나올 당시 대량의 바이러스 증식 억제용 왁찐까지 획득해서 가지고 왔다. 크로노스의 연구원들은 대게가 미조제의 보통 인간들인데 보통 인간의 경우에는 조아노이드처럼 사념파로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들이 배신하는 것에 대비해서 크로노스는 강제로 모든 연구원들에게 일정기간이 지나면 뇌세포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를 주입하였다. 근본적인 치료는 안 된다. 완치용 백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바이러스를 치료하려면 조아노이드로 조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증식 억제용 왁찐을 맞게 되면 바이러스의 폭주를 일정기간 동안 억누를 수가 있다. 그러니 오래 살고 싶으면 이 왁찐을 정기적으로 주사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왁찐 역시 제조방법은 절대 비밀이었고 그 방법은 발카스의 오른팔이라고 까지 불리는 해커링조차 몰랐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연구원들은 크로노스에 반항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왁찐의 공급이 끊기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었다. 아키토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하였다. 그 역시 크로노스가 해커링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일에 협조하지 않으면 왁찐의 공급을 끊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그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의 승리를 위해서라도 박사님의 협조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의 승리가 아니라 '내 야망을 위해서'라고 말해야 제대로 말한 것 아닌가?"
아키토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해커링이 정곡을 제대로 찔렀다. 아키토는 그저 피식 웃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해커링은 그런 그를 잠시 동안 지긋이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자제박스 쪽으로 돌렸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해커링은 이제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자신은 얼마 살지 못한다. 30대 초반에 한창 학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천재 과학자였던 그는 어느 날 느닷없이 크로노스에게 납치되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들의 일을 돕고 있었다. 물론 조아노이드니 조아로드니 하는 그가 이제까지 몰랐던 미지의 분야를 알아가는 즐거움이야 있었지만 그는 크로노스에 충성하고픈 생각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반항할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못했다. 자기 몸에 심어진 끔찍한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그저 발카스를 도와 여러 가지 핵심 업무에 종사하기만 하면 편한 생활이 보장됐으니 이런 생활도 나쁠 건 없겠다 싶었다. 한마디로 그는 모든 걸 체념한 것이다.
그러나 아키토가 해커링 자신을 납치해 오자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젠 크로노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왁찐은 아키토가 자기가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훔쳐왔으니까 바이러스 걱정도 없었다. 이제야 그는 크로노스에게 반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평생 목표였던 해밀컬 발카스에게 한 방 먹여줄 찬스가 생겼다고 할 수 있었다. 무려 4백 년 동안이나 조아노이드 조제 기술을 연마해 온 발카스의 지식은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품었던 평생의 소원이라면 바로 그 괴물 두뇌 해밀컬 발카스가 깜짝 놀랄 정도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것. 발카스의 아래에 있던 당시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할 수 있다!
"마키시마 아키토. 자네의 야망을 이루는데 동참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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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그래 그런 사람이다 이거지?"
힐드는 마라로부터 미국에 머물고 있는 베루더의 보고서를 받고 그것을 흥미 있게 읽고 있었다. 닥터 알프레드 해커링. 크로노스 조제국의 제 2인자. 그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만의 군대를 만들려는 아키토. 일이 점점 더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베루더는 보고서의 마지막에 자기 의견을 첨부하였다.
'외람된 의견이오나 우리도 별도의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별도의 군대라고 둘러말했지만 힐드는 그의 의중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조아노이드로 구성된 군대를 말하는 것이다. 독은 독으로 제거하라는 말처럼 조아노이드에게 효과적인 대응 수단은 역시나 같은 조아노이드다. 현재의 마계 군대는 조아노이드 집단을 상대로는 한계가 명백했다. 마술식은 원래 잘 안 통하도록 처음부터 만들어졌고 그 육체의 강인함은 마계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웬만한 전사들조차도 능가했다. 그런 놈들과 정면 승부를 했을 경우 피해가 너무나 클 것은 자명했다. 힐드는 인간계를 그냥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큰 희생을 내가며 전면전을 벌일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언젠가는 크로노스와의 일전이 불가피 하다. 즉 베루더의 의견은 그 때를 대비해서 마계인들을 대신해서 크로노스와 싸울 군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후후, 그럼 우리도 한번 연구해 볼까나? 조아노이드 군대."
"히...힐드님! 조아노이드를 만드신다고요?!!"
힐드의 말에 마라는 크게 놀랐다. 아무리 불리한 입장이라고는 해도 마족을 조아노이드로 만들다니. 대마계장의 명령이라 해도 과연 마계의 구성원들이 찬성할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자기 몸을 개조한다는 것을 내켜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힐드는 당황해하는 마라의 얼굴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킥킥, 그러면 마계 조아노이드 제 1호는 마라, 너로 해볼까?"
"히...히이익!! 힐드니이임!!"
힐드의 말에 마라는 새파랗게 질려서는 힐드에게 매달렸다. 물론 힐드는 농담으로 해 본 소리이지만 마라 입장에서는 전혀 농담같이 들리지가 않았다. 농담을 하는 사람이 마계의 지배자인 대마계장이니 누가 그걸 농담으로만 들을까. 힐드의 말이 곧 법이 되는데 말이다. 잠시 마라를 보며 깔깔 대던 힐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은 그냥 검토 단계. 게다가 난 마계의 백성들을 조아노이드로 만들 생각은 없어."
"그...그럼 어떻게 만드시려고요?"
힐드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임에는 틀림없었다.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면서 강력한 전투력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적을 밀어붙이는 군대. 이런 걸 꿈꾸지 않는 군주가 없을 리가 없다. 조아노이드 조제 방법이나 크로노스의 조아로드의 사념파에 어떻게 대응하는 지에 대한 기술적 문제 등은 별로 걱정할 거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 문제는 먼저 이런 군대를 조직할 아키토가 겪을 시행착오를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제 시험에 사용할 '육체'를 어디서 구할 거냐는 것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인간들을 잡아와도 괜찮고 인간 이외에 다른 종족들을 잡아다가 조제 실험에 사용해도 되지 않겠는가.
'이거 괜찮겠는걸. 조아노이드 군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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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잉!!!
-콰르릉!!
시라 섬 일대에 심한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아무래도 태풍의 영향권에 든 모양이었다. 알칸펠은 신전의 발코니에서 말없이 시라 섬을 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마카람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잠깐 갔다 온 후 외에는 그는 이제까지 이 섬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외부에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간에 그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오직 단 한가지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바깥을 보던 알칸펠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신전 지하로 내려갔다. 신전의 맨 아래쪽까지 내려간 알칸펠은 육중한 석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무라카미...."
방 안은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 한 가운데에는 한창 치료중인 무라카미가 있었다. 투명한 물주머니 같은 조제통에 들어가 있는 무라카미는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전투 형태는 벌써 풀었고 기간틱 다크와의 전투에서 입었던 데미지들도 거의 다 고쳤다. 단 하나, 전투 막바지에 타격을 입은 조아 크리스털만큼은 아직도 수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무라카미의 이마에는 심하게 금이 간 조아 크리스털이 박혀 있었다. 조아 크리스털은 조아로드의 에너지의 원천이자 생명 그 자체라고 까지 불리는 가장 중요한 기관. 저걸 고치지 않고서는 무라카미를 회복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칸펠로서도 파손된 조아 크리스털을 회복시키는 건 쉽지가 않았다. 회복 플라스크 안에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입하고 있기는 하지만 수복 속도는 한없이 더딜 뿐이었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알칸펠에게는 그렇게나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다음에 알칸펠이 잠에 빠지게 되는 때는 아마도 두 달쯤 후. 그리고 그 이후에 과연 금방 잠에서 깰 지 아니면 그대로 몇 년씩이나 가는 기나긴 휴면기에 빠지게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
무라카미를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알칸펠은 이윽고 결심을 굳혔다. 좀 무모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부족하고 무라카미의 회복속도는 더디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알칸펠은 석문을 다시 닫고는 그대로 신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알칸펠은 구름을 뚫고 그대로 계속해서 상승을 하였다. 성층권을 벗어난 이후 그는 즉시 어딘가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기다려라, 무라카미. 내가 반드시 고쳐 주겠다!'
Next episode 제13화 '알칸펠의 과거' coming soon....
p.s : 한 주 쉬고 다시 연재입니다. 비록 보시는 분은 거의 없지만....-ㅅ-;;
p.s 2 : 역시 베르단디의 대사는 어려워요. 이 상황에서 베르단디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 생각하는게 상상 이상으로 골치아프군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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