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입니다.)멸의 계승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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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하늘은 고맙게도 푸르렀다. 오, 오늘은 유원지에 가기에 딱 좋은 날씨구나. 역시 하루종일 놀만한 곳으로 유원지만한 곳은 따로 없지. 돈이 좀 깨진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이지만.
".....그럼 나도 준비 해 보실까."
평소대로라면 그저 후줄근한 옷을 입고서 유원지에 출근했겠지만 오늘은 주영이하고 같이 가기로 한 지로 약간 신경을 쓰기로 했다. 아무리 세상을 대충 살아온다는 나이지만 그래도 남 옆에서까지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입는 청바지에다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서 그 위에다가 흰색의 긴 팔 셔츠를 껴입었다. 그리고 검은색으로 물들어져 있는 잠바까지 입었다. 준비 오케이. 이 정도면 이주영 옆에 있더라도 사람들이 그리 이상하게 쳐다보지는 않을 것이다.
"음, 내가 봐도 합격선인 것 같아."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을 훓어보았다. 그리 이상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주영이와 만날려고 약속한 시간이 1시,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 집에서 공원까지 대략 20분 거리. 시간은 충분하다.
"으음......시계도 가져갈까?"
아무리 시간이 남아있다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면 이리저리 예상치 못한 사태로 늦을 수가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서 이다. 저번에 큰 맘 먹고 구입한 최신형 핸드폰과 돈이 두둑하게 들은 지갑을 챙기고서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갔다.
"좋은 날씨야."
밝게 대지를 적셔주는 햇빛을 맞으며 나는 천천히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가 내린 직후라서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지만 그렇게 심하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고여있는 물웅덩이도 없었다. 음, 이 정도면 유원지에 간다 하더라도 놀이기구를 운행시키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뭐, 어디까지나 나의 멋대로 추측이지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눈 앞의 목적지가 보였다.
"오, 보인다 보여."
사람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아 공원은 그런대로 한산한 편이었다. 주영이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바로 정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 나왔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오늘 그녀의 옷차림은 다른 날보다 사뭇 달랐다. 다른 때라면 그저 청바지를 입는게 일상다반사였지만 오늘은 왠일로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치마를 검지로 가르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치마 입었네?"
"으.....응....."
"무슨 심경의 변화?"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말이냐!"
들고 있던 가방을 크게 휘둘러 나의 정수리에 명중시켰다. 아팟!
"무슨 짓이야! 갑자기 왜 때리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니? 이상황에서 심경의 변화라는 말이 나와?!"
"나는 그저 내 느낀 점을 입으로 뱉었을 뿐이라고! 그게 뭐가 나빠?!"
"엄청 나뻐! 그정도는 알아둬!"
알고 싶지도 않아! 도대체 뭐가 나쁘다는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그렇게 애매한 태도만 보이면 알 수가 없다고!"
".....하.....원래부터 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둔할 줄이야.....왠지 흥분하던 내 자신이 슬퍼져....."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는다. 어제부터 도대체 왜 저러는거야?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우선 유원지에 가기 전에 병원에서 진단부터 받을까?"
"됐어! 난 지극히 정상이야!"
내가 보기에 지극히 비정상으로 보이는데......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정도는-"
"됐다니까! 어서 가기나 해!"
내 등을 떠밀면서 그녀는 갈 길을 재촉했다.
"아니 그래도-"
"됐다니까!"
그렇다고 머리 때리지 마!
유원지는 에버랜드로 결정. 우리집이 용인 근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원지도 용인 에버랜드였다. 버스를 타고서 에버랜드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감탄을 했다.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그래? 난 자주 와봐서 별로 그런 느낌이 나지 않는데...."
머리를 긇적이며 눈 앞의 거대한 유원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여기는 서서히 지겨운데....다음번에는 롯데월드에 가볼까?
"우선 입장권을 끊을 테니까. 자유이용권으로 좋겠지?"
"응."
연말 회원권을 이용하여 자유이용권을 저렴하게 구입했다. 구입하기 전에 판매원이 날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자주 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셨네요?"
"별로 놀만한 곳이 없어서요. 이 나이에 PC방에 가서 게임에 파묻히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거든요."
"오늘은 옷차림이 다르네요? 여친이라도 데리고 오셨어요?"
"여친은 무슨.....그냥 신세지고 있는 관리인의 딸하고 같이 왔어요."
"어머, 좋으시겠다."
"하하. 고마워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대략 이런 대화들이 오고 갔다. 물론 사람이 없어 한산했기에 이런 대화가 가능했지만. 자유이용권을 갖고서 주영이한테 갔다.
"자."
자유이용권을 주영이한테 한장 내밀었다. 주영이는 그것을 받고서 능숙하게 손목에다가 찼다.
"오랜만이라면서 꽤나 능숙하네?"
"여기 올 때마다 자유이용권으로 입장했으니까. 이 정도 쯤이야."
아, 그러십니까? 나는 항상 입장권만 끊어서 건 슛 팅 게임만 하는 사람이라 이런 것에는 영 서투른뎁쇼?
"음....오늘은 어디에서 뭐하고 놀까."
사파리에서 동물이나 구경할까? 아니, 이왕 비싼 걸 끊었으니까 놀이기구부터 점령하는게 순리겠지. 음.....고르기가 힘드네....일단은 주영이한테 물어볼까?
"난 일단 놀이기구부터 타는게 좋다고 생각하는데....너는 어때? 오늘은 너한테 보답할려고 불렀으니까 너 좋을대로 가도 괜찮아."
"으음.....그런 말하면 고르기가 힘든데......"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어색한 웃음을 내비쳤다.
"우선 식당에 가서 뭐 좀 먹으면 안될까? 점심을 먹지 않고 왔거든."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과 점심을 거른 채 이곳에 도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어나보니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을 입고 준비하는데 모든 시간을 뺏겨버렸다. 이유는 단지 그것 뿐.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인걸.....그럼 안에 들어가서 간단한 걸로 허기나 달래고 난 다음에 그 다음 일을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정문을 가르키며 그렇게 말했다.
식당은 여기서 꽤나 먼 거리에 있었다. 식당 주위에는 분수대가 있는 큰 공원이 있었다. 아니, 풀밭이 없는데 공원이라도 불러도 되는건가? 정 부른다면 콘크리트 공원이라 부르는게 나을까나?
"......"
뭐, 아무렴 어때? 그냥 공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거지. 식당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의자를 빼 앉아 식당 앞에서 줄줄이 나열돼있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이름 한번 독특하네."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뭔가 이리저리 갖다 붙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나는 음식 이름 밖에 없네.
"여기에 자주 왔잖아? 그렇다면 이 식당 자주 이용하지 않았어?"
"돈이 아까워서 밖에 있는 편의점에서 먹었어. 여기서 10000원 이상 투자할 바에야 2000원을 투자해서 배부르게 먹는게 더 나아."
"돈은 그렇게 많이 있으면서 정작 쓰려고는 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게 많은 돈은 언제 다 쓸려고 그래?"
솔직히 그녀의 말대로 나의 재산은 현재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축적되어 있었다. 국가가 걷는 세금보다야 적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부유한 축에 속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다. 하지만 이 돈도 내가 볼 때는 부족한 편에 속한다. 여러가지로 이것저것 사모으기 때문에 빠져나가는 돈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들인 물건은 제대로 다 쓴 다음에야 다시 새로 주문한다. 비싼 걸 주문해놓고 정작 쓰지 않으면 돈이 아깝잖아.
"그렇게 말 안해도 일단 한번 쓰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빠져나간다고. 니가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흐음? 어디다가 그렇게 돈을 쓰길래 그런 말을 하는거야?"
"몰라도 돼. 애초에 안다고 해도 믿지 않을거야."
"궁금한걸?"
"평생가도 안 가르켜 줄 거다."
재빨리 음식을 시키고서 조용히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보다 굉장히 한적하구나. 오늘은 학교 학생들이 여기로 소풍을 안 오는 날인가 보지? 보통은 소풍을 온 다른 학교 학생들로 꽤나 시끌벅적한데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고릴라는 어때? 오늘은 나왔어?"
문득 어제 독감에 걸려서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던 고릴라가 생각났다. 고릴라 성격에 하루 이상은 빠질 것 같지 않은데.....
"오늘은 나왔어. 아직 완치되지도 않으셨으니 그렇게 무리하실 필요까지야 없는데....."
"보나마나 ‘이정도 감기 쯤으로 기합으로 다 쫒아버릴테다!‘라는 소릴 하면서 수업 진행 했겠지?"
눈에 훤하다. 포효를 하며 병을 이겨내는 모습이.
"맞았어. 정말인지 구제불능이라는 소리가 딱 맞아 떨어진다니까. 학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꾿꾿히 수업을 진행시키는게 오히려 무섭기까지 했어."
"그런 타입은 주먹으로도 말리지 못하는 타입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야."
"헤에? 너도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이 있었어?"
뭘 그렇게 놀라시나? 나도 엄연한 인간인데 싫어하는 것 쯤 없을까봐?
"나도 가끔씩 그런 타입이 되거든. 뭐, 그때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지만."
"뭔가 굉장히 뼈가 있는 말이네?"
"이래뵈도 너보다는 인생경험을 많이 했거든. 오, 음식 나왔다."
음식이 각각 나와 주영이 앞에 놓여졌다. 제법 맛있게 보이는 음식인걸? 어디 한번 먹어볼까? 젓가락을 이용해 고기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오, 먹을 만하네?"
맛있다라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먹을만한 정도의 음식이었다. 뭐, 식당에서 먹지 못 할 만한 음식이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겠지만.
"명색이 식당인데 먹지 못 할 수준의 음식이 나올 리가 있겠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방금 그 생각을 했거든요.
"그럼 이제 서서히 다음 목적지를 정하도록 할까? 너는 어디로 가면 좋겠어?"
나의 말에 주영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우선 산책부터 하자. 그렇게 서둘러 정한다고 해서 유원지가 없어질 것도 아니잖아? 일단은 유원지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다니는게 가장 낮다고 생각해."
"뭐, 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야 별 말 없지만."
어차피 니 말을 따르기로 했으니 나야 어디로 가든 불만이 없지.
"그럼 그렇게 알고 우선은 음식부터 먹자."
그녀는 앞에 있는 음식을 신속하게 먹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서 주영이의 제안대로 유원지를 천천히 걸었다. 그래도 명색이 유원지라서 그런지 아까까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서히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안보이네. 오늘은 소풍을 온 학교가 없는 모양이지?"
"보통 학교에서는 소풍을 현장학습체험이라고 부르지?"
나의 말에 주영이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현장학습체험? 학교에서는 소풍을 그렇게 부르나?
"응? 그 표정은 뭐야? 뭔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인데?"
"응.....나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서 현장학습체험이라는 소리를 오늘 처음 듣거든. 보통 학교에서는 소풍을 그렇게 부르나보지?"
"....에?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나의 말에 주영이가 조금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사실이다. 난 학교라는 곳을 거의 다니지 못했다. 그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다니지 못했지만.
"응.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부모님이 자퇴를 시켜버렸어. 덕분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학교라는 곳에 다녀보지 못했지."
"그.....그렇지만 너는 나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하잖아? 내가 막혀서 어쩔 줄 몰라하는 문제도 손 쉽게 풀던데?"
"아, 그 다음에는 조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곧 정신차리고 독학으로 공부를 했어. 그때 당시에는 별로 놀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공부에만 집중했거든."
나의 말에 주영이는 정말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어이, 여보세요?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니....."
그러더니 곧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뭘......"
".....괜찮아?"
이거 진짜 병이 있는거 아니야? 어제부터 정말인지 이해 못 할 행동만 하던데....아, 얼굴을 든다.
"너 진짜 대단하다......"
응? 뭐가?
"어떻게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현역 대학생보다 더 똑똑할 수가 있어....."
그런 이유로 대단하다? 그게 대단한건가?
"그럼 안되나?"
"안되는 건 아니지만......내 자신에게 회의감가 느껴져......"
아니, 그렇다고 회의감가 느껴질 것까지야.....
"노력하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노력하는 자가 천재를 이긴다는 말이."
"우......"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풀이 죽어 있었다. 겨우 그런 일로 충격을 받다니.....이해할 수가 없네.
".....너 지금 이런 별 거 아닌 일로 풀이 죽어있는 나를 이해를 못하겠다는 생각했지?"
"....!!!!!!"
어떻게 내 생각을 읽었다냐?
"역시.....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아니 그런게 아니라....."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 더듬어진다.
"그래.....공부를 잘하는 애는 나의 마음을 전혀 모르겠지....."
우와, 한순간 주영이의 모습에서 내일의 죠의 포스가 느껴졌어. 이거 혹시 위험한 거 아니야?
"흑.....언제나 학점을 조금이라도 더 따기 위해서 노력하는 나의 찟어지는 고통을 너 같이 대학을 안 다니는 남자가 알 턱이 있나......"
누....눈의 초점이 맞질 않아. 저....정신을 어디다가 팔고 온거니?
"그런 남자가 나보다 공부를 잘하다니.....그것도 학교를 나오지 않는 남자가......"
뭔가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압박하는 주영이의 분위기에 아무 말도 않고 그저 꼼짝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은 부조리해....."
그.....그렇다고 세상을 탓 할 필요까지야.....
"흑......세상을 헛 살았어......"
그 나이에 벌써 신세타령? 이거 이대로 놔두다가는 점점 더 심해지겠는걸. 에....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주영이가 저 상태에서 벗어날까. 음....
"......아."
생각났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아니, 충분하길 간절히 바란다.
"정 그렇다면 나한테서 공부를 받아보는 건 어때?"
".....뭐?"
"공부를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면서?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가르켜 줄테니까. 물론 나도 그렇게까지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너한테 알려줄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평소대로 돌아와라.
"...정말?"
오오, 효과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완전히 돌아오겠다.
"응. 정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힘 좀 내줘."
안그러면 옆에서 보는 내가 더 기운이 빠진단 말이야.
"아, 그렇지. 내가 저기서 아이스크림을 사올테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유원지라 그런지 가격은 엄청 비싸다. 하나에 2500원이라니? 도대체 유원지는 왜 이렇게 하나하나가 비싼거야?
"그럼 잠시만 이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 내가 금방 사갖고 올테니까."
주영이를 재빨리 벤치에 앉히고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자 수많은 메뉴들이 보였다. 으음.....뭐가 제일 맛있을까.....주영이는 보통 상큼한 맛을 자주 찾으니까.....좋아, 저걸로 하자. 그리고 내 것은.....좋아, 저걸로 결정
"여기 오렌....."
"오렌지와 망고 믹스 아이스크림 주세요."
아씨, 누구야?! 내가 먼저 왔으니 내가 먼저 시키는게 당연한 일인데 어디서 그런 신성한 불가침조약을 깨뜨린 개념없는 녀석이 다 있어?! 일단 얼굴부터 손 봐줄까?!
"아, 이거 우연이군요. 김민재씨."
".....니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거냐....."
옆을 보니 때릴 맘도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는 보기만 해도 열받는 싱글벙글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라고 주장하는 남자, 이채원이 서있었다.
"음.....그러니까....."
머리를 긁으면서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지 유추해보았다. 대략 10초 동안 생각한 다음에 나온 결론은-
"염장 지르기?"
"그런 건 보통 솔로가 커플한테 하는 대사 아닙니까?"
그는 막 나온 아이스크림을 한입 먹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솔로입니다."
"니놈에 인생의 모토가 남의 염장 지르기 아니었나?"
"어딜 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까?"
"전부 다."
오렌지와 망고 믹스 아이스크림과 키위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오렌지와 망고 믹스는 내 몫, 키위는 주영이 몫이다.
"그런데 저기 여자 분은 애인 이십니까?"
그가 주영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미인이시군요."
"어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해주는데."
내가 예상하는데 이 녀석 머리 속에는 이미 망상의 도원향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주영이는 단순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관리인의 딸이야. 평소에 신세를 많이 져서 거기에 대한 보답 좀 할 겸 같이 온 거 뿐이니까."
"그녀를 놔두고 애인을 만들다니....이런 걸 보통 양다리를 걸치다라고 하는거죠?"
"양다리는 너 같은 놈이 하는거다!!"
발을 들어 녀석의 얼굴을 걷어찼다. 깔끔하게 들어간 나의 발차기. 녀석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훌륭한 반원을 그리며 땅에다가 열렬한 헤딩을 시도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밟고 싶지만 그래도 옛날의 친분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끝나는 건 줄 알아."
"그....그거 정말인지 감사해야 할 일이군요."
오호? 꽤나 체력이 생겼나 보군? 나의 발차기를 맞고서 금방 일어나다니.
"그건 그렇고 여기에는 진짜 무슨 일로 왔어? 니 성격상 유원지에 혼자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오렌지와 망고 믹스 아이스크림과 키위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뭐, 저도 이런 곳에 놀러온 것이라면 좋겠지만...."
좋겠지만?
"일종의 보험...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
일종의....보험?
"이를테면 예방접종....이랄까요? "
"무슨 영문도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거야?"
"뭐, 신경쓰지 마시고 하시던 데이트 계속 하세요. 당신한테 폐가 될 일은 일체 하지 않을테니까요."
"데이트 아니라니까!"
나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으며-
"그럼 저는 이만 퇴장해 드리죠."
그리고는 뒤돌아 주영이가 있는 방향하고 정 반대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 그게 아니라는데 저 인간은 왜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거야?!
"나 참.....결국 여기에 왜 왔는지는 알지 못했잖아."
뭐, 저 녀석이 여기에 있던 없던 나하고는 전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이크, 아이스크림 녹겠다. 얼른 주영이한테 가야지.
"화내지는 않으려나."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주영이가 있는 벤치로 달려갔다. 주영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주영이는 그리 화가 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들고 있는 키위 아이스크림을 주영이한테 줬다.
"미안. 많이 늦었지?"
"별로. 근데 이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이제 기분이 다 풀렸는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아이스크림을 받는 주영이를 보며 남 몰래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키위 아이스크림. 혹시 싫어해?"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니껀 무슨 아이스크림인데?"
"오렌지와 망고 믹스."
"....그게 뭐야."
내 아이스크림에 그다지 식욕이 당기지 않는지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키위 아이스크림을 한입 배어물었다. 그리고 내뱉는 소감 한마디.
"맛있다."
그거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이제 서서히 놀이기구나 탈까? 솔직히 자유 이용권을 끊고서 쓰지 않으면 돈이 좀 아깝거든."
내 말에 주영이는 잠시 이해를 못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자신의 팔목에 걸려있는 자유이용권을 보고서-
"아, 맞다. 우리 자유이용권을 끊었었지."
....자유이용권을 끊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계셨습니까?
"응. 니 말을 들으니 그래야 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우선 무엇을 타는게 좋을까....."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탈만한 놀이기구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 곳은 놀이기구가 있는 곳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위치였다. 기껏 이 위치에서 보이는 놀이기구라고는 저기 보이는 롤러코스터.....
"우선은 저 롤러코스터부터 타보자."
"....너, 눈에 보이는 게 저것 뿐이라서 저걸 먼저 선택한거지?"
"헤헷, 들켰나?"
혀를 쏙 내밀며 말하는 주영이를 보며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우선은 다 먹고 타러 가자."
"찬성."
그녀는 생긋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는 키위 아이스크림을 신속하게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롤러 코스터 앞.
"좋아! 우선은 롤러 코스터부터 평정이다!"
주영이가 의욕이 찬 모습으로 롤러 코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욕이 넘치는 것을 넘어서 흘러내릴 정도인걸?"
"몇 년만에 타보는 롤러 코스터인데! 이 정도 롤러 코스터야 가볍게 준비운동으로 삼고 말겠어!"
콧바람을 힘차게 뿜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주영이를 보며 유원지에 같이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서서히 나도 시동을 걸어보실까?"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으음, 몸이 상당히 굳어 있었는걸.
"시동이라니.....꽤나 베테랑같은 소리를 하고 있잖아?"
"베테랑같은게 아니라 진짜로 베테랑이야. 거의 여기로 출퇴근을 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너 이곳에 자주 오지?"
"자주 오는게 아니라 거의 여기서 지낸다고."
"그렇다면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뭐부터 타야만 본전을 뽑았다는 느낌이 들 수가 있어?"
하이고? 나한테 안내를 맡기신다? 그런 귀찮은 일을 누가 할까보냐.
"오늘은 너의 말에 따라서 놀기로 했잖아? 그 약속을 깨뜨릴 수야 없지."
"솔직히 말해. 귀찮을 것 같으니까 일부러 말을 돌린 거지?"
다 알고 있네, 뭐....
"알면 그런 말을 하지마.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나는 귀찮은 일을 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는 것을."
"잘났어, 정말......"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되었다. 나와 주영이는 누가 뭐라할 것도 없이 맨 앞에 자리에 앉았다.
"준비됐겠지?"
안전대가 내려왔다. 안전대가 고정되자 직원들이 고정이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전대를 일일히 검사하는 것이 보였다. 내 말에 주영이가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검사가 끝났다. 곧 롤러 코스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겁이 난다면 겁이 난다고 솔직히 실토하라고.”
“그러는 너야말로 겁먹은 것 아니야? 평소보다 말이 많은 것 같은데?”
호오? 감히 이 몸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별로 자랑할 게 못되지만 이 몸은 이래봬도 유원지에 모든 놀이기구를 섭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이기구를 타본 자란 말씀이야.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스릴 넘치기로 유명한 모든 놀이기구를 마스터한 경험이 있지. 그런 나한테 겁을 먹었다고?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후훗. 이 몸한테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냐?”
롤러코스터는 점점 위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도전장은 무슨......단순히 겁쟁이한테 겁쟁이라고 그 사실을 말해준 것 뿐인데.”
“호오.....3년 동안 너를 보아왔지만 오늘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은 처음보는 걸? 좋아, 그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정상에 도착했다. 남은 것은 스릴을 즐기는 일뿐.
“그럼......”
서서히 롤러 코스터가 밑으로 하강하면서 가속도가 붙는다. 세찬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린다.
“오늘도 제대로 즐겨보실까?!”
한껏 격앙된 기분으로 나는 스릴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승자는 말없이 승리감을 맛보는 법이지.”
“웃기지 마! 아직 승부 끝나지 않았어!”
나는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주영이를 보며 직감했다. 이 승부, 나의 완승이다.
“그....그런 동정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 아직 승부가 난 것은 아니잖아!”
“아니, 동정 어린 눈으로 쳐다본 적은 없는데.”
“자, 다음에는 어떤 걸 타볼까?! 저거 탈까?!”
주영이가 한 놀이기구를 가르켰다. 나는 주영이가 가르킨 놀이기구를 보았다. 주영아.....
“저거 아까 전에 탄 거잖아.”
“알고 있었어! 그냥 말해본거야!”
아니, 그냥 말한 것치고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잖아.
“아직....아직 나는 더 탈 수 있어!”
어째서일까.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이긴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든다.
“주영아. 이제 그만 타자. 이 이상 타는 건 미련이야.”
주영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주영이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무슨 소릴! 아직 본전도 뽑지 못했잖아! 본전을 뽑기 전까지 나는 계속 탈거야!”
그녀의 말은 틀렸다. 우린 지금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다 탔다. 유원지에 온 사람들의 수가 평소보다 적었기 때문에 놀이기구를 빨리 탈 수 있어서 놀이기구를 타는데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전은 이미 뽑은 지 오래다.
“그렇게 계속 집착하는 건 좋지 않아. 우리는 유원지에 놀러왔지, 승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윽....”
나의 말에 주영이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계속 나만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어느새 우리는 누가 더 놀이기구를 많이 타나로 승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단이라고 한다면 아까 롤러 코스터에서의 대화 때문이겠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놀러왔어. 그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나도 알고 있어. 잠시 기분이 격앙되서 샛길로 빠진 것 뿐이야.”
약간 삐친 얼굴이긴 하지만 그래도 진정된 모습이었다.
“알아주니 다행이네.”
“.......”
그래도 분한 기분은 있는지 뚱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애같이 보인다니까.
“그럼 나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테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알았어.”
여전히 뚱한 얼굴로 있는 주영이를 놔두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승부랍시고 이리저리 끌려간 탓에 화장실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뭐, 먹은 게 그다지 없었으므로 지금까지 신호가 오지 않았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리 급하지는 않지만 뭐, 미리 간다고 큰일이 나는 게 아니니까.”
화장실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서 손을 닦기 위해 세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왠지 모르게 피곤해 지는군.”
“그렇습니까? 겉보기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사람을 겉보기로 판단하지마.”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굳이 놀라지 않았다. 아까 전부터 녀석의 존재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눈치채시고 계셨습니까?”
“여기 왔을 때부터.”
“과연. 괜히 ‘파멸의 시작점’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군요. 저의 기척을 눈치채시다니.”
파멸의 시작점이라...오랜만에 들으니까 그 이름도 그립다는 느낌이 드는군. 하지만.....
“미안하지만 여긴 남자 화장실이야. 여자가 들어올 곳이 못되는 몇 안되는 남자들만의 성역이라고.”
뒤를 돌아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피처럼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그 쪽에서 직접 찾아오는 건 꽤나 드문 일인데.....모처럼 찾아온 거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그쪽 의뢰는 내일 듣도록 하지.”
이름은 네리무 핀 드리올라. 나한테 짭잘한 일거리를 자주 소개해 주는 고마운 여자다. 뭐, 그 정체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 별로 환영할 만한 정체는 아니지만 말이다.
“걱정마세요. 이 유원지의 시간을 동결시켰으니까요. 적어도 제 말을 들을 여유 정도는 있으실 거예요.”
“아, 그러셔? 그거 정말인지 고마운 일이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그게 왠 귀신 씨나라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그녀가 시간을 동결시켰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그녀의 말대로 이 유원지의 시간은 멈춰있을 것이다.
“걱정마세요. 오늘은 의뢰가 아닌 충고를 하려고 왔을 뿐이니까요.”
“충고? 그건 그거대로 듣고 싶은 얘기인걸. 다름 아닌 니가 나한테 하는 충고라니....들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정체가 정체인 만큼 그녀의 충고는 꽤나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좋아. 들어보도록 하지. 무슨 충고를 하고 싶어서 이런 시간에 찾아왔는지 말이야.”
“혹시 지난 밤에 SRR팀이 찾아오지 않았나요?”
SRR?
“그런게 있었던가?”
“특별 구조 진압대 말이예요.”
특별 구조 진압대? 아, 혹시....
“이채원을 말하는 건가?”
“SRR에 누가 있는지는 제 인생에 하등 상관이 없어요.”
그거야 그렇지.
“응. 확실히 지난 밤에 특별 진압 구조대 중에 몇 사람이 우리 집에 찾아왔었지. 그런데 그게 왜?”
“무슨 말을 하던가요?”
“응? 글쎄....잠깐만.....”
이채원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더라....음.....
“....아.”
생각났다.
“무슨 부탁이 있다면서 찾아왔어. 뭐라고 했더라.....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한테 부탁하러 왔었다나 뭐라나....”
"역시.....“
응? 역시?
“그 말투는 뭐야? 꼭 네리무도 알고 있다는 그 말투는.”
“알고 있다마다요. 너무나도 난리를 쳐놓고 있어서 저희 쪽에서도 그 상황을 알고 있는걸요.”
“헤? 너희 쪽에서도 알고 있다는 것은 꽤나 커다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인데.....이채원 녀석. 그런 큰 일을 나보고 해결하라고 했단 말인가?”
그 녀석, 이따가 다시 만나면 삼천강을 구경시켜 주도록 해주마.
“뭐, 그런 일은 저희 쪽에서 본다면 그다지 큰 축에 속하진 않지만 말이예요.”
그건 말이야. 당연한 말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데....
“너희들의 힘은 반칙이라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힘을 개인이 전부 소지하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는 김민재씨도 저희 쪽에서 본다면 반칙의 가까운 힘을 가시고 계시잖아요. 솔직히 당신이 가지고 계신 그 힘은 정말인지 저희들조차도 두려움을 사고 있는 힘이라고요.”
“칭찬으로 들을게.”
“그럼요. 저희들이 남을 추켜세운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잠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 이런 분위기도 괜찮은 것 같....
“.....잠깐.”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이지? 지금까지 내가 뭐하고 있었더라?
“.....맞아.”
네리무의 충고를 듣고 있었던 중이지.
“어이, 네리무. 잠시 샛길로 빠졌어. 나는 지금 너의 충고를 들을려고 여기 있는 것 아니었나?”
“릴렉스...라는 거죠. 뭐, 잠시 옆길로 새는 것도 좋지 않나요?”
좋기는 무슨.....
“충고는 짧고 굵게 끝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기는 나라서 말이야.”
“여전하시군요. 3년 전과 전혀 변하신 게 없어요.”
그녀가 자그맣게 웃었다.
“지금 그 말도 전에 하셨던 말이예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으시고.”
“그렇다는 말은 전에도 나한테 충고를 해주다가 옆길로 샌 적이 있다는 말이군.”
“뭐, 그렇죠.”
그녀가 다시 웃더니 이내 그 웃음을 걷고서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나도 표정이 진지하게 되었다.
“자, 농담은 여기까지 해두고 본론으로 넘어가죠. 충고할 말은 이거 하나 뿐이예요.”
오, 이제 본론인가? 이거 긴장이 되는걸?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충고가 뭐지?”
“당신한테 이제 두가지 길을 선택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한쪽의 길은 힘을 사용하지 않고서 평범한 삶을 사는 길. 그리고 또 하나는.....”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각오를 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힘을 사용함으로서 다시 자기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는 길을.”
“.......”
두가지.....길인가?
“그걸 선택하는 것은 당신의 몫 이예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
“당신의 선택에 따라 이 세계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그건 나보고 하는 소린가? 아니면.....”
나는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한테 하는 소린가?
“....글쎄요. 그건 당신이 생각하기 나름이죠.”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네리무....
“그거 충고 맞아? 내가 듣기에는 예언에 가까운데.....”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예요.”
그녀가 진지한 표정을 풀고서 다시 웃었다. 하이고, 역시 웃으니까 얼굴이 사는구만.
“하지만 저는 당신의 선택을 믿어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3년 전 당신은 세계를 구한 영웅이니까요.”
세계를 구한 영웅? 내가?
“저기....내가 3년 전 그런 거창한 일을 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기억에서는 그런 거창한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뭐,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슬픈 일이긴 하지만요.”
그녀가 날름 혀를 내밀었다. 나름대로 그 얼굴에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저는 이만 가볼께요. 이제 서서히 힘에 부치기 시작하네요. 역시 이런 커다란 장소를 상대로 시간을 동결시킨다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예요. 이런 일은 시간의 계승자한테나 어울리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네요.”
“시간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의 힘을 사용한다는 거와 똑같은 얘기니까. 조금이긴 하지만 난 너를 존경하고 있다고.”
“그거 최고의 찬사네요.”
그녀가 밖으로 나간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잘 지내지?”
“그럼요. 마스터는 언제나 당신만을 생각하고 계신답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언제 시간 좀 내서 마스터 좀 만나주세요.”
“가능하면 노력하지.”
그녀는 자그맣게 웃으며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힘차보였다.
“그럼 가까운 시일 내로 다시 만나도록 하죠. 그때는 짭잘한 일을 가지고 올께요.”
“그렇다면 이쪽에서 대환영이지. 이왕이면 천만 단위가 넘어가는 일로 부탁해.”
“노력해보죠.”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치 지금까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양.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면서 그제서야 그녀가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
이제 서서히 가보도록 할까? 주영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럼 나도 준비 해 보실까."
평소대로라면 그저 후줄근한 옷을 입고서 유원지에 출근했겠지만 오늘은 주영이하고 같이 가기로 한 지로 약간 신경을 쓰기로 했다. 아무리 세상을 대충 살아온다는 나이지만 그래도 남 옆에서까지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입는 청바지에다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서 그 위에다가 흰색의 긴 팔 셔츠를 껴입었다. 그리고 검은색으로 물들어져 있는 잠바까지 입었다. 준비 오케이. 이 정도면 이주영 옆에 있더라도 사람들이 그리 이상하게 쳐다보지는 않을 것이다.
"음, 내가 봐도 합격선인 것 같아."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을 훓어보았다. 그리 이상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었다. 주영이와 만날려고 약속한 시간이 1시,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 집에서 공원까지 대략 20분 거리. 시간은 충분하다.
"으음......시계도 가져갈까?"
아무리 시간이 남아있다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면 이리저리 예상치 못한 사태로 늦을 수가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서 이다. 저번에 큰 맘 먹고 구입한 최신형 핸드폰과 돈이 두둑하게 들은 지갑을 챙기고서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갔다.
"좋은 날씨야."
밝게 대지를 적셔주는 햇빛을 맞으며 나는 천천히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가 내린 직후라서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지만 그렇게 심하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고여있는 물웅덩이도 없었다. 음, 이 정도면 유원지에 간다 하더라도 놀이기구를 운행시키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뭐, 어디까지나 나의 멋대로 추측이지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눈 앞의 목적지가 보였다.
"오, 보인다 보여."
사람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아 공원은 그런대로 한산한 편이었다. 주영이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바로 정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 나왔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오늘 그녀의 옷차림은 다른 날보다 사뭇 달랐다. 다른 때라면 그저 청바지를 입는게 일상다반사였지만 오늘은 왠일로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치마를 검지로 가르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치마 입었네?"
"으.....응....."
"무슨 심경의 변화?"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말이냐!"
들고 있던 가방을 크게 휘둘러 나의 정수리에 명중시켰다. 아팟!
"무슨 짓이야! 갑자기 왜 때리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니? 이상황에서 심경의 변화라는 말이 나와?!"
"나는 그저 내 느낀 점을 입으로 뱉었을 뿐이라고! 그게 뭐가 나빠?!"
"엄청 나뻐! 그정도는 알아둬!"
알고 싶지도 않아! 도대체 뭐가 나쁘다는거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그렇게 애매한 태도만 보이면 알 수가 없다고!"
".....하.....원래부터 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둔할 줄이야.....왠지 흥분하던 내 자신이 슬퍼져....."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는다. 어제부터 도대체 왜 저러는거야?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우선 유원지에 가기 전에 병원에서 진단부터 받을까?"
"됐어! 난 지극히 정상이야!"
내가 보기에 지극히 비정상으로 보이는데......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정도는-"
"됐다니까! 어서 가기나 해!"
내 등을 떠밀면서 그녀는 갈 길을 재촉했다.
"아니 그래도-"
"됐다니까!"
그렇다고 머리 때리지 마!
유원지는 에버랜드로 결정. 우리집이 용인 근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원지도 용인 에버랜드였다. 버스를 타고서 에버랜드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감탄을 했다.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그래? 난 자주 와봐서 별로 그런 느낌이 나지 않는데...."
머리를 긇적이며 눈 앞의 거대한 유원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여기는 서서히 지겨운데....다음번에는 롯데월드에 가볼까?
"우선 입장권을 끊을 테니까. 자유이용권으로 좋겠지?"
"응."
연말 회원권을 이용하여 자유이용권을 저렴하게 구입했다. 구입하기 전에 판매원이 날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자주 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셨네요?"
"별로 놀만한 곳이 없어서요. 이 나이에 PC방에 가서 게임에 파묻히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거든요."
"오늘은 옷차림이 다르네요? 여친이라도 데리고 오셨어요?"
"여친은 무슨.....그냥 신세지고 있는 관리인의 딸하고 같이 왔어요."
"어머, 좋으시겠다."
"하하. 고마워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대략 이런 대화들이 오고 갔다. 물론 사람이 없어 한산했기에 이런 대화가 가능했지만. 자유이용권을 갖고서 주영이한테 갔다.
"자."
자유이용권을 주영이한테 한장 내밀었다. 주영이는 그것을 받고서 능숙하게 손목에다가 찼다.
"오랜만이라면서 꽤나 능숙하네?"
"여기 올 때마다 자유이용권으로 입장했으니까. 이 정도 쯤이야."
아, 그러십니까? 나는 항상 입장권만 끊어서 건 슛 팅 게임만 하는 사람이라 이런 것에는 영 서투른뎁쇼?
"음....오늘은 어디에서 뭐하고 놀까."
사파리에서 동물이나 구경할까? 아니, 이왕 비싼 걸 끊었으니까 놀이기구부터 점령하는게 순리겠지. 음.....고르기가 힘드네....일단은 주영이한테 물어볼까?
"난 일단 놀이기구부터 타는게 좋다고 생각하는데....너는 어때? 오늘은 너한테 보답할려고 불렀으니까 너 좋을대로 가도 괜찮아."
"으음.....그런 말하면 고르기가 힘든데......"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어색한 웃음을 내비쳤다.
"우선 식당에 가서 뭐 좀 먹으면 안될까? 점심을 먹지 않고 왔거든."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과 점심을 거른 채 이곳에 도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어나보니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을 입고 준비하는데 모든 시간을 뺏겨버렸다. 이유는 단지 그것 뿐.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인걸.....그럼 안에 들어가서 간단한 걸로 허기나 달래고 난 다음에 그 다음 일을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정문을 가르키며 그렇게 말했다.
식당은 여기서 꽤나 먼 거리에 있었다. 식당 주위에는 분수대가 있는 큰 공원이 있었다. 아니, 풀밭이 없는데 공원이라도 불러도 되는건가? 정 부른다면 콘크리트 공원이라 부르는게 나을까나?
"......"
뭐, 아무렴 어때? 그냥 공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거지. 식당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의자를 빼 앉아 식당 앞에서 줄줄이 나열돼있는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이름 한번 독특하네."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뭔가 이리저리 갖다 붙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나는 음식 이름 밖에 없네.
"여기에 자주 왔잖아? 그렇다면 이 식당 자주 이용하지 않았어?"
"돈이 아까워서 밖에 있는 편의점에서 먹었어. 여기서 10000원 이상 투자할 바에야 2000원을 투자해서 배부르게 먹는게 더 나아."
"돈은 그렇게 많이 있으면서 정작 쓰려고는 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게 많은 돈은 언제 다 쓸려고 그래?"
솔직히 그녀의 말대로 나의 재산은 현재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축적되어 있었다. 국가가 걷는 세금보다야 적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부유한 축에 속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다. 하지만 이 돈도 내가 볼 때는 부족한 편에 속한다. 여러가지로 이것저것 사모으기 때문에 빠져나가는 돈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들인 물건은 제대로 다 쓴 다음에야 다시 새로 주문한다. 비싼 걸 주문해놓고 정작 쓰지 않으면 돈이 아깝잖아.
"그렇게 말 안해도 일단 한번 쓰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빠져나간다고. 니가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흐음? 어디다가 그렇게 돈을 쓰길래 그런 말을 하는거야?"
"몰라도 돼. 애초에 안다고 해도 믿지 않을거야."
"궁금한걸?"
"평생가도 안 가르켜 줄 거다."
재빨리 음식을 시키고서 조용히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보다 굉장히 한적하구나. 오늘은 학교 학생들이 여기로 소풍을 안 오는 날인가 보지? 보통은 소풍을 온 다른 학교 학생들로 꽤나 시끌벅적한데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고릴라는 어때? 오늘은 나왔어?"
문득 어제 독감에 걸려서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던 고릴라가 생각났다. 고릴라 성격에 하루 이상은 빠질 것 같지 않은데.....
"오늘은 나왔어. 아직 완치되지도 않으셨으니 그렇게 무리하실 필요까지야 없는데....."
"보나마나 ‘이정도 감기 쯤으로 기합으로 다 쫒아버릴테다!‘라는 소릴 하면서 수업 진행 했겠지?"
눈에 훤하다. 포효를 하며 병을 이겨내는 모습이.
"맞았어. 정말인지 구제불능이라는 소리가 딱 맞아 떨어진다니까. 학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꾿꾿히 수업을 진행시키는게 오히려 무섭기까지 했어."
"그런 타입은 주먹으로도 말리지 못하는 타입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야."
"헤에? 너도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이 있었어?"
뭘 그렇게 놀라시나? 나도 엄연한 인간인데 싫어하는 것 쯤 없을까봐?
"나도 가끔씩 그런 타입이 되거든. 뭐, 그때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지만."
"뭔가 굉장히 뼈가 있는 말이네?"
"이래뵈도 너보다는 인생경험을 많이 했거든. 오, 음식 나왔다."
음식이 각각 나와 주영이 앞에 놓여졌다. 제법 맛있게 보이는 음식인걸? 어디 한번 먹어볼까? 젓가락을 이용해 고기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오, 먹을 만하네?"
맛있다라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먹을만한 정도의 음식이었다. 뭐, 식당에서 먹지 못 할 만한 음식이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겠지만.
"명색이 식당인데 먹지 못 할 수준의 음식이 나올 리가 있겠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방금 그 생각을 했거든요.
"그럼 이제 서서히 다음 목적지를 정하도록 할까? 너는 어디로 가면 좋겠어?"
나의 말에 주영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우선 산책부터 하자. 그렇게 서둘러 정한다고 해서 유원지가 없어질 것도 아니잖아? 일단은 유원지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다니는게 가장 낮다고 생각해."
"뭐, 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야 별 말 없지만."
어차피 니 말을 따르기로 했으니 나야 어디로 가든 불만이 없지.
"그럼 그렇게 알고 우선은 음식부터 먹자."
그녀는 앞에 있는 음식을 신속하게 먹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서 주영이의 제안대로 유원지를 천천히 걸었다. 그래도 명색이 유원지라서 그런지 아까까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서히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안보이네. 오늘은 소풍을 온 학교가 없는 모양이지?"
"보통 학교에서는 소풍을 현장학습체험이라고 부르지?"
나의 말에 주영이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현장학습체험? 학교에서는 소풍을 그렇게 부르나?
"응? 그 표정은 뭐야? 뭔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인데?"
"응.....나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서 현장학습체험이라는 소리를 오늘 처음 듣거든. 보통 학교에서는 소풍을 그렇게 부르나보지?"
"....에?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나의 말에 주영이가 조금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하지만 사실이다. 난 학교라는 곳을 거의 다니지 못했다. 그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다니지 못했지만.
"응.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부모님이 자퇴를 시켜버렸어. 덕분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학교라는 곳에 다녀보지 못했지."
"그.....그렇지만 너는 나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하잖아? 내가 막혀서 어쩔 줄 몰라하는 문제도 손 쉽게 풀던데?"
"아, 그 다음에는 조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곧 정신차리고 독학으로 공부를 했어. 그때 당시에는 별로 놀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공부에만 집중했거든."
나의 말에 주영이는 정말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어이, 여보세요?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니....."
그러더니 곧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지금까지 나는 도대체 뭘......"
".....괜찮아?"
이거 진짜 병이 있는거 아니야? 어제부터 정말인지 이해 못 할 행동만 하던데....아, 얼굴을 든다.
"너 진짜 대단하다......"
응? 뭐가?
"어떻게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현역 대학생보다 더 똑똑할 수가 있어....."
그런 이유로 대단하다? 그게 대단한건가?
"그럼 안되나?"
"안되는 건 아니지만......내 자신에게 회의감가 느껴져......"
아니, 그렇다고 회의감가 느껴질 것까지야.....
"노력하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노력하는 자가 천재를 이긴다는 말이."
"우......"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풀이 죽어 있었다. 겨우 그런 일로 충격을 받다니.....이해할 수가 없네.
".....너 지금 이런 별 거 아닌 일로 풀이 죽어있는 나를 이해를 못하겠다는 생각했지?"
"....!!!!!!"
어떻게 내 생각을 읽었다냐?
"역시.....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아니 그런게 아니라....."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 더듬어진다.
"그래.....공부를 잘하는 애는 나의 마음을 전혀 모르겠지....."
우와, 한순간 주영이의 모습에서 내일의 죠의 포스가 느껴졌어. 이거 혹시 위험한 거 아니야?
"흑.....언제나 학점을 조금이라도 더 따기 위해서 노력하는 나의 찟어지는 고통을 너 같이 대학을 안 다니는 남자가 알 턱이 있나......"
누....눈의 초점이 맞질 않아. 저....정신을 어디다가 팔고 온거니?
"그런 남자가 나보다 공부를 잘하다니.....그것도 학교를 나오지 않는 남자가......"
뭔가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압박하는 주영이의 분위기에 아무 말도 않고 그저 꼼짝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은 부조리해....."
그.....그렇다고 세상을 탓 할 필요까지야.....
"흑......세상을 헛 살았어......"
그 나이에 벌써 신세타령? 이거 이대로 놔두다가는 점점 더 심해지겠는걸. 에....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주영이가 저 상태에서 벗어날까. 음....
"......아."
생각났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야. 아니, 충분하길 간절히 바란다.
"정 그렇다면 나한테서 공부를 받아보는 건 어때?"
".....뭐?"
"공부를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면서?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가르켜 줄테니까. 물론 나도 그렇게까지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너한테 알려줄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평소대로 돌아와라.
"...정말?"
오오, 효과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완전히 돌아오겠다.
"응. 정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힘 좀 내줘."
안그러면 옆에서 보는 내가 더 기운이 빠진단 말이야.
"아, 그렇지. 내가 저기서 아이스크림을 사올테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유원지라 그런지 가격은 엄청 비싸다. 하나에 2500원이라니? 도대체 유원지는 왜 이렇게 하나하나가 비싼거야?
"그럼 잠시만 이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 내가 금방 사갖고 올테니까."
주영이를 재빨리 벤치에 앉히고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자 수많은 메뉴들이 보였다. 으음.....뭐가 제일 맛있을까.....주영이는 보통 상큼한 맛을 자주 찾으니까.....좋아, 저걸로 하자. 그리고 내 것은.....좋아, 저걸로 결정
"여기 오렌....."
"오렌지와 망고 믹스 아이스크림 주세요."
아씨, 누구야?! 내가 먼저 왔으니 내가 먼저 시키는게 당연한 일인데 어디서 그런 신성한 불가침조약을 깨뜨린 개념없는 녀석이 다 있어?! 일단 얼굴부터 손 봐줄까?!
"아, 이거 우연이군요. 김민재씨."
".....니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거냐....."
옆을 보니 때릴 맘도 사라져 버렸다. 그곳에는 보기만 해도 열받는 싱글벙글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라고 주장하는 남자, 이채원이 서있었다.
"음.....그러니까....."
머리를 긁으면서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지 유추해보았다. 대략 10초 동안 생각한 다음에 나온 결론은-
"염장 지르기?"
"그런 건 보통 솔로가 커플한테 하는 대사 아닙니까?"
그는 막 나온 아이스크림을 한입 먹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솔로입니다."
"니놈에 인생의 모토가 남의 염장 지르기 아니었나?"
"어딜 봐서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까?"
"전부 다."
오렌지와 망고 믹스 아이스크림과 키위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오렌지와 망고 믹스는 내 몫, 키위는 주영이 몫이다.
"그런데 저기 여자 분은 애인 이십니까?"
그가 주영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미인이시군요."
"어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해주는데."
내가 예상하는데 이 녀석 머리 속에는 이미 망상의 도원향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주영이는 단순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관리인의 딸이야. 평소에 신세를 많이 져서 거기에 대한 보답 좀 할 겸 같이 온 거 뿐이니까."
"그녀를 놔두고 애인을 만들다니....이런 걸 보통 양다리를 걸치다라고 하는거죠?"
"양다리는 너 같은 놈이 하는거다!!"
발을 들어 녀석의 얼굴을 걷어찼다. 깔끔하게 들어간 나의 발차기. 녀석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훌륭한 반원을 그리며 땅에다가 열렬한 헤딩을 시도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밟고 싶지만 그래도 옛날의 친분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끝나는 건 줄 알아."
"그....그거 정말인지 감사해야 할 일이군요."
오호? 꽤나 체력이 생겼나 보군? 나의 발차기를 맞고서 금방 일어나다니.
"그건 그렇고 여기에는 진짜 무슨 일로 왔어? 니 성격상 유원지에 혼자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오렌지와 망고 믹스 아이스크림과 키위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뭐, 저도 이런 곳에 놀러온 것이라면 좋겠지만...."
좋겠지만?
"일종의 보험...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
일종의....보험?
"이를테면 예방접종....이랄까요? "
"무슨 영문도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거야?"
"뭐, 신경쓰지 마시고 하시던 데이트 계속 하세요. 당신한테 폐가 될 일은 일체 하지 않을테니까요."
"데이트 아니라니까!"
나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으며-
"그럼 저는 이만 퇴장해 드리죠."
그리고는 뒤돌아 주영이가 있는 방향하고 정 반대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 그게 아니라는데 저 인간은 왜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거야?!
"나 참.....결국 여기에 왜 왔는지는 알지 못했잖아."
뭐, 저 녀석이 여기에 있던 없던 나하고는 전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이크, 아이스크림 녹겠다. 얼른 주영이한테 가야지.
"화내지는 않으려나."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주영이가 있는 벤치로 달려갔다. 주영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주영이는 그리 화가 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들고 있는 키위 아이스크림을 주영이한테 줬다.
"미안. 많이 늦었지?"
"별로. 근데 이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이제 기분이 다 풀렸는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아이스크림을 받는 주영이를 보며 남 몰래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키위 아이스크림. 혹시 싫어해?"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니껀 무슨 아이스크림인데?"
"오렌지와 망고 믹스."
"....그게 뭐야."
내 아이스크림에 그다지 식욕이 당기지 않는지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키위 아이스크림을 한입 배어물었다. 그리고 내뱉는 소감 한마디.
"맛있다."
그거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이제 서서히 놀이기구나 탈까? 솔직히 자유 이용권을 끊고서 쓰지 않으면 돈이 좀 아깝거든."
내 말에 주영이는 잠시 이해를 못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자신의 팔목에 걸려있는 자유이용권을 보고서-
"아, 맞다. 우리 자유이용권을 끊었었지."
....자유이용권을 끊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계셨습니까?
"응. 니 말을 들으니 그래야 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우선 무엇을 타는게 좋을까....."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탈만한 놀이기구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 곳은 놀이기구가 있는 곳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위치였다. 기껏 이 위치에서 보이는 놀이기구라고는 저기 보이는 롤러코스터.....
"우선은 저 롤러코스터부터 타보자."
"....너, 눈에 보이는 게 저것 뿐이라서 저걸 먼저 선택한거지?"
"헤헷, 들켰나?"
혀를 쏙 내밀며 말하는 주영이를 보며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우선은 다 먹고 타러 가자."
"찬성."
그녀는 생긋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는 키위 아이스크림을 신속하게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롤러 코스터 앞.
"좋아! 우선은 롤러 코스터부터 평정이다!"
주영이가 의욕이 찬 모습으로 롤러 코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욕이 넘치는 것을 넘어서 흘러내릴 정도인걸?"
"몇 년만에 타보는 롤러 코스터인데! 이 정도 롤러 코스터야 가볍게 준비운동으로 삼고 말겠어!"
콧바람을 힘차게 뿜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주영이를 보며 유원지에 같이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서서히 나도 시동을 걸어보실까?"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으음, 몸이 상당히 굳어 있었는걸.
"시동이라니.....꽤나 베테랑같은 소리를 하고 있잖아?"
"베테랑같은게 아니라 진짜로 베테랑이야. 거의 여기로 출퇴근을 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너 이곳에 자주 오지?"
"자주 오는게 아니라 거의 여기서 지낸다고."
"그렇다면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뭐부터 타야만 본전을 뽑았다는 느낌이 들 수가 있어?"
하이고? 나한테 안내를 맡기신다? 그런 귀찮은 일을 누가 할까보냐.
"오늘은 너의 말에 따라서 놀기로 했잖아? 그 약속을 깨뜨릴 수야 없지."
"솔직히 말해. 귀찮을 것 같으니까 일부러 말을 돌린 거지?"
다 알고 있네, 뭐....
"알면 그런 말을 하지마.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나는 귀찮은 일을 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는 것을."
"잘났어, 정말......"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 차례가 되었다. 나와 주영이는 누가 뭐라할 것도 없이 맨 앞에 자리에 앉았다.
"준비됐겠지?"
안전대가 내려왔다. 안전대가 고정되자 직원들이 고정이 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전대를 일일히 검사하는 것이 보였다. 내 말에 주영이가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검사가 끝났다. 곧 롤러 코스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겁이 난다면 겁이 난다고 솔직히 실토하라고.”
“그러는 너야말로 겁먹은 것 아니야? 평소보다 말이 많은 것 같은데?”
호오? 감히 이 몸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별로 자랑할 게 못되지만 이 몸은 이래봬도 유원지에 모든 놀이기구를 섭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이기구를 타본 자란 말씀이야.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스릴 넘치기로 유명한 모든 놀이기구를 마스터한 경험이 있지. 그런 나한테 겁을 먹었다고?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후훗. 이 몸한테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냐?”
롤러코스터는 점점 위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도전장은 무슨......단순히 겁쟁이한테 겁쟁이라고 그 사실을 말해준 것 뿐인데.”
“호오.....3년 동안 너를 보아왔지만 오늘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은 처음보는 걸? 좋아, 그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정상에 도착했다. 남은 것은 스릴을 즐기는 일뿐.
“그럼......”
서서히 롤러 코스터가 밑으로 하강하면서 가속도가 붙는다. 세찬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린다.
“오늘도 제대로 즐겨보실까?!”
한껏 격앙된 기분으로 나는 스릴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승자는 말없이 승리감을 맛보는 법이지.”
“웃기지 마! 아직 승부 끝나지 않았어!”
나는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주영이를 보며 직감했다. 이 승부, 나의 완승이다.
“그....그런 동정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 아직 승부가 난 것은 아니잖아!”
“아니, 동정 어린 눈으로 쳐다본 적은 없는데.”
“자, 다음에는 어떤 걸 타볼까?! 저거 탈까?!”
주영이가 한 놀이기구를 가르켰다. 나는 주영이가 가르킨 놀이기구를 보았다. 주영아.....
“저거 아까 전에 탄 거잖아.”
“알고 있었어! 그냥 말해본거야!”
아니, 그냥 말한 것치고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잖아.
“아직....아직 나는 더 탈 수 있어!”
어째서일까.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이긴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든다.
“주영아. 이제 그만 타자. 이 이상 타는 건 미련이야.”
주영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주영이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무슨 소릴! 아직 본전도 뽑지 못했잖아! 본전을 뽑기 전까지 나는 계속 탈거야!”
그녀의 말은 틀렸다. 우린 지금 거의 모든 놀이기구를 다 탔다. 유원지에 온 사람들의 수가 평소보다 적었기 때문에 놀이기구를 빨리 탈 수 있어서 놀이기구를 타는데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전은 이미 뽑은 지 오래다.
“그렇게 계속 집착하는 건 좋지 않아. 우리는 유원지에 놀러왔지, 승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윽....”
나의 말에 주영이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계속 나만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어느새 우리는 누가 더 놀이기구를 많이 타나로 승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단이라고 한다면 아까 롤러 코스터에서의 대화 때문이겠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놀러왔어. 그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나도 알고 있어. 잠시 기분이 격앙되서 샛길로 빠진 것 뿐이야.”
약간 삐친 얼굴이긴 하지만 그래도 진정된 모습이었다.
“알아주니 다행이네.”
“.......”
그래도 분한 기분은 있는지 뚱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완전히 애같이 보인다니까.
“그럼 나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테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알았어.”
여전히 뚱한 얼굴로 있는 주영이를 놔두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승부랍시고 이리저리 끌려간 탓에 화장실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뭐, 먹은 게 그다지 없었으므로 지금까지 신호가 오지 않았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리 급하지는 않지만 뭐, 미리 간다고 큰일이 나는 게 아니니까.”
화장실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서 손을 닦기 위해 세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왠지 모르게 피곤해 지는군.”
“그렇습니까? 겉보기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사람을 겉보기로 판단하지마.”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굳이 놀라지 않았다. 아까 전부터 녀석의 존재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눈치채시고 계셨습니까?”
“여기 왔을 때부터.”
“과연. 괜히 ‘파멸의 시작점’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군요. 저의 기척을 눈치채시다니.”
파멸의 시작점이라...오랜만에 들으니까 그 이름도 그립다는 느낌이 드는군. 하지만.....
“미안하지만 여긴 남자 화장실이야. 여자가 들어올 곳이 못되는 몇 안되는 남자들만의 성역이라고.”
뒤를 돌아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피처럼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그 쪽에서 직접 찾아오는 건 꽤나 드문 일인데.....모처럼 찾아온 거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그쪽 의뢰는 내일 듣도록 하지.”
이름은 네리무 핀 드리올라. 나한테 짭잘한 일거리를 자주 소개해 주는 고마운 여자다. 뭐, 그 정체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 별로 환영할 만한 정체는 아니지만 말이다.
“걱정마세요. 이 유원지의 시간을 동결시켰으니까요. 적어도 제 말을 들을 여유 정도는 있으실 거예요.”
“아, 그러셔? 그거 정말인지 고마운 일이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그게 왠 귀신 씨나라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하겠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그녀가 시간을 동결시켰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그녀의 말대로 이 유원지의 시간은 멈춰있을 것이다.
“걱정마세요. 오늘은 의뢰가 아닌 충고를 하려고 왔을 뿐이니까요.”
“충고? 그건 그거대로 듣고 싶은 얘기인걸. 다름 아닌 니가 나한테 하는 충고라니....들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정체가 정체인 만큼 그녀의 충고는 꽤나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좋아. 들어보도록 하지. 무슨 충고를 하고 싶어서 이런 시간에 찾아왔는지 말이야.”
“혹시 지난 밤에 SRR팀이 찾아오지 않았나요?”
SRR?
“그런게 있었던가?”
“특별 구조 진압대 말이예요.”
특별 구조 진압대? 아, 혹시....
“이채원을 말하는 건가?”
“SRR에 누가 있는지는 제 인생에 하등 상관이 없어요.”
그거야 그렇지.
“응. 확실히 지난 밤에 특별 진압 구조대 중에 몇 사람이 우리 집에 찾아왔었지. 그런데 그게 왜?”
“무슨 말을 하던가요?”
“응? 글쎄....잠깐만.....”
이채원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더라....음.....
“....아.”
생각났다.
“무슨 부탁이 있다면서 찾아왔어. 뭐라고 했더라.....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나한테 부탁하러 왔었다나 뭐라나....”
"역시.....“
응? 역시?
“그 말투는 뭐야? 꼭 네리무도 알고 있다는 그 말투는.”
“알고 있다마다요. 너무나도 난리를 쳐놓고 있어서 저희 쪽에서도 그 상황을 알고 있는걸요.”
“헤? 너희 쪽에서도 알고 있다는 것은 꽤나 커다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인데.....이채원 녀석. 그런 큰 일을 나보고 해결하라고 했단 말인가?”
그 녀석, 이따가 다시 만나면 삼천강을 구경시켜 주도록 해주마.
“뭐, 그런 일은 저희 쪽에서 본다면 그다지 큰 축에 속하진 않지만 말이예요.”
그건 말이야. 당연한 말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데....
“너희들의 힘은 반칙이라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힘을 개인이 전부 소지하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는 김민재씨도 저희 쪽에서 본다면 반칙의 가까운 힘을 가시고 계시잖아요. 솔직히 당신이 가지고 계신 그 힘은 정말인지 저희들조차도 두려움을 사고 있는 힘이라고요.”
“칭찬으로 들을게.”
“그럼요. 저희들이 남을 추켜세운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잠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 이런 분위기도 괜찮은 것 같....
“.....잠깐.”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이지? 지금까지 내가 뭐하고 있었더라?
“.....맞아.”
네리무의 충고를 듣고 있었던 중이지.
“어이, 네리무. 잠시 샛길로 빠졌어. 나는 지금 너의 충고를 들을려고 여기 있는 것 아니었나?”
“릴렉스...라는 거죠. 뭐, 잠시 옆길로 새는 것도 좋지 않나요?”
좋기는 무슨.....
“충고는 짧고 굵게 끝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기는 나라서 말이야.”
“여전하시군요. 3년 전과 전혀 변하신 게 없어요.”
그녀가 자그맣게 웃었다.
“지금 그 말도 전에 하셨던 말이예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으시고.”
“그렇다는 말은 전에도 나한테 충고를 해주다가 옆길로 샌 적이 있다는 말이군.”
“뭐, 그렇죠.”
그녀가 다시 웃더니 이내 그 웃음을 걷고서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나도 표정이 진지하게 되었다.
“자, 농담은 여기까지 해두고 본론으로 넘어가죠. 충고할 말은 이거 하나 뿐이예요.”
오, 이제 본론인가? 이거 긴장이 되는걸?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충고가 뭐지?”
“당신한테 이제 두가지 길을 선택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한쪽의 길은 힘을 사용하지 않고서 평범한 삶을 사는 길. 그리고 또 하나는.....”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각오를 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힘을 사용함으로서 다시 자기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는 길을.”
“.......”
두가지.....길인가?
“그걸 선택하는 것은 당신의 몫 이예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
“당신의 선택에 따라 이 세계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그건 나보고 하는 소린가? 아니면.....”
나는 날카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한테 하는 소린가?
“....글쎄요. 그건 당신이 생각하기 나름이죠.”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네리무....
“그거 충고 맞아? 내가 듣기에는 예언에 가까운데.....”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예요.”
그녀가 진지한 표정을 풀고서 다시 웃었다. 하이고, 역시 웃으니까 얼굴이 사는구만.
“하지만 저는 당신의 선택을 믿어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3년 전 당신은 세계를 구한 영웅이니까요.”
세계를 구한 영웅? 내가?
“저기....내가 3년 전 그런 거창한 일을 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 기억에서는 그런 거창한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뭐,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슬픈 일이긴 하지만요.”
그녀가 날름 혀를 내밀었다. 나름대로 그 얼굴에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저는 이만 가볼께요. 이제 서서히 힘에 부치기 시작하네요. 역시 이런 커다란 장소를 상대로 시간을 동결시킨다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예요. 이런 일은 시간의 계승자한테나 어울리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네요.”
“시간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바로 신의 힘을 사용한다는 거와 똑같은 얘기니까. 조금이긴 하지만 난 너를 존경하고 있다고.”
“그거 최고의 찬사네요.”
그녀가 밖으로 나간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잘 지내지?”
“그럼요. 마스터는 언제나 당신만을 생각하고 계신답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언제 시간 좀 내서 마스터 좀 만나주세요.”
“가능하면 노력하지.”
그녀는 자그맣게 웃으며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힘차보였다.
“그럼 가까운 시일 내로 다시 만나도록 하죠. 그때는 짭잘한 일을 가지고 올께요.”
“그렇다면 이쪽에서 대환영이지. 이왕이면 천만 단위가 넘어가는 일로 부탁해.”
“노력해보죠.”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치 지금까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양.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면서 그제서야 그녀가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
이제 서서히 가보도록 할까? 주영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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