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9화
페이지 정보
본문
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part 2.-
제9화 - 발카스의 회상 -
"으음....!"
클라우드 게이트의 최고 간부 회의실에 모인 신장 멤버들은 전면의 대형 스크린에 비쳐지는 요코하마의 참상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시내 곳곳에 기간틱과 이마카람(무라카미의 새로운 이름)과의 전투로 인해 무너진 건물들이 수도 없이 널려 있었고 요코하마 스타디움은 완전히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때마침 당시 경기 중이라서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있던 요코하마 스타디움의 인명피해는 상당히 컸다. 요코하마 시의 명물인 마린타워 역시 중간 부분이 뚝 부러져 버린 채였다. 부러진 위쪽의 전망대에 있던 사람들은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특히 이마카람 밀리비너스가 무책임하게 유사 블랙홀을 구현했던 요코하마 코스모 월드 부근은 그 피해 정도가 심각했다. 항상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그것도 가족단위의 입장객이 많은 놀이공원의 특성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고 그 다수는 어린 아이들과 학생들이었다. 놀이 기구는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들이 즐비했다. 코스모 월드 부근에 있던 아오시마 호텔도 무사하지 못했다. 건물 전체의 3분의 1이 블랙홀로 인해 파괴 돼 버린 호텔은 지금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모습이었다.
"인명피해는 거의 5만 단위에 이릅니다. 재산피해는 잠정 집계수치를 보는 게 겁날 정도입니다."
"뭐 5만 명 정도라면 도시의 규모로 봤을 때 그리 큰 피해는...."
"사망자만 따져서 그런 거야. 부상자는 차마 볼 엄두가 안 나."
쿨메그닉이 농담 비슷하게 이죽거리자 푸르크슈탈이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일본 지부를 관장하는 총독으로서 아무리 구인류라고 해도 시민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던 푸르크슈탈로서는 쿨메그닉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웃을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영 아닌 것을 그제야 감 잡았는지 쿨메그닉은 멋쩍은 듯 두어 번 헛기침 하더니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하여튼 요코하마 시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가이버 기간틱과 조아로드라는 두 최강의 전투 병기가 맞붙은 결과였다. 나중에 피해를 수습하고 도시를 다시 재건해야 할 걸 생각하니 푸르크슈탈은 골치가 아파왔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유사 블랙홀까지 써 가면서 큰 피해를 내가며 싸웠건만 기간틱을 해치우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피해가 얼마가 됐든 이겼으면 그래도 참고 넘어가겠지만 일을 이렇게까지 벌려놓은 이마카람은 오히려 기간틱에게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푸르크슈탈은 지금 당장 이마카람을 패 죽이고 싶었다.
"그래, 이마카람은 지금 어디 있나?"
"알칸펠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발카스가 이마카람의 안부를 묻자 푸르크슈탈은 소태 씹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 말에 발카스와 한두 명을 제외한 신장 멤버 대다수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너무 이마카람만 싸고도는 알칸펠에 대해 불만들이 있던 것이다. 평소에는 일 년에 얼굴 몇 번 마주치기도 힘들 정도로 나타나지 않더니만 부하 하나 부상당했다고 그 즉시 달려와서는 서둘러 데려간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흥. 유사 블랙홀까지 쓰다니. 이마카람 녀석,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 녀석 제정신인가?"
검은 망토를 두르고 검은 터번을 쓴 남자, 자빌 붐 하이안이 빈정대었다. 그러자 옆에 옆 자리에 앉아있던 호리호리한 체구의 동양계 남자, 리엔쯔이가 거기에 동조하고 나섰다.
"애초에 그런 신참에게 가이버 토벌이라는 중대임무가 전담되었다는 것을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이제까지 오랫동안 알칸펠님을 모셔온 우리를 제쳐두시다니....난 좀 섭섭해."
발카스를 제외하면 멤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그만 체구의 노인, 카브라알도 나섰다. 그러자 멤버들이 저마다 이마카람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마카람의 지금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 하는 신장은 아무도 없었다. 그 딴 녀석 어찌되든 알 게 뭐냐 라는 식이었다. 게다가 이야기가 점점 이마카람을 영입한 알칸펠에 대한 불만으로 까지 흘러가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발카스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쾅!
"경들은 말을 삼가시오!!!"
발카스가 소리 지르자 신장 멤버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마카람이야 둘째치더라도 감히 알칸펠에게까지 불만을 토로하는 꼴을 발카스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발카스는 모두를 꾸짖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알칸펠님의 뜻이오! 알칸펠님께선 무슨 생각이 있으시니까 이마카람을 뽑은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가만히 그 분의 뜻을 따르면 되는 거요."
"그 알칸펠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다들 이러는 거 아닙니까."
푸르크슈탈이 오히려 말대꾸를 하자 발카스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푸르크슈탈은 발카스가 다른 신장 멤버들 보다 신임하는 편이고 푸르크슈탈 역시 발카스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었는데 오늘은 아예 대놓고 반발하고 있었다. 당황한 발카스가 다른 신장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푸르크슈탈에게 주의를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줘서 후련하다는 듯 한 표정들이었다. 푸르크슈탈은 당황해하는 발카스를 제쳐 두고 모두에게 오늘의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주십사 하고 청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크로노스의 적인 가이버를 처 부수기 위해 여러분들께 도와주십사 하고 요청하기 위함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부 신장 멤버는 안 그래도 싸우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웃었다. 푸르크슈탈의 이 말은 자칫 잘못하면 알칸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알칸펠은 분명 가이버의 토벌은 전적으로 이마카람에게만 맡긴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명령은 알칸펠 본인이 직접 나타나서 말한 게 아니라 알칸펠의 직속 참모격인 발카스가 모두에게 전했던 얘기다. 하지만 바로 이 것이 문제였다.
"푸르크슈탈!!"
듣다 못한 발카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푸르크슈탈에게 소리쳤다. 그는 잔뜩 당황한 채로 계속해서 소리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알칸펠님의 명령도 없이 행동하려 하는가!"
"그럼 대체 어쩌란 말씀입니까!"
뜻밖에 푸르크슈탈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발카스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푸르크슈탈은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만약 기간틱이 또다시 이 곳 클라우드 게이트를 공격해오면 그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어디서 뭘 하고 계신지도 모르는 알칸펠님의 명령만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냥 죽으란 말입니까!"
"이보게, 푸르크슈탈."
그 때 푸르크슈탈 옆에 앉아있던 신이 그를 조용히 말렸다. 친구인 푸르크슈탈이 너무 흥분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내버려두면 위험하겠다 싶어서 신이 나선 것이다. 이 이상 더 말하면 자칫 잘못하다가 알칸펠에 대한 불경죄를 저지를 수도 있었다. 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리자 푸르크슈탈이 다소 흥분을 가라 앉혔다. 그리고 그는 곧장 발카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실언을 했습니다. 여러분들께 사과드립니다."
흥분을 가라앉힌 푸르크슈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닥터 발카스, 이해해 주십시오. 전 알칸펠님의 뜻에 거스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이버들이 계속해서 설치게 내버려두면 우리 크로노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현재 진행 중인 방주 계획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알칸펠님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발카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른 신장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표정만 봐도 이미 다들 심정적으로는 푸르크슈탈에게 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장 멤버들은 이미 더 이상 발카스를 따를 생각들이 없었다. 이마카람 문제는 알칸펠의 명령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걸 알칸펠 본인이 직접 나타나서 말한 게 아니라 발카스가 대신 말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즉 다들 이젠 발카스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중간에 발카스 본인이 무슨 꿍꿍이를 꾸민 건지 아닌지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발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이젠 더 이상 자신 혼자만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가이버와 다른 신장 멤버들의 접촉을 막아야 했지만 그로서는 불가능했다. 따지고 보면 푸르크슈탈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가이버들이 쳐들어 왔을 때조차 그냥 도망만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가 무엇보다 알칸펠을 위해 알칸펠의 적을 쓰러뜨리겠다는데 그걸 무슨 명분으로 막는다는 말인가.
'알칸펠님....이 늙은이는 이제 더 이상 이들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발카스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지금 이들을 막으려면 역시 알칸펠이 직접 나서야 했다. 그래서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그 위엄을 보여주며 직접 명령을 내려야 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알칸펠이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 나타나 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제발....한 번 더 당신의 위엄을 보여 주십시오....'
****************************************
도쿄에서 좀 외곽 쪽에 위치한 곳에 3층 정도 높이의 버려진 저택이 하나 있다. 벌써 몇 년째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지 정원은 온통 잡초 투성이였고 건물 역시 벽면에 넝쿨과 이끼가 보기 흉하게 잔뜩 엉켜 있었다. 건물 자체는 유럽풍의 석조 건물로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이긴 하지만 관리상태가 엉망인지라 고급 주택의 느낌은 퇴색돼 버렸다. 건물 안이라고 해서 멀쩡한 건 아니다. 주택 안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곳곳에 거미줄이 흉하게 쳐져 있었다. 내부 집기들 역시 방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의 흔적이 몇 년 동안 없던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사람들이 오래간만에 다시 들어왔다.
"자, 이러면 됐나요?"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편해졌어요."
울드는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야미에게 주사를 놓았다. 주사를 놓자 하야미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이 보였다. 울드가 놓은 주사는 일종의 영양 공급제인데 주로 조아노이드등의 조제체에게 사용하는 응급처치용 약품이었다. 손종 실험체로 조제되기 위해 다소 위험한 방식으로 조제를 한 하야미의 몸은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베르단디나 울드로서는 하야미에게 함부로 회복 법술을 걸어줄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몸을 파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공격 법술은 한 가지 공식만 만들어도 웬만한 적에게 다 통용될 수 있었지만 회복하고자 하는 상대의 몸에 일일이 맞춰야 하는 회복법술은 그런 식으로 일률 적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응급처치만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던 거처를 엔자임들과 무라카미의 기습으로 잃은 베르단디들은 지금 이 버려진 저택의 지하 비밀 공간에 몸을 숨겼다. 이 저택의 서재에는 책장을 위장한 비밀 출입문이 있었고 그 곳 지하에는 십여 명 정도의 인원이 오랫동안 지낼 수 있는 넓은 거주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지하 공간의 방들 중 한 곳에는 조아노이드를 조제하는 데 사용하는 조제통과 컨트롤 시스템이 있었다. 유적기지에서 봤던 조제시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다.
"오다기리 할아버지의 집 지하에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
스쿨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하 공간에 있는 조제설비를 둘러보았다. 스쿨드의 말 대로 이 저택은 바로 오다기리 주임의 집이었다. 원래 오다기리의 집안은 대대로 큰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문을 이은 오다기리가 크로노스에게 납치되자 식구들과 하인들은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이 곳은 그대로 버려지고 말았다. 하지만 크로노스에 납치된 이후에도 오다기리는 몇몇 식솔들과 몰래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 집은 만약을 대비한 은신처로서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유적기지에서 탈출한 이후 살아남은 스텝들은 이 곳에 와서 오다기리 주임이 남긴 설비로 손종 실험체 조제에 착수하였다. 오다기리 본인은 그 위험성 때문에 손종 실험체 조제에 반대하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를 대비해서 이 곳 지하에 조제통 1기를 비롯해서 배양액이나 기타 조제 관련 설비를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갖춰진 장비들은 유적기지에 비하면 너무나 빈약하였다. 몰래 준비하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야미를 포함한 살아남은 스텝 4명은 이 시설만으로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서 생체 실험을 시도하였고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하야미 한 사람 뿐이었다.
"그래도 저 만이라도 이렇게 살아남아 여러분들과 만날 수 있게 됐으니 죽은 동료들도 기뻐해 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야미는 이들이 1년 전 미나카미 산에서 탈출했던 당시 가지고 나왔던 각종 자료들을 꺼내 보였다. 이 것들은 그동안 오다기리들이 소중하게 모으고 정리해 놓은 강림자들의 유적에 대한 연구 자료들과 조아노이드를 비롯한 각종 생체 병기 등에 대한 자료, 기타 크로노스에 대한 일급 기밀 자료들 이었다. 앞으로 크로노스와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여러분들께 이 것들을 무사히 전해드릴수 있게 됐으니 저로서는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하야미는 속이 아주 후련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야미에게 그 동안 수고했다고 말하며 격려하였다. 이제 6년 전 야마무라 교수로 부터 시작된 크로노스에 대한 항쟁이 케이들에게 계승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울드만큼은 얼굴표정이 좀 어두웠다. 그녀는 지금 하야미의 몸 상태가 상당히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
"미국으로 가신다고요?"
"응. 조만간 다시 돌아가려고 맘먹고 있었어."
지하 비밀공간에서 아키토는 모두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아키토가 사해에서 일본으로 순간이동 되어 온 이후로 지금까지 벌써 한 달이나 흘렀다. 그 동안 전력의 핵심인 아키토가 빠진 레지스탕스 부대는 아무것도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어야 했다. 기습이 주된 전법이라고는 하지만 미조제의 인간들로는 조아노이드 부대와 싸우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서 부대를 다시 재편성할 꺼야. 현재의 조직으로는 앞으로 놈들과의 싸움을 하지 못해. 그리고 레지스탕스에는 의사도 있고 과학자도 있어. 여기 있는 자료들을 가지고 가서 연구시켜 보고 싶어."
아키토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였다. 솔직히 이런 자료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그것을 분석해내서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작전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했다. 케이들은 그런 조직이 없는 일개 개인에 불과하니 그런 조직을 가지고 있는 아키토가 활용하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잠깐 기다려. 그 자료는 천계에도 아주 중요한 자료다. 우리도 그게 꼭 필요해."
그 때 린드가 나서서 반대 의견을 내었다. 천계의 전투신으로서 앞으로 천계가 크로노스와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결정한다면 이 자료들이 꼭 필요했다. 하다못해 이 자료들을 전부 다 카피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자료의 양이 워낙 방대해서 전부 다 카피하려면 며칠은 걸릴 판이었다.
"본부에 도착하는 즉시 카피본을 만들어서 보내 주지. 그 쪽 사정도 이해는 하겠지만 나도 시간이 별로 없어. 어서 가서 조직의 재편성에 착수 해야 해."
아키토는 린드의 요구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린드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아키토의 제안에 금방 수긍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함께 싸워 온 동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거 하나만 믿고 이 자료들을 다 넘기 주는 건 어딘지 개운치가 않았다. 린드는 아키토에게서 어딘가 위험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저, 린드님."
그 때 하야미가 린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린드에게 뭔가 두툼한 노트 두 권을 건넸다. 린드는 의아해 하면서 그 노트를 받아들었다.
"이게 뭐지?"
"오다기리 주임님의 연구 일지 필사본과 일기입니다. 이 것 정도로도 어느 정도 훌륭한 자료가 될 듯싶군요. 우선은 이걸 드릴 테니 지금은 좀 참아주십시오."
하야미까지 부탁하자 린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로도 천계에 보낼 자료로서는 충분할 듯싶었다. 우선은 린드는 아키토를 믿어보기로 하였다. 린드까지 수긍하자 아키토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난 한시라도 빨리 미국으로 출발하겠어. 내가 거기 가서 한바탕 설쳐대면 놈들의 시선도 온통 다 그리로 쏠릴 테니 여긴 더 안전해질 거야."
하긴 지금의 아키토에게는 기간틱이라는 새로운 힘도 생겼으니 이젠 무서울 것도 없다. 이전보다 더 가열차게 크로노스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 분명했다. 케이는 잘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자 베르단디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케이씨, 안색이 나쁘세요."
"아...걱정 마. 난 괜찮아."
안색이 나쁜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시즈였다. 이제 또 다시 아키토와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 역시 한없이 무거워졌다. 하나뿐인 가족까지 잃고 이젠 또 다시 아키토의 무사함만을 빌며 이런 곳에서 숨어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은 한 없이 우울해졌다. 바로 그 때 아키토가 시즈를 돌아보며 말했다.
"준비해라, 시즈. 너도 같이 간다."
"예? 아...아키토님?"
"출발은 준비되는 데로 간다. 필요한 건 현지에 다 있으니까 짐은 별로 필요 없을 거다. 간단하게만 꾸리도록."
아키토의 뜻밖에 말에 시즈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기를 이제 가서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하는 아키토가 데려 가겠다니. 한편으로는 너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괜히 아키토의 앞길에 방해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들어서 지금 시즈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아키토는 시즈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거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모두가 다가와서 시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잘됐어요, 시즈씨."
"미국 가서 마키시마랑 잘 되길 빌께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가니 시즈씨는 좋겠네~~."
마지막에 지로의 농담에 시즈는 얼굴이 잔뜩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동안 허둥대던 그녀는 서둘러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갔다. 울드와 스쿨드, 베르단디도 덩달아 마음이 붕 떠서 시즈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케이는 그런 그녀들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케이."
그 때 린드가 케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린드 역시 케이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기간틱은 이제 누가 쓰는 거지?"
"뭐...나와 마키시마 선배 둘이 다 쓸 수 있어. 다만 기간틱은 하나뿐이니까 한 사람이 쓰고 있을 때는 다른 한쪽은 그 동안 참아야겠지."
린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도 케이의 기간틱 소유권이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닌 듯싶었다. 컨트롤을 '넘겼다'기 보다는 '공유한다'라는 개념으로 보면 좋을 듯싶었다. 그러나 린드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기간틱을 쓰고 있는데 다른 한 명도 지금 당장 기간틱을 써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 땐 어떻게 되는가? 그 시점까지 기간틱을 쓰고 있는 사람이 우선인가, 아니면.......
****************************************
"부르셨습니까, 닥터 발카스."
신과 푸르크슈탈은 발카스의 호출을 받고 클라우드 게이트의 실험 조제 구역에 도착하였다. 마치 뭔가 고민하는 듯이 멍하니 서 있던 발카스는 두 사람이 오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발카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왔는가....내가 자네 두 사람을 보자고 한 건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할 게 있어서 그러네."
"중요한 얘기라 하시면.... 무엇인지요?"
"그 전에. 우선 자네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발카스가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두 사람은 어느새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발카스의 태도도 그렇고 다른 신장 멤버들 모르게 두 사람만 몰래 오라는 지시도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길레 아무도 모르게 몰래 오라는 것이었을까.
"자네들은 알칸펠님을 끝까지 따를 건가?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갑자기 발카스가 알칸펠에 대한 충성을 묻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또 물어볼까.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들이 알칸펠을 배신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맘을 품어본 적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푸르크슈탈이 좀 어이없다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닥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게."
발카스는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농담 같은걸 하는 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하긴 알칸펠에 대한 충성을 묻는 게 농담거리는 절대 아니지만. 신이 먼저 대답하였다.
"예. 저의 알칸펠님에 대한 충성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제 명예와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알칸펠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푸르크슈탈 역시 신을 이어 곧바로 대답하였다. 발카스는 다소 안심한 듯이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결의를 들으니 좀 안심이 되는구먼. 그럼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발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능하면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카스의 마음속에만 담아두려했던 거지만 이제는 밝힐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동요하고 있는 12신장 멤버들 중에서 발카스가 가장 신임하고 있는 이 두 사람 -푸르크슈탈과 신- 에게라도 이야기 해 둬서 확실하게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둬야 했다. 결심을 굳힌 발카스가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알칸펠님의 신체에 관한 얘기네."
****************************************
"와펠다노스와 가레노스는 어디 있어?"
"회의 끝나자마자 돌아갔어. 참여할 생각은 없는가봐."
클라우드 게이트의 VIP 룸에 신장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푸르크슈탈이 주제한 회의는 별다른 결론 없이 끝났다. 가이버 토벌 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문제는 알칸펠의 제가를 얻어야 하는 일이니 만큼 신장 멤버들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푸르크슈탈의 말은 누가 봐도 옳았지만 문제는 알칸펠 역시 그 의견에 동조해 줄까 하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알칸펠에게 명령을 어긴 불충한 자로 찍힐까봐 다들 염려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각자 생각 좀 해 본 다음에 통보해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곳 VIP룸에 모인 신장멤버들은 쿨메그닉, 자빌, 카브라알, 리엔쯔이, 칼레온의 5명이었다. 알칸펠은 이번에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부상을 당한 이마카람은 당연히 못 왔고 와펠다노스와 가레노스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각자의 담당구역으로 돌아갔다. 신과 푸르크슈탈, 발카스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발카스 박사가 아무래도 신과 푸르크슈탈을 회유하고 있는 것 같군. 그 두 사람은 발카스 박사가 특히 신임하는 자들이니까."
카브라알이 정확하게 짚었다. 사실 이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북미지구 담당인 신은 그렇다 쳐도 이 곳 일본지부 담당인 푸르크슈탈이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게다가 발카스도 안 보이고 발카스가 특히 신임하는 두 사람도 같이 안 보인다면 정답은 이미 나온 셈이다. 카브라알의 말에 자빌이 볼 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 두 사람만 신임한다고 하면 나머지 우리는 뭡니까?"
"뭐긴 뭐야. 왕따지."
카브라알 대신 쿨메그닉이 이죽거렸다. 발카스도 그렇고 알칸펠도 그렇고 같은 신장 멤버인 자기들을 홀대하는 것 같아서 자빌은 마음이 좀 상했다. 사실 그건 자빌뿐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다른 멤버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렇고 다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칼레온이 모두에게 의견을 물었다. 바로 푸르크슈탈이 제안한 가이버 토벌건이었다. 칼레온 본인은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다. 가이버를 더 이상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알칸펠의 뜻을 알지 못하니 조금 걱정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구해본 것이다.
"뭐, 난 상관없어. 한 번 해볼까 하는데."
쿨메그닉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고 유머스러운 인물이라 그런지 쿨메그닉은 별로 고민하는 기색은 없었다. 모두는 쿨메그닉에게 주목하였다.
"그 가이버란 것에 흥미가 좀 생겨서 말이야."
"역시 자네 목적은 딴 데 있었군."
"자빌, 자네는 궁금하지 않아? 왜 우리가 가이버 토벌에 나서면 안 되는 건지."
쿨메그닉이 자빌에게 오히려 반문하자 자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자빌도 궁금해졌다. 왜 알칸펠은 오랫동안 알칸펠 본인을 모셔오던 다른 신장멤버들을 전부 다 제쳐놓고 자기가 직접 임명한 이마카람에게 모든 걸 다 일임한 걸까? 왜 다른 신장 멤버들은 가이버와 싸우면 안 된다는 건가.
"생각들 해 보라고. 우리는 12신장이야. 알칸펠님의 직속 부하라고. 그런데 왜 우리는 가이버와 싸우면 안 되는 거지?"
쿨메그닉이 그 동안 모두가 궁금해 하면서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덕분에 우리는 그 동안 가이버가 어떻게 설치든 간에 거의 남의 일처럼 구경만 했지. 그 결과가 바로 이거야. 그런데도 닥터 발카스는 알칸펠의 뜻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개입하는 걸 막으려고만 하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쿨메그닉."
리엔쯔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리엔쯔이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아니 엔쯔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가 긴장해 있었다. 쿨메그닉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와 가이버가 접촉하면 뭔가 큰 일이 나니까 그러는 게 아닐까? 우리가 당할까봐 그러는 게 아니라 가이버 자체에 우리가 알면 안 되는 뭔가 큰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거지."
그 말에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알칸펠이 자기의 충복이라 할 수 있는 이마카람에게만 가이버 토벌을 맡긴 이유도 쿨메그닉의 가정을 대입해보면 딱 맞아 떨어졌다. 다른 신장 멤버가 알면 안 되는 가이버의 비밀. 순전히 가정일 뿐이지만 달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이버 같은 골칫거리를 모두가 힘을 합해 해치우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규오도 마찬가지야. 그 녀석도 가이버에 묘하게 집착했지. 그리고 건방지게도 반란을 시도했어. 우리들은 그렇다 쳐도 지 까짓게 감히 알칸펠님에게 대항하다니. 녀석이 그렇게 철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모두는 숨을 죽였다. 그러고 보니 1년 전에 알칸펠에 의해 숙청된 규오도 가이버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집착하였다. 규오는 틀림없이 가이버에 관한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그걸 손에 넣어 알칸펠에게 대항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시도했던 것일 꺼다.
"이봐. 너는 알칸펠님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는 거냐?"
리엔쯔이가 쿨메그닉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더 이상은 웬지 알면 위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물론 무섭지. 나도 그런 건 생각조차 하기 싫다고."
여유 있게 웃던 쿨메그닉의 얼굴에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쿨메그닉을 비롯한 신장 멤버 모두는 조아로드로 조제되기 전 평범한 인간이었을 당시 알칸펠과 직접 대면하였었다. 그리고 알칸펠에게서 다들 본능적으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쿨메그닉은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절에는 자기 부족이나 인근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가장 강맹한 용사로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사자 조차도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일대에서는 쿨메그닉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그는 당시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알칸펠을 만나자 알칸펠에게서 근원적인 공포를 느낀 것이다. 사자 앞에 어린 사슴처럼 그는 그대로 알칸펠을 무서워하며 고개를 땅에 처박았었다.
"하지만 말이야. 어떻게 보면 알칸펠님도 두려워하시는 게 있는 것 같아."
쿨메그닉이 땀을 훔치면서 말했다.
"우리와 가이버가 접촉하는 것은 분명 알칸펠님에겐 절대로 피해야 하는 일인 것이 틀림없어."
****************************************
"그러니까, 이야기는 먼저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던 4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네."
발카스가 조아로드가 되기 이전, 지금으로 부터 4백 년 전에는 유럽인들 사이에서 신대륙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던 때이다. 1492년 10월 12일 컬럼버스가 바하마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에 상륙하는 것을 시작으로 -물론 컬럼버스는 인도를 가려다가 그만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격으로 발견한 거지만.- 수많은 탐험가들이 거친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신대륙에 대한 열풍은 당시 평범한 학자였던 발카스의 마음도 거세게 뒤흔들었다. 신대륙, 이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이던가.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을 생각할수록 그의 가슴은 거세게 뛰었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발카스는 이미 너무 나이 들어서 탐험은 고사하고 좀 떨어진 다른 도시로 가는 것도 힘겨웠던 때였다. 그래서 주변의 모두가 그런 발카스를 말렸다. 하지만 늙은 몸도 주변의 반대도 신대륙을 보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미의 식민지로 가는 무역선에 선의(船醫)로 자원하여 승선하였다. 당시 원양 항해는 매우 힘들고 병을 얻기가 쉬워서 의사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위에 폭풍우가 몹시 심하게 치기 시작했다. 거센 폭풍우를 헤쳐 가며 간신히 항해하던 발카스가 탄 배는 그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침몰하고 말았다. 발카스를 비롯한 선원들 모두가 바닷속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발카스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
.
.
.
.
"....으...음...."
발카스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모래가 보였다. 발카스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추스리려 애썼다. 잠시 후 주변 풍경이 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바닷가 백사장일 뿐이었다. 설마 여기가 신대륙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침몰하기 전에 선장이 이제 겨우 반 정도 왔을 뿐이라고 얘기해 줬던 것이다. 어딘가의 외딴 섬이 틀림없었다.
아무튼 일단 목숨은 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백사장 앞에는 울창한 열대 우림이 펼쳐져 있었다. 혼자 아무런 도구도 없이 들어갈려니 좀 겁이 나기도 했지만 여기서 마냥 있어봐야 대안도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백사장을 벗어나 조심스럽게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혼자서 숲을 헤매던 발카스는 더럭 겁이 났다. 숲 속이 너무 울창해서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니 태양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꼼짝없이 숲속을 해맬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픈 건 둘째쳐도 목이 너무 말랐다.
그런데 이 숲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발카스는 동식물 분야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편이었는데 이 숲속에 있는 식물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간간히 보이는 나무 열매들 역시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종이다 보니 함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독이 있는 열매일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나이든 그가 동물을 사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꾸로 사냥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부웅! 부웅!!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뭔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는 즉시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옆을 뭔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발카스는 경악하였다. 커다란 두개의 눈, 4장의 날개, 상당히 긴 꼬리, 6개의 다리. 다름 아닌 잠자리였다. 일단 형태는 발카스가 알고 있던 잠자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문제는 바로 크기. 놀랍게도 발카스를 스쳐 지나간 잠자리는 그 날개 길이만 거의 2m는 됐던 것이다!
"아니!! 저럴 수가! 저렇게 거대한 잠자리가 있었단 말인가!!!"
발카스가 날아가는 거대 잠자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그 순간 위에서 어떤 그림자가 그 잠자리를 덮쳤다.
"카악!!"
-콰직!!
덮친 것은 새였다. 그런데 그 새 역시 발카스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도대체 저게 새인지 아니면 악어에다가 날개와 깃털을 붙인 건지 알 수가 없는 기묘한 생물이었다. 어쨌든 위에서 덮친 그 '새'는 그 날카로운 이빨로 거대 잠자리를 머리부터 씹어 먹기 시작했다. 잠자리는 열심히 버둥거렸지만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발카스는 소름이 끼쳤다. 저 새가 잠자리를 다 먹은 다음에 자기도 덮칠까봐 겁이 났다. 그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
"헉! 헉!"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던 발카스는 이제 정말로 기진맥진 하였다. 나이도 나이지만 이 찌는 듯이 더운 지방의 숲속을 물 한 방울 마시지도 못하고 한참을 돌아다녔으니 지칠 만도 했다. 그는 땀을 훔치면서 근처의 나무뿌리 사이에 주저앉았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야생에서 살아가는 지식은 고사하고 이런 데를 와본 적조차 없는 발카스로서는 나무 수액조차 채취할 줄 몰랐다. 그는 의학이나 각종 동식물 연구 등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지만 정작 여기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문득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헛공부를 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호호호호'
그 때 그의 귓가에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는 좀 더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 목소리는....틀림없이 사람이다!
"사람이다! 틀림없어! 사람이 살고 있어!"
발카스는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벌떡 일어서서는 그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가면 갈수록 웃음소리가 더 커져갔다. 노래 소리 비슷한 것도 들려왔다. 목소리 톤을 들어보면 이건 틀림없이 젊은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잘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발카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다.
"여보시오! 나 좀 도와주시오!"
발카스는 힘껏 소리 지르며 숲을 해쳐나갔다. 갑자기 앞이 확트이는걸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숲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자 발카스의 눈앞에 커다란 호수가 펼쳐졌다. 그리고 호수가의 커다란 바위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발카스는 즉시 그 쪽으로 뛰어갔다.
"여보시오! 아가씨들! 나 좀 도와...!!"
그 순간 발카스는 놀라운 걸 보고 말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호숫가에 있던 사람들은 젊은 여자들이었고 상반신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반신. 그녀들의 하반신은 인간의 다리가 아니라 물고기의 지느러미 형상이었던 것이다! 동화나 전설 속에나 나오던 인어들이었다!
그 인어들은 우두커니 서 있는 발카스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끼리끼리 소곤거렸다. 그리고 서로 얘기하다가 까르르 웃기도 하였다. 발카스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쏴아아!
"우워어어어!!!"
그 순간 갑자기 호수 한가운데 물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뭔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회색 피부를 가지고 목 길이만 십여 미터는 훨씬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괴물이 떠올랐다. 공포에 질린 발카스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괴물은 웬만한 성채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히히힝!!"
옆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발카스는 이번엔 또 뭐가 튀어나온 건가 싶어 벌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바로 옆에는 말의 다리가 보였다. 그런데 그 말의 목 부분에는 말 머리가 아니라 인간의 상반신이 있었다. 신화속의 동물이라던 켄타우르스였다! 그 켄타우르스는 자기들에겐 이방인인 발카스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카스의 안색은 대번에 새파래졌다.
"으....으아아아아!!!"
결국 극도의 공포심을 못 이긴 발카스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방금 전에 간신히 빠져나온 숲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인어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마귀할멈의 웃음소리 마냥 들려왔다.
****************************************
"으...으아아! 사..사람살려!! 사...어이쿠!!"
-콰당!
한참을 달아나던 발카스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어딘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발카스가 넘어진 곳의 바닥이 이상했다. 숲 속이라고 생각했는데 땅바닥이 이제까지 보던 흙이 아니라 돌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연적으로 생긴 자갈밭이 아니라 누군가가 일일이 돌을 깎아가며 정성스럽게 제대로 포장한 길이었다. 깜짝 놀란 그는 몸의 고통을 잊고 그 돌길을 천천히 살펴봤다. 이건 틀림없이 문명의 흔적이었다.
"사람이....살고 있는 건가?"
돌길은 눈앞에 보이는 산 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발카스는 그 돌길을 따라가 보았다. 조금 걷자 산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였다. 계단은 저 위에 산 너머 까지 이어져 있었다. 역시 이건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말이 통할 수 있는 진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숲은 사라지고 근처에는 조그만 풀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바다에는 몇 개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발카스가 타고 가던 배는 저 소용돌이들 중 하나에 걸린 것이다. 그런데 선장은 항해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항로상에 이런 섬이 있었다는 걸 몰랐단 말인가?
지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가던 그는 드디어 산 정상에 도달하였다. 돌계단은 산 정상까지 정성스럽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뭐지...? 이 곳은...."
처음 보는 양식의 신전이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 부분만 잘라낸 듯 한 모양의 신전은 상당히 웅장해 보였다. 그러나 주변에는 저 신전 이외에 다른 건축물은 없었다. 이건 신전이라기보다는 마치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용도의 건축물, 무덤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사람의 기척뿐만 아니라 조그만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 섬의 동물들이 일부러 접근을 안 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발카스는 좀 겁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꾹 참고 신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전의 출입구로 생각되는 곳으로 들어서자 발카스는 온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바깥은 열대 지방답게 찌는 듯이 더운데도 이 안은 햇빛이 안 들어와서 인지 상당히 춥게 느껴졌다. 좁은 틈으로 햇살이 조금 비치는 게 조명의 전부인지라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으음"
신전 내부의 통로 벽면에는 여러 기묘한 동물들이 조각돼 있었다. 하나같이 다 발카스가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아니 그 중에는 방금 전에 발카스가 본 인어라든지 켄타우르스나 거대 잠자리도 보였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조각해 놓은 건지는 몰라도 최소한 현재의 인류 수준의 지성을 가진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짐승들이 이런 걸 만들었을 리는 없으니까.
통로의 끝이라 생각되는 곳에 도달하였다. 그러자 그의 바로 앞에 거대한 석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발카스는 난감해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다른 데로 빠지는 길이 전혀 없는 일방통행로여서 더 이상 전진이 안 된다면 완전히 허탕만 친 셈이기 때문이었다. 발카스는 그 석벽을 여기저기 더듬어 보며 혹시나 문을 여는 장치 같은 게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석문의 가운데에 위치한 파란 보석에 주목하였다. 그 보석은 문 전체에 새겨져 있는 어떤 정체불명의 생명체의 이마(라 생각되는 부분)에 박혀있었다. 발카스는 그 보석을 살짝 만져보았다.
-스르륵
발카스가 툭 튀어나온 보석을 만지자 그 보석이 안으로 쏙 밀려들어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직후 석문이 양 옆으로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의 앞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한참동안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자 발카스는 눈이 부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눈이 서서히 빛에 익숙해지면서 그는 그제야 앞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석문의 너머에는 원형의 커다란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한 가운데에는 뭔가 커다란 고치 같은 것이 있었다. 그 고치의 양 끝은 각각 천정과 바닥의 돌로 된 원형 구조물 위에 고정돼 있었다. 발카스는 그 고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보았다.
"...허억!"
발카스는 숨이 멋는것만 같았다. 그 고치의 표면은 아주 투명했다. 그리고 내부는 물 같아 보이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 물로 가득 찬 고치 안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 잠을 자고 있는지 두 눈을 감은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 사람은 정말 하나의 유명한 조각 작품 같았다. 새하얀 피부와 은색의 머리, 그리고 웅크리고 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의 몸에는 군살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니, 그런 눈으로 보이는 것 이외에도 그의 모습에는 어딘지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 이 안에 있는 게 정말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발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고치의 표면에 갔다 대었다.
-화악!!
그러자 갑자기 고치가 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발카스는 깜짝 놀라 고치에서 손을 떼고는 뒤로 물러섰다. 발카스는 이번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지나 싶어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 직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치 안에서 잠자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발카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을 보자마자 발카스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고치안의 남자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고치를 부수고 나오는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벽면을 그냥 통과하였다. 마치 유령이 벽을 그냥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남자는 고치를 나오면서도 시선은 발카스를 향해 있었다.
<너는 누구지?>
그 순간 발카스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음성. 발카스는 직감적으로 자기 눈앞에 이 남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자기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신, 바로 신이라 할 수 있었다.
"저....저는...."
발카스는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대로 자기 눈앞에 이 남자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저는....당신의....종입니다!"
****************************************
"그 남자라는 게 설마...!"
"그래, 알칸펠님이시네. 난 그 때 그분을 처음 뵈었지."
발카스의 말에 신과 푸르크슈탈은 숨을 죽였다. 이런 얘기는 이제까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알칸펠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발카스조차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다. 지금 두 사람은 크로노스의 탄생에 얽힌 비밀을 듣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알칸펠님이 계시던 그 대서양상의 섬은 대체..."
"'시라 섬'이라고 하네."
"시라 섬이요?"
그 말을 들은 신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이윽고 그것을 기억해냈다.
"흠...닥터. 혹시 동방기행기에 나온 그 시라 섬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네. 바로 그 섬이지."
발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푸르크슈탈이 신에게 물었다.
"그게 뭔데?"
"14세기 무렵 파리에서 출판된 J.맨데빌의 '동방기행기'를 말하는 거야. 그 책에 따르면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그 후 백 년간 그 섬에서 지냈다고 하지. 그런데 그게 실존하는 섬일 줄은...."
책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두 사람은 지금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옛날같이 원양항해가 극히 어렵고 배로만 장기간에 걸쳐 항해해야 했던 시대, 그것도 아직도 인류가 가보지도 못했던 미지의 땅이 많았던 시절에는 시라 섬이 발견되지 않을 수 있다 치자. 지금은 도저히 발견 안 될 수가 없다. 비행기를 넘어서 인공위성이 지구 곳곳을 촬영해서 정밀한 지도를 만드는 세상이고 인류의 발자국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진정한 의미의 무인도는 없다고 봐도 된다. 게다가 그 섬에는 정채 불명의 생물체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섬이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 섬에는 강림자의 우주선의 잔해가 있네."
"예에??"
"아마도 그 섬은 태고적에 강림자들의 생체 실험장이었던 같아."
그 옛날 원시 지구에 내려온 강림자들은 지구상에서 각종 생체 실험을 하였다. 자기들이 원하는 궁극의 생체 병기를 만들기 위해. 시라 섬은 바로 그런 실험장들중 하나였으며 시라 섬에 지금까지 있는 각종 신기한 동식물들은 바로 그 실험의 와중에서 나온 생물체들이다. 그 때 발카스가 보았던 거대 잠자리나 인어, 호수속의 거대 괴물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공룡이었다. 나중에 학자들이 브라키오사우루스라고 부르게 되는 공룡이었다 - 등등은 모두 강림자들이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물론 그 것들 중에는 강림자들이 의도하던 것도 있을 거고 의도하지 않았던 것도 있겠지만.
시라 섬에 있다는 우주선은 말 그대로 잔해뿐이다. 과거에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라 섬의 우주선은 완전히 파괴돼서 더 이상 기능하지 않고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이 우주선은 아직 완전하게 죽지 않았다. 우주선 주위의 일정 구역 내에 강력한 사이코 필드를 펼쳐서 외부의 급격한 환경변화로 부터 섬의 생태계를 보호하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공룡 같은 태고적의 생물들이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필드의 효과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섬 자체를 외부의 어떠한 관측수단으로 부터 완벽하게 감추는 일종의 스텔스 효과까지 가져왔다. 그래서 설사 맨 눈으로 본다 해도 섬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찰스 다윈이 그 섬을 봤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껄? 후후후."
****************************************
그 날 이후, 발카스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알칸펠은 발카스를 종으로 거뒀고 발카스는 영원히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한동안 섬에서 지내던 발카스에게 어느 날 알칸펠이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해밀컬."
"예."
"동지를 모아라."
알칸펠은 신전 꼭대기의 발코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고 그 틈 사이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발카스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알칸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알칸펠은 계속해서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너를 포함해서 모두 11명의 부하가 필요하다. 그들을 모아와라. 그들 한명 한명에게 내 힘을 나눠주겠다. 그래서 그들을 주축으로 나의 군대를 만들 것이다. 언젠가 그들을 이끌고 저 하늘을 공격하기 위해...!"
하늘을 공격! 신에게 도전하겠다는 뜻일까. 그 말을 들은 발카스는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황당하다는 생각보다는 과연 그 야망의 스케일이 다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알칸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알칸펠의 얼굴에는 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 한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 후 알칸펠의 조아 크리스털에서 배핵의 분할, 배양이 이루어져 모두 11개의 복제 크리스털이 완성되었다. 발카스는 그 중의 한 개를 전수 받아 조아로드가 되었다.
조아로드가 된 직후 그는 알칸펠과 함께 대서양 건너편의 신대륙 -오늘날 북아메리카로 불리는- 곳으로 건너갔다. 알칸펠은 발카스를 북아메리카의 황량한 산악지대, 오늘날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데려갔다. 알칸펠은 그 곳의 수많은 바위산 중에서 한 곳을 지정하였다. 두 사람은 산 정상에 내려앉았다.
"자, 밑을 봐라."
발카스는 알칸펠의 지시에 그 자리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조아로드의 능력을 발휘해서 산 아래를 투시하였다. 그러자 그의 눈에 알칸펠이 얘기해 줬던 우주선의 잔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먼 옛날 이 지구에 왔던 우주인들이 버리고 간 것이 이 산 아래에 묻혀 있는 것이다.
"이 지하에 있는 우주선은 이미 태고적에 말라 비틀어져 버린 상태다. 그래도 다행히 기억 중추만은 살아있어."
그렇다면 이건 엄청난 가치를 가진 물건이었다. 시라 섬에 있는 우주선은 기억 중추가 파괴당해 겨우 생명유지 장치정도로 밖엔 쓸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즉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곳의 우주선처럼 기억 중추가 살아있다면 얘기가 전혀 다르다. 그 옛날 강림자들이 남긴 엄청난 양의 지식을 알아 낼 수 있는 것이다.
"해밀컬, 네 임무는 이 우주선에서 최대한의 지식을 습득해서 나와 11명의 동지들이 부릴 조아노이드 군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잘 해봐라. 이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맡기겠다."
"이 해밀컬 발카스, 목숨 바쳐 그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발카스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하였다. 그는 속으로 다짐하였다. 알칸펠님을 위해서 반드시 그의 위엄에 걸맞는 군대를 만들어내겠다고.
발카스는 즉시 일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바위산 지하에 묻혀있는 강림자의 우주선 잔해의 기억중추에서 그 옛날 강림자들의 방대한 실험기록등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비밀결사 '크로노스'의 창설에 착수할 수 있었다. 유적 우주선이 발견된 이 곳 바위산은 훗날 크로노스의 본부 기지가 되었으며 모든 크로노스 구성원의 성지가 되었다.
****************************************
"그리고 그 후 난 4백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조아로드가 될 만한 뛰어난 인재를 찾아 다녔지."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요. 전 370년 전 미국에서 박사를 만났죠."
신이 그 때의 추억이 생각나는 듯이 웃었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푸르크슈탈도 그 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전 215년 전 빈에서 박사를 만났었죠."
발카스도 그 때가 생각났다는 듯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현재의 12신장 멤버들은 맨 마지막에 새로 12신장에 임명된 이마카람 밀리 비너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발카스가 400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발한 인제들이다. 알칸펠의 직속부하이자 크로노스의 중추가 되어야 하기에 발카스는 인제를 뽑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물론 반역을 저질렀다가 숙청된 규오의 경우에는 발카스의 안목에 최대 오점으로 남고 말았지만.
"아무튼 서서히 12신장 멤버들도 점점 갖춰져가고 조직의 기반다지기도 본 궤도에 올랐을 무렵이었지. 바로 그 때....."
발카스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졌다. 신과 푸르크슈탈 역시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발카스가 긴장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칸펠님의 신체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네."
****************************************
"이 곳은 여전하군..."
발카스는 실로 오래간만에 시라 섬을 찾았다. 그 동안 12신장이 될 자격이 있는 뛰어난 인재도 찾아다니고 창설 된지 얼마 안 되는 조직의 기반을 다지는 일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자연히 시라 섬에 발길이 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건 발카스가 알칸펠에 대한 충성심이 식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알칸펠에 대한 그의 마음은 단순히 충성심을 넘어 신앙에 가까웠다. 그도 처음에는 한 달에 두세 번 이상 들러서 경과보고를 하였었다. 그러나 알칸펠이 오지 말라고 막았다. 와서 보고할 시간이 있으면 자기가 내린 명령을 하루라도 빨리 완수해 내라고 핀잔을 주었다. 난 너만 믿고 있으니 알아서 잘 해 봐라 라는 말과 함께. 그 때 발카스는 알칸펠이 자기를 믿고 있다는 얘기에 감격해 하면서도 알칸펠의 꾸지람에 (물론 알칸펠은 그냥 농담조로 가볍게 얘기한 거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발카스는 더욱 더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안 와볼수가 없었다. 알칸펠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발카스를 비롯한 신장 멤버(이때는 아직 5명 정도밖에 없었다)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게 벌써 2년째였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직접 밖으로 나와서 발카스의 브리핑을 듣거나 다른 신장 멤버들을 살피거나 했었는데 어느새 부터인가 점점 그들앞에 나타나는 횟수가 줄더니 급기야는 2년 전 부터는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 된 발카스가 오늘 시라 섬에 온 것이다.
알칸펠이 머무는 신전은 처음 봤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특별히 무슨 큰 일이 벌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알칸펠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어디 나가신 걸까? 발카스는 의아해 하면서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응?"
그런데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통로 안쪽에 뭔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뭔지 궁금해진 발카스는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쓰러져 있는 그게 뭔지 확인하고는 경악하였다.
"알칸펠님!!!"
****************************************
"도대체 알칸펠님께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수면 중이셨네."
발카스의 대답에 두 사람은 맥이 탁 풀렸다. 뭔가 큰 일이 벌어진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더니만 한다는 소리가 자고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발카스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원래 발카스는 농담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지만 지금 그의 태도를 보니 농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발카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통 잠이 아니었네. 맥박도 호흡도 거의 정지한 상태의....가사상태였지."
"가사상태요?"
"그 때는 왜 그런 건지 알 수 없어서 나도 무척 당황했지. 내가 아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어도 알칸펠님은 깨어나지 않으셨네. 몇 년 후 스스로 일어나실 때 까지는."
그 때 당시 발카스는 알칸펠이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 발카스 자신이 너무 미숙했기에 그랬던 건가 싶어 깊은 절망에 빠졌었다. 다른 신장 멤버들이 동요할까봐 모두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결국 알칸펠의 신상에 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조직의 붕괴로까지 갈 수 있었다. 그래도 아주 약하나마 맥박은 뛰고 있으니까 최소한 죽은 건 아니다. 그러니 당시의 발카스로서는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비로소 알칸펠이 깨어났고 그 이후 알칸펠에게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알칸펠의 잠은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기나 긴 잠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바로 휴면기였다.
"대체 알칸펠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주기적인 휴면기라니요?"
"나도 모르겠네. 알칸펠님도 거기까지는 말씀 안 해주셨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알칸펠님은 우리와는 달리 태초에 강림자들이 직접 조제한 오리지널 조아로드란 것뿐이야."
현재의 12신장 멤버들은 모두 다 발카스가 직접 조아로드로 조제하였다. - 발카스 본인은 알칸펠이 조제하였다 - 발카스는 애리조나 그랜드 캐니언의 바위산 지하에 있던 유적 우주선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아로드의 조제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발카스가 입수한 지식의 양은 솔직히 '어깨너머로 훔쳐보기' 수준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조아로드는 당연히 강림자가 태초에 만들었던 오리지널 조아로드와는 그 능력이나 힘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알칸펠의 전투력과 현재 신장 멤버들의 전투력은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
제9화 - 발카스의 회상 -
"으음....!"
클라우드 게이트의 최고 간부 회의실에 모인 신장 멤버들은 전면의 대형 스크린에 비쳐지는 요코하마의 참상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시내 곳곳에 기간틱과 이마카람(무라카미의 새로운 이름)과의 전투로 인해 무너진 건물들이 수도 없이 널려 있었고 요코하마 스타디움은 완전히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때마침 당시 경기 중이라서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있던 요코하마 스타디움의 인명피해는 상당히 컸다. 요코하마 시의 명물인 마린타워 역시 중간 부분이 뚝 부러져 버린 채였다. 부러진 위쪽의 전망대에 있던 사람들은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특히 이마카람 밀리비너스가 무책임하게 유사 블랙홀을 구현했던 요코하마 코스모 월드 부근은 그 피해 정도가 심각했다. 항상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그것도 가족단위의 입장객이 많은 놀이공원의 특성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고 그 다수는 어린 아이들과 학생들이었다. 놀이 기구는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들이 즐비했다. 코스모 월드 부근에 있던 아오시마 호텔도 무사하지 못했다. 건물 전체의 3분의 1이 블랙홀로 인해 파괴 돼 버린 호텔은 지금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모습이었다.
"인명피해는 거의 5만 단위에 이릅니다. 재산피해는 잠정 집계수치를 보는 게 겁날 정도입니다."
"뭐 5만 명 정도라면 도시의 규모로 봤을 때 그리 큰 피해는...."
"사망자만 따져서 그런 거야. 부상자는 차마 볼 엄두가 안 나."
쿨메그닉이 농담 비슷하게 이죽거리자 푸르크슈탈이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일본 지부를 관장하는 총독으로서 아무리 구인류라고 해도 시민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던 푸르크슈탈로서는 쿨메그닉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웃을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영 아닌 것을 그제야 감 잡았는지 쿨메그닉은 멋쩍은 듯 두어 번 헛기침 하더니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하여튼 요코하마 시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가이버 기간틱과 조아로드라는 두 최강의 전투 병기가 맞붙은 결과였다. 나중에 피해를 수습하고 도시를 다시 재건해야 할 걸 생각하니 푸르크슈탈은 골치가 아파왔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유사 블랙홀까지 써 가면서 큰 피해를 내가며 싸웠건만 기간틱을 해치우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피해가 얼마가 됐든 이겼으면 그래도 참고 넘어가겠지만 일을 이렇게까지 벌려놓은 이마카람은 오히려 기간틱에게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푸르크슈탈은 지금 당장 이마카람을 패 죽이고 싶었다.
"그래, 이마카람은 지금 어디 있나?"
"알칸펠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발카스가 이마카람의 안부를 묻자 푸르크슈탈은 소태 씹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 말에 발카스와 한두 명을 제외한 신장 멤버 대다수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너무 이마카람만 싸고도는 알칸펠에 대해 불만들이 있던 것이다. 평소에는 일 년에 얼굴 몇 번 마주치기도 힘들 정도로 나타나지 않더니만 부하 하나 부상당했다고 그 즉시 달려와서는 서둘러 데려간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흥. 유사 블랙홀까지 쓰다니. 이마카람 녀석,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 녀석 제정신인가?"
검은 망토를 두르고 검은 터번을 쓴 남자, 자빌 붐 하이안이 빈정대었다. 그러자 옆에 옆 자리에 앉아있던 호리호리한 체구의 동양계 남자, 리엔쯔이가 거기에 동조하고 나섰다.
"애초에 그런 신참에게 가이버 토벌이라는 중대임무가 전담되었다는 것을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이제까지 오랫동안 알칸펠님을 모셔온 우리를 제쳐두시다니....난 좀 섭섭해."
발카스를 제외하면 멤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그만 체구의 노인, 카브라알도 나섰다. 그러자 멤버들이 저마다 이마카람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마카람의 지금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 하는 신장은 아무도 없었다. 그 딴 녀석 어찌되든 알 게 뭐냐 라는 식이었다. 게다가 이야기가 점점 이마카람을 영입한 알칸펠에 대한 불만으로 까지 흘러가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발카스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쾅!
"경들은 말을 삼가시오!!!"
발카스가 소리 지르자 신장 멤버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마카람이야 둘째치더라도 감히 알칸펠에게까지 불만을 토로하는 꼴을 발카스는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발카스는 모두를 꾸짖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알칸펠님의 뜻이오! 알칸펠님께선 무슨 생각이 있으시니까 이마카람을 뽑은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가만히 그 분의 뜻을 따르면 되는 거요."
"그 알칸펠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다들 이러는 거 아닙니까."
푸르크슈탈이 오히려 말대꾸를 하자 발카스는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푸르크슈탈은 발카스가 다른 신장 멤버들 보다 신임하는 편이고 푸르크슈탈 역시 발카스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었는데 오늘은 아예 대놓고 반발하고 있었다. 당황한 발카스가 다른 신장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푸르크슈탈에게 주의를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줘서 후련하다는 듯 한 표정들이었다. 푸르크슈탈은 당황해하는 발카스를 제쳐 두고 모두에게 오늘의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주십사 하고 청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크로노스의 적인 가이버를 처 부수기 위해 여러분들께 도와주십사 하고 요청하기 위함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부 신장 멤버는 안 그래도 싸우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웃었다. 푸르크슈탈의 이 말은 자칫 잘못하면 알칸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알칸펠은 분명 가이버의 토벌은 전적으로 이마카람에게만 맡긴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명령은 알칸펠 본인이 직접 나타나서 말한 게 아니라 알칸펠의 직속 참모격인 발카스가 모두에게 전했던 얘기다. 하지만 바로 이 것이 문제였다.
"푸르크슈탈!!"
듣다 못한 발카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푸르크슈탈에게 소리쳤다. 그는 잔뜩 당황한 채로 계속해서 소리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알칸펠님의 명령도 없이 행동하려 하는가!"
"그럼 대체 어쩌란 말씀입니까!"
뜻밖에 푸르크슈탈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발카스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푸르크슈탈은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만약 기간틱이 또다시 이 곳 클라우드 게이트를 공격해오면 그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어디서 뭘 하고 계신지도 모르는 알칸펠님의 명령만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냥 죽으란 말입니까!"
"이보게, 푸르크슈탈."
그 때 푸르크슈탈 옆에 앉아있던 신이 그를 조용히 말렸다. 친구인 푸르크슈탈이 너무 흥분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내버려두면 위험하겠다 싶어서 신이 나선 것이다. 이 이상 더 말하면 자칫 잘못하다가 알칸펠에 대한 불경죄를 저지를 수도 있었다. 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리자 푸르크슈탈이 다소 흥분을 가라 앉혔다. 그리고 그는 곧장 발카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실언을 했습니다. 여러분들께 사과드립니다."
흥분을 가라앉힌 푸르크슈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닥터 발카스, 이해해 주십시오. 전 알칸펠님의 뜻에 거스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이버들이 계속해서 설치게 내버려두면 우리 크로노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현재 진행 중인 방주 계획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알칸펠님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발카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른 신장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표정만 봐도 이미 다들 심정적으로는 푸르크슈탈에게 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장 멤버들은 이미 더 이상 발카스를 따를 생각들이 없었다. 이마카람 문제는 알칸펠의 명령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걸 알칸펠 본인이 직접 나타나서 말한 게 아니라 발카스가 대신 말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즉 다들 이젠 발카스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중간에 발카스 본인이 무슨 꿍꿍이를 꾸민 건지 아닌지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발카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이젠 더 이상 자신 혼자만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가이버와 다른 신장 멤버들의 접촉을 막아야 했지만 그로서는 불가능했다. 따지고 보면 푸르크슈탈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가이버들이 쳐들어 왔을 때조차 그냥 도망만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가 무엇보다 알칸펠을 위해 알칸펠의 적을 쓰러뜨리겠다는데 그걸 무슨 명분으로 막는다는 말인가.
'알칸펠님....이 늙은이는 이제 더 이상 이들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발카스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지금 이들을 막으려면 역시 알칸펠이 직접 나서야 했다. 그래서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그 위엄을 보여주며 직접 명령을 내려야 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알칸펠이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 나타나 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다.
'제발....한 번 더 당신의 위엄을 보여 주십시오....'
****************************************
도쿄에서 좀 외곽 쪽에 위치한 곳에 3층 정도 높이의 버려진 저택이 하나 있다. 벌써 몇 년째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지 정원은 온통 잡초 투성이였고 건물 역시 벽면에 넝쿨과 이끼가 보기 흉하게 잔뜩 엉켜 있었다. 건물 자체는 유럽풍의 석조 건물로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이긴 하지만 관리상태가 엉망인지라 고급 주택의 느낌은 퇴색돼 버렸다. 건물 안이라고 해서 멀쩡한 건 아니다. 주택 안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곳곳에 거미줄이 흉하게 쳐져 있었다. 내부 집기들 역시 방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의 흔적이 몇 년 동안 없던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사람들이 오래간만에 다시 들어왔다.
"자, 이러면 됐나요?"
"감사합니다. 이제 많이 편해졌어요."
울드는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야미에게 주사를 놓았다. 주사를 놓자 하야미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이 보였다. 울드가 놓은 주사는 일종의 영양 공급제인데 주로 조아노이드등의 조제체에게 사용하는 응급처치용 약품이었다. 손종 실험체로 조제되기 위해 다소 위험한 방식으로 조제를 한 하야미의 몸은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베르단디나 울드로서는 하야미에게 함부로 회복 법술을 걸어줄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몸을 파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공격 법술은 한 가지 공식만 만들어도 웬만한 적에게 다 통용될 수 있었지만 회복하고자 하는 상대의 몸에 일일이 맞춰야 하는 회복법술은 그런 식으로 일률 적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응급처치만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던 거처를 엔자임들과 무라카미의 기습으로 잃은 베르단디들은 지금 이 버려진 저택의 지하 비밀 공간에 몸을 숨겼다. 이 저택의 서재에는 책장을 위장한 비밀 출입문이 있었고 그 곳 지하에는 십여 명 정도의 인원이 오랫동안 지낼 수 있는 넓은 거주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지하 공간의 방들 중 한 곳에는 조아노이드를 조제하는 데 사용하는 조제통과 컨트롤 시스템이 있었다. 유적기지에서 봤던 조제시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다.
"오다기리 할아버지의 집 지하에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
스쿨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하 공간에 있는 조제설비를 둘러보았다. 스쿨드의 말 대로 이 저택은 바로 오다기리 주임의 집이었다. 원래 오다기리의 집안은 대대로 큰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문을 이은 오다기리가 크로노스에게 납치되자 식구들과 하인들은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이 곳은 그대로 버려지고 말았다. 하지만 크로노스에 납치된 이후에도 오다기리는 몇몇 식솔들과 몰래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 집은 만약을 대비한 은신처로서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유적기지에서 탈출한 이후 살아남은 스텝들은 이 곳에 와서 오다기리 주임이 남긴 설비로 손종 실험체 조제에 착수하였다. 오다기리 본인은 그 위험성 때문에 손종 실험체 조제에 반대하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를 대비해서 이 곳 지하에 조제통 1기를 비롯해서 배양액이나 기타 조제 관련 설비를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갖춰진 장비들은 유적기지에 비하면 너무나 빈약하였다. 몰래 준비하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야미를 포함한 살아남은 스텝 4명은 이 시설만으로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서 생체 실험을 시도하였고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하야미 한 사람 뿐이었다.
"그래도 저 만이라도 이렇게 살아남아 여러분들과 만날 수 있게 됐으니 죽은 동료들도 기뻐해 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야미는 이들이 1년 전 미나카미 산에서 탈출했던 당시 가지고 나왔던 각종 자료들을 꺼내 보였다. 이 것들은 그동안 오다기리들이 소중하게 모으고 정리해 놓은 강림자들의 유적에 대한 연구 자료들과 조아노이드를 비롯한 각종 생체 병기 등에 대한 자료, 기타 크로노스에 대한 일급 기밀 자료들 이었다. 앞으로 크로노스와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여러분들께 이 것들을 무사히 전해드릴수 있게 됐으니 저로서는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하야미는 속이 아주 후련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야미에게 그 동안 수고했다고 말하며 격려하였다. 이제 6년 전 야마무라 교수로 부터 시작된 크로노스에 대한 항쟁이 케이들에게 계승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울드만큼은 얼굴표정이 좀 어두웠다. 그녀는 지금 하야미의 몸 상태가 상당히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
"미국으로 가신다고요?"
"응. 조만간 다시 돌아가려고 맘먹고 있었어."
지하 비밀공간에서 아키토는 모두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아키토가 사해에서 일본으로 순간이동 되어 온 이후로 지금까지 벌써 한 달이나 흘렀다. 그 동안 전력의 핵심인 아키토가 빠진 레지스탕스 부대는 아무것도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어야 했다. 기습이 주된 전법이라고는 하지만 미조제의 인간들로는 조아노이드 부대와 싸우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서 부대를 다시 재편성할 꺼야. 현재의 조직으로는 앞으로 놈들과의 싸움을 하지 못해. 그리고 레지스탕스에는 의사도 있고 과학자도 있어. 여기 있는 자료들을 가지고 가서 연구시켜 보고 싶어."
아키토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였다. 솔직히 이런 자료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그것을 분석해내서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작전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했다. 케이들은 그런 조직이 없는 일개 개인에 불과하니 그런 조직을 가지고 있는 아키토가 활용하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잠깐 기다려. 그 자료는 천계에도 아주 중요한 자료다. 우리도 그게 꼭 필요해."
그 때 린드가 나서서 반대 의견을 내었다. 천계의 전투신으로서 앞으로 천계가 크로노스와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결정한다면 이 자료들이 꼭 필요했다. 하다못해 이 자료들을 전부 다 카피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자료의 양이 워낙 방대해서 전부 다 카피하려면 며칠은 걸릴 판이었다.
"본부에 도착하는 즉시 카피본을 만들어서 보내 주지. 그 쪽 사정도 이해는 하겠지만 나도 시간이 별로 없어. 어서 가서 조직의 재편성에 착수 해야 해."
아키토는 린드의 요구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린드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아키토의 제안에 금방 수긍할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함께 싸워 온 동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거 하나만 믿고 이 자료들을 다 넘기 주는 건 어딘지 개운치가 않았다. 린드는 아키토에게서 어딘가 위험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저, 린드님."
그 때 하야미가 린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린드에게 뭔가 두툼한 노트 두 권을 건넸다. 린드는 의아해 하면서 그 노트를 받아들었다.
"이게 뭐지?"
"오다기리 주임님의 연구 일지 필사본과 일기입니다. 이 것 정도로도 어느 정도 훌륭한 자료가 될 듯싶군요. 우선은 이걸 드릴 테니 지금은 좀 참아주십시오."
하야미까지 부탁하자 린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로도 천계에 보낼 자료로서는 충분할 듯싶었다. 우선은 린드는 아키토를 믿어보기로 하였다. 린드까지 수긍하자 아키토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난 한시라도 빨리 미국으로 출발하겠어. 내가 거기 가서 한바탕 설쳐대면 놈들의 시선도 온통 다 그리로 쏠릴 테니 여긴 더 안전해질 거야."
하긴 지금의 아키토에게는 기간틱이라는 새로운 힘도 생겼으니 이젠 무서울 것도 없다. 이전보다 더 가열차게 크로노스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 분명했다. 케이는 잘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자 베르단디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케이씨, 안색이 나쁘세요."
"아...걱정 마. 난 괜찮아."
안색이 나쁜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시즈였다. 이제 또 다시 아키토와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 역시 한없이 무거워졌다. 하나뿐인 가족까지 잃고 이젠 또 다시 아키토의 무사함만을 빌며 이런 곳에서 숨어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은 한 없이 우울해졌다. 바로 그 때 아키토가 시즈를 돌아보며 말했다.
"준비해라, 시즈. 너도 같이 간다."
"예? 아...아키토님?"
"출발은 준비되는 데로 간다. 필요한 건 현지에 다 있으니까 짐은 별로 필요 없을 거다. 간단하게만 꾸리도록."
아키토의 뜻밖에 말에 시즈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자기를 이제 가서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하는 아키토가 데려 가겠다니. 한편으로는 너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괜히 아키토의 앞길에 방해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들어서 지금 시즈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아키토는 시즈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거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모두가 다가와서 시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잘됐어요, 시즈씨."
"미국 가서 마키시마랑 잘 되길 빌께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가니 시즈씨는 좋겠네~~."
마지막에 지로의 농담에 시즈는 얼굴이 잔뜩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동안 허둥대던 그녀는 서둘러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 자기 방으로 갔다. 울드와 스쿨드, 베르단디도 덩달아 마음이 붕 떠서 시즈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케이는 그런 그녀들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케이."
그 때 린드가 케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린드 역시 케이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기간틱은 이제 누가 쓰는 거지?"
"뭐...나와 마키시마 선배 둘이 다 쓸 수 있어. 다만 기간틱은 하나뿐이니까 한 사람이 쓰고 있을 때는 다른 한쪽은 그 동안 참아야겠지."
린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도 케이의 기간틱 소유권이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닌 듯싶었다. 컨트롤을 '넘겼다'기 보다는 '공유한다'라는 개념으로 보면 좋을 듯싶었다. 그러나 린드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기간틱을 쓰고 있는데 다른 한 명도 지금 당장 기간틱을 써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 땐 어떻게 되는가? 그 시점까지 기간틱을 쓰고 있는 사람이 우선인가, 아니면.......
****************************************
"부르셨습니까, 닥터 발카스."
신과 푸르크슈탈은 발카스의 호출을 받고 클라우드 게이트의 실험 조제 구역에 도착하였다. 마치 뭔가 고민하는 듯이 멍하니 서 있던 발카스는 두 사람이 오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발카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왔는가....내가 자네 두 사람을 보자고 한 건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할 게 있어서 그러네."
"중요한 얘기라 하시면.... 무엇인지요?"
"그 전에. 우선 자네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발카스가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두 사람은 어느새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발카스의 태도도 그렇고 다른 신장 멤버들 모르게 두 사람만 몰래 오라는 지시도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길레 아무도 모르게 몰래 오라는 것이었을까.
"자네들은 알칸펠님을 끝까지 따를 건가?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갑자기 발카스가 알칸펠에 대한 충성을 묻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또 물어볼까.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들이 알칸펠을 배신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맘을 품어본 적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푸르크슈탈이 좀 어이없다는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닥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게."
발카스는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농담 같은걸 하는 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하긴 알칸펠에 대한 충성을 묻는 게 농담거리는 절대 아니지만. 신이 먼저 대답하였다.
"예. 저의 알칸펠님에 대한 충성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제 명예와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알칸펠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푸르크슈탈 역시 신을 이어 곧바로 대답하였다. 발카스는 다소 안심한 듯이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결의를 들으니 좀 안심이 되는구먼. 그럼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발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능하면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카스의 마음속에만 담아두려했던 거지만 이제는 밝힐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동요하고 있는 12신장 멤버들 중에서 발카스가 가장 신임하고 있는 이 두 사람 -푸르크슈탈과 신- 에게라도 이야기 해 둬서 확실하게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둬야 했다. 결심을 굳힌 발카스가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알칸펠님의 신체에 관한 얘기네."
****************************************
"와펠다노스와 가레노스는 어디 있어?"
"회의 끝나자마자 돌아갔어. 참여할 생각은 없는가봐."
클라우드 게이트의 VIP 룸에 신장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푸르크슈탈이 주제한 회의는 별다른 결론 없이 끝났다. 가이버 토벌 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문제는 알칸펠의 제가를 얻어야 하는 일이니 만큼 신장 멤버들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푸르크슈탈의 말은 누가 봐도 옳았지만 문제는 알칸펠 역시 그 의견에 동조해 줄까 하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알칸펠에게 명령을 어긴 불충한 자로 찍힐까봐 다들 염려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각자 생각 좀 해 본 다음에 통보해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곳 VIP룸에 모인 신장멤버들은 쿨메그닉, 자빌, 카브라알, 리엔쯔이, 칼레온의 5명이었다. 알칸펠은 이번에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부상을 당한 이마카람은 당연히 못 왔고 와펠다노스와 가레노스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각자의 담당구역으로 돌아갔다. 신과 푸르크슈탈, 발카스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발카스 박사가 아무래도 신과 푸르크슈탈을 회유하고 있는 것 같군. 그 두 사람은 발카스 박사가 특히 신임하는 자들이니까."
카브라알이 정확하게 짚었다. 사실 이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북미지구 담당인 신은 그렇다 쳐도 이 곳 일본지부 담당인 푸르크슈탈이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게다가 발카스도 안 보이고 발카스가 특히 신임하는 두 사람도 같이 안 보인다면 정답은 이미 나온 셈이다. 카브라알의 말에 자빌이 볼 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 두 사람만 신임한다고 하면 나머지 우리는 뭡니까?"
"뭐긴 뭐야. 왕따지."
카브라알 대신 쿨메그닉이 이죽거렸다. 발카스도 그렇고 알칸펠도 그렇고 같은 신장 멤버인 자기들을 홀대하는 것 같아서 자빌은 마음이 좀 상했다. 사실 그건 자빌뿐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다른 멤버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렇고 다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칼레온이 모두에게 의견을 물었다. 바로 푸르크슈탈이 제안한 가이버 토벌건이었다. 칼레온 본인은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다. 가이버를 더 이상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알칸펠의 뜻을 알지 못하니 조금 걱정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구해본 것이다.
"뭐, 난 상관없어. 한 번 해볼까 하는데."
쿨메그닉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고 유머스러운 인물이라 그런지 쿨메그닉은 별로 고민하는 기색은 없었다. 모두는 쿨메그닉에게 주목하였다.
"그 가이버란 것에 흥미가 좀 생겨서 말이야."
"역시 자네 목적은 딴 데 있었군."
"자빌, 자네는 궁금하지 않아? 왜 우리가 가이버 토벌에 나서면 안 되는 건지."
쿨메그닉이 자빌에게 오히려 반문하자 자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자빌도 궁금해졌다. 왜 알칸펠은 오랫동안 알칸펠 본인을 모셔오던 다른 신장멤버들을 전부 다 제쳐놓고 자기가 직접 임명한 이마카람에게 모든 걸 다 일임한 걸까? 왜 다른 신장 멤버들은 가이버와 싸우면 안 된다는 건가.
"생각들 해 보라고. 우리는 12신장이야. 알칸펠님의 직속 부하라고. 그런데 왜 우리는 가이버와 싸우면 안 되는 거지?"
쿨메그닉이 그 동안 모두가 궁금해 하면서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덕분에 우리는 그 동안 가이버가 어떻게 설치든 간에 거의 남의 일처럼 구경만 했지. 그 결과가 바로 이거야. 그런데도 닥터 발카스는 알칸펠의 뜻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개입하는 걸 막으려고만 하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쿨메그닉."
리엔쯔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리엔쯔이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아니 엔쯔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가 긴장해 있었다. 쿨메그닉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와 가이버가 접촉하면 뭔가 큰 일이 나니까 그러는 게 아닐까? 우리가 당할까봐 그러는 게 아니라 가이버 자체에 우리가 알면 안 되는 뭔가 큰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거지."
그 말에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알칸펠이 자기의 충복이라 할 수 있는 이마카람에게만 가이버 토벌을 맡긴 이유도 쿨메그닉의 가정을 대입해보면 딱 맞아 떨어졌다. 다른 신장 멤버가 알면 안 되는 가이버의 비밀. 순전히 가정일 뿐이지만 달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이버 같은 골칫거리를 모두가 힘을 합해 해치우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규오도 마찬가지야. 그 녀석도 가이버에 묘하게 집착했지. 그리고 건방지게도 반란을 시도했어. 우리들은 그렇다 쳐도 지 까짓게 감히 알칸펠님에게 대항하다니. 녀석이 그렇게 철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모두는 숨을 죽였다. 그러고 보니 1년 전에 알칸펠에 의해 숙청된 규오도 가이버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집착하였다. 규오는 틀림없이 가이버에 관한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그걸 손에 넣어 알칸펠에게 대항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시도했던 것일 꺼다.
"이봐. 너는 알칸펠님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는 거냐?"
리엔쯔이가 쿨메그닉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더 이상은 웬지 알면 위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물론 무섭지. 나도 그런 건 생각조차 하기 싫다고."
여유 있게 웃던 쿨메그닉의 얼굴에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쿨메그닉을 비롯한 신장 멤버 모두는 조아로드로 조제되기 전 평범한 인간이었을 당시 알칸펠과 직접 대면하였었다. 그리고 알칸펠에게서 다들 본능적으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쿨메그닉은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절에는 자기 부족이나 인근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가장 강맹한 용사로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사자 조차도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일대에서는 쿨메그닉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그는 당시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알칸펠을 만나자 알칸펠에게서 근원적인 공포를 느낀 것이다. 사자 앞에 어린 사슴처럼 그는 그대로 알칸펠을 무서워하며 고개를 땅에 처박았었다.
"하지만 말이야. 어떻게 보면 알칸펠님도 두려워하시는 게 있는 것 같아."
쿨메그닉이 땀을 훔치면서 말했다.
"우리와 가이버가 접촉하는 것은 분명 알칸펠님에겐 절대로 피해야 하는 일인 것이 틀림없어."
****************************************
"그러니까, 이야기는 먼저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던 4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네."
발카스가 조아로드가 되기 이전, 지금으로 부터 4백 년 전에는 유럽인들 사이에서 신대륙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던 때이다. 1492년 10월 12일 컬럼버스가 바하마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에 상륙하는 것을 시작으로 -물론 컬럼버스는 인도를 가려다가 그만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격으로 발견한 거지만.- 수많은 탐험가들이 거친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신대륙에 대한 열풍은 당시 평범한 학자였던 발카스의 마음도 거세게 뒤흔들었다. 신대륙, 이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이던가.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을 생각할수록 그의 가슴은 거세게 뛰었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발카스는 이미 너무 나이 들어서 탐험은 고사하고 좀 떨어진 다른 도시로 가는 것도 힘겨웠던 때였다. 그래서 주변의 모두가 그런 발카스를 말렸다. 하지만 늙은 몸도 주변의 반대도 신대륙을 보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미의 식민지로 가는 무역선에 선의(船醫)로 자원하여 승선하였다. 당시 원양 항해는 매우 힘들고 병을 얻기가 쉬워서 의사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위에 폭풍우가 몹시 심하게 치기 시작했다. 거센 폭풍우를 헤쳐 가며 간신히 항해하던 발카스가 탄 배는 그만 소용돌이에 휘말려 침몰하고 말았다. 발카스를 비롯한 선원들 모두가 바닷속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발카스는 이내 정신을 잃었다.
.
.
.
.
.
"....으...음...."
발카스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모래가 보였다. 발카스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추스리려 애썼다. 잠시 후 주변 풍경이 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바닷가 백사장일 뿐이었다. 설마 여기가 신대륙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침몰하기 전에 선장이 이제 겨우 반 정도 왔을 뿐이라고 얘기해 줬던 것이다. 어딘가의 외딴 섬이 틀림없었다.
아무튼 일단 목숨은 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백사장 앞에는 울창한 열대 우림이 펼쳐져 있었다. 혼자 아무런 도구도 없이 들어갈려니 좀 겁이 나기도 했지만 여기서 마냥 있어봐야 대안도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백사장을 벗어나 조심스럽게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혼자서 숲을 헤매던 발카스는 더럭 겁이 났다. 숲 속이 너무 울창해서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니 태양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꼼짝없이 숲속을 해맬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픈 건 둘째쳐도 목이 너무 말랐다.
그런데 이 숲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발카스는 동식물 분야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편이었는데 이 숲속에 있는 식물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간간히 보이는 나무 열매들 역시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종이다 보니 함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독이 있는 열매일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나이든 그가 동물을 사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꾸로 사냥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부웅! 부웅!!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뭔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는 즉시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옆을 뭔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발카스는 경악하였다. 커다란 두개의 눈, 4장의 날개, 상당히 긴 꼬리, 6개의 다리. 다름 아닌 잠자리였다. 일단 형태는 발카스가 알고 있던 잠자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문제는 바로 크기. 놀랍게도 발카스를 스쳐 지나간 잠자리는 그 날개 길이만 거의 2m는 됐던 것이다!
"아니!! 저럴 수가! 저렇게 거대한 잠자리가 있었단 말인가!!!"
발카스가 날아가는 거대 잠자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그 순간 위에서 어떤 그림자가 그 잠자리를 덮쳤다.
"카악!!"
-콰직!!
덮친 것은 새였다. 그런데 그 새 역시 발카스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도대체 저게 새인지 아니면 악어에다가 날개와 깃털을 붙인 건지 알 수가 없는 기묘한 생물이었다. 어쨌든 위에서 덮친 그 '새'는 그 날카로운 이빨로 거대 잠자리를 머리부터 씹어 먹기 시작했다. 잠자리는 열심히 버둥거렸지만 이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발카스는 소름이 끼쳤다. 저 새가 잠자리를 다 먹은 다음에 자기도 덮칠까봐 겁이 났다. 그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
"헉! 헉!"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던 발카스는 이제 정말로 기진맥진 하였다. 나이도 나이지만 이 찌는 듯이 더운 지방의 숲속을 물 한 방울 마시지도 못하고 한참을 돌아다녔으니 지칠 만도 했다. 그는 땀을 훔치면서 근처의 나무뿌리 사이에 주저앉았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야생에서 살아가는 지식은 고사하고 이런 데를 와본 적조차 없는 발카스로서는 나무 수액조차 채취할 줄 몰랐다. 그는 의학이나 각종 동식물 연구 등에 상당히 조예가 깊었지만 정작 여기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문득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헛공부를 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호호호호'
그 때 그의 귓가에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는 좀 더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 목소리는....틀림없이 사람이다!
"사람이다! 틀림없어! 사람이 살고 있어!"
발카스는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벌떡 일어서서는 그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가면 갈수록 웃음소리가 더 커져갔다. 노래 소리 비슷한 것도 들려왔다. 목소리 톤을 들어보면 이건 틀림없이 젊은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잘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발카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다.
"여보시오! 나 좀 도와주시오!"
발카스는 힘껏 소리 지르며 숲을 해쳐나갔다. 갑자기 앞이 확트이는걸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숲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자 발카스의 눈앞에 커다란 호수가 펼쳐졌다. 그리고 호수가의 커다란 바위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발카스는 즉시 그 쪽으로 뛰어갔다.
"여보시오! 아가씨들! 나 좀 도와...!!"
그 순간 발카스는 놀라운 걸 보고 말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호숫가에 있던 사람들은 젊은 여자들이었고 상반신에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반신. 그녀들의 하반신은 인간의 다리가 아니라 물고기의 지느러미 형상이었던 것이다! 동화나 전설 속에나 나오던 인어들이었다!
그 인어들은 우두커니 서 있는 발카스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끼리끼리 소곤거렸다. 그리고 서로 얘기하다가 까르르 웃기도 하였다. 발카스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쏴아아!
"우워어어어!!!"
그 순간 갑자기 호수 한가운데 물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뭔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회색 피부를 가지고 목 길이만 십여 미터는 훨씬 넘을 것 같은 거대한 괴물이 떠올랐다. 공포에 질린 발카스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괴물은 웬만한 성채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히히힝!!"
옆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발카스는 이번엔 또 뭐가 튀어나온 건가 싶어 벌벌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바로 옆에는 말의 다리가 보였다. 그런데 그 말의 목 부분에는 말 머리가 아니라 인간의 상반신이 있었다. 신화속의 동물이라던 켄타우르스였다! 그 켄타우르스는 자기들에겐 이방인인 발카스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카스의 안색은 대번에 새파래졌다.
"으....으아아아아!!!"
결국 극도의 공포심을 못 이긴 발카스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방금 전에 간신히 빠져나온 숲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등 뒤에서 인어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마귀할멈의 웃음소리 마냥 들려왔다.
****************************************
"으...으아아! 사..사람살려!! 사...어이쿠!!"
-콰당!
한참을 달아나던 발카스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어딘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발카스가 넘어진 곳의 바닥이 이상했다. 숲 속이라고 생각했는데 땅바닥이 이제까지 보던 흙이 아니라 돌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연적으로 생긴 자갈밭이 아니라 누군가가 일일이 돌을 깎아가며 정성스럽게 제대로 포장한 길이었다. 깜짝 놀란 그는 몸의 고통을 잊고 그 돌길을 천천히 살펴봤다. 이건 틀림없이 문명의 흔적이었다.
"사람이....살고 있는 건가?"
돌길은 눈앞에 보이는 산 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발카스는 그 돌길을 따라가 보았다. 조금 걷자 산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였다. 계단은 저 위에 산 너머 까지 이어져 있었다. 역시 이건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도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말이 통할 수 있는 진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숲은 사라지고 근처에는 조그만 풀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바다에는 몇 개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발카스가 타고 가던 배는 저 소용돌이들 중 하나에 걸린 것이다. 그런데 선장은 항해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항로상에 이런 섬이 있었다는 걸 몰랐단 말인가?
지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가던 그는 드디어 산 정상에 도달하였다. 돌계단은 산 정상까지 정성스럽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뭐지...? 이 곳은...."
처음 보는 양식의 신전이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 부분만 잘라낸 듯 한 모양의 신전은 상당히 웅장해 보였다. 그러나 주변에는 저 신전 이외에 다른 건축물은 없었다. 이건 신전이라기보다는 마치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용도의 건축물, 무덤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사람의 기척뿐만 아니라 조그만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 섬의 동물들이 일부러 접근을 안 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 발카스는 좀 겁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꾹 참고 신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전의 출입구로 생각되는 곳으로 들어서자 발카스는 온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바깥은 열대 지방답게 찌는 듯이 더운데도 이 안은 햇빛이 안 들어와서 인지 상당히 춥게 느껴졌다. 좁은 틈으로 햇살이 조금 비치는 게 조명의 전부인지라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으음"
신전 내부의 통로 벽면에는 여러 기묘한 동물들이 조각돼 있었다. 하나같이 다 발카스가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아니 그 중에는 방금 전에 발카스가 본 인어라든지 켄타우르스나 거대 잠자리도 보였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조각해 놓은 건지는 몰라도 최소한 현재의 인류 수준의 지성을 가진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짐승들이 이런 걸 만들었을 리는 없으니까.
통로의 끝이라 생각되는 곳에 도달하였다. 그러자 그의 바로 앞에 거대한 석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발카스는 난감해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다른 데로 빠지는 길이 전혀 없는 일방통행로여서 더 이상 전진이 안 된다면 완전히 허탕만 친 셈이기 때문이었다. 발카스는 그 석벽을 여기저기 더듬어 보며 혹시나 문을 여는 장치 같은 게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석문의 가운데에 위치한 파란 보석에 주목하였다. 그 보석은 문 전체에 새겨져 있는 어떤 정체불명의 생명체의 이마(라 생각되는 부분)에 박혀있었다. 발카스는 그 보석을 살짝 만져보았다.
-스르륵
발카스가 툭 튀어나온 보석을 만지자 그 보석이 안으로 쏙 밀려들어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직후 석문이 양 옆으로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의 앞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한참동안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자 발카스는 눈이 부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눈이 서서히 빛에 익숙해지면서 그는 그제야 앞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석문의 너머에는 원형의 커다란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한 가운데에는 뭔가 커다란 고치 같은 것이 있었다. 그 고치의 양 끝은 각각 천정과 바닥의 돌로 된 원형 구조물 위에 고정돼 있었다. 발카스는 그 고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보았다.
"...허억!"
발카스는 숨이 멋는것만 같았다. 그 고치의 표면은 아주 투명했다. 그리고 내부는 물 같아 보이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 물로 가득 찬 고치 안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 잠을 자고 있는지 두 눈을 감은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세상에.....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 사람은 정말 하나의 유명한 조각 작품 같았다. 새하얀 피부와 은색의 머리, 그리고 웅크리고 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의 몸에는 군살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니, 그런 눈으로 보이는 것 이외에도 그의 모습에는 어딘지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 이 안에 있는 게 정말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발카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고치의 표면에 갔다 대었다.
-화악!!
그러자 갑자기 고치가 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발카스는 깜짝 놀라 고치에서 손을 떼고는 뒤로 물러섰다. 발카스는 이번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지나 싶어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 직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치 안에서 잠자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발카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을 보자마자 발카스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고치안의 남자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고치를 부수고 나오는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벽면을 그냥 통과하였다. 마치 유령이 벽을 그냥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남자는 고치를 나오면서도 시선은 발카스를 향해 있었다.
<너는 누구지?>
그 순간 발카스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음성. 발카스는 직감적으로 자기 눈앞에 이 남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자기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신, 바로 신이라 할 수 있었다.
"저....저는...."
발카스는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대로 자기 눈앞에 이 남자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저는....당신의....종입니다!"
****************************************
"그 남자라는 게 설마...!"
"그래, 알칸펠님이시네. 난 그 때 그분을 처음 뵈었지."
발카스의 말에 신과 푸르크슈탈은 숨을 죽였다. 이런 얘기는 이제까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알칸펠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발카스조차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다. 지금 두 사람은 크로노스의 탄생에 얽힌 비밀을 듣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알칸펠님이 계시던 그 대서양상의 섬은 대체..."
"'시라 섬'이라고 하네."
"시라 섬이요?"
그 말을 들은 신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이윽고 그것을 기억해냈다.
"흠...닥터. 혹시 동방기행기에 나온 그 시라 섬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네. 바로 그 섬이지."
발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푸르크슈탈이 신에게 물었다.
"그게 뭔데?"
"14세기 무렵 파리에서 출판된 J.맨데빌의 '동방기행기'를 말하는 거야. 그 책에 따르면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그 후 백 년간 그 섬에서 지냈다고 하지. 그런데 그게 실존하는 섬일 줄은...."
책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두 사람은 지금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옛날같이 원양항해가 극히 어렵고 배로만 장기간에 걸쳐 항해해야 했던 시대, 그것도 아직도 인류가 가보지도 못했던 미지의 땅이 많았던 시절에는 시라 섬이 발견되지 않을 수 있다 치자. 지금은 도저히 발견 안 될 수가 없다. 비행기를 넘어서 인공위성이 지구 곳곳을 촬영해서 정밀한 지도를 만드는 세상이고 인류의 발자국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진정한 의미의 무인도는 없다고 봐도 된다. 게다가 그 섬에는 정채 불명의 생물체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섬이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 섬에는 강림자의 우주선의 잔해가 있네."
"예에??"
"아마도 그 섬은 태고적에 강림자들의 생체 실험장이었던 같아."
그 옛날 원시 지구에 내려온 강림자들은 지구상에서 각종 생체 실험을 하였다. 자기들이 원하는 궁극의 생체 병기를 만들기 위해. 시라 섬은 바로 그런 실험장들중 하나였으며 시라 섬에 지금까지 있는 각종 신기한 동식물들은 바로 그 실험의 와중에서 나온 생물체들이다. 그 때 발카스가 보았던 거대 잠자리나 인어, 호수속의 거대 괴물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공룡이었다. 나중에 학자들이 브라키오사우루스라고 부르게 되는 공룡이었다 - 등등은 모두 강림자들이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물론 그 것들 중에는 강림자들이 의도하던 것도 있을 거고 의도하지 않았던 것도 있겠지만.
시라 섬에 있다는 우주선은 말 그대로 잔해뿐이다. 과거에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라 섬의 우주선은 완전히 파괴돼서 더 이상 기능하지 않고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이 우주선은 아직 완전하게 죽지 않았다. 우주선 주위의 일정 구역 내에 강력한 사이코 필드를 펼쳐서 외부의 급격한 환경변화로 부터 섬의 생태계를 보호하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공룡 같은 태고적의 생물들이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필드의 효과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섬 자체를 외부의 어떠한 관측수단으로 부터 완벽하게 감추는 일종의 스텔스 효과까지 가져왔다. 그래서 설사 맨 눈으로 본다 해도 섬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찰스 다윈이 그 섬을 봤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껄? 후후후."
****************************************
그 날 이후, 발카스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알칸펠은 발카스를 종으로 거뒀고 발카스는 영원히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한동안 섬에서 지내던 발카스에게 어느 날 알칸펠이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해밀컬."
"예."
"동지를 모아라."
알칸펠은 신전 꼭대기의 발코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고 그 틈 사이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발카스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알칸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알칸펠은 계속해서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너를 포함해서 모두 11명의 부하가 필요하다. 그들을 모아와라. 그들 한명 한명에게 내 힘을 나눠주겠다. 그래서 그들을 주축으로 나의 군대를 만들 것이다. 언젠가 그들을 이끌고 저 하늘을 공격하기 위해...!"
하늘을 공격! 신에게 도전하겠다는 뜻일까. 그 말을 들은 발카스는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황당하다는 생각보다는 과연 그 야망의 스케일이 다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알칸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알칸펠의 얼굴에는 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을 올려다보며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 한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 후 알칸펠의 조아 크리스털에서 배핵의 분할, 배양이 이루어져 모두 11개의 복제 크리스털이 완성되었다. 발카스는 그 중의 한 개를 전수 받아 조아로드가 되었다.
조아로드가 된 직후 그는 알칸펠과 함께 대서양 건너편의 신대륙 -오늘날 북아메리카로 불리는- 곳으로 건너갔다. 알칸펠은 발카스를 북아메리카의 황량한 산악지대, 오늘날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데려갔다. 알칸펠은 그 곳의 수많은 바위산 중에서 한 곳을 지정하였다. 두 사람은 산 정상에 내려앉았다.
"자, 밑을 봐라."
발카스는 알칸펠의 지시에 그 자리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조아로드의 능력을 발휘해서 산 아래를 투시하였다. 그러자 그의 눈에 알칸펠이 얘기해 줬던 우주선의 잔해가 있는 것이 보였다. 먼 옛날 이 지구에 왔던 우주인들이 버리고 간 것이 이 산 아래에 묻혀 있는 것이다.
"이 지하에 있는 우주선은 이미 태고적에 말라 비틀어져 버린 상태다. 그래도 다행히 기억 중추만은 살아있어."
그렇다면 이건 엄청난 가치를 가진 물건이었다. 시라 섬에 있는 우주선은 기억 중추가 파괴당해 겨우 생명유지 장치정도로 밖엔 쓸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즉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곳의 우주선처럼 기억 중추가 살아있다면 얘기가 전혀 다르다. 그 옛날 강림자들이 남긴 엄청난 양의 지식을 알아 낼 수 있는 것이다.
"해밀컬, 네 임무는 이 우주선에서 최대한의 지식을 습득해서 나와 11명의 동지들이 부릴 조아노이드 군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잘 해봐라. 이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맡기겠다."
"이 해밀컬 발카스, 목숨 바쳐 그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발카스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하였다. 그는 속으로 다짐하였다. 알칸펠님을 위해서 반드시 그의 위엄에 걸맞는 군대를 만들어내겠다고.
발카스는 즉시 일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바위산 지하에 묻혀있는 강림자의 우주선 잔해의 기억중추에서 그 옛날 강림자들의 방대한 실험기록등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비밀결사 '크로노스'의 창설에 착수할 수 있었다. 유적 우주선이 발견된 이 곳 바위산은 훗날 크로노스의 본부 기지가 되었으며 모든 크로노스 구성원의 성지가 되었다.
****************************************
"그리고 그 후 난 4백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조아로드가 될 만한 뛰어난 인재를 찾아 다녔지."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요. 전 370년 전 미국에서 박사를 만났죠."
신이 그 때의 추억이 생각나는 듯이 웃었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푸르크슈탈도 그 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전 215년 전 빈에서 박사를 만났었죠."
발카스도 그 때가 생각났다는 듯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현재의 12신장 멤버들은 맨 마지막에 새로 12신장에 임명된 이마카람 밀리 비너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발카스가 400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발한 인제들이다. 알칸펠의 직속부하이자 크로노스의 중추가 되어야 하기에 발카스는 인제를 뽑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물론 반역을 저질렀다가 숙청된 규오의 경우에는 발카스의 안목에 최대 오점으로 남고 말았지만.
"아무튼 서서히 12신장 멤버들도 점점 갖춰져가고 조직의 기반다지기도 본 궤도에 올랐을 무렵이었지. 바로 그 때....."
발카스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졌다. 신과 푸르크슈탈 역시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발카스가 긴장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칸펠님의 신체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네."
****************************************
"이 곳은 여전하군..."
발카스는 실로 오래간만에 시라 섬을 찾았다. 그 동안 12신장이 될 자격이 있는 뛰어난 인재도 찾아다니고 창설 된지 얼마 안 되는 조직의 기반을 다지는 일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자연히 시라 섬에 발길이 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건 발카스가 알칸펠에 대한 충성심이 식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알칸펠에 대한 그의 마음은 단순히 충성심을 넘어 신앙에 가까웠다. 그도 처음에는 한 달에 두세 번 이상 들러서 경과보고를 하였었다. 그러나 알칸펠이 오지 말라고 막았다. 와서 보고할 시간이 있으면 자기가 내린 명령을 하루라도 빨리 완수해 내라고 핀잔을 주었다. 난 너만 믿고 있으니 알아서 잘 해 봐라 라는 말과 함께. 그 때 발카스는 알칸펠이 자기를 믿고 있다는 얘기에 감격해 하면서도 알칸펠의 꾸지람에 (물론 알칸펠은 그냥 농담조로 가볍게 얘기한 거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발카스는 더욱 더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안 와볼수가 없었다. 알칸펠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발카스를 비롯한 신장 멤버(이때는 아직 5명 정도밖에 없었다)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게 벌써 2년째였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직접 밖으로 나와서 발카스의 브리핑을 듣거나 다른 신장 멤버들을 살피거나 했었는데 어느새 부터인가 점점 그들앞에 나타나는 횟수가 줄더니 급기야는 2년 전 부터는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 된 발카스가 오늘 시라 섬에 온 것이다.
알칸펠이 머무는 신전은 처음 봤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특별히 무슨 큰 일이 벌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알칸펠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어디 나가신 걸까? 발카스는 의아해 하면서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응?"
그런데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통로 안쪽에 뭔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뭔지 궁금해진 발카스는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쓰러져 있는 그게 뭔지 확인하고는 경악하였다.
"알칸펠님!!!"
****************************************
"도대체 알칸펠님께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수면 중이셨네."
발카스의 대답에 두 사람은 맥이 탁 풀렸다. 뭔가 큰 일이 벌어진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더니만 한다는 소리가 자고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발카스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원래 발카스는 농담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지만 지금 그의 태도를 보니 농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발카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통 잠이 아니었네. 맥박도 호흡도 거의 정지한 상태의....가사상태였지."
"가사상태요?"
"그 때는 왜 그런 건지 알 수 없어서 나도 무척 당황했지. 내가 아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어도 알칸펠님은 깨어나지 않으셨네. 몇 년 후 스스로 일어나실 때 까지는."
그 때 당시 발카스는 알칸펠이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 발카스 자신이 너무 미숙했기에 그랬던 건가 싶어 깊은 절망에 빠졌었다. 다른 신장 멤버들이 동요할까봐 모두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결국 알칸펠의 신상에 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조직의 붕괴로까지 갈 수 있었다. 그래도 아주 약하나마 맥박은 뛰고 있으니까 최소한 죽은 건 아니다. 그러니 당시의 발카스로서는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비로소 알칸펠이 깨어났고 그 이후 알칸펠에게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알칸펠의 잠은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기나 긴 잠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바로 휴면기였다.
"대체 알칸펠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주기적인 휴면기라니요?"
"나도 모르겠네. 알칸펠님도 거기까지는 말씀 안 해주셨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알칸펠님은 우리와는 달리 태초에 강림자들이 직접 조제한 오리지널 조아로드란 것뿐이야."
현재의 12신장 멤버들은 모두 다 발카스가 직접 조아로드로 조제하였다. - 발카스 본인은 알칸펠이 조제하였다 - 발카스는 애리조나 그랜드 캐니언의 바위산 지하에 있던 유적 우주선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아로드의 조제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발카스가 입수한 지식의 양은 솔직히 '어깨너머로 훔쳐보기' 수준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조아로드는 당연히 강림자가 태초에 만들었던 오리지널 조아로드와는 그 능력이나 힘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알칸펠의 전투력과 현재 신장 멤버들의 전투력은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
댓글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