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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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part 2.-
제10화 - 그 이름은 기간틱 다크 -
미국 LA 외곽 지역에 버려진 공장이 한 군데 있었다. 규모가 꽤 큰 곳이었지만 원 업체가 부도가 난 이후 버려진 이 공장은 그 후 인수하겠다는 업체가 나오질 않아서 그대로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된 상태였다. 시에서도 흉물스러운 이 곳을 당장이라도 헐어버리고 싶었지만 철거 비용을 시가 다 부담하기에는 너무 버거워서 민간 사업자가 나서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공장 시설 곳곳에는 시뻘건 녹이 잔뜩 슬어있었고 땅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분위기가 으스스한 것이 무슨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곳이었다.
"후후, 저기가 바로 레지스탕스 놈들의 아지트란 말이지? 쥐새끼답게 시궁창 같은 곳에 숨어들 있었군."
바로 그 공장을 지금 크로노스의 전투원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북미 지구의 중요 조제시설들을 파괴한 레지스탕스 '제우스의 우뢰'. 이들의 아지트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찾아낸 것이다. 레지스탕스의 소재가 파악되자 이들은 즉시 병력을 총 동원해서 그 공장을 포위하였다. 이전까지는 기습을 당해서 조제시설들을 파괴당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정면공격을 가하게 되면 미조제의 인간 따위는 조아노이드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모든 조아노이드 전투원들은 이번에야 말로 일망타진 하고 말겠다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지휘관이 모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원 전투형태로 변신하라! 놈들을 단 한명도 살려 보내지 마라!!"
"크아아아!!!"
"키아아!"
명령이 떨어지자 전투원들이 일제히 조아노이드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삼백 명에 달하는 조아노이드 부대가 일제히 공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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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완전히 포위당했어!"
레지스탕스 본부는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졌다. 그동안 활동도 안하고 가만히 숨어 지냈는데도 결국 아지트가 놈들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쳐들어온 놈들의 숫자도 끔찍하게 많았다. 보통 인간은 조아노이드에게 맞설 수가 없다. 그 동안 이들이 대 활약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이버 III 마키시마 아키토가 이들을 지휘하고 스스로 선봉에 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없는 지금 보통 인간들뿐인 레지스탕스 멤버들로는 저 많은 수의 조아노이드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전원 전투태세를 갖춰라! 놈들이 공격해오고 있다!"
-삐잉! 삐잉!
기지 내에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들 황급히 무기고에서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장갑차 승무원들은 서둘러 각자의 차량으로 달려가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장갑형 험비등의 경장갑차를 제외한 강력한 중화기를 탑재한 장갑차들은 싣고 있는 탄약이 한 발도 없었다. 안전을 위해서 탄약은 모두 무기고에 보관 중이었던 것이다. 승무원들이 황급히 무기고에서 탄약을 꺼내 각 차량에 적재하기 시작했다.
-콰쾅!!
그러나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조아노이드들이 공장 안으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그 즉시 응전하였다.
-타타타탕! 드르르륵!!
공장 내부는 이내 시끄러운 총소리로 가득 찼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가장 먼저 돌입한 조아노이드들에게 집중사격 하였다. 그러나 맨 선두로 들어온 조아노이드들은 겉껍질이 극도로 강화된 장갑형 조아노이드들이었다. 보병용 소화기로는 상대가 안 되는 조아노이드들이었다.
"오지 마! 오지 마!!"
"크아악!!"
한 대원이 공포에 질린 채 자기에게 육박해 오는 게 모양의 조아노이드에게 총을 난사하였다. 그러나 그 조아노이드는 태연하게 총탄을 튕겨내더니 그 대원을 오른손의 거대한 집게로 꽉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힘을 주었다.
-콰지직!!
"아아악!!"
조아노이드의 집게 팔에 잡힌 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한 순간에 그의 몸은 그대로 두 토막으로 잘리고 말았다. 다른 조아노이드들도 총탄을 여유 있게 튕겨내며 눈앞에 보이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빠르게 잦아들면서 대원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으아아!! 사..살려줘!"
"크르르르...!"
또 다른 대원 한명이 조아노이드 한 마리에게 쫓겨 구석에 몰리고 말았다. 총탄이 전혀 먹히지 않자 그는 공포에 질린 채 꼼짝도 못했다. 조아노이드가 그 대원을 후려치기 위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콰쾅!!
그 순간 그 조아노이드의 뒤통수에 로켓탄이 작렬하였다. 머리를 잃은 조아노이드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대원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죽어버린 조아노이드의 사채를 보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그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이 봐!! 그러고 있으면 죽어! 빨리 어딘가로 피해!"
대원이 고개를 돌리자 빈 로켓 발사기를 버리고 기관단총에 탄창을 장전하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베루더였다.
"젠장! 이 놈들이 여길 어떻게 알아냈지?"
-타타타탕!!
그는 톰슨 기관단총을 장전하고 바로 눈앞에 조아노이드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톰슨 같은 권총탄 사용화기는 애초에 조아노이드에게 통할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선두로 들어온 놈들은 중장갑형 조아노이드였다. 역시나 총탄은 조아노이드의 겉껍질에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하지만! 중장갑이라 해도 약점은 있는 법!!"
베루더는 일단 거리를 벌린 후 등에 메고 있던 M72 RAW 대전차 로켓을 꺼냈다. 300mm 의 강철판도 관통한다는 강력한 위력의 대전차 로켓이었다. 베루더는 로켓의 안전장치를 풀고 발사관을 뒤로 잡아당겨 로켓의 발사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조준경을 세워 자신에게 똑바로 달려오고 있는 중장갑 조아노이드를 조준하였다. 목표는 바로....
"네 녀석의 입이지!!"
"크아아!!"
-푸슈우웅!!
조아노이드가 크게 포효하는 것과 동시에 베루더의 M72 로켓이 발사되었다. 빠른 속도로 사출된 로켓탄은 그대로 정확하게 조아노이드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쾅!!
조아노이드의 입에 틀어박힌 로켓탄은 그대로 폭발했고 그 폭발 압력은 조아노이드의 머리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아무리 중장갑형이라 할지라도 입까지 완전 장갑화를 이루기는 어렵고 더군다나 내부에서 폭발하는 건 그 어떤 조아노이드라 해도 견딜 수가 없었다.
-푸슝! 콰아앙!!
"크아악!!"
"아아악! 제기랄!!"
"도망쳐!!"
다른 대원들 역시 열심히 대전차 로켓을 날려대었다. 그러나 베루더처럼 적의 약점을 노려 쏠 수 있을 만한 사격술을 가진 대원은 없었다. 그저 맹목적으로 열심히 로켓을 날렸고 로켓탄들은 중장갑형 조아노이드들의 겉껍질을 관통하지 못했다. 대전차 로켓이 통하지 않자 모두들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퍼엉!! 콰쾅!!
그 때 지원군이 나타났다. 레지스탕스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 중 최고의 화력을 가진 스트라이커 MGS 장갑차가 간신히 포탄 적재를 끝내고 나타난 것이다. 스트라이커 MGS의 105mm 포가 불을 뿜고 그 포탄에 정통으로 맞은 조아노이드 한 마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외에도 몇 대의 장갑차가 더 나타나서 조아노이드 무리를 향해 기관포를 난사해 대었다.
-퍼엉!! 투투퉁!!
"크아악!!"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불리했다. 중장갑 조아노이드 부대가 뚫어놓은 돌파구를 통해 드디어 대규모의 주력 부대가 밀어닥친 것이다. 레지스탕스 장갑차 부대는 분전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대씩 차례대로 격파당하고 말았다.
-콰콰쾅!!
"제기랄! 결국 개죽음이군!"
베루더는 격파되는 장갑차들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라리 한 데 뭉쳐 포위망을 돌파하는 용도로 썼으면 그나마 한명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0.1%라도 올라갈 텐데 괜히 적을 막겠답시고 방어전 같은걸 하니까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방어가 아니라 탈출을 생각해야 하는데도. 하긴 현재 적의 숫자로 봐서는 포위망 돌파도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푸슝! 콰아앙!!
베루더는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M72를 날려 조아노이드 또 한 마리를 해치웠다. 이제 더 이상은 조아노이드에게 통할 무기가 없었다. 즐겨 쓰는 톰슨 기관단총은 통할 상대가 아니라서 사실상 쓸모가 없고 대전차 로켓은 이미 다 써버렸다. 베루더는 일단 그 자리에서 후퇴하였다. 대책은 없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가만히 있다가 저 놈들에게 죽을 수는 없었다. 베루더를 비롯한 살아남은 대원들이 공장 안쪽으로 황급히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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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는! 보스와는 연락이 됐어?!!"
"아니, 연락이 안 돼!"
통신실에 모인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절망하였다. 이 상황에서는 가이버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아키토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에 있다는 아키토와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긴 아키토와는 3일전부터 연락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뭣들 하는 겁니까! 빨리 탈출 해야죠!!"
그 때 베루더가 통신실로 뛰어들면서 모두에게 소리쳤다. 베루더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본인이 부상을 입은 건 아니고 이제까지 치열한 교전을 벌이면서 뒤집어쓴 상대 조아노이드들의 피였다. 그는 빈약한 무기로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이 열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몸을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훗날을 기약하죠!"
"훗날? 지금 훗날이라고 했나?"
그 때 제프리가 베루더를 보며 차갑게 이죽거렸다. 베루더의 레지스탕스 내의 직속상관이자 얼마 전에 사해의 크로노스 연구소에도 같이 갔다 왔던 인물이다.
"이제 다 끝났어. 놈들이 쳐들어와서 조직이 완전히 풍비박산 났어. 탈출은 불가능하고 만에 하나 탈출한다 해도 그걸로 사실상 끝이야. 우린 살아남아도 아무것도 못해."
제프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체념해 버렸다. 베루더는 기가 막혔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제압이전엔 해병 특수수색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사람이 이렇게나 쉽게 포기하다니. 베루더는 다시 제프리를 비롯한 모두를 설득하였다.
"그럼 이대로 죽을 겁니까! 보스가 없다고 이렇게 까지 겁쟁이가 된 겁니까! 그 동안 용맹하게 싸웠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보스 얘기는 하지 마!! 그 자식은 우릴 버렸어! 우리를 버렸다고!!"
전멸 직전의 극한 상황에서 모두는 아키토에게서 연락이 전혀 없자 아키토가 자신들을 배신하고 말았다고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인간은 극한 상황에 다다르게 되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워할 수 있다던가. 베루더는 새삼스레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 다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별로 탓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도대체 일본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조직의 보스라면 조직의 일을 최우선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배신감을 느끼는 건 베루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애초에 마계의 정보원이니까 마계의 지령이 내려오거나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아키토에게서 등을 돌려도 상관없었고 따라서 아키토에게 느끼는 실망감은 이들보다는 적었다. 어차피 베루더 역시 아키토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빨리 어디론가 탈출을...!"
-콰쾅!!
그 순간 한 쪽 벽면이 부서지면서 조아노이드 몇 마리가 튀어 나왔다. 놈들이 순식간에 안쪽 까지 밀고 들어온 것이다. 모두는 당황해 하며 그 조아노이드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총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모두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결국 구석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제는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후후후. 왜 그래? 레지스탕스 제군들. 너희들은 겨우 이 정도였냐?"
"우리 조제시설을 여러 군데 부숴서 좀 더 대단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거 실망인걸."
조아노이드들이 구석에 몰려 떨고 있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빈정대었다. 모두는 공포에 질린 채 아무 말도 못했다. 아니, 단 한사람만이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는 유난히 붉은 그의 머릿결을 뒤로 쓸어 넘기며 조아노이드들을 노려보았다.
"실망이라고? 그래, 실망시켜서 미안하다. 그렇다면 내가 사과하는 의미로 너희들에게 멋진 걸 보여주지."
베루더는 들고 있던 톰슨 기관단총을 자기 뒤에 있던 대원 한 명에게 넘겼다. 이제부터 총은 소용없다. 그 동안은 좋아하는 무기인지라 위력 면에서 조아노이드에게 통할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재미삼아 써왔지만 지금부터는 재미로 싸울 수가 없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거 간수 잘하쇼. 구식이래도 이거 1930년대 시카고 갱들이 쓰던 톰슨이니까. 그거 매물로 내 놓으면 수만 달러는 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한 베루더는 한 번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조용히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베루더가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모두는 눈이 휘둥그래진체로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였다.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 같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는 해석이 불가능했다. 그야 당연한 거지만 지금 베루더는 마술식을 영창하고 있던 것이다. 마술식은 인간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일종의 프로그램이므로 못 알아 듣는 건 당연했다. 조아노이드들은 지금 베루더가 무슨 잔재주를 부릴지 기대된다며 빈정대고 있었다. 주변의 반응이야 어떻든 베루더는 주문의 영창에 집중하였다.
-휘이잉!!
그 순간 베루더의 발아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더니 직경 2m 정도의 붉은색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생전처음보는 놀라운 광경에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베루더가 두 눈을 부릅뜨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와라! 나의 생명이자 죽음이여!! 너의 피보다 진한 붉은색의 날을 다시 한 번 보여 다오! 나이트메어 오브 블러디(Nightmare of Bloody)!!
-파아앗!!
그 와 동시에 마법진에서 한 줄기의 빛이 위로 쏘아졌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아주 새빨간 검신을 가진 칼이 한 자루 있었다. 바스타드 소드 정도의 크기의 그 검을 베루더는 양 손으로 꼭 잡았다. 그리고 조아노이드들에게 호기 있게 소리쳤다.
"그럼 보여주마! 내가 이 칼을 꺼낸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부웅!
베루더는 바로 자기 눈앞에 있는 조아노이드를 향해 칼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 조아노이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 칼을 막으려 하였다. 하긴 총포탄도 튕겨내는 중장갑 조아노이드인 자신에게 기껏 인간이 휘두르는 칼이 통할리가 없지 않은가. 칼을 어떻게 꺼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퍼억!!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베루더가 한 번 휘두르자 그 중장갑 조아노이드는 그대로 허리가 잘려나가고 말았다. 분수처럼 피를 내 뿜으며 그 조아노이드는 두 토막이 나서 쓰러졌다. 마치 무 자르듯 가볍게 중장갑 조아노이드가 잘려나가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였다. 특히나 조아노이드들의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너...너 정말 인간이냐!!"
베루더는 조아노이드의 그 질문에 그저 피식 웃었다. 인간이냐고? 보면 모르나? 이런 능력이 있는 자가 인간일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있는 붉은색의 마족을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얼빠진 질문이군. 보면 모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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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A구역 제압완료!"
-"C구역 제압 거의 완료!"
전투개시 30분도 안돼서 거의 대부분의 공장 지역이 제압되었다. 피해도 예상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하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미조제의 인간 따위는 조아노이드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정면 승부로 가게 되면 보통 인간들 제압하는 거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속속 올라오는 보고에 지휘관은 만족스러운 듯 한 표정을 지었다.
-"B구역 고전중! 적의 저항이 격렬합니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보고가 올라왔다. 고전중이라니? 인간들을 상대로 말인가? 조아노이드 대 부대가? 지휘관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는 무전기에다 대고 화를 내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헛소리야! 조아노이드 부대가 인간들을 상대로 고전한다니!"
-"그...그게 저희도 믿어지지 않습니다만 어떤 인간 한 명이 다수의 조아노이드를 쓰러트리고 있습니다!"
"한 명?!! 수백 명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명?! 지금 장난하나!!"
-"녀석은 지금 요상한 칼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그 칼에 맞은 조아노이드는 종류 불문하고 허무하게 두 토막이 나는 중인지라...."
갈수록 기가 막히는 얘기뿐이었다. 한 명에게 다수의 조아노이드가 당한다는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그 한 명이 휘두르는 무기가 총이나 폭탄도 아니고 칼이라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부딫혀오는 총탄조차도 뚫을 수 없는 것이 조아노이드의 피부인데 그게 기껏 인간이 휘두르는 칼에게 잘린다니. 인간의 근력으로는 아무리 세게 휘두른다 해도 총탄의 속도를 웃돌 수가 없다. 인간의 팔로 낼 수 있는 위력이래야 뻔하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얘기였다.
"젠장! 네 녀석들은 돌아가면 모조리 다 징계할 거다! 헛소리 말고 빨리 녀석들을....!"
-퍼억!! 슈칵!!
그 순간 그의 양 옆에 있던 전투원들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경악한 지휘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완전히 피바다였다. 사방이 온통 여러 토막이 난 조아노이드 시체들로 가득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공포만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했다.
"훗, 내가 없는 세에 잘도 빈집을 털려 했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공포에 질린 그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생전 처음 보는 검은색의 거인이 서 있었다. 거인의 양 팔에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는 하얀 칼날 6개가 나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칼로 주변의 조아노이드 대원들을 순식간에 베어버린 것이다. 지휘관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곧이어 거인의 이마에서 아주 강한 빛이 쏘아져 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광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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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웅!! 촤악!!!
"끼아악!!"
베루더는 있는 힘껏 칼을 휘둘러서 또 한 마리의 조아노이드를 반 토막 내었다. 조아노이드들은 수적으로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함에도 베루더의 놀라운 전투력에 놀라 주춤대기만 하였다. 놀란 것은 조아노이드들뿐만이 아니다. 살아남은 레지스탕스 대원들 역시 베루더의 인간 같지 않은 전투력에 놀라고 있었다. 제프리가 조금은 주저하는 듯 한 목소리로 베루더에게 물었다.
"자...자네는 대체 누군가?"
"세상이 뭐라 하던 나는 나, 베루더요."
"아니, 자네 이름 말고 자네의 정체가 대체...."
"내 정체? 일급마 특무 한정, 베루더. 마족이오."
마족이라는 베루더의 대답에 대원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처음엔 베루더가 농담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하긴 총이나 로켓탄에도 죽지 않는 조아노이드들을 상대로 인간이 칼 한 자루로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헉...헉...! 제길, 역시 난 칼 따위는 안 맞아. 내 체질에는 총이 딱 제격인데...."
베루더가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베루더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지만 자기 피는 아니고 전부 다 베어버린 조아노이드들의 피였다. 전투 자체도 비교적 짧은 시간만 벌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베루더의 체력은 빠르게 고갈돼 가고 있었다.
"이봐, 베루더. 자네 괜찮나? 많이 지쳐 보이는데..."
"전혀 안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당장 이 칼 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베루더의 체력이 빠르게 고갈되는 원인은 바로 그가 소환한 마검, 나이트메어 오브 블러디 때문이었다. 이 검은 사용자의 생명 에너지를 흡수하여 날에 강력한 파괴력을 부여하는 검이었다. 사용자의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검의 위력 또한 더욱 더 강해진다. 게다가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서는 검의 모습이 단계별로 진화될 수 있는 능력까지 있었다. 전체 5단계의 진화 단계가 있는데 베루더가 쓰고 있는 검의 현재 레벨은 3단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말은 결국 오래 사용하고 있으면 사용자의 생명 에너지를 고갈 시켜 버린다는 뜻도 되었다. 즉 자신의 생명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컨셉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웬만큼 강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장기전은 절대로 피해야 하는 무기였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이쪽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베루더에게 이 무기가 지급된 이유도 이걸로 적과 싸우라는 게 아니라 탈출할 수 있는 찬스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쳇, 오늘 여기서 뼈를 묻게 생겼군.'
하지만 그는 탈출할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마계의 명령은 절대로 크로노스와 정면대결하지 말고 불가피한 상황이 벌어져도 탈출을 최우선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 그런 명령을 숱하게 어겨왔다. 전장을 접하게 되면 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리고 무턱대고 앞으로 돌격하였다. 그는 거기서 생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이다.
"젠장, 나도 못 말리는 놈이라니까. 이러다 내가 제 명에 못살지."
그 때 조아노이드의 무리 뒤쪽에서 특이하게 생긴 조아노이드들이 앞으로 나섰다. 어깨가 유난히 부풀어 올라있는 열 마리 정도의 조아노이드들이 베루더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그 놈들의 어깨가 위 아래로 갈라지면서 안에 있던 뭔가가 드러났다. 그것을 본 베루더는 경악하였다. 생체 열선포였던 것이다!
"젠장!! 누가 쏘게 둘 줄 아냐!!!"
베루더가 검을 치켜들고 생체 열선포 조아노이드 무리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저 녀석들에게 발포를 허용하면 이쪽이 불리하다. 나이트메어 오브 블러디에는 원거리 공격능력 같은 건 없다. 어떻게 해서든 거리를 좁혀야 했다.
"크아악!"
그 때 돌격해오는 베루더의 앞을 근접전용 조아노이드 무리가 가로막았다. 생체 열선포 조아노이드들이 발사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 베루더는 힘껏 칼을 휘둘러 자기 앞을 가로막은 조아노이드 무리를 베어버렸다. 앞을 가로막은 조아노이드 무리는 베루더의 칼 앞에 추풍낙엽이었다. 그런데 저지선을 돌파하자마자 생체 열선포 조아노이드들이 발사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곧장 베루더 한 사람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푸슝!! 푸슈슝!!
-콰앙!!
"으아악!!"
베루더는 칼을 들어 올려 중요 급소 부위에 열선포가 명중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두 다리까지는 막지 못했다. 양 무릎에 생체 열선포가 명중하고 말았다. 그리고 검으로 가리지 못한 몸 이곳저곳을 생체 열선포가 할퀴고 지나갔다.
"크...크으윽!!"
베루더는 검을 땅에 꽃은 채 거기에 의지해서 간신히 서 있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좀 전에 입은 데미지와 그 동안 검에 막대한 체력을 쏟아 부은 덕분에 그의 몸은 지금 만신창이었다. 베루더의 체력이 고갈되자 방금 전까지 붉은 빛을 발하고 있던 검 날에 빛이 꺼졌다. 이제 나이트메어 오브 블러디에 주입할 힘도 남지 않은 것이다. 베루더가 제압됐다고 판단한 조아노이드들이 코웃음 쳤다.
"후후후. 제법 설쳤다만 거기까지다."
"쳇...."
베루더는 자기 눈앞의 조아노이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직 전의까지 상실하진 않았다. 아직도 그는 싸울 생각이었다. 원래 성격이 좀 괴팍한 면이 있는지라 그는 이렇게 불리한 싸움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정말로 틀린 모양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으니 이건 불리한 정도가 아니라 승부가 완전히 결정 난 것이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어떻게 겨우 이정도의 녀석들에게 북미의 주요 조제시설들이 당한 거지?"
"....알고 싶냐?"
베루더는 빈정대는 투로 그 조아노이드에게 말했다. 상대방 역시 그런 베루더를 피식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래. 궁금해 죽겠다. 너희 같은 벌레들이 어떻게 우리들의 조제시설을 파괴했는지."
"네 뒤에 해답이 있어."
베루더의 대답에 그는 무심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경악하였다. 그의 바로 뒤에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검은 거인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검은 거인이 그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는 거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거인의 무시무시한 힘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는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동료들은 순식간에 그 거인의 칼에 토막이 나서 죽어있던 것이다.
-퍼억!!
거인이 손에 힘을 주자 그 조아노이드의 얼굴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눈 깜짝할 새에 조아노이드들을 전멸시켜 버린 그 거인의 압도적인 힘에 공포를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베루더만큼은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는 직감적으로 저 거인이 누군지 눈치 챈 것이다.
"오셨습니까, 보스. 오랜만이군요."
"보..보스라고?!!"
베루더의 말에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스인 아키토가 가이버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변신 모습은 보통 인간보다 약간 큰 수준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검은 거인은 색깔 빼고는 모습도 크기도 완전히 달랐다. 당장 크기만 해도 3m는 됐던 것이다.
"베루더는 날 알아보는군. 그래, 지금 막 돌아왔다."
"뭐...제가 내세울 건 눈치밖에 없으니까요."
"보스? 정말 보스입니까? 그 모습은 대체....!"
거인의 목소리를 들은 대원들은 비로소 저것이 진짜 자신들의 보스, 마키시마 아키토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미국을 떠났을 때와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가 전에 말했었지? 새로운 힘을 손에 넣어 돌아오겠다고."
"그 모습이 새로운 힘인 모양이군요."
베루더의 말에 아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나의 새로운 힘, '기간틱 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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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토는 조아노이드 부대를 박살낸 후 살아남은 인원들을 수습해서 예비기지로 정해뒀던 부둣가 창고의 비밀 공간에 숨어들었다. 인명피해가 꽤 커서 재편성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보였다.
"그래, 자네의 활약은 얘기 들었네. 조아노이드를 30마리 이상이나 베었다고?"
"23마리까지 세다가 관뒀습니다. 곧 죽을 건데 의미 없는 짓이라고 생각돼서요."
아키토는 아지트를 기습한 조아노이드 부대를 상대로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준 베루더와 독대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대원들의 증언과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베루더가 해치운 조아노이드들의 시체를 보면서 아키토는 놀라움을 표시했다. 부상까지 당해가며 다수의 조아노이드와 싸운 사람치고는 지금 베루더는 멀쩡해 보였다. (전투 직후 마계의 비약 등으로 일단 응급처치는 해 둔 상태였다.) 그러다가 그는 이내 베루더의 정체를 단번에 눈치 채었다.
"그래, 마계의 프로 전투원께서 왜 내 부하로 있던 거지?"
"알고 계셨습니까? 이거 놀라운데요?"
베루더는 아키토가 자기가 마족인 것을 알아차리자 놀랐다. 그리고 뜻밖에 아키토의 표정에 동요하는 빛이 없다는 데에 또 한 번 놀랐다. 상대가 마족이라 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다. 아키토는 베루더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처음엔 몰랐지. 그러나 자네의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전투능력을 보니까 의심이 되더군. 그러다가 자네의 이마에 있는 그 빨간 문양을 보니까 바로 알 수 있겠더군. 그거와 비슷한 문장을 가진 사람들, 아니 여신들을 알고 있어서 말이야."
여신들, 그러고 보니 마라가 일본에서 가이버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는 여신들이 있다는 얘기를 해 준적이 있었다. 마라도 잘 아는 신족들이라는데 천상계에서 도우미 여신 사무소 일로 내려왔다가 황당한 소원 때문에 지상계에 머물고 있다고 했었다. 아키토가 그녀들과 함께 지냈었다면 마족이라고 해서 놀라워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름이 울드, 베르단디, 스쿨드라고 했던가. 게다가 울드는 바로 대 마계장의 딸이기도 하고.
"거의 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틀렸군요."
"한가지라면?"
"전 전투원이 아닙니다. 제 임무는 어디까지나 정보 수집이지요."
그 말을 들은 아키토는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등받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전에 없던 여유가 느껴졌다. 아마도 기간틱 다크라는 새로운 힘을 얻어서 저럴 수 있는 게 아닐까하고 베루더는 생각했다.
"그래, 나한테 무슨 정보를 캐내려고 내 부하 행세를 했나?"
"그냥 이것저것이요."
아키토의 질문에 베루더는 살짝 웃으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아키토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긴 정보부 요원을 상대로 그렇게 쉽게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고문 같은걸 해서 억지로 불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다고 쉽게 털어놓을 인물 같지도 않거니와 자칫 잘못하면 마계까지 적으로 돌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별의 제왕이 되는 것, 아키토의 최종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마계라 해도 전쟁을 피할 수 없겠지만 크로노스라는 강적을 상대해야 하는 지금 일을 또 벌여놓을 필요는 없었다.
"뭐 좋아. 너희들 꿍꿍이가 뭐든 그건 신경 안 쓰겠다. 내 일을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저희는 방해할 이유도 생각도 없습니다."
베루더는 대화를 하면 할 수록 이 아키토라는 사내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배포가 크다고 해야 할까? 자신의 조직 내부에 다른 조직에서 온 속내를 알 수가 없는 자가 있음에도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남자야 말로 훗날 마계의 앞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을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베루더는 이 남자에게서 위험함을 느꼈다. 그렇다면.....암살을 해야 할까?
"하지만, 네 진정한 보스가 누구건 간에 어쨌든 지금 넌 내 밑에 있는 샘이니 일단은 내 명령을 들어야겠다."
"당연하신 말씀."
베루더는 아키토의 말에 간단하게 긍정하였다. 그래, 암살 같은 생각은 일단 접어두자. 마계에선 아직 어떠한 지령도 없으니 베루더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기간틱 다크라는 힘을 가진 아키토를 상대로는 정면 승부는 자살행위다. 그리고 이 남자는 어차피 크로노스를 해치울 생각이므로 일단은 마계에게도 유익한 존재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적의 적은 친구인 셈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한 가지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게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제가 도울 일이 있다는 거군요?"
"그래. 나 혼자 못할 것은 없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네 실력으로 날 도와주면 좀 더 쉽게 일을 할 수 있을 거다."
"제 실력이라 하심은...정보수집 능력입니까, 아니면 전투 능력입니까?"
"둘 다 필요해."
베루더는 흥미가 생겼다. 아무래도 뭔가 대담한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것도 현재의 레지스탕스 멤버들로는 불가능한, 마족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중요 체크 대상이다. 그는 무슨 일이 됐건 수락할 생각이었다. 같이 작전을 하다 보면 이 남자의 '진짜 목적'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무슨 작전입니까?"
"목적지는 애리조나. 목표는 크로노스 본부기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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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틱이 미국에 나타났어?"
"그래, 레지스탕스 본부를 덮친 부대가 놈에게 전멸 당했다는군. 요코하마에서 이마카람과 교전했던 검은 기간틱이야."
클라우드 게이트의 최고 간부 집무실, 클라우드 헤드의 안에서 신과 푸르크슈탈이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에서 안 좋은 소식이 전해져 온 탓이었다. 그동안 대담하게도 미 조제의 인간들 주제에 크로노스의 대규모 조제시설들을 파괴하고 다녔던 레지스탕스 '제우스의 우뢰'의 아지트를 습격한 조아노이드 부대가 정체불명의 검은 거인에게 전멸 당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체불명의 검은 거인이라고 보고가 올라왔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게 뭔지 알 수가 있었다. 바로 가이버 III의 기간틱이었던 것이다.
"하긴 놈이 나타났다면 조아노이드 따위는 몇 백 몇 천이 모여도 안 되지."
"닥터 발카스께서는 이미 애리조나 본부로 떠나셨어."
그 외에 여기 잠시 머물고 있던 다른 신장 멤버들 역시 모두 떠났다. 한 번 싸워보고 싶다고 호기 있게 소리치던 쿨메그닉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 외에 자빌과 카브라알, 리엔쯔이 등도 모두 미국으로 갔다. 칼레온 만큼은 아직 마음을 못 정했는지 자기 담당구역으로 돌아갔다.
"그러는 신, 자네는 어쩔 건가?"
"난 당분간 이곳 일본에 있겠네. 자네 혼자에게만 여길 맡겨두는건 왠지 너무 걱정돼서 말이야."
"면목이 없군."
신이 푸르크슈탈의 실력을 의심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전투능력은 친구인 그가 확실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상대가 바로 가이버 기간틱이었다는 점이었다. 황색과 검은색의 기간틱. 그렇다는 것은 어쩌면 기간틱이 사실은 두 개가 아닐까? 물론 이들은 기간틱이 원래는 하나뿐이고 그 하나를 가이버 I과 III가 공유해서 쓰고 있는 거란 걸 몰랐다. 어쨌든 검은색의 기간틱이 미국에 나타났다면 나머지 하나, 황색의 기간틱은 이곳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요코하마에서 기간틱이 보여줬던 전투력을 보자면 아무리 조아로드라고 해도 1:1은 너무 위험했다. 최소한 둘 이상이 한꺼번에 덤벼야 승산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남아있을 가이버 I의 기간틱과의 교전에 대비해 신은 이곳에 남기로 한 것이다.
"외부의 적도 강력한데 내부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정말 죽을 맛이군."
신은 현재의 상황에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발카스의 얘기를 들은 이후로 신과 푸르크슈탈은 어깨가 더욱 더 무거워짐을 느꼈다. 외부로는 가이버라는 강력한 적이 계속해서 도전해오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알칸펠은 기나긴 휴면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2신장 내부에 행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불순분자까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골치 아팠다. 발카스는 이 두 사람에게 철저한 내부 단속을 부탁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린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얘기를 알아버렸어. 우리 조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릴 중대한 비밀, 알칸펠님에 관한 것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이들은 그동안 발카스를 의심해 오고 있던 것을 후회하였다. 발카스는 끝까지 이 사실을 혼자서 간직해 오면서 몸이 자유롭지 못한 알칸펠을 대신해 조직을 꾸려왔고 결국 오늘날의 크로노스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크로노스의 최종 목표인 '타 천체로의 진출'을 위해서. 생각해 보면 그 노구의 양 어깨에 너무나 무거운 짐들이 놓여 있던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은 발카스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대들기까지 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가 박사의 짐을 나눠서 들자고. 이제 우리에겐 조직의 결속 강화라는 막중한, 그러면서 당연한 임무가 부여됐으니까."
신과 푸르크슈탈은 결의를 다지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게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하늘에서 내린 것은 놀랍게도 눈이었다. 아직 11월의 도쿄에는 너무나 이른 눈이었다.
"응? 여기 이맘때쯤에 눈이 내리나?"
"아니, 눈 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그런데 눈이라니....참 별일도 다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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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그럼 그렇지. 관리 똑바로 못해?"
때 아닌 함박눈에 의아해진 울드가 천상계로 전화를 걸었었다.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유그드라실의 버그 증가로 인한 오류. 그 때문에 도쿄에 때 아닌 많은 양의 눈이 내린 것이다.
-"난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야! 네들이 다 지상계에 내려가는 바람에 나만 죽을 고생 하고 있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수화기 너머로 페이오스의 한(?) 맺힌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드는 수화기를 살짝 손으로 막으며 하품을 해 댔다. 남의 불평 같은걸 진지하게 들어줄 울드가 아니다. 하긴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원래 유그드라실의 주 관리 책임은 울드, 베르단디, 스쿨드 이 세 자매의 몫이었으니까. 그러던 것이 어느 날 베르단디가 도우미 여신 사무소 일로 지상에 내려왔다가 케이의 소원 때문에 발이 묶이고 - 사실 지금은 베르단디 본인이 원해서 머물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 그 뒤를 따라 울드와 스쿨드까지 모두 내려왔으니 세 사람 몫을 혼자서 해야 하는 페이오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크로노스에 대한 동향감시까지 해야 하니까 일거리가 더 늘어났다.
"뭐 열심히 해 봐. 열심히 하면 위에서 수고했다고 휴가라도 주겠지."
-"지금 이 판국에 휴가 같은 소리할래?"
울드는 위로인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나 해 댔고 페이오스는 수화기로 화만 버럭낼 뿐이었다. 이 비상시국에 휴가가 가능할리가 없다. 아마도 페이오스가 다음 휴가를 받는 때는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난 이후가 될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울드 역시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약 올리는 거지.
오다기리 교수 저택 지하에는 이렇게 외부와 연결된 전화도 있었다. 물론 기존의 통신망을 그냥 이용할 수는 없고 몇 군데 중계기를 거쳐야 하는 꽤 복잡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난방과 수도, 전기도 이 곳 지하실에만 공급되었다. 외부에는 이 저택은 빈 집으로 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아무도 없는 티를 보이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것 역시 오다기리 교수가 훗날에 대비해서 식솔들에게 부탁해 둔 것이었다.
"뜨개질이야? 누구 껀데?"
"케이씨 드릴 거에요. 이제 날도 추워졌으니까요."
베르단디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옷은 한 절반정도 만들어진 상태였다. 베르단디는 한올 한올에 정성을 기울여가며 뜨개질을 하였다. 지로는 그런 베르단디를 보며 푸근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뜨개질이란 건 웬만큼 인내심과 집중력이 없으면 못하는 일이다. 한올 한올 일일이 손으로 실을 떠야 하는 거니까. 그것도 성인 남자가 입을 정도의 상의를 만드는 건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 만큼 손뜨개질에는 만든 사람의 정성이 듬뿍 담겨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기 위해 뜨개질에 열심인 베르단디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우웅~ 언니는 언제나 뜨개질만 해. 재미없어...."
물론 모든 사람이 그걸 푸근하게만 보는 건 아니다. 스쿨드는 베르단디가 자기랑 놀아주지 않고 뜨개질에만 열중해 있자 삐진 듯 했다. 사실 직접 하는 사람은 몰라도 뜨개질은 옆에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지루한 광경이었다. 스쿨드의 투정에 베르단디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미안, 스쿨드. 이 부분만 좀 마무리하고 아이스크림 만들어줄께. 조금만 기다리렴."
그때 거실 문이 열리면서 메구미가 들어섰다. 그녀는 쟁반에 여러개의 찻잔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하나씩 차를 권했다.
"자, 여러분. 홍차를 좀 타봤어요. 베르단디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다고요."
"아녜요, 메구미씨. 메구미씨가 타주신 홍차는 정말 맛있어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베르단디는 메구미가 준 홍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그 때 메구미의 눈에 베르단디가 만들고 있는 스웨터가 보였다.
"헤에? 이거 케이 줄 거야? 케이 복 터졌네. 여자친구가 예쁜 스웨터도 만들어주고."
메구미는 케이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고 베르단디는 그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러다가 베르단디는 문득 이런 여유가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가 가이버 유니트와 접촉하고 크로노스와의 기나긴 싸움을 시작한지 이제 2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2년 전 크로노스니 조아노이드니 가이버니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살던, 평범하지만 평화롭던 일상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물론 아직도 숨어 지내는 신세라는 점은 여전했지만 최소한 몇 달 전 케이가 다시 돌아오기 전 까지 좁은 투룸에서 지내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은 한껏 여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즈씨랑 마키시마씨는 잘 있으실까요?"
베르단디는 그 두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미국으로 가서 레지스탕스의 조직을 재편하고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고 했으니 고충이 심할 듯싶었다. 게다가 보통 인간인 시즈는 상당히 위험한 처지였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듯싶은데?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가자마자 벌써 한바탕 한 모양이야."
지로가 인터넷으로 정보를 모아보니 크로노스가 레지스탕스 본부를 습격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크로노스 측은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바빴다. 어느 폐 공장지대를 수백 마리의 조아노이드가 포위한 사실을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 곳에 뭔가가 있으니까 조아노이드들이 그리로 몰려간 거 아닌가. 자세한 정보는 크로노스가 철저히 통제하고 있어서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대강 추측은 가능했다. 아마도 조아노이드 토벌부대는 큰 피해를 입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 만약 이겼다면 왜 출동 사실 자체를 부인할까. 이겼다고 대대적으로 떠들어야 정상이다.
"아마도 마키시마가 가서 싹 쓸어버린 걸 거야. 그렇지 않고 서야 놈들이 출동 사실을 감출리가 없지.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시즈씨는 마키시마가 잘 지켜줄 거야. 그 녀석도 가이버잖아."
"하긴 그래요."
모두 다 그 두 사람일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키토는 이제 기간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기간틱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즈 역시 아키토의 조직 내에서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을 테니 신변에 큰 위험은 닥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시즈 입장에서는 위험하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 바로 옆에 있는 것이 더 나을 듯싶었다. 안전하다고는 해도 지구 반대편에서 소식도 못 들은 채 잔뜩 맘 졸이며 기도나 하는 것 보다야 낫지 않을까.
어쨌든 아키토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면 크로노스의 시선은 온통 미국으로 쏠릴 테니 여기 남은 베르단디들은 조용히 숨어 지내기만 하면 더 안전해 질 수가 있었다. 어차피 크로노스 같은 거대 조직과 싸우려면 지금의 케이나 베르단디들처럼 '개인'으로 싸우는 것 보다는 아키토처럼 '군대에 상응하는 집단'으로 싸우는 것이 좀 더 확실하게 타격을 줄 수 있고 민중들에게도 크게 어필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곳에 모인 베르단디들은 이전보다 한결 더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 역시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마키시마 그 사람 혼자 싸우는 거 보다 양쪽에서 동시에 날뛰면 더 빨리 녀석들을 물리칠 수 있을 텐데."
그 때 통화를 끝낸 울드가 합석하였다. 울드만은 좀이 쑤셔 못살겠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또 다시 기약 없는 은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화끈한 성격의 울드에게는 못 견딜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한바탕 휘젓고 싶어 하였다. 안 그래도 저번의 엔자임 III와의 대결에서 드러난 법술의 문제점들도 거의 다 보완해서 상대가 하이퍼 조아노이드라 할지라도 한 번 해볼만하다고 자신감에 차 있는 울드였다.
"게다가 그 12신장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나타나면 케이가 기간틱으로 변신해서 싸우면 되잖아. 어려울 거 없다고."
"그런데 케이는 지금 뭐하고 있지?"
케이 얘기가 나오자 메구미가 문득 케이가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물론 밖으로 나가는 경솔한 행동을 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케이씨는 지금 린드와 핫세씨와 함께 작은 방에 계세요. 하야미씨를 도와서 남은 자료들의 정리를 하시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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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핫세한테 이런 일 시켜서 면목이 없는 걸."
"아녜요. 빈둥대는 것 보다는 나은걸요. 게다가 공부도 되고요."
작은 방에는 케이, 핫세, 린드와 하야미가 모여 있었다. 케이는 하야미를 도와서 조제통의 정비를 하고 있었고 핫세는 린드를 도와 천계에 보낼 크로노스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다기리가 남긴 자료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더 충실한 보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상당수의 자료를 아키토가 가져가 버렸지만 일부 남은 자료들만으로도 천계에게는 대 크로노스 전에 대비한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조제통을 어떻게 잘도 입수하셨네요. 이런 거 민간에서는 안 팔지 않나요?"
"이건 간이판에 해당돼.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부품들로 짜집기한 것이거든."
하야미는 케이의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조아노이드 조제통은 당연히 민간 판매는 안 되는 물건이다. 모든 조제관련 설비는 크로노스의 승인이 없이는 입수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오다기리가 이걸 준비한 때는 제압 이전. 당연히 온전한 조제통은 입수 불가능했다. 하지만 단위 부품별로 따로따로 구하는 것까지 불가능하진 않았다. 조제통 부품들은 다른 전자제품들과 통하는 것들도 상당수 있었으니까 그것들을 각각 따로 구입해서 하나로 합치면 되는 것이다. 그 외에 조제에 필요한 배양액등은 하야미들이 재료를 사와 직접 만드는 식으로 입수하였다.
물론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은 크로노스가 만든 제대로 된 조제시설보다 열악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조잡한 물건에 하야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고 결국 실험에 나선 스텝들 네 명중에서 하야미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키시마 아키토가 가지고 간 자료들도 어서 빨리 보냈으면 좋겠는데."
린드는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여전히 아키토가 가지고 간 자료가 못내 아쉬워했다. 물론 나중에 카피본을 보내준다고 하기야 했지만 린드는 어딘가 계속 찝찝했다. 그렇다고 가서 억지로 뺏어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걱정 마십시오. 마키시마는 약속을 지킬 겁니다. 마키시마와 우린 동지잖습니까. 사선을 같이 넘어온 동지요."
하야미는 여전히 아키토를 신용하고 있었다. 하긴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제까지 목숨 걸고 같이 크로노스에 맞서 싸워왔으니까. 비록 지금은 떨어져있어도 아키토와 이들 간에는 지금 단단한 유대관계가 형성돼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약속을 어길 리는 없다, 하야미의 생각은 그랬고 그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의 생각이기도 했다.
"뭐, 그렇겠지...."
린드는 하야미의 말에 달리 반박할 수가 없었다. 린드는 자기가 너무 신경과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대체 왜 마키시마 아키토를 의심할까? 이제까지 그와 함께 수많은 사선을 넘었는데. 왜 의심하게 됐을까. 단순히 느낌이 그래서? 어째서 그런 비논리적인 이유에 집착할까? 왠지 자신답지 않다고 린드는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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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통 점검을 끝낸 후 케이는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지하실에서 나와 2층의 발코니로 나왔다. 바깥은 유그드라실의 오류로 인해 내린 때 아닌 폭설로 인해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눈이 왔다고는 해도 아직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아키토 얘기가 나오자 왠지 마음이 복잡해지는 케이였다. 그를 생각하면 할수록 왠지 자신과 아키토가 자꾸만 비교되었다. 그는 발코니의 난간에 몸을 기댄 체 가만히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마키시마 선배는 나와 달라. 나는 도저히 선배처럼 될 수는 없어....'
그 때 무라카미가 습격해 왔을 때 케이는 위기의 순간 아키토에게 기간틱의 컨트롤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아키토는 기간틱으로 변신해서 무라카미와 싸우러 갔었다. 나중에 돌아온 아키토는 무라카미를 물리치긴 했지만 생사 확인을 미처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기간틱의 전투력 자체는 조아로드인 무라카미를 능가할 정도이니까 이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싸우는 의지. 그 때 케이는 무라카미를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끝내 해칠 수는 없었다. 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예전에 함께 싸웠던 동지를 차마 벨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키토는 다르다. 그는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 신념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설령 상대가 예전의 동료라 할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방해가 된다면 가차 없이 쓰러트릴 수 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그것이 마키시마 아키토이다. 어쩌면 그 마음가짐이야 말로 지금 크로노스와 싸워나가는데에 가장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저것 신경 써 가면서 어떻게 크로노스와 싸워 나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지킬 수는 없고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을 수는 없다.
'나 역시 선배처럼 비정해져야 하는 걸까....
-쿠웅!!!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뭔가 커다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케이는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코니 근처의 나뭇가지에 쌓여 있는 눈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눈의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
케이의 눈에 나무속에 숨어 있는 녹색의 사람 크기의 물체가 보였다. 카멜레온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것은 틀림없이 척후 조아노이드였다! 저 녀석이 들어와서 눈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케이는 경악하였다. 크로노스 놈들에게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들키고 만 것이다! 도대체 저 놈이 여길 어떻게 알고 들이닥친 것일까.
-파앗!
케이와 눈이 마주친 척후 조아노이드가 나뭇가지 속에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케이도 황급히 그 뒤를 쫓아 발코니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가이버!!"
-투웅!!!
충격파를 동반하면서 케이는 가이버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도망치는 척후 조아노이드를 열심히 쫓아가기 시작했다. 저 놈이 클라우드 게이트에 도착하면 모두가 위험하다. 그 전에 저걸 빨리 해치워야 했다. 케이는 추격을 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하였다. 바깥에 저런 놈들이 어슬렁거린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바깥바람을 쐬겠답시고 무심결에 밖으로 나온 것이 잘못이었다. 덕분에 베르단디와 모두가 위험해지게 생겼다.
'내 책임이야! 빨리 저걸 잡아야 해!!'
Next episode 제11화 '의지의 차이' coming soon......
p.s : pc 포맷도 하고 회식도 있었고, 컨디션도 최악이고..... 하여간 여러가지 일 때문에 한 주 쉬었지만 결과물은 별로 맘에 안드는군요....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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