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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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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제2부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part 2.-


제1화 - 그 날 이후 -








"에~ 또.... 감자랑 계란이랑.... 그리고...."

장을 보러 나온 주부들로 북적거리고 있는 할인점 식품 코너에서 메구미는 종이에 써 놓은 목록을 보며 여러 가지 음식 재료를 고르고 있었다. 카트에는 여기저기서 담은 식재료들이 하나 가득이었다. 혼자 사는 메구미가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아 맞다! 아이스크림이랑 술도 사야지. 술은 전통주로 사다 달랬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금 무슨 잔치 하는 줄 알 정도로 그녀의 카트는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할인점에 오면 혼자 사는 사람이라도 며칠 치를 한꺼번에 많이 사가는 건 보통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너무 많은 양이었다. 그중에는 장기간 보관이 어려운 식재료도 있었다. 필요한 재료를 다 고른 메구미는 한참 만에 계산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까지는 그래도 카트를 끌고 갈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영차!"

메구미는 주차장에 세워둔 오토바이 옆에 달려있는 사이드카에 짐을 실었다. 이 사이드카는 BMW 오스카 리브맨 스페셜, 예전에 케이가 쓰던 바이크였다. 케이가 실종된 이후 그 동안 이 바이크는 메구미가 대신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도 사실 통제국에서 담당자랑 악을 써가며 싸운 끝에 되찾아온 것이다. 지명 수배자가 쓰던 물건이라 압류해야 한다는 통제국 측에 대해 메구미는 '유족'으로서 그걸 쓸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소송이라도 걸듯이 밀어붙였던 것이다.

"헤헤, 도와 드릴까요?"

그 때 어떤 남자 한명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가왔다. 상당히 준수하게 생긴 얼굴에 드러난 팔에는 상당한 수준의 근육도 있었다. 누구나 첫눈에 호감을 가질만한 인상이었다. 허나 메구미는 그저 뚱한 표정만을 지어 보였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메구미는 남자의 호의를 간단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남자는 여전히 웃기만 하면서 돌아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줄게요. 나, 힘 엄청 세다고요. 히히히."

메구미는 그저 묵묵히 짐을 실을 뿐이었다. 이윽고 메구미는 모든 짐을 다 실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남자를 보며 말했다.

"힘이 쎄다라.... 혹시 조아노이드 세요?"

"예! 헤헤, 3일전에 조제 완료됐다고요. 전 그레골로 조제됐답니다."

메구미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그 남자에게 일침을 놓았다.

"조아노이드가 되면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반할 줄 알았나 보죠? 착각은 그쯤 하셔."

-부르릉!!

메구미는 그대로 시동을 걸고는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간단하게 퇴짜를 맞은 남자는 그저 황당하다는 듯이 멀어져 가는 메구미를 보고만 있었다.



*******************************



메구미는 한참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원래 그녀가 살던 집과는 전혀 반대방향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평일에는 지나는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원룸촌에 도착하였다. 그녀가 간 곳은 그 중에서도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녀는 주차장에 바이크를 세워두고는 사이드카에서 짐을 내렸다. 여러 세대가 다닥다닥 붙어사는 그 건물 1층의 어느 방 문 앞에다 물건을 내려놓은 메구미는 다시 사이드카로 돌아가서 나머지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양이 많기 때문에 한 번에 다 나를 수가 없어서 두어 차례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짐을 다 옮겨 놓은 후 메구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미행하지는 않았나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103호라고 쓰여 있는 방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렸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안으로 부리나케 짐을 옮겼다. 안에서 누군가가 그 짐을 옮겨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어서 오십시오. 메구미 씨."

"어서 오세요, 힘드셨죠?"

"야아! 모두 오랜만이에요."

안에서 메구미를 맞이한 것은 요헤이와 베르단디였다. 메구미가 구입한 많은 양의 식재료는 이들이 일주일간 먹을 음식들이었다. 베르단디와 요헤이가 메구미가 가져온 식재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베르단디, 나 점심 좀 먹고 갈께."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안 그래도 점심 만드는 중이었거든요. 금방 차려드릴께요."

그녀는 가져온 식재료 봉지에서 아이스크림과 술을 한 병 꺼내들고는 안방으로 향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지로는 PC앞에서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고 울드와 린드는 TV를 보고 스쿨드는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핫세는 스쿨드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시즈는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다들 메구미가 들어오자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아, 어서와."

"오랜만이네, 아! 술이다!"

울드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메구미에게서 술병을 받았다. 메구미는 못 말린다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스쿨드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그러나 스쿨드는 그저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조용히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더니 우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예전에 아이스크림을 받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하지만 메구미는 다 이해한다는 듯 그저 쓴 웃음만을 지어보였다.

"선배, 뭐 하고 계세요?"

"아, 웹 검색 중. 언론사 자료를 모으는 중이야."

지로 옆에 앉은 메구미는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각 언론사의 홈페이지들이 떠 있었다. 메인 페이지의 기사 내용은 이제 곧 다가올 '제압 1주년'을 다루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1년이네요."

"그래..... 벌써 1년이야."

지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크로노스가 지구 전역을 제압한지 이제 1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충격의 8월 17일. 그 날 전 세계 사람들은 그들의 곁에서 갑자기 나타난 무시무시한 괴물들에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세계 각국의 정부와 군은 와해되었다. 크로노스는 제압 후 '혹성 국가'가 수립되었음을 선언하고 이제부터 이 별의 모든 것은 크로노스의 관리하에 들어간다고 선언하였다. 사람들은 그 직후 잔인한 압제가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빛나갔다. 크로노스는 우선 정치적인 의미의 국경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현재 그어진 국경선은 그저 '행정 구역'을 나누는 선쯤으로 하였다. 그 동안 각 나라별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영토 문제에 관해서 크로노스는 원칙을 중시하면서 처리하였다. 그 옛날 세계 대전 이후 강대국들이 자기 입맛에만 맞게 제멋대로 그은 국경선은 각국의 국민들의 정서에 맞게 다시 그어졌다. 도대체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던 팔레스타인이나 코소보 문제 등을 크로노스는 멋지게 처리하였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던 내전도 모조리 종식되었다. 국경 분쟁은 이렇게 사라졌다.

또한 크로노스는 민생 안정과 지구 환경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선언하였다. 국회가 폐지되고 모든 의사결정을 크로노스가 하게 되면서 법안 처리 속도가 빨라졌고 모든 행정 분야는 하위직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크로노스에서 파견한 인원들이 배치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된 집단은 그 조직원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될 확률이 높아지게 되지만 이들은 그 동안 어떠한 스캔들에도 말려들지 않았다. 크로노스는 모든 일을 공정하게 그리고 원칙을 중시하며 처리하였고 이것은 일반 국민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오히려 이들에게 빌붙어서 한 몫 잡아보려한 자들은 철저한 응징을 당했다. 이로서 그동안 끊이지 않던 부정부패가 일소되었다.

지구 환경 복원사업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제압 이전 각국 정부가 예산 탓만 하면서 미루거나 개발 논리에 따라 마구 파헤쳐지던 자연환경의 회복에 크로노스는 총력을 기울였고 이것은 환경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크게 환영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크로노스가 개발을 완전히 못하게 한 것도 아니고 개발과 환경보존이라는 상이한 일들을 균형 있게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크로노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오버 테크놀로지를 상당부분 공개하였다. 이로 인해 인류의 문명은 급격한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나 의학 분야의 진보는 눈부셔서 그동안 인류를 위협하던 불치병이나 난치병 등이 상당부분 해결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압으로 인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살기 좋아진 셈이었다.




*******************************




베르단디는 방 안에 큰 상을 펼치고는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메구미나 시즈도 베르단디를 도와 같이 상을 차렸다. 인원이 많다보니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방이 상당히 좁아졌다. 이들이 기거하는 투룸은 방 두개에 부엌 겸 거실이 딸려 있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투룸이었다. 두세 명 정도가 쓰기에는 적합하지만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러나 당장 구할 수 있는 '은신처'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식사가 다 준비되자 모두가 상 주위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음식 섭취를 할 필요가 없는 여신들은 식탁에 앉지는 않고 그저 그 자리에서 각자 하던 것을 계속하였다. 울드는 술을 홀짝이면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요즘 한창 뜨기 시작한 TV 드라마였다.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는 어찌 보면 좀 진부한 소재의 드라마였지만 청춘스타들의 대거 등용과 화려한 영상미 등으로 젊은 층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지금은 교통사고를 당해 찌그러진 차 안에 갇힌 여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두 남자가 애쓰는 장면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구해줄께!"

남자 주인공이 뭔가를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울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남자 주인공이 조아노이드로 변신해서는 찌그러진 차체를 뜯어내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조제를 받지 않은 보통 인간인 라이벌은 그 장면을 무력하게 보고만 있었고 구출된 여 주인공은 조아노이드의 품에 안겨서 안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드는 짜증을 내면서 채널을 돌려버렸다. 저런 괴물녀석 따위는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쳇! 하필이면 왜 조아노이드가 주인공이야!"

이번에 나온 채널은 음악 전문 방송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조아노이드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 장안의 화재인 4인조 인기 록 밴드 '수가단'의 첫 번째 라이브 콘서트 실황중계였던 것이다. 멤버 전원이 조아노이드인 이들은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연주 테크닉과 화려한 스테이지로 젊은층, 특히 여성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들은 공연을 할 때면 조아노이드로 변신해서는 보통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수준 높은 공연을 해 보였다. 그러나 울드가 듣기에는 그저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는 수준으로 밖에는 안 들렸다. 그 장면은 베르단디도 보고 있었다. 수가단의 공연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들의 노래에는 영혼이 없어요. 그저 현란한 기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을 뿐....."

"하지만 대중들은 그저 좋다고만 하는걸."

베르단디의 걱정에 메구미는 푸념만 늘어놓았다. 정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식사를 하던 도중 메구미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 후배 녀석 상담을 좀 해줬는데.... 그 녀석, 조아노이드가 되고 싶다 하더라고."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메구미를 주시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런 건 절대 생각도 말라고 혼을 냈어. 인간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

"잘 하셨어요. 조아노이드가 된다는 건 진정한 자유를 잃는다는 것이니까요."

베르단디의 격려에도 메구미는 그저 한숨만 내 쉬었다.

"하지만....현실의 벽 앞에서 인간의 존엄같은거 얘기해 봐야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인걸...."

크로노스가 지구를 제압한 이후 사람들이 제일 걱정했던 일은 크로노스가 전 인류를 강제로 조아노이드로 조제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크로노스는 조제를 강제화 하지 않았다. 조아노이드로서의 조제, 그들이 부르는 말로 '신인류'가 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는 크로노스의 얘기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 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조제를 받지 않아도 일상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들 크로노스의 말을 믿게 되었다.

대신 크로노스는 적극적으로 조아노이드로의 조제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일단 조제를 받게 되면 학력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취직이나 승진 등에 최우선적으로 반영해 줬다. 그렇다고 미조제된 사람들을 역차별한 건 아니다. 좀 더 업무능력이 우수하면 미조제자라 할지라도 승진 기회는 많았다. 미조제된 상사가 조제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조제를 받으면 더 많은 기회가 온다는 것은 분명했다. 시민단체가 평등권 위배라고 이의를 제기해도 크로노스의 입장은 확고했다. 신인류로서의 '진화'라는 큰 결심을 해준 분들에게 이정도 답례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조제를 받은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건강해 진다고 홍보하였고 이것은 상당부분 사실이었다. 일단 조제를 받게 되면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대단히 강력해지게 되서 사실상 감기라는 건 잊고 살게 된다. 그리고 변신을 하지 않더라도 육체적인 근력 등이 상당히 강해지게 된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미조제자 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았다. 설령 부상을 입더라도 조제통 안에 들어가서 하루 정도 있다가 나오면 치료가 되니까 어려울 것도 없었다.

물론 크로노스는 조제를 받게 되면 조아로드의 사념파에 지배받게 된다는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몸 건강해지지, 취직이나 승진이 잘 되니 돈 잘 벌지, 여자들에게 인기 있지, 얼핏 보면 장점밖에 안 보이니 조제 희망자가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특히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조아노이드로의 조제는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일단 조제만 받으면 취직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크로노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겨우 1년만에 이렇게까지 변해 버렸어. 이대로 가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까지 가게 될 꺼야...."

지로는 언론 기사들을 모아놓은 스크랩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스크랩에는 조제에 관련된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조아노이드로 조제를 신청했다가 나이와 건강상 이유로 조제를 거부당하자 통제국을 상대로 조제를 받게 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60대 남자 얘기와 어째서 조아노이드의 조제는 남자들만 받냐며 여성들에게도 조제를 받을 권리를 달라고 통제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여성단체 얘기가 실려 있었다.

크로노스는 조아노이드로의 조제는 아직 남자들에게만 국한하고 있었다. 어째서 여성은 대상이 안 되냐는 질문에는 여성의 신체 구조를 얘기하면서 아직은 좀 더 기다리셔야 한다고만 하고 있었다. 조제를 받게 되면 여성은 난자 배출이 중지돼서 사실상 불임이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남성의 경우에는 정자 생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한동안 남자 역시 조제를 받게 되면 불임이 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물론 그 소문은 조제를 받은 남자가 부인을 임신시킨 사례가 속속 보고되면서 빠르게 사라져 갔다. 제압 이전에 조제를 받았던 크로노스 조직원이 제압 이후 결혼을 해서 둘 사이에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뉴스까지 많이 있었다. 기형아 논란은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숨어서 자료만 모아봐야 녀석들에게 이길 수가 없어. 힘이....힘이 있어야 해! 녀석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이!"

지로는 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들 그 말에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 이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유적 기지를 탈출하기 전 지로는 크로노스에 대한 자료들을 충실히 수집해서 정리해 두었다. 탈출 후 언론에 이를 알려 크로노스의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단 며칠도 안돼서 크로노스의 제압전이 시작되었고 세상은 크로노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젠 조아노이드라는 것이 전혀 신기할 것이 없는데다 오히려 대중의 지지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크로노스의 음모를 밝혀봐야 대중들을 납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모두는 무력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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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나 가볼께요."

"조심해서 가세요."

베르단디와 요헤이, 지로가 현관에서 메구미를 배웅하였다. 물론 숨어사는 처지이므로 밖으로 나갈 수는 없고 그저 현관에서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메구미는 신발을 신으면서 베르단디에게 말했다.

"다음 주엔 홋카이도에 좀 가봐야 해. 다음 주 동안은 여기 못올꺼야."

"예? 무슨 일이신데요?"

"....케이마씨 기일이라서....."

그 말에 모두는 침묵하였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1년전 케이마가 비명에 간 날이었다. 메구미는 잠시 어두운 표정이다가 다시 쾌활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자, 그럼 나 가요! 그동안 무슨 일 있으면 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요."

"안녕히 가세요."

문이 닫힌 후 베르단디는 잠시 슬픈 얼굴로 문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케이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 거렸다. 오늘따라 케이가 너무나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케이씨..... 어디 계세요.....'

그녀는 믿고 있었다. 1년 전 유적 기지에서 탈출할 때 유적 우주선이 파괴되던 그 순간 그들은 어느 샌가 그들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타력본원사로 순간이동되 있었다. 아무도 순간 이동 법술을 구사할 여유가 없었음에도 이들은 안전하게 우주선에서 그곳까지 이동된 것이다. 베르단디는 그것이 케이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유적 우주선의 능력을 이용해서 자신들을 탈출시킨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무사히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때 그 자리에는 케이와 아키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두 사람의 소식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케이씨.... 전 믿어요. 케이씨는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 계실거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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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바이크에 시동을 건 메구미는 잠시 안쓰러운 눈으로 베르단디들이 은신해 있는 원룸을 보았다. 지금 베르단디들은 얼마 전까지 크로노스의 지명 수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케이가 크로노스의 최대 적인 가이버였고 베르단디들도 크로노스에 저항을 하였으니 수배가 내려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도심 한적한 곳에 위치한 좁은 원룸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행여나 누가 볼까봐 함부로 커튼조차 열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벌써 1년이나 숨어 지내고 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었다. 메구미는 그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메구미도 사실 넉 달 전까지만 해도 크로노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가이버 I 의 친동생이니 그건 당연했다. 그 동안 메구미는 졸업을 했지만 크로노스의 엄격한 감시를 받던 중이라 취직자리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그 때는 대학원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당장 취직이 안 된다면 조금이라도 더 공부를 해두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1년이 다 되가는 지금은 메구미는 감시가 풀렸고 베르단디들의 수배령은 해제되었다. 1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크로노스는 이들이 이미 죽거나 천계로 돌아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배가 해제됐다고 모습을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메구미 역시 여기에 찬거리를 사다주러 올 때에는 자주 애용하는 집근처 시장을 가는 게 아니라 일부러 멀리 있는 대형 할인점을 이용하였다. 혼자 사는 메구미가 너무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을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의심할까봐 그러는 것이었다. 할인점도 어느 한 군데만 가는 것이 아니라 매번 가는 곳을 바꿨다. 혹시나 누군가가 메구미를 기억할 까봐 그러는 것이었다.

-부르릉!!

메구미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였다. 그녀 역시 오늘따라 케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기분이 우울해 졌다.

"케이....이 여동생이 걱정하고 있잖아.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돌아오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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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번 입찰건은 반드시 따내야 한단 말이요!! 만약 안 되면 당신들 다 모가지야!!"

아오시마 그룹 본사에 위치한 회의실에서 한 젋은이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그룹 임원들은 자기 아들뻘 되는 젊은이의 호통소리를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젊은이는 최근 아오시마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아오시마 도시유였다.

도시유가 저렇게 화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크로노스가 공시했던 홋카이도에 건설예정인 조제 및 연구시설 건설 사업권을 라이벌 기업에 뺏기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아오시마 그룹으로선 총력을 기울여 임했던 프로젝트였던 만큼 그 충격은 컸다. 입찰 실패 후의 후폭풍은 주식시장에도 영향을 끼쳐서 한동안 아오시마 그룹의 주식은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이번 해상 플랜트 계획이야 말로 우리가 따 내야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란 말이요!!"

크로노스 일본 지부는 그 이후 또 다른 건설 프로젝트를 공시하였다. 바로 쿄토만에서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건설 예정인 해양 연구용 플랜트 건설 사업이었던 것이다. 아오시마 그룹으로서는 본 프로젝트가 실추된 회사의 이미지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번의 그 입찰 실패는 당신들이 무능해서 그런 거야! 매달 꼬박꼬박 돈 받고 있으면 밥값을 좀 하란 말이야!!"

도시유는 이제 거의 모욕에 가까운 언사까지 하고 있었다. 임원들은 그저 죄인들 마냥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을 얘기하자면 이전 홋카이도 프로젝트의 실패 원인은 다름 아닌 도시유 때문이었다.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불리하다고 판단한 도시유는 크로노스 일본 통제국 담당자들을 미인계와 금품으로 매수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매수될 담당자 들이 아니었다. 크로노스 담당 직원들은 모두 조아노이드로서 조제를 마친 자들이었고 이들은 조제될 당시 외부로부터 어떠한 금품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유전자에 각인돼 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매수를 시도했으니 역효과가 난 것은 당연했다.

실무진 몇 명이 뇌물공여죄로 구속되고 아오시마 그룹은 프로젝트 입찰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사실 그냥 공정하게 경쟁을 하였다면 근소한 차이로 아오시마 그룹이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었지만 이 모든 걸 도시유가 다 망쳐 버린 것이다. 물론 그룹 총수의 아들인 도시유가 구속되게 할 수는 없었기에 그룹으로선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했고 도시유는 검찰에 소환되는 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인해 간부급들은 그의 경영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괜히 나서서 설치는 바람에 프로젝트도 놓치고 통제국으로 부터 강력한 경고도 받게 된 것이다. 이 후 사업권 경쟁에서 이 사건이 상당한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될 건 불 보듯 뻔했다.

물론 도시유 본인은 그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들 나가! 나가서 일들 해!!"

도시유는 그걸로 회의를 끝냈다. 간부들은 도시유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황급히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넓은 회의실 안에는 도시유 혼자만이 남았다. 네코미 공대를 졸업 후 본격적으로 그룹 경영에 나선 도시유로서는 요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잇따른 경영 악재가 겹치면서 그룹 내에서는 도시유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들이 많아졌다. 대학 다닐 당시에는 모든 이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또 일이 잘 안 풀리는 거야?"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가에 사요코가 서 있었다. 도시유는 그저 고개를 창밖으로 돌릴 뿐이었다. 회의실 전면의 대형 유리 너머로 도쿄의 풍경과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일본지부 통제국사가 위치한 클라우드 게이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사요코는 회의실 한편의 의자에 앉았다. 도시유와는 달리 그녀는 한껏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디자인전 문제로 의논할게 있으니 와달라고 한건 바로 너야."

사요코의 말에 도시유는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에 열릴 산업 디자인 전 문제를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던 것이 생각났다. 사실 이런 건 아래 실무진들이 신경 써야 할 문제고 그룹 총수인 도시유가 일일이 끼어들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전문가도 아닌 도시유가 끼어들어서도 안 되고- 그는 이렇게 '사소한' 문제에 직접 끼어드는 일이 잦았다. 이것도 그가 그룹 내에서 평판이 안 좋은 이유들 중 하나였다.

"아, 그랬었지. 후우~"

"....."

얼굴을 잔뜩 찡그린 도시유를 사요코는 그저 남 일 보듯이 무심하게만 보고 있었다. 사촌이라지만 솔직히 정은 별로 안가는 녀석이었다. 그가 무슨 고생을 한다 해도 별로 도와주고픈 생각도 안 들었다. 그리고 도시유 본인도 남의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자기 부탁 때문에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조차 감사표시를 할 줄도 몰랐다. 사촌만 아니라면 나 몰라라 했을 것이다.

"그깟 괴물 놈들 사업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모르면 잠자코 있어! 지금 세상은 크로노스가 지배해. 부를 얻으려면 놈들의 일을 해야 한다고!"

사요코는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고는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뭐,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사요코는 크로노스와 얽히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았다.

-띠리링!

그 때 사요코의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도착하였다. 폰을 꺼내서 문자를 확인한 사요코의 눈이 다소 흔들렸다. 잠시 문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도시유 모르게 핸드폰 문자를 지운 후에 핸드백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오늘 네 모습 보니 의논하긴 틀린 것 같네. 다음에 기분 좀 나아지면 부르라고."

"....그러지."

도시유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사요코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누가 보기에도 평소의 사요코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속으로는 지나치게 긴장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닫히자 그녀의 표정은 이내 심각해 졌다.

'하필이면....하필이면 왜 내가! 왜 내가 그 애를 도와야 되는 거야! 왜!'




*******************************





도쿄의 한 여름은 정말 더웠다. 좁은 투룸 안에서 모두들 땀을 흘리면서 각자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지금 뭔가 일을 하고 있는 건 울드와 지로, 베르단디, 요헤이와 시즈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할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밖으로 함부로 나갈 수 없으니 좁은 집 안에서 TV나 책 보는 것 이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울드와 지로는 천상계로 보낼 동향 보고서등을 작성하고 있었다. 울드의 임무는 일주일에 한 번씩 크로노스에 대한 정보를 취합해서 천상계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지로는 그 보조역이었다. 사실 미나카미 산에서 탈출 후 천상계와 다시 연락이 닿았을 때 주신은 그만 돌아오라고 명령했었다. 그러나 베르단디는 '케이가 살아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자신은 돌아갈 수 없다고 억지에 가깝게 간청해서 간신히 복귀 명령을 철회시킬 수 있었다. 그 대신 이들은 지상에 남아 크로노스와 그 지배하의 인간계에 대한 동향을 조사해서 정기적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것을 매주 해온 것이 벌써 1년이었다. 그러나 천상계는 보고만 받고 있을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탁탁탁탁.

동향 조사라고 해 봐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인터넷으로 밖에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온라인상의 여론과 가끔 들리는 메구미를 통해 바깥세상 얘기 듣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나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의 인식이 확 바뀌고 있었다. 단 1년 만에....

-깡깡깡깡!

그 때 부엌 쪽에서 뭔가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고장 난 수도를 고치기 위해 요헤이가 망치로 수도꼭지를 분해해 보려는 것이었다. 꼭지가 잘 안 돌아가는지 요헤이는 계속해서 두드렸다.

-탁탁탁탁.

-깡깡깡깡.

-탁탁탁

-깡깡깡

-탁!

"할아버지! 좀 조용히 해요!"

그 순간 울드의 히스테리가 폭발했다. 울드는 부엌 쪽을 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깜짝 놀란 요헤이가 작업을 멈췄다.

"아..미, 미안합니다... 이게 잘 안돌아가서..."

그 때 옆에서 자료 철을 정리하던 지로가 울드를 말렸다.

"울드. 그렇게 화낼 것 까진 없잖아."

"신경 쓰인단 말이야! 좀 있다가 자료를 위로 올려 보내야 하는데!"

그 순간 지로 역시 뭔가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지로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보내면 뭘 해! 그 잘난 천상계에서 뭐 조치를 취하는 것도 아닌데!"

"감히 천상계를 욕해!"

울드의 손에 전격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순간 욕실 청소를 하고 있던 베르단디가 서둘러 달려 나왔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 앉아 있던 린드도 이 둘을 말렸다.

"언니! 지로씨! 제발 고정하세요."

"둘 다 진정해라."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이내 홱 하며 서로 돌아앉았다. 베르단디는 이 둘을 다독인 다음 요헤이에게 다가가서 대신 사과하였다. 요헤이는 언제나 그렇듯 얼굴에 미소를 띠며 괜찮다고 손사래 쳤다. 요헤이는 모두의 신경이 날카로워 져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베르단디가 법술을 외워서 수도꼭지를 좀 더 잘 돌아가게 하였다. 법술을 외우는 그녀의 표정에 피로가 짙게 배여 있었다. 그저 몸이 피곤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둘의 말다툼 때문에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삭막해 졌다. 책을 읽고 있던 핫세는 글씨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책을 덮고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벌써 1년. 일 년 동안 이렇게 좁은 방안에서 햇볕도 제대로 못 쬐면서 갇혀 지내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부모님,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맘껏 햇빛과 바람을 쐬고 싶었다. 핫세는 슬쩍 시즈를 바라보았다. 방 한구석에서 뭔가 바느질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베르단디 선배조차 얼굴에 피로가 짙게 보일 정도인 이런 상황에서조차 시즈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처럼 평온하였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력을 가진 인물이라며 핫세가 혀를 찼다. 그 때 시즈가 바느질을 멈추고는 밝게 웃었다. 그리고 바느질을 하던 물건을 들어보였다.

"다 됐다!"

"아...! 그..그건..."

핫세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시즈가 들어 보인 천은 '작품'이라고 하기가 민망한 걸레 조각이었던 것이다. 그저 여러 자잘한 천조각을 이리저리 꿰맨 그야말로 누더기였다. 지금까지 저런 것에 열중해 있었단 말인가. 시즈는 멍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걸 아키토님께 드려야지......"

"시...시즈씨...."

핫세는 공포에 질렸다. 지금의 시즈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다만 어떤 돌출행동도 안하고 언제나 평온한 분위기인지라 지금까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요헤이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며 시즈 옆에 앉았다.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즈에게 말했다.

"시즈야....도련님은....도련님은 말이다, 사실...."

"아키토님....아키토님.....아!"

그 때 시즈가 어딘가를 보며 공포에 떨었다. 그 쪽에는 모니터에 떠 있는 미나카미 산의 모습이 보였다. 마그마가 맹렬히 분출되고 있는 미나카미 산, 바로 이들이 탈출 했던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시즈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키토님! 아키토님이!! 아아아아!!!"

"시즈!!"

"시즈씨!"

시즈가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1년 전의 그 악몽 같은 일이 떠올라 패닉상태에 빠진 것이다. 요헤이와 베르단디가 그녀를 꽉 붙잡고는 진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베르단디가 황급히 법술을 외워서 그녀의 이마에 대었다. 법술로 시즈의 정신을 안정시켜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시즈를 달랬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시즈씨! 마키시마 씨도 케이 씨도 어딘가에 분명 살아 계세요! 살아계신다고요! 그러니까..."

"그만 두십시오!"

그 순간 요헤이가 베르단디를 시즈에게서 억지로 떼어 내었다. 그리고 시즈를 품에 안은 채로 베르단디를 보았다. 요헤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당황해 하는 베르단디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무리입니다."

"요..요헤이씨?"

"벌써 1년입니다. 그 두 사람이 정말 살아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베르단디를 제외한 모두가 생각하고 있던 말이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던 말을 지금 요헤이가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젠 이런 도피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살아있다고!!"

요헤이는 베르단디에게 이제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이 말했다. 베르단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요헤이가 당황해 하며 베르단디에게 사과하였다. 베르단디 역시 누구보다도 더 괴로울 텐데 지금의 그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제가 실언을 했군요...."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그러다가 베르단디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믿어요, 전 믿고 있어요. 케이씨는 반드시 살아 계실거에요..."

"선배....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그 때 핫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녀 역시 이미 희망을 잃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케이 선배는 이미....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베르단디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 다음 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베르단디는 핫세를 설득하듯이 간절하게 말했다.

"희망을 잃어선 안돼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케이씨를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젠 더 못 참겠어요!"

그 순간 핫세가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깜짝 놀란 베르단디는 핫세에게서 떨어졌다.

"이젠 더 못 참겠다고요! 벌써 1년이에요.... 1년 동안 이런 좁은 곳에서 벌벌 떨며 갇혀 지내는 거 이젠 정말 지긋지긋 하다고요. 엄마, 아빠, 친구들.... 모두 다 보고 싶어요. 바깥바람도 쐬고 싶고 태양도 보고 싶어요. 이럴 바엔 차라리 크로노스 통제국에 자수하고 싶어요! 난....난....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내가...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해요!!"

핫세는 그간 쌓인 울분을 베르단디에게 폭발하였다. 베르단디는 잔뜩 웅크리고 있는 핫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달랬다.

"조금만 더 참아요, 우리.... 그러면 언젠가 바깥세상도 맘대로 나갈 수 있고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선배는 여신이잖아요! 여신이니까! 언제든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언제든지 보고 싶은 사람, 가서 만나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난...!"

그 순간 핫세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베르단디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런 베르단디를 보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베르단디는 울먹이며 간신히 말을 하였다.

"지금...지금 제가 가장....보고 싶은 사람은......케이씨에요....."

거기까지 말한 베르단디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핫세는 자기가 베르단디에게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뭐라 사과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고개를 파묻고 울기만 하였다. 울드가 베르단디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달랬다. 그 순간 방 한쪽 구석에 있던 스쿨드가 베르단디에게 매달렸다. 스쿨드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언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 우린 할 만큼 했잖아! 기다릴 만큼 기다렸잖아!"

"스쿨드!"

울드가 서둘러 스쿨드를 말리려고 했지만 스쿨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베르단디는 울면서 그저 듣기만 하였다.

"나 무섭단 말이야! 언제 조아노이드들이 쳐들어 올까봐 무섭단 말이야! 좁은 방안도 지겹고 이 답답한 공기도 못 참겠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자! 응?"

베르단디는 스쿨드를 품에 안았다. 스쿨드는 베르단디의 품 안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베르단디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스쿨드에게 말했다.

"...그럼 스쿨드... 일단 너 만이라도 천상계로....."

"싫어! 나 언니랑 같이가 아니면 안가!!"

스쿨드는 베르단디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스쿨드는 베르단디의 이런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명확해졌다. 가이버는 전신을 잃어도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능력이 대단하다. 그러나 1년씩이나 흘렀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건 이미 틀렸다는 뜻이 분명했다. 스쿨드가 보기에는 베르단디는 지금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걸로 밖에는 안 보였다. 더 참을 수 없게 된 스쿨드는 그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케이는 죽었어! 죽었단 말이야!!"

"제발 그만해!!!!"

갑자기 베르단디가 발작을 일으키듯이 소리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베르단디의 모습에 모두들 말을 잊었다.

"...! ....으..으흐흑!!!"

그 순간 스쿨드가 울면서 현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말릴 틈도 없었다. 스쿨드가 뛰쳐나가는 와중에도 베르단디는 하염없이 울기만 하였다.





*******************************





"흑...! 흐흑....!!"

한참을 달려 나온 스쿨드는 강가의 풀밭에 주저앉아 한참 흐느끼고 있었다. 함부로 바깥에 나가면 위험하다는 생각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이런 생활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벌써 1년, 그 동안 숨조차 함부로 내쉬지 못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슴 졸이며 숨어 지내왔다. 좁은 방 안에서 멍하니 TV나 보면서, 가끔 메구미가 사다주는 만화나 보면서 생활하는 건 이제 넌덜머리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끔찍했다. 아직 어린 스쿨드에게는 이런 생활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싫어....! 이제...이젠 이런 생활 같은 거....더는 못하겠어...!'

크로노스의 조아노이드가 들이닥칠까 봐 가슴 졸이며 사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요 1년 동안 스쿨드는 밤마다 조아노이드가 들이닥칠까 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푹 자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진작 미쳐 버렸을 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천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스쿨드?!"

그 때 누군가가 스쿨드를 알아보았다. 깜짝 놀란 스쿨드는 울다 말고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스쿨드는 함부로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혹시나 크로노스의 조직원이 나를 알아본 걸까? 스쿨드는 두려워하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아주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역시 스쿨드구나!!"

"세...센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 서 있던 건 센다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벼운 옷차림에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자전거를 타고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미나카미 산으로 납치 되간 이후 1년만에야 비로소 이렇게 만난 것이다. 그 동안 보고 싶었어도 볼 수가 없던 센다를 보게 되자 스쿨드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흐흑...."

"스쿨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왜 울어?"

"으아앙! 센다!!"

스쿨드는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센다의 품에 안겼다. 스쿨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센다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잠시 당황하였지만 이내 스쿨드를 살며시 안아주며 달래기 시작했다. 스쿨드는 그렇게 한동안 센다를 안은 채 계속해서 울기만 하였다.




*******************************




"이제 좀 괜찮아?"

".....응. 미안해..."

"아니, 뭘 이정도 가지고....."

한참을 울던 스쿨드는 이제 좀 진정이 됐는지 눈물을 그치고 센다의 품에서 떨어졌다. 스쿨드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었다. 물론 그건 센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좀 부끄러운 듯 각자 먼 산만 보고 있었다. 저녁놀도 거의 지고 이젠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스쿨드. 보고 싶었어..."

뭔가 분위기 전환을 하려고 센다가 여전히 먼 산만 보는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스쿨드의 얼굴은 더욱 더 빨개졌다. 센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듣는 스쿨드 입장에서는 부끄러워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센다는 계속해서 더듬거려가며 말을 하였다.

"그..그동안 어디 있었어? 절에 찾아갔어도 아무도...없던데...."

1년 동안이나 방치된 타력본원사는 이제 거의 폐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안에 있던 생활도구들은 크로노스가 들이 닥쳐서 거의 다 쓸어가버렸다. 이젠 사람이 살던 흔적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가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불량배들이 들이닥쳐서 약이나 본드를 흡입하는 등의 질 나쁜 짓이나 하는 곳으로 변해 버렸다. 물론 크로노스가 세상을 장악한 이후로 민생치안에 전력을 기울여서 요 근래에는 그런 놈들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됐지만 주변 주민들의 그 절에 대한 평판은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비록 일부의 의견이지만 철거를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까지 오갈 정도였다.

스쿨드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동안의 일을 전부 센다에게 말해줘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센다가 이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잘못하면 센다까지 이 일에 끌어들일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스쿨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만 푹 숙였고 센다는 그런 스쿨드의 반응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니?"

그 때 순찰 중이던 순경 두 명이 스쿨드와 센다에게 말을 걸어왔다. 순경들을 본 스쿨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경찰들은 거의 전부다 크로노스에서 파견한 조직원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스쿨드는 행여나 이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센다 역시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해 하였다. 경찰들은 계속해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집에 안가고 여기서 뭐하는 거니?"

"혹시 길 잃은 거니?"

"에..그...그게 아니라...."

센다가 순경들과 얘기하는 동안 스쿨드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얼마 못 가 잡힐게 뻔했고 무엇보다 센다만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스쿨드는 순경들이 제발 그냥 가주기만을 속으로 계속해서 빌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과는 반대로 순경들은 이번엔 스쿨드에게 주목하였다.

"얘, 넌 왜 그러고 있니? 어디 아프니?"

스쿨드는 흠칫 놀랐다. 고개를 들면 저들이 자신을 금방 알아볼 것만 같았다. 순경들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만 스쿨드는 그대로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순경들은 집요하게 스쿨드에게 말을 걸었다. 결국 순경 한명이 기어코 스쿨드의 고개를 강제로 들게 하였다. 스쿨드의 안색은 대번에 창백해 졌다. 그 순경은 그냥 스쿨드의 이마에 손을 짚고 열을 재어보려는 것이었지만 스쿨드에게는 더 없이 엄청난 공포였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어디 불편하니?"

스쿨드는 맹렬히 고개를 젓고는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순경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 하였다.

"아무튼, 너희들 집이 어디니? 둘이서만 가게 할 수는 없으니 우리가 바래다줄게."

순경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스쿨드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지금은 저들이 자신을 모르는 것 같지만 자칫 잘못하면 정체가 폭로돼서 스쿨드 자신은 물론 센다와 베르단디들까지 모두 위험해 질 수 있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위기였다. 어떻게 해서든 이들이 의심하지 못하게 하면서 떨어트려놔야 하는데 스쿨드로서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었다.

"아! 너희들 여기 있었구나!!"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경들과 센다, 스쿨드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메구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화가 잔뜩 나 있는 표정으로 센다와 스쿨드에게 말했다.

"너희들 좀 꾸짖었다고 지금까지 싸돌아다니면 어떡해!! 삼촌이랑 외숙모가 걱정하고 계셔!"

그렇게 말하면서 메구미는 둘의 손을 붙잡고 그 자리를 빠져 나오려 하였다. 그 때 어리둥절해 있던 순경들이 메구미에게 말을 걸었다.

"저....가족이십니까?"

"네, 사촌 누나에요. 얘들이 말썽 좀 피우기에 외숙모가 혼 좀 냈더니 삐져가지고는 아직까지 안 들어오고 있잖아요! 그래서 찾으러 나온 거라고요! 나 참, 오랜만에 외숙모 집에 놀러 왔는데 내가 이게 뭔 꼴이람. 하여간 애들이란 정말...."

메구미의 속사포같은 말을 들으며 경찰들은 어안이 벙벙해 졌다. 그건 스쿨드와 센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영문을 알 리 없는 센다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 사촌 누나인 것 마냥 행동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스쿨드의 반응도 수상하고 왠지 여기서 함부로 말했다간 뭔가 큰일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메구미는 순경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둘을 막무가내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자! 그만 돌아가자. 히카루, 사쿠라!"

히카루? 사쿠라? 그건 또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스쿨드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채로 메구미를 순순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센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냥 둘을 순순히 따라가는 게 좋을 듯싶었기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눕혀놓은 자전거를 끌고 따라갔다. 세 사람은 빠른 속도로 순경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순경들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어져가는 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참 내, 요즘 애들은 왜들 저러는지...."

한 명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아이들이 순순히 따라가는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진짜 친척사이 같았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저 여자애의 얼굴, 어딘가 상당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마와 양 볼에 있는 파란 문양이 특히 신경 쓰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그 문양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하려 하였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어이, 왜 그래?"

"아니...아까 저 여자애...어디선가 본 기억이.....어디선가...........아!!!"

"뭐 생각났어?"

"생각났어!! 수배 중이던 여신들 중 한명이야!!"

그 말에 그 역시 깜짝 놀랐다. 여신?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수배가 해제됐던 여성들 얼굴이 생각났다. 특히 여신들이라 하던 그 세 자매는 상당한 미인들이어서 퍽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1년 동안이나 소식들이 없기에 미나카미 산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하늘나라로 돌아간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 있었단 말인가!

"잘 못 본거 아냐?"

"틀림없어! 얼굴의 그 문양, 얼굴 생김새, 수배 전단에 나왔던 그 모습 그대로라고!"

사람 얼굴 기억 잘하기로 경찰서 내에서 알아주는 그였으니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 여신들 중 막내라는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몰랐다. 이들 여신들은 크로노스의 일급 수배자들, 일망타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아까 세 사람을 몰래 미행하기로 하고 다른 한 명은 지원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정하고 두 사람은 즉시 갈라져서 행동하였다. 스쿨드를 알아본 순경은 즉시 메구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으아악!!"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동료 순경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가 고개를 돌리자 동료가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움켜 잡힌 채 괴로워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동료를 붙잡고 있는 괴한에게 소리 쳤다.

"무슨 짓이냐! 당장 놔줘!!"

그러나 그는 오히려 씩 웃으면서 손아귀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동료 순경은 숨이 막히는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꿈틀대고만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잔뜩 긴장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들은 조아노이드이다. 전투 형태로 변신하지 않아도 완력은 어지간한 보통 사람들 보다 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아귀를 뿌리치지 못할 정도라면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전투 형태로의 변신을 시도하였다.

"이 놈이!! 감히...!"

-콰악!

"커헉!!"

그 순간 그 괴한의 팔이 길게 늘어났다.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식간에 목을 잡혀 버렸다. 그는 괴로워하며 그 손을 뿌리치려 하였지만 완력이 상상이상으로 강했다. 조아노이드로의 변신을 시도했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변신이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의식도 점점 흐려져만 갔다. 팔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조제된 사람을 힘으로 제압할 정도라니,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이윽고 의식을 잃었다.

-슈우욱, 슈욱

순경 두 명을 제압한 괴한은 씩 웃었다. 그의 양 손에 붙잡힌 순경들의 얼굴이 점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두 사람은 그 괴한에게 완전히 흡수돼 버렸다. 그 자리에는 순경들이 입고 있던 근무복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왼쪽 뺨에 커다란 흉터가 나 있는 그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그 자리에서 웃었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강가에서 도망치듯이 걸어온 세 사람은 인근 어린이 놀이터에서 잠시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 순경들이나 크로노스 통제국 요원들이 쫓아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다행히 스쿨드를 못 알아본 것 같았다. 한숨 돌리면서 메구미와 스쿨드는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센다에게 말해 주었다. 센다는 이제야 모든 걸 납득할 수 있었다. 스쿨드의 실종에서 부터 아까 전에 메구미의 행동까지 전부다.

"미안해... 너 만은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스쿨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센다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센다는 고개를 저었다.

"당치 않아! 난 그런 건 상관없어. 네가 무사하단 것만으로도 기쁜걸."

"센다...."

센다의 말에 스쿨드는 감격해서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메구미도 대견스럽다는 듯 센다를 바라보았다. 센다의 두 주먹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센다의 표정에는 어느새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난....난 크로노스를 용서할 수가 없어! 크로노스 때문에 삼촌이 돌아가셨으니까!"

센다의 말에 스쿨드와 메구미는 깜짝 놀랐다. 센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센다의 삼촌은 경찰이었다. 제압전이 벌어졌던 1년 전 여느 때처럼 순찰을 돌던 그는 본부의 다급한 무전을 받았다. 경찰 본부 내에 괴물이 나타났으니 즉시 본부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었다. 그는 명령대로 즉시 본부로 달려갔지만 무장이라고는 38구경 권총 한 자루였던 그로서는 조아노이드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동료 경관들과 힘을 합쳐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경찰 본부가 완전히 제압당하는걸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현장에서 조아노이드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센다의 집안은 그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미망인이 된 센다의 외숙모는 그 때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유산하고 말았다. 거기에 더해 극도의 대인 기피증도 생기고 말았다. 지금은 정신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었다. 센다의 어머니 역시 남동생을 그렇게 잃자 우울증에 빠져 버렸다. 센다 역시 자신을 너무나 귀여워 해줬던 삼촌을 그렇게 보내자 슬픔에 잠겨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 때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센다의 집안에는 아직도 웃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센다는 가급적 집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센다의 얘기를 들은 스쿨드와 메구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때 센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참! 생각났다! 스쿨드!"

"으..응?"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 너한테 줄게 있어. 금방 갔다 올께!"

그렇게 말하고는 센다는 자전거를 몰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메구미와 스쿨드는 멍한 표정으로 빠르게 사라져 가는 센다를 보고만 있었다.




*******************************




이십분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센다가 다시 돌아왔다. 혹시나 크로노스 조직원이 자신들을 볼까봐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메구미와 스쿨드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센다는 자전거 뒤 좌석에다 뭔가를 실고 왔다. 그것은 종이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너 보면 이거 전해주려고 가지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센다는 스쿨드에게 종이봉투를 넘겼다. 봉투 안을 들여다본 스쿨드는 깜짝 놀랐다.

"밤페이! 시글!"

봉투 안에는 밤페이와 시글의 머리부품이 들어 있었다. 1년 전 타력본원사에서 크로노스와 싸웠을 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던 둘이었는데 센다가 그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스쿨드가 도대체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었냐고 센다에게 물었다.

"그 날 절에 너 보려고 찾아 갔었는데 절은 온통 엉망에다가 이 둘은 부서진 채 나뒹굴고 있더라고. 그래서 일단 머리만이라도 챙겨놓고 있었어. 그 외에도 흩어진 부품들을 줍긴 했지만 다 줍진 못했어."

타력본원사에서 밤페이와 시글이 파괴된 이후 바로 납치된 스쿨드는 이 둘을 그 동안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유적 기지에서 순간 이동돼 왔을 당시 절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복원 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품인 기억 메모리가 담겨 있는 머리 부분을 찾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이 후 크로노스의 감시를 피해서 숨어 있느라 절에 다시 가보질 못한 스쿨드는 사실상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는데 설마 센다가 찾아놨을 줄이야. 밤페이와 시글을 다시 만난 스쿨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전신은 완전히 파괴 돼 버린 둘이었지만 머리가 온전히 남아있다면 다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런 모습으로 만났지만 스쿨드는 정말로 기뻤다. 이 둘 역시 기계라고는 하지만 소중한 '가족'이었으니까.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스쿨드는 울먹이며 센다에게 말했다.

"고마워....정말 고마워, 센다...."

"헤헷! 뭘 이런 거 가지고."

스쿨드는 그 둘의 머리를 꼭 끌어안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메구미는 그런 센다를 대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센다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그럼 나 가볼께,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셔서 말이야."

"응... 조심해 가."

"저기...스쿨드."

"응? 왜?"

"크로노스.... 꼭 물리칠 수 있겠지? 그 놈들... 반드시 벌 받겠지?"

그 말에 스쿨드는 잠시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메구미가 웃으면서 센다에게 말했다.

"물론! 이제 곧 정의의 용사가 돌아와서는 그 놈들을 물리칠 꺼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자신감 넘치는 메구미의 대답에 스쿨드 역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찬 스쿨드의 표정을 본 센다의 표정은 대번에 밝아졌다. 그는 작별인사를 하고는 힘껏 페달을 밟으며 달려갔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다음에 꼭....."




*******************************




-부르릉!

메구미의 바이크는 이윽고 은신처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주위가 어두워서 누가 이들을 봐도 쉽게 알아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스쿨드는 사이드카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시동을 끈 메구미가 조용히 스쿨드를 불렀다.

"스쿨드."

"응?"

"나 말이야, 케이가 죽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

그 말에 스쿨드는 고개를 들어 메구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슬픈 그늘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꿈에 한 번도 안 나타났거든. 거 왜 있잖아, 사람은 죽어서 가족의 꿈속에 나타나서 하고픈 말을 한다는 것 말이야. 그런데 내 꿈속에 안 나타났으니 케이는 안 죽은 거지. 안 그래?"

물론 전혀 근거 없는 소리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 반드시 이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꿈을 꾸는 경우도 많다. 스쿨드는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메구미를 바라보았다. 메구미는 여전히 웃고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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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더경님의 댓글

베이더경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흠 사요코양은 뭔가를 따르고 있다? 누군가와 계약이라도 한 것인가? [기대 만빵!]

저런 침략자라면 두손,두발 다 들고 어서 오세요!! 라고 외칠 자신 있음.[조아노이드 개조랑 인명학살만 빼면.]

그 외에 여러 헤프닝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상황이 절망적이다! 로군요.

여하튼 케이들의 건투를 빌며 건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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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버님의 댓글

가이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크로노스의 작전은 우리의 다쓰 베이더경께도 제대로 먹혀 들어갔군요. ^^;;; 포스의 힘만으론 무리인가...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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