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림바크의 세계정복 01 ★ 골렘은 우리들 곁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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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림바크의 세계정복
- 당신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한다면, 또는
당신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
- 01 ★ 골렘은 우리들 곁에 있어 -
어렸을 때 TV를 보고 있자면, 아버지가 세상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는 투로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특히 9번 채널의 저녁 9시 시간에 하고 있던 프로를 볼 때는 더욱 그랬다. 그 때의 나는 학교 선생님께 맞지 않기 위해 구구단을 열심히 외우고 있던 나이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그 시간마다 불만을 내뱉는지 모를 수밖에. 아니지, 솔직히는 그런 불만을 내놓는 아버지가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9시가 되면 딱딱한 느낌의 옷을 차려입은 아나운서를 보는 아버지의 일과가 너무나도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번은 그게 너무나 싫은 나머지, 나는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맘대로 바꿔 버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바꾼 6번 채널을 도로 9번 채널로 돌리는 게 아닌가. 그 채널이 도대체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건지.
결국 나는 아버지가 9시 35분만 되면 나타나는 기상캐스터 누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 누나는 꽤 예뻐 보였으니까. 내가 그랬는데 아버지는 오죽했을까. 그 때는 어머니가 집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지... 음, 한 1년이 지났었을까? 그러니까 아버지는 여자가 고팠던 것일테지.
지금은 알겠다.
아버지가 고파했던 것은 여자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불만도 그 9번 채널의 9시 뉴스 때문이 아니었다.
하하하, 아버지의 그 불만을 지금 나도 느끼고 있다니. 그 망할 자식같이 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고파하는 것만 아니라면, 나도 이러고 있진 않겠지. 그런데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시험 종료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고 있던 사람은 아마 문제를 다 풀 수 없을 겁니다.”
응? 뭐라고?
기상캐스터 누나 목소리인가?
누나는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11시까지 답안지 작성을 완료해주세요.”
에에, 기상캐스터 누나가 아니지. 지금 이건... 그렇지.
먼저 문제를 다 푸는 것이 급하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 정신 차려, 필교군. 역시 지나친 공부로 몸이 피곤해 진걸까. 금방이라도 코피가 터져 나올 거 같다. 하지만 피곤하다고 해서 이 시험을 망칠 순 없어. 그러면 그간의 노력이 다 날라가 버리는 거니까. 지금은 문제를 풀어야 해.
오오, 어디보자... 다음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읽고 유럽의 평론가들이 말한 평이다. 다음 중 그 평으로 가장 적합하지...“
이런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구!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된다. 23번 문제부터 막혀버리다니.
에휴, 누군가 나타나서 제발 저 대신 풀어 주세요. 못 풀겠다고 시험 포기를 선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거이거...
나는 이 시험에 떨어지면 안 되는, 세상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괜찮아. 차근차근 읽어보고 다른 냄새가 나는 지문을 고르면 될 꺼야.’
그 이유는 이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다닐 학교에 내가 학급비 면제, 급식비 면제 해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간단히 말해서 공짜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이렇게나 후한 혜택이 주어질 학교는 이 곳 밖에 없다! 그런고로 나는 이 시험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사실 돈을 내가 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에 붙어야지 누나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지 않겠냐고.
...
우와, 그러고 보니 굉장하다.
다들 아무 말도 안하고 문제를 푸니까 샤프심 굴러가는 소리만 들린다. 운전면허 이론 시험이던 한자 능력 검정 시험이던 토익이든 간에 그런 종류의 시험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 봤음 직한 이 끔찍한 시험장의 사운드. 다들 숨을 죽이고 문제를 풀고 있는 걸까. 내가 합격하면 이런 아이들과 내신 경쟁을 벌여야겠지. 상상만 해도 숨이 터억 막힌다. 이 괴물들하고 경쟁해서 이겨낼 수 있을까. 보나마나 반 정도는 미국,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 캐나다 같은 데를 유학 하고 왔을 것이다. 아니 반은 너무 적은 숫자인가?
[드르르륵]
에?
고요했던 시험장에 나무로 된 문바닥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미안.”
마치 농구의 레이업 슛처럼 말을 ‘툭’놓는 그 두 글자의 목소리.
“어디... 지각이야 지각. 27분 남았는데 풀 수 있겠어요?”
시험 감독관이 까만 가죽 가방을 왼 손에 지고 있는 그 지각생에게 물어봤다. 이 말은 한 마디로 27분 밖에 안 남았으니까 너는 시험 보든 말든 떨어 질꺼란 말이 분명하다. 하긴 100분 중에 73분을 날려버린 것은 시험 포기나 마찬가지잖아. 누군지 몰라도 이 지각생은 자신의 게으름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한 번 날려 버리게 될 것이다.
“27분...?”
뒷문에 너무나 당당한 자태로 서있는 지각생.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고 할까. 오른 빰에 손가락 하나를 퉁하니 대고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 어느 남자라도 한 번쯤 상대해보고 싶은 도도하면서도 귀여운 타입이다.
어라? 그런데 왼쪽에 목발을 지고 있네. 왼쪽 발목에 붕대가 감겨 있다. 교통사고라도 났었던 것일까?
“시간 더 안 주는 거야?”
“학생, 정해진 규칙입니다.”
그렇지만 키는 중3 여학생치고는 작은 거 아닐까. 으음. 아아, 그건 그렇고 27분 남았다고 했잖아!
“...풀 수 있어.”
자신있게 말하는 지각생.
“학생, 이름이 뭡니까? 출석 체크를 해야 해서 말이죠.”
그러자 그 지각생이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을 말했다.
“이유키에델린. 이라고 집사가 말하랬어.”
오오, 유키에델린이라... 그런거 우리나라 호적에 등록이 가능한 이름일까? 게다가 집사까지, ‘나는 부자다!’ 이 말 일까.
아..?
아하,
으?
으으... 오지 마.
뭘 묵상하듯이 눈을 살며시 감더니 그녀는 내 옆 자리에 앉아버린다. 유키에델린이라는 이름의 소녀, 방금 그 모습은 확실히 도도하잖아. 도도해. 내 또래에 이런 분위기를 풍길 수 도 있구나. 이 소녀, 느낌이랄까 분위기 같은 것이 귀족 그 자체 같다. 아무튼 나랑 분위기가 달라서 괜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분위기만으로도 나 같은 서민을 기죽일 수 있다니. 이것이 부자들의 파워인가? 아니아니, 이건 귀족의 파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소녀를 본다면 누구나 귀족을 떠올릴 것이다. 가령 이 소녀의 머리만 봐도 귀족을 떠올릴 수 있다. 머리가 어찌나 긴지 이 소녀가 다니는 중학교에는 두발 규제라는 게 없었나? 허리까지 닿는 금빛 머리. 염색한 머리 같지는 않고. 그래도 눈동자는 까만거 같은데... 가만, 눈동자? 정말 똘망똘망하잖아. 마치 만화에서 보는 수박눈 같아.
“펜 좀 줘.”
“아, 으...응.”
펜, 이라면 샤프를 말하는 거겠지.
“B심이잖아. HB가 가장 좋은 심인데.”
그렇게 말하고는 내 소중한 제도 샤프를 받은 소녀는 어느 표정도 띄지 않은 얼굴로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야. 빌려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이렇게 무성의하게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멘트를 날려주다니.
이래서 부자들은 서민들한테 싸가지가 없다는 인식을 풍기는,
“너 내 뒷담 까고 있지? 조용히 좀 해. 시끄러워서 문제를 하나도 못 읽겠잖아.”
“이봐요. 뒤에 지각한 학생과... 유필교 학생? 아무튼 조용히 해주세요. 다른 응시생에게 방해를 주는 행위를 계속하면 퇴실 조치합니다.”
아, 아니... 부자들은 서민들한테 굉장한 존재다. 으윽. 문제나 풀어야지. 이러다가는 문제를 다 읽어보지도 못하고 퇴실당하겠어. 그런데... 나, 합격하면, 이런 부자들 사이에서 자존심에 상처 안 받고 생활할 수 있을까?
하, 문제를 풀자.
...
“오라라라, 너 필아 동생, 맞지?”
“에에? 저, 저요?”
문제를 한참 풀고 있는데, 아까는 왠 맘에 안 드는 지각생(첫인상이 도도하고 귀여워 보였다는 건 취소다!)이 시험을 방해하더니 이제는 시험 감독관이 나에게 달라 붙어버렸다.
“네. 저희 누나를 아세요?”
“그럼! 알고 말고. 너희 누나가 저번 주 숙직때 얼마나 술을 마셔댔는지...너가 피곤한 누나를 둬서 고생이 많겠구나. 너희 누나, 어떻게 이 학교의 영어 선생이 된 것인지 궁금하다니까. 이 학교는 이래뵈도 자립형 사립고라 뚜렷한 실력이 없으면 선생으로 들어오기가 쉬운게 아닌데. 요새 취업난인거 너도 알지? 그러고 보니, 너희 누나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긴 하네.”
아는 사람의 동생이라는 사실에 시험 감독관은 오래전에 만난 이웃 동생을 대하듯 나에게 대화를 늘어 놓았다. 하하하, 하긴. 우리 누나가 그렇다. 이 선생님 말씀 그대로다. 하지만 누나, 구지 밖에 나와서까지 술버릇을 보일 필요는 없잖아. 왜 나까지 이걸로 피해보게 만드냐구. 정말 누가 누나고 누가 동생인지 구별이 안 가잖아. 하지만 누나도 누나 나름대로의 즐기고 싶은 것이 있겠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없는 우리 가정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누나뿐이다. 그러기에 누나는 나에겐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버팀목이자 희망의 줄기.
“그런데 말이야.”
“네?”
“너희도 그거였어? 의외인데.”
“에? 그거라뇨?”
‘그거’라니. 뭔 소린지 못 알아먹겠다.
“아아! 너희 누나, 너를 이 학교에 재학하게 한 다음 말이야. 이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의 자녀는 학급비 면제라는 거를 이용해서 생활비를 아낄 셈이구나?”
너무나 단도적인 물음을 하십니다. 시험 감독관님. 이 사이에 누가 컨닝이라도 몰래 했으면 어떡할까요?
“그래도... 이 학교에 다닐려면 그거여야 되는데...”
“저기 죄송한데... 그 ‘그거’라는 것이 뭡니까?”
“응?”
누나 나이 또래 되는 시험 감독관이 갑자기 입가를 히죽거린다. 이건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그거’라니. 입학을 위해 필요한 학교측과 입학지망생 사이에 오고가는 촌지나 뇌물 같은 걸 말하는 걸까. 요전에 아버지가 9시 뉴스를 보면서 그랬다. 우리나라는 썩어버렸다고. 난 여기서 아버지의 그 말을 체감하고 싶지 않다. 나와 누나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옳지. 마지막 문제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왠... 마지막 문제?
그냥 문제나 얌전히 풀어야 겠다.
“3분 남았습니다. 이제 슬슬 답안지 작성을 끝내주세요. 답안지 교체는 불가능 하다는 것 알고 있죠?”
다행스럽게 딱 맞춰서 문제를 다 풀었다. 이제 1문제만이 내 앞길을 가로 막고 있다. 어쩌면 이 시험, 붙을지도 모르겠는데? 예감이 좋다고 할까. 오늘의 정신적인 컨디션이 좋은 게 그간 공부한 성과가 드러나는 거 같다고나 할까. 어제까지 새벽 3시라는 타임을 잠잘 시간으로 놓고 공부한 나에게 ‘합격’이라는 성과가 주어지지 않으면 섭하지. 마지막 문제만 풀면 시험도 끝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방심은 안 된다.
[30. 자신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표상을 나타내시오. (단, 이 문제에서 응시자가 나타내는 표상은 입학시 학교 측이 보관하게 됩니다.)]
...
처음에는 잘못 읽은 게 아닌가 해서 문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았다. 난 문제를 잘못 읽어 답을 2개 골라야 할 것을 1개 고른다거나 ‘아닌 것’을 고르는 것을 ‘옳은 것’을 골라 점수 몇 점를 헌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이번에는 눈도 한 번 비벼보고. 그 다음 읽을 때는 뺨까지도 꼬집어 보았다. 으오, 이거 꿈 아닌데.
이 문제, 뭐야?
응? 누나?
"나쁜 할아버지. 가만 안 둘꺼야...우으으."
금빛 머리의 소녀는 20초 전 부터 계속 울 것처럼 중얼중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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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에 써온 글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이 있는데요. 문단간의 줄 띄어쓰기를 없앴습니다. 원래 순수 소설의 경우 문단간의 줄 띄어쓰기(엔터 신공)은 없으니... 읽기에는 다소 불편할지 몰라도 일단은 한번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면 더 없이 좋을일이 없겠습니다. 게시물에서 제 글을 눌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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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림바크의 세계정복
- 당신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한다면, 또는
당신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
- 01 ★ 골렘은 우리들 곁에 있어 -
어렸을 때 TV를 보고 있자면, 아버지가 세상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는 투로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특히 9번 채널의 저녁 9시 시간에 하고 있던 프로를 볼 때는 더욱 그랬다. 그 때의 나는 학교 선생님께 맞지 않기 위해 구구단을 열심히 외우고 있던 나이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그 시간마다 불만을 내뱉는지 모를 수밖에. 아니지, 솔직히는 그런 불만을 내놓는 아버지가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9시가 되면 딱딱한 느낌의 옷을 차려입은 아나운서를 보는 아버지의 일과가 너무나도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번은 그게 너무나 싫은 나머지, 나는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맘대로 바꿔 버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바꾼 6번 채널을 도로 9번 채널로 돌리는 게 아닌가. 그 채널이 도대체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건지.
결국 나는 아버지가 9시 35분만 되면 나타나는 기상캐스터 누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 누나는 꽤 예뻐 보였으니까. 내가 그랬는데 아버지는 오죽했을까. 그 때는 어머니가 집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지... 음, 한 1년이 지났었을까? 그러니까 아버지는 여자가 고팠던 것일테지.
지금은 알겠다.
아버지가 고파했던 것은 여자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불만도 그 9번 채널의 9시 뉴스 때문이 아니었다.
하하하, 아버지의 그 불만을 지금 나도 느끼고 있다니. 그 망할 자식같이 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고파하는 것만 아니라면, 나도 이러고 있진 않겠지. 그런데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시험 종료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고 있던 사람은 아마 문제를 다 풀 수 없을 겁니다.”
응? 뭐라고?
기상캐스터 누나 목소리인가?
누나는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11시까지 답안지 작성을 완료해주세요.”
에에, 기상캐스터 누나가 아니지. 지금 이건... 그렇지.
먼저 문제를 다 푸는 것이 급하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 정신 차려, 필교군. 역시 지나친 공부로 몸이 피곤해 진걸까. 금방이라도 코피가 터져 나올 거 같다. 하지만 피곤하다고 해서 이 시험을 망칠 순 없어. 그러면 그간의 노력이 다 날라가 버리는 거니까. 지금은 문제를 풀어야 해.
오오, 어디보자... 다음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읽고 유럽의 평론가들이 말한 평이다. 다음 중 그 평으로 가장 적합하지...“
이런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구!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된다. 23번 문제부터 막혀버리다니.
에휴, 누군가 나타나서 제발 저 대신 풀어 주세요. 못 풀겠다고 시험 포기를 선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거이거...
나는 이 시험에 떨어지면 안 되는, 세상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괜찮아. 차근차근 읽어보고 다른 냄새가 나는 지문을 고르면 될 꺼야.’
그 이유는 이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다닐 학교에 내가 학급비 면제, 급식비 면제 해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간단히 말해서 공짜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이렇게나 후한 혜택이 주어질 학교는 이 곳 밖에 없다! 그런고로 나는 이 시험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사실 돈을 내가 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에 붙어야지 누나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지 않겠냐고.
...
우와, 그러고 보니 굉장하다.
다들 아무 말도 안하고 문제를 푸니까 샤프심 굴러가는 소리만 들린다. 운전면허 이론 시험이던 한자 능력 검정 시험이던 토익이든 간에 그런 종류의 시험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 봤음 직한 이 끔찍한 시험장의 사운드. 다들 숨을 죽이고 문제를 풀고 있는 걸까. 내가 합격하면 이런 아이들과 내신 경쟁을 벌여야겠지. 상상만 해도 숨이 터억 막힌다. 이 괴물들하고 경쟁해서 이겨낼 수 있을까. 보나마나 반 정도는 미국,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 캐나다 같은 데를 유학 하고 왔을 것이다. 아니 반은 너무 적은 숫자인가?
[드르르륵]
에?
고요했던 시험장에 나무로 된 문바닥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미안.”
마치 농구의 레이업 슛처럼 말을 ‘툭’놓는 그 두 글자의 목소리.
“어디... 지각이야 지각. 27분 남았는데 풀 수 있겠어요?”
시험 감독관이 까만 가죽 가방을 왼 손에 지고 있는 그 지각생에게 물어봤다. 이 말은 한 마디로 27분 밖에 안 남았으니까 너는 시험 보든 말든 떨어 질꺼란 말이 분명하다. 하긴 100분 중에 73분을 날려버린 것은 시험 포기나 마찬가지잖아. 누군지 몰라도 이 지각생은 자신의 게으름으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한 번 날려 버리게 될 것이다.
“27분...?”
뒷문에 너무나 당당한 자태로 서있는 지각생.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고 할까. 오른 빰에 손가락 하나를 퉁하니 대고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 어느 남자라도 한 번쯤 상대해보고 싶은 도도하면서도 귀여운 타입이다.
어라? 그런데 왼쪽에 목발을 지고 있네. 왼쪽 발목에 붕대가 감겨 있다. 교통사고라도 났었던 것일까?
“시간 더 안 주는 거야?”
“학생, 정해진 규칙입니다.”
그렇지만 키는 중3 여학생치고는 작은 거 아닐까. 으음. 아아, 그건 그렇고 27분 남았다고 했잖아!
“...풀 수 있어.”
자신있게 말하는 지각생.
“학생, 이름이 뭡니까? 출석 체크를 해야 해서 말이죠.”
그러자 그 지각생이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을 말했다.
“이유키에델린. 이라고 집사가 말하랬어.”
오오, 유키에델린이라... 그런거 우리나라 호적에 등록이 가능한 이름일까? 게다가 집사까지, ‘나는 부자다!’ 이 말 일까.
아..?
아하,
으?
으으... 오지 마.
뭘 묵상하듯이 눈을 살며시 감더니 그녀는 내 옆 자리에 앉아버린다. 유키에델린이라는 이름의 소녀, 방금 그 모습은 확실히 도도하잖아. 도도해. 내 또래에 이런 분위기를 풍길 수 도 있구나. 이 소녀, 느낌이랄까 분위기 같은 것이 귀족 그 자체 같다. 아무튼 나랑 분위기가 달라서 괜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분위기만으로도 나 같은 서민을 기죽일 수 있다니. 이것이 부자들의 파워인가? 아니아니, 이건 귀족의 파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소녀를 본다면 누구나 귀족을 떠올릴 것이다. 가령 이 소녀의 머리만 봐도 귀족을 떠올릴 수 있다. 머리가 어찌나 긴지 이 소녀가 다니는 중학교에는 두발 규제라는 게 없었나? 허리까지 닿는 금빛 머리. 염색한 머리 같지는 않고. 그래도 눈동자는 까만거 같은데... 가만, 눈동자? 정말 똘망똘망하잖아. 마치 만화에서 보는 수박눈 같아.
“펜 좀 줘.”
“아, 으...응.”
펜, 이라면 샤프를 말하는 거겠지.
“B심이잖아. HB가 가장 좋은 심인데.”
그렇게 말하고는 내 소중한 제도 샤프를 받은 소녀는 어느 표정도 띄지 않은 얼굴로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말이야. 빌려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이렇게 무성의하게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멘트를 날려주다니.
이래서 부자들은 서민들한테 싸가지가 없다는 인식을 풍기는,
“너 내 뒷담 까고 있지? 조용히 좀 해. 시끄러워서 문제를 하나도 못 읽겠잖아.”
“이봐요. 뒤에 지각한 학생과... 유필교 학생? 아무튼 조용히 해주세요. 다른 응시생에게 방해를 주는 행위를 계속하면 퇴실 조치합니다.”
아, 아니... 부자들은 서민들한테 굉장한 존재다. 으윽. 문제나 풀어야지. 이러다가는 문제를 다 읽어보지도 못하고 퇴실당하겠어. 그런데... 나, 합격하면, 이런 부자들 사이에서 자존심에 상처 안 받고 생활할 수 있을까?
하, 문제를 풀자.
...
“오라라라, 너 필아 동생, 맞지?”
“에에? 저, 저요?”
문제를 한참 풀고 있는데, 아까는 왠 맘에 안 드는 지각생(첫인상이 도도하고 귀여워 보였다는 건 취소다!)이 시험을 방해하더니 이제는 시험 감독관이 나에게 달라 붙어버렸다.
“네. 저희 누나를 아세요?”
“그럼! 알고 말고. 너희 누나가 저번 주 숙직때 얼마나 술을 마셔댔는지...너가 피곤한 누나를 둬서 고생이 많겠구나. 너희 누나, 어떻게 이 학교의 영어 선생이 된 것인지 궁금하다니까. 이 학교는 이래뵈도 자립형 사립고라 뚜렷한 실력이 없으면 선생으로 들어오기가 쉬운게 아닌데. 요새 취업난인거 너도 알지? 그러고 보니, 너희 누나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긴 하네.”
아는 사람의 동생이라는 사실에 시험 감독관은 오래전에 만난 이웃 동생을 대하듯 나에게 대화를 늘어 놓았다. 하하하, 하긴. 우리 누나가 그렇다. 이 선생님 말씀 그대로다. 하지만 누나, 구지 밖에 나와서까지 술버릇을 보일 필요는 없잖아. 왜 나까지 이걸로 피해보게 만드냐구. 정말 누가 누나고 누가 동생인지 구별이 안 가잖아. 하지만 누나도 누나 나름대로의 즐기고 싶은 것이 있겠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없는 우리 가정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누나뿐이다. 그러기에 누나는 나에겐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버팀목이자 희망의 줄기.
“그런데 말이야.”
“네?”
“너희도 그거였어? 의외인데.”
“에? 그거라뇨?”
‘그거’라니. 뭔 소린지 못 알아먹겠다.
“아아! 너희 누나, 너를 이 학교에 재학하게 한 다음 말이야. 이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의 자녀는 학급비 면제라는 거를 이용해서 생활비를 아낄 셈이구나?”
너무나 단도적인 물음을 하십니다. 시험 감독관님. 이 사이에 누가 컨닝이라도 몰래 했으면 어떡할까요?
“그래도... 이 학교에 다닐려면 그거여야 되는데...”
“저기 죄송한데... 그 ‘그거’라는 것이 뭡니까?”
“응?”
누나 나이 또래 되는 시험 감독관이 갑자기 입가를 히죽거린다. 이건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그거’라니. 입학을 위해 필요한 학교측과 입학지망생 사이에 오고가는 촌지나 뇌물 같은 걸 말하는 걸까. 요전에 아버지가 9시 뉴스를 보면서 그랬다. 우리나라는 썩어버렸다고. 난 여기서 아버지의 그 말을 체감하고 싶지 않다. 나와 누나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옳지. 마지막 문제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왠... 마지막 문제?
그냥 문제나 얌전히 풀어야 겠다.
“3분 남았습니다. 이제 슬슬 답안지 작성을 끝내주세요. 답안지 교체는 불가능 하다는 것 알고 있죠?”
다행스럽게 딱 맞춰서 문제를 다 풀었다. 이제 1문제만이 내 앞길을 가로 막고 있다. 어쩌면 이 시험, 붙을지도 모르겠는데? 예감이 좋다고 할까. 오늘의 정신적인 컨디션이 좋은 게 그간 공부한 성과가 드러나는 거 같다고나 할까. 어제까지 새벽 3시라는 타임을 잠잘 시간으로 놓고 공부한 나에게 ‘합격’이라는 성과가 주어지지 않으면 섭하지. 마지막 문제만 풀면 시험도 끝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방심은 안 된다.
[30. 자신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표상을 나타내시오. (단, 이 문제에서 응시자가 나타내는 표상은 입학시 학교 측이 보관하게 됩니다.)]
...
처음에는 잘못 읽은 게 아닌가 해서 문제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았다. 난 문제를 잘못 읽어 답을 2개 골라야 할 것을 1개 고른다거나 ‘아닌 것’을 고르는 것을 ‘옳은 것’을 골라 점수 몇 점를 헌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이번에는 눈도 한 번 비벼보고. 그 다음 읽을 때는 뺨까지도 꼬집어 보았다. 으오, 이거 꿈 아닌데.
이 문제, 뭐야?
응? 누나?
"나쁜 할아버지. 가만 안 둘꺼야...우으으."
금빛 머리의 소녀는 20초 전 부터 계속 울 것처럼 중얼중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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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에 써온 글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이 있는데요. 문단간의 줄 띄어쓰기를 없앴습니다. 원래 순수 소설의 경우 문단간의 줄 띄어쓰기(엔터 신공)은 없으니... 읽기에는 다소 불편할지 몰라도 일단은 한번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면 더 없이 좋을일이 없겠습니다. 게시물에서 제 글을 눌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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