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기억 - 그가 소녀를 만나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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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타입문네 이벤트용으로 쓴거구요
나름대로 구상중인 판타지의 외전격입니다.
한데 생각했던 것만큼의 퀄리티가 안 나옵니다 ㅠㅠ..
이벤트에 보낼 때는 좀더 정리할 생각입니다만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죠..
뭐 어차피 상은 포기고 경험삼아 보내는거니...
제목은 생각해보고 바꿀지도 모릅니다.
“크윽.”
따가운 햇살이 내 눈을 꿰뚫는다.
며칠만에 보는 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뒤돌아보니 내가 빠져나왔던 안개덮인 숲이 보인다.
드래곤의 저주로 인해 영원히 걷히지 않을 안개가 덮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유래는 아무도 모른다.
단순한 탐험심에 이 지긋지긋한 숲에 발을 들인게 화근이었다. 그 후로 며칠간 이 숲속을 헤매이며 넘어진 횟수가 8번, 긁힌 횟수가 14번, 부딪힌 횟수가 5번이다.
그렇게 빠져나온 곳은 풀 한포기 없는 암석지대였다.
이 곳은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황무지였다. 나는 아마 말라죽거나 굶어죽고 말겠지.
체념하며 근처의 바위에 앉아 있는데 멀리로 까마귀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까마귀가 시체 주변에 몰리는 것일 터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근처로 다가갔을 때 나는 경악했다.
그것들은 새가 아니었다.
거대한 파충류가, 날개달린 파충류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박쥐의 날개와도 같이 피막이 덮힌 두터운 날개 두쌍을 등에 매단 채 그 검은 괴물은 날고 있었다. 흑빛의 비늘이 촘촘히 박힌 몸뚱이는 거의 10m에 달했고 파충류 특유의 거대한 주둥이가 머리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 거대한 괴물들은 산을 통째로 씹어삼킬듯한 거대한 입을 쩌억 벌린 채 조그만 소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는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괴물들의 속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녀는 지쳐 있었고 괴물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이윽고 한 놈이 소녀의 머리통을 향해 그 시뻘건 입을 쫘악 벌렸다.
그 순간 위에서 날아온 불덩이에 맞고 놈은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녀석의 주위로 주변의 괴물들이 모여 허겁지겁 이빨을 들이댔다.
-콰드득
-우드드득
뼈가 갈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금세 괴물의 시신은 사라져 버렸다.
다시 소녀에게 달려들던 녀석도 마찬가지로 동료들의 밥이 되어 버렸다.
놈들은 다른 녀석들이 소녀에게 달려들면 불덩이를 쏴대다가도 기회만 보이면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고 다투는 사자떼와도 같았다.
'이대로라면 저 소녀는 죽는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소녀의 앞까지 달려가서 잠시 기다렸다가 소녀가 근처에 오자 거칠게 안아들었다.
분명히 놀랐겠지. 하지만 설명할 시간이 없다.
달렸다. 아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때때로 날아오는 불덩이와 괴물들의 주둥이를 피해가며 계속 발을 놀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내 앞엔 벽이 떡하니 서 있었다.
“유인.. 당한건가? 저 괴물들 우릴 가지고 놀았군.”
괴물들은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 넣은 채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가 먼저 먹기 위해 순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친 놈은 뒤의 녀석에게 잡아먹혔다.
이걸로 시간은 벌었지만 결국엔 죽게 될 것이다.
“여기..”
“응?”
“여기...”
내 뒤에 서 있던 아이가 옆에서 내 옷을 당기며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구멍!!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좁은 구멍이 암석의 틈새로 나 있었다.
괴물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조금씩 구석으로 다가갔다.
-크륵? 크르르륵?
아이가 반쯤 들어갔을 때 한 놈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두 마리 먹이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 때에서야 도망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괴물들이 이 쪽으로 달려들었다.
“칫..”
소녀를 안쪽으로 밀어넣으며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쾅!! 쾅!!
괴물들이 바위벽을 들이받아대는지 동굴 안이 흔들렸다.
가끔씩 노란 눈동자가 안쪽을 살피는듯 했지만 별다른 위협은 없었다.
그러길 몇 번 하더니, 괴물들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제야 한숨 돌리고 소녀를 살폈다.
소녀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본래 깨끗했을 드레스는 찢어지고 흙이 묻어 지저분했다.
"이제 괜찮아. 괴물들은 가버렸단다."
가까이 가보니 소녀는 떨고 있었다.
아까의 기억 탓인지 아직도 몸을 떨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단다.”
하늘색 눈동자가 겁에 질린채 나를 경계한다.
나는 소녀에게 팔을 뻗었다.
-와락
떨고있는 작은 몸을 품에 끌어 안는다.
발버둥치는 것을 무시한 채 가만히 안고 있었다.
조심스레 소녀의 조그만 머리를, 가는 은발을 쓰다듬어 준다.
조금씩, 조금씩 소녀의 호흡이 안정되어간다.
어느 정도 숨소리가 가라앉자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미르란다. 너의 이름은?”
".. 이루..."
“응?”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소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어느새 출구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검푸른 장막에 메워져 있었다.
상당히 오래된 장막인지 헤어진 사이로 노오란 별빛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며칠동안의 피로에 몸을 맡겼다
-터벅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
발소리를 보아 상대는 한둘이 아닌듯 하다.
이런 삭막한 곳에서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것들은 경계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상인의 탈을 쓴 사기꾼일수도, 한순간에 목숨을 앗아갈 도적떼일수도
심할 경우에 무리를 지은 오크나 트롤등의 몬스터일 수도 있다.
허리춤에 꽂힌 칼을 소리없이 뽑아들고 입구로 다가갔다.
그들이 부디 길잃은 상단으로 이 동굴을 모른 척 지나가길 내심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램을 짓밟고 그들은 이곳을 발견한 것 같다.
불규칙하게 들려오던 발걸음이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숨을 죽이고 입구 옆의 그림자에 숨어 칼을 잡은 두손에 힘을 주었다.
목이 빠져라 들어오길 기다리는 나를 비웃듯
상당히 높은 톤의, 그러나 여성의 것은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그 자리에 구멍을 낼 터이니 입구에서 물러나시는게 좋을 겁니다.”
벽 너머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방대한 마력이 모여들고 있다.
‘저자들은 정말로 이 벽을 날려버릴 생각이다!!‘
앞으로 몸을 날림과 동시에 굉음이 들리며 뒤에서 충격파가 몰려왔다.
무슨 마법을 쓴건지 몰라도 조그만 입구는 오우거라도 드나들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탁한 먼지구름 사이로 네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맨 앞에 서 있던 노란 머리의 사내가 정중한 어투로 묻는다.
하지만 내게는 놀리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이런 짓을 하고도 다치지 않았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 당신을 향한 질문이 아닙니다.”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뭐?”
“당신과 함께 있던 아이에게 물은 것입니다.”
‘이 녀석들, 이루를 데려가기 위해 온건가?‘
이 자들이 이루에게 있어 적인지 아군인지는 아직 알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검을 고쳐잡으며 물었다.
“이루를 데려갈 생각인가?”
“그렇다면 방해할 생각인가요?”
사내는 조금 굳어진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그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했다.
“물론.”
“그건 좀 곤란한데요. 우리도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는 처지라서요.”
사내의 대답은 정중했다.
그러나 그 속엔 대단한 자신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자신감은 아마 자신의 실력을 토대로 한 것이겠지.
예의 마력을 조절하는 실력으로 봐서 왠만해서 보기 힘든 고위 마법사인듯 하다.
뒤에 서 있는 동료들도 하나 하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사내 하나만도 벅찬데 이 자의 동료들까지 합세한다면 승산이 전혀 없다.
그 때 뒤에서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여기 있어요.”
“이루!!”
돌아보니 이루가 서 있었다.
이 소란으로 잠이 깼었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의 대화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저를 와이번에게서 구해주신 거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 됐어요.
이 사람들은 와이번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요.
미르씨는 이제 미르씨 갈 길을 가셔요.“
이루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예쁜 미소가,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표정은 보고싶지 않아.‘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앉아서 이루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금발 사내에게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잠깐 인사할 시간을 줘.”
“좋습니다.”
사내와 동료들은 잠시 뒤로 물러나 주었다.
나는 그대로 이루의 머리를 끌어안은채 그 조그만 입술에 나의 입을 맞췄다.
이루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다만 연보랏빛의 눈동자와 곱게 뻗은 속눈썹만이 파르르 떨릴 뿐이다.
금발의 사내와 동료 녀석들도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다.
“저, 저런 무례한!!”
“입을 맞추다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이 틈이다.’
내가 노렸던 것은 바로 지금.
나는 그들이 당황하는 틈을 타서 품속에 손을 넣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파란 하늘이 시야에 가득차며 묘한 부유감이 들었다.
-쿵
짤막한 충격음과 함께 우리는 바닥에 떨어졌다.
“아야.... 미르씨, 어떻게 된거에요..”
“그보다 위에서 좀....”
이루는 정확히 내 허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아앗, 미안해요.”
이루는 서둘러 비켜주었다.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이루에게 다가갔다.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락없이 키스해서 미안해. 녀석들을 당황시키기 위해서였으니 없었던 일로 해줘.”
난 웃으며 이루에게 사과했다.
이루는 적잖이 당황하는듯 했다.
아마도 다시 사과를 할 줄을 몰랐을테지.
“그건...”
“여기에 계셨군요.”
위에서 이루의 말을 가로막는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그 녀석이다.
“벌써 찾았는가...?”
“솔직히 말해 놀랐습니다. 그 순간에 마법 스크롤을 사용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이쪽을 찾을 거라곤 이미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들은...’
“너희는 인간이 아니군.”
“눈치가 빠른 인간이군요.”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리들은 신이 세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
때때로 여러 종족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 신의 전언을 전달하는 신의 사자.
우리에겐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 선사받은 권능과 마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강력해지죠.
하지만 본디 우리의 육체는 와이번의 것.
우리들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소멸하기 직전 자신의 후계를 정해 힘과 정신을 계승하게 되어 있습니다.“
드래곤의 본신이 와이번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루를 쫓는 것에는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런 나의 생각을 짐작한듯 사내는 말을 이었다.
“이루님은 레 이루님의 후계자로 지목된 와이번. 그러나 계승 의식 도중 도망치셨습니다.
힘만을 물려받았을뿐, 정신은 계승받지 못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대로라면 레 이루님의 정신은 소멸하고 만다는 맙니다.“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인격의 복제라는 것인가?’
“그럼 의식을 끝마친 다음 이루는 어떻게 되는거지?”
“예리하시군요.”
사내는 뭐가 웃긴지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때로 자신의 자아가 어느 정도 남아 융합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전대 드래곤의 의지에 밀려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걸 강요하니 도망치는건 당연하지 않아?”
나의 물음에 사내는 당연하다는듯 대답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와이번은 드래곤들의 후계가 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이루님은 후계로 선택받으셨음에도 의식의 중간에 도망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스운 말이었다.
그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틀려..”
“네?”
“틀리다고 말했어.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너희들이야.
너희들이 말하는 자랑스러움이라는 것은 주위의 시선인가, 스스로의 의지인가?
적어도 이루는 자기가 원하는 뜻을 이루기 위해 도망쳤어.
너희들처럼 주위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루야 말로 진정으로 용기있는게 아닐까?“
사내는 말이 없었다.
대신 옆에 서 있던 검은 머리의 청년이 분노를 토했다.
“죽여버리겠다, 인간!! 네놈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앗! 하는 사이에 눈앞으로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퍼엉
이제 끝이구나 하며 눈을 감았지만 내 몸은 멀쩡했다.
눈앞으로 교차시킨 두 팔사이로 이루가 보였다.
“그만 두세요, 레 아킴님.”
“이루님, 어째서 저 인간을 감싸시는 겁니까?”
“무의미한 살생은 좋지 않습니다.”
레 아킴은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이루에게 소리쳤다.
“이루님, 그만 돌아갑시다.
당신에게는 의식을 끝마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레 피컬님,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레 아킴의 호통에 맞서 이루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 때 작은 빛무리와 함께 허공에서 한 여성이 내려왔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수수한 백색 드레스를 걸친 여성은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변했군요, 이루.”
“레 이루님.”
이루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레 이루는 흘깃 나를 바라본 뒤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이것이 당신이 선택한 길인가요?”
이루는 조금 고민하는듯 하더니 이윽고 짐짓 비장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가 관여할 필요가 없겠군요.”
“하지만 레 이루님, 당신은...”
레 피컬은 당황한듯 했다.
그의 말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됐습니다, 레 피컬님.
우린 이미 많은 나날을 살아왔고 우리의 사상을 따라 많은 일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의 세상은 너무 틀에 박혀있어요.
그런 단순하기만한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 이제 그만 물러나고 싶어요. 그리고 지켜보려 합니다.
저 아이가 만들어갈 내일을.”
“레 이루님...”
레 피컬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레 아킴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레 이루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대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레 이루는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예, 그대들에게도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곧 레 이루의 몸은 가루져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흩날리는 동안
그녀의 하얀 드레스가 허물어질 때까지 아무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의 흔적이 사라지자 드래곤들은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단 한명, 레 피컬은 남아서 나에게 걸어왔다.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키스말입니다.”
“아, 아니. 그건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크큭, 아하하하하!”
레 피컬은 뭐가 우스운지 크게 웃었다.
그는 한참을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당신은 아무런 뜻 없이 했던 거군요.
하지만 명심하시길.
그 키스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다시 뵙기는 힘들겠지만 그대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 피컬의 몸은 금빛 광채에 휩싸여 공중에 떠올랐다.
그의 몸집이 점점 커지면서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고 등에는 날개가 돋아났다.
이윽고 전신에 금빛 찬란한 비늘이 뒤덮인 골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했다.
골드 드래곤은 우리를 잠깐 바라보더니 그대로 날개를 놀려 허공을 날아갔다.
남은건 이루와 나 둘뿐.
나는 이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나름대로 폼을 잡으며 말했다.
“이루, 나와 여행이라도 다니지 않을래? 이제 너의 삶을 사는거야.”
“아직은 안돼요.”
이루는 등을 돌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후훗..”
이루는 풀이 죽어 있는 나를 보며 즐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하. 지. 만.”
그리고 내게 한가지 약속을 선물했다.
“1년 뒤, 이 장소 이 시간에 만나요.”
말을 마친 이루는 은은한 연보랏빛에 휩싸여 자취를 감추었다.
언덕 위로 은빛의 드래곤이 붉은 노을 사이를 유유히 헤치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나름대로 구상중인 판타지의 외전격입니다.
한데 생각했던 것만큼의 퀄리티가 안 나옵니다 ㅠㅠ..
이벤트에 보낼 때는 좀더 정리할 생각입니다만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죠..
뭐 어차피 상은 포기고 경험삼아 보내는거니...
제목은 생각해보고 바꿀지도 모릅니다.
“크윽.”
따가운 햇살이 내 눈을 꿰뚫는다.
며칠만에 보는 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뒤돌아보니 내가 빠져나왔던 안개덮인 숲이 보인다.
드래곤의 저주로 인해 영원히 걷히지 않을 안개가 덮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유래는 아무도 모른다.
단순한 탐험심에 이 지긋지긋한 숲에 발을 들인게 화근이었다. 그 후로 며칠간 이 숲속을 헤매이며 넘어진 횟수가 8번, 긁힌 횟수가 14번, 부딪힌 횟수가 5번이다.
그렇게 빠져나온 곳은 풀 한포기 없는 암석지대였다.
이 곳은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황무지였다. 나는 아마 말라죽거나 굶어죽고 말겠지.
체념하며 근처의 바위에 앉아 있는데 멀리로 까마귀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까마귀가 시체 주변에 몰리는 것일 터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근처로 다가갔을 때 나는 경악했다.
그것들은 새가 아니었다.
거대한 파충류가, 날개달린 파충류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박쥐의 날개와도 같이 피막이 덮힌 두터운 날개 두쌍을 등에 매단 채 그 검은 괴물은 날고 있었다. 흑빛의 비늘이 촘촘히 박힌 몸뚱이는 거의 10m에 달했고 파충류 특유의 거대한 주둥이가 머리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 거대한 괴물들은 산을 통째로 씹어삼킬듯한 거대한 입을 쩌억 벌린 채 조그만 소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는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괴물들의 속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녀는 지쳐 있었고 괴물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이윽고 한 놈이 소녀의 머리통을 향해 그 시뻘건 입을 쫘악 벌렸다.
그 순간 위에서 날아온 불덩이에 맞고 놈은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녀석의 주위로 주변의 괴물들이 모여 허겁지겁 이빨을 들이댔다.
-콰드득
-우드드득
뼈가 갈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금세 괴물의 시신은 사라져 버렸다.
다시 소녀에게 달려들던 녀석도 마찬가지로 동료들의 밥이 되어 버렸다.
놈들은 다른 녀석들이 소녀에게 달려들면 불덩이를 쏴대다가도 기회만 보이면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고 다투는 사자떼와도 같았다.
'이대로라면 저 소녀는 죽는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소녀의 앞까지 달려가서 잠시 기다렸다가 소녀가 근처에 오자 거칠게 안아들었다.
분명히 놀랐겠지. 하지만 설명할 시간이 없다.
달렸다. 아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때때로 날아오는 불덩이와 괴물들의 주둥이를 피해가며 계속 발을 놀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내 앞엔 벽이 떡하니 서 있었다.
“유인.. 당한건가? 저 괴물들 우릴 가지고 놀았군.”
괴물들은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 넣은 채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가 먼저 먹기 위해 순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친 놈은 뒤의 녀석에게 잡아먹혔다.
이걸로 시간은 벌었지만 결국엔 죽게 될 것이다.
“여기..”
“응?”
“여기...”
내 뒤에 서 있던 아이가 옆에서 내 옷을 당기며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구멍!!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좁은 구멍이 암석의 틈새로 나 있었다.
괴물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조금씩 구석으로 다가갔다.
-크륵? 크르르륵?
아이가 반쯤 들어갔을 때 한 놈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두 마리 먹이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 때에서야 도망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괴물들이 이 쪽으로 달려들었다.
“칫..”
소녀를 안쪽으로 밀어넣으며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쾅!! 쾅!!
괴물들이 바위벽을 들이받아대는지 동굴 안이 흔들렸다.
가끔씩 노란 눈동자가 안쪽을 살피는듯 했지만 별다른 위협은 없었다.
그러길 몇 번 하더니, 괴물들의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제야 한숨 돌리고 소녀를 살폈다.
소녀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본래 깨끗했을 드레스는 찢어지고 흙이 묻어 지저분했다.
"이제 괜찮아. 괴물들은 가버렸단다."
가까이 가보니 소녀는 떨고 있었다.
아까의 기억 탓인지 아직도 몸을 떨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단다.”
하늘색 눈동자가 겁에 질린채 나를 경계한다.
나는 소녀에게 팔을 뻗었다.
-와락
떨고있는 작은 몸을 품에 끌어 안는다.
발버둥치는 것을 무시한 채 가만히 안고 있었다.
조심스레 소녀의 조그만 머리를, 가는 은발을 쓰다듬어 준다.
조금씩, 조금씩 소녀의 호흡이 안정되어간다.
어느 정도 숨소리가 가라앉자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미르란다. 너의 이름은?”
".. 이루..."
“응?”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소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어느새 출구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검푸른 장막에 메워져 있었다.
상당히 오래된 장막인지 헤어진 사이로 노오란 별빛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며칠동안의 피로에 몸을 맡겼다
-터벅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
발소리를 보아 상대는 한둘이 아닌듯 하다.
이런 삭막한 곳에서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것들은 경계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상인의 탈을 쓴 사기꾼일수도, 한순간에 목숨을 앗아갈 도적떼일수도
심할 경우에 무리를 지은 오크나 트롤등의 몬스터일 수도 있다.
허리춤에 꽂힌 칼을 소리없이 뽑아들고 입구로 다가갔다.
그들이 부디 길잃은 상단으로 이 동굴을 모른 척 지나가길 내심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램을 짓밟고 그들은 이곳을 발견한 것 같다.
불규칙하게 들려오던 발걸음이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숨을 죽이고 입구 옆의 그림자에 숨어 칼을 잡은 두손에 힘을 주었다.
목이 빠져라 들어오길 기다리는 나를 비웃듯
상당히 높은 톤의, 그러나 여성의 것은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그 자리에 구멍을 낼 터이니 입구에서 물러나시는게 좋을 겁니다.”
벽 너머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방대한 마력이 모여들고 있다.
‘저자들은 정말로 이 벽을 날려버릴 생각이다!!‘
앞으로 몸을 날림과 동시에 굉음이 들리며 뒤에서 충격파가 몰려왔다.
무슨 마법을 쓴건지 몰라도 조그만 입구는 오우거라도 드나들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탁한 먼지구름 사이로 네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맨 앞에 서 있던 노란 머리의 사내가 정중한 어투로 묻는다.
하지만 내게는 놀리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이런 짓을 하고도 다치지 않았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 당신을 향한 질문이 아닙니다.”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뭐?”
“당신과 함께 있던 아이에게 물은 것입니다.”
‘이 녀석들, 이루를 데려가기 위해 온건가?‘
이 자들이 이루에게 있어 적인지 아군인지는 아직 알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검을 고쳐잡으며 물었다.
“이루를 데려갈 생각인가?”
“그렇다면 방해할 생각인가요?”
사내는 조금 굳어진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그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했다.
“물론.”
“그건 좀 곤란한데요. 우리도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는 처지라서요.”
사내의 대답은 정중했다.
그러나 그 속엔 대단한 자신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자신감은 아마 자신의 실력을 토대로 한 것이겠지.
예의 마력을 조절하는 실력으로 봐서 왠만해서 보기 힘든 고위 마법사인듯 하다.
뒤에 서 있는 동료들도 하나 하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사내 하나만도 벅찬데 이 자의 동료들까지 합세한다면 승산이 전혀 없다.
그 때 뒤에서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여기 있어요.”
“이루!!”
돌아보니 이루가 서 있었다.
이 소란으로 잠이 깼었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의 대화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저를 와이번에게서 구해주신 거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 됐어요.
이 사람들은 와이번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요.
미르씨는 이제 미르씨 갈 길을 가셔요.“
이루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예쁜 미소가,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표정은 보고싶지 않아.‘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앉아서 이루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금발 사내에게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잠깐 인사할 시간을 줘.”
“좋습니다.”
사내와 동료들은 잠시 뒤로 물러나 주었다.
나는 그대로 이루의 머리를 끌어안은채 그 조그만 입술에 나의 입을 맞췄다.
이루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다만 연보랏빛의 눈동자와 곱게 뻗은 속눈썹만이 파르르 떨릴 뿐이다.
금발의 사내와 동료 녀석들도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다.
“저, 저런 무례한!!”
“입을 맞추다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이 틈이다.’
내가 노렸던 것은 바로 지금.
나는 그들이 당황하는 틈을 타서 품속에 손을 넣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파란 하늘이 시야에 가득차며 묘한 부유감이 들었다.
-쿵
짤막한 충격음과 함께 우리는 바닥에 떨어졌다.
“아야.... 미르씨, 어떻게 된거에요..”
“그보다 위에서 좀....”
이루는 정확히 내 허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아앗, 미안해요.”
이루는 서둘러 비켜주었다.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이루에게 다가갔다.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락없이 키스해서 미안해. 녀석들을 당황시키기 위해서였으니 없었던 일로 해줘.”
난 웃으며 이루에게 사과했다.
이루는 적잖이 당황하는듯 했다.
아마도 다시 사과를 할 줄을 몰랐을테지.
“그건...”
“여기에 계셨군요.”
위에서 이루의 말을 가로막는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그 녀석이다.
“벌써 찾았는가...?”
“솔직히 말해 놀랐습니다. 그 순간에 마법 스크롤을 사용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이쪽을 찾을 거라곤 이미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들은...’
“너희는 인간이 아니군.”
“눈치가 빠른 인간이군요.”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리들은 신이 세상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낸 존재.
때때로 여러 종족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 신의 전언을 전달하는 신의 사자.
우리에겐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 선사받은 권능과 마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강력해지죠.
하지만 본디 우리의 육체는 와이번의 것.
우리들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소멸하기 직전 자신의 후계를 정해 힘과 정신을 계승하게 되어 있습니다.“
드래곤의 본신이 와이번이라니,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루를 쫓는 것에는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런 나의 생각을 짐작한듯 사내는 말을 이었다.
“이루님은 레 이루님의 후계자로 지목된 와이번. 그러나 계승 의식 도중 도망치셨습니다.
힘만을 물려받았을뿐, 정신은 계승받지 못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대로라면 레 이루님의 정신은 소멸하고 만다는 맙니다.“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인격의 복제라는 것인가?’
“그럼 의식을 끝마친 다음 이루는 어떻게 되는거지?”
“예리하시군요.”
사내는 뭐가 웃긴지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때로 자신의 자아가 어느 정도 남아 융합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전대 드래곤의 의지에 밀려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걸 강요하니 도망치는건 당연하지 않아?”
나의 물음에 사내는 당연하다는듯 대답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와이번은 드래곤들의 후계가 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이루님은 후계로 선택받으셨음에도 의식의 중간에 도망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스운 말이었다.
그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틀려..”
“네?”
“틀리다고 말했어.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너희들이야.
너희들이 말하는 자랑스러움이라는 것은 주위의 시선인가, 스스로의 의지인가?
적어도 이루는 자기가 원하는 뜻을 이루기 위해 도망쳤어.
너희들처럼 주위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루야 말로 진정으로 용기있는게 아닐까?“
사내는 말이 없었다.
대신 옆에 서 있던 검은 머리의 청년이 분노를 토했다.
“죽여버리겠다, 인간!! 네놈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냐!!”
앗! 하는 사이에 눈앞으로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퍼엉
이제 끝이구나 하며 눈을 감았지만 내 몸은 멀쩡했다.
눈앞으로 교차시킨 두 팔사이로 이루가 보였다.
“그만 두세요, 레 아킴님.”
“이루님, 어째서 저 인간을 감싸시는 겁니까?”
“무의미한 살생은 좋지 않습니다.”
레 아킴은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이루에게 소리쳤다.
“이루님, 그만 돌아갑시다.
당신에게는 의식을 끝마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레 피컬님, 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레 아킴의 호통에 맞서 이루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 때 작은 빛무리와 함께 허공에서 한 여성이 내려왔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수수한 백색 드레스를 걸친 여성은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변했군요, 이루.”
“레 이루님.”
이루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레 이루는 흘깃 나를 바라본 뒤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이것이 당신이 선택한 길인가요?”
이루는 조금 고민하는듯 하더니 이윽고 짐짓 비장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가 관여할 필요가 없겠군요.”
“하지만 레 이루님, 당신은...”
레 피컬은 당황한듯 했다.
그의 말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됐습니다, 레 피컬님.
우린 이미 많은 나날을 살아왔고 우리의 사상을 따라 많은 일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의 세상은 너무 틀에 박혀있어요.
그런 단순하기만한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 이제 그만 물러나고 싶어요. 그리고 지켜보려 합니다.
저 아이가 만들어갈 내일을.”
“레 이루님...”
레 피컬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레 아킴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레 이루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대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레 이루는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예, 그대들에게도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곧 레 이루의 몸은 가루져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흩날리는 동안
그녀의 하얀 드레스가 허물어질 때까지 아무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의 흔적이 사라지자 드래곤들은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단 한명, 레 피컬은 남아서 나에게 걸어왔다.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키스말입니다.”
“아, 아니. 그건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거니까.”
“크큭, 아하하하하!”
레 피컬은 뭐가 우스운지 크게 웃었다.
그는 한참을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당신은 아무런 뜻 없이 했던 거군요.
하지만 명심하시길.
그 키스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다시 뵙기는 힘들겠지만 그대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 피컬의 몸은 금빛 광채에 휩싸여 공중에 떠올랐다.
그의 몸집이 점점 커지면서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고 등에는 날개가 돋아났다.
이윽고 전신에 금빛 찬란한 비늘이 뒤덮인 골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했다.
골드 드래곤은 우리를 잠깐 바라보더니 그대로 날개를 놀려 허공을 날아갔다.
남은건 이루와 나 둘뿐.
나는 이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나름대로 폼을 잡으며 말했다.
“이루, 나와 여행이라도 다니지 않을래? 이제 너의 삶을 사는거야.”
“아직은 안돼요.”
이루는 등을 돌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후훗..”
이루는 풀이 죽어 있는 나를 보며 즐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하. 지. 만.”
그리고 내게 한가지 약속을 선물했다.
“1년 뒤, 이 장소 이 시간에 만나요.”
말을 마친 이루는 은은한 연보랏빛에 휩싸여 자취를 감추었다.
언덕 위로 은빛의 드래곤이 붉은 노을 사이를 유유히 헤치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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