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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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
제10화 - 싸우는 날개 -
"...일이 그렇게 된 거야."
케이는 절에 돌아온 후 결국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했다. 물론 자기가 엔자임에게 한번 죽었었다
는 얘기는 뺐다. 그 부분은 스쿨드가 놈들에게 잡혀서 구하러 갔다오고 보니 새벽이더라 라는 식으로 대충
넘어갔다. 케이가 얘기를 하고 있는 내내 스쿨드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베르단디와 울드는 케이의 얘기를 듣는 동안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베르단디는 더욱 더 충격을 받
은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케이씨 혼자서 그런 힘겨운 싸움을 해 오셨었다니...."
베르단디는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훔쳤고 울드는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유니트 가이버라니, 울드나
베르단디는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까 강가에서 케이가 변신을 푸는 장면을 못 봤더라면 믿지 못했
을 것이다. 게다가 스쿨드를 덮치려던 괴물, 크로노스란 조직에서 보낸 조아노이드 역시 전혀 듣도 보도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직접 본 이상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에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그게 숨긴다고 될 일이냐."
울드는 케이와 스쿨드를 꾸짖었다. 어처구니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섭섭한 감정이 더 컸다. 그런 위험에 처
했는데 자기들에게 끝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었다니. 물론 케이가 자신들을 걱정해서 그랬다는 건 알겠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기분이 나쁜 울드였다. 울드에겐 자기가 그리 미덥지 않게 보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
다.
"아무튼 케이 말대로 라면 녀석들은 계속해서 공격을 해 올 꺼야. 아무래도 천계에 지원요청을 해야겠어.
베르단디."
"...네."
베르단디는 눈물을 닦으면서 대답을 하였다. 그 모습을 울드는 잠시동안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네가 천계에 전화하렴. 나보단 1급신인 네가 하는 게 더 확실할 꺼야."
베르단디는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 잠시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일어서서는 복도에 나가서 천계와
전화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천계에 사정을 설명하고 지원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인간계에 내려와 있는 신족들은 대게는 힘에 제한이 걸리게 된다. 특히나 베르단디처럼 1급신의 경우에는
그 힘이 너무나 강대하기에 본인도 맘대로 풀 수 없는(즉, 상부의 허가가 필요한) 봉인이 걸리게 되고 이
경우 어떤 위협이 닥쳐올 경우 자신의 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이때를 대비해서 천계에서 전투
부원들을 보디가드로 파견을 해 줄 수도 있다. 단, 요청만 한다고 무작정 보내주는 건 아니다. 천계에서 관
여하는 곳은 이곳 지구만이 아니기에 전투원이 파견되어야 하는 곳도 많았고 또한 천계의 자체방어를 위해
서도 일정 수의 대원들은 항상 상주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급인 울드보다는 권한이 좀 더 많
은 1급신인 베르단디가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좀 더 확실했다.
하지만 울드는 전투원이 파견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 현재 느닷없이 괴물로 변하는 정
체불명의 인간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고 계약자(케이)는 가이버라는 요상한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는 말에
누가 납득할 수 있을까. 정말 전화하기는 싫었지만 여차하면 마계에라도 한 번 전화를 넣어볼까 하는 생각
도 들었다.
...아마도 그런 짓 했다가는 면허 취소를 당하겠지. 울드는 그 생각은 그냥 접어두기로 했다.
그런데 통화가 좀 길어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한 30분은 통화를 한 것 같았다. 굳이 보고 안해도 되는
부분까지 몽땅 다 얘기하고 있는 걸까? 울드와 스쿨드, 케이는 복도로 나가 보았다. 베르단디는 복도에서
여전히 통화중이었다.
"네? 네. 기다리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리 통화가 길어?"
울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베르단디가 송화기 부분을 손으로 막고는 울드쪽을 바라보았다.
"저...그게 좀 물어볼께 있다고 기다리라고 하시네요. 처음 통화를 했을 때 크로노스와 가이버에 관해서 말
씀을 드리니까 전투부는 물론 최고법술원에서도 뭘 물어보신다고 하세요."
울드는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었다. 전투부가 뭔가 질문을 많이 한다면 임무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
가겠지만 경호 임무랑은 상관도 없는 최고법술원이 왜 나선단 말인가. 하여튼 베르단디는 그 이후로도 한참
을 더 통화를 한 후에야 수화기를 내렸다.
"조만간 전투부 분들을 파견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일단은 그 때까지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하세요."
베르단디의 말에 케이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도 다행히 전투부원들을 파견해 준다고 하니 일
단은 안심이었다. 물론 크로노스란 놈들의 정확한 규모를 알 수가 없으니 반격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지원군
이 단 한두 명이라도 있는 것이 훨씬 안심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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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마당의 말라버린 우물가 옆에서 시글은 수리가 완료된 밤페이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듣고 있었다. 로봇인 둘
은 인간처럼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케이블을 연결해서 밤페이의 기억회로에 저장돼 있는 그간의 기록
파일들을 복사하면 그만이었다.
스쿨드에 의해 이제까지 있었던 크로노스와 관련된 일은 일체 비밀로 지정돼서 밤페이 자신도 외부로 말하
거나 복사할 수 없었다. 밤페이가 시글에게 모두 다 털어놨다가 베르단디나 울드에게 이 사실이 알려질까
봐 스쿨드가 락을 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스쿨드가 모든 제한을 풀어버린 것
이다.
사정을 모두 알게된 시글은 의외로 담담했다. 어차피 자신의 임무는 이 집과 가족들의 경비였다. 싸워야 할
적이 마족이외에도 하나 더 추가 된 것일 뿐이었다. 문제는 추가된 상대가 절대로 만만치 않은 적들일 것
같다는 것이었지만. 시글은 밤페이의 기억회로에 접속해서 밤페이가 목격했던 조아노이드들에 대한 자료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케이가 가이버란 정체 불명의 형태로 변신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까지도.
"...?"
그런데 기억 파일 한 부분을 본 시글은 깜짝 놀랐다. 마지막 기록 파일이었는데 그 부분은 토요일 저녁에
밤페이가 엔자임이란 조아노이드와 싸울 때의 기록이었다. 엔자임의 강펀치가 명중해서 밤페이의 기능이 정
지하기 직전 순간적으로 시글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 것이다. 어째서 내 모습이 이 파일에 기록돼 있는 걸
까? 그것도 그 파일 속의 자신은 웃는 모습이었다. 밤페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준건 이제까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드물었는데.
"너, 이 파일에 왜 내 모습이 기록돼 있는 거야?"
시글이 이유를 묻자 밤페이는 대답도 안하고 그냥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글이 계속해서 다그쳐도 밤페
이는 시글의 시선을 피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시글은 문득 얼마 전에 본 연속극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자 주인공이 최후를 맞는 씬이었는데 죽기 직전 순간적으로 사랑하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
던 모습이었다. 그걸 보고 아무래도 인간은 죽음이 임박하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나
보다 하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밤페이도...?
"쓸데없이 인간 흉내 낼래? 그 급박한 순간에 왜 날 떠올려? 네가 드라마 주인공이냐?"
시글은 밤페이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핀잔을 줬다. 그런데 밤페이가 멋적은듯 고개를 푹 숙이며 딴청을 피우
는 게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시글은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
하지만 왠지 싫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자기가 밤페이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이 라는 뜻이니까. 시글은
밤페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깐동안이지만 아주 따뜻한 미소를. 밤페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 모습을 못 본 것이 정말로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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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저희는 무사해요. 선배,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케이는 때마침 전화를 걸어온 지로에게 무사함을 알렸다. 지로는 케이와 베르단디, 스쿨드가 보이지 않자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닌가 해서 안부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미처 연락을 못해줘서 지로에게 너무나 미안하
였다.
지로의 말에 따르면 대회장에서 테러로 보이는 폭발사고가 나서 대회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그건 테러가 아니라 스쿨드의 연막탄과 케이가 가이버로 변신할 때 나는 폭발음이었지만 케이는 차마
그걸 얘기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로 인해 남은 본선경기는 그대로 취소되었고 대회 자체는 무기 연기되
었다. 대회가 언제 다시 개최되는지는 추후 공지한다고 하지만 아마도 근 시일에 열리긴 힘들꺼라는 것이
지로의 생각이었다.
"네. 아, 그런가요? 예, 예. 그럼 내일 뵐께요."
통화를 마친 케이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케이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생각하였다. 이제 크로노스와
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자기들 입으로는 별것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일본지부를 잃은 것은
큰 타격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녀석들은 이곳으로 전력을 기울여 쳐들어 올 것
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사실을 전부 알아버린 베르단디나 울드, 그리고 스쿨드는 물론 조아노이
드를 봐 버린 핫세나 가까이 지내는 지로까지 위험할 지도 몰랐다.
천계에서 지원군이 온다고 하니까 부담은 좀 덜해질 것이다. 그러나 크로노스가 케이의 주변인물로 타겟을
확대할 경우 상황은 더 안 좋아 질 수도 있었다. 사실 주변인물들을 인질로 잡는 건 누구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고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은 그럴 가능성은 높았다. 그럴 경우 지키기만 해서는 전혀 승산
이 없었다. 이쪽에서 쳐들어가서 결판을 지어야 했지만 놈들은 겨우 한두 명 추가된다고 도전할 수 있을 정
도로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케이로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이버Ⅲ. 당신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나요?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일본지부에서 본 이후로 가이버Ⅲ는 보질 못했다. 그 역시 지금 어딘가 에서 케이처럼 소중한 사람
을 지키면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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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릉!
케이와 베르단디는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하였다. 다만 두 사람의 얼굴이 다소 굳어 있다는 점만 달랐
다. 베르단디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배웅 나온 스쿨드의 손을 꼭 잡고 절대 혼자서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울드의 표정 역시 그리 밝지 못했다. 솔직히 울드는 당장
이라도 회사 때려치우고 크로노스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냈고 케이 역시 그 생각을
안 하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일단 오늘은 출근을 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지로를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였지
만 말이다. 가능한 한 지로는 말려들지 않게 해야 했다.
"스쿨드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마. 그리고 케이. 베르단디를 잘 보호해 줘."
케이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는 여신인 베르단디가 보통 인간인 케이를 보호해
줘야 하는 거지만 지금 케이는 그저 보통인간이 아니라 조아노이드에게 강한 면모를 보이는 가이버였다. 그
리고 베르단디는 일급신이라지만 지상계에 머물고 있는 동안은 대부분의 힘을 봉인해야만 하는 입장이라
울드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케이와 베르단디는 회사로 출발하였다. 두 사람의 바이크가 안보일 때까지 서있던 울드와 스쿨드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전 울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행여 누군가가 여길 노리고 있지 않나 살펴보았다.
평소엔 전혀 안 하던 행동이지만 이젠 사정이 달랐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지 않자 울드는 집안으로 들어와
서는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몇번의 신호음이 들린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예, 지구도움센터 소속 1급신 2종 비한정 페이오스입니다."
"나야, 울드. 좀 조사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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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윈드에는 케이와 베르단디 둘 만이 가게를 보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니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지
로에게 어제 경기장에서 사건이 벌어진 직후 케이들이 보이질 않아 걱정 많이 했다며 얘기도 없이 그냥 가
는 게 어딨냐는 잔소리를 조금 들었다.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 없는 케이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였
다. 그리고 지로는 오전 동안 사업 문제로 다녀올 데가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 동안 자동차부의 대회 출
전 문제로 가게일에 좀 소흘했던 지로는 다시 본연의 일에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회는 연기만 됐을 뿐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예선전 당시 자동차부의 성적은 상당히 위험
한 수준이었으므로 결코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로는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알아
서 해야 한다며 더 이상은 도와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사자는 자기 새끼를 벼랑으로 떨어트린 후 기어
올라온 새끼만 거둔다는 얘기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옆에서 이것저것 도와주기만 해서는 장
기적으론 그들에게 좋을 게 없었다. 저번이야 시간이 너무 촉박했으므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것이지만 이
제는 비교적 여유가 있으므로 그들 스스로 해쳐나가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지로의 뜻이었다. 어차피 지
로도 케이도 이젠 생업에 종사해야 할 때였다. 소규모 가게인 그들에겐 지난 한 주를 사실상 꼬박 바치다시
피 한 것은 상당한 타격이었다.
오전동안 손님이 계속 왔지만 다행히 케이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쨌든 오전 동안은 좀 바
쁘게 보냈고 점심때가 임박해서야 다소 한가해졌다. 잠시 한숨 돌리는 케이에게 베르단디가 차를 권했다.
"케이씨, 수고하셨어요. 차 한잔 드세요."
"응, 고마워."
차를 마시는 케이의 표정은 다소 어두웠다. 차가 맛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
민이 됐기 때문이었다. 천계에서 지원군이 오는 건 오는 거고 크로노스와 싸우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크로노스와의 전투가 격화되면 지금처럼 한가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전
혀 상관없는 지로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뭔가...걱정되시는 게 있나요?"
케이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본 베르단디가 걱정스러워 하였다. 케이는 솔직하게 이야기하였다. 이젠 베르단
디도 사실을 알고 있으니 숨길 필요가 없었다. 가능하면 베르단디는 끝까지 모르게 일을 해결하고 싶었는
데...
"앞으로 크로노스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할 수는 없을 거야. 조만간 여기도 그만둬야
겠지...."
"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평범했지만 행복했던 일상이 이제 산산이 깨지게 된 것이다. 과연 원래대로 돌아
올 수 있을까..
"하지만 베르단디, 난 너만은 반드시 지킬 꺼야. 어떠한 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케이씨...."
베르단디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케이의 말이 감격스러웠지만 그가 모든 짐을 자기 혼
자서만 지려고 하는 것만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였다. 케이만 모든 짐을 떠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굳
게 결심하였다.
"저도 케이씨와 같이 싸우겠어요. 어떤 적이라 할지라도 케이씨 혼자서만 싸우게 하지 않겠어요."
"위험해! 싸우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해. 베르단디를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
결국 베르단디는 케이의 예상대로 같이 싸우겠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지만 케이는 걱정이 앞섰
다. 힘의 강약을 떠나서 케이는 베르단디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질 수 있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같이 살면서 마족이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로 인해 그들의 일상이 위협을 받던 일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힘이 없는 보통의 인간이었던 케이는 그저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수밖엔 없었다. 베르단디가
힘겹게 싸우는 장면을 보면서, 혹은 위기에 처한 그녀를 보며 케이는 자신의 무력함을 저주하였었다. 그러
나 지금은 가이버란 힘이 있다. 이젠 자신이 그녀를 지켜줄 차례였다.
"천계에서도 전투부가 내려 올 거라면서. 그렇다면 더더욱 베르단디가 위험하게 나설 필요는 없어. 이번엔
내가 널 지켜줄 차례야. 게다가 이건 나때문에 벌어지기도 한 일이니까."
"그건 케이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저 우연히 벌어진...."
"아니, 내가 유니트를 식장하게 되어서 이번 일이 벌어지게 된 거야. 그러니까 아무 상관없는 베르단디가
말려드는 건 원치 않았던 건데..."
"어째서 제가 아무 상관없다고 하시는 건가요? 전 언제나 케이씨 곁에 있겠다고 했었는데..."
베르단디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녀를 또다시 슬프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케이는 고개를 떨궜다. 둘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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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페이오스. 조사해 봤어?"
울드는 오후에 천상계에 전화를 걸어 페이오스에게 조사를 부탁했던 유니트 가이버와 크로노스에 관한 것
에 대해 물어보고 있었다. 어젯밤에 울드는 유그드라실에 접속을 해봤지만 해당되는 자료가 전혀 없었다.
혹시 1급신만 열람 가능한 자료영역에 있지 않나 싶어서 울드는 천상계에 있던 페이오스에게 조사를 부탁
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직접 천상계에 갔다오고 싶었지만 케이와 베르단디가 출근한 지금, 집에 있는 스
쿨드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어서 그냥 참았다.
-"그게....가이버에 관한 건 자료가 있긴 한데 나조차도 열람이 불가능한 거였어. 보려면 최고 평의회의 허가
를 받은 후 볼 수 있고 그 이후 프로텍트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있었어."
울드는 그 대목에서 깜짝 놀랐다. 최고 평의회라니! 천상계의 최고 결정기관인 그곳의 승인을 받아야 할 정
도라면 최고의 기밀사항이라 할 수 있었다.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 질 것만 같아서 울드는 불안해지기 시작
했다.
-"일단 신청은 해 봤지만 뭐 결과는 알겠지? 난 단번에 거절당했어. 그럼 베르단디는 어떠냐고 물어보니 일
단 검토는 해 보겠다더군. 본인이 신청하면 열람여부를 결정해서 통보해 주겠데."
울드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기 애인이 바로 그 가이버인 베르단디는 당연히 그것에 관해서 알 권
리가 있는데도 검토해 보겠다니. 울드 본인은 2급이고 페이오스야 당사자가 아니므로 그렇다 치더라도 1급
신이고 당사자인 베르단디는 볼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크로노스에 관한 사항인데....이것 역시 울드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아주 단편적
인 것 뿐이야. 1급신이라면 어느 정도 열람 가능하지만 대신 열람후 프로텍트를 해야 해."
"단편이라도 좋으니까 알려줘. 우린 지금 위험하다고."
-"그래, 좋아. 사실 천상계에선 오래 전부터 크로노스란 조직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은밀하게
조사를 진행하던 중이었지."
페이오스가 알려준 건 정말 단편적인 것뿐이었다. 일단 페이오스가 하고 있는 '지구도움센터' 일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기에 페이오스도 처음엔 크로노스란 조직의 존재는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크로노스에 관해서
조사를 하고 있던 전투부의 허가를 받아 조사기록등을 열람할 수 있었다.
"전투부? 어째서 거기가 조사하고 있는데? 그렇게 위험한 놈들이야?"
-"그렇태나봐. 게다가 나조차도 열람 불가능한 부분이 있었어."
크로노스란 조직은 지구 시간으로 약 4백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며 어쨌든 이들은 인간을 자신들의 부하인 조아노이드로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상당히 체계적
인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창설 당시부터 은밀히 행동을 하며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조직의
세를 불려왔다. 천계에서 이들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 것은 백년 안팎이었고 그나마도 제대로된 조사는 진행
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조직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세가 전 세계 곳곳에 퍼질 정도로 커지자 천계에서는 더 이상
내버려두면 위험하겠다는 판단아래 은밀히 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녀석들의 기지의 위치는
단지 몇 군데만 파악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이며 그나마도 일본지부 같은 경우는 엊
그제 폭발사고 덕분에 알았을 정도였다.
-"이상이야."
"....정말 별 도움안되는군."
울드는 내용이 빈약하다며 투덜거렸다. 이건 크로노스에 관한 거라기 보다는 그저 지금까지 천상계의 조사
과정을 간단히 요약한 정도밖에는 안됐다. 그나마 천상계 역시 그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걸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이들의 규모가 케이 혼자서 어떻게 감당
해 볼 수준이 아니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케이씨는 어쩌다가 가이버가 됐데? 하필이면 왜..."
"재수가 없었지 뭐."
울드는 그거밖엔 해 줄말이 없었다. 유니트를 식장하게 된 경위를 간단히 압축하면 정말 저 한마디로 설명
이 가능했다. 페이오스 역시 대충은 감 잡은 듯 했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너희들만으로 그 녀석들과 대결하는 건 위험해. 조아노이드 한두마리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는 놈들이 또 어떤 능력을 가진 조아노이드들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전투부에서 지원부대 안 보내준데? 어제 베르단디가 요청했었는데."
-"내가 한번 알아보고 연락줄께."
얼마간 더 얘기하다가 울드는 수화기를 내렸다. 더 얘기해봐야 추가로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페이오스
는 1급신이므로 뭔가 더 알고 있겠지만 보아하니 그녀 역시 많은걸 알고있지는 못한 듯 싶었다. 나중에 왈
큐레(북구신화의 전쟁의 여신. 여기서는 천상계 전투전문 여신)들이 오면 한번 물어봐야 갰다고 생각하였다.
어차피 그녀들도 프로텍트가 걸려 있을 것이 뻔하니 그렇게 많이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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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가볼 데가 있어. 그러니까 조금 일찍 접자."
저녁 6시무렵에 지로가 가게를 일찍 닫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저녁에 약속이 잡혀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아까 5시 무렵부터 손님이 전혀 없었으니 조금 일찍 닫아도 무방할 듯 싶었다. 지로의 말에 케이와
베르단디는 주변을 정리하며 퇴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 무슨 일 있었어?"
"네?"
"아니, 표정들이 좀 어두워 보여서 말이야."
지로는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분위기가 좀 냉랭하다고 해야 하나? 베르단디나 케이의 얼굴이 시무룩
해져있는 것도 그렇고 둘 다 평소보다는 왠지 의욕들이 없어 보였다. 지로가 케이에게 바짝 다가서서는 케
이의 목에 팔을 둘렀다.
"헤에~ 오전에 나 없을 때 둘이 싸웠구나?"
"아..아니에요!"
케이가 허둥대며 대답하니 더욱 더 의심이 가는 지로였다. 저 둘이 서로 싸운다는 건 평소의 모습을 보자면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 모습이었지만 지금 케이의 반응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설마 둘이 진짜로
싸운걸까?
"그건 아니고요, 실은 지금 케이씨가 크로....흡!"
베르단디가 지로에게 사실을 다 말하려 하자 케이는 황급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기름때 묻은 손을
그냥 갔다 댄 것이 너무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역시나 거짓말을 할 수 없는 1급신 -아니, 급수같은것
과 관계없이 근본적으로 베르단디는 거짓말이란 걸 못하는 성격 같아 보이지만- 베르단디 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크로노스니 가이버같이 남들이 듣기에 황당한 얘기를 해 봤자 어디 아프냐는 소리밖에는 들
을 것이 없었다.
"??"
"자! 서둘러 퇴근해야지. 오늘은 나도 좀 피곤하고! 하하하..."
케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열심히 대걸레질을 하면서 이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려 하였다. 지로와 베르단디는
그런 케이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물론 지로는 대체 저 녀석이 뭘 숨기고 있길레 저러는 건가 하는
거였고 베르단디는 케이가 왜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나 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내일 뵈요!"
서둘러서 청소를 끝낸 케이는 행여나 지로가 다시 물고 늘어질까봐 도망치듯 베르단디를 끌고 가게를 빠져
나왔다. 지로는 여전히 수상하다는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지로도 할 일이 있으니 더 이상
물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지로는 절대 아니었다. 내일은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
도 달달 볶아서 사실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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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돌아온 두 사람은 울드나 스쿨드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그동안 크로노스가 처들어오지는 않
은 듯 했다. 주변 경계를 하고 있던 시글도 수상한 자는 없었다고 말해 주었다. 지금 주변경계는 밤페이를
대신해서 시글이 밤페이의 축소 형태인 미니군들을 통솔해서 수행하고 있었다. 밤페이는 스쿨드가 파워 업
개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처럼 베르단디는 돌아오자마자 케이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였다. 모든게 평소처럼 흘러갔다. 아니, 한가
지는 분명히 달랐다. 정체불명의 조직의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 달랐다. 다시 예전 같은 평화로운 저녁을 맞
을 수 있을까...
"케이씨, 식사하세요."
"응, 잘 먹을께."
응접실에서 케이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처럼 잠시 하던 일들을 멈추고 울드와
스쿨드도 나왔다. 그러나 예전처럼 시끌벅적 하지는 않았다. 뭔가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크로노스의 존재
는 이제 이들의 일상을 이렇게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케이씨, 아까 왜 지로씨에게 말하는 것을 말리셨나요?"
".....글쎄."
제3자도 아니고 말을 막은 장본인의 대답치고는 꽤나 한심했지만 케이 역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사
실대로 말하면 지로도 말려 들까봐서 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솔직히 크로노스가 주변 사람들을 노린다고
가정했을 경우 조아노이드나 가이버를 모른다고 지로를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요 근래들어 가
장 자주 만나고 가장 가깝게 지낸 사이 아닌가. 인질로서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그저 지로 선배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게 낮지 않을까 싶어서랄까. 그리고 솔직히 우리말을 믿어 줄지도 의
문이고."
"하지만 전부 사실인 걸요."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좀 황당한 내용이잖아. 요 며칠동안 일어난 사건은..."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갈 꺼야?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해."
그때까지 계속 TV를 보고 있던 울드가 중간에 끼여들었다. 울드의 말에 케이는 할 말이 없었다.
"...내일이라도 지로 선배에게 얘기하자. 물론 크로노스 얘기는 빼고. 선배는 모르는 게 좋아."
케이의 말에 베르단디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지로, 케이와 함께 한 직장 생
활이 정말로 즐거웠던 베르단디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결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로를 위해서라도 자
신들은 지로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다고 크로노스가 과연 지
로를 그냥 내버려둘까...
"아!! 베르단디!"
그 때 울드가 뭔가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베르단디 역시 '그것'을 느꼈다. 아직 능력이 모자란 스쿨드나
보통 인간인 케이만이 갑작스러운 두 자매의 반응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갑자기 베르단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뭔가 거대한 힘이 내려오고 있어요!"
"거대한 힘? 설마...."
"아무래도 드디어 행차들 하신 것 같애. 왈큐레들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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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강한 섬광이 번쩍이면서 주변에 엄청난 바람이 불었다. 드디어 천계에서 전투의 여신들, 왈큐레가 파견된
것이다. 믿음직한 구원군이 온 것이다. 케이들은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으로 나가자 열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천계의 전투여신 왈큐레 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한 명은
케이도 아는 인물이었다. 엔젤이터 사건 이후로 오랜만에 찾아온 생애의 벗, 린드였다. 케이는 너무 반가워
서 린드의 바로 앞까지 달려나갔다.
"린드! 정말 오랜만이야."
찾아온 지원군이 안면이 있는 사람인지라 정말 다행이었다. 다만 여기 온 이유가 임무 때문이 아니라 휴가
를 받아서 온 것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린드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
두웠다. 케이는 임무 때문에 와서 그런건가라고 생각하였다.
"린드, 오셨군요. 정말..."
-챙!
베르단디들도 린드에게 달려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다른 왈큐레들이 배틀액스를 들
어 베르단디들을 그 자리에서 제지하였다. 깜짝 놀란 울드가 장난하지 말라며 배틀액스를 치우려 하였지만
왈큐레들의 표정은 아주 무서웠다. 그 자리에서 꼼짝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울드는 이들이 장난을 하
고 있는 게 아니란 걸 금방 눈치챘다. 케이 역시 저게 뭐하는 짓이냐며 물었지만 린드는 그저 묵묵부답이었
다.
"케이...."
이윽고 린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린드의 눈동자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때 엔젤이터 사건당시 봤었
던 결의에 찬 눈이 아니었다. 케이는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내 임무는....."
"리..린드? 대체 왜 그래?"
"내 임무는....유니트 가이버를 포획하는 거야."
그 말에 케이와 베르단디들은 경악하였다. 도와주러온게 아니라 유니트를 포획하러 온 거라니! 베르단디가
필사적으로 린드에게 소리쳤다.
"린드! 대체 그게 무슨 말이죠? 케이씨를...케이씨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미안하다....그러나 난 그렇게 임무를 받았다."
린드가 양옆에 있던 왈큐레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왈큐레들이 케이를 순식간에 사방에서 포위하였
다. 그리고 다들 일제히 법술을 외우기 시작했고 케이를 중심으로 지면에 원형의 법술진이 그려지기 시작했
다. 법술진의 모양을 본 베르단디와 울드는 경악하였다. 저것은 절대봉인진이었다! 인간에게는 그 영향이 너
무나 강력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것이었다. 봉인의 영향으로 인해 케이가 괴로운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린드!! 제발 멈춰요!"
"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야!!"
베르단디들이 앞으로 달려나오려 했지만 왈큐레들은 두 사람을 절대 놔주지 않았다. 더 가까이 가지 말라며
거칠게 밀치기까지 하였다.
"걱정 마라. 일단 케이에게서 가이버만, 정확히는 컨트롤 메탈만 회수하면 된다. 그 작업은 천상계에서 최고
법술원이 나서서 할거고 그게 끝나면 케이는 무사히 돌려보내 주마."
컨트롤 메탈이라는 말에 스쿨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가이버에게 있어서 컨트롤 메탈은 가장 중요한 부분,
생명과도 같다. 만약 그걸 적출해 냈다가는 케이는 그 때 엔자임에게 당했던 때처럼, 그리고 리스카처럼 비
참하게 죽게 된다! 스쿨드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케이! 도망쳐! 널 죽이려는 거야!!!"
스쿨드의 외침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베르단디나 울드는 물론 린드조차도 놀란 표정을 지었
다. 그러나 법술을 외우고 있던 왈큐레들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만둬요!!"
케이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소리에 베르단디가 공격법술을 외우려고 하였다. 어떡해서든 케이를 구하려는 그
녀에겐 상대가 같은 동족이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를 제지하던 왈큐레가 베틀액스를 높히 치켜들
었다.
"멈추지 않으면 벤다!"
"머...멈춰!!"
그 때 법술진 안에서 괴로워하던 케이가 소리쳤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 케이는 베르단
디의 위기를 봤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리고 케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가이버어어!!!!"
-퍼어엉!!
케이는 가이버로 변신하였다. 식장시 발생하는 강렬한 충격파는 순식간에 지면에 그려져 있던 봉인진을 파
괴해 버렸다. 너무나 쉽게 봉인진이 파괴되자 모든 왈큐레들이 경악하였다. 그 사이 케이는 베르단디를 베
려던 왈큐레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야아아!!"
-퍼억!!
"커헉!!"
케이는 돌진해온 기세 그대로 왈큐레를 어깨로 받아버렸고 그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왈큐레가 배틀액스를 케이를 향해 내리쳤다. 케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주파 소드를
전개하였다.
"하앗!"
-부웅! 키잉!!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 한번 맞부딪친 것만으로도 왈큐레의 배틀액스가 두부처럼 힘없이 잘리고 만 것이
다. 왈큐레들이 장비하는 배틀액스는 천상계에서만 나는 고강도 희귀금속으로 만드는 것으로 지상계의 금속
과는 그 강도면 에서 비교가 안 된다. 게다가 강도 문제를 떠나서 종이로 만든 것도 아니고 어엿한 금속인
데 단 한번 맞부딪혔다고 저렇게 쉽게 잘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가이버의 고주파 소드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고주파수로 진동하면서 물체의 분자결합 자체를 파괴해 버리는 고주파 소드 앞에서는 강도
는 의미가 없었다.
"하아앗!!"
상대방이 머뭇거리는 찰나의 순간, 케이가 다시 한번 소드를 휘둘렀다. 왈큐레는 피할 틈도 없었다. 케이의
눈에 그녀의 목이 크게 확대됐다. 목표는 상대방의...!
"안돼요!!"
그 때 베르단디의 비명이 들려왔다. 케이는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고주파
소드를 상대 왈큐레의 목에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그야말로 종이 한장 차이로. 공포에 질려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본 케이는 당황해하며 황급히 소드를 회수하였다.
"아...이..이건..! 고의가 아냐!"
베르단디의 외침 덕에 정신을 가까스로 차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목을 베어버릴 뻔했다. 그 때 당시 케
이는 흥분상태에 놓여있었다. 마치 조아노이드들과 싸울 때처럼. 그러나 상대방은 천계의 여신들이지 크로
노스가 아님에도 케이는 강한 적개심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조아노이드를 해치울 때처럼 공격을 하려고
하였었다. 어째서?
"타앗!"
그러나 상대 왈큐레들은 그런 케이의 사정같은건 아랑곳없이 공격을 해왔다. 사실 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고
의가 아니었다는 변명에 납득할 리가 없었다. 왈큐레들의 배틀액스가 케이에게 내리쳐졌다.
-부웅!
-퍽!!
"허억!"
케이는 반사적으로 첫 번째 공격을 피하고는 상대 왈큐레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강력한 가이버의 펀치에
왈큐레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케이는 다른 목표를 찾았다. 주변에 '적'이 많기 때문에 한
명에게 집중공격을 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케이는 곧장 또 다른 왈큐레에게 돌려차기를 하였다.
상대방은 그 공격을 가드를 올려 막아내려 하였지만 방어에 들어가는 타이밍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결국
케이의 공격은 상대 왈큐레의 어깨에 맞았고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어깨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끼릭.
그 때 가이버의 헤드센서가 후방의 적을 탐지해 내었다. 케이는 반사적으로 고주파 소드를 전개시키고 재빨
리 뒤돌아 섰다. 케이의 등뒤를 기습하려던 상대방은 순간 당황했지만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는 케
이를 향해 있는 힘껏 배틀액스를 내리쳤다. 케이 역시 상대방을 향해 고주파 소드를 휘둘렀다.
-키이잉!
결과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배틀액스는 이번에도 고주파 소드에게 힘없이 잘리고 말았다. 그러자 왈큐레
들이 케이 근처에서 급히 떨어졌다. 첫번째는 우연이었다 치더라도 두번째까지 자신들의 무기가 저렇게 쉽
게 잘리고 만다면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가이버를 상대로 접근전은 불리하다고 판단
해서 거리를 둔 것이다.
-화아악!!
세 명이 화염 계통의 공격 법술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녀들 손에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이 나타났다. 다른 세
명은 배틀액스를 들고 법술을 외우는 왈큐레들을 엄호하며 가이버의 육박 공격에 대비하였다. 케이는 즉시
복부의 중력제어구에 손을 모아 프레셔 캐논을 준비하였다. 잠시후 양쪽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공격을 하였
다.
-파앙!!
-화아악!!
프레셔 캐논과 왈큐레들의 화염 공격이 중간에 충돌하였다. 1대3의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프레셔
캐논은 화염공격들을 그대로 상쇄시켜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경악하였다. 천계 전투부의 정예 대원
세명의 공격이 이렇게 간단히 막힐 줄은 상상도 못했다.
케이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자 곧장 추가타를 날리기 위해 오른쪽 가슴의 장갑판에 손을 대었다. 마침 거리
도 적당히 벌려져 있고 적들도 한군데 몰려 있으니 절호의 찬스였다. 케이는 어느새 전투에 몰두하고 있었
다. 조아노이드들과 싸울 때처럼.
"케..케이씨..."
베르단디는 저런 케이의 모습을 처음 봤다. 그녀의 눈앞에서 분명히 변신하는 것을 봤지만 저렇게 상대방에
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먹을 휘두르는 케이는 그녀의 기억에는 없었다. 언제나 남을 먼저 배려해 주는 자상
하고 온화한 케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베르단디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때 스쿨드가 뭔가에 깜
짝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 저건!!"
케이가 오른쪽 흉부장갑을 열자 그것을 본 스쿨드가 경악하였다. 저건 틀림없이 메가 스매셔였다! 저걸 발
사한다면 왈큐레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스쿨드가 베르단디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언니! 저걸 막아야 해! 메가 스매셔가 발사되면..!!"
크게 당황해하는 스쿨드의 외침을 들은 베르단디가 즉시 움직였다. 지금 케이가 무슨 공격을 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의 케이를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지금 막지 못하면 영영 케이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베르단디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베르단디가 팔을 크게 벌리며 케이와 왈큐레들의 사이에 뛰
어들었다.
"케이씨! 안돼요!!!"
"베르단디!!"
메가 스매셔 발사직전에 베르단디가 뛰어들자 케이는 경악하였다. 이미 메가 스매셔의 에너지는 최고점에
도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발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케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상체를 비틀었다.
-퍼어어엉!!!
그 직후 메가 스매셔가 발사되었다. 그러나 케이가 상체를 튼 덕분에 다행히 메가 스매셔는 아무도 없는 허
공으로 발사되었다. 메가 스매셔의 엄청난 섬광이 하늘을 가르는 모습을 본 모두는 그 자리에서 바짝 얼어
붙었다. 특히나 방금 전까지 표적이 됐던 왈큐레 들은 다들 공포에 질렸다. 저 공격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면....!
"아...이..이건..!"
베르단디의 혼신의 외침 덕분일까, 케이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자신은 저들을 조아노이드처럼 공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메가 스매셔를 쓰려고 하기까지 하였다. 베르단디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저들을
죽였을 것이다. 케이는 베르단디의 얼굴을 봤다. 깊은 슬픔에 젖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케이는 크게 흔들리
기 시작했다.
그러나 왈큐레들은 전투를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곧 그녀들은 넓게 산개해서는 케이를 포위하였다. 한
군데 모여있다간 메가 스매셔 한방에 전멸 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린드도 있었다. 아까 까
지만 해도 케이와의 관계 때문인지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린드
는 잔뜩 긴장한 채로 배틀액스를 움켜쥐고 있었다.
린드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케이는 전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베르단디의 슬픔에 젖은 눈동자가 케이의
마음에서 전의를 걷어내었다. 더 이상 베르단디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케이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기로 하였다. 그러려면 일단 왈큐레들의 발을 묶어야 했다. 현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
지 않고 저들의 발을 묶을 수 있는 것이라면...
"소닉 버스터!"
케이의 입 부근의 진동구가 맹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저께 음파포를 사용하는 두 조아노이드와 싸울 때
익혔던 기술. 그 뒤로 케이는 남들 몰래 몇 번의 연습을 한 끝에 소닉버스터에 대해 깨우칠 수가 있었다.
소닉 버스터는 상대의 공명주파수를 튜닝해 목표를 분쇄하는 것. 세상 모든 물체는 공명주파수가 있지만 그
것은 모두가 다 다르다. 그렇다면 소닉 버스터로 특정한 물체만 골라 부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케이는
의식을 집중하였다. 목표는...!
-큐우우웅!!
가이버의 입 부근의 금속구가 붉게 변하면서 공기를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린드를 포함한 왈큐레
들은 또다시 가이버가 공격을 해 온다는 것을 알고는 잔뜩 긴장하였다. 그 때였다.
"아니!!"
"이..이건..!"
그녀들이 들고 있던 배틀액스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버렸다. 케이는 소닉버스터로 배틀액스의 공명주파수
를 튜닝, 배틀액스만 분쇄해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무기를 잃어버린 왈큐레들이 주춤거렸다. 왈큐레들의 무
기가 분쇄된 것을 확인한 케이는 소닉버스터의 목표를 주변의 땅으로 변경하였다. 다시 가이버의 금속구가
맹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그러자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갑작스런 흙먼지에 다들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사
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윈드!!"
-휘이이잉!!
린드가 바람의 법술을 외우자 어디선가 강풍이 불어와 흙먼지들을 빠르게 걷어내었다. 그러자 소닉버스터로
인해 엉망으로 파헤쳐진 지면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자리에 케이 -가이버Ⅰ- 의 모습은 없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면을 파헤쳐서 거기서 나온 흙먼지를 연막 삼아 그 사이에 도망친 것 같았다. 린드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아~ 아~ 굉장하구나. 가이버란 것은."
절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서 힐드와 마라가 아까부터 가이버Ⅰ과 천계 전투부간의 싸
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힐드는 어딘지 즐거워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마라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마라, 넌 앞으로 여기 얼쩡대지 않는 게 좋겠다. 넌 가이버에겐 한 주먹 거리겠는걸?"
"예? 제...제가요! 1급마인 제가 말입니까!"
허둥대는 마라의 모습에 힐드는 픽 하고 웃어버렸다. 마라는 1급마의 자존심 때문에 차마 자기 입으로 말은
못했지만 사실 가이버에게 정면 승부를 건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깨닫고 있었다. 전사도 아닌 마라가
천계 전투부 아홉명을 압도하는 가이버에게 단독으로 싸움을 걸 경우 어찌될 지는 뻔했다.
"자, 마라. 서두르자."
"네? 어...어디로."
"그야 뻔하잖아? 케이를 쫓아가야지."
"네!? 가이버와 싸우시게요?"
마라의 반응에 힐드는 입을 삐쭉였다. 힐드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난 저렇게 무식하게 일처리 안해. 넌 그동안 줄곧 날 따라다니고도 전혀 모르겠니? 정말 실망이다~"
힐드의 말에 마라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이윽고 둘은 그 자리에서 어딘가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
"린드! 당장 추격해야 합니다. 멀리는 못 갔을 겁니다."
다른 왈큐레들이 추격을 종용했지만 린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지금 가이버의 힘에 전율하고 있었다.
무슨 무기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배틀액스를 한 순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리다
니. 만약 케이가 노린 것이 무기가 아니라 자신들이었다면 모두 죽은목숨이라 생각하니 등에 식은땀이 흘렀
다. 게다가 가슴에서 발사됐던 그 무기를 비롯한 가이버의 능력들 역시 그녀의 예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
다. 사상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린드가 추격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생애의 벗이 되기로 했던 케이를 무슨 사냥감
처럼 추격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봉인을 시도하는 거친 방법이 아니라 사정을 차근차근
설명해서 천상계로 데려 갔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천상계의 명령은 가이버는
무척 위험한 것이므로 반드시 완전히 봉인한 후에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식장자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라
잘 설명하면 조용히 데려올 수 있을 거라는 린드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런 명령은 가능한 한 따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빠질까도 생각했지만 그런데도 린드가 이 일을 맡았던
것은 남에게 그걸 맡기느니 차라리 자신이 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그리고 일이 꼬이게 된 원인은....
"스쿨드."
린드는 베르단디들을 포위하고 있던 왈큐레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을 한 후 스쿨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스
쿨드는 린드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난 케이를 죽일 생각이 없어. 절대 봉인진을 쓴 것은 케이에게 붙은 가이버가 워낙 위험한 것이라서 그렇
게 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거짓말쟁이!! 린드는 케이의 컨트롤 메탈을 뺏으려 했잖아!"
스쿨드는 이제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었다. 린드는 스쿨드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메탈을 뺏으면 케이는 죽어!! 강식장갑에게 먹혀서 죽는단 말이야!"
"뭐라고!"
그 말에 베르단디와 울드, 린드는 충격을 받았다. 특히나 린드는 더욱 더 놀라고 있었다. 컨트롤 메탈 적출
은 최고 법술원에서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명령만 받았던 린드는 그걸 뺏기면 식장자가 어떻게 된다
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그걸 어떻게 안 건가?"
"저번에 일본지부에서 가이버Ⅱ의 메탈을 케이가 부쉈더니 그렇게 됐어! 그리고 케이도 그저께 엔자임에게
메탈을 뺏겨서 한 번 죽었던 적이....! 흡!!"
생각 없이 소리치던 스쿨드가 실수를 깨닫고 서둘러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케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얘기해선 안 된다던 걸 말해버리고 말았다. 스쿨드는 베르단디를 돌아보았다. 제발 제대로 듣지 못
했길 빌면서. 그러나 베르단디는 확실히 그 말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주 창백해져 있었다. 베르단디가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스..스쿨드..! 그..그게 무슨 소리니? 응!"
"어..언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할 수 없이 스쿨드는 모든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가이버에게 있어서 컨트롤 메
탈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케이에게 일어났었던 일들을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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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정신없이 도망친 케이는 잠시 멈춰서 숨을 돌렸다. 그리고 헤드 센서에 의식을 집중하였다. 헤드 센서에 아
무 것도 감지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다행히 추격자는 없는 것 같았다. 케이는 한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
시 주위를 둘러본 케이는 깜짝 놀랐다. 정신없이 달아나서 몰랐는데 그는 어느새 대학 뒤편의 호수에 와있
었다. 모든 일이 시작된 곳, 처음 유니트와 접촉했던 곳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이다.
케이는 식장을 풀었다. 그리고 호수가 까지 걸어간 다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벌써 어두워져서 하늘에 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별들을 바라보던 케이는
그대로 벌렁 뒤로 누워버렸다. 온 몸의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아까 왈큐레들의 결계진의 영향과는 별로
상관없었다. 그 보다는 이젠 어쩌나 하는 걱정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천계에서 린드가 왔을 때는 이제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 싶어서 기뻤지만 그건 한 순간이었다. 믿었던 천계
마저 케이를, 아니 정확히는 가이버를 노리고 있으니 이젠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세상 모든 것에서
버림받은 것만 같았다. 베르단디를 싸우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혼자서는 도저히 크로노스에 맞설 자
신이 없다. 그렇다고 크로노스가 자기를 그냥 놔둘 리도 만무했다. 가이버Ⅲ와 연락이라도 되면 좋겠지만
그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같이 싸워 줄지도 의문이었다. 처음부
터 같이 싸워 줄 의사가 있었으면 케이에게 자신의 정체를 솔직히 드러내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자고 했
을 거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고민중이지?"
그 때 누군가가 불쑥 케이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케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1000분의 1 분신상태의
힐드와 마라였다. 케이는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힐드는 입을 삐쭉거렸다.
"뭐야,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나 경계할 필요는 없잖아~♡."
"여...여긴 웬일인가요!"
"뭐, 그냥 네가 좀 불쌍해 보여서 도와주려고."
이제까지 무슨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으면 꼭 조건을 붙이던 인물이 갑자기 그냥 도와주겠다는 것을 케이
는 믿을 수가 없었다. 케이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어...어떻게 날 도와준다는 거죠?"
"뭐, 간단해. 마계에 오라는 거지."
"마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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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는 모든 것을 다 얘기하였다. 스쿨드의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나 베
르단디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얘기가 다 끝나자 베르단디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언니!!"
"베르단디!"
"케이씨가....케이씨가 죽었었다니...."
놀란 울드와 스쿨드가 급히 베르단디에게 다가갔다. 베르단디의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울드와 스쿨드가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린드는 그런 베르단디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다른 왈큐레들이 린드에게 다가와서는 다시 추격을 재촉하였다.
"린드, 당장 추격해야 합니다. 가이버의 약점이 이마의 메탈이란 것도 알았고..."
그 순간 린드는 그 왈큐레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린드의 시선에 왈큐레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
다. 곁에 있던 다른 왈큐레들 까지 린드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린드의 이런 태도
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계의 명령은 당장 가이버를 잡아오라는 것이었잖은가.
"린드!"
베르단디를 달래던 울드는 린드를 노려보았다. 린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울드가 왜 저러는
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케이를, 정말 케이를 죽일 셈이야! 생애의 벗이란건 거짓말이었어?!!"
울드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린드에게 뿐만 아니라 울드는 천계에 대해서도 강한 배신감을 느끼
고 있었다. 정체 불명의 강적에게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좀 도와달라고 지원을 요청했건만 천계는 도와줄
생각은커녕 오히려 케이를 죽이려고 (비록 린드가 받은 명령은 그저 가이버를 포획해 오라는 것뿐이었지만)
왈큐레들을 보냈으니 그런 감정이 드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곁에 있던 왈큐레들도 린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린드가 이번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
시켜 임무를 등한시하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이것은 중대한 명령위반행위였다. 지금 그들은 린드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임무냐, 친구냐. 린드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나는...."
이윽고 린드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결의에 차 있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입장을 정리한 모양이었
다.
"나는 가이버 포획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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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는 힐드의 말에 깜짝 놀라 반문하였다. 힐드는 그런 케이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케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계로 오라니요! 대체 이유가..."
"말했잖앙~♡ 도와주겠다고."
"그러니까 어떻게 도...!"
그 순간 케이는 온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힐드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케이는 직감적으로 힐드의 마법에 당하고 말았다는 걸 눈치챘다. 일종의 최면술일까?
"자....마계로 와. 그러면 모든 근심과 고통에서 해방이야."
힐드는 케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채로 마라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마라는 음흉하게 웃으며 품속에서
봉인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케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안돼... 이...이대로는..!'
케이는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려 하였다. 그러나 몸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의식도 점점 흐려지
고 있었다. 이대로 끝장인가.
'케이씨!'
그 때 베르단디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어젯밤 호수에서 봤던 베르단디의 슬픈 얼굴, 갑자기 왜 그
표정이 생각났을까. 여기가 바로 그 장소 부근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지금의 베르단디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케이는 최후의 힘을 쥐어 짜냈다.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가."
"가?"
그 순간 케이가 뭔가 말하기 시작했다. 힐드는 참으로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최면술에 걸려서도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의 인간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 때 케이가 혼신의 힘을 다
해 외쳤다!
"가이버어어!!!!"
-퍼엉!!
"우와아아!!!"
케이는 최후의 힘을 쥐어 짜내 가이버로 변신하는데 성공하였다. 힐드는 가이버가 소환되는 찰나의 순간 동
안 간신히 몸을 피하는데 성공해서 충격파에 당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왔던 마라는 피하질 못했다. 강
력한 충격파에 마라는 형편없이 튕겨나갔다.
".....이거 대단한데. 유니트 가이버란 것은 말이야. 그리고 너의 그 정신력도."
힐드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 충격파에 자신도 당할 뻔했다. 지금 그녀는 원래
몸의 1000분의 1 수준의 힘만 가진데다가 몸에 힘을 억제하는 봉인구까지 하고 있어서 저 충격파에 휩쓸렸
다면 큰 데미지를 입었을 것이다.
가이버로 변신한 케이는 곧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는 바로 왼손을 들어 왼쪽의 흉부장갑에 손을 대었다.
여차하면 메가 스매셔를 날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힐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마계
에 있는 본체와 합체한다면야 손쉬운 상대이지만 지금 분신상태의 그녀의 힘으로는 가이버Ⅰ과 싸워서 반
드시 승리한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싸울 생각도 없었지만. 왜냐하면 온전하게 마계로
데려가야 하니까.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거야!!"
"뻔하잖아? 마계로 데려가려는 거였지. 우리 역시 유니트 가이버가 필요하거든."
케이는 힐드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마계까지 유니트를 노리다니! 크로노스와 천계도 모자라서 이젠
마계까지 덤벼드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이란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하지만 난 널 가급적 조용히 데려가려고 그랬던 거라고. 그리고 컨트롤 메탈만 손에 넣고 넌 온전히 보내
줄 생각이었단 말씀. 왜냐면 넌 울드랑 아주 잘 아니까 말이야. 그래서 부드럽게 대해주려고 했던 건데..."
"어째서 가이버를 노리는 거냐!"
"후훗. 천계랑 같은 이유지. 유니트 가이버는 '그들'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니까."
케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설명을 요구했지만 힐드는 그저 장난스러운 표정만 지으며 더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충격파에 당해서 뻗어있는 마라를 들어올리고는 어딘가로 날아가려고 하였다. 케이는 여전
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힐드가 날아가려다 말고 케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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