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여신님-세계를 구하기 위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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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다들 왜 그러고 있어요?”
케이는 현장에 도착하자 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그을리고 폭발한 흔적들과 바닥에 구르고 있는 피스 대원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좀전의 낭패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섭선을 들고 있는 초류향의 모습에 케이는 잠시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도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좀 전 까지만 해도 잘 싸우는 것 같더니….”
케이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좀 밀리는 것 같긴 해도 수월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헌데 이곳에 도착해서 본 상황은 적은 멀쩡하고(그것이 비록 허세일 지라도 일단은 모두 복원했으니 초류향은 지금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다)피스 대원들은 모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너도 저 버러지들처럼 오라능력자냐?”
버러지? 케이는 유독 그 하나의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저 짧은 말에서도 확실하게 그는 인간을 벌레 취급하고 있었다. 아, 몬스터들의 5대 간부라고 했었나? 그럼 그렇게 말 할 수도 있겠군. 그동안 꽤 많이 당해왔을 테니까.
“큭, 뭐 아니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우리 노아가 아닌 테라인은 모두 적이니까. 그러니까….”
초류향은 말을 잠깐 끊더니 케이를 분노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눈앞의 존재는 왠지 모르게 공격하기가 꺼려졌다. 너무도 높은 곳에 있다는 존재감. 자신의 존재가 눈앞의 존재와 비교하면 마치 벌레 같다는 느낌. 그런 자조 속에서 열등감은 곧 분노가 되어 눈앞의 존재를 태워버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들끓었다. 초류향은 섭선을 휘두르며 끊었던 말을 이었다.
“너도 죽어버려!!!”
퍼퍼퍼펑!
또다시 생성된 더스트 익스플로젼. 그 강대한 위력이 다시 한번 12구역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연속된 폭발로 인해 역사 안은 먼지로 가득찼지만 초류향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자신과 싸우던 오라능력자들과 같이 바닥을 뒹굴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크크크큭, 그래. 너희 하찮은 테라인들은 그렇게 벌레처럼 바닥을 뒹구는게 어울려. 가이아의 힘은 벌레들이 쓰기엔 너무나 큰 힘이란 말이다! 내가 어울리지 않는 그 힘을 거두어 주겠다!”
초류향은 광분하여 소리치다가 문득 저 먼지 속에서 오라가 아닌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너무나 깨끗하고 순수한 기운.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니. 이건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웠다.
“좀 전부터 계속 벌레라느니 버러지라느니 귀에 거슬리는군요. 그쪽도 공격을 당하면 같은 모습이 된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인지요?”
먼지 속에서 태연하게 들리는 저 목소리는 바로 케이였다. 그는 폭굉이 몰아쳐 올 때 자신과 쓰러져있는 피스 대원들을 모두 감싸는 수호막을 펼쳤다. 다들 정신을 잃고 있진 않았지만 다시 한번 폭굉을 견디면 전투불능이 될 수도 있었다. 케이는 이왕 도와주기로 한거 확실하게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로 피차간에 긴 말은 굳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수호막을 거두고는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뒤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피스 대원들이 서있었는데 케이는 그 중 피스 블루 유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인…이라고 했나요?”
가인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그가 멍하니 있건 말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바람을 다룬다고 했죠? 가인군은 아직 그 응용력이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는 쉽게 이길 수 있는 것도 어렵게 만든다고요. 재가 몇가지 예를 보여줄테니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케이가 초류향을 향해서 주먹을 들어올리니 케이의 오른손에서 가인이 천공권을 쓸 때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주먹의 주위로 모여드는 엄청난 바람! 비록 위력은 수십 배 차이가 나지만 천공권과 다를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방을 위한 준비작업. 진짜는 왼손의 네 손가락에 모여드는 바람이었다. 케이는 그것을 초류향을 향해 던졌다.
“핫!”
간다!
풍박(風縛)
초류향도 케이의 손끝에 모이는 기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던지면 유유히 피하기로 마음먹고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케이가 던진 바람의 기운들은 뇌가 인지하기도 전에 자신의 양손과 양발에 달라붙어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다.
이, 이건 뭐냐! 말도 안돼! 보지도 못했다! 초류향이 그렇게 절규할 때 케이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보이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 이유가 궁금하겠죠? 뭐 간단해요. 바람은 한없이 자유로운 힘. 그 무엇보다 빠른 힘. 도대체 그런 바람을 볼 생각을 했다니. 그쪽도 어떤 의미론 대단하군요. 이것도 막아낼 수 있을지 보겠습니다.”
케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초류향을 향해 오른손에 모아두었던 바람의 회오리를 내던졌다.
쿠콰콰콰!!!
엄청난 소리를 동반하며 거세게 초류향에게 다가오는 케이의 천공권. 초류향은 이를 악물며 아껴두었던 최후의 힘을 사용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을 쳤다.
화르르르륵
초류향의 눈앞으로 거대한 불의 회오리가 솟아올랐다. 다른 말로는 파이어 스톰(fire storm)이라고도 하는 그 불의 회오리는 회전을 함으로 인해 여러겹의 방어막이 생기기 때문에 고작 한겹 정도의 방어막 역할만 했던 불의 장벽보다는 훨씬 강력한 방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라면 막을 수 있다! 여기서 살아남으면 반드시 네놈을 찢어 죽이리라! 그렇게 초류향이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천공권과 불의 회오리가 부딪치는가 싶었는데 이게 왠 일. 케이가 만들어낸 천공권은 둘로 나누어져 그대로 불의 회오리를 지나치더니 바로 뒤의 초류향을 직접 공격하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벌였다. 초류향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채 무엇을 시도하기도 전에 그 속에 휩쓸렸다.
“크아아아아!!!!!!”
역사 안은 초류향의 비명 소리만 가득할 뿐 그 이외에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제가 말했죠? 바람은 한없이 자유로운 힘이라고. 그 무엇도 바람을 묶어둘 수도 없고 다룰 수도 없어요. 단지 부탁해서 힘을 빌리는 것 뿐. 고정관념이라는 것에 생각을 묶어두지 말아요. 가인군은 아직 젊은데 왜 생각을 그 안에 끼워 맞출려고만 합니까?”
“아!”
케이의 마지막 말에 가인은 문득 브루스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일탈해라.’
‘바보같은 놈. 젊은 놈이 왜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하냐. 네 안의 틀을 깨란 말이다.’
‘일탈하지 못하는 한 넌 그놈을 이길 수 없다.’
이런 뜻이었나. 난 왜 천공권이 직선으로밖에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지? 내가 다루는건 바람인데 왜 묶어두려고만 했을까. 아아. 유가인, 이 한심한 놈! 도대체 뭐가 강하다는 거냐! 그저 자그마한 힘에 취해서 자만에 빠져 있었을 뿐 다른 걸 시도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잖아!
“하하. 소년 뭘 그리 우울해 하고 그래. 이제라도 알았으니 좀 더 사고의 폭을 넓히면 되는거야. 그렇게 조금씩 강해져 가는 거라고.
“그렇다. 가인.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넌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좀전에 본 것을 바탕으로 수련한다면 넌 새로운 기술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정진우와 마리가 가인을 위로했다. 그들도 피스 대원이기 이전에 한사람의 무인이기 때문에 기술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운용한다는 것은 시도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라가 아무리 이미지 메이킹으로 구현되는 것이라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항상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케이가 보여준 기술은 그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케이가 알고 있는 기술중에 기본적인걸 보여줬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직 그를 소멸시키진 않았습니다만…그쪽에 처리를 맡기고 이만 가봐도 되겠죠?”
케이의 목소리에 그들은 놀라서 초류향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분명 케이가 쓴 기술의 위력은 가인의 전력을 다한 천공권보다 더 강해 보였다. 근데 천공권이 불의 회오리를 뚫고 들어가서 위력이 줄어든 상태로 맞은것도 아니고 둘로 나뉘어서 하나만 맞은것도 아닌데 그걸 맞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니…세삼 5대간부의 생명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초류향의 정신이 약해짐으로 인해 불의 회오리는 유지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불의 회오리 뒤에 있던 초류향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에 이곳저곳에 상처가 많이 났지만 미약하게 느껴지는 기운으로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없앨 수 있었으면서 왜 없애지 않은 겁니까?”
진우가 느꼈던 그 힘은 분명 초류향을 한번에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렇게 생각한건 진우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공격을 당하 초류향 자신도 죽음의 공포를 느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은 케이가 그 힘을 줄였다는 뜻일 터, 케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그는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저는 여지껏 살인은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생명 경시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베르단디가 싫어하니까요. 저는 단지 그를 제압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케이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초류향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케이의 손에서 약간의 기운이 모여들더니 이내 무형의 사슬이 되어 쓰러져있는 초류향의 손발을 꽁꽁 묶었다. 그는 완벽하게 제압된 것이다. 이런 것이 솔직히 케이의 실력은 아니다. 단지 세레스틴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일 뿐. 이곳에 있을 동안 세레스틴의 능력을 자기것으로 만드는게 케이가 한동안 할 일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케이는 피스 대원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피스 대원들은 멍하니 있다가 문득 브루스가 계속 안보였던 것을 깨닫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브루스는 보이질 않았다.
“사부님이 어딜 가신거지?”
“브루스라는 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그는 제가 제압한 저자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자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진우의 말에 케이가 답변을 해줬다. 초류향과 비슷한 기운을 가진 자라고? 그럼 또 다른 용마인 인건가. 이상하군. 나타나는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진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는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떠오르는 의문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고민해봐야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것은 그저 진 사령관님께 맡기고 자신은 열심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일 것이다. 진우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유레카에 무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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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물의 창을 벽경으로 가볍게 후려쳐서 방향을 바꾸고는 재빨리 보법을 밟아 레비아탄의 뒤로 돌아갔다. 레비아탄은 자신의 뒤로 접근한 브루스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가 끼고 있던 반지 중 하나가 물로 변하더니 브루스의 발밑에서 물의 창이 솟아올랐다. 이대로 계속 접근하려 한다면 분명 물의 창에 꽤뚫릴 터! 레비아탄은 그가 뒤로 물러나리라 생각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의 예상을 가볍게 무시하며 그대로 돌진해왔다.
이런 미친! 죽으려고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레비아탄은 브루스의 무모한 행동에 눈을 부릅떴다. 브루스는 발밑에 솟아나는 물의 창의 힘을 이용해 그것을 밟고 레비아탄을 향해 그대로 쇄도해왔다. 그리고 쏟아지는 브루스의 공격!
칠성권! 녹존!
투아아아앙!
상대의 주심을 파괴하는 칠성권 제 3의 발경! 그 강대한 전사경이 레비아탄을 향해 쏟아졌다.
“커어억!”
레비아탄은 녹존을 맞고는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아무리 기억의 공유를 통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지만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괜히 브리트라가 당한 것이 아니었군.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어차피 내 역할은 이미 충분히 이룬 것 같으니 기회를 봐서 퇴각을 해야겠군. 레비아탄이 그렇게 고통속에서 이곳을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브루스의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 용마인 중 하나라 기대했거늘 초류향이나 쿠사나기나…네놈까지 날 즐겁게 해 줄 존재가 없다니…….”
브루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최초의 용마인인 브리트라는 LA에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때의 브리트라의 모습은 SA급 몬스터 드래곤! 처음에 브리트라를 상대할 때 브루스는 매우 기뻤었다. 과연 SA급의 힘은 그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하지만 초류향과 쿠사나기를 상대하면서 브리트라보다 못한 그들이 과연 같은 용마인 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평을 들어줘야 할 레비아탄은 이 장소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쩌저저저정
갑자기 브루스의 머리 위로 거대한 얼음의 창들이 쏟아져 내렸다. 브루스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더니 재빠르게 레비아탄에게 짓쳐 들어갔다. 하지만…….
“이,이런! 감히 네놈이!”
레비아탄의 주위로 뿌연 물안개가 뒤덥히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 레비아탄은 사라져버렸다. 브루스는 허탈함에 그 자리에 멍하니 있다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귀환소리에 일행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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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년 9월 27일 19시 17분에 12구역 상공에 B급 몬스터 와이번과 5대간부 중 하나인 요르문간드의 용마인 초류향과 레비아탄이 출현. B급 몬스터 와이번을 격파. 레비아탄은 도주했습니다. 케이씨의 도움으로 초류향을 생포 할 수 있었지만 그도 갑자기 사라져버렸습니다.”
민수정의 브리핑에 자리에 있던 피스메이커 수뇌부들이 신음을 흘렸다. 기껏 초류향을 잡아놨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리다니…도대체 철통같은 감시 속에서 어떻게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민수정의 브리핑이 다시 이어졌다.
“초류향은 평소에 불꽃을 이용해 공간을 이동해 왔었습니다. 이번에도 아마 그렇게 탈출한 듯합니다. 케이씨가 그를 제압해 두었던 힘을 풀었으니 더 이상 그를 구속할 어떠한 수단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수뇌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향을 감옥에 가두자마자 케이는 그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힘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들은 그때 신의 힘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묶어둘 수 없었던 용마인을 그 힘 하나로 가볍게 제압한 것이다.
“케이씨 일행은 피스 대원들과 함께 복귀 후 진 사령님과 만나 피스메이커의 일에 협조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거주지는 현제 피스 블루, 피스 핑크, 피스 옐로우, 피스 그레이가 머물고 있는 곳에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대우는 피스 대원들과 동급으로 하며 팔라딘은 붙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피스 옐로우의 집이 그렇게 넓었던가요?”
닥터의 질문에 민수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그 장소에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분들이 다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진 않지만……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을 늘렸습니다.”
닥터를 포함한 수뇌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간을 늘렸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렇게 와닫지 않는 말이었다. 수뇌부들은 다시 시선을 민수정에게 돌려 부연설명을 부탁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시민양의 집은 정확히 3배정도 넓어졌습니다. 도대체 신의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겉보기로는 전혀 달라진게 없습니다. 그런데 집 내부는 3배 정도가 더 넓으니…저도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거에요. 게다가 이왕 얹혀 살게 되었다면서 청소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술법으로 자동으로 청결을 유지시켜 준다고….”
그녀의 말에 수뇌부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신의 힘은 어떤거기에 공간을 늘리고 자동으로 청결을 유지시킨단 말인가. 물론 유레카도 자동으로 청결이 유지된다. 하나의 도시와 맞먹을 정도의 크기인데 민간인인 청소부를 안으로 들일 순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과학으로 가능한 것이고 그쪽은 술법이다. 차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진짜 그분들은 황당한 일만 골라서 하는거 같아요. 와이번을 한번에 없애버리질 않나…그분들에게 감시원을 두는거 자체가 인력 낭비죠.”
민수정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수뇌부들은 B급 몬스터 와이번을 한번에 소멸시켜 버리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그때 와이번을 향해 내리꽂히던 번개의 힘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드래곤에게도 치명타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아니, 드래곤도 한방에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영상을 보고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는 이런 말을 했었다.
‘저정도의 힘이라면 아마 드래곤도 한방에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신의 힘은 어마어마하군. 내 탐랑과 비슷한 정도의 힘이라 생각된다.’
브루스의 탐랑은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카오스의 힘, 아포칼립스 제레네이터를 생성시키는 기술이었다. 용마인 브리트라를 상대할 때도 사용했던 기술이었다. 그럼 울드의 격멸굉뢰도 아포칼립스 제레네이터를 생성한단 말인가.
닥터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저 괴물같은 브루스도 탐랑을 한번 쓰고 나면 영계에서 힘을 보충해야 했다. 그런데 탐랑이랑 비슷한 힘을 썻던 울드는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질 않았었다. 그리고 그 때 몇마디 나눈 말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스크린을 통해서 상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았는데 그런 태연한 모습이라니. 닥터는 결국 그들이 신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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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26구역에 위치한 한시민의 집.
시민의 집에서는 평소와 같은 생활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시민의 일상은 7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가인들을 깨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데 오늘은 그 평범한 일상이 변했다. 시민이 일어나 주방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식사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 사람은 바로….
“일어나셨어요? 일단 신세지고 있으니 제가 아침을 준비해봤어요. 다들 입에 맞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바로 베르단디였다. 역시 너무나 친절한 베르단디. 그녀의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항상 도움을 주려는 그 따뜻한 배려심. 그 끝없는 자상함과 못하는 것이 없는 완벽함이 더해져 천상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언제나 요리를 할때면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시민은 베르단디가 만든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종류는 요리의 지식이 짧기 때문에 나열하지 않겠다. 다만 사람 수가 수인 만큼 무지 많다는 것만 알아두자. 시민은 상에 차려져있는 많은 반찬들 중 가까이 있던 나무무침을 한입 먹어보았다.
“어머.”
시민은 베르단디의 요리를 먹어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느낌과 씹을수록 고소함과 단맛이 살아난다. 나물 특유의 맛을 살리면서도 조미료의 맛이 강하지 않고 뒷맛이 입안에 은은하게 남아서 식욕을 돋궈준다. 이 요리 하나만으로도 시민은 베르단디의 요리 실력이 엄청난 프로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자신은 이런 맛을 낼 자신이 없었다. 시민은 결국 요리는 베르단디에게 넘기고 자신은 가인들을 깨우기로 했다.
똑똑
“가인 씨, 아침이에요. 얼른 일어나서 식사하고 학교 가셔야죠?”
시민은 가인의 방에서 반응이 없자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끼익
가인은 침대에서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가인 씨도 참, 언제나 깨워줘야 한다니까. 시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전혀 귀찮거나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시민은 침대에 다가가서 가인을 깨우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문득 가인의 얼굴을 바라보니 자신도 모르게 가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으음”
시민의 손길에 가인은 가볍게 뒤척이다 잠시 후 눈을 떴다. 시민은 가인이 깨는 소리에 황급히 손을 거둔 상태였다.
“시민……씨?”
“예, 가인 씨, 아침이에요. 그만 일어나세요.”
시민이 미소지으며 말하자 가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를 돌아보니 그곳은 비어있었다. 브루스는 이미 일어나서 산책이라도 하고 있나 보다. 원래는 브루스가 가인을 깨워서 같이 나가 운동을 하고 오는게 일상인데 오늘은 특별이 쉬게 해주는 것이다.
가인은 간단히 세면을 한 뒤 유리를 깨워서 욕실로 보내고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가인과 유리를 뺀 나머지 식구들, 어제 새로 들어온 여신들까지 모두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우와, 시민 씨. 이 요리를 모두 다 만드신 거에요? 일찍 일어나는 것도 피곤하실 텐데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도와드릴 텐데….”
가인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지만 시민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이 요리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기에. 식탁에 차려진 각가지 요리들은 모두 하나부터 열까지 베르단디의 손에 의해 탄생한 것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양과 질이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하다는 점이 시민에게 또 한번의 허탈함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가인 씨, 이건 제가 한 것이 아니에요. 전부 저기 베르단디씨가 한 것이죠.”
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르단디씨가? 이 많은 요리를 모두 혼자서? 혹시 모두 술법으로 한 것은 아닐까? 가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페이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것은 술법으로 한 것이 아니에요. 저는 여태 베르단디가 요리를 할 때 술법을 사용하는 것을 못봤어요. 한마디로 모두 그녀가 전부 하나하나 요리를 했다는 거죠.”
이것을 모두 혼자서? 이 많은 요리를? 가인이 그렇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있을 때 시민이 말했다.
“가인 씨, 얼른 드시고 학교 가셔야죠. 도시락은 준비 놨으니까 얼른 드시고 등교 준비 하세요.”
“아, 예. 잘 먹겠습니다.”
가인은 국을 한입 떠먹었다. 그리곤 역시 시민처럼 놀랐다. 어떻게 국에서 이런 깊은 맛이⋯가인은 놀라며 다른 반찬들도 하나씩 먹어보았다. 반찬은 하나하나가 그 고유의 맛을 살리면서도 조미료들이 재료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천상의 맛! 과연 여신! 엉뚱한데서 여신의 힘을 느끼는 가인이었다.
“재료 하나하나에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졌다. 애송아. 잘 느껴봐라. 이 간단한 요리 하나에도 세상의 이치를 담아내었다. 네놈은 짐작을 할 수 있겠냐.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인데 요리 하나에도 세상의 이치를 담아내는지. 신의 벽이란 이렇게 높은 거였군.”
결코 남을 한부로 칭찬하지 않는 브루스가 베르단디의 요리 하나만으로도 이정도로 극찬을 하고 있었다. 브루스가 느낀 것은 모든 요리에 음과 양의 조화가 깃들어 그 무엇보다도 몸의 균형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간단한 음식만으로도 선도(仙道)를 이룬 자신도 그동안 미묘하게 맞지 않던 균형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게다가 오라의 양이 미약하나마 늘어났다. 베르단디의 요리는 오라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그들은 지금 엄청난 기연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느낌은 브루스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피스 대원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맛 자체가 최상이기 때문에 가인들은 음식을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그 모습을 베르단디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식사가 끝난 후 베르단디와 시민이 같이 설거지를 했다. 혼자서 다 하기에는 그 양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술법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언제 이런 일에 베르단디가 술법을 사용한 일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당연히 설거지는 스스로 할 수밖에.
“시민 씨,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
“갔다 오겠다.”
“예,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세요. 맛있는 저녁 준비해 놓을게요.”
가인과 유리, 브루스는 24구역에 있는 한성고등학교로 향했고 시민은 베르단디랑 마저 설거지를 끝낸 후 저녁에 요리할 장을 보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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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집과 가까운 어느 집의 지붕에서 한성고등학교로 향하는 가인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머리, 검은색의 선글라스, 그 선글라스 안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감흥빛 눈동자와 입가의 시니컬한 미소, 바로 인류의 배신자라 불리는 피스 블랙 한시영이었다.
“유빈, 저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냈니?”
시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옆에 서있는 피스 핑크와 같은 능력을 지닌 또 다른 배신자 피스 카민, 마인드 브레이커 마유빈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마스터. 도저히 누군지를 알아내지 못하겠어요. 정신 장벽이 너무나 두껍게 쳐져 있어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아요.”
유빈은 마스터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시영은 그 모습을 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잘못한건 없단다. 그만큼 저 안에 있는 자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지.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다간 나의 계획을 계속 방해하게 될 것 같구나. 빠른 시일내로 쉐도우 다이브라도 해봐야 겠구나.”
불쌍한 테라인들. 당신들은 앞으로 어떠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겠지.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운명은 너무나 잔혹하기에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낳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너무나 가련한 자들이다. 당신들 테라인은…….”
한동안 시민의 집을 바라보던 시영은 이내 유빈과 함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케이는 현장에 도착하자 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그을리고 폭발한 흔적들과 바닥에 구르고 있는 피스 대원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좀전의 낭패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섭선을 들고 있는 초류향의 모습에 케이는 잠시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도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좀 전 까지만 해도 잘 싸우는 것 같더니….”
케이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좀 밀리는 것 같긴 해도 수월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헌데 이곳에 도착해서 본 상황은 적은 멀쩡하고(그것이 비록 허세일 지라도 일단은 모두 복원했으니 초류향은 지금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다)피스 대원들은 모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너도 저 버러지들처럼 오라능력자냐?”
버러지? 케이는 유독 그 하나의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저 짧은 말에서도 확실하게 그는 인간을 벌레 취급하고 있었다. 아, 몬스터들의 5대 간부라고 했었나? 그럼 그렇게 말 할 수도 있겠군. 그동안 꽤 많이 당해왔을 테니까.
“큭, 뭐 아니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우리 노아가 아닌 테라인은 모두 적이니까. 그러니까….”
초류향은 말을 잠깐 끊더니 케이를 분노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눈앞의 존재는 왠지 모르게 공격하기가 꺼려졌다. 너무도 높은 곳에 있다는 존재감. 자신의 존재가 눈앞의 존재와 비교하면 마치 벌레 같다는 느낌. 그런 자조 속에서 열등감은 곧 분노가 되어 눈앞의 존재를 태워버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들끓었다. 초류향은 섭선을 휘두르며 끊었던 말을 이었다.
“너도 죽어버려!!!”
퍼퍼퍼펑!
또다시 생성된 더스트 익스플로젼. 그 강대한 위력이 다시 한번 12구역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연속된 폭발로 인해 역사 안은 먼지로 가득찼지만 초류향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자신과 싸우던 오라능력자들과 같이 바닥을 뒹굴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크크크큭, 그래. 너희 하찮은 테라인들은 그렇게 벌레처럼 바닥을 뒹구는게 어울려. 가이아의 힘은 벌레들이 쓰기엔 너무나 큰 힘이란 말이다! 내가 어울리지 않는 그 힘을 거두어 주겠다!”
초류향은 광분하여 소리치다가 문득 저 먼지 속에서 오라가 아닌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너무나 깨끗하고 순수한 기운.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니. 이건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웠다.
“좀 전부터 계속 벌레라느니 버러지라느니 귀에 거슬리는군요. 그쪽도 공격을 당하면 같은 모습이 된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인지요?”
먼지 속에서 태연하게 들리는 저 목소리는 바로 케이였다. 그는 폭굉이 몰아쳐 올 때 자신과 쓰러져있는 피스 대원들을 모두 감싸는 수호막을 펼쳤다. 다들 정신을 잃고 있진 않았지만 다시 한번 폭굉을 견디면 전투불능이 될 수도 있었다. 케이는 이왕 도와주기로 한거 확실하게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로 피차간에 긴 말은 굳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수호막을 거두고는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뒤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피스 대원들이 서있었는데 케이는 그 중 피스 블루 유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인…이라고 했나요?”
가인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그가 멍하니 있건 말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바람을 다룬다고 했죠? 가인군은 아직 그 응용력이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는 쉽게 이길 수 있는 것도 어렵게 만든다고요. 재가 몇가지 예를 보여줄테니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케이가 초류향을 향해서 주먹을 들어올리니 케이의 오른손에서 가인이 천공권을 쓸 때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주먹의 주위로 모여드는 엄청난 바람! 비록 위력은 수십 배 차이가 나지만 천공권과 다를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방을 위한 준비작업. 진짜는 왼손의 네 손가락에 모여드는 바람이었다. 케이는 그것을 초류향을 향해 던졌다.
“핫!”
간다!
풍박(風縛)
초류향도 케이의 손끝에 모이는 기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던지면 유유히 피하기로 마음먹고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케이가 던진 바람의 기운들은 뇌가 인지하기도 전에 자신의 양손과 양발에 달라붙어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다.
이, 이건 뭐냐! 말도 안돼! 보지도 못했다! 초류향이 그렇게 절규할 때 케이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보이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 이유가 궁금하겠죠? 뭐 간단해요. 바람은 한없이 자유로운 힘. 그 무엇보다 빠른 힘. 도대체 그런 바람을 볼 생각을 했다니. 그쪽도 어떤 의미론 대단하군요. 이것도 막아낼 수 있을지 보겠습니다.”
케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초류향을 향해 오른손에 모아두었던 바람의 회오리를 내던졌다.
쿠콰콰콰!!!
엄청난 소리를 동반하며 거세게 초류향에게 다가오는 케이의 천공권. 초류향은 이를 악물며 아껴두었던 최후의 힘을 사용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을 쳤다.
화르르르륵
초류향의 눈앞으로 거대한 불의 회오리가 솟아올랐다. 다른 말로는 파이어 스톰(fire storm)이라고도 하는 그 불의 회오리는 회전을 함으로 인해 여러겹의 방어막이 생기기 때문에 고작 한겹 정도의 방어막 역할만 했던 불의 장벽보다는 훨씬 강력한 방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라면 막을 수 있다! 여기서 살아남으면 반드시 네놈을 찢어 죽이리라! 그렇게 초류향이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천공권과 불의 회오리가 부딪치는가 싶었는데 이게 왠 일. 케이가 만들어낸 천공권은 둘로 나누어져 그대로 불의 회오리를 지나치더니 바로 뒤의 초류향을 직접 공격하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벌였다. 초류향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채 무엇을 시도하기도 전에 그 속에 휩쓸렸다.
“크아아아아!!!!!!”
역사 안은 초류향의 비명 소리만 가득할 뿐 그 이외에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제가 말했죠? 바람은 한없이 자유로운 힘이라고. 그 무엇도 바람을 묶어둘 수도 없고 다룰 수도 없어요. 단지 부탁해서 힘을 빌리는 것 뿐. 고정관념이라는 것에 생각을 묶어두지 말아요. 가인군은 아직 젊은데 왜 생각을 그 안에 끼워 맞출려고만 합니까?”
“아!”
케이의 마지막 말에 가인은 문득 브루스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일탈해라.’
‘바보같은 놈. 젊은 놈이 왜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하냐. 네 안의 틀을 깨란 말이다.’
‘일탈하지 못하는 한 넌 그놈을 이길 수 없다.’
이런 뜻이었나. 난 왜 천공권이 직선으로밖에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지? 내가 다루는건 바람인데 왜 묶어두려고만 했을까. 아아. 유가인, 이 한심한 놈! 도대체 뭐가 강하다는 거냐! 그저 자그마한 힘에 취해서 자만에 빠져 있었을 뿐 다른 걸 시도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잖아!
“하하. 소년 뭘 그리 우울해 하고 그래. 이제라도 알았으니 좀 더 사고의 폭을 넓히면 되는거야. 그렇게 조금씩 강해져 가는 거라고.
“그렇다. 가인.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넌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좀전에 본 것을 바탕으로 수련한다면 넌 새로운 기술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정진우와 마리가 가인을 위로했다. 그들도 피스 대원이기 이전에 한사람의 무인이기 때문에 기술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운용한다는 것은 시도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라가 아무리 이미지 메이킹으로 구현되는 것이라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항상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케이가 보여준 기술은 그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케이가 알고 있는 기술중에 기본적인걸 보여줬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직 그를 소멸시키진 않았습니다만…그쪽에 처리를 맡기고 이만 가봐도 되겠죠?”
케이의 목소리에 그들은 놀라서 초류향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분명 케이가 쓴 기술의 위력은 가인의 전력을 다한 천공권보다 더 강해 보였다. 근데 천공권이 불의 회오리를 뚫고 들어가서 위력이 줄어든 상태로 맞은것도 아니고 둘로 나뉘어서 하나만 맞은것도 아닌데 그걸 맞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니…세삼 5대간부의 생명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초류향의 정신이 약해짐으로 인해 불의 회오리는 유지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불의 회오리 뒤에 있던 초류향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에 이곳저곳에 상처가 많이 났지만 미약하게 느껴지는 기운으로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를 없앨 수 있었으면서 왜 없애지 않은 겁니까?”
진우가 느꼈던 그 힘은 분명 초류향을 한번에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렇게 생각한건 진우뿐이 아니었다. 심지어 공격을 당하 초류향 자신도 죽음의 공포를 느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은 케이가 그 힘을 줄였다는 뜻일 터, 케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그는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저는 여지껏 살인은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생명 경시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무엇보다 베르단디가 싫어하니까요. 저는 단지 그를 제압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케이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초류향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케이의 손에서 약간의 기운이 모여들더니 이내 무형의 사슬이 되어 쓰러져있는 초류향의 손발을 꽁꽁 묶었다. 그는 완벽하게 제압된 것이다. 이런 것이 솔직히 케이의 실력은 아니다. 단지 세레스틴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일 뿐. 이곳에 있을 동안 세레스틴의 능력을 자기것으로 만드는게 케이가 한동안 할 일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케이는 피스 대원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피스 대원들은 멍하니 있다가 문득 브루스가 계속 안보였던 것을 깨닫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브루스는 보이질 않았다.
“사부님이 어딜 가신거지?”
“브루스라는 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그는 제가 제압한 저자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자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진우의 말에 케이가 답변을 해줬다. 초류향과 비슷한 기운을 가진 자라고? 그럼 또 다른 용마인 인건가. 이상하군. 나타나는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진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는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떠오르는 의문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고민해봐야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것은 그저 진 사령관님께 맡기고 자신은 열심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일 것이다. 진우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유레카에 무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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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물의 창을 벽경으로 가볍게 후려쳐서 방향을 바꾸고는 재빨리 보법을 밟아 레비아탄의 뒤로 돌아갔다. 레비아탄은 자신의 뒤로 접근한 브루스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가 끼고 있던 반지 중 하나가 물로 변하더니 브루스의 발밑에서 물의 창이 솟아올랐다. 이대로 계속 접근하려 한다면 분명 물의 창에 꽤뚫릴 터! 레비아탄은 그가 뒤로 물러나리라 생각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브루스는 그의 예상을 가볍게 무시하며 그대로 돌진해왔다.
이런 미친! 죽으려고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레비아탄은 브루스의 무모한 행동에 눈을 부릅떴다. 브루스는 발밑에 솟아나는 물의 창의 힘을 이용해 그것을 밟고 레비아탄을 향해 그대로 쇄도해왔다. 그리고 쏟아지는 브루스의 공격!
칠성권! 녹존!
투아아아앙!
상대의 주심을 파괴하는 칠성권 제 3의 발경! 그 강대한 전사경이 레비아탄을 향해 쏟아졌다.
“커어억!”
레비아탄은 녹존을 맞고는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아무리 기억의 공유를 통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지만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괜히 브리트라가 당한 것이 아니었군.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어차피 내 역할은 이미 충분히 이룬 것 같으니 기회를 봐서 퇴각을 해야겠군. 레비아탄이 그렇게 고통속에서 이곳을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브루스의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 용마인 중 하나라 기대했거늘 초류향이나 쿠사나기나…네놈까지 날 즐겁게 해 줄 존재가 없다니…….”
브루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최초의 용마인인 브리트라는 LA에 그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때의 브리트라의 모습은 SA급 몬스터 드래곤! 처음에 브리트라를 상대할 때 브루스는 매우 기뻤었다. 과연 SA급의 힘은 그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하지만 초류향과 쿠사나기를 상대하면서 브리트라보다 못한 그들이 과연 같은 용마인 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평을 들어줘야 할 레비아탄은 이 장소에서 벗어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쩌저저저정
갑자기 브루스의 머리 위로 거대한 얼음의 창들이 쏟아져 내렸다. 브루스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더니 재빠르게 레비아탄에게 짓쳐 들어갔다. 하지만…….
“이,이런! 감히 네놈이!”
레비아탄의 주위로 뿌연 물안개가 뒤덥히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 레비아탄은 사라져버렸다. 브루스는 허탈함에 그 자리에 멍하니 있다가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귀환소리에 일행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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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년 9월 27일 19시 17분에 12구역 상공에 B급 몬스터 와이번과 5대간부 중 하나인 요르문간드의 용마인 초류향과 레비아탄이 출현. B급 몬스터 와이번을 격파. 레비아탄은 도주했습니다. 케이씨의 도움으로 초류향을 생포 할 수 있었지만 그도 갑자기 사라져버렸습니다.”
민수정의 브리핑에 자리에 있던 피스메이커 수뇌부들이 신음을 흘렸다. 기껏 초류향을 잡아놨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리다니…도대체 철통같은 감시 속에서 어떻게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민수정의 브리핑이 다시 이어졌다.
“초류향은 평소에 불꽃을 이용해 공간을 이동해 왔었습니다. 이번에도 아마 그렇게 탈출한 듯합니다. 케이씨가 그를 제압해 두었던 힘을 풀었으니 더 이상 그를 구속할 어떠한 수단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수뇌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류향을 감옥에 가두자마자 케이는 그의 손과 발을 묶고 있던 힘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들은 그때 신의 힘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묶어둘 수 없었던 용마인을 그 힘 하나로 가볍게 제압한 것이다.
“케이씨 일행은 피스 대원들과 함께 복귀 후 진 사령님과 만나 피스메이커의 일에 협조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거주지는 현제 피스 블루, 피스 핑크, 피스 옐로우, 피스 그레이가 머물고 있는 곳에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대우는 피스 대원들과 동급으로 하며 팔라딘은 붙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피스 옐로우의 집이 그렇게 넓었던가요?”
닥터의 질문에 민수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그 장소에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분들이 다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진 않지만……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을 늘렸습니다.”
닥터를 포함한 수뇌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간을 늘렸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렇게 와닫지 않는 말이었다. 수뇌부들은 다시 시선을 민수정에게 돌려 부연설명을 부탁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시민양의 집은 정확히 3배정도 넓어졌습니다. 도대체 신의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겉보기로는 전혀 달라진게 없습니다. 그런데 집 내부는 3배 정도가 더 넓으니…저도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거에요. 게다가 이왕 얹혀 살게 되었다면서 청소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술법으로 자동으로 청결을 유지시켜 준다고….”
그녀의 말에 수뇌부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신의 힘은 어떤거기에 공간을 늘리고 자동으로 청결을 유지시킨단 말인가. 물론 유레카도 자동으로 청결이 유지된다. 하나의 도시와 맞먹을 정도의 크기인데 민간인인 청소부를 안으로 들일 순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과학으로 가능한 것이고 그쪽은 술법이다. 차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진짜 그분들은 황당한 일만 골라서 하는거 같아요. 와이번을 한번에 없애버리질 않나…그분들에게 감시원을 두는거 자체가 인력 낭비죠.”
민수정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수뇌부들은 B급 몬스터 와이번을 한번에 소멸시켜 버리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그때 와이번을 향해 내리꽂히던 번개의 힘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드래곤에게도 치명타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아니, 드래곤도 한방에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영상을 보고 피스 그레이 브루스 류는 이런 말을 했었다.
‘저정도의 힘이라면 아마 드래곤도 한방에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신의 힘은 어마어마하군. 내 탐랑과 비슷한 정도의 힘이라 생각된다.’
브루스의 탐랑은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카오스의 힘, 아포칼립스 제레네이터를 생성시키는 기술이었다. 용마인 브리트라를 상대할 때도 사용했던 기술이었다. 그럼 울드의 격멸굉뢰도 아포칼립스 제레네이터를 생성한단 말인가.
닥터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저 괴물같은 브루스도 탐랑을 한번 쓰고 나면 영계에서 힘을 보충해야 했다. 그런데 탐랑이랑 비슷한 힘을 썻던 울드는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질 않았었다. 그리고 그 때 몇마디 나눈 말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스크린을 통해서 상대를 공격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았는데 그런 태연한 모습이라니. 닥터는 결국 그들이 신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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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26구역에 위치한 한시민의 집.
시민의 집에서는 평소와 같은 생활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시민의 일상은 7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가인들을 깨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데 오늘은 그 평범한 일상이 변했다. 시민이 일어나 주방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식사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 사람은 바로….
“일어나셨어요? 일단 신세지고 있으니 제가 아침을 준비해봤어요. 다들 입에 맞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바로 베르단디였다. 역시 너무나 친절한 베르단디. 그녀의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항상 도움을 주려는 그 따뜻한 배려심. 그 끝없는 자상함과 못하는 것이 없는 완벽함이 더해져 천상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언제나 요리를 할때면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시민은 베르단디가 만든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종류는 요리의 지식이 짧기 때문에 나열하지 않겠다. 다만 사람 수가 수인 만큼 무지 많다는 것만 알아두자. 시민은 상에 차려져있는 많은 반찬들 중 가까이 있던 나무무침을 한입 먹어보았다.
“어머.”
시민은 베르단디의 요리를 먹어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느낌과 씹을수록 고소함과 단맛이 살아난다. 나물 특유의 맛을 살리면서도 조미료의 맛이 강하지 않고 뒷맛이 입안에 은은하게 남아서 식욕을 돋궈준다. 이 요리 하나만으로도 시민은 베르단디의 요리 실력이 엄청난 프로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자신은 이런 맛을 낼 자신이 없었다. 시민은 결국 요리는 베르단디에게 넘기고 자신은 가인들을 깨우기로 했다.
똑똑
“가인 씨, 아침이에요. 얼른 일어나서 식사하고 학교 가셔야죠?”
시민은 가인의 방에서 반응이 없자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끼익
가인은 침대에서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가인 씨도 참, 언제나 깨워줘야 한다니까. 시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전혀 귀찮거나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시민은 침대에 다가가서 가인을 깨우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문득 가인의 얼굴을 바라보니 자신도 모르게 가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으음”
시민의 손길에 가인은 가볍게 뒤척이다 잠시 후 눈을 떴다. 시민은 가인이 깨는 소리에 황급히 손을 거둔 상태였다.
“시민……씨?”
“예, 가인 씨, 아침이에요. 그만 일어나세요.”
시민이 미소지으며 말하자 가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를 돌아보니 그곳은 비어있었다. 브루스는 이미 일어나서 산책이라도 하고 있나 보다. 원래는 브루스가 가인을 깨워서 같이 나가 운동을 하고 오는게 일상인데 오늘은 특별이 쉬게 해주는 것이다.
가인은 간단히 세면을 한 뒤 유리를 깨워서 욕실로 보내고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가인과 유리를 뺀 나머지 식구들, 어제 새로 들어온 여신들까지 모두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우와, 시민 씨. 이 요리를 모두 다 만드신 거에요? 일찍 일어나는 것도 피곤하실 텐데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도와드릴 텐데….”
가인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지만 시민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이 요리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기에. 식탁에 차려진 각가지 요리들은 모두 하나부터 열까지 베르단디의 손에 의해 탄생한 것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양과 질이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하다는 점이 시민에게 또 한번의 허탈함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가인 씨, 이건 제가 한 것이 아니에요. 전부 저기 베르단디씨가 한 것이죠.”
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르단디씨가? 이 많은 요리를 모두 혼자서? 혹시 모두 술법으로 한 것은 아닐까? 가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페이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것은 술법으로 한 것이 아니에요. 저는 여태 베르단디가 요리를 할 때 술법을 사용하는 것을 못봤어요. 한마디로 모두 그녀가 전부 하나하나 요리를 했다는 거죠.”
이것을 모두 혼자서? 이 많은 요리를? 가인이 그렇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있을 때 시민이 말했다.
“가인 씨, 얼른 드시고 학교 가셔야죠. 도시락은 준비 놨으니까 얼른 드시고 등교 준비 하세요.”
“아, 예. 잘 먹겠습니다.”
가인은 국을 한입 떠먹었다. 그리곤 역시 시민처럼 놀랐다. 어떻게 국에서 이런 깊은 맛이⋯가인은 놀라며 다른 반찬들도 하나씩 먹어보았다. 반찬은 하나하나가 그 고유의 맛을 살리면서도 조미료들이 재료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천상의 맛! 과연 여신! 엉뚱한데서 여신의 힘을 느끼는 가인이었다.
“재료 하나하나에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졌다. 애송아. 잘 느껴봐라. 이 간단한 요리 하나에도 세상의 이치를 담아내었다. 네놈은 짐작을 할 수 있겠냐.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인데 요리 하나에도 세상의 이치를 담아내는지. 신의 벽이란 이렇게 높은 거였군.”
결코 남을 한부로 칭찬하지 않는 브루스가 베르단디의 요리 하나만으로도 이정도로 극찬을 하고 있었다. 브루스가 느낀 것은 모든 요리에 음과 양의 조화가 깃들어 그 무엇보다도 몸의 균형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간단한 음식만으로도 선도(仙道)를 이룬 자신도 그동안 미묘하게 맞지 않던 균형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게다가 오라의 양이 미약하나마 늘어났다. 베르단디의 요리는 오라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그들은 지금 엄청난 기연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느낌은 브루스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피스 대원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맛 자체가 최상이기 때문에 가인들은 음식을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그 모습을 베르단디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식사가 끝난 후 베르단디와 시민이 같이 설거지를 했다. 혼자서 다 하기에는 그 양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술법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언제 이런 일에 베르단디가 술법을 사용한 일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당연히 설거지는 스스로 할 수밖에.
“시민 씨,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
“갔다 오겠다.”
“예,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세요. 맛있는 저녁 준비해 놓을게요.”
가인과 유리, 브루스는 24구역에 있는 한성고등학교로 향했고 시민은 베르단디랑 마저 설거지를 끝낸 후 저녁에 요리할 장을 보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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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집과 가까운 어느 집의 지붕에서 한성고등학교로 향하는 가인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머리, 검은색의 선글라스, 그 선글라스 안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감흥빛 눈동자와 입가의 시니컬한 미소, 바로 인류의 배신자라 불리는 피스 블랙 한시영이었다.
“유빈, 저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냈니?”
시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옆에 서있는 피스 핑크와 같은 능력을 지닌 또 다른 배신자 피스 카민, 마인드 브레이커 마유빈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마스터. 도저히 누군지를 알아내지 못하겠어요. 정신 장벽이 너무나 두껍게 쳐져 있어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아요.”
유빈은 마스터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시영은 그 모습을 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잘못한건 없단다. 그만큼 저 안에 있는 자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지.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다간 나의 계획을 계속 방해하게 될 것 같구나. 빠른 시일내로 쉐도우 다이브라도 해봐야 겠구나.”
불쌍한 테라인들. 당신들은 앞으로 어떠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겠지.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운명은 너무나 잔혹하기에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낳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너무나 가련한 자들이다. 당신들 테라인은…….”
한동안 시민의 집을 바라보던 시영은 이내 유빈과 함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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