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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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
제9화 - 고요속의 외침 -
"거의 다 왔어."
"....."
일본지부에서 탈출한 케이와 스쿨드는 공중을 날아서 대학 뒤편의 호수가 부근까지 날아왔다. 가이버의 모
습으로 그냥 걸어왔다가는 사람들 눈에 띄는 것도 있지만 비행에 처음 성공한 케이가 비행연습도 해 볼겸
일본지부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었다. 오는 도중에 정신집중이 풀려서 두 번이나 추락할 뻔하기도 했지
만 말이다.
날아오는 동안 스쿨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가끔씩 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케이가 고개를 돌리면
황급히 시선을 피하기만 할뿐이었다. 처음엔 왜 그러나 싶었지만 케이는 곧 스쿨드가 저러는 이유를 알아차
렸다.
"...내가 살아있는거, 역시 이상하지?"
"으...응?"
"그 때, 난 분명히 엔자임에게 패했었지. 그리고 스쿨드 말대로 라면 난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었고...."
"...그...그건!"
스쿨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모두가 다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난 도대체 뭐지?"
케이는 그렇게 질문을 하였다. -사실 절반정도는 자기 자신에게 한 질문이다-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면 지
금 여기 있는 난 뭐란 말인가? 일본지부에서 탈출을 할 때는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여유가 생긴
지금은 이런 의문이 케이의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그..그러니까! 케이는 무슨... 에 그러니까, 그래! 기적이야! 무슨 기적 같은 힘에 의해서 부활한 거야! 틀림
없어!"
스쿨드가 잔뜩 당황해하며 더듬거리면서 설명했지만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기적이라니. 정확한 계산에 의
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야 하는 정밀기계를 만드는 스쿨드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막
연하고 비과학적인' 말은 대답이 될 수가 없었다.
"그..그럼!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이 케이를 다시 만들었다고 보는 건 어때?"
"메탈이?"
"그래. 가이버는 어지간한 상처는 금방 치료하잖아? 그렇다면 혹시 전신을 다시 만드는 것도 할 수 있지 않
을까?"
스쿨드가 정답을 말했다. 물론 직접 보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황상 그렇게 밖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컨트롤 메탈이 아주 약간의 체조직으로 부터 전신을 복원해 냈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었지만 어차
피 유니트 가이버 자체가 '미지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케이는 머리속이 더욱 더 혼란스러워 졌다. 만약 스쿨드의 말이 맞다면 여기 있는 난 원래 있던 몸의 복사
품이란 말인가? 지금의 나의 기억이나 나의 육체 전부 진짜가 아닌 복사품? 그렇다면 지금의 난 진정한 나
라고 할 수 있을까?
"난...원래의 나와 같은 것일까?"
"...."
스쿨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날아가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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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케이와 스쿨드는 호수가 부근에 도착하였다. 일단 여기 주차시켜놓은 바이크를 다시 회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몇 시쯤 됐을까? 베르단디가 무척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케이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응?"
"왜 그래?"
"앞에 누군가가 있어."
거기까지 말한 케이는 바이크까지 가지 않고 좀 떨어진 곳에 착지하였다. 그러나 스쿨드는 앞에 뭐가 있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밤이라 어두운 데다 바이크가 세워진 곳은 나무가 울창한 곳이라서 위에서는 대낮
에도 전혀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케이는 어떻게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그러고 보니 케이는 전에도 뭔가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린 적이 있었다. 한밤중에 절 뒤쪽에서 가이버가 돼
봤을때도 베르단디와 울드의 접근을 눈치챘었고 대학에서 젤브부스와 싸울 때도 젤브부스의 용해액 기습을
미리 알아차리고 몸을 피한 적도 있었다. 일본지부에서 탈출할 때도 케이는 보통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리
가 없는 코너뒤쪽에 매복해 있던 적들을 눈치채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것도 가이버의 힘일까?
두 사람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겨가며 바이크를 주차시켜 놓은 곳까지 살금살금 걸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
은 바이크를 주차 시켜놓은 자리 근처까지 왔다. 케이의 사이드카 조수석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척 익숙한 뒷모습, 베르단디였다!
"어..언니! 흡!"
순간 케이가 재빨리 손으로 스쿨드의 입을 막았다. 다행히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스쿨드의 입을
막은 채로 케이는 조용히 언덕길 아래로 내려갔다. 두사람은 곧 베르단디와 꽤 멀리 떨어졌다. 이만하면 되
겠다 싶은 케이가 스쿨드의 입을 막은 손을 치웠다. 그러자 스쿨드가 양 볼이 잔뜩 부은 채로 다짜고짜 따
지기 시작했다.
"왜 그래! 언니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나 지금 여기서 식장을 해제하면 벌거벗은 몸이란 거 알지? 그렇다고 가이버인채로 베
르단디 앞에 나타날 수도 없고 말이야."
"우..."
갑자기 스쿨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마도 감옥 안에서 케이와 다시 만났을 때 봤던 알몸이 다시 생각난
것일 것이다.
"스쿨드. 내 옷 만들어 줄 수 없어? 법술로..."
"난 못해... 정말! 왜 가이버는 옷은 복원 못하는 거야!"
스쿨드가 심통을 부렸다. 물론 스쿨드 역시 그 이유를 알면서도 그냥 한번 저래보는 것이다. 옷은 체세포
분열 같은 걸 못하는 무생물이니 당연히 복원 불가능이었다. 케이는 그런 스쿨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물
론 가이버의 마스크 때문에 스쿨드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절로 공간이동해서 내 옷 좀 가져다줄래? 저쪽으로 조
금만 가면 호수니까 공간이동에 문제는 없을 꺼야."
"알았어... 여기서 기다려."
거기까지 말한 스쿨드는 호수 쪽으로 부지런히 뛰어갔다. 스쿨드가 사라지는 것을 본 케이는 다시 베르단디
가 있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수풀 속에 숨어서 베르단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뒷모습만 보여서 얼굴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베르단디는 아마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케이는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지금이라도 당장 베르단디 앞으로 달려나가서 걱정 끼쳐 미안
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설명해야 한다. 가이버부터 시작해서 크로노
스로 인한 모든 일을.... 어차피 크로노스 일본지부는 괴멸되었다. 총사령관 리헐트 규오는 죽었다. 녀석들은
아마도 더 이상 공격해 오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괜히 베르단디에게 걱정거리를 늘릴 필요는 없을 것이
었다.
'미안해 베르단디...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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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우우
스쿨드는 공간이동을 해서 절의 욕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변이 무척 조용한 게 울드는 아마도 밖에 나
갔거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스쿨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스쿨드는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동정을 살폈다. 역시 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싶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스쿨드는 법술을 외우면서 공중에 살짝 몸을 띄웠
다. 마루바닥을 밟아서 삐걱거리는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서다. 이 정도는 스쿨드도 할 수 있었다.
-스륵
케이의 방에 도착한 스쿨드는 주위를 한번 살펴본 후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왠지 문 열리는 소리가 평소보
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스쿨드는 잔뜩 긴장되었다. 스쿨드는 방으로 들어선 후 역시 살며시 문을 닫
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휴우~ 성공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절반쯤 성공한 셈이다. 이젠 케이의 옷을 챙겨 가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드르륵!!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깜짝 놀란 스쿨드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놀랍게도 울드가 서있었
다. 울드는 단단히 화가 난 듯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짖고 있었다. 스쿨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흐응~ 그래...뭐가 성공인데?"
"우...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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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스쿨드가 꽤 늦자 케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공간이동으로 갔을 테니 왕복시간 같은 건 거의 없는 셈
쳐도 상관없었다. 설마 스쿨드가 케이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있을 리가 없으니 아무래도 들킨 건지도
몰랐다.
-끼릭
그 때 케이의 머리 위에 있던 두개의 금속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이는 누군가가 여기로 접근하고 있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스쿨드 같지는 않았다. 생명반응이 두개가 탐지되는 데다 무엇보다 그 둘은 지
금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설마 크로노스 일본지부의 잔존 조아노이드 일
까?
가이버의 머리엔 중앙의 컨트롤 메탈을 중심으로 머리 양 옆부분에 또다른 금속구가 양옆으로 하나씩 두개
가 존재한다. 이것은 일종의 센서로서 식장자에게 주변 상황 등을 수시로 알려주는 경보장치 역할을 한다.
이쪽으로 몇 명이 오는지, 그리고 접근해 오는 것이 조아노이드인지 보통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능력이 있었
다. 케이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데 조아노이드와는 반응이 달랐다. 그렇다고 보통의 인간도 아니었다. 케이는 일단 수풀 속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만약 그들이 크로노스라면 베르단디를 지키기 위해 바로 튀어나갈 만반의 준비
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바로 상공에 도착하였다.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본 케이는 깜짝 놀랐다.
빗자루를 타고 온 울드와 스쿨드 였던 것이다! 역시나 들키고 만 것이었다.
"베르단디!"
울드가 부르는 소리에 베르단디는 고개를 돌렸다. 직후 베르단디는 깜짝 놀랐다. 스쿨드도 같이 왔기 때문
이었다. 베르단디가 서둘러 사이드카에서 내려 스쿨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스쿨드를 꼭 끌어안았다.
"스쿨드! 무사했구나!!"
"...언니, 미안해...."
스쿨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도저히 언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
기 때문이었다.
"스쿨드, 혹시 케이씨는 어딨는지 아니?"
"...."
그 때 울드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
다.
"케이!! 여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리나와!!!"
울드의 외침에 케이는 크게 당혹스러웠다. 울드는 스쿨드로 부터 케이의 행방에 대해 듣고 왔을 것이다. 어
차피 그건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정작 문제는 가이버인 채로 나가느냐 아니면 식장을 풀고 벌거벗은 몸
으로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케이는 애타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베르단디의 모
습을 보곤 결심을 굳혔다. 지금 창피한 것이 문제인가, 베르단디가 저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파앙!
케이는 식장을 풀었다. 그리고 중요부위(...)를 손으로 가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수풀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
다. 케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여기야."
"케이씨!!"
케이를 발견한 베르단디가 눈물을 흘리며 케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바로 케이를 꼭 껴안았다. 당황한 케
이는 얼굴이 아주 새빨개졌다.
"베..베르단디! 진정해, 나 지금 옷이..."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케이를 끌어안은 베르단디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베르단디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
었다. 케이는 조용히 손을 들어서 살며시 베르단디를 안았다.
"밤페이군이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당해서...! 그래서 케이씨도 당하신 줄 알고...! ....흑!"
케이는 베르단디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곧 어떻게 봤는지 대충 짐작하였다. 아마도 법술을 써서 밤페이의
파편에 기억된 당시의 장면을 봤는지도 몰랐다. 괴물이란 것은 아마도 엔자임을 말하는 것이겠지. 심하게
충격을 받았는지 베르단디는 아직도 진정이 안되는 것 같았다. 우선 베르단디를 진정시켜야 했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진정해."
"...네."
베르단디가 포옹을 풀었다. 그러자 눈물이 가득한 그녀의 눈이 보였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큰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케이는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앞으론 이럴 일이 없을꺼야..."
"네...케이씨."
"저...그런데 내 옷 좀 만들어 줄 수 있어?"
"네? 아! 죄송해요. 지금 당장 만들어 드릴께요."
거기까지 말한 케이는 얼굴이 더욱 더 빨개졌다. 베르단디가 서둘러 법술을 외웠다. 그러자 케이의 몸을
정체불명의 하얀빛이 감싸더니 빛이 사그라들자 케이 몸에 꼭 맞는 옷이 만들어졌다. 케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 베르단디. 덕분에 살았어."
"아뇨, 괜찮아요."
"난 전혀 괜찮지 않은데, 케이!"
갑자기 울드가 케이의 멱살을 잡았다. 울드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깜짝 놀란 베르단디가 울드를 말렸
다.
"언니! 왜 이러세요?"
"자, 말해봐! 이제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
케이는 울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다. 역시나 다혈질인 울드 다웠다. 그러나 케이는 뭐라 말해야 좋을
지 몰랐다. 이제까지 괴물과 싸우다 왔다고 해야 하나? 케이가 되는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그게 그러니까, 친구 만나러 갔다가...그...뭐라 해야하나... 아! 강도, 강도를 만나서 말야, 옷까지 다 뺐기
고...그래서..."
누가 봐도 수상한 답변이었고 역시나 울드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스쿨드가 울드에
게 사실을 말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울드는 모든 걸 알고서 이런 질문을 하는걸까,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
는 상태일까?
"누가 그런걸 믿을 줄 알고! 도대체 너희들 왜 이래! 스쿨드는 내가 뭐라해도 아예 입을 닫고 있고 넌 거짓
말이나 하고 있고!"
"언니! 제발 그만.."
"베르단디가 얼마나 걱정 많이 했는 줄 알아! 이 애가 얼마나 맘고생 했는 줄 알면 그런 거짓말은..."
"언니! 그만 하세요!!"
베르단디가 울드를 억지로 떼어놓았다. 그리고는 케이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상태를 살폈다. 울드는 그 장면
을 보고 기가 막혔다.
"베르단디! 넌 이런 거짓말을 믿어? 이 녀석 때문에 네가..."
베르단디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전 케이씨를 믿어요. 설령 거짓말이라 해도 무슨 사정이 있으실 꺼에요."
울드는 뭐라 말하려다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베르단디에겐 뭐라 말해도 소용없을 듯 싶었다. 분위기는
금방 얼어붙었다. 케이는 울드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자, 너무 늦었어. 그만 돌아가자."
케이는 바이크로 가서 시동을 걸려 하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바이크 키는 아까 전투에서 패해서 녹아버렸
을때 같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케이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베르단디가 나서서 법술
로 시동 거는 것을 도와주었다. 울드는 짜증이 난다는 듯 빗자루를 타고 혼자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별수
없이 스쿨드는 조수석에 베르단디와 함께 앉아 가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울드의 화가 풀리려면 한참 걸릴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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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로 돌아온 케이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이상하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푹 자고 일어난 듯한
느낌만 들었다. 한동안 뒤척이던 케이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시간은 벌써 5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잠
자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든 케이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간편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흐읍~~"
케이는 마당에서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듬뿍 들이마셨다. 그리고 온몸을 비틀면서 가볍게 몸을 풀어주었다.
동쪽 하늘에서는 벌써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자동차부가 황금망치배에 출전하는 날이다. 지로 선배가 힘들면 안나와도 좋다고 했다
고 하지만 그래도 선배 된 입장에서 안 나가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은 특별히 할 것도 없으니
까. 다만 베르단디는 어제 케이 걱정에 잠을 설쳤을 테니 같이 가자고 할 순 없었다. 케이는 오늘은 혼자서
만 가 봐야 겠다고 맘먹었다.
"케이씨. 주무시지 않고요..."
그 때 베르단디가 마당으로 나왔다. 잠자리에든지 한시간도 안됐는데 벌써 나온단 말인가? 케이가 걱정스럽
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베르단디? 피곤하지 않아? 베르단디야 말로 좀 더 자야지."
"아니에요, 왠지 잠이 오지 않아서..."
베르단디는 어딘지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다. 정말 소중한
사람을 나는 이렇게나 걱정시켰었구나... 케이는 고개를 돌렸다. 왠지 베르단디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사
실 어제밤일은 케이의 잘못이랄 수는 없었지만 케이는 베르단디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베르단디가 케이의 바로 옆에 섰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동쪽 하늘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고 있었
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 그건 케이만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몰랐다. 베르단디는 언제나 케
이를 믿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지금 케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베르단디."
"네."
"어젯밤엔 걱정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앞으론 이럴 일이 없을꺼야. 모든 일이 다 잘 풀렸으니까..."
"네, 케이씨."
베르단디가 밝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 있었냐고 안 물어보네?"
"케이씨를 믿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무사하시니 까요."
그녀의 미소를 보며 케이는 다짐하였다. 이렇게나 나를 믿어주는 그녀를 다시는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다
시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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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안 잤지만 몸은 피곤한 걸 몰랐다. 컨트롤 메탈이 육체를 재구성한 여파일까? 어쨌든 케이는 아침식사
를 평소 휴일아침보다 빨리 시작하였다. 오늘은 황금망치배 대회장에도 나가 봐야 하니까 일찍 식사를 마쳐
두는게 좋을 듯 싶었다.
평소 같으면 식사를 할 필요가 없다 할지라도 울드와 스쿨드도 응접실에 나와서 TV를 본다든지 서로 승부
를 겨룬다든지 해서 떠들썩했는데 오늘은 울드는 나오지 않았다. 피곤해서 자는 건지 화가 안 풀려서 안 나
오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스쿨드는 먼저 나와있었다. 스쿨드 역시 잠은 자지 않고 부서진 밤페이의 수
리를 했었다. 예비 부품들이 있어서 수리 자체는 빨리 끝났다. 평소 같으면 동물 관련 프로나 기계가 나오
는 프로를 볼 텐데 오늘은 스쿨드가 뉴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네, 여기는 맥스제약 화재현장입니다. 현재 도쿄 전역의 소방소가 총 출동해서 화재 진압에 전력을...'
뉴스에선 새벽에 발생한 맥스제약 폭발사건이 계속해서 방영되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과격분자의 테러 가능
성이 높다는 경찰의 발표를 방송하고 있었다. 아마도 크로노스 일본지부는 외부에는 맥스제약으로 알려져
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뉴스에선 조아노이드나 크로노스, 가이버의 얘기같은건 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크로노스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려고 하였으니까.
그 때 베르단디가 아침식사를 내 왔다. 케이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또 큰 사고가 난 모양이군요."
"으..응. 화재가 났대나봐."
케이는 짐짓 모르는 척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베르단디는 요즘 주변에 큰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며 걱정하
였다. 그리고 스쿨드에게 밖에 나갈 땐 조심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하였다. 아무래도 베르단디 역시 뭔가 이
상한 점을 느꼈을 지도 몰랐다.
"오늘은 나 혼자 대회장에 갔다올께. 베르단디는 집에서 쉬고 있어."
"아뇨, 저도 같이 갈께요. 도시락이랑 금방 준비할께요."
"하지만 베르단디도 피곤할 텐데...."
"전 괜찮아요. 케이씨."
베르단디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그리고 빈 그릇을 가지고 부엌으로 갔다. 케이는 더 이상 말리지 않
기로 하였다. 어제 그렇게 걱정을 시켰는데 또 혼자서 기다리라고 하면 베르단디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듯 싶었다. 다만 저렇게 말해도 역시 피곤할 테니 결과만 보고 일찍 귀가하면 될 듯 싶었다. 케이의
예상대로라면 대회는 아마 3시전에는 끝날 테니 시상식 같은 거는 안 보고 오면 쉴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
그런데 스쿨드의 표정이 시무룩한 것이 어딘지 좀 이상했다. 크로노스의 역습을 걱정한다기 보다는 저건 마
치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차마 하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랄까? 케이는 대번에 눈치챘다.
"같이 갈까? 스쿨드."
"응?"
"피곤하면 안 가도 되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가도 괜찮아?"
"너도 노력했잖아. 넌 네가 노력을 쏟은 머신이 달리는걸 볼 권리가 있어."
스쿨드는 사실 대회장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제 그렇게 언니나 울드에게 걱정을 끼쳐 놓아서 밖으로
또 나가겠다고 하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마치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냐. 모든건 내가 미숙해서 그랬던걸. 그리고 이제 다 끝났어. 그러니까 이젠 안심해도 된
다고 생각해."
케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스쿨드의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역시 스쿨드는 웃는 표정이 제일 귀여
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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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드.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대회장에 가기 전 케이는 울드의 방 앞에서 울드를 불렀다. 아무래도 얘기를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들어와."
안에서 울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목소리가 좀 딱딱한 듯이 느껴지는
게 아직도 화가 다 안 풀린 듯 싶었다. 케이는 잔뜩 긴장한 채로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뭔가의 실험에 열중하고 있는 울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울드는 케이가 들어왔는데도 돌아서지 않
았다. 케이는 조심스럽게 용건을 말했다.
"오늘 베르단디랑 스쿨드랑 같이 레이스경기장에 갈 꺼야."
"..."
"같이 가지 않겠어?"
"흥미 없어."
목소리에 냉기가 확 느껴졌다. 역시나 아직도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저기...어젠 정말 미안했어. 너희들에게 걱정을 끼쳐서..."
"...."
"두번 다시 베르단디를 그렇게 울리는 일은 없도록 할께. 절대로! 이제 모든 건 다 괜찮아 졌으니까. 그럼
난 가볼께..."
더 말해봐야 화만 더 돋굴 것 같아서 케이는 그대로 돌아섰다. 아마 한동안 울드랑은 좀 불편하게 지낼 것
만 같았다.
"베르단디는 언제나 너만 바라보고 있어."
그런데 케이가 문을 닫기 직전 울드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 보단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울드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언제나 그 애가 웃을 수 있게 해 줘. 무슨 사정인지는 나중에 말할 결심이 서면 말하도록 해. 이
번만은 봐줄 테니까."
"응...알았어. 나중에 꼭 말해줄께. 울드."
"걘 내 소중한 동생이야. 그러니까 잘 부탁해."
"응. 명심할께."
케이는 울드와 어느 정도 화해를 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닫았다. 케이는 보
지 못했지만 울드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케이가 나간 것을 확인한 울드는 문을 한
번보고는 살짝 웃었다. 역시 케이라면 베르단디에게 잘 어울리는 남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
"케이~~!!"
황금망치배 대회장에 나온 케이와 베르단디, 스쿨드를 맞은 것은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지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케이의 동생 메기까지 있었다. 메기 역시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케이는 그 모습들을 보
고 움찔하였다.
"너 이 녀석! 대체 어젯밤에 어디 가서 뭐한거야!"
"케이, 무슨 일 있었어? 어젯밤 베르단디가 울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었어. 우리 집에 안 왔냐고 말이
야."
케이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제저녁에 엔자임이란 괴물과 싸우다가 패해서 의식을 잃었었는데 정
신을 차려보니 크로노스란 놈들의 본거지더라, 그래서 끝도 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을 물리치고 탈출했더니
밤늦은 시간이더라. 다 사실이지만 남들에게 말할 순 없었다. 백프로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만한 말이다.
"저..그러니까 그게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바쁜 일? 너한테 얼마나 바쁜 일이 있기에 여러 사람 걱정하게 만드냐!"
지로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계속 추궁하였다. 그러나 케이는 달리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적당히
얼버무리기엔 일이 좀 커지고 말았다. 옆에서 베르단디가 말려도 지로는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케이는 거짓말이 서툴다니까. 표정이랑 말 더듬는 거 하며 '나 지금 거짓말하고 있소'라고 광고하는 꼴이
잖아?"
오빠가 궁지에 처해있는데도 메기는 옹호해줄 생각이 없는지 옆에서 지로를 거들고 있었다. 케이는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지 거의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별다른 좋은 생각이 안 떠올
랐다. 그 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후 예선전이 시작됩니다. 예선 첫 경기는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 대 이와시미즈 대학 블랙맥스의 경기
가 되겠습니다. 참가팀은 출전준비를 서둘러 주십시오.'
장내에 예선전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방송을 들은 지로와 메기는 케이를 추궁하는걸 일단 중지
했다. 추궁이야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경기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자동차부원들이 서둘러 머
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로는 나중에 두고 보자는 표정을 지으며 출전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케이는 안
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뭔가 중대한 걸 숨기고 계시는 구만. 케이?"
자동차부원이 아닌 메기는 준비를 도울 필요가 없었으므로 아직도 케이 옆에 끈질기게 붙어 있었다. 케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넌 여기 왜 왔냐? 넌 소프트볼부 잖아."
"어머나, 난 바이크도 좋아해. 그리고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자유~."
"어련하시겠어...."
케이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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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르릉!! 부르릉!!!
스타트 라인에서 두 대의 머신이 대기 중이었다. 예선 첫 경기, 자동차부와 이와시미즈 대학의 머신이었다.
서킷 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나 자동차부원들은 더욱 더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는 이제
까지 대회에서 성적이 별로였던 팀이었으므로 대진운 자체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이쪽의
라이더인 콘도가 너무 지나치게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대회장에 가기 위해 부실로 집합한 콘도는 옆에서 보기에 상당히 걱정이 될 정도로 퀭한 얼굴이
었다. 드디어 실전이라는 긴장감 때문에 밤새 한숨도 못 잔 것이다. 주변에서 용기를 북돋워주려 노력해도
콘도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 컨디션이 정상일리가 없었다. 게다가 연습에 연습을 거
듭해서 드디어 7초대를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연습은 연습일 뿐. 실전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과연 실전에서
도 같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띠!!
-부아아아앙!!!
드디어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면서 두대의 머신이 굉음을 울리며 출발하였다. 일단 출발은 좋았다. 문
제는 초반 가속이 어느 쪽이 빠르느냐 였다. 10초도 안돼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동차부원들에겐 영겁처럼
긴 시간이었다.
-바아아앙!!
그리고 드디어 두대의 머신이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였다. 먼저 통과한 사람은 콘도였다. 자동차부원들이 일
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다행히도 콘도는 잘 해내었다.
그러나 솔직히 기록은 좋지 못했다. 기록은 8.239초. 상대방은 8.253초. 둘다 본선진출은 무리인 기록이었다.
첫 번째 상대팀이 비교적 약체라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그런 행운은 없다. 7초대
를 끊지 못하면 상대방 머신이 중간에 탈이 나지 않는 이상은 이길 가망이 없었다. 지로와 케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둘은 콘도를 바라보았다. 첫 경기에 승리해서 잔뜩 들떠있었다. 다행히도 긴장감은 어느 정도 날려버린듯
했다. 잔뜩 얼어있는 것보다는 저런 모습이 차라리 더 나았다.
-부아아앙!!
"와아아아!!"
그러나 얼마후 다음 대전상대의 기록을 본 콘도는 다시 얼어붙었다. 상대팀의 이번 기록은 7.925. 콘도의 기
록보다 0.3초나 앞서는 기록이었다. 말이 0.3초지 사람이 달리는 게 아니라 속도만을 잔뜩 올린 바이크간에
대결에서 이 차이는 꽤 컸다.
"괜찮아, 괜찮아. 아주 못이길 차이는 아냐. 평소에 연습하던 실력이 나오면 되는 거라고. 안그래?"
지로가 별거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지만 콘도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역시나 대회 초보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건 여러 대회를 경험해 보면 자연히 나아지는 거지만 지금의 자동차부는 한가하게
'이번 경기는 참가에 의의를 두자'라고 말할 상황이 못됐다. 무조건 우승밖에는 길이 없었다. 여기다 쏟아
부은 돈도 엄청나고 게다가 신입부원들을 끌어들이려면 뭔가 빛나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케이가 졸업하기
전 세웠던 우승기록같은 건 이제 의미가 없었다. 현재의 성적이 참담하다시피 한 수준인데 '예전의 영광'이
먹힐 리가 만무했다.
예선전이 계속되면서 다들 점점 더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2라운드 진출자들이 하나같이 다들 7초대를 마크
하고 있던 것이다. 예년보다 평균속도가 훨씬 빨라졌다며 케이가 혀를 찼다. 7초대면 한번 해볼만하다고 여
겼던 건 큰 착각이었다. 7초대는 이제 '당연한'것이 돼버렸다. 이러다가 조만간 누군가가 6초대도 끊는 거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
"핫세씨? 왜 그러세요?"
베르단디는 핫세가 아까부터 자꾸 관중석 쪽을 둘러보는 걸보고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부모님이라도 찾고
있는 건가? 하지만 직접 출전한 것도 아닌데 멀리 사시는 부모님을 부를 핫세는 아니었다.
"네? 아...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디 불편하세요? 혹시...."
베르단디는 혹시나 핫세가 다시 병이 도진 건 아닌가 싶었다. 얼마 전에 원인은 모르겠지만 심한 정신적 충
격을 받고 입원까지 했다가 의사의 권고를 뿌리치고 본인이 억지로 퇴원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핫
세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전혀 의외의 대답을 하였다.
"아...아뇨. 그게 아니라 마키시마 선배께서 오시지 않았나 해서...."
"네? 마키시마씨요?"
"마키시마는 오늘 못 와. 걔네 회사에 큰불이 났다고."
그 때 옆에서 상대팀 기록을 검토하고 있던 지로가 아키토 얘기가 나오자 중간에 끼여들었다. 그 소리에 핫
세가 깜짝 놀랐다.
"저..정말이요?"
"응. 오늘 아침 뉴스 안 봤어? 맥스제약 화재건 말이야."
맥스제약이란 말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케이와 스쿨드가 움찔하였다. 아키토의 회사가 맥스제약 이었다
니! 케이는 순간 아키토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맥스제약의 경영에 참여한다는 사람이 과연 거기가 크로노스
의 일본지부 였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사실 나도 오늘 아침 여기 나오라고 얘기하려고 전화했었는데 그런 사고가 나서 사고 수습하느라 못 온다
더라."
"그..그럼 마키시마 선배는 무사하신 거죠?"
핫세의 반응에 지로는 의아해하다가 뭔가를 눈치챈 듯 쿡 하고 웃었다. 그리고 정신차리라는 의미로 들고
있던 기록철로 핫세의 머리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그래. 무사해. 그러니까 넌 경기에만 집중해. 부장이 딴 데 한눈팔고 있으면 되냐?"
"아...네."
핫세는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콘도의 표정이 일그러졌
다. 누가 봐도 질투 때문에 저러는 거라는 게 다 보였다.
-'지금부터 예선 2라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2라운드 첫 경기는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 대....'
그 때 2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자동차부원들은 또다시 출전준비로 분주해 지기 시작했
다. 라이더인 콘도는 잔뜩 흥분된 표정으로 핼맷을 썼다. 케이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려 하
였다.
"걱정마, 연습 때처럼만 하면..."
"두고보십시오! 전 반드시 이길 껍니다!!"
아까 까지만 해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더니만 지금은 또 뭣때문인지 잔뜩 흥분된 상태였다. 저건 시합
을 앞두고 흥분된다기 보다는 무슨 이유로 인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잔뜩 얼어있는거나 지나치게 흥분
돼 있는 거나 안 좋기는 둔다 마찬가지였다. 케이는 행여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부아아앙!!!
"해냈어!"
두 번째 경기도 다행히 통과하였다. 두 번째 기록은 7.890. 상대팀 보단 좀 아슬아슬한 차이였지만 어쨌든
이겼다. 앞으로 본선 진출까진 2번 더 경기를 치러야 한다. 이제 슬슬 콘도가 자신감이 붙는 것 같아서 부
원들은 안심하였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되었다. 3라운드 상대는 하필이면 전년도 우승팀으로 결정되었다. 예선 2라운드 경기에
서 이 팀은 작년에 자신들이 세웠던 우승기록 7.751초를 갱신한 7.732를 기록하였다. 자동차부는 순간 찬물
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콘도의 실력과 머신의 현재 상태로 볼 때 속도가 당장에 훨씬 빨라지기는 무리였
기에 다들 위기감을 느꼈다. 다만 라이더인 콘도만은 여전히 잔뜩 흥분된 -이라기 보단 화가 난- 상태였지
만 말이다.
"걱정 마세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오는 거니까요. 그것은 달리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옆에서 도와주면서 같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 되요. 그러니까 다들 포기하지 마세요."
베르단디 역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특유의 포근한 미소로 모두를 격려하였다. 자동차부원들은 모
두 전의를 다졌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벌써부터 포기하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베르단디의 격려 덕분일까, 아니면 상대팀이 지독하게 운이 없는 걸까. 예선 3라운드에서 상대팀은 달리던
도중 엔진트러블이 발생해서 경기를 포기했다. 자동차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스타트
부터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뜻밖의 행운 덕에 자동차부는 예선 마지막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4라운드 역시 순전히 운이었다. 이번엔 상대방이 긴장한 나머지 출발이 늦고 말았다. 상대팀은 무서운 속도
로 추격해 왔지만 처음 벌어진 차이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는 이렇게 절반쯤은 운
으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본선 진출 팀들중 가장 성적이 나쁘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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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잘 먹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케이와 베르단디, 스쿨드는 대회장 한쪽에 마련된 매점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매점에서 산 스쿨드 몫의 아이스크림과 간단한 스낵류, 그리고 베르단디가 싸온 도시락을 펼쳐서 점심식사
를 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았지만 다행히 서두른 덕에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베르단디와 스쿨드의 즐거워하는 표정을 본 케이는 역시 같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들은 벌써 다 날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왜 그러세요?"
케이가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자 의아해진 베르단디가 물었다. 케이는 밝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아니, 그냥. 역시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베르단디 역시 밝게 웃으며 케이의 잔에 차를 따랐다.
"아, 벌써 다 먹었네...."
그 때 한참 아이스크림에 빠져 있던 스쿨드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새 한 통을 다 먹은 것이다.
꽤 큰 컵이건만 역시나 아이스크림 하면 환장하다시피 하는 스쿨드 다웠다. 베르단디가 더 사다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금방 갔다올께요."
베르단디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매점 쪽으로 갔다. 자리에는 이제 케이와 스쿨드 두 사람만 남았다. 스쿨드
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 컵을 만지작거렸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걱정되니?"
".....그럼 걱정 안돼?"
케이의 질문에 스쿨드는 좀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하긴 그런 일을 겪은 지 아직 하루도
안됐으니 저렇게 불안해 하는 것도 다 이해가 갔다. 케이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 일본지부는 괴멸됐고 총사령관은 죽었어. 아마 우리에게 또 덤벼올 여유 같은 건 없을걸?"
"...그럴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 때 누군가가 케이와 스쿨드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그들
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케이와 스쿨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본지부 건물 하나 부쉈다고 우릴 이겼다고 생각하는가?"
"넌 크로노스!!"
깜짝 놀란 케이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스쿨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 분
명히 일본지부는 완전히 괴멸되었었는데! 그런데 하루도 안돼서 또 공격을 해 온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뭐냐, 한 번 해보자는 거냐? 여기서?"
벌떡 일어서서 강하게 노려보고 있는 케이를 본 남자는 주변을 한번 휘 둘러보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
러나 이건 케이에겐 협박으로 들렸다. 여기서 싸우게 되면 여러 사람들이 말려들게 되니까. 그러나 케이 역
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너희들도 이런데서 함부로 정체를 드러내진 못할텐데?"
이 남자가 조아노이드라 해도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데서는 함부로 변신하진 못할 것이라고 케이는 판단
하였다. 서로 피차 변신을 못하는 상태라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스쿨드는 도망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오히려 그런 케이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후후...난 상관없어. 원한다면 여기서 한판 뜰 수도 있는데 말이지. 여길 온통 피바다로 만들고 싶다면 그렇
게 하자고."
"괘...괜한 허세 부리지 마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케이는 잔뜩 긴장하였다. 이 남자는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다
죽일 기세였다. 자칫 잘못하면 대참사가 일어날 상황이었다.
"우리들 크로노스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지. 그런 우리가 이제까지 활동해 오면서 조아노이드를 단 한번도
안 들킨 줄 아나?"
그런데도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아마도 현장에 있던 목격자
들은 다 제거해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언론 등에는 사고 등으로 비쳐 보이도록 위장을 했을 거고. 아니, 혹
시 모른다. 이들이 매스컴까지 전부 장악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은밀
히.
"자, 둘다 순순히 따라오도록 하시지.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다 말려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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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몫의 아이스크림을 더 산 베르단디는 자리로 돌아오다가 울드와 도중에 만났다. 경기 같은 건 흥미
가 없다면서 절에 남겠다더니 어느새 경기장에 와 있었다. 물론 울드가 입장권을 내고 정상적으로 들어왔을
리는 없고 하늘로 날아서 들어왔을 것이다.
"어머, 언니. 오신거에요?"
"응. 혼자 있기 좀 심심해서. 너희들 예선은 통과했더라?"
"보셨어요?"
"그래. 1라운드 중반부터 봤지. 좀 아슬아슬 하던데?"
현재 자동차부는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간신히 본선에 올랐다. 그래서 현재 자동차
부엔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현재 성적으론 결승은 꿈도 못 꾼다. 본선은 상대팀 머신 트러블이라는 운이
통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라이더인 콘도가 빨리 제 페이스를 찾아야 했다.
"케이와 스쿨드는 어디에 있어?"
"네. 저기들 있어요. 같이 가실래요?"
"그래, 생각 같아선 스쿨드 외출금지 시켜버리고 싶었다만..."
물론 그런다고 울드의 말에 순순히 따를 스쿨드도 아니지만. 울드의 말에 베르단디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두 사람은 함께 케이와 스쿨드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베르단디나 울드 둘 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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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끌려갈 수는 더
욱 더 없었다. 방법은 하나, 싸우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싸울 수가 없다. 베르단디나 다른 무고한 사
람들을 모두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
그때 스쿨드가 주머니 속에 슬며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주머니 속에서 잠깐 뭔가를 만지작 거렸다.
남자의 주의가 케이에게 집중되있던 순간 스쿨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면서 바닥에 주머니 속에 들어있
던 것을 힘껏 내동댕이쳤다.
"케이!! 지금이야!"
-퍼엉!!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이들 사이에 짙은 흰 연기가 자욱하게 끼었다. 스쿨드가 던진 건 스
쿨드 봄버의 연막탄 버전이었던 것이다. 이 틈을 타 케이가 재빨리 스쿨드와 그 남자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
어졌다. 그리고 케이는 강하게 외쳤다.
"가이버!!!"
-퍼엉!!
연막 속에서 케이는 재빨리 가이버로 변신하였다. 스쿨드의 연막탄 성능은 굉장했다. 순식간에 넓은 범위에
짙은 연막을 만들어낸 것이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변신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연막 때문에
스쿨드가 보이지 않았다.
"스쿨드!"
케이는 재빨리 스쿨드 곁으로 다가갔다. 연막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가이버의 헤드센서는 그
남자와 스쿨드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케이는 스쿨드를 안고는 높히 점프하였다. 그리고 바로 중력
제어구를 조종하여 경기장 밖으로 날아갔다.
"호오.... 그런 수도 있었군."
스쿨드의 연막탄과 케이의 가이버 변신 시에 났던 폭발음 때문에 매점가에 있던 사람들이 대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이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고 밀치는 대 혼란 속에서도 그 남자는 태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
다. 그리고 그는 손목에 차고 있는 무전기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쪽 방향으로 갔다. 내가 갈 때까지 녀석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무매르제."
******************************************
"케이씨!!"
자리로 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두 사람이 있던 테이블 쪽에서 뭔가가 터지면서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끼었
다. 베르단디와 울드는 서둘러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때였다.
-슈웅!
연막속에서 갑자가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푸른색이 감도는 뭔가였는데 중요한 건 그것이 스쿨드를 안고 있
었다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두사람은 확실히 보았다. 베르단디와 울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것
은 스쿨드를 데리고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케이씨! 스쿨드!"
베르단디는 두 사람이 있던 테이블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나 현장에 케이와 스쿨드는 없었다. 스쿨드는
아까 그 푸른색의 무엇이 데려가는걸 봤지만 그렇다면 케이는 대체 어딨단 말인가? 베르단디의 안색이 창
백해 졌다.
"베르단디! 뒤쫓아 보자, 서둘러!"
"네!!"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법술을 써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차피 주위에 있
던 사람들은 서둘러 현장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상황이어서 그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울드는
공중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스쿨드를 데리고 날아간 그것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다. 생각보다 비행속
도가 빨랐다.
"제가 새들에게 한번 물어볼께요!"
베르단디가 주변에서 날고 있던 비둘기들에게 다가갔다.
******************************************
"이 정도면 괜찮을 꺼야."
케이들이 도착한 곳은 경기장에서 멀리 떨어진 강가 부근의 빈 공터였다. 대기업에서 쇼핑몰을 짓기 위해
측지중인 곳이었다. 케이는 경기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전속력으로 날아왔다. 도착후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수상한 놈들은 없는 듯 싶었다.
"어떡해! 놈들이 또 쳐들어 왔잖아!"
"....."
스쿨드는 이제 울상이 되었고 케이는 뭐라 해 줄말이 없었다. 일본지부의 파멸로 모든게 다 끝난 줄 알았는
데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하루도 안돼서 또 쳐들어 올 줄은 몰랐다. 케이는 암담함을 느꼈다.
"너희들은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케이와 스쿨드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쪽 방향에는 검은 양복에 짙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서있었다. 저 남자 역시 크로노스의 조직원이 틀림없
었다. 이렇게 쉽게 케이들이 날아온 곳을 찾아낸 걸 보면 빈틈없이 포위망을 둘러친 것 같았다.
"우리들의 조직은 세계 곳곳에 있다. 그 정도로는 끄떡도 안 하지."
갑자기 케이들 바로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놀랍게도 아까 대회장
매점가에서 케이와 스쿨드를 협박했던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는지 그저 놀
라울 뿐이었다. 역시 저 남자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너희들 조아노이드냐!"
남자들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빨갛게 충혈되 있는 그들의 눈이 보였다!
"우리들은 보통의 조아노이드들과는...."
"차원이 틀리단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남자들의 덩치가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이 급속히 사라지면서 다
들 한 마리의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각각 빨간색과 하늘색의 조아노이드로 변신을 완료하
였다.
"난 하이퍼 조아노이드, 노즈코프!"
"하이퍼 조아노이드, 무매르제! 지옥에나 떨어져라, 가이버!!"
무매르제의 양쪽 어깨 부분이 위아래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바짝 긴장하였다. 저 모양
새는 바모아의 생체열선포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렇다면 저 녀석들은 열선포가 주무기일까?
-파앙!
갑자기 뭔가 공기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케이는 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우우우웅!!!
"우아악!!"
온 몸이 격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진동 때문에 온 몸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케이
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잠시후 진동이 멎었다. 케이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하아하아...대체 방금 그건..."
케이는 방금 전 공격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서 당혹해 하고 있었다. 녀석의 어깨부분이 열리면서 열선포 비
슷하게 생긴 그 곳에서 뭔가가 발사된 건 확실한데 공격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스쿨
드 역시 크게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도 저들의 공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스쿨드는 아까
케이에게 공격이 명중했을 때 뭔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생각났다. 소리... 그렇다면 저 녀석
들의 공격은 혹시...
"흥! 방금 전 우리의 공격을 잘도 견뎌냈군. 그렇다면 이번엔 좀 더 거칠게 나가주지."
무매르제가 다시 그 무기를 케이에게 조준하였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까 그
공격을 또 한번 맞으면 이번엔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공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였다.
-파앙!
아까와 같이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케이는 바로 옆으로 멀리 덤블링하였다. 무매르제의 공격이 빛나
갔는지 케이 뒤편의 지면이 크게 솟구쳐 올랐다.
"이놈!"
노즈코프 역시 어깨장갑을 열고는 마찬가지의 공격을 해왔다. 케이는 역시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반
사적으로 옆으로 크게 피했다. 그 덕분인지 공격을 맞지는 않았다. 약이 오른 노즈코프와 무매르제가 맹렬
하게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파앙! 퍼엉! 파앙!
-콰앙! 쿠쿵!!
소리가 들릴 때마다 케이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 때마다 케이 주변의 지면이 엉망으로 파해
쳐졌다. 이렇게 하니 피할 수는 있었지만 대신 반격도 불가능했다. 피하는 동작이 너무 커서 바로 공격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하면서 바로 반격하려면 몸의 균형을 유지한 채로 상대의 공격을 아슬아
슬하게 피해야 하지만 공격이 보이질 않으니 이거밖엔 방법이 없었다.
"아! 잠깐! 무매르제, 공격을 멈춰!!"
그때 한참 공격하던 노즈코프가 실수를 깨닫고는 공격을 중지하려 하였다. 자기들이 쏴댄 공격에 지면이 파
헤쳐지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연막 구실을 해서 시야가 가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매르제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흥! 뭐 어때. 안보이면 안보이는데로 쏘지 뭐. 어차피 계속 쏘다보면 한방 맞을 꺼야."
"무매르제!"
노즈코프가 거칠게 어깨를 잡고 흔들고 나서야 무매르제는 공격을 멈췄다. 잠시 언쟁을 벌이던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가 가라않자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엔 엉망으로 파헤쳐진 지면만 있을 뿐 가이버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같이 있던 그 꼬마 계집애도 보이지 않았다. 공격에 맞아 죽은 거 같지
는 않고 아무래도 틈을 봐서 같이 도망친 것 같았다.
"쳇! 놓쳤잖아! 왜 쓸데없이 공격을 퍼부어서는..."
"자기도 같이 했으면서 왜 나한테 그러는데!"
둘은 잠시 언쟁을 벌이다가 곧 그만두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가이버Ⅰ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둘은 곧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아마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
"음파포?"
"그래. 내가 보기엔 틀림없어."
케이와 스쿨드는 인근에 있던 다리 아래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일단 두 사람은 작전회의를 하고 있
었다. 스쿨드는 이제까지 본 전투장면을 토대로 어떤 결론을 내렸다. 저들의 공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아까 케이에게 공격이 명중했을 시 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점, 그리고 그 외 저들이 무기를 사용
할 시 마치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점. 데이터가 부족하긴 하지만 이쯤에서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소리를 이용한 병기, '음파포'다!
"정확한 작동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공기를 압축시켜 그걸 상대방에게 발사하는 능력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걸 맞게되면 격렬한 진동이 일어나면서 몸에 큰 타격이 오는 거고."
스쿨드의 설명을 들은 케이는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놈들의 공격에 당했을 당시 케이는 온 몸이 엄청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녀석들의 음파포는 명중시에 격렬한 진동을 일으키는 압축공기탄을 발사해서 상대방
을 부수는 무기였다. 이상 진동이 계속되면 물체는 결국 부서지고 만다. 마치 지진이 발생했을 때 건물 벽
면이 진동을 못 견디고 부서지면서 결국은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할까? 게다가 놈들의 공격은 공기를 압축
시킨 것이니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되받아치는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피하는 것도 절대로 쉽지 않은 공격
이었다.
"그...그럼 어떻게 해야.."
일단 놈들 무기의 정체는 파악했다. 그 다음엔 대응방법이다.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공격이 전혀 안 보
인다는 점이었다. 가이버의 헤드센서를 사용한다면 공격이 날아오는걸 감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은 우
선 자신의 시각과 청각으로 거의 모든 정보를 습득한다. 그 중에서도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특히 높으며
그 점에선 가이버인 케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케이가 헤드센서를 이용한 전투에 좀 더 숙달돼 있
다면 눈을 감고 헤드센서에만 모든 정보를 의지하는 식의 전투도 가능하겠지만 그러기엔 아직 그는 미숙했
다. 그리고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걸 연습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스쿨드가 결정적인 말을 하
였다.
"아까 내가 보니까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 때 놈들의 공격이 날아가는 게 보이는 듯 했어."
"뭐? 날아가는 게 보여?"
스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쿨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놈들의 공격은 어쨌든 공기중을 통과해야 한
다. 물 한가운데에 뭔가를 던지면 물이 출렁이며 수면전체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놈들의 공격 역시 공기중
을 통과하다 보면 대기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 다만 물과는 달리 공기는 그런 현상을 맨눈으론 볼 수가
없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런데 대게 실험실 등에서 공기의 흐름을 눈으로 보려고 할 때 쓰는 방법이 공기
중에 무슨 가루 같은 것을 뿌려서 그 가루의 흐름을 보는 것으로 공기의 흐름을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니까, 흙먼지를 중간에 일으켜 놓으면 그 공기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거지?"
"딩동댕~!!"
스쿨드는 훌륭한 교사였고 케이는 이해가 빠른 학생인 셈이다. 스쿨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케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포장이 안 된 곳이고 풀도 별로 없다. 흙먼지를 일으키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듯 싶었다. 케이의 머릿속에 좋은 작전이 떠올랐다.
"정말 대단한데, 스쿨드. 놈들의 무기를 이렇게 금방 꿰뚫어 볼 줄은.."
"물론! 난 천재니까!!"
케이의 감탄에 기가 산 스쿨드는 가슴을 쭉 펴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확실히 이럴 때는 천
재같아 보이지만 평소의 발명품들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나사가 빠진 천재랄까? 하여튼 이제 스쿨드 덕분
에 승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놀이는 끝이다! 가이버!!"
저 멀리서 무매르제라 불리던 붉은 색 조아노이드가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들키고 말았다. 찾아내는 게 생
각보다 좀 늦었다는 것만 달랐다. 케이가 자세를 취했다.
"스쿨드. 뒤는 나한테 맡기고 넌 숨어있어!"
"응! 케이, 조심해!!"
스쿨드는 부리나케 뛰어서 인근 뚝방 위로 올라갔다. 스쿨드가 몸을 피하는 것을 본 케이가 복부에 손을 모
아서 프레셔 캐논을 준비하였다.
-위잉!
케이의 양손에 충격파가 모였다. 케이는 바로 발사하지 않고 상대방과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연습도 못해
보고 바로 실전이란 게 좀 불안하지만 연습 같은걸 할 여유는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
"어림없다!"
케이가 뭔가를 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자 무매르제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의 양어깨의 음파포에서 충격파
가 발사되었다. 그 순간 케이 역시 프레셔 캐논을 발사하였다.
-파앙!!
-퍼엉!!
그런데 케이가 쏜 프레셔 캐논은 어이없게도 무매르제의 앞에 훨씬 못 미친 곳의 지면에 작렬하였다. 무매
르제는 케이의 미숙함을 비웃었지만 그건 무매르제의 착각이었다. 케이는 처음부터 무매르제를 노린 게 아
니라 그 지면을 노리고 있었다. 케이의 프레셔 캐논으로 인해 전방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흙먼지로
인해 무매르제는 가이버Ⅰ의 모습을 놓쳤다.
"이야아아아!!"
그 때였다. 흙먼지를 뚫고 가이버Ⅰ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무매르제가 또 한번 음파포를 쏘려고 했지만
어느새 가이버Ⅰ이 자기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가이버Ⅰ이 고주파 소드를 휘둘렀다.
-부웅! 퍼억!!
"끄아아아아!!!!"
케이는 있는 힘껏 고주파 소드를 휘둘렀지만 무매르제는 몸을 비틀어 간신히 치명타는 피할 수 있었다. 그
러나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의 소드에 무매르제는 오른팔을 잘리고 말았다. 잘린 부위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무매르제가 상처를 감싸쥐며 멀리 점프하여 거리를 벌렸다.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프레셔 캐논으로 전방에 흙먼지를 일으켜서 놈의 음파포가 그 속을 통과하게 만든
다. 그러면 격렬한 대기의 움직임으로 인해 흙먼지가 흩어질 것이고 그것을 보고 음파포를 피한다. 무모한
작전이었지만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 다만
제9화 - 고요속의 외침 -
"거의 다 왔어."
"....."
일본지부에서 탈출한 케이와 스쿨드는 공중을 날아서 대학 뒤편의 호수가 부근까지 날아왔다. 가이버의 모
습으로 그냥 걸어왔다가는 사람들 눈에 띄는 것도 있지만 비행에 처음 성공한 케이가 비행연습도 해 볼겸
일본지부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었다. 오는 도중에 정신집중이 풀려서 두 번이나 추락할 뻔하기도 했지
만 말이다.
날아오는 동안 스쿨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가끔씩 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케이가 고개를 돌리면
황급히 시선을 피하기만 할뿐이었다. 처음엔 왜 그러나 싶었지만 케이는 곧 스쿨드가 저러는 이유를 알아차
렸다.
"...내가 살아있는거, 역시 이상하지?"
"으...응?"
"그 때, 난 분명히 엔자임에게 패했었지. 그리고 스쿨드 말대로 라면 난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었고...."
"...그...그건!"
스쿨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모두가 다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난 도대체 뭐지?"
케이는 그렇게 질문을 하였다. -사실 절반정도는 자기 자신에게 한 질문이다-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면 지
금 여기 있는 난 뭐란 말인가? 일본지부에서 탈출을 할 때는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여유가 생긴
지금은 이런 의문이 케이의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그..그러니까! 케이는 무슨... 에 그러니까, 그래! 기적이야! 무슨 기적 같은 힘에 의해서 부활한 거야! 틀림
없어!"
스쿨드가 잔뜩 당황해하며 더듬거리면서 설명했지만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기적이라니. 정확한 계산에 의
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야 하는 정밀기계를 만드는 스쿨드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막
연하고 비과학적인' 말은 대답이 될 수가 없었다.
"그..그럼! 가이버의 컨트롤 메탈이 케이를 다시 만들었다고 보는 건 어때?"
"메탈이?"
"그래. 가이버는 어지간한 상처는 금방 치료하잖아? 그렇다면 혹시 전신을 다시 만드는 것도 할 수 있지 않
을까?"
스쿨드가 정답을 말했다. 물론 직접 보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황상 그렇게 밖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컨트롤 메탈이 아주 약간의 체조직으로 부터 전신을 복원해 냈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었지만 어차
피 유니트 가이버 자체가 '미지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케이는 머리속이 더욱 더 혼란스러워 졌다. 만약 스쿨드의 말이 맞다면 여기 있는 난 원래 있던 몸의 복사
품이란 말인가? 지금의 나의 기억이나 나의 육체 전부 진짜가 아닌 복사품? 그렇다면 지금의 난 진정한 나
라고 할 수 있을까?
"난...원래의 나와 같은 것일까?"
"...."
스쿨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날아가고만 있었다.
******************************************
이윽고 케이와 스쿨드는 호수가 부근에 도착하였다. 일단 여기 주차시켜놓은 바이크를 다시 회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몇 시쯤 됐을까? 베르단디가 무척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케이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응?"
"왜 그래?"
"앞에 누군가가 있어."
거기까지 말한 케이는 바이크까지 가지 않고 좀 떨어진 곳에 착지하였다. 그러나 스쿨드는 앞에 뭐가 있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밤이라 어두운 데다 바이크가 세워진 곳은 나무가 울창한 곳이라서 위에서는 대낮
에도 전혀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케이는 어떻게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그러고 보니 케이는 전에도 뭔가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린 적이 있었다. 한밤중에 절 뒤쪽에서 가이버가 돼
봤을때도 베르단디와 울드의 접근을 눈치챘었고 대학에서 젤브부스와 싸울 때도 젤브부스의 용해액 기습을
미리 알아차리고 몸을 피한 적도 있었다. 일본지부에서 탈출할 때도 케이는 보통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리
가 없는 코너뒤쪽에 매복해 있던 적들을 눈치채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것도 가이버의 힘일까?
두 사람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겨가며 바이크를 주차시켜 놓은 곳까지 살금살금 걸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
은 바이크를 주차 시켜놓은 자리 근처까지 왔다. 케이의 사이드카 조수석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척 익숙한 뒷모습, 베르단디였다!
"어..언니! 흡!"
순간 케이가 재빨리 손으로 스쿨드의 입을 막았다. 다행히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스쿨드의 입을
막은 채로 케이는 조용히 언덕길 아래로 내려갔다. 두사람은 곧 베르단디와 꽤 멀리 떨어졌다. 이만하면 되
겠다 싶은 케이가 스쿨드의 입을 막은 손을 치웠다. 그러자 스쿨드가 양 볼이 잔뜩 부은 채로 다짜고짜 따
지기 시작했다.
"왜 그래! 언니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나 지금 여기서 식장을 해제하면 벌거벗은 몸이란 거 알지? 그렇다고 가이버인채로 베
르단디 앞에 나타날 수도 없고 말이야."
"우..."
갑자기 스쿨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마도 감옥 안에서 케이와 다시 만났을 때 봤던 알몸이 다시 생각난
것일 것이다.
"스쿨드. 내 옷 만들어 줄 수 없어? 법술로..."
"난 못해... 정말! 왜 가이버는 옷은 복원 못하는 거야!"
스쿨드가 심통을 부렸다. 물론 스쿨드 역시 그 이유를 알면서도 그냥 한번 저래보는 것이다. 옷은 체세포
분열 같은 걸 못하는 무생물이니 당연히 복원 불가능이었다. 케이는 그런 스쿨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물
론 가이버의 마스크 때문에 스쿨드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절로 공간이동해서 내 옷 좀 가져다줄래? 저쪽으로 조
금만 가면 호수니까 공간이동에 문제는 없을 꺼야."
"알았어... 여기서 기다려."
거기까지 말한 스쿨드는 호수 쪽으로 부지런히 뛰어갔다. 스쿨드가 사라지는 것을 본 케이는 다시 베르단디
가 있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수풀 속에 숨어서 베르단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뒷모습만 보여서 얼굴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베르단디는 아마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케이는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지금이라도 당장 베르단디 앞으로 달려나가서 걱정 끼쳐 미안
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설명해야 한다. 가이버부터 시작해서 크로노
스로 인한 모든 일을.... 어차피 크로노스 일본지부는 괴멸되었다. 총사령관 리헐트 규오는 죽었다. 녀석들은
아마도 더 이상 공격해 오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괜히 베르단디에게 걱정거리를 늘릴 필요는 없을 것이
었다.
'미안해 베르단디...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
-슈우우
스쿨드는 공간이동을 해서 절의 욕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변이 무척 조용한 게 울드는 아마도 밖에 나
갔거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스쿨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스쿨드는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동정을 살폈다. 역시 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싶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스쿨드는 법술을 외우면서 공중에 살짝 몸을 띄웠
다. 마루바닥을 밟아서 삐걱거리는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서다. 이 정도는 스쿨드도 할 수 있었다.
-스륵
케이의 방에 도착한 스쿨드는 주위를 한번 살펴본 후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왠지 문 열리는 소리가 평소보
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스쿨드는 잔뜩 긴장되었다. 스쿨드는 방으로 들어선 후 역시 살며시 문을 닫
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휴우~ 성공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절반쯤 성공한 셈이다. 이젠 케이의 옷을 챙겨 가지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드르륵!!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깜짝 놀란 스쿨드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놀랍게도 울드가 서있었
다. 울드는 단단히 화가 난 듯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짖고 있었다. 스쿨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흐응~ 그래...뭐가 성공인데?"
"우...울드..!!"
******************************************
'늦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스쿨드가 꽤 늦자 케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공간이동으로 갔을 테니 왕복시간 같은 건 거의 없는 셈
쳐도 상관없었다. 설마 스쿨드가 케이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있을 리가 없으니 아무래도 들킨 건지도
몰랐다.
-끼릭
그 때 케이의 머리 위에 있던 두개의 금속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이는 누군가가 여기로 접근하고 있다
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스쿨드 같지는 않았다. 생명반응이 두개가 탐지되는 데다 무엇보다 그 둘은 지
금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설마 크로노스 일본지부의 잔존 조아노이드 일
까?
가이버의 머리엔 중앙의 컨트롤 메탈을 중심으로 머리 양 옆부분에 또다른 금속구가 양옆으로 하나씩 두개
가 존재한다. 이것은 일종의 센서로서 식장자에게 주변 상황 등을 수시로 알려주는 경보장치 역할을 한다.
이쪽으로 몇 명이 오는지, 그리고 접근해 오는 것이 조아노이드인지 보통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능력이 있었
다. 케이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데 조아노이드와는 반응이 달랐다. 그렇다고 보통의 인간도 아니었다. 케이는 일단 수풀 속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만약 그들이 크로노스라면 베르단디를 지키기 위해 바로 튀어나갈 만반의 준비
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바로 상공에 도착하였다.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본 케이는 깜짝 놀랐다.
빗자루를 타고 온 울드와 스쿨드 였던 것이다! 역시나 들키고 만 것이었다.
"베르단디!"
울드가 부르는 소리에 베르단디는 고개를 돌렸다. 직후 베르단디는 깜짝 놀랐다. 스쿨드도 같이 왔기 때문
이었다. 베르단디가 서둘러 사이드카에서 내려 스쿨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스쿨드를 꼭 끌어안았다.
"스쿨드! 무사했구나!!"
"...언니, 미안해...."
스쿨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도저히 언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
기 때문이었다.
"스쿨드, 혹시 케이씨는 어딨는지 아니?"
"...."
그 때 울드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
다.
"케이!! 여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리나와!!!"
울드의 외침에 케이는 크게 당혹스러웠다. 울드는 스쿨드로 부터 케이의 행방에 대해 듣고 왔을 것이다. 어
차피 그건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정작 문제는 가이버인 채로 나가느냐 아니면 식장을 풀고 벌거벗은 몸
으로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케이는 애타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베르단디의 모
습을 보곤 결심을 굳혔다. 지금 창피한 것이 문제인가, 베르단디가 저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파앙!
케이는 식장을 풀었다. 그리고 중요부위(...)를 손으로 가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수풀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
다. 케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여기야."
"케이씨!!"
케이를 발견한 베르단디가 눈물을 흘리며 케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바로 케이를 꼭 껴안았다. 당황한 케
이는 얼굴이 아주 새빨개졌다.
"베..베르단디! 진정해, 나 지금 옷이..."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케이를 끌어안은 베르단디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베르단디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
었다. 케이는 조용히 손을 들어서 살며시 베르단디를 안았다.
"밤페이군이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당해서...! 그래서 케이씨도 당하신 줄 알고...! ....흑!"
케이는 베르단디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곧 어떻게 봤는지 대충 짐작하였다. 아마도 법술을 써서 밤페이의
파편에 기억된 당시의 장면을 봤는지도 몰랐다. 괴물이란 것은 아마도 엔자임을 말하는 것이겠지. 심하게
충격을 받았는지 베르단디는 아직도 진정이 안되는 것 같았다. 우선 베르단디를 진정시켜야 했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진정해."
"...네."
베르단디가 포옹을 풀었다. 그러자 눈물이 가득한 그녀의 눈이 보였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큰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케이는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앞으론 이럴 일이 없을꺼야..."
"네...케이씨."
"저...그런데 내 옷 좀 만들어 줄 수 있어?"
"네? 아! 죄송해요. 지금 당장 만들어 드릴께요."
거기까지 말한 케이는 얼굴이 더욱 더 빨개졌다. 베르단디가 서둘러 법술을 외웠다. 그러자 케이의 몸을
정체불명의 하얀빛이 감싸더니 빛이 사그라들자 케이 몸에 꼭 맞는 옷이 만들어졌다. 케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 베르단디. 덕분에 살았어."
"아뇨, 괜찮아요."
"난 전혀 괜찮지 않은데, 케이!"
갑자기 울드가 케이의 멱살을 잡았다. 울드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깜짝 놀란 베르단디가 울드를 말렸
다.
"언니! 왜 이러세요?"
"자, 말해봐! 이제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
케이는 울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다. 역시나 다혈질인 울드 다웠다. 그러나 케이는 뭐라 말해야 좋을
지 몰랐다. 이제까지 괴물과 싸우다 왔다고 해야 하나? 케이가 되는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그게 그러니까, 친구 만나러 갔다가...그...뭐라 해야하나... 아! 강도, 강도를 만나서 말야, 옷까지 다 뺐기
고...그래서..."
누가 봐도 수상한 답변이었고 역시나 울드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스쿨드가 울드에
게 사실을 말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울드는 모든 걸 알고서 이런 질문을 하는걸까,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
는 상태일까?
"누가 그런걸 믿을 줄 알고! 도대체 너희들 왜 이래! 스쿨드는 내가 뭐라해도 아예 입을 닫고 있고 넌 거짓
말이나 하고 있고!"
"언니! 제발 그만.."
"베르단디가 얼마나 걱정 많이 했는 줄 알아! 이 애가 얼마나 맘고생 했는 줄 알면 그런 거짓말은..."
"언니! 그만 하세요!!"
베르단디가 울드를 억지로 떼어놓았다. 그리고는 케이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상태를 살폈다. 울드는 그 장면
을 보고 기가 막혔다.
"베르단디! 넌 이런 거짓말을 믿어? 이 녀석 때문에 네가..."
베르단디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전 케이씨를 믿어요. 설령 거짓말이라 해도 무슨 사정이 있으실 꺼에요."
울드는 뭐라 말하려다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베르단디에겐 뭐라 말해도 소용없을 듯 싶었다. 분위기는
금방 얼어붙었다. 케이는 울드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자, 너무 늦었어. 그만 돌아가자."
케이는 바이크로 가서 시동을 걸려 하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바이크 키는 아까 전투에서 패해서 녹아버렸
을때 같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케이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베르단디가 나서서 법술
로 시동 거는 것을 도와주었다. 울드는 짜증이 난다는 듯 빗자루를 타고 혼자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별수
없이 스쿨드는 조수석에 베르단디와 함께 앉아 가기로 하였다. 아무래도 울드의 화가 풀리려면 한참 걸릴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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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로 돌아온 케이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이상하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푹 자고 일어난 듯한
느낌만 들었다. 한동안 뒤척이던 케이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시간은 벌써 5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잠
자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든 케이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간편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흐읍~~"
케이는 마당에서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듬뿍 들이마셨다. 그리고 온몸을 비틀면서 가볍게 몸을 풀어주었다.
동쪽 하늘에서는 벌써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자동차부가 황금망치배에 출전하는 날이다. 지로 선배가 힘들면 안나와도 좋다고 했다
고 하지만 그래도 선배 된 입장에서 안 나가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오늘은 특별히 할 것도 없으니
까. 다만 베르단디는 어제 케이 걱정에 잠을 설쳤을 테니 같이 가자고 할 순 없었다. 케이는 오늘은 혼자서
만 가 봐야 겠다고 맘먹었다.
"케이씨. 주무시지 않고요..."
그 때 베르단디가 마당으로 나왔다. 잠자리에든지 한시간도 안됐는데 벌써 나온단 말인가? 케이가 걱정스럽
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베르단디? 피곤하지 않아? 베르단디야 말로 좀 더 자야지."
"아니에요, 왠지 잠이 오지 않아서..."
베르단디는 어딘지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 한 구석이 저려왔다. 정말 소중한
사람을 나는 이렇게나 걱정시켰었구나... 케이는 고개를 돌렸다. 왠지 베르단디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사
실 어제밤일은 케이의 잘못이랄 수는 없었지만 케이는 베르단디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베르단디가 케이의 바로 옆에 섰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동쪽 하늘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고 있었
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 그건 케이만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몰랐다. 베르단디는 언제나 케
이를 믿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지금 케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베르단디."
"네."
"어젯밤엔 걱정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앞으론 이럴 일이 없을꺼야. 모든 일이 다 잘 풀렸으니까..."
"네, 케이씨."
베르단디가 밝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 있었냐고 안 물어보네?"
"케이씨를 믿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무사하시니 까요."
그녀의 미소를 보며 케이는 다짐하였다. 이렇게나 나를 믿어주는 그녀를 다시는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다
시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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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안 잤지만 몸은 피곤한 걸 몰랐다. 컨트롤 메탈이 육체를 재구성한 여파일까? 어쨌든 케이는 아침식사
를 평소 휴일아침보다 빨리 시작하였다. 오늘은 황금망치배 대회장에도 나가 봐야 하니까 일찍 식사를 마쳐
두는게 좋을 듯 싶었다.
평소 같으면 식사를 할 필요가 없다 할지라도 울드와 스쿨드도 응접실에 나와서 TV를 본다든지 서로 승부
를 겨룬다든지 해서 떠들썩했는데 오늘은 울드는 나오지 않았다. 피곤해서 자는 건지 화가 안 풀려서 안 나
오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스쿨드는 먼저 나와있었다. 스쿨드 역시 잠은 자지 않고 부서진 밤페이의 수
리를 했었다. 예비 부품들이 있어서 수리 자체는 빨리 끝났다. 평소 같으면 동물 관련 프로나 기계가 나오
는 프로를 볼 텐데 오늘은 스쿨드가 뉴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네, 여기는 맥스제약 화재현장입니다. 현재 도쿄 전역의 소방소가 총 출동해서 화재 진압에 전력을...'
뉴스에선 새벽에 발생한 맥스제약 폭발사건이 계속해서 방영되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과격분자의 테러 가능
성이 높다는 경찰의 발표를 방송하고 있었다. 아마도 크로노스 일본지부는 외부에는 맥스제약으로 알려져
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뉴스에선 조아노이드나 크로노스, 가이버의 얘기같은건 없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크로노스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려고 하였으니까.
그 때 베르단디가 아침식사를 내 왔다. 케이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또 큰 사고가 난 모양이군요."
"으..응. 화재가 났대나봐."
케이는 짐짓 모르는 척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베르단디는 요즘 주변에 큰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며 걱정하
였다. 그리고 스쿨드에게 밖에 나갈 땐 조심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하였다. 아무래도 베르단디 역시 뭔가 이
상한 점을 느꼈을 지도 몰랐다.
"오늘은 나 혼자 대회장에 갔다올께. 베르단디는 집에서 쉬고 있어."
"아뇨, 저도 같이 갈께요. 도시락이랑 금방 준비할께요."
"하지만 베르단디도 피곤할 텐데...."
"전 괜찮아요. 케이씨."
베르단디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그리고 빈 그릇을 가지고 부엌으로 갔다. 케이는 더 이상 말리지 않
기로 하였다. 어제 그렇게 걱정을 시켰는데 또 혼자서 기다리라고 하면 베르단디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듯 싶었다. 다만 저렇게 말해도 역시 피곤할 테니 결과만 보고 일찍 귀가하면 될 듯 싶었다. 케이의
예상대로라면 대회는 아마 3시전에는 끝날 테니 시상식 같은 거는 안 보고 오면 쉴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
그런데 스쿨드의 표정이 시무룩한 것이 어딘지 좀 이상했다. 크로노스의 역습을 걱정한다기 보다는 저건 마
치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차마 하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랄까? 케이는 대번에 눈치챘다.
"같이 갈까? 스쿨드."
"응?"
"피곤하면 안 가도 되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가도 괜찮아?"
"너도 노력했잖아. 넌 네가 노력을 쏟은 머신이 달리는걸 볼 권리가 있어."
스쿨드는 사실 대회장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제 그렇게 언니나 울드에게 걱정을 끼쳐 놓아서 밖으로
또 나가겠다고 하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마치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냐. 모든건 내가 미숙해서 그랬던걸. 그리고 이제 다 끝났어. 그러니까 이젠 안심해도 된
다고 생각해."
케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스쿨드의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역시 스쿨드는 웃는 표정이 제일 귀여
웠다.
******************************************
"울드.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대회장에 가기 전 케이는 울드의 방 앞에서 울드를 불렀다. 아무래도 얘기를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들어와."
안에서 울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목소리가 좀 딱딱한 듯이 느껴지는
게 아직도 화가 다 안 풀린 듯 싶었다. 케이는 잔뜩 긴장한 채로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뭔가의 실험에 열중하고 있는 울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울드는 케이가 들어왔는데도 돌아서지 않
았다. 케이는 조심스럽게 용건을 말했다.
"오늘 베르단디랑 스쿨드랑 같이 레이스경기장에 갈 꺼야."
"..."
"같이 가지 않겠어?"
"흥미 없어."
목소리에 냉기가 확 느껴졌다. 역시나 아직도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저기...어젠 정말 미안했어. 너희들에게 걱정을 끼쳐서..."
"...."
"두번 다시 베르단디를 그렇게 울리는 일은 없도록 할께. 절대로! 이제 모든 건 다 괜찮아 졌으니까. 그럼
난 가볼께..."
더 말해봐야 화만 더 돋굴 것 같아서 케이는 그대로 돌아섰다. 아마 한동안 울드랑은 좀 불편하게 지낼 것
만 같았다.
"베르단디는 언제나 너만 바라보고 있어."
그런데 케이가 문을 닫기 직전 울드가 말을 걸어왔다. 아까 보단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울드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언제나 그 애가 웃을 수 있게 해 줘. 무슨 사정인지는 나중에 말할 결심이 서면 말하도록 해. 이
번만은 봐줄 테니까."
"응...알았어. 나중에 꼭 말해줄께. 울드."
"걘 내 소중한 동생이야. 그러니까 잘 부탁해."
"응. 명심할께."
케이는 울드와 어느 정도 화해를 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닫았다. 케이는 보
지 못했지만 울드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케이가 나간 것을 확인한 울드는 문을 한
번보고는 살짝 웃었다. 역시 케이라면 베르단디에게 잘 어울리는 남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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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황금망치배 대회장에 나온 케이와 베르단디, 스쿨드를 맞은 것은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지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케이의 동생 메기까지 있었다. 메기 역시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케이는 그 모습들을 보
고 움찔하였다.
"너 이 녀석! 대체 어젯밤에 어디 가서 뭐한거야!"
"케이, 무슨 일 있었어? 어젯밤 베르단디가 울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었어. 우리 집에 안 왔냐고 말이
야."
케이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제저녁에 엔자임이란 괴물과 싸우다가 패해서 의식을 잃었었는데 정
신을 차려보니 크로노스란 놈들의 본거지더라, 그래서 끝도 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을 물리치고 탈출했더니
밤늦은 시간이더라. 다 사실이지만 남들에게 말할 순 없었다. 백프로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만한 말이다.
"저..그러니까 그게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바쁜 일? 너한테 얼마나 바쁜 일이 있기에 여러 사람 걱정하게 만드냐!"
지로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계속 추궁하였다. 그러나 케이는 달리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적당히
얼버무리기엔 일이 좀 커지고 말았다. 옆에서 베르단디가 말려도 지로는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케이는 거짓말이 서툴다니까. 표정이랑 말 더듬는 거 하며 '나 지금 거짓말하고 있소'라고 광고하는 꼴이
잖아?"
오빠가 궁지에 처해있는데도 메기는 옹호해줄 생각이 없는지 옆에서 지로를 거들고 있었다. 케이는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지 거의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별다른 좋은 생각이 안 떠올
랐다. 그 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후 예선전이 시작됩니다. 예선 첫 경기는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 대 이와시미즈 대학 블랙맥스의 경기
가 되겠습니다. 참가팀은 출전준비를 서둘러 주십시오.'
장내에 예선전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방송을 들은 지로와 메기는 케이를 추궁하는걸 일단 중지
했다. 추궁이야 나중에라도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경기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자동차부원들이 서둘러 머
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로는 나중에 두고 보자는 표정을 지으며 출전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케이는 안
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뭔가 중대한 걸 숨기고 계시는 구만. 케이?"
자동차부원이 아닌 메기는 준비를 도울 필요가 없었으므로 아직도 케이 옆에 끈질기게 붙어 있었다. 케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넌 여기 왜 왔냐? 넌 소프트볼부 잖아."
"어머나, 난 바이크도 좋아해. 그리고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자유~."
"어련하시겠어...."
케이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
-부르르릉!! 부르릉!!!
스타트 라인에서 두 대의 머신이 대기 중이었다. 예선 첫 경기, 자동차부와 이와시미즈 대학의 머신이었다.
서킷 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나 자동차부원들은 더욱 더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는 이제
까지 대회에서 성적이 별로였던 팀이었으므로 대진운 자체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이쪽의
라이더인 콘도가 너무 지나치게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대회장에 가기 위해 부실로 집합한 콘도는 옆에서 보기에 상당히 걱정이 될 정도로 퀭한 얼굴이
었다. 드디어 실전이라는 긴장감 때문에 밤새 한숨도 못 잔 것이다. 주변에서 용기를 북돋워주려 노력해도
콘도는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 컨디션이 정상일리가 없었다. 게다가 연습에 연습을 거
듭해서 드디어 7초대를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연습은 연습일 뿐. 실전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과연 실전에서
도 같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띠!!
-부아아아앙!!!
드디어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면서 두대의 머신이 굉음을 울리며 출발하였다. 일단 출발은 좋았다. 문
제는 초반 가속이 어느 쪽이 빠르느냐 였다. 10초도 안돼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동차부원들에겐 영겁처럼
긴 시간이었다.
-바아아앙!!
그리고 드디어 두대의 머신이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였다. 먼저 통과한 사람은 콘도였다. 자동차부원들이 일
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다행히도 콘도는 잘 해내었다.
그러나 솔직히 기록은 좋지 못했다. 기록은 8.239초. 상대방은 8.253초. 둘다 본선진출은 무리인 기록이었다.
첫 번째 상대팀이 비교적 약체라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그런 행운은 없다. 7초대
를 끊지 못하면 상대방 머신이 중간에 탈이 나지 않는 이상은 이길 가망이 없었다. 지로와 케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둘은 콘도를 바라보았다. 첫 경기에 승리해서 잔뜩 들떠있었다. 다행히도 긴장감은 어느 정도 날려버린듯
했다. 잔뜩 얼어있는 것보다는 저런 모습이 차라리 더 나았다.
-부아아앙!!
"와아아아!!"
그러나 얼마후 다음 대전상대의 기록을 본 콘도는 다시 얼어붙었다. 상대팀의 이번 기록은 7.925. 콘도의 기
록보다 0.3초나 앞서는 기록이었다. 말이 0.3초지 사람이 달리는 게 아니라 속도만을 잔뜩 올린 바이크간에
대결에서 이 차이는 꽤 컸다.
"괜찮아, 괜찮아. 아주 못이길 차이는 아냐. 평소에 연습하던 실력이 나오면 되는 거라고. 안그래?"
지로가 별거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굴었지만 콘도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역시나 대회 초보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건 여러 대회를 경험해 보면 자연히 나아지는 거지만 지금의 자동차부는 한가하게
'이번 경기는 참가에 의의를 두자'라고 말할 상황이 못됐다. 무조건 우승밖에는 길이 없었다. 여기다 쏟아
부은 돈도 엄청나고 게다가 신입부원들을 끌어들이려면 뭔가 빛나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케이가 졸업하기
전 세웠던 우승기록같은 건 이제 의미가 없었다. 현재의 성적이 참담하다시피 한 수준인데 '예전의 영광'이
먹힐 리가 만무했다.
예선전이 계속되면서 다들 점점 더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2라운드 진출자들이 하나같이 다들 7초대를 마크
하고 있던 것이다. 예년보다 평균속도가 훨씬 빨라졌다며 케이가 혀를 찼다. 7초대면 한번 해볼만하다고 여
겼던 건 큰 착각이었다. 7초대는 이제 '당연한'것이 돼버렸다. 이러다가 조만간 누군가가 6초대도 끊는 거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
"핫세씨? 왜 그러세요?"
베르단디는 핫세가 아까부터 자꾸 관중석 쪽을 둘러보는 걸보고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부모님이라도 찾고
있는 건가? 하지만 직접 출전한 것도 아닌데 멀리 사시는 부모님을 부를 핫세는 아니었다.
"네? 아...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디 불편하세요? 혹시...."
베르단디는 혹시나 핫세가 다시 병이 도진 건 아닌가 싶었다. 얼마 전에 원인은 모르겠지만 심한 정신적 충
격을 받고 입원까지 했다가 의사의 권고를 뿌리치고 본인이 억지로 퇴원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핫
세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전혀 의외의 대답을 하였다.
"아...아뇨. 그게 아니라 마키시마 선배께서 오시지 않았나 해서...."
"네? 마키시마씨요?"
"마키시마는 오늘 못 와. 걔네 회사에 큰불이 났다고."
그 때 옆에서 상대팀 기록을 검토하고 있던 지로가 아키토 얘기가 나오자 중간에 끼여들었다. 그 소리에 핫
세가 깜짝 놀랐다.
"저..정말이요?"
"응. 오늘 아침 뉴스 안 봤어? 맥스제약 화재건 말이야."
맥스제약이란 말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케이와 스쿨드가 움찔하였다. 아키토의 회사가 맥스제약 이었다
니! 케이는 순간 아키토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맥스제약의 경영에 참여한다는 사람이 과연 거기가 크로노스
의 일본지부 였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사실 나도 오늘 아침 여기 나오라고 얘기하려고 전화했었는데 그런 사고가 나서 사고 수습하느라 못 온다
더라."
"그..그럼 마키시마 선배는 무사하신 거죠?"
핫세의 반응에 지로는 의아해하다가 뭔가를 눈치챈 듯 쿡 하고 웃었다. 그리고 정신차리라는 의미로 들고
있던 기록철로 핫세의 머리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그래. 무사해. 그러니까 넌 경기에만 집중해. 부장이 딴 데 한눈팔고 있으면 되냐?"
"아...네."
핫세는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콘도의 표정이 일그러졌
다. 누가 봐도 질투 때문에 저러는 거라는 게 다 보였다.
-'지금부터 예선 2라운드를 시작하겠습니다. 2라운드 첫 경기는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 대....'
그 때 2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자동차부원들은 또다시 출전준비로 분주해 지기 시작했
다. 라이더인 콘도는 잔뜩 흥분된 표정으로 핼맷을 썼다. 케이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려 하
였다.
"걱정마, 연습 때처럼만 하면..."
"두고보십시오! 전 반드시 이길 껍니다!!"
아까 까지만 해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더니만 지금은 또 뭣때문인지 잔뜩 흥분된 상태였다. 저건 시합
을 앞두고 흥분된다기 보다는 무슨 이유로 인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잔뜩 얼어있는거나 지나치게 흥분
돼 있는 거나 안 좋기는 둔다 마찬가지였다. 케이는 행여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부아아앙!!!
"해냈어!"
두 번째 경기도 다행히 통과하였다. 두 번째 기록은 7.890. 상대팀 보단 좀 아슬아슬한 차이였지만 어쨌든
이겼다. 앞으로 본선 진출까진 2번 더 경기를 치러야 한다. 이제 슬슬 콘도가 자신감이 붙는 것 같아서 부
원들은 안심하였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되었다. 3라운드 상대는 하필이면 전년도 우승팀으로 결정되었다. 예선 2라운드 경기에
서 이 팀은 작년에 자신들이 세웠던 우승기록 7.751초를 갱신한 7.732를 기록하였다. 자동차부는 순간 찬물
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콘도의 실력과 머신의 현재 상태로 볼 때 속도가 당장에 훨씬 빨라지기는 무리였
기에 다들 위기감을 느꼈다. 다만 라이더인 콘도만은 여전히 잔뜩 흥분된 -이라기 보단 화가 난- 상태였지
만 말이다.
"걱정 마세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오는 거니까요. 그것은 달리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옆에서 도와주면서 같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 되요. 그러니까 다들 포기하지 마세요."
베르단디 역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특유의 포근한 미소로 모두를 격려하였다. 자동차부원들은 모
두 전의를 다졌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벌써부터 포기하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베르단디의 격려 덕분일까, 아니면 상대팀이 지독하게 운이 없는 걸까. 예선 3라운드에서 상대팀은 달리던
도중 엔진트러블이 발생해서 경기를 포기했다. 자동차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스타트
부터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뜻밖의 행운 덕에 자동차부는 예선 마지막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4라운드 역시 순전히 운이었다. 이번엔 상대방이 긴장한 나머지 출발이 늦고 말았다. 상대팀은 무서운 속도
로 추격해 왔지만 처음 벌어진 차이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는 이렇게 절반쯤은 운
으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본선 진출 팀들중 가장 성적이 나쁘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
"그럼 잘 먹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케이와 베르단디, 스쿨드는 대회장 한쪽에 마련된 매점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매점에서 산 스쿨드 몫의 아이스크림과 간단한 스낵류, 그리고 베르단디가 싸온 도시락을 펼쳐서 점심식사
를 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았지만 다행히 서두른 덕에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베르단디와 스쿨드의 즐거워하는 표정을 본 케이는 역시 같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들은 벌써 다 날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왜 그러세요?"
케이가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자 의아해진 베르단디가 물었다. 케이는 밝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아니, 그냥. 역시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베르단디 역시 밝게 웃으며 케이의 잔에 차를 따랐다.
"아, 벌써 다 먹었네...."
그 때 한참 아이스크림에 빠져 있던 스쿨드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새 한 통을 다 먹은 것이다.
꽤 큰 컵이건만 역시나 아이스크림 하면 환장하다시피 하는 스쿨드 다웠다. 베르단디가 더 사다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금방 갔다올께요."
베르단디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매점 쪽으로 갔다. 자리에는 이제 케이와 스쿨드 두 사람만 남았다. 스쿨드
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 컵을 만지작거렸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걱정되니?"
".....그럼 걱정 안돼?"
케이의 질문에 스쿨드는 좀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하긴 그런 일을 겪은 지 아직 하루도
안됐으니 저렇게 불안해 하는 것도 다 이해가 갔다. 케이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 일본지부는 괴멸됐고 총사령관은 죽었어. 아마 우리에게 또 덤벼올 여유 같은 건 없을걸?"
"...그럴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 때 누군가가 케이와 스쿨드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그들
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케이와 스쿨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본지부 건물 하나 부쉈다고 우릴 이겼다고 생각하는가?"
"넌 크로노스!!"
깜짝 놀란 케이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스쿨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 분
명히 일본지부는 완전히 괴멸되었었는데! 그런데 하루도 안돼서 또 공격을 해 온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뭐냐, 한 번 해보자는 거냐? 여기서?"
벌떡 일어서서 강하게 노려보고 있는 케이를 본 남자는 주변을 한번 휘 둘러보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
러나 이건 케이에겐 협박으로 들렸다. 여기서 싸우게 되면 여러 사람들이 말려들게 되니까. 그러나 케이 역
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너희들도 이런데서 함부로 정체를 드러내진 못할텐데?"
이 남자가 조아노이드라 해도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데서는 함부로 변신하진 못할 것이라고 케이는 판단
하였다. 서로 피차 변신을 못하는 상태라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스쿨드는 도망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오히려 그런 케이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후후...난 상관없어. 원한다면 여기서 한판 뜰 수도 있는데 말이지. 여길 온통 피바다로 만들고 싶다면 그렇
게 하자고."
"괘...괜한 허세 부리지 마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케이는 잔뜩 긴장하였다. 이 남자는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다
죽일 기세였다. 자칫 잘못하면 대참사가 일어날 상황이었다.
"우리들 크로노스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지. 그런 우리가 이제까지 활동해 오면서 조아노이드를 단 한번도
안 들킨 줄 아나?"
그런데도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아마도 현장에 있던 목격자
들은 다 제거해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언론 등에는 사고 등으로 비쳐 보이도록 위장을 했을 거고. 아니, 혹
시 모른다. 이들이 매스컴까지 전부 장악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은밀
히.
"자, 둘다 순순히 따라오도록 하시지.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다 말려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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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드 몫의 아이스크림을 더 산 베르단디는 자리로 돌아오다가 울드와 도중에 만났다. 경기 같은 건 흥미
가 없다면서 절에 남겠다더니 어느새 경기장에 와 있었다. 물론 울드가 입장권을 내고 정상적으로 들어왔을
리는 없고 하늘로 날아서 들어왔을 것이다.
"어머, 언니. 오신거에요?"
"응. 혼자 있기 좀 심심해서. 너희들 예선은 통과했더라?"
"보셨어요?"
"그래. 1라운드 중반부터 봤지. 좀 아슬아슬 하던데?"
현재 자동차부는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간신히 본선에 올랐다. 그래서 현재 자동차
부엔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현재 성적으론 결승은 꿈도 못 꾼다. 본선은 상대팀 머신 트러블이라는 운이
통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라이더인 콘도가 빨리 제 페이스를 찾아야 했다.
"케이와 스쿨드는 어디에 있어?"
"네. 저기들 있어요. 같이 가실래요?"
"그래, 생각 같아선 스쿨드 외출금지 시켜버리고 싶었다만..."
물론 그런다고 울드의 말에 순순히 따를 스쿨드도 아니지만. 울드의 말에 베르단디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두 사람은 함께 케이와 스쿨드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베르단디나 울드 둘 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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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끌려갈 수는 더
욱 더 없었다. 방법은 하나, 싸우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싸울 수가 없다. 베르단디나 다른 무고한 사
람들을 모두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
그때 스쿨드가 주머니 속에 슬며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주머니 속에서 잠깐 뭔가를 만지작 거렸다.
남자의 주의가 케이에게 집중되있던 순간 스쿨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면서 바닥에 주머니 속에 들어있
던 것을 힘껏 내동댕이쳤다.
"케이!! 지금이야!"
-퍼엉!!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이들 사이에 짙은 흰 연기가 자욱하게 끼었다. 스쿨드가 던진 건 스
쿨드 봄버의 연막탄 버전이었던 것이다. 이 틈을 타 케이가 재빨리 스쿨드와 그 남자에게서 가능한 멀리 떨
어졌다. 그리고 케이는 강하게 외쳤다.
"가이버!!!"
-퍼엉!!
연막 속에서 케이는 재빨리 가이버로 변신하였다. 스쿨드의 연막탄 성능은 굉장했다. 순식간에 넓은 범위에
짙은 연막을 만들어낸 것이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변신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연막 때문에
스쿨드가 보이지 않았다.
"스쿨드!"
케이는 재빨리 스쿨드 곁으로 다가갔다. 연막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가이버의 헤드센서는 그
남자와 스쿨드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케이는 스쿨드를 안고는 높히 점프하였다. 그리고 바로 중력
제어구를 조종하여 경기장 밖으로 날아갔다.
"호오.... 그런 수도 있었군."
스쿨드의 연막탄과 케이의 가이버 변신 시에 났던 폭발음 때문에 매점가에 있던 사람들이 대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이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고 밀치는 대 혼란 속에서도 그 남자는 태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
다. 그리고 그는 손목에 차고 있는 무전기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쪽 방향으로 갔다. 내가 갈 때까지 녀석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무매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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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씨!!"
자리로 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두 사람이 있던 테이블 쪽에서 뭔가가 터지면서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끼었
다. 베르단디와 울드는 서둘러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때였다.
-슈웅!
연막속에서 갑자가 뭔가가 솟구쳐 올랐다. 푸른색이 감도는 뭔가였는데 중요한 건 그것이 스쿨드를 안고 있
었다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두사람은 확실히 보았다. 베르단디와 울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것
은 스쿨드를 데리고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케이씨! 스쿨드!"
베르단디는 두 사람이 있던 테이블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나 현장에 케이와 스쿨드는 없었다. 스쿨드는
아까 그 푸른색의 무엇이 데려가는걸 봤지만 그렇다면 케이는 대체 어딨단 말인가? 베르단디의 안색이 창
백해 졌다.
"베르단디! 뒤쫓아 보자, 서둘러!"
"네!!"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있었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법술을 써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차피 주위에 있
던 사람들은 서둘러 현장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상황이어서 그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울드는
공중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스쿨드를 데리고 날아간 그것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다. 생각보다 비행속
도가 빨랐다.
"제가 새들에게 한번 물어볼께요!"
베르단디가 주변에서 날고 있던 비둘기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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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괜찮을 꺼야."
케이들이 도착한 곳은 경기장에서 멀리 떨어진 강가 부근의 빈 공터였다. 대기업에서 쇼핑몰을 짓기 위해
측지중인 곳이었다. 케이는 경기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전속력으로 날아왔다. 도착후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수상한 놈들은 없는 듯 싶었다.
"어떡해! 놈들이 또 쳐들어 왔잖아!"
"....."
스쿨드는 이제 울상이 되었고 케이는 뭐라 해 줄말이 없었다. 일본지부의 파멸로 모든게 다 끝난 줄 알았는
데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하루도 안돼서 또 쳐들어 올 줄은 몰랐다. 케이는 암담함을 느꼈다.
"너희들은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케이와 스쿨드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쪽 방향에는 검은 양복에 짙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서있었다. 저 남자 역시 크로노스의 조직원이 틀림없
었다. 이렇게 쉽게 케이들이 날아온 곳을 찾아낸 걸 보면 빈틈없이 포위망을 둘러친 것 같았다.
"우리들의 조직은 세계 곳곳에 있다. 그 정도로는 끄떡도 안 하지."
갑자기 케이들 바로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놀랍게도 아까 대회장
매점가에서 케이와 스쿨드를 협박했던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는지 그저 놀
라울 뿐이었다. 역시 저 남자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너희들 조아노이드냐!"
남자들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빨갛게 충혈되 있는 그들의 눈이 보였다!
"우리들은 보통의 조아노이드들과는...."
"차원이 틀리단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남자들의 덩치가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이 급속히 사라지면서 다
들 한 마리의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각각 빨간색과 하늘색의 조아노이드로 변신을 완료하
였다.
"난 하이퍼 조아노이드, 노즈코프!"
"하이퍼 조아노이드, 무매르제! 지옥에나 떨어져라, 가이버!!"
무매르제의 양쪽 어깨 부분이 위아래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바짝 긴장하였다. 저 모양
새는 바모아의 생체열선포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렇다면 저 녀석들은 열선포가 주무기일까?
-파앙!
갑자기 뭔가 공기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케이는 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우우우웅!!!
"우아악!!"
온 몸이 격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진동 때문에 온 몸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케이
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잠시후 진동이 멎었다. 케이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하아하아...대체 방금 그건..."
케이는 방금 전 공격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서 당혹해 하고 있었다. 녀석의 어깨부분이 열리면서 열선포 비
슷하게 생긴 그 곳에서 뭔가가 발사된 건 확실한데 공격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스쿨
드 역시 크게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도 저들의 공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스쿨드는 아까
케이에게 공격이 명중했을 때 뭔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생각났다. 소리... 그렇다면 저 녀석
들의 공격은 혹시...
"흥! 방금 전 우리의 공격을 잘도 견뎌냈군. 그렇다면 이번엔 좀 더 거칠게 나가주지."
무매르제가 다시 그 무기를 케이에게 조준하였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까 그
공격을 또 한번 맞으면 이번엔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공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였다.
-파앙!
아까와 같이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케이는 바로 옆으로 멀리 덤블링하였다. 무매르제의 공격이 빛나
갔는지 케이 뒤편의 지면이 크게 솟구쳐 올랐다.
"이놈!"
노즈코프 역시 어깨장갑을 열고는 마찬가지의 공격을 해왔다. 케이는 역시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반
사적으로 옆으로 크게 피했다. 그 덕분인지 공격을 맞지는 않았다. 약이 오른 노즈코프와 무매르제가 맹렬
하게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파앙! 퍼엉! 파앙!
-콰앙! 쿠쿵!!
소리가 들릴 때마다 케이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 때마다 케이 주변의 지면이 엉망으로 파해
쳐졌다. 이렇게 하니 피할 수는 있었지만 대신 반격도 불가능했다. 피하는 동작이 너무 커서 바로 공격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하면서 바로 반격하려면 몸의 균형을 유지한 채로 상대의 공격을 아슬아
슬하게 피해야 하지만 공격이 보이질 않으니 이거밖엔 방법이 없었다.
"아! 잠깐! 무매르제, 공격을 멈춰!!"
그때 한참 공격하던 노즈코프가 실수를 깨닫고는 공격을 중지하려 하였다. 자기들이 쏴댄 공격에 지면이 파
헤쳐지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연막 구실을 해서 시야가 가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매르제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흥! 뭐 어때. 안보이면 안보이는데로 쏘지 뭐. 어차피 계속 쏘다보면 한방 맞을 꺼야."
"무매르제!"
노즈코프가 거칠게 어깨를 잡고 흔들고 나서야 무매르제는 공격을 멈췄다. 잠시 언쟁을 벌이던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가 가라않자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엔 엉망으로 파헤쳐진 지면만 있을 뿐 가이버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같이 있던 그 꼬마 계집애도 보이지 않았다. 공격에 맞아 죽은 거 같지
는 않고 아무래도 틈을 봐서 같이 도망친 것 같았다.
"쳇! 놓쳤잖아! 왜 쓸데없이 공격을 퍼부어서는..."
"자기도 같이 했으면서 왜 나한테 그러는데!"
둘은 잠시 언쟁을 벌이다가 곧 그만두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가이버Ⅰ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둘은 곧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아마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
"음파포?"
"그래. 내가 보기엔 틀림없어."
케이와 스쿨드는 인근에 있던 다리 아래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일단 두 사람은 작전회의를 하고 있
었다. 스쿨드는 이제까지 본 전투장면을 토대로 어떤 결론을 내렸다. 저들의 공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아까 케이에게 공격이 명중했을 시 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점, 그리고 그 외 저들이 무기를 사용
할 시 마치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점. 데이터가 부족하긴 하지만 이쯤에서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소리를 이용한 병기, '음파포'다!
"정확한 작동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공기를 압축시켜 그걸 상대방에게 발사하는 능력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걸 맞게되면 격렬한 진동이 일어나면서 몸에 큰 타격이 오는 거고."
스쿨드의 설명을 들은 케이는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놈들의 공격에 당했을 당시 케이는 온 몸이 엄청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녀석들의 음파포는 명중시에 격렬한 진동을 일으키는 압축공기탄을 발사해서 상대방
을 부수는 무기였다. 이상 진동이 계속되면 물체는 결국 부서지고 만다. 마치 지진이 발생했을 때 건물 벽
면이 진동을 못 견디고 부서지면서 결국은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할까? 게다가 놈들의 공격은 공기를 압축
시킨 것이니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되받아치는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피하는 것도 절대로 쉽지 않은 공격
이었다.
"그...그럼 어떻게 해야.."
일단 놈들 무기의 정체는 파악했다. 그 다음엔 대응방법이다.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공격이 전혀 안 보
인다는 점이었다. 가이버의 헤드센서를 사용한다면 공격이 날아오는걸 감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은 우
선 자신의 시각과 청각으로 거의 모든 정보를 습득한다. 그 중에서도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특히 높으며
그 점에선 가이버인 케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케이가 헤드센서를 이용한 전투에 좀 더 숙달돼 있
다면 눈을 감고 헤드센서에만 모든 정보를 의지하는 식의 전투도 가능하겠지만 그러기엔 아직 그는 미숙했
다. 그리고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걸 연습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스쿨드가 결정적인 말을 하
였다.
"아까 내가 보니까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 때 놈들의 공격이 날아가는 게 보이는 듯 했어."
"뭐? 날아가는 게 보여?"
스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쿨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놈들의 공격은 어쨌든 공기중을 통과해야 한
다. 물 한가운데에 뭔가를 던지면 물이 출렁이며 수면전체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놈들의 공격 역시 공기중
을 통과하다 보면 대기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 다만 물과는 달리 공기는 그런 현상을 맨눈으론 볼 수가
없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런데 대게 실험실 등에서 공기의 흐름을 눈으로 보려고 할 때 쓰는 방법이 공기
중에 무슨 가루 같은 것을 뿌려서 그 가루의 흐름을 보는 것으로 공기의 흐름을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니까, 흙먼지를 중간에 일으켜 놓으면 그 공기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거지?"
"딩동댕~!!"
스쿨드는 훌륭한 교사였고 케이는 이해가 빠른 학생인 셈이다. 스쿨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케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포장이 안 된 곳이고 풀도 별로 없다. 흙먼지를 일으키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듯 싶었다. 케이의 머릿속에 좋은 작전이 떠올랐다.
"정말 대단한데, 스쿨드. 놈들의 무기를 이렇게 금방 꿰뚫어 볼 줄은.."
"물론! 난 천재니까!!"
케이의 감탄에 기가 산 스쿨드는 가슴을 쭉 펴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확실히 이럴 때는 천
재같아 보이지만 평소의 발명품들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나사가 빠진 천재랄까? 하여튼 이제 스쿨드 덕분
에 승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놀이는 끝이다! 가이버!!"
저 멀리서 무매르제라 불리던 붉은 색 조아노이드가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들키고 말았다. 찾아내는 게 생
각보다 좀 늦었다는 것만 달랐다. 케이가 자세를 취했다.
"스쿨드. 뒤는 나한테 맡기고 넌 숨어있어!"
"응! 케이, 조심해!!"
스쿨드는 부리나케 뛰어서 인근 뚝방 위로 올라갔다. 스쿨드가 몸을 피하는 것을 본 케이가 복부에 손을 모
아서 프레셔 캐논을 준비하였다.
-위잉!
케이의 양손에 충격파가 모였다. 케이는 바로 발사하지 않고 상대방과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연습도 못해
보고 바로 실전이란 게 좀 불안하지만 연습 같은걸 할 여유는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
"어림없다!"
케이가 뭔가를 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자 무매르제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의 양어깨의 음파포에서 충격파
가 발사되었다. 그 순간 케이 역시 프레셔 캐논을 발사하였다.
-파앙!!
-퍼엉!!
그런데 케이가 쏜 프레셔 캐논은 어이없게도 무매르제의 앞에 훨씬 못 미친 곳의 지면에 작렬하였다. 무매
르제는 케이의 미숙함을 비웃었지만 그건 무매르제의 착각이었다. 케이는 처음부터 무매르제를 노린 게 아
니라 그 지면을 노리고 있었다. 케이의 프레셔 캐논으로 인해 전방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흙먼지로
인해 무매르제는 가이버Ⅰ의 모습을 놓쳤다.
"이야아아아!!"
그 때였다. 흙먼지를 뚫고 가이버Ⅰ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무매르제가 또 한번 음파포를 쏘려고 했지만
어느새 가이버Ⅰ이 자기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가이버Ⅰ이 고주파 소드를 휘둘렀다.
-부웅! 퍼억!!
"끄아아아아!!!!"
케이는 있는 힘껏 고주파 소드를 휘둘렀지만 무매르제는 몸을 비틀어 간신히 치명타는 피할 수 있었다. 그
러나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의 소드에 무매르제는 오른팔을 잘리고 말았다. 잘린 부위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무매르제가 상처를 감싸쥐며 멀리 점프하여 거리를 벌렸다.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프레셔 캐논으로 전방에 흙먼지를 일으켜서 놈의 음파포가 그 속을 통과하게 만든
다. 그러면 격렬한 대기의 움직임으로 인해 흙먼지가 흩어질 것이고 그것을 보고 음파포를 피한다. 무모한
작전이었지만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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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더경님의 댓글
베이더경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호오~생각해보니까 전에 모 과학잡지에서 읽은 글인데요...
생명체든, 무생명체든, 어떤 것이든지 그것의 원자구조였던가 분자였던가? 어쩄든 구조가 파괴되는 구간이 있었다고 했는데...혹시 그런 구간을 파괴하는 파장대의 공격은 없나요?? [스프리건에서 나왔던 고주파진동기같은....궁금모드 돌입 -퍼퍽]
흙먼지로 음파 공격을 확인하다라....맘에 듭니다..[일반인은 절대 흉내 못할 묘기 ㅋㅋ -퍼퍽]
어쩄든 가이버가 된 케이의 활약! 계속해서 읽고 있답니다 ^^
이번 주말에 저도 뵙도록 하죠~!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가이버님의 댓글
가이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가이버의 무기중 말씀하신 공격 비슷한 거라면 '고주파 소드'와 이번화에 등장한 '소닉 버스터'가 있습니다. 가이버의 무기에 관해선 다음 화 설정올릴때 한꺼번에 정리해서 올릴 예정입니다. 이제 무기는 다 등장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케이도 이제 먼치킨 다 돼가는 군요. -_-;;;; 흙먼지로 음파 공격을 피하는건 그야말로 묘기죠. 전술이 아니라...-.-;;; 그런데 원래 TV애니판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프레셔 캐논 한방으로 다리를 통째로 무너뜨려 음파포를 막는다는 식이라서-_-;;; 제가 좀 바꿔봤습니다. (먼산)
주말에 올라올 베이더님 소설도 기대할께요. ^^ 몸조리 잘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