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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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식장갑 가이버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
제5화 -제3의 그림자-
"케이씨. 식사하세요."
"응. 잠깐만."
베르단디는 응접실에 케이의 아침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그 옆에선 울드와 스쿨드가 아침 TV 채널권을 놓
고 숙명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시간 없으니깐 간단하게 끝내자. 곧 '운명적 사랑' 할 시간이란 말야."
"흥! 그딴 불륜 드라마가 뭐가 재밌다고. '숲속의 동물탐험대'가 훨씬 재밌어!"
TV는 분명 두대가 있었건만 이 두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채널권을 두고 서로 게임 등으로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젠가, 도둑잡기, 우노같은 보드게임등으로 승부를 가리곤 했고 전에 페이오스까지 있었을 때는 베르
단디까지 포함해서 4명이 마작을 두곤 했었다. 물론 대게 승자는 왠지 모르겠지만 베르단디였다.
하지만 이번엔 시간이 없으니 단숨에 승부를 낼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럴때는 역시 가위바위보 만한 게
없었다.
"훗. 이 울드님의 '절대행운마법'이면 너같은건 한판이야."
"흥! 행운 따위 불확실한 거 이 '고속연산장갑'이라는 과학 앞에선 모래성일 뿐이야!"
세면장에서 씻고 온 케이는 이 광경을 좀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있었다. 둘이 저러는거야 항상 보는 것이니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좀 이해가 안가는 케이였다. 베르단디는 저 둘이 아주 친해서 저
러는 거라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가위, 바위, 보!"
다섯번의 접전 끝에 결국은 2:1로 울드의 승리로 끝났다. (두번은 무승부) 이번엔 행운이 과학을 누른 셈이
었다. 스쿨드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승리한 울드는 당연히 즐거워하며 TV를 켰다.
"그럼 잘먹겠습니다."
케이는 수저를 들고 된장국을 떠서 입안에 넣었다.
"세상에! 케이! 너네 학교가 박살났어!"
"켁! 쿨럭, 쿨럭!"
갑작스런 울드의 외침에 케이는 사레가 들려선 기침을 해댔다. 깜짝 놀란 베르단디는 서둘러 케이에게 물잔
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국에 뭐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아..아니. 국이 문제가 아니라..."
케이가 TV를 가리키자 베르단디도 시선을 TV로 돌렸다. 그리고 베르단디 역시 깜짝 놀랐다. TV에선 뉴스
가 방송되고 있었다. 울드가 드라마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는 와중에 뉴스 채널을 잠깐 본 모양인데 거기선
지금 놀라운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뉴스에선 네코미 공대가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이 지금 난리가 아니었다. 건물 곳곳이 마치 폭탄을 맞
은 것처럼 부서져 있었고 많은 경찰들이 현장을 조사하는 장면이 방송되고 있었다. 기자는 긴장된 목소리로
현재 까진 불순분자의 테러로 의심된다는 경찰 발표를 읽고 있었다.
베르단디와 울드는 갑작스러운 이 뉴스에 놀라고 있었지만 케이와 스쿨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어제 젤브
부스와의 전투 때문이었다. 특히 케이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미숙해서 피해가 저렇게 크게
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건 발생시각은 어제 저녁 6시 이후로 추정되지만 목격자가 없어서 경찰은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
니다. 다행히 현재까지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6시 이후라면...너희들 그 때 학교에 없었어? 베르단디야 그 전에 먼저 들어왔으니 모를 거고."
울드가 고개를 돌려 케이와 스쿨드를 쳐다봤다. 그러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아..아니! 아무 것도 못 봤어. 그치? 스쿨드."
"으...응! 아무 것도 없었어...."
그런 두사람의 모습을 울드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봤다. 울드가 계속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자 당황한 케
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침식사를 서둘러 입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스쿨드 역시 괜히 찻잔을 만지작
거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울드는 뭔가 수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제 저녁늧게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더니만 케이는 갑자기 베르
단디한테 무슨 일이라도 난 것마냥 굴지 않나, (대담하게 남들이 보는 앞에서 포옹까지 하고) 지금은 그저
단순히 그때 학교에 없었냐고 물어본 것뿐인데도 마치 무슨 죄 지은 사람들 마냥 저런 반응들을 보이고 있
질 않나. 그러고 보니 베르단디가 케이보다 먼저 퇴근해서 들어왔다는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그때 베르단
디는 어딘가 멍한 표정이었었고 말이다.
"잘 먹었습니다! 자, 그럼 슬슬 출근준비 해야지."
5분도 안돼서 식사를 마친 케이는 도망치듯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케이가 나가자 스쿨드도 그 뒤를 쫓듯
이 밖으로 나갔다. 그런 두사람을 베르단디는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울드는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
다. 울드가 보고싶어하던 드라마가 방송되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거기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음....나중에 둘에게 자백제라도 주사해 볼까?'
"역시 말해야 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어!"
"스쿨드...."
케이의 방까지 따라온 스쿨드는 잔뜩 굳은 표정을 지으며 케이를 다그치고 있었다. 케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그저 듣고만 있었다.
"말해서 천계에서 지원군이라도 불러오도록 해야 해. 노란 가이버도 그렇고 어제 그 빨간 괴물녀석도 그렇
고 다 케이가 상대하기엔 너무 벅찬 녀석들이야!"
더 이상 숨기기 어렵다는 건 케이도 알고 있었다. 더불어 크로노스란 조직에 혼자서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도. 더군다나 단지 싸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놈들에게 노출된 스쿨드도 지켜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
다. 이럴 때 누군가가 같은 편이 되어서 싸워줄 수만 있다면 정말 든든할 것이다. 그것도 천계에서 직접 나
서만 준다면야 놈들을 완전히 격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시 안돼."
"어째서!"
"말하게 되면 베르단디도 울드도 같이 싸우겠다고 할거야. 그 리스카나 젤브부스와 같은 급의 괴물들과 마
주쳤을 때 과연 그 두사람이 무사할 수 있을까?"
"언니는 1급신이야! 그런 것들쯤..!"
"힘이 봉인된 상태잖아? 게다가 난 아무리 베르단디라해도 메가 스매셔를 맞고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곤 생
각 안 해."
"!"
스쿨드의 뇌리에 베르단디가 리스카와 맞딱드렸을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리스카가 가슴의 장갑을 열어서 메
가 스매셔를 베르단디에게 쏘는 그 모습이. 베르단디는 실드를 전개해서 막아보려고 하지만 스매셔의 섬광
은...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메가 스매셔의 위력을 똑똑히 본 스쿨드는 공포에 질렸다.
"아..안돼!! 언니!"
"놈들은 모두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받은 자들 같아. 하지만 울드나 베르단디는 전사가 아냐. 난 너희 셋이
위험해 지는 건 참을 수 없어."
"하..하지만!"
"알았지? 스쿨드. 물론 나도 언제까지나 이대로 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해.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
장 말할 순 없어. 싸우는 건 나 혼자로 족해."
케이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점퍼를 걸치곤 방밖으로 나갔다. 스쿨드는 뭐라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케
이의 뒷모습을 보는 그녀의 얼굴엔 케이와 베르단디에 대한 걱정과 적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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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영업준비를 하고 있던 훨윈드에 자동차부원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다들 수심에 잠겨있는 표정들이었
다. 다들 학과 수업이 있을 터인데 학교는 안가고 여기 왜 왔을까? 케이가 핫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다들 무슨 일이야? 이렇게 한꺼번에들 몰려오고. 오전에 수업 없어?"
"하고 싶어도 못해요....."
"뭐?"
핫세가 이유를 말하자 다들 상당히 놀랐다. 어제 네코미 공대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이번 주 일요일까지
경찰이 전면 봉쇄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사고라고 보기엔 아주 의심스러운 점들이 너무 많아서
경찰은 테러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때문에 정밀감식작업과 더불어 추가적인 테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학교출입을 통제하기로 하였고 이미 학교측과도 합의를 본 상태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 자동차부는 비상이 걸렸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상담해 보려고 아침부터 찾아왔다는 것이
다. 하지만 지로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머신을 완성해야 하는데 이거 큰일이군..."
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이렇게 중요한 때에 학교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
지 전지역 통제는 너무한 거 아니냐며 지로가 혀를 찼다. 경찰이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았다.
학교 출입이 통제돼서 안에 들어가서 머신을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래서 부실 안에 있는 머신의 부
품과 각종 공구를 가져오려고 했었지만 그나마도 경찰이 제지해서 가져나올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모든 부품을 새로 살수는 없었다. 공구야 여기 있는걸 쓰면 되지만 다른 부품들 특히 엔진은 아무
리 지로라도 새로 사는 건 부담이 너무 컸다. 제작 시간도 촉박하였다. 이젠 4일밖에 안 남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주행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립이야 백보 양보해서 어떻게든 된
다 쳐도 주행테스트및 라이더의 훈련은 대체 어디서 한단 말인가.
"학교 뒤편 항공학부로 가는 도로라면...."
"거긴 급커브나 급경사가 너무 심해서 드래그 레이스용 머신이 달릴만한 데가 못돼. 세팅이나 훈련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핫세가 의견을 내 봤지만 지로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직선으로 달리는 드래그 레이스 머신에겐 넓고 평
탄한 장소가 있어야 했고 그런 곳이라면 학교내의 활주로가 제격이었다. 원래 네코미 공대 자리는 제2차 세
계대전 당시 해군항공대의 비행장이었던 만큼 아주 넓은 활주로가 있었고 거기서 자동차부는 각종 머신들
의 테스트를 맘편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낭패였다. 학교 이외엔 이 주변엔 알맞은 장소가 없었고 일반 도로
에서는 그런 테스트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똑똑.
"손님이 오셨나 보네요."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고 베르단디가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그런데 온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어머, 마키시마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제 큰 일이 벌어졌었는데 괜찮으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네. 전 괜찮지만 지금은...."
찾아온 사람은 아키토였다. 아키토 역시 어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는듯 베르단디에게 안부를 물었지만 베
르단디의 표정은 어두웠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아키토는 베르단디나 지로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는 것
을 봤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다 어두운 것도 봤다. 아키토는 지로를 보고는 그녀에게 다
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대체 분위기가 왜 이럽니까?"
"왜일 꺼 같니... 어제 학교에서 일어난 그 괴상한 사건 때문이지."
지로는 간단하게 현 상황을 설명하였다. 경찰의 봉쇄로 인해 머신제작및 라이더 훈련이 사실상 물 건너갔다
고 말이다. 그리곤 지로를 비롯한 자동차부원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키토는 이 말을
듣고는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그렇다면 제가 가져온 선물이 좀 도움이 되겠군요. 잠깐들 나와 보시겠습니까?"
"이...이건!!"
아키토가 수행원을 시켜서 끌고 온 승합차 안에는 어제 학교에 두고 온 머신의 부품들과 공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있었다. 이 정도면 당장 머신제작을 재개할 수 있었다. 자동차 부원들은 전혀 예상도 못하던
광경을 보곤 얼이 빠졌다.
"제가 다 가져온 것 맞나요? 혹시나 빠진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너...이..이걸 대체.."
지로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아키토는 이걸 어떻게 가지고 나온 걸까? 경찰이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 경찰 쪽에 아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져올 수 있었죠. 중요한 대회가 있다고 해서 설득을 좀 했습
니다."
"여...역시! 넌 굉장해! 마키시마! 이거라면 아직 희망이 있어!"
"하하. 뭘 이런걸 가지고..."
생각지도 않게 문제가 해결되자 지로는 환호성을 질렀고 다른 부원들의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부원들
이 서로 얼싸안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베르단디의 얼굴에도 미소가 흘렀다. 그러나 케이의 얼굴에는 아
직 근심이 남아있었다. 사실 아직 한가지 문제가 해결이 안 된 것이다.
"머신이야 제작이 가능하지만, 연습은 어디서 하죠?"
순간 부원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산 넘어 산' 이라던가. 조립을 하면 아무리 못해도 한번은 달려봐야 한
다. 일단 우선은 조립만 하고 당일날 달리겠다고 하는 것은 시합을 안 하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
만 아키토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아까 말했지? 케이군. 설득을 했다고. 오늘은 안되지만 내일부터는 활주로를 쓸 수 있어."
"네?"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자동차부원들에게 아키토가 웃으면서 설명하였다. 처음엔 경찰 측에서 안됀다고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일어난 곳은 본관 건물과 그 주변 동들이고 활주로는 이들 건물에서 멀
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게다가 드넓은 활주로에다가 폭탄을 파묻을 바보가 어디 있는가.
설령 그런 놈이 있다 쳐도 네코미 공대의 활주로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포장돼 있는 곳이다. 여기다 폭탄을
묻어놓으려면 일단 콘크리트를 파헤친 후 드러난 맨땅에다 폭탄을 묻고 다시 시멘트를 부어서 마무리해야
하는데 이 정도면 폭탄 하나 묻는데 드는 노력이 너무 크다. 게다가 그렇게 정성을 들여도 주변과 확 차이
가 나기 때문에 대번에 들키고 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때 말도 안돼는 소리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경찰
이 오버한 것이다.
"경찰도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 듯 싶더군. 그래서 오늘 그 주변을 한번 수색해 보고 내일부턴 활주로
를 쓸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했어. 물론 들어가려면 신원조회랑 몸수색을 받아야 하고 활주로 이외에 다른
곳에는 못 간다는 조건이 있지만 말이야."
"........."
모두를 고민하게 만들던 두 가지 문제가 이 한사람으로 인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지로를 비롯한 모
든 부원들이 아키토를 경외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아키토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하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조립 안 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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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이 좁고 또 손님도 맞이해야 했기 때문에 밖에서 머신의 최종조립을 하였다. 오전동안 지로와 아키
토가 매달려서 최종 조립을 하였다. 두 사람이 조립에 열중하는 모습을 자동차 부원들은 가끔씩 잔심부름을
하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람이 많아서 산만스러울 텐데도 아키토는 싫은 표정 한번 안 짓고 열심히 조
립에 매달렸고 가끔씩 자동차 부원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그 광경을 케이와 베르단디는 가
게 문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저 분, 일년만 하고 만 솜씨가 아닌데. 상당히 숙련된 솜씨야."
"그렇네요. 그리고 아주 즐거워 보이세요."
오늘은 일거리도 별로 없어서 케이 역시 한가했다. 조립에 참여해도 문제될 건 없었지만 왠지 저 두사람을
방해하는 것만 같아서 케이는 그저 지켜보기로만 하였다. 저것도 두사람이 서로 옛 추억을 나누는 거라고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제3자인 케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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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르릉!!
두 사람이 매달린 덕에 빠른 시간 안에 조립이 순조롭게 끝났다. 엔진의 작동음도 아주 부드러웠고 그 밖에
조립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시운전뿐이었다. 자동차 부원들은 머신이 완성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이 다음부터는 시운전을 하면서 세팅을 마무리 해나가야 한다는 게 남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걸 할 장소에 들어갈 수 없으니 오늘의 작업은 일단은 여기까지 였다.
"좋아. 일단은 완성은 됐네. 도와줘서 고마워, 마키시마. 다행히 실력은 녹슬지 않았네?"
"뭘요. 선배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지로는 마키시마의 얼굴을 보곤 손수건을 꺼내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조립을 하다보니 어쩌다 얼굴에
오일이 묻은 것이다.
"이그...귀공자님 얼굴이 이게 뭐냐. 이따가 회사 가서 어떻게 하려고?"
"하하, 그래도 전 아직 이런 기름냄새가 향수보다 더 좋은 걸요?"
그 때 케이가 가게에서 나와서 모두를 불렀다.
"여러분. 잠깐 간식 좀 드세요!"
"음~ 향이 아주 좋군요. 저도 홍차는 꽤 즐깁니다만 이렇게 잘 끓인 홍차는 처음입니다."
아키토는 베르단디가 내놓은 홍차를 마셔보곤 감탄을 하였다. 찻잎의 양, 끓이는 시간과 온도, 그리고 그윽
한 향기 등등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지로는 아키토 옆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스러워하는 투로
말했다.
"아주 좋지? 우리 경리사원 솜씨가 이 정도라고. 베르단디가 끓인 차에 맛들이면 어디 가서 다른 차 못 마
셔."
다른 부원들도 모두 베르단디가 끓인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만 사람이 너무 많은 관계로 잔이 모자라서 다
른 부원들은 모두 종이컵으로 마시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찻잔의 온도도 중요한 홍차의 특성상 종
이컵은 부적절했지만 잔을 산처럼 쌓아놓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 별 수 없었다.
"오늘 오길 잘했군요. 이런 멋진 차를 마실 수 있었으니까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베르단디는 아키토의 찬사에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였다. 차를 다 마신 아키토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정
비업소 하면 대게는 기름때 등으로 좀 지저분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훨윈드는 아주 깔끔했다. 컨테
이너 박스를 가져다 놓은 건지라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었지만 적절한 인테리어 배치 덕에 넓고 화사하게
보이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가게를 둘러보던 아키토는 한 쪽에 세워져있던 바이크를 보았다. 그것도 아주 반가운 바이크를. 때마침 같
이 있던 지로도 그것을 보곤 미소를 지었다. 아키토가 본 것은 레이스용의 미니 사이드카였다.
"이걸 갖고 계셨습니까. 옛날 생각나는군요."
"그래. 어쩌다 보니. 그러고 보니 너랑 내가 같이 나간 그 대회 생각이 나네."
"네. 그땐 정말 즐거웠죠."
자동차부가 아직 학교측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조그만 동아리 수준이던 시절, 당시 자동차부는 어렵사리 사
이드카 경기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학교의 자금지원을 받지 못했으므로 머신을 독자구입할수는 없었고
결국 아는 오토바이 가게를 통해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아키토의 집은 상당한 부자였으므로 그가 구입할 수
도 있었지만 집에서는 아키토가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단 한푼도 지원 받을
수가 없었다.
아키토와 지로가 페어를 이루어 참가한 그 대회에서 두사람은 대회에 여러 차례 참가한 다른 대학팀들을
여유 있게 재치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당시 그들의 머신은 다른 대학들의 그것과는 달리 성능이 딸리는 중
고였고 그나마도 빌린 물건인 관계로 맘대로 세팅을 바꿀 수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팀들 중에는 프로 레이
싱팀에서 스카우트 해 갈려는 유망주도 있었고 그 외에 다른 팀들도 여러 레이싱 대회에 참가한 경험이 풍
부한 팀들뿐이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우승을 차지하였고 그들은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물론 이것이 자동차 동아리
가 부로 승격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선배가 이걸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단지 추억 때문만은 아닐텐데요."
"응? 무슨 소리니?"
아키토는 마치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귀여워서 구입하신 거군요."
"에? 아..아하하! 눈치 챘구나. 네가 보기에도 이거 정말 귀엽지 않니? 그치?"
"여전하시군요. 단지 귀엽기만 하면 사족을 못쓰시는 거. 일반도로는 달릴 수도 없는, 일반인에겐 필요도 없
는 값비싼 물건인데도요."
"우... 그, 그래도 귀엽잖아! 그리고 전에 자동차부에게 이거 빌려줘서 그래서 대회에 나가서 우승도 했었는
걸!"
아키토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말은 전에 지로랑 자신이 페어로 나갔던 그 대회를
일컫는 말은 아닐 터였고 현재의 자동차부중 누군가가 우승했다는 말일 것이었다.
"누가 나갔던 겁니까? 대단한데요."
"저기 두 사람."
지로가 웃으면서 가리킨 곳에는 케이와 베르단디가 있었다. 케이는 바이크를 수리 중이었고 베르단디는 옆
에서 케이가 정비하고 있는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한번 실력이 어떤지 보고 싶군요."
"도전해 보고 싶다는 거야?"
"예. 물론 선배가 같이 달려준다는 전제하에서요. 사이드카 경주는 두사람이 있어야 하잖습니까?"
케이와 베르단디와 경주를 한다? 게다가 두사람은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 역대 최고의 팀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었는데? 케이와 베르단디가 아직 재학 중이던 당시 출전한 사이드카 대회에서 둘은 완벽하게 호흡을 맞
추며 우승을 하였고 그 광경은 지로도 봤었다.
지로는 옛 생각이 났다. 그리고 더불어 투지도 끓어올랐다. 저 두사람과의 경주라면 아주 재밌을 것 같았다.
그것도 아키토가 함께 한다면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너 괜찮겠어? 오랫동안 바이크 안 탔잖아?"
"그래도 타는 법까지 잊어먹진 않았습니다. 몸이야 당일날 좀 풀면 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로는 아키토의 이런 모습에 왠지 믿음이 갔다. 다른 사람이 '
몸이야 당일날 좀 풀면 된다'라고 말한다면 말도 안됀다며 고개를 저었겠지만 아키토라면 그 정도로도 충분
하겠다 싶었다. 이미 결정은 났다.
"그럼, 머신이 또 한대 필요할 테니 그건 제가 준비하죠. 토요일 어떻습니까?"
"좋아. 마침 그 날은 차량 검사 받으러 가는 날이니깐 갔다오고 난 후엔 시간이 날 꺼야."
"그럼 결정됐군요."
-삐리리리!
그 때 아키토의 웃옷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아키토는 핸드폰을 꺼내곤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
다.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키토의 표정이 잔뜩 굳은 것이 아무래도 사적인 전화는 아닌 것 같았다.
"알았다. 곧 가지."
"가 봐야 하니?"
"네. 또 사업문제라서요. 쉴 틈을 안주는 군요. 그래도 토요일엔 반드시 시간을 낼 테니 걱정 마시고 당일날
연락주세요. 그럼 그때 뵙는 걸로 하죠."
"그래. 기대하고 있을께. 두 사람한테는 내가 말해놓을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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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앞으로 3~4일 정도면 완료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그것은 이틀후 정도면 완성될 겁니다."
규오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규오는 리스카, 그리고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젤브부스의 재조제
과정을 보고 받고 있었다. 가이버I 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패배한 그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동시에
대 가이버용의 무장을 추가하기로 한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규오 총사령관님."
그 때 규오의 호출을 받은 아키토가 규오의 호출을 받고 조제소에 나왔다. 아키토의 눈에 규오와 리스카,
그리고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조제통안에 들어가 있는 젤브부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래, 요즘 가이버I인 정비공 녀석과 접촉하고 있다고?"
"네. 대학 후배입니다. 물론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만 서서히 안면을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흠...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보단 그렇게 우회하는 것도 좋겠지."
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규오는 아키토를 온통 멍청이들만 모인 일본지부에서 유일한 진주라고 보
고 있었다. 이 일만 마무리되면 아키토를 본부기지로 불러서 자기 부관으로 삼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 때, 아키토가 시선을 리스카에게 돌렸다.
"그러고 보니, 리스카 감찰관."
"응? 뭔가."
"몸은 괜찮으십니까? 듣기론 정밀 검진을 받으셨다고 하던데..."
"아, 별거 아니네. 컨디션이 좀 나쁜 거 같아서 말야."
"....그거 다행이군요."
가이버I과의 전투중 갑작스럽게 몸에 이상이 생겨서 목표를 놓쳤던 리스카는 일본지부로 돌아온 즉시 정밀
검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검사 결과는 '전혀 이상 없음'이었다. 의료진에게 당시 상황을 얘기한 리스카는
아마도 강식장갑이 육체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면역체계에 사소한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소견을 들
었다. 현재는 이상이 없으므로 아마도 조금만 있으면 그런 현상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아직
은 강식장갑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으므로 상태를 좀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규오는 잠시 후 뒤쪽의 수행원 중 한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파나다임.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예!"
**********************************
-부아아앙!!
왠지 오늘따라 케이가 속도를 더 내는 것 같아서 베르단디는 좀 불안하였다. 베르단디는 지금 케이의 마음
이 상당히 흥분된 상태인 것이 보였다. 물론 왜 그런지까진 알 수 없었지만. (힘이 제한된 베르단디는 상대
의 마음을 색깔로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분노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빨강으로 보이게 된다)
지나치게 흥분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고 순간의 판단미스는 이런 고속운전상황에선 큰 사고로 연결되게
된다. 아무리 절로 가는 길이 퇴근시간에는 한가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운전이란 건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부아아아앙!!
"케..케이씨!"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는 속도를 크게 줄이던 급커브가 바로 코앞에 닥쳐왔는데도 케이는 속도를 줄이지 않
았다. 이대로 라면 코너에 격돌하고 만다!
"!"
그 순간, 베르단디가 조수석에서 몸을 일으켜서는 케이쪽으로 자신의 전 체중을 실었다. 브레이크를 당기기
에는 너무 늦었다. 이렇게 된 이상 회전하려는 방향으로 최대한 중심을 기울여서 코너를 탈출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끼이이이이!!!
바이크는 간신히 코너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조금만 타이밍이 늦었더라면 코너에 부딪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 차이는 불과 몇cm 차이밖에 안됐다.
-부르르릉....
케이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멈춰 섰다. 핼맷의 바이져를 올린 케이는 손등으로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본 베르단디가 손수건을 꺼내서는 케이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주었다.
"괜찮으세요? 케이씨."
"....으...응."
하지만 베르단디가 보기엔 케이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두려운 빛이 느껴졌기 때문이었
다. 사실 그건 굳이 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케이의 얼굴이 아주 창백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내가 너무 무모한 짓을 했었지."
"무슨 일이 있으신 거에요?"
"아까 지로 선배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서..."
퇴근전에 지로가 케이들에게 아키토의 말을 전했다. 토요일 차량검사가 끝나고 오후에 자동차부 앞의 활주
로에서 사이드카 경주를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케이는 왠지 흥분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동차부 원년 챔프 페어와 경주라니. 물론 아키토는 일년밖에 활동하지 않았고 그나마 지로와 함께 사이드
카를 탄 건 그 대회때 한번뿐이었으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케이와 베르단디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왠지 케이는 아키토가 거대한 벽으로 느껴졌다. 겨우 한 두 번 봤을 뿐이고 그나마 그가 바이크를
모는 모습은 한번도 못 봤지만 이상하리 만치 그가 어렵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째서?
"왠지 자꾸만 마음이 흥분돼. 그냥 한번 달려보자는것 뿐인데... 무슨 큰 대회에 나가는 것만 같아."
"어째서 두려워하시는 건가요? 바이크를 타는 건 재밌는 일이 아니었나요?"
베르단디가 케이의 손을 두손으로 꼭 쥐었다. 그리고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처럼 케
이를 격려할 때의 그 모습이었다.
"우리가 같이 대회에 출전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때 우리는 남들을 이기려고 나갔던 건가요? 우린 즐
겁게 바이크를 타기 위해 나갔던 거잖아요. 전 그때 정말 즐거웠었어요."
"......응. 즐거웠었어."
어떻게 보면 우스운 말이다. 대회에 나간다면 누구나 목표는 우승으로 잡게 마련이다. 그저 한번 달려만 보
는데 의의를 둔다는 것은 처음부터 겨룰 의지가 없다는 말밖엔 안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우승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베르단디가 강조하려는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대회에선 우승을 목표로 하는 것이 당연해요. 하지만 우승을 못하면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인가요? 그
순간 정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
"이번도 마찬가지 에요. 마키시마 씨도, 지로 씨도, 그리고 케이 씨도 모두 바이크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번
에 다같이 달려보기로 한 거잖아요. 상대방을 꺾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요. 즐겁게 그리고 정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달린다는 것이 중요한 거에요."
케이는 문득 자신이 너무 그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하였다. 왜 그를 반드시 꺾어야 한다는 생각
에 사로잡혔을까. 죽자 사자 달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즐겁게 달려보자는 것인데. 왠지 자신이 너무 부끄럽
게 느껴졌다. 괜히 혼자 흥분해서 방금 전에도 사고를 낼 뻔하지 않았는가.
"그래, 즐겁게 달려야지. 미안, 베르단디. 괜히 흥분해 가지고 사고나 낼 뻔하고...."
"아니에요. 케이씨. 저도 막 두근거려요. 그 분들과 달릴걸 생각하면요."
두사람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없는 도로 위에서 두사람의 웃음소리가 오랫동
안 울려 퍼졌다.
**********************************
다음날 오후. 지로와 케이, 그리고 베르단디는 자동차부원들과 함께 학교내의 활주로에 모였다. 아키토의 말
대로 활주로는 통제에서 풀린 것이다. 물론 들어가는 과정에서 사소한 검문이 있었지만 문제가 될 만한 물
품같은건 없었기에 어렵지 않게 모두 다 통과할 수 있었다. 활주로로 가는 도중에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
려있는 본관 건물이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부릉! 부르릉!
오늘은 조립을 완료한 머신의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남은 기간은 3일. 그 안에 세팅을 마무리하고 라이
더의 훈련까지 완료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라이더로 지명된 부원은 레이스 대회는 이
번이 처음인 완전 초보 라는게 문제였다.
"좋아! 이 콘도, 핫세의 정성이 들어간 이 머신으로 반드시 우승을 거머쥐겠어!!"
좀 오버하는 듯한 라이더, 콘도의 모습에 케이는 왠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그건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였
다. 다만 베르단디만이 그런 모습을 보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을 뿐이다. 뭐, 최소한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는
것 보단 저렇게 기운이 넘치는 게 그나마 나았다.
핫세의 정성 어쩌고 하긴 했지만 현재 머신의 제작당시 핫세가 참여한 부분은 없었다. 최초설계부터 핫세가
참여하긴 했지만 현재의 머신은 당시 핫세의 설계와는 동떨어진 물건이 되고 말았다. 최초설계가 기술적 벽
에 부딪히자 타미야와 오딘의 설계로 머신 제작을 했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그 엉망진창인 계산을 수정하고
제작을 완료한 것은 지로와 케이, 그리고 아키토 였으므로 안타깝게도 핫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 거나 마
찬가지였다.
"자, 그럼 준비...!"
콘도가 뭐라고 하던 간에 핫세는 신경도 안 쓰고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원래는 신호용 권총을 써야 겠지만
그랬다간 현재 교내에 있는 경찰들에게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발생한 테러로 인해
경찰들이 잔뜩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경찰의 유무를 떠나서 그런 간단한 소모품조차 맘대로 살 수
없을 정도로 자동차부가 가난한 것도 '중요한'이유였다.
"출발!!"
-끼이이이!! 부아아앙!!!
"9.053, 9.021, 8.859.....이래 가지곤 틀렸군."
케이는 현재까지의 타임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해도 기록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작년도 대회의
우승타임은 7.751초. 케이가 우승을 했던 3년전 대회의 케이의 우승기록은 7.713초. 그러나 오후 내내 달려
서 얻은 주행기록중 가장 좋은 성적은 8.693초. 1초나 차이가 나서는 승산이 전혀 없었다. 우승을 노리려면
7초대에 진입해야 가능했다.
"괜찮아요, 케이씨. 아직 첫날인 걸요."
베르단디가 미소를 지으며 케이를 격려하였다. 하긴, 아직 포기하기엔 너무 일렀다.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
이다. 앞으로 남은 기간은 오늘을 제외하면 이틀 남았다. 그 동안 '장족의 발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부원의 수가 적은 자동차부 중에서도 라이더로 나설 만한 사람이 마땅히 없었으므로 대안도 없었다.
"네 동생 메기는 어때? 걘 아직 졸업 안 했으니 출전자격 문제는 없잖아? 게다가 아직까지 고갯길 퀸의 타
이틀을 거머쥐고 있고..."
"소프트볼 부라서 안돼요. 재작년 대회부터 라이더 자격기준이 상당히 까다로워져서 걸린다고요."
지로가 의견을 내 봤지만 케이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생각 같아선 메기에게 부탁
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본인의 수락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자격이 안됐다. 이게 다 3년전 대회에서 케이에게
이겨서 베르단디를 자기 부로 끌고 가겠답시고 아마추어 대회에 프로 선수를 참가시킨 도시유 때문이었다.
3년전 대회에서 도시유의 사륜부는 베르단디를 걸고 (물론 본인의 사전동의없이 멋대로) 자동차부와 이 황
금망치배에서 격돌하였고 그 때 도시유는 부잣집 도련님답게 거액을 들여 일본 최고 기록을 보유한 프로선
수를 데려와서 달리게 했던 것이다. 바로 이게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다른 팀들에서 아마대회에
어째서 프로가 달리냐고 대회조직위에 강하게 항의해서 규정이 강화된 것이다. 강화된 규정은 현재 재학생
일 것과 원래부터 출전팀 소속으로 1년이상 활동한 부원에 한해서만 출전이 허용되었다. 이 규정에 따라 졸
업생인 케이는 물론 메기도 출전이 불가능했다. 부원이 적은 자동차부로선 큰 타격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 그리고 세팅도 좀 더 해야하고. 그러니 너무 초조해 하지 말자고."
"그래요, 케이씨. 콘도씨는 분명히 해낼 거에요. 그에게선 아주 강한 의지가 느껴져요."
글쎄, 그 의지란 게 부를 위해 우승을 하려는 건지 아니면 핫세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
다. 하긴 아무렴 어떤가. 우승만 하면 그만인 것을.
"연습은 잘 돼가나요?"
그 때 누군가가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키시마 아키토 였다.
"마키시마. 너 왔구나. 여긴 어쩐 일이니?"
"구경 좀 하려고요. 어때요, 순조롭습니까?"
지로는 고개를 저으며 현재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이야기 해줬다. 현재까지의 기록을 쭉 훑어보던 아키토
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한번 달려봐도 될까요?"
**********************************
"준비~~!"
스타트 라인에서 아키토가 탄 머신이 대기 중이었다. 다들 아키토의 결과는 어떻게 나올지 긴장하며 지켜보
고 있었다. 마침 이쯤해서 콘도이외에 다른 사람을 한번 달리게 해볼 생각이었던 지로는 마침 잘 됐다는 표
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달려서 이전과 비슷한 기록이 나오면 머신의 문제, 만약 더 낫거나 못한 기록이 나오면 라이더
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다만 아키토는 바이크에서 손을 뗀지 한참됐으므로 그리 좋은 기록이 나오진 않겠
지만 말이다.
"출발!!"
"에엑~!!"
"어머나. 굉장하시네요."
지로를 비롯한 모든 부원들이 깜짝 놀랐다. 아키토의 기록이 예상이상으로 좋았기 때문이다. 세번에 걸쳐
주행한 기록은 각각 7.922, 7.825, 7.731 이었다. 특히나 마지막 기록은 작년도 우승기록을 0.02초 갱신하기까
지 했다. 다들 놀라움으로 입이 쫙 벌어졌다.
"오랜만에 달리려니 생각만큼 잘 안돼는군요."
아키토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안됀다는 사람이 처음부터 7초대에 진입하고 마지막 기록은
작년도 우승기록을 뛰어넘었다?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기록이 있으니 더 무슨 말을 하겠는
가. 모든 부원들이 아키토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굉장하세요...마키시마 선배..."
진심으로 감탄한 듯한 핫세에게 아키토는 살짝 미소를 지어줬다. 그러자 핫세의 얼굴에 홍조가 나타났다.
부끄러운지 핫세는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콘도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지...지금기록은 엔진이 길이 잘 들어서 그래요! 내가 달릴 땐 엔진이 길이 안 들었었다고!"
엔진 자체는 완전 신품은 아니었고 예전에 쓰던걸 계량한 것이므로 길이 안 든건 아니었다. 설사 그렇다고
쳐도 겨우 세번만에 기록이 1초가까이나 단축될 정도로 엔진이 확 달라질 순 없었다. 그러나 이런 억지소리
를 아키토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받아넘겼다.
"아, 그런가? 그럼 지금 자네가 달려보면 더 잘나오겠군."
"두고 보세요! 전 이보다 더 잘 달릴 수 있으니까!"
"역시 라이더가 미숙한 거구만...."
다시 한번 달린 콘도의 기록을 보고 다들 그럼 그렇지 하며 혀를 찼다. 이번에 콘도가 세번에 걸쳐 달린 기
록은 9.012, 8.723, 8.710. 아키토의 기록과는 무려 1초나 차이가 났다. 할말이 없는지 콘도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드래그레이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기어변속타이밍이다. 그걸 염두에 두게."
아키토는 콘도에게 가볍게 충고하였다. 물론 콘도에겐 상당한 굴욕이겠지만. 아키토는 곧이어 지로에게 이
것저것 머신의 상태 등을 이야기하였다. 기어변속이 매끄럽지 못하다든지 엔진의 상태나 이상 진동여부 등
등 실제로 주행을 하면서 라이더밖에 느낄 수 없는 여러 가지 사항을 얘기하였다.
달릴때 머신의 상태가 어떻다는 건 라이더 밖에 알 수가 없는 거고 실제로 달려보면서 나타난 여러 문제점
들을 스텝들에게 이야기 해 줘야 개선이 되는 것이다. 콘도는 달리고 난 후에 이러한 점등을 이야기하지 못
했다. 자기 머신의 상태도 제대로 체크하지 못할 정도로 아직 그는 미숙했다.
"그럼 다들 수고들 하라고. 난 이만 가봐야 겠어. 아, 그리고 콘도라고 했나?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말고 힘
내라고. 아직 시간은 있어."
아키토는 가볍게 한마디 한 거였지만 콘도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러나 아키토가 자신보다 실력이 좋다
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는 모습을 보니 1년만 부활동을 하고 그 이후에도 경영문제 때문에 취
미생활을 거의 못했다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아키토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부실로 향했다.
**********************************
저녁이 되어서 주변이 어둑어둑해지자 지로는 테스트를 종료하였다. 너무 어두워지면 연습도 안되고 무엇보
다 경찰이 안전문제 때문에 빨리 나가달라고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더 이상 기록이 나아지지
도 않는데 괜히 더 달려서 머신이랑 라이더에게 무리를 줄 필요는 없었다.
"자, 그럼 다들 내일보자."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내일을 기약하며 각자 귀가하기 시작했다. 다만 콘도만은 몸이 지친 건지 아님 의욕을 잃은 건지 어깨
를 축 늘어뜨린 채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케이와 베르단디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콘도씨 힘드신가봐요..."
"걱정이네, 정말....저렇게 의기소침해 있으면 곤란한데..."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아키토 때문에 자기가 너무 미숙하다는 것이 모두에게 낱낱이 까발려졌으니 그런
상황에서 기운이 넘치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다. 케이는 저러다가 출전을 포기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부원이 다섯명 밖에 안돼는 현 상황에서 콘도가 그만두겠다 하면 자동차부는 출전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대체 인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없다고 의욕이 없는 사람을 억지로 출전시켜봐야 결과는 뻔
하다.
"괜찮아요. 아직 이틀이나 남았어요."
"베르단디?"
"콘도씨는 반드시 극복해 낼거에요. 비온 뒤 땅이 더 단단히 굳는다고 하죠?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기 마련
이에요."
"그래, 베르단디 말이 맞아. 아직 이틀이나 있어. 포기할 순 없지."
베르단디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베르단디인 것이다. 그녀
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틀밖에 없어, 이틀이나 있어. 글자 수는 같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틀리다. 뭐든
지 마음먹기 나름인 것이다. 그러나 마냥 믿기만 한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하지만 혼자서 역경을 견뎌 낸다는 건 조금 힘들죠. 답을 내는 건 스스로 해야 하지만 옆에서 등을 조금
밀어주는 정도의 도움은 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 그 말이 맞아. 우리가 조금 도와주자고."
**********************************
"뭐! 스쿨드가 안 들어왔어?!!"
"응. 아까 부품 구하러 나간다더니 아직도 안 들어왔네."
절에 돌아온 케이는 울드로 부터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다. 스쿨드가 낮에 밖으로 나간 후 지금까지 돌아오
지 않았다는 것이다. 케이는 잔뜩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경솔하게 혼자서 밖으
로 나가다니! 크로노스가 노리고 있는 현 상황에서 혼자 돌아다닌다는 건 '날 좀 잡아가쇼' 하는 말밖엔 안
됐다.
"대체 어디로! 어디로 간다는 말없었어?"
"응? 글쎄...뭐 전자상가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는데?"
무심한 투로 말하는 울드에게 케이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곧 화를 누그러뜨렸다. 생각해보면 사정을 전
혀 모르는 울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누구에게 화를 내고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스쿨드를 찾아야 했다.
"내가 나가서 찾아올께!"
케이는 현관문을 거칠게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베르단디도 그런 케이를 따라가기 위해 서둘러 문밖으로
나섰다.
"케이씨! 저도 같이...."
"안돼!!"
무심결에 케이는 베르단디에게 큰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베르단디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리
고 이 광경을 옆에서 바라보던 울드도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케이가 베르단디에게 저런 식으로 소리친 적
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많이 놀란 표정의 베르단디를 보고 케이는 아차 싶었다. 케이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음 한 부분이
저려 왔다. 하지만 같이 갈 순 없었다. 잘못하면 베르단디까지 크로노스의 표적이 되고 만다. 무슨 일이 있
어도 그녀만큼은 지켜야 했다.
"....미안, 베르단디. 스쿨드는 내가 찾아 볼 테니까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줘. 혹시 스쿨드가 돌아올지
도 모르니까...."
"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께요."
베르단디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케이는 살짝 한번 웃어주고는 서둘러 차고로 달려갔다. 그런 케이
의 모습을 두 자매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울드는 케이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
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냄새가 나는 것을....
**********************************
전자상가는 이미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은 후였다. 몇 군데 열려있는 가게들도 퇴근준비를 하고 있었
다. 여기엔 없는 게 확실했다.
"여기가 아니라면....거기 뿐이군!"
스쿨드가 부품을 조달하는 곳은 크게 두군데다. 하나는 이곳 전자상가. 물론 용돈이 충분할 때 얘기지만. 만
약 용돈이 부족하다면 대게 스쿨드는 베르단디에게 떼를 써보지만 집안 살림을 챙기는 베르단디는 무작정
내주진 않는다. 그럴 때 스쿨드가 찾는 곳은....
"학교의 고물 수집장!"
각종 고철들이 모여있는 그곳도 스쿨드에겐 절호의 부품 조달처다. 전자상가를 못 간다면 이곳을 뒤져서 필
요한 것을 찾는다. 겉모양을 이루는 철판 등도 주로 이곳에서 조달한다. 그리고 스쿨드는 여기 들어간다면
나오는데 한참 걸린다. 그 엄청난 고물의 산 속에서 원하는 부품을 찾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학교는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경찰이 들여 보내줬을리는 없을 것 같
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거기밖에 가볼 데가 없었다. 케이는 전속력으로 학교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부아아앙!!
**********************************
"아! 벌써 어두워졌네?"
학교 뒤편의 고물 수집장에서 한참 원하던 부품과 자재를 찾던 스쿨드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아차 싶었다.
너무 늦게까지 여기 있었던 것이다. 주위에 어둠이 깔리자 낮에는 몰랐지만 이곳이 상당히 으스스해 보였
다. 마치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어차피 필요한 부품 등은 거의 다 구했으므로
여기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밤페이. 돌아가자. 재료 챙겨!"
-삐삣.
스쿨드가 부품 등을 챙겨가려고 끌고 온 리어카에는 벌써 각종 부품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이번에 만들
발명품은 많은 부품 등이 필요하므로 리어카에 실어선 밤페이로 견인해 갈 생각이었다. 밤페이가 부품 등을
와이어로 단단하게 고정하였다.
"여기서 뭐하는 거니, 꼬마야."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오자 스쿨드는 깜짝 놀랐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
으로 고개를 돌린 스쿨드의 눈에 한 남자가 비쳤다. 그 남자는 검은 양복을 걸치고 아주 덩치가 컸다. 그런
데 분위기랄까 어쨌든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쿨드가 잔뜩 몸을 움츠리고 뒤로 슬슬 뒷걸음질
쳤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니? 경찰 아저씨들이 막고 있었을 텐데. 후후, 하긴 알게 뭐야. 잡아만 가면 그만인
것을."
"당신은 설마..... 크로노스!!"
역시 저 남자는 크로노스의 조직원이었다. 그제야 혼자서는 위험하니 함부로 밖에 나가지 말라던 케이의 말
이 생각났다. '그것'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무심결에 늘 하듯이 혼자 밖으로 나온 게 큰 실수였다. 하
지만 스쿨드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흥! 날 잡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는 안될껄!"
자신 있게 소리친 스쿨드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선 그 남자를 향해 던졌다. 그 남자는 뭐지 하는 표정으로
그걸 쳐다만 볼뿐이었다.
"받아라! 스쿨드 봄버!!!"
-콰쾅!!
스쿨드의 비장의 무기, 스쿨드 봄버가 그 남자 바로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스쿨드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후우~ 폭탄이었냐."
그런데 그 남자는 옷이 찢어졌다는 것 이외엔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스쿨드는 깜짝 놀랐다. 이
번에 던진 것은 위력을 좀 더 높인 것인데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 남자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
며 찟어진 웃옷을 벗었다.
"이런이런... 이거 좋은 양복이란 말이야. 아무리 지급 받은거라지만 맘에 들었던 옷인데...."
"아아....뭐 저런 녀석이..."
"후후, 얌전히 따라오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려 줄 꺼야. 그러니..."
남자는 스쿨드에게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스쿨드의 표정에 두려움이 나타났다. 밤페이가 스쿨드를
지키기 위해 그 남자 앞을 막아섰다.
-삐삐!!
"하하! 이건 뭐니? 이런 장난감으로 날 막겠다는 거냐?"
"그만둬!"
그 때 누군가가 그들 앞에 달려나왔다. 케이였다. 스쿨드의 표정은 안도감에 당장 밝아졌다.
"케이!"
"괜찮아? 스쿨드!"
역시나 스쿨드는 여기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불길한 예감도 적중하였다. 크로노스가 스쿨드를 납치하려 했
던 것이다. 그래도 때맞춰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더 빨리 여기 왔겠지만 경찰이 정문을
통제하고 있던 터라 학교 뒤편의 고물처리장과 연결된 개구멍 쪽으로 오느라 더 늦어지고 말았다. 스쿨드
역시 그 구멍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거길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후후, 네 녀석이 가이버I 이냐. 마침 잘됐군. 이참에 네 녀석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야겠다!"
-투두둑!!
남자의 얼굴과 피부가 변하기 시작하면서 덩치가 폭발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변신을 완료한 남자는 무시
무시한 괴물로 변했다. 역시 저 녀석은 조아노이드 였다. 어제의 젤브부스와는 달리 상당히 날렵해 보였는
데 양어깨에 뭔가 이상한 게 튀어나와 있었다.
"나, 하이퍼 조아노이드 파나다인이 유니트를 회수하겠다!!"
"스쿨드, 물러서! 가이버!!!"
-퍼엉!!
강력한 충격파를 동반하며 케이는 가이버로 변신하였다. 변신한 케이는 바로 파나다인에게 헤드빔을 날렸
다.
-푸슝!
"흥!!"
그러나 파나다인은 높이 뛰어올라서 빔을 간단히 피하였다. 그리고 파나다인이 곧장 반격을 하였다.
-푸슉! 푸슉!
파나다인의 양어깨에서 뭔가 이상한 액체 두 가지가 순차적으로 발사되었다. 케이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
을 날려 피했다. 무슨 독이나 용해액 같은 걸까?
-콰아아앙!!
"꺄아악!!"
갑작스런 폭발에 스쿨드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놀랍게도 발사된 액체는 액체폭약이었다. 두 가지
액체가 서로 섞이더니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곧바로 폭발한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무기에 케이는
크게 놀랐다.
"후후, 내 몸안에선 이런 위력의 액체 폭약이 계속 정재 된다. 그리고 이걸 뿜어서 상대방을 공격하지."
"큭! 그럼 이건 어떠냐!!"
케이가 양손을 모아서 프레셔 캐논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파나다인은 케이가 공격할 틈을 주질 않았다. 또
다시 양어깨에서 액체폭약이 발사되었다.
-콰쾅!!
케이는 간발의 차로 이번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액체폭약이 정제돼서 발사되는 과정이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별도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무튼 이런 속도라면 프레셔 캐논처럼 발사에 시간이 걸
리는 무기는 쓸 수 없었다. 당장 쓸 수 있는 가장 빠른 무기라면....
-푸슝! 푸슝!!
케이는 연거푸 헤드빔을 날렸다. 그러나 파나다인은 이 공격들을 가볍게 피하였다. 이동 속도가 이전까지
보았던 조아노이드 들보다 훨씬 빨랐다. 파나다인은 미친 듯이 웃으며 또다시 액체 폭약을 쏘았다.
-콰앙!!
"하하하!! 난 젤브부스 같은 둔한 녀석과는 차원이 틀려!!"
확실히 젤브부스와는 다른 아주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뭔가 해보려 하면 바로 액체폭약이 날아오고
있었다. 발사에 시간이 걸리는 원거리 무기들은 쓸 수가 없었다. 케이는 고주파 소드를 전개시켰다. 접근전
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간다! 파나다인!!"
그러나 파나다인은 뒤로 멀리 점프해서는 케이와 크게 거리를 벌렸다. 그리곤 바로 액체폭약을 날렸다.
-푸슉! 콰아앙!!
케이는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케이는 접근전을 거는 것도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저런 식으로
일정한 거리를 둬가며 계속해서 액체폭약을 날려대면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주력이나 도약력등은 파
나다인이 좀 더 우세했다. 이기려면 어떻게 해서든 저 녀석의 발을 묶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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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이게 무슨 꼴이람."
대학 뒤편 고물 수집장의 좁은 개구멍을 힘겹게 통과한 핫세가 투덜거리며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냈다.
오늘이 방세를 내는 날인데 하필이면 방세가 들어있는 지갑을 부실에 두고 온 것이다.
"....오늘따라 내가 도대체 왜 이러지?"
아까 활주로에서 테스트를 수행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마음이 진정이 안돼는 핫세였다. 좀 더 정확히 말
하자면 아까 아키토가 왔을 때 부터였다. 자동차부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잠깐이지만 멋진 바이크 솜씨도 보
여주었고, 그리고 아키토가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지었던 때부터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
그때 그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자 핫세는 얼굴이 화끈거리는걸 느꼈다. 케이처럼 다정다감한 남자도 좋지
만 아키토는 정말 쿨하고 자신감이 넘처흐르는 진정한 사나이의 모습이랄까? 핫세의 심장은 점점 더 심하
게 뛰기 시작했다.
-콰앙!!
그 순간,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려왔다. 한참 망상에 빠져있던 핫세는 깜짝 놀라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폭
발음이 상당히 큰 것이 아무래도 이 고물 수집장안에서 뭔가가 터지는 것 같았다. 설마 대학을 부순 테러리
스트들일까? 하지만 이런 고물 수집장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여기서 폭탄 테러를 할까?
-콰앙!! 퍼엉!!
폭발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휴대폰은 차안에 두고 왔
다. 이대로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동시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
도 했다. 일단 핫세는 현장에 가서 살짝 보고 오기로 하였다. 그러면 나중에 경찰에 신고할 때 좀 더 구체
적으로 말해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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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처리장 한 쪽에 숨어서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스쿨드는 케이가 고전하고 있는걸 보고 도와줘야
겠다고 결심했다. 상대방 조아노이드는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케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아무래도 케이가 당할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의 스쿨드로서는 파나다인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능
력은 없었다. 일단 저 날쌘 움직임을 단 한순간이라도 봉쇄해서 케이에게 공격찬스를 만들어 주기로 하였
다.
이럴 때 베르단디나 울드였다면 공격법술로 저 녀석에게 한방 먹여서 케이에게 찬스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스쿨드는 공격법술같은건 고사하고 아직 제대로 할 수 있는 법술자체가 별로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스쿨드는 평소에 법술 수련을 열심히 하지 않은걸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의 천사 노블 스칼렛을 소환하면
그나마 강력한 법술을 구사할 수 있긴 하지만 솔직히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목표를 맞출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일단 지금 당장은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리고
스쿨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면 역시나 기계다.
"밤페이! 자력 네트 와이어포 준비!"
명령을 받은 밤페이가 머리의 삿갓을 벗었다. 드러난 머리 위의 뚜껑이 열리면서 원통형의 3연장 발사기가
밖으로 나왔다. 동시에 밤페이는 파나다인의 움직임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다.
자력 네트 와이어포는 일전에 공포의 대왕 사건 때 울드가 내보냈던 거대 로봇을 상대로 썼었던 무기였다.
발사 후 탄체가 목표 상공에서 폭발하면 그 안에 들어있던 그물이 목표를 덮고 그 순간 강력한 전자파를
방출해서 전자기기등을 마비시키는 무기다. 문제는 지금 노리고 있는 파나다인은 기계가 아니라 생물이어서
그런 능력이 전혀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아직이야! 기다려, 밤페이!"
하지만 그 사실은 스쿨드도 알고 있었다. 스쿨드는 다만 이 무기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멈출 수 있
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지금 밤페이가 탑재하고 있는 무기들은 전부 대 마라용 무기들 -부적이나
복인형종류- 뿐인지라 조아노이드 상대로는 이것밖엔 쓸 게 없었다. 스쿨드는 파나다인의 움직임을 보면서
기회를 노렸다.
"지금이야! 발사!!"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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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이자식!! 쥐새끼처럼 피하는 것만 잘하는군."
파나다인은 점점 숨이 차오르는걸 느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액체폭약을 사출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려
니 체력의 한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액체폭약은 몸 안에서 그때그때 생성되서 발사되는 것. 계
속 쏘면 파나다인 자신은 물리적으로 점점 소모되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당하는 건 자신이었다. 등에 근
접전무기인 날카로운 날을 가진 두개의 채찍이 있었지만 솔직히 가이버에게 통할 무기는 아니었다. 접근전
을 허용하면 그걸로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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