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식장갑 가이버 제6화
페이지 정보
본문
강식장갑 가이버 - GUYVER THE BIOBOOSTED ARMOR
제6화 -생과 사의 갈림길-
"살려줘!! 제발....제발 이러지마! 부탁해....제발....!"
맥스 제약의 조아노이드 연구개발 구역에서 한 남자가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주변에는 건
장한 체격의 일본지부 전투요원들이 남자의 양팔을 하나씩 붙잡고 조제소로 끌고 가고 있었다. 남자는 끌려
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요원들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질질 끌려가고 있
었다.
이윽고 조제소에 도착한 남자는 공포에 질려서 미친 듯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에 금발머리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가 있는 힘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규오 각하!! 한번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유니트를 회수해 오겠습니다!"
금발머리의 남자, 리헐트 규오는 그러나 조제소에 끌려온 남자 -마키시마 겐죠- 의 애원을 들은 체도 안 했
다. 규오는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에게 이렇게 기회를 주겠다는 거 아니냐. 대(對) 가이버용 시작형 조아노이드로서 말이다! 너에
게 유니트를 회수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는데 왜 그리 싫은 표정을 짓는 거냐."
"제발....제발 그것만은...!!"
옆에서 대기 중이던 요원들이 겐죠가 입고 있던 옷을 강제로 벗기기 시작했다. 겐죠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
고 있어서 요원들이 팔다리를 하나씩 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이 옷을 거의 찟듯이 강제로 벗
겨내고 있었다. 조제통에 넣기 전에 이물질인 옷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이윽고 완전히 알몸이 된 겐죠를
요원들이 조제통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으아아!!! 제발! 각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퍽!
"헉!"
겐죠가 너무 반항이 심하자 요원들 중 한 명이 그의 배에 주먹을 날렸다. 겐죠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움
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진 겐죠를 요원들이 조제통안에 넣고 문을 닫았다. 이윽고 조제통안에 녹색의 배양액
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겐죠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서 유리벽을 거세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화유리
로 제작된 조제통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푸!! 살려줘!! 제발...어푸어푸!!"
배양액은 무정하게도 계속 차 올랐고 이윽고 통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겐죠는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유리벽을 두들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움직임도 점점 둔해지기 시
작했다.
'제발....살려줘.......'
****************************************
케이와 베르단디는 오전에 시간을 내서 병원에 왔다. 어젯밤에 입원한 핫세를 문병 온 것이다. 두사람은 걱
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실로 향했다.
"핫세씨, 대체 어쩌다 그리 되셨을까요. 별 탈 없으셔야 될텐데...."
"그러게..."
케이는 핫세가 입원하게 된 이유를 차마 베르단디에게 말하지 못했다. 어제밤에 파나다임과의 대결도중 말려
들고만 핫세는 구출된 후 깨어나자마자 극도의 발작증세가 나타났다.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던 케이는 일단
근처의 큰 병원 응급실에 핫세를 입원시켰다. 계속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던 핫세는 진정제를 투여 받고서야
조용해졌다.
'제발....핫세는 놈들이 노리지 말아야 하는데...'
도대체 왜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로 인해 핫세까지 크로노스의 표적이 된 건 아닌가 하고 걱정되는
케이였다. 케이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 때 빨리 녀석을 해치워 버렸다면 이렇게 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걱정 마세요. 케이씨. 핫세씨는 건강해지실 거에요."
"....응."
케이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본 베르단디가 케이를 격려하였지만 케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아마도 베르
단디는 케이가 그저 핫세의 상태를 염려해서 저렇게 어두운 표정인가 싶어서 그러는 거겠지만 베르단디는
정확한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가능한 한 모르는 게 나았다. 잘못하면 그녀까지 위험해진다. 어떻
게 해서든 그런 일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케이였다.
케이와 베르단디는 이윽고 핫세가 있는 병실 앞에 도착하였다. 핫세는 1인실에 입원중 이었다. 또 발작증세
를 일으킬 경우 다른 환자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병원 측에서 1인실을 배정한 것이다. 일단
경과를 지켜본 후 일반환자들과 같이 둘지 결정하자는 것이 의료진의 뜻이었다. 베르단디가 병실 문을 노크
하였다.
"핫세씨, 들어가도 되요?"
처음엔 반응이 없어서 한번 더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간 두사람의 눈에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는 핫세의 모습이 보였다. 베르
단디는 핫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괜찮아요?"
"....베르단디 선배....저...저...!"
베르단디를 본 핫세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베르단디는 핫세를 조용히 품에 안았다.
베르단디의 품에 안긴 핫세가 별안간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으아앙! 선배! 저...저 너무 무서워요!!"
"걱정 말아요. 이젠 괜찮아요..."
베르단디는 핫세를 안은 채로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어린아이를 다독이는 엄마처럼 베
르단디는 핫세를 그렇게 달래고 있었다. 한참 울던 핫세가 어느덧 울음을 그쳤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았다.
베르단디의 노래는 단순한 음이 아니다. 음정, 박자하나하가 다 법술공식의 일부고 이렇게 노래로서 상대방
에게 법술을 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베르단디는 핫세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벼운 법술을 시행한 것이
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핫세가 다소 진정되자 베르단디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핫세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베르단디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잠시 주저하던 핫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베르단디 선배...저 사실은...어젯밤에....괴물을 봤어요..."
"괴물이요?"
"학교 뒤 고물 수집장에서...커다란 괴물이!"
핫세가 또 다시 흥분하려 하자 베르단디가 다시 그녀를 진정시키려 노력하였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질문은
안 좋겠다고 판단한 베르단디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핫세를 다독거리기만 하였다. 옆에서 계속 지켜만 보던
케이는 심한 자책감에 괴로워하였다. 옛날귀신 얘기 같은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핫세앞에 느닷없이 흉측
하게 생긴 괴물이 튀어나왔으니 그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터였다. 그때 파나다임을 최대한 빨리 끝내
지 못한 미숙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좁은 병실 안에서 핫세의 흐느낌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아니! 핫세가요!!"
오후에 연습을 위해 학교내 활주로에 모인 자동차부원들은 연습을 해야 하는데 부장인 핫세가 왜 안나왔는
지 의아해 하면서 케이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고 케이는 주저하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부원들은 큰 충격
을 받았다.
최초시작부터 기술적 문제로 인해 황금 같은 시간들을 그냥 날려버리고 곧이어 학교는 폭탄테러를 당해 한
때 머신제작조차 못할 위기에 빠지더니 간신히 그 문제를 해결했나 싶더니 이번엔 부장이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말았다. 지로의 말마따나 되는 일이 없었다. 자동차부원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자! 자! 핫세는 지금 호전중이야. 곧 괜찮아 질 꺼야. 입원중인 핫세를 위해서라도 너희들이 이렇게 처저있
으면 어떡해.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연습 시작하자."
케이는 나름대로 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려보려 했지만 모두의 얼굴은 그저 어두울 뿐이었다. 특히나 라이더
인 콘도의 표정은 최악이었다. 당장이라도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태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며 면회는 가급적 좀 나중에 해달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장 면회를 가자고 하는 부원들을 간신히
설득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래가지고는 제대로 연습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큰일이군. 이거."
역시나 콘도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기록이 어제보다 더 엉망이었다. 한시간 동안
아홉번을 달렸는데 모두 다 9초대에서만 왔다갔다하고 있었고 그 중에 두 번은 콘도가 큰 실수를 저질러서
기록이 10초대를 넘기까지 했다. 라이더가 저렇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선 더 이상의 연습은 아무래도 힘들
겠다 싶었다.
"......."
케이는 아무래도 이쯤에서 연습을 중지하고 다같이 병문안을 갔다오는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들 저
렇게 흔들리고 있으니 이대로 연습을 강행해봐야 머신에 무리만 줄뿐이었다. 의사의 권고도 있었지만 그래도
베르단디가 나름대로 노력했기에 이제 좀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였다.
"케이씨. 저희들 왔어요."
한참 고민하던 케이는 베르단디가 자신을 부르자 뒤돌아 섰다. 베르단디는 일단 오전동안은 옆에서 핫세를
돌봐주다가 오후에 간식거리를 준비해서 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뒤돌아선 케이는 깜짝 놀랐다. 베르단디의
옆에는 핫세가 서있었던 것이다. 어제 입원한 환자가 대체 여길 어떻게?
"아, 어서 와..... 아니! 핫세!!"
핫세의 표정은 아직도 좀 굳어 있는 것이 상태가 완전히 호전된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케이는 베르단디를 쳐다봤다. 베르단디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핫세!"
그 때 다들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던 자동차부원들이 핫세를 보곤 부리나케 달려왔다. 부원들은 핫세를 둘
러싸고는 괜찮냐, 대체 무슨 일이냐는 질문들을 퍼붓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대회가 앞으로 3일밖에 안 남았는데 한가하게 누워있을 순 없잖아요. 저 거의 도움이 안돼도
그래도 빠지고 싶지 않아서...."
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핫세를 케이와 베르단디는 대견스럽다는 듯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나 핫세를 자동차부 입단초기부터 쭉 지켜봐왔던 케이는 핫세의 성장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여성드라
이버 한정 카트대회에 참가할 당시 심적 부담감으로 인해 꾀병을 부리던 모습같은건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잘도 외출허가를 내줬네. 확실히 괜찮은 거야? 베르단디."
"아직은 좀더 안정이 필요해요. 의사 선생님도 처음엔 퇴원을 반대하셨고요. 그래도 핫세씨가 강하게 퇴원을
요구하셔서...."
"퇴원?! 잠깐 외출이 아니고?"
"네...."
거기까지 말한 베르단디는 핫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베르단디도 많이 노력했지만 정신적 충
격이란 게 그렇게 쉽게 낮는것이 아니다. 게다가 어떤 형태로 후유증이 남아서 나중에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베르단디는 병원 측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통원치료를 받는 것을 조건으로 퇴원을
간신히 허가 받았다고 말해줬다. 그 말을 들은 자동차부원들 특히 콘도는 무척 감동한 모습들이었다.
"그것보다 선배. 현재 기록은 어때요?"
핫세가 케이에게 상황을 묻자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콘도는 무슨 죄 지은것마냥 고개를 푹 숙
였다. 케이는 기록 현황판을 핫세에게 넘겨주었다. 기록을 본 핫세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제보다 더 나빠졌네요."
핫세는 그대로 한숨을 내 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에게 희망이란 없는 건가....역시 출전을 포기하는 게..."
그리고 핫세는 안경을 들어올리더니 눈물이라도 나는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 모습을 본 콘도가 두 주먹
을 불끈 쥐었다.
"왜 포기를 해! 아직 안 끝났어!"
그리고는 핫세의 두손을 꼭 잡고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은 순식간에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두고 봐!! 핫세에게 우승을 바치겠어!!"
****************************************
-부아아앙!!
콘도의 기록을 본 케이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기록이 확실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처음 시작부터
8.137을 끊더니 다섯 번째에는 드디어 7.983으로 7초대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어저께 그렇게 노
력했어도 실패했고 오늘 핫세가 나오기 전까지의 연습에선 10초까지 기록하는 등 엉망진창이었던 인물이 핫
세가 눈물 좀 흘렸다고 단숨에 7초대에 진입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른 부원들도 콘도의 변신에 저
절로 입이 벌어졌다. 여자의 눈물은 이렇게나 강한 건가?
어쨌거나 7초대에 진입함으로서 경쟁력이 생겼다. 이젠 중요한 것은 이 페이스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는 것
이었다. 어쩌다 한번 7초에 진입한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일단 7초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으면 우승권도 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케이는 핫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핫세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모든 걸 포기
하고 눈물짓던 모습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콘도씨는 이렇게 자극을 해 줘야 잘 하는 스타일이죠. 특히나 여자의 눈물 같은 것에 약한 편이에요."
"그...그럼 아까 운 것은..."
"연기 좀 해봤어요. 뭐, 대회를 포기할까하고 잠시 고민했던 건 사실이지만."
모든게 다 연기였다니, 케이도 감쪽같이 속아넘어갔다. 베르단디같이 순진한 여성만 쭉 봐오다가 핫세를 보
자 케이는 갑자기 여자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일단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현재 당면 목표
는 기록의 향상이고 궁극적으로는 우승 아닌가. 지금 이들은 불법적인 거 제외하고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
었다. 케이는 그냥 납득하고 넘어가기로 하였다.
****************************************
"현재 상황은?"
"예, 각하. 현재 80% 정도 완성된 상태입니다."
조제소에 들른 규오는 현재 조제중인 '그것'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조제통내부는 녹색의 배양액으로 가득차
있어서 안이 잘 안보였지만 뭔가 거대한 하얀 덩어리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연구원이 규오의 옆에서 계속
보고를 하였다.
"이 시작형 조아노이드는 리스카 감찰관의 식장시 채취한 셈플을 토대로 개발한 대 강식장갑용 분해 효소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리스카 감찰관이라는 훌륭한 '샘플'덕분에 일본지부 연구원들은 강식장갑을 분해할 수 있는 특수효소를 개발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효소는 아직 사용에 제한이 많았다. 효소가 대기에 노출될 경우 화학반응이
일어나 효과가 떨어져 버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젤브부스의 용해액처럼 내뿜을 수는 없었다. 그
리고 기존에 이미 조제되있는 조아노이드들에는 적용이 불가능했다. 이 용해액을 쓰려면 처음에 조제할 때부
터 조아노이드의 육체를 특별하게 조제해야 했다.
"그래서 이 조아노이드의 경우엔 이빨과 손톱, 그리고 꼬리 쪽에 분비선을 만들었습니다. 가이버의 강식장갑
과 접촉하게 되면 바로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음."
규오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투입이 가능한 수준이 되기까지 앞으로 이틀이면 됩니다. 코드네임은 '엔자임'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저...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이런 하이스피드로 조제를 할 경우 생명체로서 밸런스가 붕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이건 완전한 신
규개발이라 여러 가지 돌발사태가 있을 수 있고... 전투에서 살아남아도 며칠 살지 못할껍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이건 일회용이니까. 이걸로 가이버 두명을 다 어찌해 볼 순 없겠지. 하지만 그 중 하나라
도 잡으면 이건 제 역할을 다 하는 거다. 안 그런가? 아키토."
규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같이 들어온 한 남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규오가 바라본 방향에는 아키토가 서있
었다. 아키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각하."
규오는 아키토를 흥미로운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양부라곤 해도 제 아버지가 지금 조제되고 있는 것이
다. 무슨 표정변화라도 있을 듯 싶었는데 아키토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자기 아버지가 지금 사형이나 마찬가지의 꼴을 당했는데, 기분은 어떤가?"
규오가 아키토를 걱정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키토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키토
는 여전히 차갑게 웃고만 있었다.
"어차피 저 남자는 저를 자기 오른팔로 삼으려고 절 강제로 양자 삼았던 겁니다. 그래서 친부모님의 회사를
의도적으로 부도가 나게 만들어서 그 부채를 갚아주는 조건으로 절 데려온 거죠. 부자지간의 정 같은 건 처
음부터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후후. 그런가. 하지만 너는 저런 무능한 녀석에겐 너무 아까운 녀석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키토는 규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좋아. 엔자임이 완성되면 우선 소재가 확실한 가이버I부터 잡는다."
"제가 적당한 지점으로 불러내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후후후....이번에야말로."
규오는 조제통을 바라보며 잔인하게 웃었다.
****************************************
드디어 토요일이 왔다. 지로를 비롯한 자동차부원들은 오후에 '황금망치배' 대회 조직위에 출두해서 라이더
의 등록과 머신 검사를 받았다. 머신에 규정상 금지된 부품을 장착한 것이 없는가 검사 받고 라이더의 학력
조회 등도 이루어졌다. 특별히 문제될 건 없었기에 두 가지 다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성과물인 머신은 조직위 측에서 보관하게 된다. 차량 검사후 어떤 팀에서 머신에 무슨 부품
을 추가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레이스는 사실상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아우~~ 한 짐 덜었네."
지로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케이도 마찬가지 기분이었지만 자동차부원들은 흥분된 표정을 감
추지 못했다. 특히 직접 바이크를 몰고 달릴 콘도의 얼굴은 잔뜩 얼어있었다. 그 동안 타대학 동아리 끼리의
친목도모차원에서의 가벼운 경주에만 몇 번 나가본 적이 있는 그로서는 이런 큰 대회에 나간다는 것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케이. 일전에 말한 것 말인데..... 준비는 되셨는감?"
"예? 아, 그거요? 예. 저희는 언제라도 좋아요."
케이와 베르단디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지로는 씨익 웃더니 자동차부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자! 학교로 가자. 빅이벤트가 있어!"
****************************************
"마키시마! 기다렸지?"
대학에 돌아와보니 아키토가 먼저 활주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먼저 검은색의 레이스 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발치에는 바로 2대의 레이스용 사이드카가 대기 중이었다. 한대는 훨윈드에 있던 걸
가지고 온 것이고 또 한대는 아키토 본인이 준비한 것이다.
"아뇨, 저도 방금 왔습니다. 대회 조직위에는 갔다오신 건가요?"
"그래, 문제없이 등록하고 왔지."
지로는 아키토가 준비해 온 머신을 살펴보았다. 지로가 보유중인 사이드카와 완전히 동일한 사양이었다. 유
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차체의 색상이 다른 것뿐이었다. 지로는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빌린 거야?"
"아뇨, 샀습니다."
"에? 이번 한 번만 타고 말지도 모르는데? 이 비싼걸 샀다고?"
"계속 두고 있으면 언젠가 또 탈 일이 있을 거 같아서요. 게다가 빌린 건 맘대로 튜닝할 수 없잖습니까? 그
리고 단지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이런걸 산 선배님이 제게 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아키토의 지적에 지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지로는 멋적은듯이 웃었다. 아키토는 시선을 돌려서 옆에 있
던 케이와 베르단디를 바라보았다.
"오늘 좋은 경기를 기대하고 있겠네. 케이군. 그리고 베르단디씨.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케이와 베르단디가 동시에 대답하였다.
케이와 베르단디, 그리고 지로는 레이스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자동차부실로 들어갔다. 그 사이 자동차부원들
은 활주로에 임시서킷을 만들고 있었다. 제대로 된 서킷하고는 비교할 수 없지만 두 팀이 경기하기에는 지장
이 없는 수준이었다. 아키토는 묵묵히 부원들이 서킷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기다렸지?"
지로들이 모두 레이스복으로 갈아입고 서킷으로 나왔다. 케이는 늘 즐겨 입던 짙은 회색에 오랜지색 띠가 둘
러져 있는 레이스복을, 베르단디 역시 늘 즐겨 입던 붉은 색 위주의 레이스복으로 갈아입었다. 지로는 청색
과 흰색이 조화된 레이스 복으로 입고 나왔다. 공기저항 문제 때문에 상당히 타이트해질 수밖에 없는 레이스
복이 두 여성의 몸매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아! 아직 시작안했나봐. 늧진 않았어!"
"아, 언니, 스쿨드. 어서 와요."
그 때 울드와 스쿨드가 활주로로 찾아왔다. 베르단디가 대학에서 레이스를 할 예정이니까 와서 구경하라고
초청한 것이다. 둘 다 이런 재밌는 구경거리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아키토는 그들이 가족이란걸 한번에 알
아봤다. 그런데 서킷에 온 것은 울드와 스쿨드 뿐만이 아니었다. 그 바로 뒤에서 또 다른 덩치 두명이 이쪽
으로 오고 있었다.
"오! 레이스 준비중이냐. 다들 수고한다!"
어떻게 소식을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뒤에 온 덩치 둘은 타미야와 오딘이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자동차
부원들은 좀 탐탁치 않은 표정들이었다. 저 두사람의 설계만 전적으로 믿었다가 손해본 시간과 예산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쁜 뜻으로 한 것도 아니고 저 두사람의 자동차부에 대한 애정은 다들 알고
있기에 대놓고 뭐라 하진 못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알고 온 거냐? 난 너희들에겐 말한 기억이 없는데?"
지로가 입술을 삐쭉이며 마치 무슨 불청객에게 하는 듯이 말하자 두 사람은 단번에 울상이 되었다. 왕따당한
셈이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울드가 지로에게 간단히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요 앞에서 우연히 만났지. 이거 보러 왔다고 하니깐 바로 뒤쫓아오던데?"
"과연...."
그러나 울상도 잠시였다.
"네..네놈은 마키시마!!!"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아키토를 본 타미야와 오딘은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자동차 부원
들은 도대체 두사람이 왜 저러나 하며 궁금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다만 지로만은 그저 한숨만 내 쉴 뿐이었고
아키토는 가볍게 쓴웃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아키토가 두사람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요. 형님들."
같은 학년이었다지만 나이차가 있기 때문에 아키토는 늘 두사람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타미야와 오딘
은 여전히 아키토를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보다못한 지로가 그 사이에 끼여들었다.
"마키시마는 오늘 나랑 같이 팀을 이뤄서 레이스를 하려고 왔어. 별거 아니니까 신경쓰지들 마셔."
"뭐라고요오오~~!!!"
두 사람은 지로의 그 말에 폭발직전까지 흥분하고들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케이와 여신3자매, 그리고
자동차부원들은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네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뭔가 엄청난
과거가 있는 것일까?
"네놈이 지로 선배랑 파트너가 된다니!!!!"
"으악~~! 초 부럽다아!! 그 자리엔 내가 있었어야~~!!!"
뭔가 했더니 단순한 질투였다. 베르단디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케이를 비롯한 나머지 사
람들은 그저 한숨만 내 쉴 뿐이었다. 그저 같이 달린다는 것 가지고 뭔가 큰 일(?)이 벌어지는 것 마냥 굴다
니...
"자, 슬슬 몸을 좀 풀어보도록 할까요? 선배님, 준비 되셨습니까?"
"그래, 한번 달려보자고."
지로는 아키토에게 가볍게 윙크를 하고 핼맷을 착용했다. 그리고 두사람은 사이좋게 사이드카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타미야와 오딘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부원들은 그런 그들을 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부아아앙!!
자동차부원들이 임시로 만든 서킷에서 아키토와 지로의 사이드카가 질주하고 있었다. 본 게임에 앞서 호흡도
맞춰보고 머신의 상태도 점검할 겸 한번 달려보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레이스용 사이드카를 타본지 한참
됬을텐데도 상당히 좋은 호흡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동차부원들은 모두 진정으로 감탄하
고 있었다. 특히 좀 있다가 그들과 직접 레이스를 펼쳐야 하는 케이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상당히 매끄러
운 주행을 보여주는 것이 아무래도 힘겨운 상대가 될 듯 싶었다.
"와아~ 정말 잘 하시네요. 두분 다 굉장하세요."
베르단디는 아키토와 지로의 주행을 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나중에 저 두 사람과 직접 겨뤄야 하는 당
사자임에도 베르단디의 얼굴엔 긴장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케이는 미소를 지었
다. 역시 베르단디였다. 순수하게 즐길 줄 아는 그녀. 승패같은건 그녀에겐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즐겁
게' 달린다는 것, 그리고 달릴 때만큼은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 문득 자신은 지
금까지 너무 승패에 집착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며 반성하게 되었다.
"긴장되세요?"
문득 케이의 시선을 느낀 베르단디가 고개를 돌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
보던 케이 역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별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거든. 그런데 베르단디 덕분에 다시 생각났어."
"네? 뭔데요?"
"즐겁게 달린다, 는 것."
베르단디는 케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타미야와 오딘이 난입하였다.
"무르다!! 케이! 반드시 마키시마를 꺾는다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거다!!
".....도대체 왜요?"
뭐, 물어보지 않아도 이유는 뻔하다. 그저 질투가 나는 것뿐이다. 둘 다 예전엔 지로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던
연적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결과는 무승부. 지로는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자동차부의 존속을 택했던 것이
다. 그런 그녀가 아키토에게 마음을 품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친한 선후배 사이였고 그 사실은
이들도 잘 알고 있을텐데도 두사람은 아키토와 지로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냥! 마키시마 녀석이 맘에 안 들어서다~!"
"...저희가 이기면 지로 선배도 지는 셈이 되는데 괜찮으세요?"
케이는 한번 장난삼아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케이의 예상대로 나왔다.
"그건 안돼~~!!! 아아...이걸 어쩌지??"
"그래! 지로선배랑 베르단디가 서로 위치를 바꾸는 거야! 그럼 문제없어!"
"오!! 멋진 생각이야, 덴짱!!"
"그렇게 생각하지? 다이짱!!"
케이는 대답할 가치를 못 느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케이는 그저 한숨만 내 쉴 뿐이었고 베
르단디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뿐이었다.
****************************************
-부릉! 부르릉!!
드디어 승부의 시간이 왔다. 하얀색 보디의 케이&베르단디, 푸른색 보디의 아키토&지로의 사이드카 두대가
스타트 라인에서 대기 중이었다. 서킷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두 머신의 엔진소리가 활주로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언니! 힘내~~!!"
스쿨드가 있는 힘껏 소리치며 베르단디를 응원하였다.
"케이~~!! 우리의 원수를 갚아다오!!"
타미야와 오딘은 여전히 저렇게 개념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이 거기서 왜
나올까? 질투심에 미쳐서 분위기 파악 못하는 두 남정네가 분위기 다 깨고 있었다.
"준비~"
핫세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저 손이 내려오면 승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승부는 서킷을 3바퀴 먼저 도는 쪽
이 승리하는 것이다. 케이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서킷에 선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베르단
디와 지로는 조수석에서 잔뜩 자세를 낮추고 있었고 핼맷에 가려 잘 안보이긴 했지만 아키토 역시 늘 미소
짓던 얼굴이 아니었다. 미소가 사라진 그의 눈은 전방만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서킷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쿨드와 자동차부원들의 손에도 어느덧 땀이 맷히기 시작했다. 울드 만큼은 팔짱을 끼고 서있는 것이
겉으로 보기엔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였지만 내심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
어가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출발!!"
-끼이이이!! 부아아아앙!!!
핫세의 양손이 힘차게 내려지는 것과 동시에 두대의 머신이 굉음을 울리며 질주를 시작하였다. 양쪽 모두 스
타트 미스같은 실수같은건 저지르지 않았다. 두대의 머신은 순식간에 제1코너에 접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조
수석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베르단디와 지로는 동시에 돌고자 하는 방향으로 체중을 실었다.
-바아앙!!
제1코너를 먼저 빠져나온것은 안쪽을 달리고 있던 아키토와 지로. 케이와 베르단디는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케이는 일단 첫바퀴는 상대방에 대한 탐색을 우선으로 하고 승부수는 마지막 바퀴에서 낼 생각이었다. 어차
피 초반부터 앞지를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또한 케이는 그가 이렇게 레이스를 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못
봤으니 먼저 그의 주행방식부터 아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아키토 팀이 선두인 것은 한바퀴를 다 도는 순간까지 변함이 없었다. 현재 까진 양쪽 다 실수없이 깨끗한 주
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번째 바퀴에 접어들자 케이가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첫 승부처는 S자 커브. 케이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부아앙!!
케이팀이 바깥쪽에서 파고들려고 하는 순간, 아키토가 먼저 베스트 라인을 선점하였다. 아키토와 지로의 호
흡은 완벽하였다. 케이는 아키토 팀의 완벽한 블로킹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
었다.
'서두르지 말자. 아직 기회는 있어!'
케이는 다시금 속도를 올렸고 베르단디는 코너 구간마다 열심히 케이를 보조해 주었다. 전년도 챔프답게 케
이와 베르단디의 호흡은 완벽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앞서 달리고 있는 아키토와 지로 역시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동차부 원년 챔프란 건 그저 이름 뿐만은 아니었다. 케이는 투지가 끓어오르는걸 느꼈다.
벌써 마지막 바퀴째에 접어들었다. 그 동안 케이는 여러 번 승부를 걸어봤지만 그때마다 아키토팀은 완벽하
게 이를 막아내었다. 저 두사람은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상적인 라인을 달리고 있었다. 케이는 점점 초
조해 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었다.
그 때, 케이의 왼쪽 어깨에 베르단디가 손을 올려놓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중이라 고개를 돌려볼 순
없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베르단디는 미소 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겠지.
'괜찮아요. 아직 레이스는 안 끝났어요. 케이씨.'
케이의 마음에 다시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는 힘차게 액셀을 돌렸다. 거기에 호응하듯 그들의 머신의 엔진음
이 커지기 시작했다.
-부아아앙!!
케이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기로 하였다. 이제 남은 곳은 급격한 R커브. 여기가 마지막 승부처였다. 케이는
바깥쪽으로 빠진 후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내 두대의 머신이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무모한 짓을 하는군. 이건 나의 승리다!'
아키토는 승리를 확신하였다. 아웃라인에서 저렇게나 속도를 올리면 정작 커브에선 급감속을 할 수밖에 없
다. 그렇게 되면 결국 코너를 먼저 돌아도 속도가 모자라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대로 안쪽만 확실
하게 차지하고 있으면....
-끼이익!
그 순간 아키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케이와 베르단디의 머신이 그들을 추월해 나간 것이다. 아키토가
코너에 진입하기 직전, 잠깐 감속을 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둘의 머신이 그들 앞을 파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라인을 빼앗은 케이와 베르단디는 아키토팀보다 먼저 코너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와아~!"
자동차부원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케이팀이 이겨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저 네사람의 멋진 레이스 그 자체에
열광하고 있었다. 아키토팀의 환상적인 코너링, 그리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역전의 기회를 잡은 케이
팀. 저들의 레이스는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명승부였다.
"장하다!! 케이! 우리의 원수를 갚았구나!!!"
"아! 그러고 보니 지로선배가 지고 말았잖아! 이를 어째!!!"
....아, 물론 저 개념 없는 두 사람 -타미야와 오딘- 은 예외다(...).
****************************************
"져버렸네....에헤헤."
지로는 핼맷을 벗고는 멋적은듯 웃었다. 아키토 역시 핼맷을 벗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륭하셨습니다. 선배. 역시 옛날 그대로의 기량이시더군요."
"훌륭하긴, 내가 잘 못해서 진걸....."
아키토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제 실수입니다. 한 순간이지만 이대로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마음이 방금 전의 코너에서 틈
을 내 주고 말았죠. 선배가 실수한 건 없습니다."
아키토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지로는 손수건을 꺼내서 아키토의 얼굴에 난 땀들을 닦아주었다. 두 사람은 그
대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비록 졌지만 그래도 '즐거운' 레이스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케이와 베르단디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케이와 베르단디 역시 얼굴에 땀이 홍건했다. 하지만 지친 표정은
아니었다. 아주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이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즐거운' 레이스를 했기 때문에 자연
스럽게 나오는 표정이었다. 케이가 먼저 아키토와 지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두분 다 정말 훌륭하셨습니다. 덕분에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가 뭘 배우거나 가르치려고 달린 건가?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아키토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케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들에게 승패라든지 기교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럴려고 달린 것이 아닌 것이다. 케이는 밝게 웃으면서 아키토의 손을 마주 잡았다.
"훌륭한 솜씨였어.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더군. 정말 대단해."
"아뇨, 뭘요. 선배님이야말로 코너링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아키토는 악수 후 베르단디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아키토는 베르단디의 손을 잡더니 정중히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하였다. 그러자 울드와 베르단디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곁에서 그 광
경을 보고 있던 케이에게 울드가 찰싹 달라붙더니 그녀 특유의 관능적인(...) 목소리로 설명을 하였다.
"손등에 하는 키스는 존경의 표시라네~~."
"아...알고 있어!"
케이는 얼굴이 새빨개 진 체로 허둥거렸다. 케이의 행동을 본 울드는 재밌다는 듯이 킥킥거렸다. 사실 손등
에 하는 키스는 울드의 말대로 존경의 표시다. 원래는 궁중의 관례에서 시작된 것으로 서구권에서는 전혀 이
상할 것이 없는 행동이지만 그런 키스문화가 없던 동양권에서는 익숙치 않은 모습이다 보니 이상하게 확대
해석 하는 경향이 좀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던 케이를 비롯한 자동차부원들이 바로 그랬다. 다들 놀란 표
정들이었고 머릿속에선 각자 제 멋대로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만 키스를 받은 베르단디 만은 아키
토가 키스하는 의미를 알았는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후후~ 하지만 손등에 하는 것에는 의미가 또 있는데 말이지. 이거 말했다간 케이 삐지겠네~ 후훗'
울드는 이 참에 계속 말해서 케이를 자극해 보려다가 그냥 참았다. 나중에 뒀다가 써먹을 수도 있을 듯 싶었
다.
손등에 하는 키스는 존경이외에도 '애정', '그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오해받기 딱 좋은 단어들이다. (...)
****************************************
"자! 자! 지금부턴 즐거운 파티시간이야!"
그 때 지로가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모든 부원들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가 조금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지로에게 물었다.
"저..내일 시합인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두는게 좋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하자는 거야! 내일 시합이라고 바짝 얼어있으면 안돼! 재밌게 놀아서 긴장을 풀어야 하는 거라고!"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케이 자신도 처음으로 큰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을 때 전날 밤엔 한숨도 못
잘 정도로 긴장했던 적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놀면 결국엔 상태가 더 안
좋아지게 된다.
"걱정 말라고. 오늘은 적당히 놀고 갈 꺼야. 본격적인 파티는 내일 해야지."
"여러분. 제가 케이크를 구워 가지고 왔어요. 오늘은 그걸 나눠 먹도록 하죠."
"와아~~!!"
베르단디의 음식 솜씨, 특히 그녀가 구워내는 케이크의 맛을 잘 알고 있는 부원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안그
래도 케이와 베르단디가 졸업을 해서 취업을 한 이후론 전혀 먹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케이는 졌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키시마. 잠깐 파티를 즐기고 가지 그러니. 이렇게 그냥 가기야?"
"죄송합니다. 사실은 오늘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억지로 시간을 냈던 것이라서요. 파티까지 할 여유는
없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게다가 지금은 저녁이 다 돼 가는데?"
"사업이란게 토요일 오후라고 봐주진 않더군요."
아키토는 그대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키토는 중요한 사업약속이 있다며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한다고 말
하였다. 처지야 이해는 하지만 지로는 그래도 못내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바쁘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지로는 아키토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 그럼 할 수 없지. 나중에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예, 그러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아, 그리고 오늘 즐거웠네. 케이군. 아주 훌륭한
솜씨였어."
아키토의 찬사에 케이는 그저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그 옆에선 베르단디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키토가
케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제까지 살면서 오늘처럼 즐거운 레이스는 처음이었네. 비록 졌지만 후회 없이 달렸어. 고맙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선배님."
"두 사람은 정말 최고의 팀이군요. 그럼 즐거웠습니다. 마드모아젤."
아키토는 베르단디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하였고 베르단디 역시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아키토는 그대
로 뒤돌아 서서는 자신의 자가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세사람은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
었다.
"즐거운 추억을 만드셨네요. 마키시마씨 께서는요..."
"그래, 즐거운 추억이지. 저녀석 앞으론 이렇게 맘껏 달리진 못할 꺼야. 아마도...."
지로는 돌아가는 아키토의 뒷모습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주변 환경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
에게 오늘은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 될 터였다. 세 사람은 그렇게 아키토의 뒷모습을 오랫동안보고 있었다.
아키토는 걸어가면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아키토는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다. 작전을 시작하라."
그는 간단하게 통화를 마치고는 휴대폰을 다시 품안에 넣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케이군...가이버의 전투는 레이스랑은 전혀 다르다네. 후후후......"
****************************************
"케이씨 한테요?"
파티를 준비하려고 부실로 향하던 베르단디는 다른 과 학생으로부터 케이앞으로 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보
낸 사람이 누군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누가 보낸 건지 아느냐는 베르단디의 물음에 그 학생은 자기 역시 그
저 부탁 받은 것뿐이라며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베르단디는 편지를 들고 부실로 향하였다.
부실안으로 들어가자 케이를 비롯해서 남자 부원들이 탁자를 배치하는 등 파티 준비에 열심이었다. 울드랑
스쿨드는 도울 생각은 안하고 부실 한 쪽에서 보드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베르단디는 케이에게 편지를 주
기 위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케이씨."
"아, 베르단디. 무슨 일이야?"
"여기 편지요. 케이씨 앞으로 온 거에요."
"나한테?"
겉봉투에는 케이 이름만 적혀있고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케이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이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혼자서 지난주 토요일에 폭발 사건이 있었던 호수 부
근 현장으로 지금 당장 나와라.' -크로노스-
'크로노스!!'
케이는 경악하였다. 이 편지는 크로노스가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왜 편지를 보낸 걸까? 이제까지의 녀석들
의 행동패턴은 먼저 기습을 걸어오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건 마치 결투장 같지 않은가. 도대체 녀
석들이 이번엔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걸까?
"케이씨?"
케이가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짖자 베르단디는 뭔가 큰일이 생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단디가 무슨
내용인가 보려고 케이 옆에 바짝 다가섰다.
"무슨 내용이에요?"
"아..아무 것도 아냐!! 아..아하하!"
갑자기 케이가 편지를 황급히 주머니 속에 쑤셔 박더니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베르단디는 케이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그보다 나 지금 당장 급한 일이 생겨서 말야! 좀 늦더라도 먼저 파티 시작하고 있어. 알았지?"
"네. 하지만 너무 늦지 마세요. 이번 케이크는 아주 맛있게 구워졌어요."
"응! 금방 갔다올께."
여전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케이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는 부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베르단디는 그런
그의 모습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중대한 일 같았다.
그때 그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스쿨드는 뭔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설마 크로노스 일까?
스쿨드는 게임을 하던 도중에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울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스쿨드? 너 게임 하다말고 어디가? 이번에 안 하면 네 패배로 칠 거야."
"울드가 이긴 걸로 해!"
지기 싫어하는 스쿨드가 저런 소리를 하자 울드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스쿨드는 그런 울드의 반응 따윈 무
시하고 서둘러 케이를 쫓아 부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케이에 이어 스쿨드까지 갑자기 뛰쳐나가자 베르단디는
점점 더 의문이 쌓여갔다. 그리고 동시에 케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
했다. 베르단디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두 사람이 나간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케이!!"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있던 케이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따라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스
쿨드가 있었다. 스쿨드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어딜 가는 거야?"
"아, 좀 급한 일이 생겨서...."
"크로노스지? 그치?"
역시 스쿨드도 뭔가를 느껴서 따라나온 것이다. 케이는 적당히 얼버무려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바지주머
니속에 꾸겨넣은 편지를 스쿨드에게 건넸다. 편지를 본 스쿨드는 경악하였다.
"케이! 이건 함정이야. 가면 위험해!"
"가지 않으면 놈들이 아마 여기로 쳐들어 올 거야. 그럼 모두가 위험해!"
케이는 놈들이 정정당당한 결투를 하려고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함정일거라
는 생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가지 않는다면 놈들이 여기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토요일 저녁. 학교 안에는 지금 베르단디랑 울드, 그리고 자동차부원들 밖에 없다. 집단으로
덤벼들어도 현장에 있는 베르단디나 다른 부원들만 제거하면 그들의 존재가 들킬 걱정같은건 없을 터였다.
어차피 케이 역시 녀석들이 따로 불러낸 것이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핫세같은 피해자가 더 생
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안 해도 되니까 말이다.
"결판을 내고 말겠어. 이 악몽을 오늘 끝낼 거야!"
케이는 다시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그 때 스쿨드가 재빨리 조수석에 올랐다. 케이는 깜짝 놀랐다.
"위험해! 스쿨드. 넌 여기 있어."
"싫어! 나도 같이 가. 나도 전혀 무관하지 않으니까!"
"놈들의 함정이야. 싸움은 나 혼자면 충분해!"
하지만 스쿨드는 내릴 생각이 없는 듯 조수석 아래 있던 베르단디의 헬멧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케이가 다시
한번 내리라고 말하려는 찰나 스쿨드가 먼저 선수를 쳤다.
"만약에 여차하면 내가 도움을 청하러 갈 수 있을 꺼야! 나라도 무슨 도움이 될 꺼라고! 케이 혼자선 너무
불리해."
"하지만...!"
"나, 케이한테만 모든 걸 떠맡기고 숨어있기는 싫어!"
거기까지 말한 스쿨드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었다. 더 이상 말해봐야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
다. 케이는 한숨을 내쉬며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알았어...하지만 위험해진다 싶으면 재빨리 도망쳐야 해. 알았지?"
"응! 알았어!"
스쿨드의 표정은 대번에 밝아졌다. 그리고 스쿨드는 주머니에서 소형 무전기를 꺼내들고는 어딘가로 무전을
날리기 시작했다.
"밤페이! 고속 전투형 무장을 갖추고 당장 대학 뒤 호수가로 날아와!"
****************************************
그 시각 절에서는 밤페이와 시글이 서로 쫓고 쫓기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케이가 '청춘의 회오리'라고
부르는 광경이었다. 밤페이는 시글을 좋아하니까 열심히 쫓아가는 중이었고 시글은 밤페이가 너무 싫어서 계
속해서 도망가는 어찌 보면 '안타까운 사랑의' 한 장면이었다.
"정말, 끈질기네! 난 너 싫대두!!"
"삐삣!!"
그 때 갑자기 밤페이가 추격(?)을 중지하고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밤페이가 갑자기 멈추자 시글은 이번엔
무슨 꿍꿍이를 꾸미려고 하는 건가 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페이는 그대로 스쿨드의 방으로 들어갔
다. 시글은 스쿨드의 방문 앞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안에서 뭔가를 끼워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페
이가 뭘 하나 궁금해진 시글은 문을 살짝 열어보려 하였다. 그 순간 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
-드르륵!
"우왁!"
깜짝 놀란 시글은 뒤로 물러섰다. 밤페이가 문을 확 열어 젖힌 것이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밤페이는 뭔가
무장을 잔뜩 장착하고 있었다. 설마 자길 '잡겠답시고' 저런걸 주렁주렁 장착한 건 줄 알고 시글은 잔뜩 긴
장하고 있었다.
"삐삐삐."
"뭐? 출동해야 한다구?"
"삐이~ 삐삐삐."
"날 잊지 말아달라고? 너 지금 무슨 소리야?"
밤페이의 기계어는 같은 로봇인 시글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밤페이는 지금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것
마냥 말하고 있었다. 잊지 말아달라니? 두 번 다시 못 볼 것처럼 이야기 하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흥! 어디서 삼류 멜로드라마 본 모양인데 나한텐 안 통하네!"
밤페이는 표정의 변화가 불가능하므로(간단한 감정표현은 본인이 매직으로 얼굴에다 그려 넣지만) 말을 안
하면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시글을 바라보던 밤페이는 로켓엔진을 가동하였다.
-쿠우웅!!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밤페이는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밤페이의 중량에 비해 턱없이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 덕분에 컨트롤이 잘 안돼서 밑에서 본 밤페이의 비행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전체적인 밸런스보다는
강력한 파워에 집착하는 스쿨드의 나쁜 버릇이 잘 나타나는 장비였다.
"......"
시글은 한동안 밤페이가 날아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알 수가 없으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아까 발진전의 밤페이는 어딘가 무척 슬퍼 보였다. 시글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무슨
큰 일이 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는 밤페이를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
케이와 스쿨드는 호수 부근에서 밤페이와 합류한 후 (합류할 때 하마터면 서로 충돌할 뻔했다) 호수가로 내
려갔다. 두 사람은 적의 복병이 숨어있지 않을까 싶어서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밤페이 역시 주
변이 어두운 관계로 스쿨드가 장착한 적외선 탐색기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그 때 당시 폭발이 일어났던 장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당히 큰 폭발이었는지
땅에 큰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케이가 흔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여긴가 보군. 그 때 폭발이 일어났던 곳이..."
"뭐가 폭발했던 걸까? 상당히 큰 폭발이었나 본데?"
"소형 플라스틱 폭탄이었다."
그 때 그들의 뒤편 숲속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두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
자 그들의 눈에 남루한 차림을 한 초로의 남자가 서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얼굴은 상당히 초
췌해 보였다.
"유니트를 가지고 탈출했던 실험체가 여기서 우리 체포조에게 잡히자 자폭을 한 거다. 그 바람에 유니트는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지."
"당신은 누구시죠?"
케이의 목소리는 긴장감으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저 사람,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보였다.
"크로노스 일본 지부장."
케이와 스쿨드는 깜짝 놀랐다. 설마 보스가 직접 나올 줄이야! 그런데 차림새가 상당히 엉망인 게 보스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그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건 엇그저께까지 얘기지만. 난 네놈들 때문에....."
-투두둑!
갑자기 남자의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과 피부색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덩치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저 남자는 조아노이드였던 것이다!
"자리에서 쫓겨나서 대 가이버용 시작형 조아노이드...."
남자의 덩치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젠 인간의 모습같은건 보이지 않는 단계까지 왔다. 케이와 스쿨드는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자는 변신을 완료하였다. 엄청나게 거대한 몸집을 가진 처음 보는 조아노
이드 였다. 변신완료후 정체불명의 그 조아노이드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엔자임으로 조제되고 말았다아아!! 크아아아!!!"
조아노이드 엔자임. 두 사람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대 가이버용 조아노이드란 것은 어
떤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걸까? 게다가 어째서 단 한 마리뿐일까? 하지만 길게 생각할 틈
같은 건 없었다. 케이는 스쿨드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한 후 앞으로 나섰다.
"가이버!!"
-쿠아앙!
가이버로 변신한 케이는 바로 헤드빔을 날렸다. 헤드빔은 엔자임의 몸에 상처를 냈지만 그 정도는 엔자임에
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가 없었다. 엔자임이 케이에게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휘잉!
케이는 높이 점프해서 엔자임의 머리위로 넘어갔다. 착지후 케이는 그대로 얼마간을 더 달려서 엔자임과 거
리를 벌렸다. 그러자 엔자임이 뒤돌아 서서는 다시 케이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케이는 바로 프레셔 캐논을
준비하였다.
-부우웅!
에너지를 모으는데 시간이 필요한 무기지만 거리가 어느 정도 벌려져 있어서 발사준비를 하는데엔 문제가
없었다. 이윽고 에너지가 모이자 케이는 프레셔 캐논을 발사하였다.
-파앙!
발사된 프레셔 캐논은 엔자임의 복부를 그대로 관통해나갔다. 배에서 다량의 출혈이 발생하면서 엔자임이 고
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
그러나 그 뿐이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엔자임은 계속해서 케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와 스쿨드는 경악하였다. 겉으로 봐선 치명상이 분명한데도 엔자임은 아직도 건재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가이버의 무기가 안 통한다니!!"
풀숲에 숨어서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스쿨드는 안절부절못하였다. 하지만 무기가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
다. 분명히 엔자임은 프레셔 캐논에 큰 대미지를 입고 복부에서 다량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이버I
때문에 자신이 이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엔자임, 마키시마 겐죠의 분노는 이미 육체의 상처같은건 무시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엔자임의 육체는 이미 분노가 지배하고 있었다. 상처를 한 손으로 막으면서 엔자임이
으르렁거렸다.
"이놈이...!! 난 네놈 때문에 지위도 명예도...! 그리고 생명까지도 전부 잃고 말았다아아!!!"
엔자임이 포효하며 케이에게 다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케이는 근접전을 준비하였다. 주먹을 날리
려는 순간 엔자임의 공격이 한발 빨랐다. 엔자임의 거대한 주먹이 먼저 케이의 안면을 강타하였다.
-퍼억!
"으악!!"
주먹에 맞은 케이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곧이어 엔자임이 쓰러져있는 케이에게 공격을 하였다.
-푹! 푸슈우우~~
"아아악!!"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던 강식장갑을 엔자임의 손톱이 간단하게 파고 들어간 것이
다. 가슴부위를 깊게 찔린 케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엔자임은 손톱을 더욱더 깊게 찔러 넣었다. 그
리고는 그대로 케이를 들어올려서는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콰지직!
"커헉!!"
케이는 그대로 굵은 나무에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인해 나무가 부러질 정도였다. 케이는 간신히 몸을 일으
켰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가슴 양쪽의 메가 스매셔를 보호하는 장갑판이 심하게 훼손돼 있었
다.
'이럴수가...강식장갑이!'
"후후후...이걸로 네 녀석이 자랑하는 메가 스매셔는 봉쇄되었다. 내 몸속에는 네 녀석의 강식장갑을 분해하는
효소가 흐르고 있지."
그 말을 들은 케이는 경악하였다. 놈들이 가이버의 강식장갑을 분해하는 효소를 만들어 낼 줄이야! 이제는
더 이상 강식장갑만 믿고 무턱대고 접근전을 벌일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저번의 젤브부스의 용해액도 강식
장갑을 녹일 수 있었지만 이 분해효소는 그 위력이 그때보다 더 강력했다. 만약 저 손톱에 다시 한번 걸리면
이번엔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아무튼 저 녀석 말대로 메가 스매셔는 이제 쓸 수 없었다. 가슴의 장갑판이
너무나 손쉽게 뚫리면서 내부에 있던 빔발생기관까지 같이 망가지고 만 것이다.
"워낙 급하게 조제된 나는....지금 이 상태로는 이삼일 정도밖에 못산다. 오래 살고 싶다면 다시 재조제를 받
으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인간의 모습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평생을 이 꼴로 살아
야해!!"
"큭...!"
"일본지부장에까지 올랐던 내가 이 꼴이 되다니...이건 다 네놈 때문이다! 죽어라, 가이버!!!"
엔자임이 분노를 폭발시키며 케이에게 그 무시무시한 손톱을 휘둘렀다. 그 순간 케이가 고주파 소드를 급히
전개시키고는 공격해오는 엔자임의 팔을 잘랐다.
-부웅! 퍼억!!
"크아아아!!"
팔이 잘린 엔자임이 잘린 부위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케이는 급히 엔자임의 눈을 피해 수풀 속
으로 몸을 숨겼다. 일단은 숨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팔의 피부가 타 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팔을
내려다본 케이는 깜짝 놀랐다. 아까 고주파 소드로 엔자임의 팔을 자르면서 그 피가 묻은 모양인데 피가 묻
은 부분이 흰 연기를 뿜으며 타 들어가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엔자임의 피에 노출된 고주파 소드는 힘없이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엔자임의 피 속에 분해효소가 섞여서 전신을 순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젠 고주파
소드로 베 버릴 수도 없었다. 놈의 피에 접촉되는 것만으로도 강식장갑은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는 것이다!
아직 고주파 소드는 왼팔에 하나가 남아 있었지만 한번 쓰고 망가지고 만다면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렇
다고 원거리 무기들도 마땅히 쓸 게 없었다. 헤드빔과 프레셔 캐논은 놈을 쓰러뜨리기엔 위력이 부족했고 메
가 스
댓글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