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님팬픽 [IceFlower] 1화 - 설산에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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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아름다운 건,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추위를 못 느끼는 너와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겨울은 혹독한 것이니까.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의 마음 말이야. 네가 그냥 단순히 설경이 아름다워서 겨울이 좋다는 거라면... 약간은 실망인걸?”
“내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내 곁에 있어달라고 말한다면, 넌 약속 해줄 수 있는 거야?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부탁 하는 건...... 잔인한 일이잖아.”
- [Ice Flower] 본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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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홋카이도, 쿠시로 근교.
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쌓인 눈과 매서운 추위로 인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산등성이에 한순간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빛이 사라지고 나자 그곳에는 하늘거리는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는 새하얀 옷과 주변 풍경에 극히 대조되면서도 또한 묘하게 어울렸다. 그녀는 사뿐히 떠오르더니 가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 그녀가 깃털처럼 가볍지 않고서야 분명 일반사람이 보기에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이스 플라워.”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는 눈과 같이 새하얀 머리카락에 유리같이 투명한 날개를 가진 천사가 나타났다.
“너도 보고 싶었지?”
천사는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산과 들판을 가득매운 새하얀 눈은 겨울의 약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그 위로 학 무리가 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옷과 머리칼을 흩날렸지만 그녀는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차가운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추위 따위는 상관 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1급신 시험을 통과한 것, 축하해요. 티아라.”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저야 말로 감사드려요.”
금발의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와 같이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이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여인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티아라 라고 불린 검은 머리칼의 여인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휴가가 끝나고 나면 정식으로 1급신으로서의 임무를 맡게 될 거예요. 1급신의 임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니, 개인적인 행동에는 제약이 많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그때까지 휴가 잘 보내고 오시길.”
“네!”
금발의 여인은 기품이 있으면서도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고, 티아라는 그에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떠나려는 듯 게이트를 여는 법술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또 겨울을 보러 가는 건가요?”
“후훗... 물론이죠.”
그 말과 함께 티아라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금발의 여인은 약간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대가 선택할 운명에 후회가 없기를...”
지상계의 시원한 바람과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새하얀 눈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천상계의 풍경도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변하지 않는 온후한 날씨는 아무래도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피어있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하여 오랜시간을 숙고하는 것인데 천상계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으니...
항상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 푸른 정원, 정적인 세상. 영원의 시간만큼이나 나에게는 지루한 곳이기도 했다.
“너도 기분 좋지?”
산등성이를 타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흩날리며 햇빛에 반짝이는, 무수한 눈먼지들을 한손으로 저으며 투명한 날개의 그녀-아이스플라워-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눈먼지들을 지켜보며 소리 없는 미소로 답했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나에게 허락된 1주일 이라는 휴가 기간이 지나 천상계로 귀환하게 되면 정식으로 1급신의 의식을 치르고 힘과 의무를 받게 될 것이다. 뭐, 특별히 1급신이 되어서 무언가를 꼭 해보고 싶다던가 하는 건 없었지만, 1급신은 꼭 되고 싶었다.
혹시 그 이유가 아르나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크게 부정하진 않겠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아르나는 나보다 먼저 1급신이 된 후에 나에게 신경 써주는 척 했지만, 사실 굉장히 도도해 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문에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내가 질투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정말 섭섭하다. 내가 1급신이 되기 위한 최종 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먼저 아르나에게 달려가 자랑했었는데, 그녀는 내가 원하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며 자기는 일이 있다면서 게이트를 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거였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서,
“네가 감당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왕 합격한거니 경솔히 행동하는 일은 없길 바래. 특.히. 휴가 기간동안에는.”
잘났어, 정말...
‘특히’에 악센트를 두며 휴가 때 사고 치지 말라며 도도한 말투로 강조하던 그녀는 놀랍게도 ‘봄’의 신이다. 봄, 봄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따스하고, 화려하고... 뭐 이런게 아닐까? 하지만 난 아르나에게서 그런 이미지와 연관지을만한 걸 찾을 수 없었다. ‘봄의 아르나’ 라고 하더니... 차라리 겨울 쪽이 훨씬 어울렸을 텐데. -내가 알고 있는 바로 아직 겨울의 신은 없다고 한다. 왜일까?-
음~ 굳이 따지자면 아르나의 천사는 ‘화려하다’는 수식을 달아도 될 것 같긴 하다. 실버블론드의 머리카락과 금빛 날개는 정말 화려하고 아름답지만...-솔직히 말해 내가 본 천사들 중에 제일 화려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표정은 주인을 닮아서인지 도도하기 그지없었다. 신님이 아르나에게 봄을 맡긴 것에 다 이유가 있겠지만, 나로서는 봄과 아르나가 어디를 봐서 어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스플라워, 너도 그렇게 생각...
휘리리릭~
“응?”
아이스플라워에게 동의를 구하려는 찰나 그녀는 스스로 몸을 숨겨버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하다고 생각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 그리고 햇빛에 반짝이는 눈, 그리고...
뽀드득.
발자국 소리.
인간...?
곤란했다. 지금 내 모습은 인간의 눈에 정상적으로 비칠 리가 없으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내가 서있는 가지는 벌써 부러져서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야 했고, 그전에 이 복장으론 얼어 죽었어야 하니까.
일단 나는 생각나는 대로 복장을 변환 시키고 나무 아래로 뛰어내려 사뿐히 착지했다. 하지만 참 우아한 착지였다고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전에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20대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검은 털모자 사이로 삐져나와 있는 머리카락엔 흰 새치가 보였다. 파란색의 두툼한 점퍼와 역시 두꺼워 보이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한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지팡이를-재질은 금속인 것 같다- 들고 있었는데 산에 오르면서 몸을 지지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나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부터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헤헤 하고 웃어줬는데-사실 내가 생각해도 좀 어설펐다- 그래도 미동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힘을 살짝 사용해서 파장을 알아봤지만 악마나 마족 그런 건 전혀 아니었고 평범한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듯 했다.
“안녕하세요? 등산하기 좋은 날씨죠?”
내가 말을 먼저 건넸지만-생각해보니 이 말은 더욱더 어설프잖아!- 그 남자는 무슨 일인지 요지부동으로 서서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는 듯해서 나는 오른손을 그의 얼굴 앞에서 휘휘 저어보았지만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설마 내 모습을 전부 봐 버린 건 아니겠지?
“저기...”
“으아악, 이... 이리로 오지마.”
이런...
‘저기, 그럼 안녕히.’ 이 말을 남기고 이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저기’라는 단어에 남자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후닥닥 뒷걸음질치려다가 그만 눈 위로 엉덩방아를 찍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거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걸? 날 무슨 괴물 취급하는 것 같잖아? 나는 내 모습을 다시 점검-이라고 하기엔 거창한- 해보았지만 별로 이상한 것 같진 않았다. 아, 겨울복장인건 확실하지만 산에 오르는 차림과는 거리가 먼가?
“......”
“......”
잠시 동안 서로 간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나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듯 했다. 나는 도와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지만-이래 뵈도 난 상냥한 여신이니까- 그의 반응은...
“오, 오지마!”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정말....
“네~ 좋아요. 좋다고요. 근처에 안가면 되는 거죠? 대신 하나만 물어볼게요. 왜 절 피하는 거죠?”
“너... 넌, 여자잖아.”
에? 확실히 난 여신이니, 인간이 보기엔 여자로 보일 것이다. 아니, 남자라고 했다면 따끔한 맛을 보여줬을 것이다.
“네, 당연히 여자죠. 그래서요?”
“그... 그 뿐이야.”
“에?”
그뿐이라니. 그렇다면...
“그러니까, 단지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피한다, 이 말이죠?”
그러자 그 남자는 고개를 끄덕 거렸다. 내가 인간계에 오려다 잘못 온건 아닐 테고... 여자가 없고 남자들끼리만 사는 세계도 있나? 그런 거도 아닐 테고...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저 남자가 어딘가 이상하다.’ 였다.
“이, 이상한 눈빛으로 보지마.”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뜻을 읽었는지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이런 겨울에 맨발로, 그것도 이런 산속에 있는 너보단 내가 더 정상적이지 않아?”
앗! 차!
문제는 발이었다. 술법 때문에 발이 시리다는 것을 못 느끼는 덕에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야? ‘예비1급신, 2급신 비한정 티아라’ 라는 말씀!
“맨발이라뇨?”
나는 그의 신발과 비슷하게 디자인하여 재빨리 만들어낸 신을 그의 눈앞에 보여주며 약간은 능청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메롱!- 그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내 발에 신겨져 있는 신발을 보더니 장갑을 벗고 손으로 눈을 비비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다시 맨발로 보일 리 없잖아?
남자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일으키고는 다시 한번 나를 힐끗 훑어보는 듯 했다. 나는 흰 털실 스웨터에 바닥에 닿을 듯한 길이의 주름진 다홍색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의 미적 감각으로 보기에 이 복장에 이 갈색의 두툼한 신발은 좀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저 남자의 표정을 보니 왠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그럼 난 이만...”
에? 남자는 산을 내려가려는지 몸을 돌리고는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아니, 나같이 아름다운-공주병이라 생각하지 말길!- 여인을 산속에 혼자 버려두고 가겠다니?
“저기, 이봐요.”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그 남자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저, 따라가도 될까요?”
나를 향해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좋으면 좋다고 할 것이지. 나는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그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길-사실 눈 때문에 길이라 부를만한 것도 없었다.- 옆에는 눈 속에 파묻힌 나무 표지판 하나가 있었는데 다른 부분은 달라붙은 눈 때문에 볼 수 없었고 ‘☜高野’ 라고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전, 타카노(작가주: 高野의 일식 발음, 실제 일본에 존재하는 지명)라고 해요. 그쪽은요?”
“케, 케이마...”
왠지, 재미있는 휴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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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어느날 갑자기 떠오른 소재라 그냥 별 생각 없이 짧은 단편으로 하루만에 후닥닥 대충 쓴 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애착이 생기다보니 수정을 좀 하게 됬습니다. (처음 썼던 글은 동일한 제목의 프롤로그를 보시면 ^^;;;)
초안 글이 결말까지 거의다 쓴 상태라 늦어도 2주안에는 IceFlower연재를 끝낼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럼 다시 Always를.... 그건 스토리나 분위기를 너무 거창하게 잡아서 저도 현재 감당이 안되는 상황 ㅜ.ㅜ)
제 글에 부족한점이 많으니 언제든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비평을 바탕으로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내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내 곁에 있어달라고 말한다면, 넌 약속 해줄 수 있는 거야?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부탁 하는 건...... 잔인한 일이잖아.”
- [Ice Flower] 본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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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홋카이도, 쿠시로 근교.
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쌓인 눈과 매서운 추위로 인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산등성이에 한순간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빛이 사라지고 나자 그곳에는 하늘거리는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는 새하얀 옷과 주변 풍경에 극히 대조되면서도 또한 묘하게 어울렸다. 그녀는 사뿐히 떠오르더니 가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 그녀가 깃털처럼 가볍지 않고서야 분명 일반사람이 보기에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이스 플라워.”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는 눈과 같이 새하얀 머리카락에 유리같이 투명한 날개를 가진 천사가 나타났다.
“너도 보고 싶었지?”
천사는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산과 들판을 가득매운 새하얀 눈은 겨울의 약한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그 위로 학 무리가 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옷과 머리칼을 흩날렸지만 그녀는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차가운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추위 따위는 상관 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1급신 시험을 통과한 것, 축하해요. 티아라.”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저야 말로 감사드려요.”
금발의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와 같이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이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여인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티아라 라고 불린 검은 머리칼의 여인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휴가가 끝나고 나면 정식으로 1급신으로서의 임무를 맡게 될 거예요. 1급신의 임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니, 개인적인 행동에는 제약이 많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그때까지 휴가 잘 보내고 오시길.”
“네!”
금발의 여인은 기품이 있으면서도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고, 티아라는 그에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떠나려는 듯 게이트를 여는 법술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또 겨울을 보러 가는 건가요?”
“후훗... 물론이죠.”
그 말과 함께 티아라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금발의 여인은 약간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대가 선택할 운명에 후회가 없기를...”
지상계의 시원한 바람과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새하얀 눈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천상계의 풍경도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변하지 않는 온후한 날씨는 아무래도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피어있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하여 오랜시간을 숙고하는 것인데 천상계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으니...
항상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 푸른 정원, 정적인 세상. 영원의 시간만큼이나 나에게는 지루한 곳이기도 했다.
“너도 기분 좋지?”
산등성이를 타고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흩날리며 햇빛에 반짝이는, 무수한 눈먼지들을 한손으로 저으며 투명한 날개의 그녀-아이스플라워-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눈먼지들을 지켜보며 소리 없는 미소로 답했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나에게 허락된 1주일 이라는 휴가 기간이 지나 천상계로 귀환하게 되면 정식으로 1급신의 의식을 치르고 힘과 의무를 받게 될 것이다. 뭐, 특별히 1급신이 되어서 무언가를 꼭 해보고 싶다던가 하는 건 없었지만, 1급신은 꼭 되고 싶었다.
혹시 그 이유가 아르나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크게 부정하진 않겠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아르나는 나보다 먼저 1급신이 된 후에 나에게 신경 써주는 척 했지만, 사실 굉장히 도도해 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문에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내가 질투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정말 섭섭하다. 내가 1급신이 되기 위한 최종 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먼저 아르나에게 달려가 자랑했었는데, 그녀는 내가 원하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며 자기는 일이 있다면서 게이트를 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거였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서,
“네가 감당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왕 합격한거니 경솔히 행동하는 일은 없길 바래. 특.히. 휴가 기간동안에는.”
잘났어, 정말...
‘특히’에 악센트를 두며 휴가 때 사고 치지 말라며 도도한 말투로 강조하던 그녀는 놀랍게도 ‘봄’의 신이다. 봄, 봄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따스하고, 화려하고... 뭐 이런게 아닐까? 하지만 난 아르나에게서 그런 이미지와 연관지을만한 걸 찾을 수 없었다. ‘봄의 아르나’ 라고 하더니... 차라리 겨울 쪽이 훨씬 어울렸을 텐데. -내가 알고 있는 바로 아직 겨울의 신은 없다고 한다. 왜일까?-
음~ 굳이 따지자면 아르나의 천사는 ‘화려하다’는 수식을 달아도 될 것 같긴 하다. 실버블론드의 머리카락과 금빛 날개는 정말 화려하고 아름답지만...-솔직히 말해 내가 본 천사들 중에 제일 화려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표정은 주인을 닮아서인지 도도하기 그지없었다. 신님이 아르나에게 봄을 맡긴 것에 다 이유가 있겠지만, 나로서는 봄과 아르나가 어디를 봐서 어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스플라워, 너도 그렇게 생각...
휘리리릭~
“응?”
아이스플라워에게 동의를 구하려는 찰나 그녀는 스스로 몸을 숨겨버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하다고 생각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 그리고 햇빛에 반짝이는 눈, 그리고...
뽀드득.
발자국 소리.
인간...?
곤란했다. 지금 내 모습은 인간의 눈에 정상적으로 비칠 리가 없으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내가 서있는 가지는 벌써 부러져서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야 했고, 그전에 이 복장으론 얼어 죽었어야 하니까.
일단 나는 생각나는 대로 복장을 변환 시키고 나무 아래로 뛰어내려 사뿐히 착지했다. 하지만 참 우아한 착지였다고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전에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20대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검은 털모자 사이로 삐져나와 있는 머리카락엔 흰 새치가 보였다. 파란색의 두툼한 점퍼와 역시 두꺼워 보이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한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지팡이를-재질은 금속인 것 같다- 들고 있었는데 산에 오르면서 몸을 지지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나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부터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헤헤 하고 웃어줬는데-사실 내가 생각해도 좀 어설펐다- 그래도 미동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힘을 살짝 사용해서 파장을 알아봤지만 악마나 마족 그런 건 전혀 아니었고 평범한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듯 했다.
“안녕하세요? 등산하기 좋은 날씨죠?”
내가 말을 먼저 건넸지만-생각해보니 이 말은 더욱더 어설프잖아!- 그 남자는 무슨 일인지 요지부동으로 서서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는 듯해서 나는 오른손을 그의 얼굴 앞에서 휘휘 저어보았지만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설마 내 모습을 전부 봐 버린 건 아니겠지?
“저기...”
“으아악, 이... 이리로 오지마.”
이런...
‘저기, 그럼 안녕히.’ 이 말을 남기고 이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저기’라는 단어에 남자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후닥닥 뒷걸음질치려다가 그만 눈 위로 엉덩방아를 찍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거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걸? 날 무슨 괴물 취급하는 것 같잖아? 나는 내 모습을 다시 점검-이라고 하기엔 거창한- 해보았지만 별로 이상한 것 같진 않았다. 아, 겨울복장인건 확실하지만 산에 오르는 차림과는 거리가 먼가?
“......”
“......”
잠시 동안 서로 간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나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듯 했다. 나는 도와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지만-이래 뵈도 난 상냥한 여신이니까- 그의 반응은...
“오, 오지마!”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정말....
“네~ 좋아요. 좋다고요. 근처에 안가면 되는 거죠? 대신 하나만 물어볼게요. 왜 절 피하는 거죠?”
“너... 넌, 여자잖아.”
에? 확실히 난 여신이니, 인간이 보기엔 여자로 보일 것이다. 아니, 남자라고 했다면 따끔한 맛을 보여줬을 것이다.
“네, 당연히 여자죠. 그래서요?”
“그... 그 뿐이야.”
“에?”
그뿐이라니. 그렇다면...
“그러니까, 단지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피한다, 이 말이죠?”
그러자 그 남자는 고개를 끄덕 거렸다. 내가 인간계에 오려다 잘못 온건 아닐 테고... 여자가 없고 남자들끼리만 사는 세계도 있나? 그런 거도 아닐 테고...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저 남자가 어딘가 이상하다.’ 였다.
“이, 이상한 눈빛으로 보지마.”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뜻을 읽었는지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이런 겨울에 맨발로, 그것도 이런 산속에 있는 너보단 내가 더 정상적이지 않아?”
앗! 차!
문제는 발이었다. 술법 때문에 발이 시리다는 것을 못 느끼는 덕에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야? ‘예비1급신, 2급신 비한정 티아라’ 라는 말씀!
“맨발이라뇨?”
나는 그의 신발과 비슷하게 디자인하여 재빨리 만들어낸 신을 그의 눈앞에 보여주며 약간은 능청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메롱!- 그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내 발에 신겨져 있는 신발을 보더니 장갑을 벗고 손으로 눈을 비비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다시 맨발로 보일 리 없잖아?
남자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일으키고는 다시 한번 나를 힐끗 훑어보는 듯 했다. 나는 흰 털실 스웨터에 바닥에 닿을 듯한 길이의 주름진 다홍색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의 미적 감각으로 보기에 이 복장에 이 갈색의 두툼한 신발은 좀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저 남자의 표정을 보니 왠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그럼 난 이만...”
에? 남자는 산을 내려가려는지 몸을 돌리고는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아니, 나같이 아름다운-공주병이라 생각하지 말길!- 여인을 산속에 혼자 버려두고 가겠다니?
“저기, 이봐요.”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그 남자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저, 따라가도 될까요?”
나를 향해 뒤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좋으면 좋다고 할 것이지. 나는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그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길-사실 눈 때문에 길이라 부를만한 것도 없었다.- 옆에는 눈 속에 파묻힌 나무 표지판 하나가 있었는데 다른 부분은 달라붙은 눈 때문에 볼 수 없었고 ‘☜高野’ 라고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전, 타카노(작가주: 高野의 일식 발음, 실제 일본에 존재하는 지명)라고 해요. 그쪽은요?”
“케, 케이마...”
왠지, 재미있는 휴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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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어느날 갑자기 떠오른 소재라 그냥 별 생각 없이 짧은 단편으로 하루만에 후닥닥 대충 쓴 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애착이 생기다보니 수정을 좀 하게 됬습니다. (처음 썼던 글은 동일한 제목의 프롤로그를 보시면 ^^;;;)
초안 글이 결말까지 거의다 쓴 상태라 늦어도 2주안에는 IceFlower연재를 끝낼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럼 다시 Always를.... 그건 스토리나 분위기를 너무 거창하게 잡아서 저도 현재 감당이 안되는 상황 ㅜ.ㅜ)
제 글에 부족한점이 많으니 언제든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비평을 바탕으로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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