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朧月夜-約束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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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산이 내려주는 바람. 그리고 저 먼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

그 두 개가 만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그대와 그때의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 朧月夜 - 約束編 -

君相憶 – 그대와 내가 서로를 생각하며.



“누구냐?”

“소자 흑수문지입니다. 아버지.”

푸른 달빛이 비춰주고 있는 쓰러져 내려가는 기와집. 지난 16년간의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무너져버린 집. 그리고 그 집을 새하얗게 감싸고 있는 하늘의 결정.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앳된 소년의 옷은 여기저기 헐고 꿰매어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동자는 조용히 울릴 뿐이었다.

“그래. 들어 오거라.”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지는 신고 있던 화(고구려의 신발)를 벗고 장지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방 안은 달빛과 작은 호롱불 하나만이 비춰지고 있었고, 그 빛은 한 사내의 음영을 만들었다.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살과 흉터. 그리고 노쇠한 어깨와 툭 튀어나온 광대뼈. 지저분하게 기러진 수염은 지금 방 안에 앉아 있는 노인의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동자는 검은 하늘 한 가운데에 떠 있는 푸른 북극성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

문지는 장지문을 닫은 뒤 노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16년간의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단 한차례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 그-흑수대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곽이라사(郭爾羅斯)(현재 내몽고 철리목맹(哲里木盟)의 사부(四部)의 하나)에서 출정하여 젊은 세월을 아사달과 신시. 국내성 그리고 요동성과 안시성. 개모성까지의 모든 전투에 하나같이 참여하여 살아남고 이겨 귀환해온 흑수가의 가주. 하지만 돌아온 그에게 남았던 것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아들 하나만이 살아남은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서서 흑수가의 또 다른 전성기를 만들었지만 다시금 쳐들어오는 당나라의 400만 군대에게 막을 길이 없이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의 피난처인 안시성으로 들어와 당태종(太宗)의 400만 대군과 싸우고 있었지만 눈먼 화살에 의해 어깨와 오른쪽 가슴에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앞으로 다가올 죽음만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문지는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사내는 부모가 죽기 전에는 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황제, 아니 열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가래 끓는 목소리를 내면서 하는 대건의 말에 문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대건은 인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마지막 남은 혈육을 바라보았다.

찢어진 창살을 타고 들어오는 북녘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집 안을 훑고 지나가면서 희미한 호롱불이 흔들거렸다.

“문지야.”

“예. 아버지.”

콜록거리며 가래를 뱉어내는 대건을 보자 문지는 품 안에 새하얗게 접어놓았던 천 조각을 꺼내어 대건의 입술 주위를 닦아 내었다.

“너에게 이야기 해 줄 것이 있어서 이리 불렀다. 너는 우리 집안의 성(姓)이 무엇인지 아느냐?”

“흑수(釛守)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문지의 말에 대건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낡고 달아 없어지려고 하는 편지 한 장을 품 안에서 꺼내어 문지에게 건네주었다.

“내 너에게 그것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 해 주기 위하여 불렀다.”

“아버지.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건 너희 할아버지이신 흑수마량께서 어떤 여인에게서 받은 편지란다. 그것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넘겨주셨지. 그리고 이건 네가 태어나는 날, 이 아비가 필사를 하여 매일같이 품속에 넣어 두고 살았단다. 그래서 내가 가기 전에 너에게 건네주려고 했었지. 그리고 이제 이걸 너에게 건네주려고 한다. 어디 읽어 보거라.”

힘이 없는 비쩍 마른 팔로 편지를 건네는 대건의 손. 그 손을 문지는 살며시 맞잡으며 편지를 받았다. 대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문지는 조용히 편지를 펼쳐서 읽기 시작하였다.

“君相憶” (군상억 : 그대와 내가 서로를 생각하며)

제목을 읽던 문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대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계속 읽으라는 대건의 눈빛에 문지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憶君無所贈” (억군무소증 : 그대를 생각하며 무엇인가 주고 싶으나 증정할 것이 없어)

“贈次一片竹” (증차일편죽 : 이제 막 주려고 하니 한조각의 대나무(부채)를 주려고 하니)

“竹間生淸風” (죽간생청풍 : 대나무(부채) 사이에서 맑은 바람이 불거든)

“風來君相憶” (풍래군상억 : 바람 따라 서로 생각합시다.)

문지가 편지를 다 읽자, 대건의 눈이 서서히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잡은 눈빛으로 문지를 바라보았다.

“이 시는 너희 할아버지에게 한 여인이 쓰셨던 것이었단다. 그 여인의 이름은 ‘김(釛)화란’이셨지. 그 여인은 아사달의 대귀족이시자 당시의 대대가였던 김하랑의 하나뿐인 금지옥엽이셨단다. 할아버지께선 그 김화란을 좋아하셨지. 하지만 곽이라사의 작은 귀족이었던 흑수(黑粹)가를 탐탁치 않게 여기셨던 대대가께서는 할아버지를 변방의 왜고려(지금의 사할린)의 부노에 사관으로 보내셨단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떠나신 후, 자신의 딸은 당시의 태대사자(가우리 왕족의 관직)이셨던 고무달님에게 보내셨지.”

대건은 목에 가래가 꼈는지 목을 끓어서 가래를 천 조각에 뱉어 내었다. 붉은 혈흔이 새하얀 천을 서서히 물들이자 문지는 놀라면서 대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내치는 대건의 손짓에 문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그 자리에 앉았다.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대건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김화란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에 태대사자에게 시집을 가셨단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 왜고려로 떠나려는 날, 평양성의 대동문 앞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신 채 기다려 한수의 시와 함께 심에 작은 옥이 박혀 있는 간죽채(대나무 부채)를 건네주셨단다. 그리고 그분의 품에는 할아버지께 드렸던 간죽채와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 그러면서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단다. 후에 이와 같은 부채를 지닌 아이가 나타나거든 자신의 아이로 알아 달라는 말이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고, 그 길로 왜고려로 떠나셨단다. 그날이 대덕 6년(평강상호태열제 6년) 진월(음력 3월) 초하룻날이었지.”

대건은 문지에게 방구석에 있는 오래된 롱 위에 있는 작은 보자기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문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름한 보자기를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았고, 그는 보자기를 풀어서 먼지가 쌓인 부채 하나를 꺼내었다. 지저분한 대님으로 그 부채를 닦은 후, 그는 문지에게 건네주었다. 문지는 부채를 받아 가만히 살펴보았다. 길이는 약 반자(≒15cm)정도 되는 평범한 간죽채였지만 심에 박힌 작은 옥은 굉장히 세공이 잘 되어 있어서 매우 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심에 박힌 옥 표면에 써 있는 두 자리의 글자-흑수(釛守).

옛날 50여 년 전에는 김(釛)이라고 불렸던 글자.

그 글자가 새겨져 있는 작은 옥돌.

자신을 지켜달라는 한 여인의 간절한 소망이 엿보이는 작은 옥돌이 새겨진 간죽채.

그 간죽채에 새겨진 성(姓)의 뜻-‘저를 지켜주세요.’

“참 어리석은 분이셨단다. 여인의 부탁에 자신의 성을 바꿔버리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말이지, 네 할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단다.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문지는 대건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대건은 그런 문지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성 밖에서 당나라 군사의 함성 소리가 푸른 밤하늘을 울리고, 문지의 손은 살짝 떨렸다. 그리고 대건은 그런 문지의 손을 가냘픈 손으로 감싸 앉았다.

“이 아비도 그랬단다. 할아버지께 성의 유래를 듣고는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말에 이 애비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

문지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대건을 바라보았다. 대건은 목에 걸려 있던 피와 가래를 천에 뱉어내고는 옆에 떠져 있던 사발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내 목이 가셨는지 대건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때는 대덕 13년(평강상호태열제 13년). 추수가 끝내고 난 다음이라고 하셨단다. 당시 평원제께서는 궁을 보수하시려다가 메뚜기때와 가뭄으로 나라가 피폐해지고 어려워지자 보수를 그만 두셨었지. 그리고 나라가 어려워지는 것에 대해 태대사자께서는 책임을 물고 하야를 하시여 남소성으로 내려가셨었단다. 하지만 당시의 대기근은 가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단다. 옆의 북주에서 또한 대기근이 일어난 것이었지. 그래서였을까. 북주와 싸우고 있던 흉노족들이 식량을 강탈하기 위해서 남소성을 공격하였단다. 무려 3만이나 되는 대군이었지. 국경부근이지만 내륙에 가까이 위치해 있던 남소성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무너지고 말았단다. 남소성에도 1만의 상비군이 있었지만 그것은 정규군이 아닌 하호(下戶)-농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군대였었기에 정말로 순식간에 무너졌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 전쟁에서 태대사자 내외분들은 모두 흉노족의 인질로 잡혔었단다.”

대건은 다시금 목이 탔는지 사발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잠시 숨을 고른 후, 찢어진 창살에서 비치는 푸른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리운 누군가를 바라보는 눈빛. 문지는 가만히 그러한 대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희 할아버지께서는 말이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평원제께 청을 드려 자신이 직접 태대사자 내외를 구하러 가겠다고 하였단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것은 인질이 되신 지 열닷새가 지난 후였지. 평원제께서는 너무 늦은 감이 있으시다며 할아버지의 청을 거절하셨단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왜고려에서의 사관임무를 놔둔 채, 곽이라사로 돌아오셨단다. 왜고려에서 곽이라사까지는 파발이 달려도 무려 열흘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이레만에 말이다. 그리고는 바로 사병들을 이끄시고는 태대사자 내외를 구출하러 가셨단다. 겨우 500여명의 사병을 데리고 말이시다. 너무 무모하셨었지. 3만의 대군 한 가운데에 잡혀 계셨던 태대사자 내외를 구하기 위해 500명으로 간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무모했지.”

말을 하기가 벅찼는지 대건이 헛숨을 내쉬자 문지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건의 요지부동한 거절에 문지는 가만히 그가 잡고 있던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숨이 어느 정도 골라진 듯 대건의 숨소리가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뜬 대건은 옆으로 살짝 치워둔 허름한 보자기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문지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달빛이 구름에 가려 방 안이 어두워지자 문지는 그것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다. 새하얀 한지에서 비추어지는 하나의 검은 먹의 글씨와 인장.

‘滅(멸)’

문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500명의 사병과 3만의 훈련된 군대의 전쟁. 사병이 일당 백이라고 할지라도 전술학적으로, 그리고 수치학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글씨의 아래 찍혀있는 하나의 인장-大德(대덕)

“그 글씨 그대로란다.”

대건의 말에 문지는 고개를 돌려 대건을 바라보았다.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아까보다 더욱 더 빛나는 듯이 보였다. 잠시 후, 대건이 앉으라고 손짓을 하자 문지는 그의 앞에 다시 앉았다.

“계속 이야기를 해야 되겠구나. 할아버지께서는 2번의 공격을 감행하셨다고 한다. 500명 이라는 한정된 인원으로 3만의 병사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기 위한 방책이셨었지. 당시 흉노의 군대는 남소성에서 100여리 정도 떨어진 ‘장사’라는 마을을 점령하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그 군대를 이끄는 사람이 지금 흉노족의 대추장인 홀필렬(忽必烈)-‘쿠빌라이’였단다. 그는 흉노족에서도 뛰어난 지략가로 지금도 널리 알려지고 있지. 지금 당태종도 세수가 90이 넘어간 그의 군대 때문에 400만의 대군을 데리고 오면서 일부 전투병력을 후방으로 배치하였지.”

문지는 홀필렬(忽必烈)이라는 이름에 살짝 몸이 떨렸지만, 대건이 진지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몸의 떨림이 멈추었다.

홀필렬(忽必烈)-쿠빌라이는 흉노족의 족장이자 책략가인 사람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수가 부족하고 유목민족이라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는 흉노족의 사람들을 홀필렬은 하나로 뭉쳐, 근방의 나라를 약탈하여 식량을 얻었다. 그는 흉노족의 유목민족적인 특성을 잘 이용하여 적은 수의 기동대를 이용, 상대편 군영의 앞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는 최소한의 필요한 양만큼의 식량과 무기를 탈취한 후, 후퇴하는 전술을 폈었다. 그런 그의 기만전술에 북주와 가우리는 많은 병사를 국경 근처에 투입했었지만, 국경 부군의 주요 요충지 주위를 돌아 국경 내륙의 도시를 공격하는 그의 전술에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노장의 경험을 이용한 책략을 많이 채용하여 더더욱 많은 피해를 안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흉노족의 인구수가 적은 관계로 다른 타 지역을 점령하기에는 버거운 것을 알기 때문에 타 지역을 점령하지는 않았었다.

가우리는 국경 근처를 약탈하는 흉노족의 군대를 치기 위해 국경부근의 군대를 투입하려고 했었지만 북주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는 것보다는 흉노족을 놔두는 편이 좋다는 온달의 권유에 따라서 필요악의 존재로서 흉노족의 군대를 처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내 북주는 수제국이 되어 중국을 점령하였고, 수제국은 가우리와의 국경 사이에 있는 흉노족의 무리를 치기 위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국경에 배치하게 되었다.

가우리는 수제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닿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수제국에게 사신을 보내어 흉노족의 자치를 인정해 주자는 공문을 보냈었지만, 수문제는 대륙정벌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안된다는 통보와 함께 수제국에서 직접 흉노족을 치겠다고 답신을 보내왔다.

결국, 수문제가 국경부근의 4만의 군사를 일으켜 동진을 시도하자, 홍무(弘武) 9년(영양무원호태열제 9년), 가우리는 먼저 가우리의 휘하에 있던 1만의 말갈병을 이끌고 요서지방의 임유관을 침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원의 부족과 훈련되지 못한 말갈의 병력으로 인하여 공격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수문제는 가우리를 정벌하기 위하여 수군 30만과 육군 30만의 대병력을 모아서 가우리를 향해 돌격하였다.

수문제의 수군은 라이저우(萊州)에서 출항을 하여 비사성을 향했지만, 하늘의 비호인지 폭풍우로 인하여 회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우리는 흉노족의 홀필렬과 동맹을 맺어 육로로 진격해 오는 수문제의 육군을 막았다. 그 중, 홀필렬의 경갑기마대의 돌파능력은 고구려의 철갑기마대의 능력에 비례해 뒤쳐지지 않았다. 흉노족의 경갑기마대는 단 1만의 기병으로 임유관 앞의 벌판에서 대치 중이었던 10만의 수문제의 선발대를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돌파, 아군 200명의 사망과 적군 1만 4000여명의 사망을 낳은 대 전투로 기록되었다. 그 이후, 홀필렬의 군대는 치고 빠지는 형식으로 임유관을 향해 진격해 오는 수문제의 육군에게 많은 타격을 입혔다.

“그래. 너도 믿기 어렵겠지. 홀필렬이 이끄는 3만의 대군을 단 500명의 사병으로 뚫고 들어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네 할아버지는 그것을 가능케 하셨단다. 한 여인을 지켜내기 위해서 말이다. 비록 자신의 여인이 아닐지라도.”

노란 유채꽃이 떨어지듯 내려오는 하늘의 유성우(流星雨). 열린 창을 통해서 내려오는 유성우를 바라보던 대건은 눈을 돌려 눈 앞의 문지를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여윈 팔을 들어 곧 있음 약관의 나이가 되어버리는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말이다. 너무 늦으셨었다. 이미 홀필렬은 가우리와의 교섭이 실패하자 두 분을 처형했단다. 너무 늦었지. 그렇기에 평원제께서도 말리셨던 것이었고. 결국, 평양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두 개의 관(棺)과 어린 여아 하나뿐 이였단다.”

대건의 눈가에 맺히는 작은 이슬 한 방울. 문지는 대건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손으로 닦아 내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에 대건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네 할아버지께서는 성을 바꾸셨단다. 흑수(黑粹)에서 흑수(釛守)로 말이다. 그리고 한동안 집안에서 나오시지를 않으셨지. 그 모습을 보신 평원제가 할아버지에게 한 여인을 이어주셨단다. 그것이 바로 네 할머니이시지.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셨단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간죽채만은 할머니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었지. 그래. 그때가 바로 수양제가 가우리에 공격하기 전 날 밤이었을 것이다. 그날 할아버지께서는 을지문덕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장군과 함께 출전하기 위해 평원제께서 내려주셨던 삼각판정결판갑(三角板釘結板甲)을 입고 계셨었지. 새하얀 눈이 내리던 저녁. 할아버지께서는 이 애비를 정자(亭子)로 부르셨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셨지.”

[대건아.]

[예. 아버지.]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비겁한 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애비는 한 여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정말 애절한 약속을 말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내 품 안에서 지켜 내지를 못하였고, 사랑했던 여인을 이 세상에서 지켜내지 못한, 그런 못난 비겁자다.]

[어째서 아버지께서 비겁자란 말씀이십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때 최선을 다해 그분을 구하기 위해 애쓰셨지 않으셨습니까?]

[너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애비가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그때 네 할아버지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단지 할아버지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단다. 그래. 그분은 울고 계셨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네 할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지금 나는, 지난날의 원수와 함께 적을 맞아 싸우러 가야 한다. 이 아비의 약속을 무참히 밟아버린 원수를 바로 옆에 대동한 채, 우리의 조국을 침략하려고 오는 수양제의 200만 대군을 향해 싸우러 나가야 한다. 바로 옆에서 환도(環刀)로 벨 수 있는 곳에서 벨 수 없는 자와 함께 싸우러 나가야 한다. 그리고 철천지원수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는 그녀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나가야 한다. 원수의 피로 적시기 위해 갈아온 칼날을 조국을 피로 물들이려는 적을 향해 돌려버린 여인의 방패가 되기 위해 나가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하여 아버지께서 지켜주어야 하신단 말입니까?]

[그건……. 이 흑수(釛守)라는 성이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딸, 은지가 을지막하하리지 장군의 참모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 고무달 태대사자와 김화란의 여식이었던 고은지 계달사(契達奢)께서는 을지막하하리지 장군의 참모로서 수양제와의 일전을 치르게 되신 거였다. 그것을 들은 할아버지께서는 영양제께 청을 들여서 계달사의 속하로 들어가서 참전하게 되신 것이지.”

대건은 옆에 놓여진 사발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이고는 입가에 묻은 물기를 지저분한 소매로 닦아내었다. 문지는 그의 말을 듣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대건의 얼굴에는 씁쓸한 그리움을 느끼게 해 주는 미소가 지어졌었다.

“그리고 3년간의 전쟁 후, 4월 열 아흐렛날. 할아버지는 조용히 주무신 채 집으로 돌아오셨단다. 한 여인과 함께 말이지. 피에 물든 듯 이곳저곳 얼룩진 연화색의 저고리와 대구고(통이 넓은 바지. 고구려 귀족들이 입음.)를 입고, 허리에는 할아버지의 환도를 차고 있었지. 그날따라 봄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마당에 있던 벗꽃잎들이 하늘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향해 웃었다.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대건의 눈가에 조금씩 맺히는 차디찬 밤이슬. 그리고 누런니가 보이는 미소. 대건의 눈물 어린 미소를 문지는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뚫린 지붕을 위를 지나가고 있는 새하얀 보름달. 당군의 400만 대군이 안시성을 공격한지 한달 하고도 반이 지나가 버린 지난날의 전쟁. 대건의 아스라이 무너질 듯한 미소가 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웃었다.”

대건은 조용히 읊었다. 너무나도 작고, 슬픈 목소리. 문지는 그 소리에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내었다. 그늘에 가려진 대건의 얼굴.

“나는 웃었다. 차마 울 수가 없었다. 이 아비가 태어나고서 네 할아버지가 그렇게 편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웃고 계시는데 어찌 아들 된 도리로서 울 수가 있겠느냐. 할아버지께서는 마치 이승의 한(恨)을 푸신 듯, 행복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어느새 옆에 있던 여인이 다가와 내 얼굴을 쓰다듬더구나. 그리고 그녀는 내 옆에서 한 조의 시를 읊었다. 바로 할아버지가 항상 품속에 두고 계셨던 그 시-군상억(君相憶)을 말이다. 그리고 품속에서 간죽채를 꺼내 이 아비에게 건네주더구나.”

시월의 차디찬 바람과 함께 지나가는 황조롱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다시금 밖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당나라 군사의 함성소리. 삐걱거리는 경첩을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두 부자의 얇은 소매 속을 파고들어갔다. 대건의 팔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자 그 모습을 본 문지는 방 구석에 개어져 있던 이불을 가지고 와 바닥에 깔았다. 차디찬 바닥 위에 놓여진 이불의 속은 차갑기만 하였지만, 대건은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문지는 이불을 대건의 어깨까지 덮어 준 다음, 말라버린 오른쪽 팔을 조금씩 주물렀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아버지께서 이리 즐거워 보이는 것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더니 그녀가 이러더구나. ‘살수에서의 전투로 출전하는 중. 그분께서 저에게 이러더군요. 자신이 나만한 나이였을 때 한 여인을 사모하였다고. 그러나 그 여인을 지켜주지 못해 그 한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고. 그러나 이제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저는 그 말뜻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분께서 읊으시던 시를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사모하시던 한 분의 사내가 있었다면서 읊어주시던 시조였었지요. 그리고 그와 함께 흉노의 군대 속에 있던 저를 구해 주시던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그분, ‘흑수마량’ 이셨습니다.’ 그녀의 말 속에는 그리움과 기쁨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는 너무나도 감사했다. 한평생 한 여인을 지키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알아준 그녀를 말이다.”

대건은 이제 괜찮은 듯, 팔을 주무르고 있던 문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지는 이불 밑에 손을 대어보고 방바닥이 차자, 장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아궁이에 장작을 몇 개 넣은 후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불 속에서 조금씩 따뜻해지는 온기를 느끼면서 대건은 눈을 감았다.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웃지 않고 말이다. 그제서야 네 할아버지의 죽음이 실감이 난 것이었지. 그때 그녀가 나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아주었다. 따스했었다. 너무나도 따스했다. 그녀의 목소리 또한 이 나의 마음을 녹였지. 매우 평범한 얼굴의 여인. 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한달간의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자주 앉아 계셨던 서재로 들어갔었다. 그 많은 책들은 다 사라졌고, 남은 것은 단지 있었다는 향기 뿐 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유채꽃은 네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셨던 꽃이었지. 비록 추운 북쪽이라 오랫동안 피어있지는 못했지만 수수한 아름다움을 좋아하신 네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그 꽃을 좋아하셨다. 멍하니 그 꽃을 바라보며 네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 누군가 내 뒤로 오더구나. 그녀였지.”

대건은 문지에게 창고에 가서 봉수공후(공후 끝에 봉으로 머리를 장식한 악기)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다. 문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궁이로 가서 장작을 몇 개 더 넣어두고 옆에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삐걱거리는 경첩소리와 함께 열리는 창고냄새에 문지는 살짝 코를 막았다. 지난 날 전쟁을 피해 본가에 있던 물건 중, 중요한 것들만 추려서 이 창고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영락대제시절(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그의 조상이 서역 진출을 하면서 가져온 서역의 진기한 물품들도 있는 이곳. 그 안에서 문지는 봉수공후를 찾아 가지고 나왔다. 달빛에 비추어지는 불그스름한 선. 지난날 서역정벌에서 가지고 돌아온 악기. 21개의 가느다란 현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어 그 모순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있었다. 공후를 받은 대건은 마치 매우 소중한 물건처럼 공후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초로의 노인이 만지고 있는 붉은 악기. 전쟁터에서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붉은 빛깔과 천장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의 달빛. 그리고 푸른 현과 맞잡는 활의 미묘한 떨림.

대건은 마른 오른팔로 공후를 잡은 채 문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나라는 존재 때문에, 이 나라를 위해 싸우던 한 사내가 죽었다고. 울더구나. 너무 애처롭게 울었어. 어느새 어깨가 젖어버리더구나.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더구나. 한동안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 그러다가 그녀가 한 말이 ‘유채꽃이 예쁘네요.’였단다. 아까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수줍게 말이다. 웃었지. 기쁘게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내 아버지를 생각해 주었고, 나를 생각해 주었던 것이 고마웠다. 그녀는 무안한 듯 고개를 돌리다가 창가에 하나 남아있는 이 봉수공후를 보더구나. 그러더니 어느샌가 그 공후 옆으로 가서는 활들 들어 조금씩 키기 시작하더라. 어느정도 익숙해진 듯 보이더나 나를 보더구나. 그녀는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며 노래 한조를 불러주었단다.”

왼쪽 팔을 들어올려 공후를 조율하는 대건을 문지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생긴 그의 얼굴. 힘이 들어간 말라버린 오른쪽 팔. 점점 밝아지는 혈색. 달빛에 비추어지는 그의 얼굴은 생기가 넘쳤다.

대건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지천명(地天命)을 바라보는 초로의 나이에서 흘러나오는 쉰 노랫가락. 그리고 현의 노래.

[유채꽃밭에 석양이 엷어지고 菜花沬夕陽]

[멀리 바라본 산등성이 안개는 짙고 遠觀山深霧]

[봄바람 살랑 부는 하늘을 보면 風春風見天]

[저녁달이 걸려있어 향기가 희미해져 係月曖香氣]

[마을의 등불 빛도 숲의 색깔도 火光村色林]

[밭의 작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도 道小田他遵]

[개구리가 우는 소리도 종소리도 鳴蛙音鍾音]

[마치 스치는 으스름 달 밤처럼 攊恰曖月夜]

[들어봐 들어봐 눈을 감으면 淸聽暝觀見]

[바람의 별의 노래가 들려요 風星之聽歌]

너무나도 조용한 세계. 전쟁터와는 다른, 피의 내음이 나지 않는 세계. 푸른 들판 위에서 마주보는 석양처럼 따스한 노래. 한여름 곽이라사의 푸른 들판 위에 나는 유채꽃의 향연. 그리운 임을 기다리는 한 여인의 소망. 피내음이 나는 전쟁터 속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공후의 울음소리에 성내, 그리고 성외에서의 모든 소리는 종적을 감추었다.

문지의 눈에서는 어느새 한 줄기의 눈물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한 문지를 본 대건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공후를 마저 뜯었다.

모든 소리가 잠기고, 경첩의 울음소리마저 잠들었다. 병장기들은 모두 그 빛을 잃었고, 하늘의 어두운 빛은 모든 것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그리고 공후의 소리도 잠들었다.

“그래. 네 어머니가 너에게 자주 들려주던 공후인이겠구나.”

눈을 뜬 대건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문지를 바라보았다. 문지는 이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어 그를 바라보았다. 대건은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로 그런 문지를 바라만 보았다.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르고는 이어서 계속 현을 뜯었단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노래가 없었어. 그러기를 일다경이 지났을까. 여전히 이어지는 공후의 소리에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나 또한 그것에 대한 답가를 해 주었단다.”

이어지는 공후의 소리. 그리고 다시금 시작하는 초로의 노인의 노래. 서서히 음이 높아지는 공후의 소리와 함께 그의 노래는 시작되었다. 첫 소절과 비슷한 음영. 하지만 그 음영의 깊이는 달랐다. 공후를 뜯던 손의 움직임은 더욱 느려졌고,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조금씩 낮아졌다.

[유채꽃밭에 석양이 엷어지고 菜花沬夕陽]

[머리 바라본 산등성이 안개는 짙고 遠觀山深霧]

[봄바람 살랑 부는 하늘을 보면 風春風見天]

[저녁달이 걸려있어 향기가 희미해져 係月曖香氣]

[아득한 아득한 먼 미래에 悠之遠未來]

[강하게 강하게 빛나는 이름으로 强之光名之]

[모두의 모두의 근원이 되는 대지 摠之地根源]

[살아있어 살아있어 이 가슴 속에 生之內胸我]

서서히 내려앉은 공후. 그리고 떨어지는 그의 왼손. 따스한 어둠과 함께 그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문지는 떨리는 손을 가만히 뒤로 내었다. 이내 서서히 고개를 드는 대건의 얼굴에는 우수에 가득 찬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의 손길은 공후의 목을 가만히 스쳐지나갔다.

“답가가 끝나고 공후의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였다.”

어느새 대건의 눈빛은 아까와는 다른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검은 심연의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그의 눈동자는 이립(而立)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문지를 향해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창문을 통해 바람이 들어오더구나. 따스했지. 그리고 그녀가 일어났다. 달빛이 그녀의 머릿결을 비추자 그녀의 머리가 은색처럼 반짝였지. 아름다웠어. 그녀가 나의 앞으로 다가왔단다. 그리고는 이리 말하더구나. ‘흑수마량이 저를 처음 만나자 하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는 지금 당신에게 이 언약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어느새 그녀가 내 앞에 살짝 무릎을 굽히며 내 손등을 잡더구나.”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산이 내려주는 바람. 그리고 저 먼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

“그 말은 평소 네 할아버지가 혼자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하시던 말씀이셨다. 하지만 그녀는 그 두 문장의 말만 하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두 개가 만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그대와 그때의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러한 이야기는. 지난 수문제와의 전쟁 중, 아버지가 전투에 나가 계시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그 때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 그리고 아버지와의 만남. 지난 살수에서의 전투에서 퇴각하는 도중 어머니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맞아주신 할아버지. 그리고 그러한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픈 웃음으로서 맞은 아버지. 인색하신 아버지의 웃음과 눈물. 그 모습을 본 어머니의 마음.

하지만 나는 알기 싫었다.

눈앞에서 양친의 죽음을 보고, 그 원수를 보고 있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구해 준 한 남자. 어렸을 적의 어머니로서는 그 원수에 대한 한(恨)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항상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간죽채가 그런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검은 나라를 공격하려는 적군의 피로서 물들어 있었다고. 원수의 피가 아닌.

바로 옆 자리에 홀필렬과 함께 싸우면서, 어머니는 느끼셨다고 한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홀필렬은 원수였다고. 하지만 그는 흉노족에게는 영웅이라고. 순간 그에게로 향하던 검의 살기가 사라졌다고 하셨다. 그는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사내였기 때문이라고.

약관식(弱冠式)을 거행하는 날. 그날도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침략을 하는 이민족과 전쟁을 벌이고 계셨다. 남아있는 흑수가의 핏줄은 나 하나뿐. 아무도 없는. 아니, 어머니 하나만 계셨던 아주 단촐한 약관식이었다. 최소한 아버지가 잠시 본가에 들으실 줄 알았었다. 하지만 편지 한통도 오지 않았다.

슬펐다. 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느새 내 옆으로 오신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해 주셨다.

‘문지야. 후에 네 아버지께서 어떤 편지에 대해 네게 이야기를 해주실 것이다. 그게 지금이 될지, 아니면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나만 기억해 주려무나. 네 아버지를…….’

사랑해주렴.

어머니의 말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었다. 어린 나이였다 라는 변명은 되지가 않았다. 단지, 알기 싫었다. 단지 언제나 혼자 사계절을 맞으시는 어머니의 인생. 그리고 밤이면 쓸쓸히 공후를 뜯는 어머니의 하루. 그것이 싫었다.

수문제의 침략으로 아버지가 다시 전쟁터에 다니시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항상 나를 데리고 곽이라사의 전경이 보이는 정자에 데리고 가셨다. 조금씩 주름을 선물 받으시는 어머니의 얼굴. 항상 어머니는 아버지를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사셨다.

어머니의 마지막 날. 그날도 함께 정자에 갔었다. 정자에서 보이는 붉은 석양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어머니는 한수의 시를 읊으셨다.


[近來安否問如何 요즘 안부가 어떠하신 지요.]


[月到紗窓妾恨多 달빛이 사창에 비치니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 만약 꿈속의 혼에도 다닌 데 흔적이 있다면.]


[門前石路半成沙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문지야.”

따스한 말투로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붉은 석양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살짝 위로 쪽을 올린 머리. 푸른 청색의 단아한 저고리와 살짝 주름을 잡고 단에 선을 댄 치마. 허리에 매여진 흰색의 띠. 붉은 석양의 은은한 빛깔이 들어있는 두루마기.

“난 말이다. 네 외할머니께 매우 감사하고 있단다. 네 할아버지와의 약속 덕분에 이렇게 좋은 남편과 아들을 만나게 되지 않았니?”

어머니의 그 미소. 아마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어머니의 미소 중, 가장 아름다웠다. 단지 그 감정 밖에는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아. 그래서인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 모습이 가장 어머니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던 것인가. 어느새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어머니는 다시 웃으셨다. 마지막 미소였다. 어머니가 이 생에서 나에게 보여주시는 마지막 미소.

눈꺼풀이 무거우신 듯, 어머니는 정자에서 한숨 주무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나의 무릎을 베고 싶으시다며 옆으로 다가와 누우셨다.

‘여보. 나중에 뵈요.’





어느새 주무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평생을 아버지만을 생각하시며 살아계셨던 분. 평소 홀로 공후를 뜯으며 그 외로움을 달래셨던 분.

‘君 相 憶’

항상 그 분을 그리우며 생각하시던 그 마음.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대와 그때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시는 분.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신 분.

‘아버지.’

이제 편히 주무십시오.
개개화(開化)4년.(645년 - 보장제 4년)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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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토님의 댓글

긴토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누가 누굴 평가하리오 =ㅅ= 수준이 이리도 다른것을..

사무소씨 역시 당신은 명실상부 최고의 네오홈 소설란의 지존이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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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류애님의 댓글

월류애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년도가 남기는 효과는 정말 굉장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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