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제 1화 (2) 제 3외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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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 3 외국어.
버스에서 내리자 나를 맞는 것은 찬 바람이었다. 차가운 도시의 바람과 함께 내 앞을 지나가는 노란색의 은행잎. 그것을 보고서야 가을이라는 것을 느끼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노란색으로 염색을 해 버린 은행나무들. 두꺼운 목도리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여인. 새벽장사 마치고 가게를 정리하고 있는 아줌마. 그리고 아침 직장인을 맞으려는 토스트가게 주인과 가게에서 나오는 새하얀 연기. 내 눈가를 살짝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에 살짝 눈웃음이 갔다. 내가 좋아하는 가을과 겨울. 세상이 조용해지는 이 때를 가장 좋아한다.
“그래도 춥긴 춥구나.”
횡단보도 앞에서 건너편에 있는 탑골공원을 바라보았다. 아직 새벽녘이라 그런지 그 많던 할아버지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 날씨에 나오시면 청춘이시지. 파란불이 켜지는 동시에 내 옆에서 뛰어나가는 한 여자. 보아하니 학원 지각하는 것 같던데 맘 편히 가지시는 것이 신상에 좋을 듯한데.
"おはようございます。"
일본인 강사와의 인사와 함께 시작하는 일본어수업.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 것이었기에 편하게 배우고 있다. 벌써 10개월 가까이 되가는 이 수업이 이젠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있으니 나 혼자 남자. 그리고 나 혼자 대학생 이라는 것이다. 아침반이 직장인 수업이라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학생 수도 적다는 것도. 그리고 이 수업에 대학생이 나 하나라는 것 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문제는 나 혼자 남자라는 것. 그래서일까 수업 중에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국적불문하고 수다가 시작되는 것이 듣는 남자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그랬으니 시작은 이러했다.(번역을 해주는 센스)
“여러분 5번 문장의 ‘家賃’단어 뜻을 압니까?”
“그러니깐… 집을 빌리면서 내는 돈이 아닙니까?”
어떻게 본다면 평범하고도 괜찮은 수업내용이다. 하지만 그 이후 이 내용은 변질과 변태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하나의 나비가 아닌 나방을 탄생시켰다.
“제 딸이 말이죠…….”
“어머, 저도 그래요. 얼마나 도쿄 집세가 비싼지…….”
“이번에 일본 가서 호텔에 머무는데요.”
여기까지는 회화로서 선생과 학생의 대화의 범주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 일본어를 배워오면서 나 혼자 단 하나의 남자(男)로서 지내왔고(선생도 전부 여자였다. 그리고 이번 여선생은 젊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여.), 주위의 누님들께서 예뻐해 주셨으니 괜찮지만 내용이 여자들만의 세상으로 빠지면 뭐라고 할 말이 없어지니.
“여자들은 말이에요. 비지니스 호텔 같은 곳에서 자면 안돼요.”
일본어 강사가 말을 하면서 나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올라가는 눈웃음. 결국 마지막은 항상 나에게 꼬치는 하나의 작은 비수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비록 처음 내가 비지니스 호텔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은 했었다. 그나마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매일 당하는 일이었기에. 하지만 나만한 아들을 두신 아주머니께서 나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실 때는 정말이지 어떻게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었다.
“하하. 뭐. 그건 각자 다르죠.”
조금은 찌릿한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살짝 웃고 있는 강사의 얼굴. 음. 뭔가 찔리게 하는 미소인데. 저번 11월 11일에 빼빼로까지 가져다주었는데 왜 그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에긍. 어린 내가 참아야지.
“한상(일본인은 성 뒤에다가 ‘さん’이라고 붙입니다.)은 아직 はたち(20세)니깐 괜찮겠지요.”
여기서 살짝 웃어주는 센스와 함께 넘어가고픈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과 동시에 찌릿한 느낌이 사라졌으니 분명히 강사가 뭔가 수작을 부린거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 나 덕분에 수업은 재미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나이 드신 분에게 이런 장난을 칠 수 없을테니. 그리고 나도 즐겁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일본어 강사와 수업을 하다보면 1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에 책을 넣으면서 강사가 슬쩍 나를 불렀다.
“왜요?”
“자, 포키(일본에서 빼빼로를 포키라고 하더군요.)의 답례에요.”
그녀가 나에게 건네준 것은 이번 주말에 제주도에서 다녀와서 가져온 선물이었다. 지난 월요일에 그녀가 신나게 제주도에 다녀온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지만 그것에 대한 선물로 이런걸 다. 역시 사람은 좋고 봐야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백번 옳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게 되었다.
“아, 고마워요.”
그녀가 나의 손에 쥐어준 것은 바로 ‘하루방초콜릿’. 초콜릿이라고 놀리지 마시라. 이래봬도 이거 꽤 비싼 축에 속하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초콜릿 하나에 개당 600원이 넘어가는 거금. 그것을 한 상자씩이나 나에게 건네주다니 감격에 감격을 먹었다.
“한상이 너무 열심히 해줬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 주세요.”
결석 한번 없는 나. 물론 출중한 의무정신이 아닌 내가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소릴 들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는 없었다. 흠. 이렇게 주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선생님. 다음번에 없는 돈 털어서 우동 한 그릇 사드릴게요. 기대하세요. 맛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그 말에 그녀는 기대한다는 말을 하였고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눈 후 교실 밖으로 나왔다. 다시 워크맨을 꺼내고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가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해왔다. 아직도 워크맨을 쓰냐고. 그러면 항상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좋은걸요. 테이프에서 나오는 오래된 소리가.’
결국 다들 피식 웃고는 그래라 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워크맨이 좋다. 아날로그 테이프가 들려주는 흐름의 음악. 조금은 오래된 느낌에 늘어지는 듯한 가락들의 소리. 오랫동안 듣다보니 테이프가 조금은 씹혀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느낌이 좋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선물로 받은 워크맨 이었기에 더더욱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이 워크맨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득 있다. 잠깐 분실한 적도 있었고, 수리센터에 맡겼다가 부품이 없던 적도 있었고.
이어지는 True Love를 들으면서 학원 문을 여니 차가운 바람이 다시금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눈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왠지 모르게 저 사람들과 동떨어진 느낌이 귓가에서 느껴졌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은 천천히 움직이는데 주위의 환경이 바쁘게 움직이는 장면처럼 느껴지는 걸까나.
학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문뜩 제 3외국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일본어를 배우는 것일까. 아니, 일본어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이 과연 제 3외국어일까 라는 정말로 쓸데없는 잡생각이었지만 뭐 한번 생각나니 겉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버스를 한 두어대 정도 놓치고 말았다. 이긍. 이러면 학교 지각 할텐데.
다음 이야기 : (3) 버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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