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속에서 나오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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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Q : 왜 대부분의 남자들이 호모라면 질색을 할까?
A: 시퍼런 수염자국이 남아있는 작자들에게 이성취급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까?
===
당연히 안좋았다.
굳이 질문따위 받지 않아도,
윤현진은 남자들이 "왜" 남성 동성연애자에 익숙해지지 않는건지 알고 있었다.
튼튼하다는 것 하나에 존재가치를 건 청바지를 걸치고 있었지만 두툼한 손의 감촉은
충분히 청바지를 투과하여 엉덩이에 전달되었다. 버스가 흔들리는 동안. 그러니까
찰나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보인다. 거기냐! 가 아니다.
노린거다.
하도 많이 당한 일이라 이젠 잠시만의 감촉을 가지고도 어떤 식으로 어루만졌는지
3초만에 알아낼수 있었다. 이를 잠시 부득 부득 갈고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
아 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회사원이나 붉게 물든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는 모습을
보니 저 평범해 보이는 입술을 도톰하게 말고 하아 하아 소리를 내며 현진의 뒤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상상되 버렸다.
토할것 같아.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얼마전 50대 아저씨와 용호 상박의 혈투를
벌이고 경찰서에 끌려갔다 훈방된걸 생각하면 참는 수 밖에 없다. 훈방은 두번째
는 없다. 두번째는.
물론 둘다 불세출의 명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에 등장하는 변태 호모는
아니었다. 이럴때 만큼 자신의 외모가 원망스러워 지는 적이 없다. 뒤로 간단하게
묶어 넘긴 머리카락을 움켜 쥐었다. 이거라도 전부 밀어버리면 조금 나을텐데.
고 1에 170이라면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가늘고 여린 몸매.
작고 오똑한 코 위에 흑옥같이 까맣고 자위가 큰 눈.
자그만 입술이 너무나도 붉게 보이는 창백하리만큼 투명한 피부에 뒤로 살짝 묶은.
목뒤로 흘러내리는 단발머리라면 누가 그를 17세의 소년으로 생각 하겠느냔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그를 돌봐주고 계신 작은 아버지가 허용하지 않았다.
몇번이라도 자르려고 했지만,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시는데야 두손 두발 다 들
었다. 어쨌건 부모님이 돌아가신뒤, 남자 홀몸으로 이때껏 키워 주신 분인것이다.
...작은아버지도 자신을 딸 취급 하고 싶은 거란건 꽤나 불쾌하지만.
윤현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체크무늬 셔츠를 여몄다. 내릴 곳이 다 되어가는데,
치한 남자는 다시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물감에 더럽고 분통이 터졌다.
그렇지만, 몸은 사려야 한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경찰서 구경은 그렇게 기분좋
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뭐. 일단은 오해니까.
현진은 같은 감독의 킬빌 VOL.1 에 나오는 고고 유바리처럼 웃었다.
고개를 돌려 숨을 들이키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변성기가 늦는건지, 조금 허스키 하긴 했지만 충분히 감쪽같았다. 불안과 분노,
공포가 가득한 모습으로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채 치한 남자를 가리켰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도 바라볼만한 명연기였다. 물론 아빠 일어나 라는 불후의 명
대사를 남긴 클레멘타인 같은 영화로는 무리겠지만.
"왜 계속 따라와서 막, 막 더듬는 거에요?! 무, 무서워서... 무서워서..."
여파는 충분했다. 아니 남았다.
같은 말을 또 타이핑 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한국은 외모 지상주의가 판치는
마굴이고 같은 성추행도 피해자의 외모에 따라 느껴지는 분노가 달라져버린다!
그게 진정 순수한 정의감의 발현인지야 매우 의심되지만, 순식간에 버스의 여기
저기에서 건장한 청년과 장년들이 몸을 일으켜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남자를 압
박해 들어갔다.
"아, 아니 나... 난..."
치한의 더듬는 말마디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가장 건장한 청년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 쥐었다. 치한의 체구가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
지. 그리고 무언가 중후해 보이려 무진장 애쓰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런 놈은 남성의 수치입니다. 경찰 불러 드릴까요?"
그렇지만 현진은 그저 눈물을 그렁 그렁 단체(흘리진 않았다) 고개를 들어 치
한을 보는척 하며 그의 얼굴을 과시하고, 고개를 숙여 우는척을 해 버렸다.
청년은 다시금 그를 바라보려다, 치한짓을 당하고 슬퍼하는 아가씨를 달래기 위
한 가장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만 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형형하게, 그리고 왠지는 모
르겠지만 웃음을 머금은 이들의 가혹한 린치가 시작되었다. 현진이 내렸는데도
계속. 아마 정류장까지 가겠지. 폭력은 술처럼 취하는 거니까.
그리고 어벙하게 물을것이다.
그 아가씨 어디로 가버린거지?
===
바람이 즐거운 재즈음악같이 현진의 귓가를 휘감고 창공을 향했다. 대낮의 따사
로운 햇살이 눈을 부시게 하고, 휴일의 거리엔 사람들이 나와 종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윤현진은 나는듯이 걸었다. 오늘은 무슨 착한일을 할까-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같은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실상은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라는 발걸음이었다.
사실 가해자보다 더 좋은 체격을 가지고, 물리적으로 원천 봉쇄 하더라도 성범죄
는 지독히도 기분 나쁘고, 두려운 것인 것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17세의 소년으로서 당연한 코스를, 사회학적 교육을 받아왔는
데도. 겨우 이까짓 외모로 여성 취급을 하며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투영할때는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맘을 터 놓을수 있는 동성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일단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동급생은 많을지 몰라도, 그가 스스럼 없이 친구-
라고. 그리고 자신도, 그녀석도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수 있는 인물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일요일인 오늘, "친구" 김상민과의 약속이 있었다.
대입이라는 로또 추첨을 위해 뭐 일찍부터 스터디 그룹을 가진다던가, 하는 거창
한건 아니었다. 그저 노세 노세 늙어 못노나니. 하는 소년으로서 가질 당연한 유
희를 위해서였다. 남자 둘이서 침울하게 멜로 영화를 본다던가, 둘이서 우울하게
카페에 들어가 수다를 떤다던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패션 아이템을 위해서
상점가를 쏘다닌다던가.
-하는.
물론 윤현진은 그다지, 그런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왠지 그런건 남자들
둘이서 하기엔 너무 우울한것 같고. 기왕이면 좀 발전적으로 당구장이나 하드코어
락공연장에 가는게 낫지 않은가- 싶었지만. 그의 친우 김상민은 항상 그런 쪽으로
예정을 잡고 있었다. 여하간 취향도 별나지.
"현진아!"
약속 장소인 건물 근처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 1 주제에 177이 넘는 훤칠한 키. 상민이었다. 소꿉친구로 자라와서, 같은 눈높
이로 자란 주제에- 어느세 그가 올라봐야 하는 키가 되어버렸다. 현진은 반가움과
동시에 질투를 느꼈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남자답다. 조금, 대하기 어렵다는 평
가를 동급생들에게 받고 있는 그와는 달리 발도 넓고 여자에게 인기있다.
좋은 부모님 밑에서 구김살 없이 자랐고 집도 부유하다.
어딜 봐도 그와는 다르다.
그렇지만 현진은 고개를 흔들어 질투를 지워버렸다. 어차피 살아온 과거는 고정되
어 있다. 절대 바꿀수 없다. 그리고, 상민이는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
아닌가. 조금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있다, 활짝 웃으며 상민에게 다가갔다.
주먹을 서로 부딪히고, 강하게 끌어 않았다 놓았다. 형제의 의식같은 동작을 마치
고, 둘은 어깨 동무를 했다. 현진이 조금 발돋움을 해야 했기 때문에, 상민의 얼
굴이 조금 붉어졌던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피아노가 잔잔히 울리고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도란 도란 잡담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창가의 한 구석에서도 잡담이 이어진다. 촌스럽게 만남의 광장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 cat's eye 란 상호명을 가진 카페는 이런 용도를 위해 있는거겠지.
"그러니까 말이지, 체육이 내 머리카락 가지고 시비를 거는거야. 잘됐다 싶어서 집에
전화라도 걸어주시던가, 아니면 그냥 잘라달라고 이야기 하니까. 시비라도 거는줄 알고
입에 게거품을 물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때 직접 목격한건 아니지만, 학교란 좁아
터진 공간이니까. 지금이 빡빡 민 머리를 학생의 제 1 본분으로 아는 군사정권 시대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그 시대에 교육받은 체육 선생으로서는 분하기도 했겠지.
사실 그런 긴 머리는 현진도 불편해 하는것이라 순순히 따라간 모양이었다. 다만,
직접 밀어 주겠다고 바리깡이 있는 체육의 A교무실을 향해 현진을 끌고 가던 체육선생
이 그 광경을 목격한 학생부장 선생의 사색이 된 얼굴, 그리고 속삭임을 듣고는 곧장
돌려 보낸 모양이었지만.
김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곤 가볍게 말을 끊었다.
"아아, 그 이야기 알아. 다른 이야기 하자."
"에, 아는 이야기였어? 진작 말하지. 그나저나, 이따위거나 마시자고 여기 들어온거야?
늘 생각하지만 네 미각은 너무 이상하다니까."
달다 달다 하며 입술을 내밀고, 현진은 소다수에 꽃힌 빨대를 빨았다. 까만 눈동자가
잠시 잘 세공된 유리컵을 향했다 다시금 상민을 올려본다. 조금은 뾰루퉁한 것같기도.
조금은 답답한것 같기도.
카페 cat's eye에선 일반적 카페의 왕도를 걷기 위해 전직 용병출신의 대머리 마스터
나, 바주카포와, 거대한 전투망치와, 친구의 여동생과, 신주쿠 역의 XYZ와, 발터 PPK
등은 전혀 연관 없다. 그저 조용히 연주되는 피아노가 연인들이 원하는 진지한 분위기
를 연출할뿐.
그렇지만 상민에게는 피아노 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뭐랄까. 찰랑이는 머리칼 밑으로 소근거리는 달콤한 목소리.
딱딱한 디자인의 교복이 아닌 캐주얼한 셔츠 밑으로 보이는 간헐적인 목뒤의 라인.
붉은 스트로우를 빨아들여 소다수를 넘기는 작고 붉은 입술.
'그러니까 누가 이녀석을 남자로 생각하겠어.'
물론 그런 취급을 정말 싫어하는것은 알고 있다.
어느때라면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 잘 단련된 가면과 같
은 자신이라지만, 감정이란건 스스로가 컨트롤 할수 있다 자신했을때 표면에 떠올라
버린다. 그리고, 들켜서,
미움받겠지.
창문을 열었다. 순간 어두 침침했던 창가의 자리로 눈이 부실정도의 햇살이 쏟아지고,
미적지근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와 얼굴을 때린다. 잠시 눈을 찡그렸던 그는 고개를
내밀어 휴일임을 과시하듯 쏟아져 도로를 메운 차들과, 색색으로 이동하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삭혔다.
암적응 현상때문에 같이 눈을 찌푸렸던 현진은 상민을 바라보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
했다. 잡담의 기본은, 이 이야기를 하다 전혀 상관없는, 그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야, 4반 신혜미 말야... 중학교때랑 몸매가 완전히 틀려졌던데? 가슴이 한 C컵은 될것
같은게..."
풉, 하고 음료수를 창밖에 내뿜었다. 아무래도 적응이 안된다. 저런 얼굴를 발갛게 상
기 시키며 느물느물한 아저씨 이야기를 한다는게. 창밖으로 오색의 오렌지 주스가 날아
올랐고, 그 사이로 무지개가 보였다. 상민은 잽싸게 창문을 닫고 늘 그렇듯이 주제를
돌렸다.
현진은 항상 되풀이 하듯이 상민을 쳐다보며 여자애들에게 관심좀 가지라고 권고했고,
상민은 늘 그렇듯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넌 참 인기는 많은데 말야..."
이 권고를 할때만은 꼭 벽에다 이야기 하는 기분이란 말야. 하며 현진은 따분한 눈초리
로 흑단같은 뒷머리를 만지작 거렸다. 그러다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진짜, 누군가 맘에 드는 사람은 없는거야?"
"글쎄."
반사적으로 상민은 입을 열었다. 뻔한 이야기. 뻔한 패턴. 현진이라는 녀석을 처음만난
12살 이후로 5년간이나 반복해온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십년간 이런 이야기가 있으면,
고 1에 177. 몸무게 71kg. 구김살 없이 자랐고 깨끗한 외모에 집도 잘사는 김상민이란
소년은 반드시,
"없어."
라고 이야기 해왔다.
그러니까 현진은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구슬자위같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분홍빛의 혀를 내놓고 30센치 쯤의 앉아 점프를 해 버린 것이다. 거의 공중 부양이라
해도 좋을 솜씨였다. 그리곤 테이블이 부서지도록 바로 상민의 코 앞까지 들이대고 그
애게 물었다.
"드디어 네녀석이 관심을 가진게 누구냐? 불어! 안불면 소꿉친구로서 네 비밀 101가지를
전부 폭로해 버리겠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상민은 잠시 눈길을 허공에 주시했다. 왜 이리 이녀석의 숨결
이 달게 느껴질까. 왜 이리도 시리게 가슴이 뛰어버릴까. 분명히 이 녀석은 사회학적인
"남자"가 맞았다. 그와 같은 교육을 받고 태어났고, 같은 사고관을 공식적으로 배웠으며,
그가 남몰래 야한 소설과 만화, 동영상으로 충분히 잘못된 성에 대한 선입견을 쌓았던것
처럼 그 녀석도 그럴것이다.
"네녀석, 그 발표 하려고 보자고 한거구나! 헷, 누구냐? 어디서 만났어? 어떤 매력을
느꼈냐?"
자신의 외모에 대해 피해 의식이 있어 접근하기 어려운 녀석이었고, 그때문인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는것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도 충분히 혼란스러웠던 때, 어설픈
위장으로 정체를 감춰야 했던 시기였으니까. 그렇지만, 가까워지고 난 뒤의 녀석은-
순수했고, 정이 많았으며... 자신을 정말 친구라고 생각해 주고 있었다.
현진에게 독점욕을 느낀건 언제였을까.
그러니까 말할수 없다.
상민은 한숨을 쉬었다. 호흡이 멈춰버리도록, 폐가 강렬한 고통을 느낄때까지 폐를 진공
상태로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 하려고 부른게 아냐."
"그럼 뭔데?"
"나, 오늘 이사가. 해외로. 그러니까 내일부터 못볼꺼야."
===
상민의 집은 2층 저택이였다. 2층이라고 해서 그저 그런건 아니다. 평당 억대라는
도심 노른자위 땅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저택인 것이다. 그럭저럭 큰 중소 기업의 젊은
전무로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족하지 않은 상민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여 주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집이었지만, 사실 제대로 생각이 있다면야 부자들만 입
주하는 타워 팰리스에 들어가는게 돈도 아끼고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뭐...
그런 특별한 공간에서는 개인적인 일들이 눈에 띄니까.
어느새 해는 저물어 밤이 되어 있었다. 도심에 켜진 나트륨등이 정상의 색상을 이리저리 이
지러뜨린다. 노란색의 빛에 노출된 모든것의 색은 이지러진 적색. 그리고 김상민은 그 색
에 취해 걸어 집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술에 취해.
식품위생법 규정은 음식점에서 술을 팔때는 항상 주민등록증을 검사해야 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지켜지는 규정도 아니고. 술을 마셔야 할 정도인 이들이 그리 쉽게 음주를 포기할
리도 없다. 겨우 키 177에, 고 1밖에 안된 이들이지만.
비틀 거리며 현관에 도달해서,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그리고 안에 들어갔다.
반쯤 모든것을 포기한듯 눈을 감고, 상민은 고개를 숙였다.
딸깍.
권총의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에 딱딱하고 차가운 권총의 감촉이 느껴
졌다. 뜨거운 이마에 느껴지는 차디찬 감촉. 그리고 미미한 화약냄새. 상민은 취기가 금
새 날아가 버리는것을 느꼈다. 등뒤로 식은 땀이 흘렀다. 그리고 더 차가운 목소리가 울
렸다.
"내일이 결행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김상민군."
바로 대답해야 했지만,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침을 넘기고서야 이야기 할수 있었다.
"잠시... 정리할것이 있었던것 뿐입니다."
"뭐... 그렇겠지."
그리고 남자는 권총손잡이로 김상민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강력한 충격에 상민의 고개가
돌아갔고, 찣어진 피부 사이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뇌가 흔들리는 고통에 그대로 엎드러
진 상민의 귓가로 그의 아버지 역이었던 이의 냉소가 토해졌다.
"반동 간나와의 접촉은 금하라고 지령이 오지 않았던가? 519연락소 에서 예의 주시 하고
있다! 국정원의 반혁명분자들이 탱자탱자 놀고 있는줄 알아? 남조선 정보사의 승냥이들이
냄새를 맡았다! 네놈이 제정신인가!"
몇번의 구타가 가해졌다. 복부에 억센 충격이 느껴진다. 김상민은 눈을 감았다.
남자 또한 매우 흥분해 있었다. 평상시의, 냉정함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던 아버지였다
면, 결행일에 같은 수행 공작원을 구타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첩 리철진이었던가? 택시 강도에게 공작금을 빼앗기는 어설픈 모습의 무장공비에게 비
웃음을 날리었지만 폐기당하는 마지막 모습 만큼은 별로 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폐기나 다름없는 임무 아래에선, 20년간의 성공적인 남조선 침투 임무로 공화국 영웅
호칭이 예정된 고위 공작원이나. 그의 아들 역으로서 6년간 대남 침투중이었던 풋내기나,
평상시의 모습이란건... 무리다...
김상민은 간신히 실눈을 뜨고 집안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모두 팔아 치워져
을씨년 스러웠다. 전부- 빼낼수 있을만큼 빼내어 다음 공작원을 위한 공작금이 되겠지.
사실 태반은 위대한 수령님의 뒷자금이 되겠지만.
간신히 흥분을 진정시킨 남자가 뒤돌아서서 이야기 했다.
"지혈하고, 얼마 남지 않았어도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도록. 내일 새벽 3시, 출발한다."
===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더니만.
아무리 잠을 이루려 애를 써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곰 인형을 닮은 잠옷은 충분히 따뜻했지만, 멍한 눈길로 바라 보는 시계는 마치 멈춘것만 같다.
침대에 편하게 몸을 뉘이고 고개를 돌려 충전중인 휴대폰을 바라보았지만-
반응 없이 멈추어진 휴대폰엔,
아무런 연락도 없다.
'뭐... 간다고 하면 가는거지.'
현진은 팔을 늘어뜨려 이마를 쓰다듬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11살 이후로 6년이나 함께했던 친구를 놓쳐버린 느낌.
또하나의 자신이 사라져 버린 느낌. 씁쓸하게 웃고는, 헤어졌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손바닥으로 눈자위를 쓰다듬었다.
11살 이후 떨어져 본적이 없는 유일한 "친구" 니까.
촉촉한 감촉을 느꼈지만, 우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안할 이유 따위가 없잖아.
내일부터 못보는것 아닐까? 그녀석이 떠나서, 날 잊는 것은 아닐까? 같은 이유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씩 웃으면서 보내주었다. 연락 할거지? 하고 말했다.
그리고 부들 부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집에 돌아왔다.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데로 내버려 두었다. 손으로 부벼 닦으며,
잠옷의 모자를 벗고 핸드폰을 부여 잡았다. 보지 않고도 누를수 있다. 통화 대기음이
계속해서 울렸지만,
그의 친구 김상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계속, 계속, 다시한번, 또 다시 한번.
폴더를 닫았다.
천천히 작은 아버지의 번호를 눌렀다. 사업상 바쁘신 작은 아버지도 하필 오늘 집을 비워
버려서, 좀더 크게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텅빈 집에 홀로 남아, 온기를 찾아 해메이는 기분.
그렇지만, 역시- 작은 아버지도 받지 않았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중요한 회의 중이신가...?
현진은, 조용히 곰 인형 같은 잠옷의 모자를 눌러쓰고 베게로 머리를 내리눌렀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
개인적인 취미 때문에 가지고 다닐 뿐이라고 말하던 모젤 권총이 또한번 불을 뿜었다.
원류는 독일군이었지만 일본군이 카피해서 써먹었고, 중국도 북한도 잘도 복사 해댄 덕에
반공 영화에서 나오는 북괴군 소좌 동무는 모젤 권총으로 인민군에게 돌격을 강요하곤 했다.
소련의 공산권 무기 지원 자체가 압수했던 독일군 무기로 생색내는 경우가 많기도 했지만.
이념의 손길이 닿은 선전영화가 다 그렇듯이, 재미는 부차문제였지만 어릴적에 본 이 신기한
모습의 권총은 소년의 로망으로서 존재하다, 한참 나이를 먹고서야 손에 넣을수 있게 된
물건이다. 공무원 박봉으로 무얼 하겠다고. 복제라면 금방 구했겠지만 그놈의 진품 집착이
일을 그렇게 늦게 만들었다.
그의 권총은 이북 대남 공작원 동무들에게서 노획한 진품이다.
총에 강선이 닳는다고, 실 사격도 몇번 하지 않고 신주단지마냥 들고 다니다 어쩔수 없이 꺼내
드는 기분이란 피가 꺼꾸로 솓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현대에 근접한 권총 답게 탄환은 허공을
가르며 그를 향해 사격중이던 무장 괴한의 후두부를 관통했다. 방아쇠를 건 상태로 총을 맞아
버린 공비가 흐느적 거리며 쓰러지며 AK74를 난사했다. 유탄이 이리저리 튀는 것이
총탄 한발 안맞는건 틀린건가, 하고 눈을 질끈 감게 했지만, 다행히 무사했다.
"개새끼!"
검은 양복안에 방탄조끼를 겹쳐입은 중년의 남자가 화풀이 삼아 두어발 더 시체에 쏘았다. 남
자의 복장과는 반대로, 쓰러진 시체는 EVERLAST가 쓰여진 티셔츠에 청바지라는 지극히 캐주얼
한 차림이라, 이북의 무장 공비라고 믿겨지지 않는 차림새였다.
"선배님! 무사하십니까!?"
같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전투용 권총을 쥐고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K1A 기관단총
을 쓰는 특전사 대원들과 함께였다. 기관단총의 연사음과 둔탁한 AK 계열의 총성. 비명과 욕설
, 폭발음과 발사광, 그리고 섬광과 줄기 줄기 솟는 핏줄기가 무장 공비들을 더이상 올려 보내지
못하게 하기 위한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무사하니 안하니 하기전에 애들 보내서 이 복도부터 틀어막아! 조카딸 냅두고 돌아가실뻔했다!"
"조카분 남자 아니었습니까?!"
"시끄럽다 임마!"
국정원 제 3처 소속 요원인 윤종현은 몸을 한껏 낮추고 악다구니를 질렀다. 눈먼 총알이 날아
다니는데, 방탄모도 없이 자신 까지 전투에 투입되야 하는 상황이 슬슬 질리고 있었다. 무슨 제
임스 본드에 쉬리라고 자신 같은 고위 공무원이 애장품 권총을 쏴야 한단 말인가. 자고로 고위
공무원은 아랫배나 두드리며 '그런 전투는 내 일 아닙니다.' 한마디 하면 되는것이다.
하지만 한창 시찰중의 연구소를 습격한 공비들은 그런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는다.
두두두두- 낮은 헬기 로터의 진동음과 함께, 인근 기지에서 차출된 특전사 요원들이 멋들어진
레펠링으로 7층의 연구소 진입을 시도했다. 제대로 된 침투 상식에 어긋나는, 거진 백여명 가까
운 공비들의 진입으로 연구소 자체 방어능력이 무너진 상황이었지만, 잘 훈련되고 손발이 맞는
특전사 대원들이 충원된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어두 컴컴한 밤하늘이 번쩍, 함과 동시에 RPG-7, 이북명 7호 발사관의 로켓탄두가
멋들어지게 날아올라 특전사의 귀하신 몸인 치누크 헬기를 직격했다. 국방부의 보급 담당자가
아니라 거기에 탄- 피눈물로 만들어진 특수부대원들이 파편에 맞고 걸레짝이 되었다. 천천히
기울어지며 건물에 걸쳐 거대한 폭굉을 일으켰다.
귀청이 떨어지는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무너질듯 몇번이고 덜덜 떨렸다. 몇군데에선가, 형광
등이 깨져 떨어진다.
"...블랙호크 다운이냐."
치누크는 블랙호크보다 더욱 큰 대형의 침투 헬기다.
그렇지만 윤종현은 소말리아의 평화 지원작전을 시행하다 미국 레인져 대원들이 물먹었던
실패담을 떠올렸다. 헬기까지 줄줄이 격추당하고.
당시 소말리아 민병에게 그런 기술을 가르친게, 이북의 공작원들이란 이야기가 있었던가. 윤종
현은 핸드폰이 충격으로 부서진 것도 깨닫지 못하고 방금 쏘아죽인 공비의 AK-74를 집어들었다.
전투는, 점점 더 급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블랙호크 보다 더 큰 수송헬기 치누크가 떨어져 버렸다고, 단숨에 점령 당한건 아니었다.
연구원들과 데이터, 그리고 탈취 목표가 있는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 복도를 두고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다. 함부로 몸을 드러내다간, 노리고 쏘는건지 그저 총알이 날지 않는
공간을 두지 않겠다는 건지 알수 없는 총화에 노출되어 나뒹굴 뿐이다. 그리고, 그저
지키면 전부인 특전사 대원들과는 달리 돌격해야 하는 공비들은 시체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있었다.
공격은 수비에 비해 불리하다. 옛 전술가는 이 비율이 3:1에 달한다고도 하였으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화력을 퍼부울수 있다는 현대전에서는 더더욱 극에 달한다.
잘 훈련되고 손발이 맞으며 숫적으로, 화력적으로 우세한 공격측이 완벽에 가까운 계획에
따라움직인다면 또 모를까, 공비들은 수를 빼고 전부 불리했다.
단지 누리고 있는 것은 기습이 이점이 너무나도 강력할뿐.
그들은 대부분 수년씩 암약하며 녹슬어간 고정 간첩이었다. 거사 직전 합류한 현역
전투 요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후방침투하는 이북 특수부대를 막기 위해
창설된 특전사다.
지금 보이는 특전사들이 한줌도 안된다지만, 조직력과 화력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길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전사가 무사히 인원이 증강되었다고 해도
공비와의 병력차이는 컸고, 무사히 병력 증강이 못한 지금 특전사와 국정원 요원들도 착실히
피해가 쌓이고 있었다.
에당초 이런 식의 무식한 소모전을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예상했다면-
"쩝. 모젤 권총말고도 개인적으로 캘리버 50 중기관총을 챙겨 오는건데 말이다."
윤종현은 달관한 표정으로 막 총탄이 떨어진 AK74 소총을 던져버리고 다시금 모젤 권총을
뽑아들었다. 독일 권총 매니아들을 위해 미국 업체에서 비싼 돈 주고 산 독일 규격 권총탄
이라며 애지중지 해왔지만 씁, 어쩔수 없지의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퇴직금과 연금
이 있으니 총알값은 목숨보다 쌌다.
"등에 메고 다니실순 없는 거잖습니까..."
"아니, 앞으로는 메고 라도 다닐까봐..."
양복 위에 20킬로 짜리 기관총 걸치면 꽤 볼만할거다. 느물느물한 중년 남자가 순식간에
해탈한 부처의 표정이 되어 있는 모습에. 강한 눈매를 가진 포니테일의 청년은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엄폐물에 기대어 K1 기관단총의 탄창을 갈았다.
윗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사이에 두고 각각 공방전을 벌였지만, 인원도 부족하고 총탄도 부족한
국정원과 특전사 팀의 페어는 아무래도 꿀린게 많아 천천히 연구소의 층을 내주며 위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7층의 마지노선.
엇박자로 몸을 드러낸 포니테일의 청년과 특전사 대원들이 피투성이로 기어올라오던 공작원
들을 쏴서 굴러떨어뜨리는 것으로 잠시 정적이 유지되었다.
중기관총이나 유탄 발사기 같은 중화기 없이 K3 경기관총 한정에 의지 한것 치고는
분명히 건투였지만-
남은 인원은 특전사 대원이 6명, 국정원 요원은 단 둘 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특전사 대원 셋은 옥상으로 올라가 혹시 모를 침입에 경계하며 연구소 내의 연구원들을
지키고 있었고, 윤종현을 빼고 여길 방문한 국정원 요원중에서 가장 고위직인 윤종현이 이름을
기억할 필요도 없던 신참.
차성준만 남았다.
적들도 그 우글 우글했던 인원에 비하면 손으로 헤아릴만큼 남을 정도로 대 피해를 보았지만.
사람이 죽어 넘어지는것도, 자리를 고수 하던것도, K3이 잘 발사되다가 잼에 걸려(K3은 탄피 걸
림과 작동불량이 잦다고 한다) 멎어버려 고소할테다, 대우정밀! 을 왜치며 후퇴하던것도 순식간
이던 질풍 같은 전투였지만, 좀전처럼 이쪽이 한발 쏘면 화끈하게 응답해 오던 공비들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차성준은 고개를 젖히고 조금 전부터 느끼던 의문을 물었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무얼 찾으려고 하는 걸까요?"
폐쇄적인 정보 업계, 특히나 국정원 같은데서 '질문'을 한다는건 두대 맞고 더 맞을 이야기였
지만, 그 업계에서 미친 녀석, 돌은 녀석 소리를 듣고 자란 윤종현은 그 명성에 걸맞게 해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몰라, 임마."
차성준이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지만 윤종현은 괜히 대북 문제를 다루는 제 3처의 기인(奇人)이라 불리지 않았다.
기인이라 불리우는 것은 맛이 간짓을 밥먹듯 저지르고도 무사히 승진 한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아는것만 71가지가 넘는다. 일일이 다 말하면 입이 얼얼해. 그렇지만..."
장발의 포니테일의 청년을 슬쩍 바라본 윤종현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연구소는 실제 연구
소라기 보다는 공표되면 곤란한 국가적 입수물을 보관해 놓는 곳이라는 것이 첫번째 기밀이였고,
나머지 70가지는 물건 목록이었다.
"중요한건 여기다 있으니까 걱정말라구."
전부 각 층에 분산되어 보관되 있었으며, 신중히 위장되어 있었고- 존재를 아는자는 제법 되었
지만 정확히 아는 자는 자신을 비롯한 관계자 몇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로 중요한 보호품들은 7층에 있다고 생각했다.
'설마 그자식들, 그것들 다 어디 숨겨놓았는지 다 알고 들어온건 아니겠지'
===
"빨리 빨리 해라! 시간 없어!"
얼마나 소리를 지른것인지 목소리는 음산할 정도로 쉬어 있었다.
귓볼을 총탄에 잃은것인지 남자의 귀 밑은 그저 피로 얼룩져 있다. 초조하게 시계와 복도 중
앙 계단을 겨눈 총구를 바라본다. 한때 아버지였던 남자를 김상민은 초췌한 모습으로, 그리고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어차피 일찍 끝내든, 끝내지 않던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일찍 죽던, 일찍 죽지 않던 그뿐이다. 다만 투항했다던가, 추태를 보였다는 이야기가 북녘의
수령님에게 들어가면, 가족도 같은 꼴이 된다는 것 왜엔.
중앙 벽의 기둥으로 위장 페인트가 칠해진 금고의 전자 자물쇠에 배선을 꼽고 PDA를 연결,
김상민은 휴대용 키보드를 연결한채 나는듯 암호 해독 알고리즘을 고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암호 해독,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남자는 마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시계를 바라보았다. 증원될 적은 특전사 만이 아니라 인근
육군 부대의 5분 대기조도 있었고,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특전사 1개 소대의 증원으로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던 시도가 실패한 후에야 인근 육군 부대에 협조 요청이 떴겠지만 이미 그 증
원부대가 달려올 10분은 지나있었다.
말이 5분이지 그 부대와 연구소의 거리는 미친듯 엑셀을 밟아도 10분은 됬으니까.
마지막 시도다. 하고 생각하며 상민은 그가 조합할수 있는 최선의 알고리즘으로 해독 프로그
램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 불꽃을 쥐어 짜는 듯 보이는 남자의 초조한 모습을 방관자 처럼
바라보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차피 살아 돌아가기는 다 틀린것 같습니다만..."
뭐야? 정신이 죄 썩어 문드러졌구만! 하는 소리와 함께 작전 직전에 침투했다는 베테랑 경보
여단 대원이 총구를 들이 대려 했지만,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눈을 감았던 상민이 눈을
떠 보니, '아버지'가 손을 뻗어 총을 걷어낸 것이다.
"왜 이럽네까? 저런 반혁명 정신은 수정이 필요합네다!"
젊은 경보여단 대원은 흥분해서 더 날뛰고 있었다. 바보같은 놈이 혁명 정신으로 고양된 사
기를 죽였다. 에미나이같은 약해 빠진 소리나 해서 남조선 혁명전쟁을 할수 있겠느냐.
소리를 지껄여 대며 마침내는 AK74의 실탄 삽입 레버를 당겼다.
사실은 이런 곳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도 못받고 죽는 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듯 보였지만.
그렇지만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런 반동의 처분보다는 당이 내린 지상 과업을 제대로 해치우는게 수령님에 대한 충성으로
보입니다만. 저 아이가 없으면 암호 해독은 어떻게 할겁니까...?"
대원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총구를 올렸다, 내렸다를 되풀이 하다. 한숨을 쉬고 이를 갈
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 김상민은 다시 말했다.
당연히, 조용히 있어야 했다. 그저 반성의 기미만을 보여야 했다. 그렇지만 욱 하는 감정과
함께 말이 튀어나왔다.
"저는 그냥 현실을 이야기 한것 뿐입니다. 제가 왜 반동입니까?"
순식간에 공화국에서 직접 파견된 대원이 고개를 돌려 총을 겨누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
히 진정시키고 이야기 했다.
"그게 바로 반동이다. 종간나새끼!"
아직까지 살아남은 고정 간첩 출신 공작원들이 그 대원에게 접근했지만 놓으라며 몸부림치자
어떻게 손을 쓰지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진정시켰지만,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바로 튀어나왔다.
"수령님이 어쩌건 내가 죽기 싫은데 어쩌란거야?!"
"고작 몇년만에 남조선 괴뢰 문화에 찌들어가지고, 문화어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주제
에 패배주의적 수정주의자가 된 놈이 수령님의 총폭탄인가? 괴뢰 반동새끼!"
방아쇠에 손가락이 들어가자마자 사태를 예의 주시하던 다른 공작원이 그를 밀치며 외쳤다.
"암호는 누가 해독하란 겁니까?!"
대원의 흥분에 다른 공작원들은 공감하지 못했다. 그것이 괴뢰문화에 물들어 수령님의 세뇌
가 풀려서일까. 죽음에 이러러 다들 냉정해 지지 못하기 때문일까. 상민은 그저- 비웃음을
짓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렸다.
기둥의 크기와, 금고의 크기에 비해 내용물은 초라할 정도였다. 어린애 돌반지 상자 크기
정도의 정 사각형 상자. 그리고 쌓여있는 몇장의 CD. 이것을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야 했던 것인가. 하는 감정에 다들 주춤거린다. 그리고 그 와중에 움직인 자는 전의 그
대원.
"아 새끼래... 열려버렸네?"
득의 만만한 미소로 총구를 상민에게 들이대었다. 상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먼저- 가는것 뿐이다.
그외에 다른 생각 해봤자, 살아나지 못할테니까.
이미 백여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옆에서 단체로 시체가 되는 광경을 보
았다. 단지 아쉬운것은 - 그녀석을 보고 가지 못하는 것일뿐.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경보 여단 대원이 쓰러졌다. 그를 쏜 남자는 귓볼을 총탄에 맞아 금
세 잃어버려 그 자리가 피에 얼룩져 있다.
순간 눈을 부릅 뜬 상민은 남자를 보고 그저 가식이라고 생각했던 한 마디를 뱉었다.
"...아... 버... 지.?"
다른 공작원들은 비교적 냉정하게 정수리를 관통당한 대원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민
의 말이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이 되서 까지 충성을 불태우고 싶지
는 않기 때문일까. 그리고 상민의 '아버지'는...
"...변덕일 뿐이다."
조용히 입을 열고 나는듯 금고에 달려들어 시디를 꺼냈다. 조용히 챙기는 것이 아니라, 아
카보총의 개머리 판으로 짗찣어 절대로 재생시킬수 없는 파편조각으로 만들어낸다. 다른
공작원들도 상자를 꺼내어 내용물을 열려 했다. 그렇지만, 상자는 마치 열릴 곳이 없는 것
마냥 무거운 금속성을 뽐내고 있었다. 다른 공작원이 총을 쏘았지만, 그저 도탄이 튀는
일 밖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개머리판으로도, 발길질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곤란함이 번져나간다. 그리고,
상민의 아버지가 달고 있던 무전기의 리시버로, 다급한 무전이 들어왔다. 무전이라기 보
다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발작에 가까웠다.
-괴뢰군 5분 대기조 도착! 교전 중!
AK 특유의 둔탁한 총성이 길게 울려퍼지고, 그것을 K2 소총의 경쾌한 소리로 뒤덥는다.
길게 이어지던 소리는 삽시간에 간헐적으로, 그리고 뚝 끊겨 버렸다.
"오... 온다!"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던 공작원들이 모두 냉정을 잃고 지도원인 상민의 '아버지'를 바라보
았다. 남자는 짓찣던 상자를 집어들었다. 잠시의 그 난동에도 불구하고 상자는 열리거나
부서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천천히 그 상자를 들어-
상민에게 넘겨주었다.
얼떨떨한 상민이 멍하게 상자를 바라보자, '아버지'는 조용히 등을 돌리고, AK 소총의 삽탄
레버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임무다. 그걸 가지고 도망쳐라. 그리고 파쇄해 버리던지,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해."
일찍 죽던, 일찍 죽지 않던 그뿐아니었어? 다만 투항했다던가, 추태를 보였다는 이야기가
북녘의 수령님에게 들어가면, 가족도 같은 꼴이 된다는 것 왜엔. 아무것도 없는거 아니었어?
수많은 의문과 질문을 담은 눈동자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남자는 그저 묵묵히 소총의 총열을 갈았다. 아직 적들이 남아있는 7층을 바라보며.
일순간 강한 동요가 살아남은 공작원들 사이에 울려퍼졌지만. 곧바로 진정되었다.
전부 남조선에 침투한지 십여년 이상의 고정 침투원들. 그중 상민은 가장 어렸다.
공작원들은 곧바로 총기를 손질하고 긴장을 끌어올렸다.
상민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 쳐 복도로 달려갔다.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살아남아라... 너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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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을 받는 연구소는 소란스러웠다. 활기라고 하면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일 테
지. 마스크와 장갑으로 완전 무장한 국정원내 처리 반원들이 묵묵히 핏자국을 지
우고, 공비들의 시체와 아군의 시체를 날랐다. 거대한 치누크 헬기의 잔해는 급거
동원된 기중기로 트레일러로 옮겨 실어지고 있었다.
추가 파견된 특전사 대원들을 주축으로 하는 추격부대가 탈주한 것으로 보이는 일
부 공비들을 찾아 출발한 가운데, 혹시나 있을 제 2의 습격에 대비- 정보기관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파견된 근방 육군 5분 대기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
다.
총탄 자국이 아직 군데 군데 남은 연구소였지만 몇군데 형광등을 갈아끼우고 환
하게 불을 밝혔다. 하루 4잔 이상 먹으면 안좋다는 커피를 3분만에 네잔을 들이키
고 윤종현은 사건 경과 보고서를 노트북으로 타이핑 했다.
급하게 출동한 다른 요원들 대부분은 현장 지휘에 열심이었지만, 남은 일부도
있어 윤종현 처럼 행정처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차성준은 대학때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다는 이유 하나로 인두를 빌려
윤종현의 핸드폰을 살려내고 있었다. 헤어 밴드로 홀랑 넘긴 이마 사이로 땀이
송글 송글 맺혀 떨어졌다.
무리다. 식품공학과 나왔다고 요리 잘하라는 이야기요, 철학과 나왔다고 칸트와
겨루라는 이야기다. 차성준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은 같은 동료를 잃은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장난기 섞인 목소리였다.
차성준은 바로 어제 전입한 신참이었으니까.
"선배님... 아무래도 이 기회에 새로 장만하시는게 도의적으로 옳을것 같습니다만..."
"시끄럽다."
각성이 지나치게 됬는지 시뻘건 혈관이 도드라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장난처럼 사
람이 죽어버려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국정원 3처의 종합대응부 요원 다섯
이 단 몇시간 전에 죽어버렸다. 전부 다 자기가 조카딸처럼 생각하는 조카애를
알았고, 자신이 정확히 왜 기인이라 불리게 됬는지를. 윤종현이 어떤 인간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다 알고 있던 이들이었다.
전날 알게 된 새파란 신참따위가 아니다. 윤종현은 슬퍼할 이유가 있었고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건 경과 보고를 쓰며 증폭되었다.
그렇지만 종현은 안색이 어두워진 신참, 차성준을 보고 혀를 찼다.
'하긴, 이자식은 내가 이야기하는 조카 딸이 사실은 아들인 줄도 모르지.'
모르는건 죄가 아니기에, 다시금 사람좋고 넉살 좋아보이는 영업용 미소를 뒤집어
썼다. 어쨌건 종현도 이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요원이다. 기이한 행동으로 땄을리
는 없는 것이다.
"아, 미안하다. 그거 조카 딸아이 한테 선물받은 거거든...? 내 역사적인 기념품
이지. 꼭 좀 부탁한다."
그리고 현진이는 나한테 연락하는 다른 번호는 몰라. 임마. 나 지금 혹시나 나없
는새 어떤 놈팽이가 현진이한테 수작부리는거 아닌지 겁이 무척 나고. 하는 다른
말은 꿀꺽 삼켰다.
"...예..."
차성준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헬기 로터 소리가 울렸다. 의아함과 아연실색의 기색이 퍼져나
갔고, 윤종현은 사색이 되어 창밖을 쳐다 보았다. 이북이 연관되었다는 사안이 사안
이니 만큼 간략한 보고가 지금 청와대에 올라가 높으신 "그분"이 내린
'이번 사건은 이북의 3세 수령의 입지도 불안해질만큼 통제 밖의 사건이었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준비중인 6자 회담에 악영향을 줄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비
밀로 하라' 라는 지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 하면 아직 정권을 제대로 못잡은 이북의 새 수령님이 지 부하
하나도 통제 못하는 병신인거 들키면 여러 모로 안좋고, 앞으로 평화 회담도 문제
생긴다는 뜻이다.
비싼 헬기가 격추에 수십명의 사망자를 냈는데도, 전역일이 얼마 남지않은 병장급
들이 다수 포함된 육군의 5분 대기조. 그러니까 130여명의 중대급 인원들이 부상자를
내가며 목격한 일을 없던 일로 만든다는건 보통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 내의 최소 인원과 지원 요원을 제외하고 비밀이 새어나간
일은 없었다.
"지금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중에 비밀이 새고있어! 하고 왜쳐야 하는건가?"
썰렁한 농담을 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양복을 고쳐 입은 윤종현은 그대로 문
을 부슬듯 연구소를 뛰쳐나갔고, 차성준과 다른 요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UH-60 블랙호크 헬기가 천천히 연구소 밖 잔디밭에 착륙했다. 새벽에 발사된 RPG-7
의 후폭풍에 의해 뜯겨나간 자국이 다시 한번 뭉그러졌다. 경계를 서던 육군 들이
잔뜩 긴장을 한체 총을 들어 올렸고, 그리고 그 앞에 선 윤종현 앞으로 선글라스를
낀 장년의 흑인이 내렸다.
적의 라기 보다는 혼란과 의문이 지배하고 있는 공기를 눈치챈 흑인 남자는 건장
한 체구의 몸을 잠시 비틀며 스트레칭을 하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잠시 손을 뒤로 내밀자, 단정한 용모의 백인 청년이 서류철을 꺼내어 넘겨주었다.
흑인남자는 그것을 내보이며, 그제야 무뚝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조금
어눌했지만 한국어였다.
"별로 안녕 못하시겠지만, 미스터 윤. 나는 CIA의 모스 요원이오. 지금 당장 연구
소의 1급 보관품중 이번에 강탈당한 넘버 58 번에 대한 수색의 협조를 원하오.
이건 귀국의 대통령이 서명한 명령서니 불만은 입닥치고 당신 대통령에게나 따지쇼."
===
조용하다기 보다는 정적이라 하는 편이 옳을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호쾌하다기 보다는 세밀하다고 해야 할 파스텔조 벽지의 방안 한구석에 자리한
고색 창연한 LP 턴테이블에 불이 들어왔다. 천천히 바늘이 판을 향해 다가갔고,
아무도 침해할수 없을것 같은 침묵 사이로- 상쾌한 음악이 귓가를 울리며 하루
를 열어낸다.
참고로 곡명은 Gonna Fly Now.
1976년, 실베스터 스탤론을 대스타로 만들어준 호쾌한 영화 '록키'의 주제가다.
"애드리언!"
이제야 간신히 가수면 상태에 빠져있던 윤현진은 뜻모를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설프게나마 스텝을 밟으며 허공에 팔을 허우적 대
는것이 필라델피아 출신의 복서 록키 발보아 흉내라도 내는듯 보였지만, 잘때
입는 곰인형 모양의 잠옷을 입고서는 귀여운 춤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곡이 도입부를 지나 마침내 째지는 보컬의 흉성이 시작 되자 마자, 그대로 스텝
이 꼬여 침대에 넘어졌다. 최근에는 실수 한 일이 없는 의식이었다.
최근은 한 3년 전부터였다.
"칫..."
현진은 반사적으로 펄럭 펄럭한, 조금 남는 잠옷을 바라보았다. 잠이 부족해서
일까. 아니면 이것 때문일까.
작은 아버지가 애타게 원해서 입는 천으로 된 곰인형 잠옷이었지만, 여전히 움직
이기 불편한건 마찬가지였다. 입은지 꽤 오래되긴 했지만.
귀엽긴 하다. 그런것 하나도 몰라! 하는건 솔직히 거짓말이다. 작은 아버지
에게서 받은 선물 이기도 하고.
하지만 ...남자잖아.
록키를 보며 사나이의 로망을 다지고, 애드리언을 보며 얼굴을 붉혔던, 똑같은
남자. 그런의미에서 코브라는 어이가 없었고, 람보는 별로였으며, 데몰리션맨은
쬐끔 마음에 들었다.
윤현진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단걸 깨달았다.
"그럴... 만도 하지."
다들,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본질과는 다른 취급을 했다. 작은 아버지는 머리칼
을 기르는 것을 원했고, 여성스러운 취미를 갇는 것을 원했으며,
아예 수술을 하고 새 인생을 살라는 이야기는 진지하고 끈질기게, 귀에 못이 박
히도록 들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턱없이 희귀했던, 자신을 제대로 된 사나이로 취급해 주던 친구는 이제
없었다. 그아이만은 달랐고,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시 오더라도 언제쯤 다시 볼수 있을까.
그대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모자를 뒤로 넘겼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쓰다듬고,
밍기적 밍기적 방을 나와 거실의 세면장을 향했다.
찬 물을 틀어 정신이 확 돌아오는 세수를 해야 한다고 틀었지만, 결국 뜨거운
물을 부어서 미지근한 물을 받아 얼굴에 부빈다. 역시, 잠이 부족했는지 눈자
위가 무거웠다. 눈을 감고 뜨는게 무척이나 어려웠다. 허리를 구부리고 다시 활
처럼 펴는것이 상반신의 무게 때문인지 어려웠다.
무언가, 이상했다.
제대로 눈을 뜨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대로 시린 찬물을 받아서 몇차례나 세
수를 했다. 여유 만만하게,
'그냥 잠이 부족해서 일거야'
하고 몇차례나 세수를 반복하는데도 느껴진 위화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이 부족하면 붓기도 하는거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손이 무슨 수전증이라도 걸렸는지
몇번이고 비누를 놓쳤다. .
팔꿈치 사이로 닿는 가슴은, 붓기라도 했는지 약간 도드라진 느낌.
세수를 다시 한번 하려는 생각이었는지 급하게 움직인 팔에 부딪힌 칫솔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천천히- 몇 차례로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Gonna Fly Now가 끝나 버리고,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정적을 틈타 윤현진은 등뒤로 손을 넣어 곰인형 모양의 잠옷을 가까스로 벗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백옥같은 나신을 보고 뒤로 넘어갔다.
===
윤현진은,
'소녀'
가 되어있었다.
두번째.
눈을 감았다 깨어났다. 괴리감. 왜? 빛이 더 강해진것에 대한 괴리감. 손을 들어 손목시계
를본다. 3분이 더 지났군. 입가를 문질렀다. 거의 말라붙은 피딱지가 느껴졌지만, 그 밑으
로 미세한 수분이 느껴졌다. 침.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졸은 모양이다.
꿈을 꿨다. 기분 좋았었지. 잘은 생각 안나지만...
내가 미쳤구나.
자학할 여유도 없이 김상민은 굴러 떨어지듯 들어와 숨어있던 산속 무덤 근처의 굴에서 손을
내밀었다. 침을 닦은 그 손이다. 한손으로 어렵게 바른편 주머니에 들어있던 거울을 꺼냈다.
거울로 주변을 살피려는 것이다.
반사광이 들키면 그대로 죽는거지만, 머리를 내미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쪽이 훨씬 눈에 띄
의니까. 거의 러시안 룰렛을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내민 거울 주위로는 다행이랄까,
아무도 눈에 띄의지 않았다.
상민은 조금쯤 한숨을 내쉬며 무덤 밖으로 나가는 출구인 좁다란 구렁에서 몸을 뉘였다. 의
외로 남반부에서는 확실한 대응을 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분명 추격자들이 있었던 것도,
그리고 삼십분 전까지 쫓기고 있던건 확실하지만 96년의 대 실패였던 강릉 사건 마냥
대 병력의 동원도, 물샐틈 없는 경계 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후우..."
소년은 그저 얼굴을 문질렀다. 미리 현지 침투했던 공작원들이 경계용으로 파놓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 속에 몸을 숨기는데는 성공했지만, 이후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
각나지 않았다. 무얼 어째야 하지? 북으로 도망치나? 일본으로 밀항할까?
타락한 남조선에 장기 침투하여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올라, 2차 남조선 해방 전쟁이 시작될
때 숨겨진 체스말로 기동한다. 수령님을 위하여!
그렇게 배웠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와서는 믿길 이유가 없었다.
17살이 되어 내린 결론은 그냥 해방 전쟁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전의
수령님 후보였던 2대 장군님의 첫째 아들에게 줄을 대고 있다 첫째 아들이 숙청당하고, 둘
째 아들이 3대 수령님이 되면서 그간의 성과는 전부 집어 치우고 이런 임무나 맡았다.
아버지였던 사람은... 몇년 내로 공화국 영웅칭호가 내려질 거라 할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었는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도망 치라고. 대강 도망치는데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3분간 꾼 꿈이 기억났다. 소녀가 보였다. 자신은 어둠속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만 소녀만큼은 밝은 흰 빛에 휩싸여 있었다. 빛에 휩싸여 찬란하게 다가 오고 있었다.
흙과 풀냄새 사이로 맡아진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상큼한 향기와 함께 도톰한 입술을 내밀며
소녀가 고개를 들이대고 있었다.
윤현진이었다.
"흐... 으핫... 으핫핫.."
소년은 고개를 억누르고 짓눌린 웃음을 내뱉었다. 망상이 더 심해진것 같다. 말도 안돼잖나.
같이 목욕탕도 다닌 사이인데. 그렇게 가슴속에 고인 음습함을 죽지 않을 정도만 뽑아내자
이때껏 자신이 한 손만 쓰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손가락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닫고 힘을
풀었다.
검은색의 상자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그것을 집어 비트 안에서 찾아낸 배낭에 담았다. 어쨌건 첫번째로 무얼 해야 할지
는 깨달았다. 그리고 아직은 돌파할 여유가 있을것이다. 칠팔십년대 반공 동화도 아니고
소년 간첩 따위는 빈약한 국방군의 상상력 안에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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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볓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썰렁한 애들 동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화창한 날이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거북이 승용
차들의 정체나, 그 옆을 바람처럼 가로지르는 버스 전용차선의 버스에게 오늘은 화창하니
까 활기차게 살아보아요, 해봐야 전혀 먹히지 않겠지만.
윤현진 역시 활기차게 살기는 글러있었다.
-전국구 칼잡이에게 복대는 기본이지!
하는 환청을 집에서 걸어나와 버스를 타고 부터 쭈---욱 계속 듣고 있었다. 우리의 영원한
영웅, 시대의 남아, 남아의 혼, 개나리 형님의 혼이 씌웠기 때문이란건 역시 말도 안돼겠
지. 사실 현진은 복대에 대한 심오한 고찰중이었다.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 부하가 장동건에게 하듯 분노의 회칼질 17연참을 받은것도 아니었지
만, 가슴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스스로는 그동안 보아온 애니메이션등을 참조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은거라 생각했지만, 솔직히 말해 아픈데다- 갑갑하기로는 미칠 지경이라
복대는 기본- 운운한 김모 작가가 직접 복대를 차보고 그런 소리를 한것인지 의심스럽다.
버스가 덜컹 거렸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크게 휘청, 윤현진 또한 흔들렸고 아플정도로
동여맨 붕대가 무색하게 요동했다. 견디기 힘들만큼 공포감이 찾아왔고, 곧이어 기이한 기
분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보통 성별 트랜스 개그물, 그것도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다들 잘도 충격을 이
겨내고 자기 몸에 신기해 하는 성희롱 개그가 펼쳐지겠지만, 17년간 같이 살아온 신체 부
위가 없다는것에 제정신을 유지할 사람이, 아무런 낌새도, 기억도 존재 하지 않는데도 변
화가 일어났는데- 겁을 안먹을까 보냐.
그때였다, 누군가 현진의 엉덩이를 꼬집었다.
여성적인 옷 위주로 옷을 사들인 작은 아버지 덕에 평범하게 다닐때야 혹시 모른다지만,
분명히 남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중인데도 손을 내밀다니, 용자라기 이전에 한국
내에서 성적 소수자로서의 탄압을 제대로 못받아본 인물이 분명했다.
현진은 으흐흐, 하는 침음소를 흘리고 주머니를 뒤져 징이 박힌 글러브를 꼈다.
보통 사람들이 잔인해 질때는 어느정도 공포감에 압박당할때다.
죽여버리겠어죽여버리겠어갈아버려주마너오늘제삿날이다이자식-
뒤를 돌아보며 냉정한척 한방을 날리려 했지만-
쿨한 감색의 정장을 입은 장신의 미인이 흘러내리는 안경을 올리며 현진을 바라보았다.
이 분이 누구 시더라. 아, 우리학교 선생님이었지. 그러고 보니... 우리 담임이었던가.
좀더 흥분을 삮히고 사태를 파악하자 버스는 어느새 멈추어 출구를 열고 있었다. 목적지인
학교 정문이 보이고, 늦을새라 뛰는 녀석들, 복장불량으로 기합받고 있는 다른 학생들이
보였다.
"뭐해? 내려야지."
"아, 예..."
냉막한 목소리에 하얗게 질려 주춤 주춤, 움직여 버스를 내렸다.
학교는, 언제나처럼 그모습 그대로다. 스스로는 미쳐버릴 정도로 달라져 버렸는데도.
그렇지만 공포감이 조금 줄었다. 대신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나는듯이 교문을 통과해
교실로 달려나갔다. 현진의 지금 페이스라면 이봉주를 능가할 마라토너가 되리라.
마치 그곳에 가면 구원이 있는것 마냥.
언제까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인물이 있는 것 마냥.
여선생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올렸다. 아까 그 남학생의 엉덩이를 꼬집은 손
이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남자라. 그녀는 남자라는 생물을 생물학적부터 정신적으로
싫어했고 스킨쉽 따위는 어지간하면 피해왔다. 그녀가 마음을 여는 것은 같은 여성들
뿐이었고, 윤현진이라는 학생이 놀라운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고 해도 이때까지는 그뿐
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아이에게 손을 대고 싶었을까.
1학년 4반의 여교사 차세진은 오늘은 무척 흥미로운 날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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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리소문 없이 군대 갔던 사도군입니다. ...휴가 나와서 할건 역시 쓰는것
외에 없더군요. 없는 실력이 아주 가루가 되서(;;) 그나저나 엉망인데; 혹시 어떻게 고쳐야
제대로 고치는건지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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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el eleicia님의 댓글
Ciel eleicia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역시.. 대단하십니다!! 크워웕!!
다 읽느라 고생했는데..
선물은..=ㅁ=??[퍼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