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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Love - 그 두 번째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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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눈을 뜨니 난 항상 울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다. 이젠 슬픈 건지 아닌 것인지 조차 모르겠다. 눈물과 함께 나의 가슴 한 구석에 있던 감정은 사라진 것 같았다.

“얘야 이제 일어나야지.”

  이불 속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나를 부른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요즘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항상 내 얼굴을 바라본다. 매일 자고 나면 붉게 물들어져 있는 눈동자. 이젠 익숙해질 때가 되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나보다. 거울속의 내 모습에 피식 웃은 후 간단하게 닦고 거실로 내려갔다.

  부엌에서 아침준비를 하시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뒤에서 살며시 껴안았다. 그런 내 행동에 어머니는 하시던 아침을 계속 하시고 계셨다. 역시 어머니는 어머니인가보다.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TV를 틀었다. 매일 아침마다 나오는 뉴스. 항상 똑같은 사람이 나와서 매일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에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켜놓는 이유는 시계 때문이랄까?

“접시하고 이런 것들 좀 식탁에 놓으렴.”

  세척기 안에 있던 식기들을 식탁에 한 개씩 올려놓았다. 그러다 언제나 핑크색의 접시에 손이 갔다. 그녀의 접시. 그랬다. 그때 이후로 매일 아침 이 집으로 와서 아침을 같이 먹었던 그녀.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것을 난 매일 아침마다 잊다시피 한다. 매일 눈을 뜨기 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인가. 어느새 그녀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듯 미묘한 쟈스민향의 바람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상념이 깨졌다.

  어머니는 살짝 익힌 베이컨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식탁 위에 놓으셨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으셨다.

“뭐하니? 얼른 따뜻할 때 먹어야지.”

  어머니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난 얼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왼쪽에서 느껴지는 사늘한 한기. 어머니도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셨지만 이내 아니라는 듯 식탁 위에 놓여진 샌드위치를 자신의 접시에 올려놓으셨다. 나도 먹을 것에는 욕심이 많았기에 얼른 샌드위치 하나를 접시에 올려놓았다.

“아직도 생각하니?”

“네?”

  어머니는 우유를 한잔 드신 후 다시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해나 말이다.”

  그 물음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샌드위치를 먹었을 뿐이었다.

“이미 떠난지 7년이 지나간다. 그런데 아직도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하니?”

  모르겠다. 정리했다면 정리한 듯, 아니면 아닌 듯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미 그녀를 내 손으로 이 세상에서 보낸지 7년이 지나갔지만, 어째서 아침에 눈을 뜨기 전 그녀의 모습이 내 앞에 있는 것은 왜일까. 어머니를 쳐다보니 어머니는 아침을 다 드셨는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계셨다.

“그래. 알았다.”

  어머니의 눈동자와 마주친 후, 어머니가 알았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아아. 그랬다. 어머니 또한 아직까지 그녀를 기억하고 계시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졌다.

“다음주에는 그곳에 가봐야 되지 않겠니?”

  그 말에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그렇게 된 것일까.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7년이 되는 날이. 그리고 내 눈동자가 아침마다 붉게 변한지도. 하루하루가 매우 평범하게 지나갔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는 잊기 위해 다른 일에도 매달렸었지만, 그 일이 끝나면 항상 그녀가 내 눈앞에 있었다. 이젠 익숙해 졌지만.

“이제 나가봐야 되지 않겠니? 얼른 나갈 준비하렴.”

  고개를 끄덕인 후 얼른 남아있던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중간에 목에 걸려 우유를 마셨지만.

  2층의 내 방으로 올라와서 입고 있던 흰색 반팔티를 벗었다. 그때 이후 나의 어깨에 남아있는 다섯줄의 흉터. 그 흉터를 살짝 쓰다듬었다. 벌써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통이 느껴지는 흉터. 옷이나 짐을 멜 때는 아픔이 없었지만 누군가가 손을 대면 고통이 느껴졌었다.

  가벼운 정장으로 차려입은 후 현관으로 나왔다. 오늘은 어머니도 어딘가에 나가시는지 예복을 차려입으셨다.

“오늘 어디 나가세요?”

  어머니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직장에 데려다 주고 잠시 들를 곳이 있단다.”

  고개를 끄덕인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보이는 건 그녀가 키웠던 화단. 생각해 보니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자취는 항상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시계까지도. 그녀는 이 세상에서 떠났다. 내 손을 잡고서.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작은 꽃 하나하나가 그녀의 손길에 닿았던 것. 문 앞에 휘어진 우체통은 그녀가 일으킨 작은 사고로 휘어졌던 것. 집안의 물건. 아니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그녀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신지야! 늦겠다. 얼른 차에 타렴”

  대문 앞에 어느새 차를 가지고 나오신 어머니가 부르자 대답을 하고 차에 탔다. 이렇게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상념을 가진 채 평범한 하루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주가 그녀의 기일(忌日)이다.


<First Love - 그 두 번째 첫사랑.>


  공항에 도착하니 해나의 부모님께서 먼저 자리를 잡고 계셨다. 나는 두 분께 가서 인사를 드렸다. 7년 전 모습 그대로이신 해나의 부모님. 해나의 아버지는 나의 손을 꼭 잡으셨다.

“신지군. 올해도 이렇게 못난 딸아이를 위해 같이 가줘서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요.”

  7년 전, 그 이후로 매년 해나의 부모님은 그녀의 기일에 맞추기 위해 공항에서 만나면 이런 모습을 보여 오셨다. 이것이 부모님이라는 것일까.

  어머니도 해나의 부모님과 인사를 하셨다.

[KAL기 604편 노르웨이 오슬로 행 비행기에 탑승하실 손님께서는 4번 게이트로 탑승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울리고 나와 어머니, 그리고 해나의 부모님은 4번 게이트를 향했다. 4번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한 소녀가 내 앞에 끼어들더니 먼저 출국검사를 받고는 게이트를 통과하였다. 그리고 소녀는 뒤를 돌아보더니 나를 향해 살짝 웃고는 출국심사대로 가버렸다. 허탈한 느낌이 들었지만 뭔가 익숙한 느낌이 났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을 하였다. 어째서인지 해나의 부모님과 어머니는 같이 가운데 좌석에 앉게 되었지만 나는 홀로 창가 쪽에 앉게 되었다. 그리고 괜히 옆에는 누가 앉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예쁜 여자일까. 아니면 아저씨일까. 라는 둥의 생각을. 그리고 그 모든 생각은 내 옆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스튜어디스가 간단히 안내방송을 하였지만 이젠 익숙해진 비행기였기에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이제 조금 있으면 비행기가 이륙 할 텐데 옆자리의 사람은 없는 것일까. 비행기의 도어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잠깐!”

  그리고 터널 내에서 울려오는 외침. 나는 고개를 돌려 도어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닫히기 직전의 도어를 밀고 들어왔다. 대단한걸. 난 그 대단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라? 아까 날 밀치고 먼저 들어왔던 여자애잖아?

  소녀는 스튜어디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한 후, 자신의 자리를 찾는지 그 자리에서 두리번거렸다. 설마 이 빈 자리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은 곧 무참히 깨지고 소녀는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에휴.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내 생각을 끈 채 창 밖을 쳐다보았다. 서서히 움직이는 비행기. 매번 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과학이란 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 원리를 알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겠지만.

  기장의 목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이륙을 하였다. 옆에서 해나의 부모님과 어머니께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계셨다. 옆에 주의가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렸을 적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는 창밖의 구름이 매우 신기했었지만, 이젠 어리지도 않고 많이 보았기에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저씨.”

  아저씨라는 듣기 굉장히 불쾌한 소리가 내 옆자리에서 들려왔다. 난 그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고, 그 주인공은 살짝 웃고 있었다. 하긴. 저 나이에서 본다면 난 아저씨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여자아이는 살짝 웃었다. 내가 웃긴가? 하지만 익숙하다.

“어디까지 가세요? 전 베르겐까지 가는데.”

“그래? 이 오빠도 베르겐까지 가는데. 가는 곳이 같구나.”

  어차피 노르웨이 하면 베르겐 생각하게 돼 있으니 별 놀라움은 없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느껴지는 익숙함. 그것은 무엇일까. 난 이 여자애를 처음 보는데. 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이런 느낌은 한두번이 아니니깐.

“흐음. 그렇군요. 근데 왜요?”

  ‘왜요는 일본노래란다.’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분명히 ‘아저씨개그네’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었고.

“개인적인 일이라 말해줄 수 없구나.”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는 없었다. 노르웨이까지는 한참이 걸리기에 앞 의자 트렁크에서 안대를 꺼내어 얼굴에 썼다. 앞으로 9시간. 그동안 푹 잠이나 자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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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가야해.”

  점점 밝아지고 있는 해나의 얼굴이 보였다. 살아있기 위해 밝아지는 얼굴이 아닌 죽기전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려고 하는 얼굴이. 그래.

“나 혼자 남겨두고서?”

  나는 이때 최대한 밝게 웃어주었지.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앞에서는 울 수 없다는 쓸데없는 의무감에 웃고 있었다. 뭐. 그래도 울었지만.

“신지. 내 부탁 두개만 들어줄래? 그럼 내가 선물을 줄게.”

  마치 어린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는듯한 그녀의 말투. 하지만 점점 차가워지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었다. 근데 그녀의 그때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지. 난 그녀의 부탁을 뭐든지 들어줄 수가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일단 가까이 와줘.”

  그녀의 차가운 입김이 내 피부에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었지.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내가 죽으면 말이야. 날 산의 바람과 바다의 바람이 만나는 곳에다가 보내줘. 꼭 말이지.”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었지. ‘응’이라고.

“응.”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입이 떨어졌다.

“그리고 말이야. 내 입술에 키스 해줘.”

  그때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었다. 소설 속 에서나 그런 줄로만 알았었는데. 하지만 이생에서의 마지막 키스라는 것에 나는 그 의미를 두었었다. 그리고 내 생애 두 번째 키스를 하였었다. 긴 시간동안의 키스. 내 인생에서의 소중한 첫사랑과의 마지막 키스였기에, 난 더더욱 내 영혼의 모든 것을 그 잠시 동안의 긴 시간에 쏟아 부었었지.

  해나의 입술에 내 입술에서 떨어지고, 난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었다. 점점 눈이 감기려고 하는 그녀의 눈꺼풀. 하지만 해나는 한마디의 말을 나에게 하려고 하였었다.

“신지. 그리고 선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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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이거 알아? 노르웨이는 여름에는 해가 안진데.”

“백야(白夜) 말하는 거야?”

  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이건 기말고사 끝나는 날 저녁,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이야기잖아?

“응. 7월 달에는 해가 안진데. 하아. 한번 가보고 싶어라.”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었지. ‘가보고 싶어?’

“가보고 싶어?”

  여기서 해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살짝 붉으스름한 얼굴로 말이지. 여기서 나중에 그녀가 말해줬었지. 나하고 함께 백야를 보러가고 싶다고. 흰색의 드레스를 입고서.

“흐음. 그럼 가게 해줘야지. 해나가 원한다는데. 할아버지한테 조금 뜯고, 엄마한테도 조금 달라고 하고, 그리고 알바해서 모은 것도 있으니깐. 여권도 준비해야하고, 또 뭐가 있더라. 그리고…….”

  정말로 저랬었지. 결국 그 다음날 할아버지한테 가서 자금을 조달받고, 엄마한테는 무지하게 맞으면서 받아냈으니. 정말 그땐 너무 어렸어. 내가 생각해도 말이지. 하지만 가장 즐거웠었어. 그녀를 위해서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해주지 못했었지만. 그날의 사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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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또 어디지? 수학여행 갔을 때구나. 그때 지리산에 갔었는데. 한밤중에 해나가 내가 자고 있는 방에 쳐들어와서는 갑자기 끌고 나갔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남정네들만 몰려 자는 방에 여자 혼자 쳐들어와서는 말이지.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그것들은 너무나 아름다웠어. 달밤에 피고 있는 푸른 수국.

“있잖아.”

  해나의 얼굴이 붉어졌었다. 그랬지. 여기서 내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키스를 한 곳. 처음에는 그녀가 나에게 대쉬를 하려고 하였지만 내가 남자가 먼저 해야 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젖어버려 내가 그녀에게 대쉬를 했었지.

“응?”

  이땐 나도 해나와 친하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으니.

“그러니깐. 저기.”  어라라? 점점 해나의 얼굴이 붉어지네. 저땐 정말로 저랬었나?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 내가 이렇게 말했었지. 무드도 없게시리. ‘할말 없으면 돌아갈게.’

“할말 없으면 그만 돌아간다.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이후는 뭐, 당연한 거였겠지만 일어나려는 내 손을 해나가 붙잡았지.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얼른 그녀의 손에서 빼낼려고 했는데 해나가 꽉 쥐고 있었으니.

“뭐. 뭐야!”

  그때 정말로 좋았기도, 부끄럽기도 했었어. 고등학교 때라서 그런 건가.

“저기 말이야. 나 할말이 있어.”

  대충 그녀의 마음을 눈치를 챘었지만, 그래도 난 그때까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었지. 친한 이성친구랄까. 그정도였어. 암암리에 학교 내에서는 커플로 인정되기도 하였지만. 그리고 당시의 로맨스 영화와 연애소설, 만화 등. 괜히 그런 것에 물들여 있어서 남자로서의 의무감이니 뭐니에 빠져 멋모르고 해나의 어깨를 잡았지. 그리고 붉어지는 해나의 얼굴을 보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고. 의무감 덕분이랄까.

“해나야. 혹시 말이지.”

  해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지. 흠. 그림도 되네.

“설마 나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거 아니지?”

  사실 반 장난, 반 진담으로 그 이야기를 꺼냈긴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다니. 정말 그때는 놀라기도 했었지. 근데 거참 놀랄 것도 많긴 많았다. 아니. 별거 아닌 것에도 놀라버린 거북이가슴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그녀의 고개가 끄덕이는 것을 보고나서 잠시 동안 마음을 다스린 나는 남자로서의 의무감을 가지고 오히려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버렸다.

“해나야. 나 너 사랑한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뭐. 그때 가장 멋있다고 생각한 말이 이 말 이지만 정말 멋대가리도 없긴 했다. 나중에 그녀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신지야. 사실 말이지. 그때 네가 나한테 고백 했을 때 사실은 네 말보다 주위 배경덕분에 더 멋있었다. 너도 좋아했지만 말이야. 그때 주위에 펼쳐진 수국하고 그 수국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보름달과 그 사이에서 나한테 고백하는 너의 모습이 너무 멋있더라고.’

  결국 한동안 그 말 때문에 토라져 있었지만.

  그리고 그 고백 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무드있게 첫 키스를 했지. 소설에서 읽었던 것과는 다르더라고. 마쉬멜로우 라던지 레몬맛 이라던지 그런 것이 아닌, ‘그녀의 맛’이었지. 그 날 이후 아이들에게는 공식적인 커플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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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신지. 여기 쳐다보렴.”

  교복을 보니 중학교 입학식 날이군. 나 혼자 따로 떨어진 학군이 되어서 친했던 아이들과는 반대방향의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지. 입학식 때 친한 아이들 하나 없이 어머니하고만 둘이서 찍던 사진은 아직도 있는데. 그리고 그날 1학년 4반으로 반 배정을 받고는 교실로 들어가서 창가 맨 끝 자리에 앉았지.

“야! 너도 이 학교야?”

“창렬이는 어디로 배정됐냐”

  같은 국민학교에서 같은 중학교로 온 아이들은 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하였고,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대로,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모여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당시의 나는 어디에도 낄 수가 없었어. 하지만 그런 나에게 손을 처음 내밀었던 아이가 해나. 그녀였다.

“넌?”

  처음 본 해나는 예뻤다. 하지만 그 예뻤다는 말이었을 뿐이었다. 그리 마음에 오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에.

“난 은해나. 너는?”

“난 한신지.”

  내 이름을 처음 듣는 아이들은 다 이렇게 말한다. 한신지 두신지 라는 농담을. 지금 만나는 애들도 가끔 그런 농담을 하긴 하지만 그냥 넘겨버렸지만. 하지만 해나는 달랐다.

“신지라. 이름 예쁘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처음이었다. 이름을 가지고 놀리지 않은 아이가. 그때부터 마음속에 호감은 있었지만 사랑할 정도는 아니었지. 친한 친구랄까. 그정도로.

  그리고 해나와는 중학교 3년간 같은 반을 지내게 되었다. 그동안 같이 반장도 해 보았었고, 매년 학예회 준비할 때는 항상 밤늦게 까지 함께 남아서 여러 가지를 준비도 했었다. 그러다 학교에서 밤을 새워서 해나의 부모님과 어머니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지만. 그리고 해나와는 고등학교의 1학년 또한 같은 학교로 진학해서 같은 반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렇게 보면 이런게 운명이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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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매일 잠을 잘 때 마다 꾸는 그녀와의 이야기.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달랐다.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근데 왜 자꾸 오른쪽 어깨가 아프지? 어라? 얘가 내 어깨를 기대고 자네. 근데 혼자 왔나? 이렇게 어린 애가 외국에 혼자 오기엔 조금 그런데.

“야. 일어나렴.”

  옆에 있는 아이를 흔들면서 깨웠다. 여자아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고 이내 나를 보더니 살짝 웃었다. 아까부터 날 보면 웃던데, 내가 그렇게 웃긴가? 마치 해나가 날 보면 웃는 듯이 말이지.

[지금 KAL기 604편 노르웨이 오슬로 행 비행기가 착륙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기장의 안내인사 소리를 들으면서 허리띠를 풀렀다. 해나의 부모님하고 어머니는 이미 일어나서 출구로 나가고 계셨다. 근데 왜 이 애는 나가질 않고 앉아 있는 거야. 이거 비키라고 하면 어른으로서 조금 그렇고 말이야. 그리고 계속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웃기도 하고.

‘여전하네. 신지.’

  ? 여전하네? 신지? 라고? 지금 이 애가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한건지.

“야. 너 혹시 무슨 말을 했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들은 거겠지. 어떻게 이 애가 내 이름을 알 수가 있겠어. 후우. 비행기를 오래 타면 이런다니깐.

“얘! 신지. 뭐하니! 얼른 내리렴.”

  문 앞에서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생각할 동안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터널을 통해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입국심사를 다 한 후 나와 어머니, 그리고 해나의 부모님은 택시를 잡아서 오슬로 역을 향해 갔다. 역에 도착하여 베르겐 행 기차표를 샀다. 이젠 익숙해지련만 매년 그녀를 만나러 갈 때 마다 내 가슴은 언제나 떨렸다. 기차에 오르면서 나는 조금은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아까 비행기에서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 그 아이도 베르겐에 간다고 하였으니 이 기차를 타겠구나. 근데 어째 점점 내 쪽으로 온다. 어이! 손까지 왜 흔들고는 뛰어와.

“아저씨!”

  순간 불끈 쥐어진 주먹과 함께 십자 마크가 내 이마에 새겨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까도 그랬지’ 라는 생각과 함께 그냥 모른 척 무시하였다. 하지만 아이는 내 손을 잡고야 말았다.

“얘. 이 아이는?”

  해나의 부모님과 어머니는 나에게 ‘?’마크의 얼굴을 하였고,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아이는 한술 더 떴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까 이 아저씨랑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서요. 엄마 만나러 베르겐에 가는데 이 아저씨도 베르겐에 가시다고 해서요. 혼자서는 외롭고, 여리디 어린 소녀가 외국 한 복판에 놓을 순 없잖아요? 그래서 이 아저씨가 ‘너가 괜찮다면 같이 가주마’라고 하셔서요. 근데 공항에서 아저씨가 택시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 얼른 택시를 잡아서 쫓아왔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굳게 잡으셨다.

“신지야. 네가 이 아이를 보살펴 주거라.”

  어머니에게 굳게 잡힌 손과 눈동자를 보고서는 어떠한 말도 통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gg를 내 마음 속에 눌러버렸다. 결국 이 아이 또한 우리가 타고 있던 칸에 동승하게 되었다. 검표원이 와서 잠시 주의를 준 후 여자아이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는 어른들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7시간. 아직 5월말인데도 날씨가 흐리더니 눈이 펑펑 쏟아졌다. 여전히 보이는 건 울창한 숲뿐. 갈수록 눈이 쏟아 붓는데도 기차는 잘도 달렸다. 처음 이곳에 올 때 검표원에게 물어보니 눈이 많은 곳이라 철로에 지붕이 있어서 눈이 와도 기차가 통행하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하였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이야기. 근데 묘한 느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느낌이 나의 영혼을 울리고 있었다. 아아. 이 아이 때문인가. 이 아이의 이야기에 해나의 부모님의 얼굴에 보였던 해나에 대한 그리움이 안보였다. 마치 자신의 딸아이와 이야기 하듯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시는 해나의 부모님을 보면서 내 마음 속은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기차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차가 베르겐 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9시. 철도역 주변은 눈이 1미터 이상 쌓이고 기차길만 뚫려서 마치 눈으로 된 터널 속을 통과하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기차역에서 나와 고풍스러운 호텔에 들어갔다. 근데 아까부터 이 아이는 계속해서 쫓아다니네.

“야. 너는 이제 베르겐에 도착했으니 이제 네 엄마 찾으러 가야지.”

  내 말에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헤나의 부모님과 어머니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다시 내 앞으로 왔다.

“아저씨. 고마웠어요. 그럼 다음에 봬요.”

  아이는 손을 흔들면서 호텔을 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근데 다음에? 봬요? 다음에 왜?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었을까.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한 채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지나가는 바람에 스며들어있는 쟈스민향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 아이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 난 쟈스민향. 이내 고개를 흔들며 호텔방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그 아이 이름이 뭐지?


  다음날 아침. 해나의 부모님과 어머니는 이곳 베르겐을 관광하고 그곳으로 오시겠다며 호텔 밖을 나가셨다. 3분을 마중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던 중 내 눈을 잡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제 만났던 여자아이. 난 그 아이의 뒤로 갔다. 아직 내가 온 것을 눈치 못 챈 듯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여자아이. 내가 그 아이의 등 뒤에서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 갑자기 아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아저씨. 뭐 하세요?”

  민망한 모습으로 멈추어 버린 나는 헛기침을 한 채 모른 척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손을 아이가 잡았다.

“왜?”

“아저씨. 여기 처음 아니죠. 그럼 나 관광 시켜주세요. 엄마는 일 나가서 바쁘시거든요. 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본 채 부탁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나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에는 약한 나이기에 해나가 자주 사용했었다. 그러고 보니 해나는 항사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이런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었고. 그녀의 마지막 부탁까지도.

  처음의 부두에서 배타고 빙하가 봄이 되면 녹아내려서 생기는 피요르 해안관광을 떠났다. 산과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피오로드. 그녀가 나에게 부탁했던 마지막 말이 문뜩 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산의 바람과 바다의 바람이 만나는 곳에다가 나를 보내줘.’


  그녀의 모습이 점점 겹쳐지면서 내 눈 앞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다 그녀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와! 멋있어.”

  하지만 내내 옆에서 도시의 아름다움에 빠져 감탄이란 것을 자아내는 아이의 목소리에 그 분위기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하긴 내가 뭘 바라겠냐.

  배가 베르겐을 벗어나면서 양쪽에는 바위로 된 높은 산들이 보이고, 빙하로 덮여있던 산 위에서는 봄이 되니까 빙하가 녹아서 폭포수처럼 바다에 흘러 내렸다. 길고 복잡한 해안선과 곧게 떨어지는 긴 폭포가 출렁거리는 푸른 피요르 해안과 멋진 조화를 이루어서 선상의 관광객들은 모두 사진 찍기에 바빴다. 몇 번을 보아도 아름답긴 하지만.

  4시간동안의 해안관광 후, 아이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에드워드 그리그’가 살던 집으로 데려갔다. 그 다음은 인형의 집으로, 그 다음은 베른겐항 어시장 옆 브뤼겐 거리에 있는 한자 박물관으로.

  아이는 재미가 있다는 듯이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의문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까지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왜? 어째서? 이 아이는 그녀와 함께 관광하려 했던 곳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이 아이는 대체 나에게 왜 그런 것일까. 라는 의문이 말이다. 나는 잠시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이의 물음에 나는 내가 품고 있던 의구심을 물어보려 하였지만 이내 닫아버렸다. 우연일 수도 있기 때문에.

“아니. 다음번에는 어디로 갈거니?”


  그리고 이내 아이가 손으로 가리킨 곳. 그곳은 그녀를 떠나보낸 곳.


  그곳은 플뢰옌산(山) 이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간 그곳. 그리고 내가 그녀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낸 곳. 그리고 그것은 나와 그녀가 마지막으로 단 둘이 있던 곳. 그 지점을 아이가 가리키고 있었다. 난 조금 경계어린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내 얼굴을 보자 다시 웃으며 팔을 끌어당겨서 플뢰옌산으로 향하는 기차역으로 끌고 갔다. 아이는 표를 끊고는 간이역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살짝 웃더니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였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난 아이의 옆에 앉았다.

“이제 궁금하겠죠. 나에 대해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방금 전 까지 듣던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마음에서 울리는 목소리. 내 영혼이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 부정하고 싶지만 눈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겠죠. 아니 당연하지라고 말해야 하나?”

  아이는 나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내 영혼의 기억에 잔재되어있던 것들을 마치 하나씩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눈동자와 비슷했기에. 그리고 서서히 아이의 품에서 느껴지는 쟈스민향.


  이제야 느꼈다.

 
  7년전 그녀가 말했던 선물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하나의 단어.

“해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7년의 시간이 지나고 해나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해나가 어렸을 때의 모습이 이랬었을까. 난 그런 어린 해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신지.”

  해나의 미소. 그래. 그래서였어. 이 아이가 내 얼굴을 보면 웃는 이유가. 이 아이의 웃음이 내 영혼을 울리던 이유가. 바로 이 아이가 해나였기 때문에.

“정말... 해나... 맞아?”

  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해나였다. 그 모습. 내 영혼이 느끼는 그리움. 그리고 기쁨.

“맞아. 근데 넌 여전히 눈치가 없구나. 내 부모님들은 벌써 기차 안에서 나에 대해서 느끼던데.”

  그거야 너희 부모님이니깐 그렇지. 그리고 그때 난 기차에서 잤었고.

“뭐. 그게 신지의 매력 중 하나였지만 말이야.”

  똑같았다. 약간은 비꼬는 듯 한, 하지만 상쾌한 말소리. 너무나도 그리웠던 소리였다.

  해나는 짧은 팔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였다. 어른의 신체가 아니니깐 조금 힘들어 보여 고개를 살짝 숙여주었다.

“착하다. 착하다.”

  정말 다시 이 세상이 와도 해나는 해나였다. 내 머리를 가지고 쓰다듬는 것이 재미있다고 어떤 때는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쓰다듬었었지. 그래서 한때 ‘해나의 애견’이라는 웃지 못 할 별명까지 있었지만.

  기차의 경적 소리가 울리자 해나는 내 머리에서 손을 때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 손을 붙잡았다.

“뭐해? 기차 왔잖아. 얼른 타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기차에 탔다. 곧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그 기차는 눈으로 뒤덮인 역을 지나 서서히 플뢰옌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누가 보면 마치 단란한 오누이처럼 보일 풍경. 하지만 우리 둘의 손은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듯 꽉 붙잡고 있었다. 기차는 천천히 산을 올라갔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우리는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였다. 7년 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그녀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는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았고, 누구는 어디로 이민을 간다는 둥 그러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다 가끔 창 밖을 통해 베르겐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내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 기차는 산 중턱까지 올라왔었다. 기차가 간이역에서 보급을 받는 동안 나와 그녀는 잠시 기차에서 내렸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항구도시 베르겐. 난 작디작은 그녀의 어깨위에 내 손을 살짝 올려놓았다.

“신지. 그거 알아? 내가 말했던 선물. 사실 나도 잘 몰랐었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보지를 않아서 모르겠지만, 왠지 고개를 끄덕여 줘야 될 것 같았다.

“치. 사실을 그냥 끄덕이는 거지.”

  그녀는 내 왼팔을 살짝 꼬집었다. 하지만 그 아픔도 좋았다. 이렇게 그녀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뭐. 신지니까 그냥 넘어가겠어. 그런데 말이지 아무것도 없던, 아니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는 세상에서 갑자기 눈이 살짝 뜨여지더라고. 그리고 알게 되었지. 어떤 존재가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는 것을.”

  뭔가 아스트랄계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존재가 내 옆에 있기에 난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가 보급을 다했는지 기적을 울렸고,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은 채 기차에 다시 올랐다. 덜컹거리며 출발하는 기차. 그리고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공항에서 너를 보게 되었어. 내 부모님과 너희 어머니까지. 당장 가서 안기고 싶었어. 하지만 그러면 이상할 것 같아서 그냥 너 앞을 살짝 새치기를 했지.”

  아아. 그래서 그랬던 것이었구나. 그 아이가 새치기를 하고 심사대를 통과한 후 나를 보고 살짝 웃은 것이.

“그리고 너의 옆에 앉게 되었고, 너의 온기를 느끼게 되었어.  그때부터 난 내가 너의 옆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너무 기뻤어. 비록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날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이.”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서글퍼 보이는 그녀의 얼굴.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어린 얼굴에다가 나는 살짝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 신지는 바보라고.”

“에?”

“바. 보. 라. 고.”

  나의 일편단심 민들레를 이렇게 잘근잘근 밟아버리다니. 아무리 다시 내 옆에 있어도 너무한걸. 지난 7년간 매일 그녀를 생각했었는데.

“흐음. 그런 바보 덕분에 이렇게 이 세상에 돌아온 거 아니야?”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 바보 덕분에 이렇게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지.”

  아주 토씨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대꾸를 해요. 7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어제 만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구나.

  결국 난 그녀의 말에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웃으면서 난 지난 날 있었던 추억도 하나하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차가 다시 한번 기적을 울리면서 천천히 멈추었다. 그녀를 보냈던 곳은 기차역에서 5분정도 떨어져 있는 절벽. 난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혀 변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이곳. 난 품속에 있던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꺼내었다.

“어. 그게 뭐야?”

  해나는 내 품에서 꺼내어진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쳐다보았다. 하긴 요 몇 년 사이에 개발되었던 것이었으니 그녀가 모르는 건 당연한 건가.

“디지털카메라. 필름이 필요 없고, 컴퓨터를 이용해서 사진을 뽑을 수도 있어.”

“헤에. 내가 없는 사이에 참 많이도 변했네.”

  마치 몇 년간 산골 오지에서 살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말하는 그녀의 말투는 지금 그녀의 외모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웃었지만 결국 그녀는 살짝 삐지게 되었고, 나는 기차역에 있는 작은 간이매점에 가서 따뜻한 커피를 사가지고 와 그녀에게 주는 것으로 그녀를 풀어주었다. 커피가 주는 여운을 그녀와 함께 느낀 후, 카메라를 작은 바위 위에다가 올려놓아 타이머를 맞추었다.

“뭐. 뭐하는 거야.”

“타이머 맞춰두게. 그래야 우리 둘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잖아?”

  난 30초 정도로 타이머를 맞춘 후 그녀와 함께 절벽 위에 섰다. 내가 그녀를 떠내 보냈던 장소. 바로 그곳에서 난 다시 그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난 그녀와 찍힌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고, 그녀는 ‘아. 눈이 이상해. 나 같지 않아.’라는 말을 연발하면서 다시 찍자고 때를 썼다. 하지만 난 오히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 좋았다. 평소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런 것일까. 난 그녀가 때쓰는 모습과 살짝 토라진 모습도 사진을 찍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이제 곧 있으면 해나의 부모님하고 어머니가 올라오실 시간이다.

  해나는 서쪽 하늘에서 떠오른 달을 바라보더니 내가 그녀를 보냈던 그곳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가야겠네.”

“벌써? 부모님들을 보고 가야하지 않겠어?”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까 본 그녀의 서글픈 얼굴은 지금 이 때를 알려 준다는 것을.

“아니. 기차 안에서 봬서 괜찮아. 엄마하고 아빠도 이해해 줄거야. 아니 이미 이해하고 있을걸.”

  아아. 그럴 것이다. 기차 안에서 벌써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으니. 그럼 이제 그녀는 다시 이 세상에서 떠나야 하는 것인가.

“그런가. 그럼 언제 다시 올 수 있는 거야?”

“바보. 이제 어떻게 돌아와. 이번도 기적에 가까운 것인걸. 이게 마지막이야.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그녀는 발등을 들어 내 얼굴에 입술을 대려고 하였다. 하지만 역시 어린 신체다 보니 길이가 짧았다. 그래서 나는 허리를 숙인 후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작은 입술에다가 입을 맞추었다. 따스한 느낌. 그녀가 아직까지는 내 앞에 있다는 느낌. 그러나 그 따스함은 점점 사라져만 갔다. 그리고 그 따스함이 모두 사라진 후 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그녀는 다시 이 세상을 떠나갔다.


  첫 번째는 내 손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내 키스로.


  그녀의 나에게 주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선물. 나는 그것을 내 마음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품속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을 때 같이 찍었던 사진을 보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카메라의 렌즈가 아닌 내 얼굴. 그리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는 살짝 V자를 하고 있었고. 여전했었다. 사진을 찍을 때조차도. 그녀가 토라져 있는 모습을 찍은 것도, 때쓰는 모습을 찍었을 때도 그녀의 눈길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첫사랑의 그 첫 번째는 7년 전에 끝났었다.


  그리고


  내 첫사랑의 그 두 번째는 지금 이 사진 속에서 끝났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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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님의 댓글

태상™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글을 내신 시점에서 이번 백일장의 최강이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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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우님의 댓글

박현우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할말이 없군요 -_-....역시나 너무 잘쓰셔서 뭔가 걸릴듯한 말도 못쓰겠는 이 공포....역시 여신사무소님의 소설은 예나 지금이나 저에겐 하나의 '공포' 입니다 -_-....<젠장!!! 왜 난 이렇게 못쓰...<퍽퍽퍽 당연하잖아!!>>수고하셨습니다 -_- 저도 이번 콘티에서 이 이상의 소설은...나올수 없다고 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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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ka님의 댓글

pika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여전히 대단하십니다!!

저처럼.. 주제가 불분명하지 않으시고...
또, 뭔가 막힌 듯한 느낌이 안드는 시원함까지..
시엘 씨 같이.. '음? 벌써 끝인가..? 뭔가 허전..' 이라는 느낌조차 안들다니...
(음.. 시엘 씨 욕한거 아녀요~)

대단하십니다!! ㅡㅡ; 
아니, 무섭달까.. 하아... 곤란하네.. 현우군과 동감은 싫은데 말야...
칫, 어쨌든.. 아직은 도전조차 못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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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el eleicia님의 댓글

Ciel eleicia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에헤헤! 역시 사무소님! 하지만 역시나! 저의 목표이신 분 답게 가뿐히 이기시는군요!
역시 저의 목표이십니다! 결코 멈추지 않고 달려가서 사무소님 뒤에서 음흉하게
웃어드릴테니까! 사무소님도 저의 목표가 되어주셔야 해요!
확실히! 이 글을 보자면! 스토리란! 이런것이다! 랄까요?
사랑하는 연인이 마지막 선물을 주기위해서 다시한번 나타난다.
므흣~ 감동의 물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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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라넷님의 댓글

잉그라넷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공포심 이밀려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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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님의 댓글

유랑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평가는 무슨 -_-;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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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사랑™님의 댓글

여신사랑™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흠... 잠수 기간을 타신것 치시고는 대단한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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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사랑™님의 댓글

여신사랑™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또한 상당한 지식이 요구되는 글이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게 오랜 구상을 하시진 않은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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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神社務所님의 댓글

女神社務所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ㅡ.ㅡ... 날카로운 센스.. 이십니다. 구상기간은 짧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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