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여신님-출동, 머신 아더(Machine Art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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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시더의 얘기를 써보겠습니다. 배경이 되는 오라전대의 이야기 진행상 빠지면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지루하더라도 끝까지 봐주세요. 그럼 얘기 시작합니다.
* * * * * * * * * * *
≪에에에엑스 부우메에라아앙!≫
어두운 방 안. 그 안을 밝혀주는 것은 TV에서 흘러나오는 형광색의 불빛 뿐 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마저도 TV에 닿을 것처럼 앉아 있는 한 소녀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다. 한 다섯 살 정도 되었을까. 긴 흑발 사이로 드러난 아이의 얼굴은 그 나의 또래의 천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타아아앗! 좋아! 이대로 엑스 원(One)으로 간다!≫
≪아니. 여기서는 엑스 투(Two)가 적격이다! 조종을 내게 넘겨라, 유찬!≫
≪뭣이! 지금 리더의 말을 무시하는 거냐! 진!≫
≪넌 지금 유미 씨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고 있어! 분별력을 잃은 너에게 리더의 자리를 맡길 수는 없다!≫
≪네 녀석이!≫
TV에서는 한창 용자전기 엑스카이저가 방영되고 있었다. 오늘의 방영분은 1기에서 클라이맥스라고 칭해지는 ‘47화 죽음, 그리고 분열의 시작!’ 이라는 에피소드였다.
엑스 조종사들이 남 몰래 사모해오던 가 박사의 딸, 가유미가 죽음으로 해서 유찬과 진, 그리고 김유신이 서로에게 불신을 품게 된다는 내용이다.
TV앞에 앉아있던 소녀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엑스 카이져에게 혼이라도 빼앗긴 듯한 모습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리더가 있었지? 유찬! 진! 착각하지마라! 엑스 카이저는 우리 모두의 것! 세 명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 언제부터 우리의 머리 위에 섰다는 거냐? 찬!≫
≪제길! 왜 내 맘을 몰라주는 거야! 유미 씨의 죽음으로 너까지 이성을 잃은 거냐, 유신!≫
≪이성을 잃어버린 건 너겠지!≫
≪싸움을 부추기지 마, 진!≫
세 명의 싸움은 점점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진은 결국 말해서는 안될 금기를 유찬에게 말해버렸다.
≪유미 씨는, 그녀는……너를 지켜내기 위해 그 목숨을 희생하셨다! 정신을 잃은 네 녀석을 위해! 그렇게 그녀의 목숨으로 살아난 주제에! 그녀를 지켜내지도 못한 주제에! 그런 녀석에게 우리의 목숨을 맡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충격으로 침묵에 휩싸이는 콕피트(Cockpit). 그리고 유찬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 하하. 그래. 모든 건……나의 죄……로군. 그녀를 지키지 못한…….≫
≪……찬.≫
진은 그제야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닫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그리고 유미가 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조종을 너에게 넘기겠다, 진≫
≪…….≫
진은 이를 악물며 레버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일단은 눈앞의 메카 사우르스부터 없애는 게 최우선 사항이었다. 진의 음성 인식 장치와 간단한 수 조작으로 인해 엑스 카이저는 변신을 시작했다.
≪엑스으으 투(Two)!≫
엑스 카이저가 삼단으로 분리되자 맨 앞에 위치하고 있던 1호기가 2호기와 3호기의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지켜 볼 메카 사우르스가 아니었다. 거기다 흔들리는 마음으로 인해 합체 타이밍까지 어긋난 엑스 대원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메카 사우르스의 화염 공격이 그들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아악!≫
불길에 휩싸이며 합체 노선에서 튕겨나가는 기체들. 그렇게 엑스 카이저의 합체가 실패로 끝나자 지켜보던 소녀는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TV에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닥 타닥 타닥
시끄러운 TV소리로 인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니 컴퓨터의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소녀가 돌아본 방향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한 연구복 차림의 여인이 말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긴 금발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있었는데, 모발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아선지 땋은 이음새 사이로 머리칼들이 제멋대로 삐져나와 있었다. TV앞의 소녀는 말없이 그런 여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그랜마(Grandma).”
하지만 소녀의 목소리는 여인에게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TV소리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소녀는 아직 엑스카이저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미련 없이 TV를 꺼버리며 여인을 향해 재차 불렀다.
“그랜마, 나 심심해.”
그제야 들린 것일까. 키보드를 치던 여인의 손길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차 손가락은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여인은 시더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 시더, 착하지?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으렴. 조금만 더…….”
여인은 어딘가 조급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여인의 작업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매진한다면 지난 30여 년간 매달려온 연구가 성과를 보일지도 몰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지만 그 조금만 더란 말을 얼마나 반복해왔던 것일까?
소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심심하다고 말하면 할머니는 매번 기다리라고만 말한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삑
다시 TV를 켰다. 그러자 엑스카이저의 엔딩과 함께 스탭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잠깐의 순간에 47화가 끝났던 모양이다. 이후부터는 재미없는 퀴즈프로그램과 쇼 프로그램이 이어질 것이다. 소녀는 더 이상 TV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계속 TV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녀가 자신을 돌아봐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계속 소녀는 TV만을 바라보았다.
≪안돼! 멈춰!≫
≪바보같은 짓 그만둬라, 유신!≫
절규하는 유찬과 진. 그들의 눈앞에는 엑스 카이저의 세 번째 타입, 엑스 쓰리(Three)가 자신의 배는 될 듯한 메카 사우르스를 끌어안은 채 연푸른 빛의 입자에 둘러싸여 빛나고 있었다. 엑스 쓰리의 조종사 김유신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찬과 진에게 히죽 미소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뭐야. 걱정해주는 거냐, 너희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서로 티격태격 싸워대더니, 이제 와서 무슨 얼굴들로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 소리치는 거야?≫
≪농담할 때가 아니야! 그대로 엑스 카이저의 융합로를 폭주시켰다간 수 십 메가톤에 달하는 에너지의 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면 너까지 무사하지 못한다고!≫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당장 귀환해! 부탁이야!≫
애절한 찬과 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망설임마저 버릴 수 있었다. 내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
≪헤, 헤헤. 그러고 보니 그때가 생각나는데. 처음 가 박사님의 제의로 연구소에 우리 셋이 모였을 바로 그 때가. 그 때도 우리는 지금처럼 서로 합심하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기에 바빴었지.≫
≪……유신, 너.≫
탄식하는 유찬. 그와 동시에 과거의 영상들이 그의 뒤로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저돌적인 자신과 시니컬한 진, 야수 같은 유신. 이 셋은 너무나 각자의 개성이 강했기에 도저히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날, 사우르스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시범 운행도 하지 못하고 엑스 카이저에 탑승했던 그 날.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콕피트 안에서 느껴지던 서로의 숨결을. 서로의 생각을. 서로의 투기를!
≪이 녀석들이라면 믿을 만하다! 이 녀석들과 함께라면 해볼 만 하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지금껏 우리 셋은 싸워올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응당 진저리를 칠 법한 사투의 현장들을 뚫고 올 수 있었다. 그것은 서로를 믿고 있었기에!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이었다!
≪난……너희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이……자랑스럽다.≫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자직한 김유신의 목소리. 유찬은 기어코 슬픔을 참지 못하며 눈물을 흘렸고, 냉정하기 짝이 없던 진 마저도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고집불통 자식은 이미 결정해 버린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내기로. 그러기 위해선 기꺼이 자신의 목숨 마저도 내던져버릴 것이다.
≪유신……!≫
≪헤헤. 미안하게 됐다. 젠장, 나도 이런 역은 사양하고 싶었는데. 큭.≫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지는 콕피트 안에서 유신은 엑스 선 융합로의 열기를 견뎌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연구실의 모니터로 비치는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이만 작별이다. 이 뒤는……너희들에게 맡기겠어.≫
너희들을 믿고, 너희들의 손에 나의 바톤을 넘긴다!
≪으랴아아아아아아압!≫
찢어져 나갈 것 같은 고함 소리. 그와 동시에……유신과 엑스 카이저는 빛과 함께 세계에서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우르스 제국이 준비한 최후의 메카 사우르스를 동반한 채.
“우, 우우우우우.”
그렇게 TV에서 펼쳐지는 영상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피스메이커의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 그 곁으로는 피스메이커의 중축이라 할 수 있는 오라 능력자, 피스 블루 유가인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시더는 옆에 잔뜩 준비해놓은 티슈로 연신 눈물을 닦으며 코를 풀었다.
“훌쩍! 몇 번을 봐도 감동적이야. 동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김유신의 모습이라니! 이건 엑스 카이저의 전 시리즈를 통틀어서 베스트 파이브 안에 들어가는 명장면이라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47화에서 틀어졌던 찬과 진의 관계는 회복되고 엑스카이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지.”
“…….”
울면서 설명할 건 다 하잖아.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시더의 말에 대꾸했다.
“새로운 전기라고?”
“그래! 바로 제 4의 엑스 조종사 이순신의 등장이지! 순신은 유신의 빈 자리를 메꾸게 되는데,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특공으로 눈부시게 가버린 선배의 후광에 가려져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돼. 이에 선배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분투하는 순신의 에피소드는 2기의 놓쳐서는 안될 불거리지!”
“……2, 2기? 그러면 방금 전까지가 1기였던 거야?”
“That's right! 자, 어때? 가인? 이쯤 되면 너도 나와 같이 엑스 카이저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겠지!”
“그, 글쎄.”
가인은 대답을 회피하며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뭐, 전보다는 확실히 재미를 느끼게는 되었다지만……그렇다고 시더처럼 열변을 토해낼 정도는 아니라서.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다간 시더를 실망시키게 되겠지.
‘……그나저나 이 방은 전에 왔을 때보다 더 굉장해졌잖아?’
가인은 눈에 들어오는 방의 풍경에 혀를 내둘렀다.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시더의 지하 골방. 그 골방 안에는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가득 쌓여있던 연구 자료들은 예전보다 정확히 2배로 불어나 있었고, 거기다 웬 액션 피규어와 초합금 제품들도 그 사이 사이를 빈 틈 없이 채우고 있었다. 언제봐도 생각하는 거지만, 도깨비 소굴이 따로 없는 방이다.
“자자자! 그렇다면 이제 2기로 넘어가 볼까! 대파된 엑스 카이저를 대신하는 2호기. 그레이트 카이저와 멸망된 사우르스 제국을 대신하는 인베이더들의 사투가 시작된다고!
“아, 저기……지금 2기도 보려고?”
“그럼! 김유신의 죽음으로 텐션(Tension)이 절정에 이르렀잖아! 이 여세를 몰아서 오늘 안에 2기 30화까지 돌파하는 거야!”
“아……으응.”
가인은 힘없이 어깨를 떨구며 대답했다. 그나마 1기를 다 보게 된 것만 해도 틈틈이 시더를 찾아와서 애니메이션(Animation)을 감상한 결과였거늘. 오늘 안에 30화를 돌파한다니……그런 건 절대 무리라고!
‘……애니메이션?’
가인은 문득 자신이 중얼거린 단어를 떠올리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만화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 어느새 시더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다 보니 그 단어가 입에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은근히 만화 영화 따위, 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뭔가 말도 안 되는 일만 생기면 ‘이런, 만화 같은’ 이라고 중얼거렸지.’
그러던 것이 시더에게 이끌려 이것저것 장르 불문하고 감상하다 보니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애니메이션은 어떤 의미에선 영화를 능가하는 표현 매체였던 것이다. 얼마든지 리얼한 연출이 가능한데다가 애니메이션만의 독창적인 기법은 실사의 그것보다 상당히 감각적이다. 더구나 영화 속 CG도 애니메이션의 한 범주였던 것이다. 가인은 새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만화를 무시해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구를 침략하는~악의 무리들에게는~언제나 우리가 간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과 이렇게 무리한 장시간 관람은 관계가 없단 말이지. 가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DVD를 바꿔 넣는 시더의 등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피식 웃어버린다.
‘뭐, 어때. 오늘 하루쯤은.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주말이었는데.’
그리고 누굴 만나거나 밖에 나갈 기분도 아니었고…….
가인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DVD메뉴 화면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때 막 DVD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던 시더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가인.”
“응?”
“학교에서는……별 일 없었어?”
잠깐의 침묵. 시더는 일부러 가인을 돌아보지 않으며 그의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가인은 앞과 변함없이 느슨한 목소리로 답했다.
“……으응. 별로.”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특별한 말은 없었다. 시더는 그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싫어한다는 걸 느끼고 리모콘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강력한 사운드와 함께 엑스 카이저의 2기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Burning Fire! 마음속에 있는 불꽃을 뿜어내라! 거침없이! 후회 없이!≫
“불꽃은 불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리!”
환호를 내지르며 주제가를 따라 부르는 시더. 그녀는 멍하니 앉아있는 가인을 향해 주먹을 쥐어 올리며 소리쳤다.
“뭐하고 있는 거야, 가인! 엑스 카이저의 명곡 Burning Fire야!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엑스 카이저의 이름이 운다고! 자, 따라 외쳐! Burning Fire에서 주먹을 들어올리며 외치는 거야! 어서 빨리!”
“자, 잠깐만 시더……난 괜찮아. 난 보는 걸로 만족한다고.”
“노! 노! 노! 전혀 괜찮지 않아! 이 정도의 열정도 없이 엑스 카이저를 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건 이미 팬으로서의 자격을 시험당하는 시련의 무대인 거야! 이 순간을 극복해내지 못하면 너에게 미래란 없어! 앞으로도 영원히 제자리에서 머무르게 될 거야!”
아니, 그……머물러도 그다지 상관은 없다만…….
가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에라, 모르겠다!
≪Burning Fire! 하늘 높이 날아라! 두려움 없이! 자신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라!”
“Burning Fire!”
“Burning Fire!”
“Burning Fire!”
가인과 시더의 기합 소리는 오프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학교에서는 그다지 별 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없었다. 단지 예전의 생활과 조금……달라졌을 뿐이다.
2학년 1반.
가인이 속해있는 학급. 그곳에는 지난 1년간 같은 교실 속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온 친구들이 있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과제 걱정으로 고민하고, 연예인 얘기로 웃고 떠드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 너무나도 당연한 풍경. 하지만…….
‘괴물.’
그 사건 이후로 가인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변함없는 풍경 속에서, 변함없는 교실 속에서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도.
단지 그것만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교실은 여전히 평화로웠고 여전히 시끄러웠고, 여전히 활기찼다. 그저 가인만이 그 속에서 떨어져 나왔을 뿐이다. 닺니 그것 뿐. 그 외에는 별 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없었다.
‘이제는……모르겠어.’
오라 능력자니, 피스메이커니, 몬스터니.
잠시라도 좋으니까 잊고 싶었다. 힘이 있는 이와 없는 이의 차이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면 지금과 같은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지킬 거야.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솔직히 회의감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라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힘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자신은 모두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괴물이란 말은 다른 걸 뜻하는 게 아냐! 자신들과는 다르다! 우리와 넌 틀리다! 그걸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표현한 이기적인 말에 불과해!
문득 카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을 절실히 공감하게 된다.
‘다른……걸까?’
나와 그들은 서로 다른 건가. 난 더 이상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인 건가. 인간이……아닌 걸까?
‘그렇다면 나도 틀리다는 거야? 여기 있는 시민 씨와 유리도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마리의 꾸짖음이 생각났다. 미안해요, 선배.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하지만…….
‘괴물!’
그 말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날 바라보던 모두의 눈빛이 잊혀지질 않아. 그 눈빛 속에서 느껴지던 공포와 두려움! 뒷걸음질 치던 그 모습들! 그 모든 걸 어떻게 잊을 수 있단 거지! 그 후로 모두가 보여주는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모두가 얘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인은 느낄 수 있었다. 괴물. 괴물이라고. 건드리면 잡아먹힐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그 태도들이라니!
‘싫다. 정말…….’
혹시 피해망상증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너무 예민해진 거 아냐? 하지만 분명 뭔가가 바뀌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더 이상 예전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학교도, 친구들도, 괴물 취급을 받는 것도. 그리고 오라 능력에 관한 것도. 이런 마음으로 시민 씨와 마리 선배, 진우 씨와 유리, 브루스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재영과 테레이아, 우석과 지연 선생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를 피하며 오게 된 곳이 다름 아닌 여기였다.
시더의 골방.
오라 능력자가 아니면서도 자신을 친구로 맞이해줬던 그녀. 그렇게 주말 아침부터 시더를 찾아온 가인은 지금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으으으, 으아아악!≫
화면에서는 한 남자가 그레이트 카이저의 조종석에서 얼굴이 일그러진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1호기와 2호기에 답승해 있던 유찬과 진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찬섭 중위! 속도를 너무 냈다!≫
≪계기판을 잘 봐!≫
하지만 그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찬섭 중위는 가혹한 중력의 압박에 몸을 떨고 있었다.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귓청을 때리는 괴물의 비명 소리 같은 굉음이 점점 그의 사고를 마비시킨다.
≪손이……안 움직여……계기판이 보이질 않아…….≫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리는 중위의 목소리에 유찬과 진은 이를 악물었다. 제길! 중지시켜야 해! 이대로 합체했다가는 셋 모두가 다 위험해진다!
≪안돼. 합체는 당장 중지다! 찬섭 중위, 열 분사로 합체 루트에서 빠져 나가! 어서!≫
≪안……돼. 내장이……튀어……나온…….≫
≪진정해!≫
≪우, 우우, 우아아아아아!≫
쿵! 간신히 유찬과 진이 열분사로 루트에서 빠져나갔지만, 3호기의 찬섭 중위는 그대로 기체를 조절하지 못하고 맹렬히 지상으로 낙하했다. 찬과 진은 비통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분명 조종사는 그레이트 카이저의 기체와 함께 공중에서 산화될 것이다.
“으음. 그렇지. 역시 그레이트 카이저는 엑스 카이저의 2배에 달하는 능력인 만큼 평범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기체가 아니지. 고인이 된 김유신과 같은 운동 신경을 겸비한 초인이 아니고서야 무리라고. 절대 무리.”
시더는 안경을 빛내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합체에 웬 운동 신경이 필요하다는 건지.’
애초에 조종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었다는 소리 밖에 안 되잖아. 아니. 그것보다도……과학자로서 저런 설정에 동의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시더 선생님?
“그러니까 여기서 김유신에 버금가는 육체 능력을 지닌 이순신이 등장해야 하는 거야! 그만이 유신의 비기였던 ‘백두산 메치기’를 계승할 수 있다고!
“……백두산?”
“응! 백두산! 엑스 카이저, 아니. 이제부터는 그레이트 카이저지. G카이저의 세 번째 타입. G쓰리의 기술이야. 길이 조절이 자유로운 그 팔로 상대의 몸을 감싼 채 메치기를 하면 중심 부근에 100미터퍼섹커(100m/s) 이상의 풍속이 일어나며 중심 진로에 있는 상대를 맹렬한 세력으로 감아올리는 기술이지. 김유신이 백두산에서 터득한 기술이라 백두산이란 지명이 붙게 된 거야.”
“…….”
특훈이라니. 로봇 조종과 산속에서 하는 훈련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야? 가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이런 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나만 손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는 이런 로봇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는 시더가 정말 AI 컴플리트 세트를 만든 장본인이란 걸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로봇은 말이야…….
“시더, 내 친구가 말하기를…….”
아니. 정확히는 박재영, 그 인간이 말한 것이지만.
“로봇은 무기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던데.”
“헉!”
순간, 시더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그가 말해서는 안 될 금기를 말해버렸다는 것처럼 기겁했다. 가인은 그녀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 뭐지. 이 기분은? 마치 어린애의 꿈을 부숴뜨린 것만 같은…….
“그, 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 일단 두 발로 서있다는 행위도 상당히 그런데다가……그 조종도 레버를 몇 번 당기기만 하면 되는 터무니없는 구조고, 또 연료 문제에다가, 수리비에다가.”
“으, 으으으으음.”
시더는 신음을 흘리며 말 그대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인은 더더욱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 그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모습을 감춰야 되는 게 일반 상식인데 저렇게 거대한 인간형으로 나타나면 ‘날 쏴 주십쇼’하고 시위하는 것 밖에 안되잖아? 그리고 들은 말이지만. 저 거대한 로봇이 공격당하면 안에 타고 있던 조종사도 무사하지 못한다고…….”
“그만!”
시더는 가인의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인은 그녀의 반응에 움찔 몸을 떨며 입을 다물었다. 시더는 어디선가 가져온 마커와 보드를 그 앞에 내려놓으며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자! 일단 로봇이라는 개념부터 설명해주지! 로봇이란 말은 체코어의 ‘일한다(rovota)’라는 뜻으로,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K, 차페크가 희곡 ‘로성의 인조인간’을 발표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대명사지. 하지만 로봇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어.”
“훨씬……전부터?”
“그래! 바로 고대부터! 그리스, 로마 시대 및 기원전에서 종교 의식의 도구로 만들어졌던 거야! 물론 이때의 인조인간은 엑스 카이저와 같은 거대 로봇이 아니라 단순히 문을 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자동인형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로봇의 역사란 이토록 오래되었다는 거야. 예전부터, 그보다 훨씬 예전부터 사람들은 로봇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거지.”
“……그렇구나.”
가인은 나지막히 감탄했다. 아니. 잠깐. 하지만 그렇다고 로봇의 실용성이 설명되는 건 아니잖아? 시더도 가인이 그 부분을 궁금해 한다는 걸 알았는지 설명을 재개했다.
“그래. 가인, 너의 말대로 사실 로봇이란 건 사람의 일을 대신해주는 기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반드시 인간형일 필요는 없어. 이족보행보다는 사족보행이 훨씬 이동에 용이하고 합리적이지.
시더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TV를 돌아보았다. TV의 엑스 카이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인간형 로봇이라는 건 어쩌면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거야.”
“본능?”
“그래. 사람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후손을 낳고 애정을 쏟아 기르잖아?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하는 욕구. 성경에서 보면 God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만들었다고 하지? 난 그게 인간의 얘기라고 생각해.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뜬 뭔가를 창조해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 거야. 그 욕구의 발로 중 하나가 로봇인 거고.”
“……아아.”
가인은 시더의 설명보다도 그녀가 보여주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마치 아이를 가진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하, 하하하.
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욕구……인 건가.”
“그래. 아마 인간에게 생식 능력이 없었더라면, 로봇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을 걸? 인간의 번식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바퀴벌레의 생명력만큼이나 경이로우니까.”
……아니. 어째서 잘 나가다가 그 쪽으로 얘기가 가는 건지…….
가인은 혀를 차며 TV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엑스 카이저의 영상에 다시 최초의 의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묻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거대 로봇은 실용성이 없다는 거지?”
“윽.”
시더는 어깨를 움찔 떨며 한껏 초조한 기색을 띄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얼렁뚱땅 넘길 생각이었던가.
“응? 시더? 거대 로봇은 실용성이 없는 거지? 그렇지?”
“우우우우.”
시더는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가인은 그렇게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빙글 빙글 웃기만 했다. 아, 시더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거 너무 재밌잖아? 하하하.
그렇게 가인이 의기양야해 하자 시더는 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난데 없이 눈 앞의 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아니! 거대 로봇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 일류에게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어! 절대로! 반드시 도움이 돼!”
“……어, 어떻게?”
가인은 시더의 박력이 주춤 뒤로 물러나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시더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거대 로봇은!”
바로!
“인류의 꿈이야!”
쿵
순간 할 말을 잊은 가인. 그저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간신히 입술을 열어 맥 없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꿈?”
“그래! 꿈!”
“꿈……이라고?”
“그래! 이쯤 되면 답변이 되었겠지? 꿈이야! 꿈! Dream!”
……전혀 답변이 안되잖아.
가인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과학적인 대답을 기대했었는데 뜬금없이 꿈이라니? 그렇게 가인이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시더는 두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말했다.
“와앗! 그 태도는 도대체 뭐야, 가인! 설마 꿈이라는 말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예이. 예이. 꿈 말씀이십니까? 잘 알아들었습니다.”
가인은 피식 피식 웃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더더욱 속이 상한 시더는 발까지 동동 굴리면 열변을 토해냈다.
“꿈을 우습게보지 말아! 꿈은! 인간의 상상력은 과학의 원천이야! 상상하지 않으면 모든 일은 시작되지 않는다고! 인류가 우주여행을 하게 된 것도 160년 경의 그리스 작가 루키아노스가 쓴 단편 ‘이카로메니포스’에서 발단이 되었고, 20세기의 하늘을 열 수 있던 것도 하늘을 나는 새들을 꿈꿔왔기에 가능했던 거야!”
“……시더?”
가인은 정색을 하며 소리치는 시더의 반응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이렇듯 뭔가에 분노하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다.
“꿈은 현실 도피가 아니야!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주는 운명의 바람이야! 만약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지금과 같은 문화는 이룩하지 못했을 걸! 꿈을 우습게 여기는 살마은 절대 용서받아서는 안돼! 알았지, 가인? 내 말을 알아듣겠냐고!”
“아, 으응.”
가인은 시더의 기분이 더 상하기 전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그녀가 화를 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인은 자신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 시더. 괜한 소리로 맘 상하게 해서.”
“아……그, 별로 사과를 받고 싶어서 한 소리는……아니었어. 그러니까 나는 단지, 그냥…….”
시더는 그제서야 자신도 이상하게 열을 냈었다는 걸 깨닫고선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빨갛게 상기된 뺨을 손바닥으로 식히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미안해, 가인. 다짜고짜 소리쳐서. 정말……정말 미안해. 갑자기 그랜마 생각이 나서 그만…….”
“그랜마? 할머니?”
가인은 시더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시더에게 할머니가 있었나? 시더는 드물게도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사실 앞에 내가 했던 말은 마이 그랜마가 해줬던 말이었어. 꿈은 과학의 원천이다.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주는 운명의 바람이다. 매일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이거든.”
“그,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화를 냈던 거구나. 가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선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잘 알지도 못하고.”
“으으응! 괜찮다니까! 하지만 꿈은 절대로 무시되어선 안돼, 가인. 네가 사용하는 오라 능력도 이미지 메이킹을 통한 의지의 힘이잖아? 상상을 구현화 시키는 능력! 오라야 말로 꿈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란 말이야.”
“그렇……구나.”
가인은 새삼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놀라워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인의 힘이야말로 꿈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꿈을 이뤄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오라 능력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시더는 그렇게 납득해하는 가인의 모습에 대번에 의기양양해졌다.
가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더는……정말로 할머니를 좋아하는구나?”
“응! 정말 좋아해! 그랜마는 내 자랑이자 우상이라고! 내가 이렇듯 AI슈츠를 발명해내고 피스메이커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랜마가 오리하르콘의 제련법을 찾아냈기 때문이야.”
“뭐?”
가인은 지금껏 피스메이커의 모든 발명품은 다 그녀가 만들어 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 놀람이 더욱 컸다. 저 시더가 발명을 하는 데에 있어서 기초를 쌓아준 사람이라니!
“헤헴. 뭘 그 정도 가지고 놀라시나? 마이 그랜마는 더더욱 굉장하신 분이라고! 나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위대한 과학자야!”
“그 정도란 말이야?”
“응!”
조금도 지체 없이 대답하는 시더. 그 모습에서 가인은 시더가 할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얼마나 존경하는지도.
“그럼 그 위대한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신 거야?”
“어…….”
하지만 가인의 질문에 시더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방금 전까지 기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런 시더의 반응에 가인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아, 혹시……돌아가신 건가?
“마이 그랜마는…….”
시더는 천천히 임을 열었다.
“마이 그랜마는 2020년 대재해 때 실종되셨어. 알고 있지? 그 LA 사건?”
“아, 으응.”
<대재해란 노아가 처음 차원을 넘어오면서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LA의 모든 사람이 사망했다. 생존자는 고작 6명. 그 중 2명을 제외하면 전부 오라 능력자였다. 대재해는 최초로 SA급 몬스터 드래곤이 나타난 때이기도 하다.>
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시더가 대재해 따 가족을 잃은 피해자였을 줄이야…….
“미, 미안. 나……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으으응. 왜 자꾸 사과하고 그래, 가인? 괜찮아. 괜찮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그때 가족을 잃은 사람이 나 혼자뿐이었던 것도 아니고, 워낙에 옛날 일인지라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 가인이 사과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
거짓말.
시더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똑똑히 기억하는 주제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주제에.
‘2020년 3월 9일.’
최초의 게이트가 발생한 날이자. 다른 차원의 존재가 처음으로 삼차원에 모습을 드러낸 날. 21세기 최악의 재앙일이자 세계 각지가 피로 물든 날. 그 사건의 현장에, 최초로 모든 것이 시작된 미국의 LA속에…….
‘나도 있었다.’
그 속에 나도 있었어. 그랜마를 따라서, 그 연구 시설 속에서, 나는…….
‘시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할머니의 비명소리. 그때 할머니는 왜 나에게 소리를 질렀던 걸까? 왜 그렇게 다급한 표정을 지으셨던 걸까? 도대체 왜……그 하얀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머리가 아파.’
분명 기억하고 있는데, 알고 있음이 분명한데, 거기에 생각이 미칠 때면 언제나 지독한 두통과 현기증이 그녀의 사고를 방해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상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마치 테이프를 앞으로 되감는 것처럼. 자신이 대재해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되어버린다.
가인은 갑자기 시더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자 의아함을 느끼며 그녀를 불렀다.
“시더?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응, 어라? 어? 가인? 에……또, 그러니까……어디까지 얘기했었지?”
뭔가 횡설수설하다가 오히려 자시에게 되묻는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뭘까……? 이 이상한 반응은? 하지만 대재해 때의 안 좋은 기억 때문 일거라 생각하며 가인은 넘겨버렸다.
“아, 그게……꿈 얘기였어. 그래. 꿈 얘기. 그러니까…….”
가인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TV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는 엑스카이저 애니며이션을 바라보았다. 그는 씩 웃으며 TV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시더는 저런 거대 로봇을 만드는 게 꿈인 거야?”
“응?”
시더는 두 눈을 깜빡이며 엑스카이저를 바라보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골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격납고에 위치한 은색의 거인을 떠올려보았다. 만약 그 거인을 보게 된다면 가인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나?
“흐으으음. 뭐, 그것도 꿈이기는 해.”
시더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가장 큰 꿈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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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에에에엑스 부우메에라아앙!≫
어두운 방 안. 그 안을 밝혀주는 것은 TV에서 흘러나오는 형광색의 불빛 뿐 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마저도 TV에 닿을 것처럼 앉아 있는 한 소녀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다. 한 다섯 살 정도 되었을까. 긴 흑발 사이로 드러난 아이의 얼굴은 그 나의 또래의 천진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타아아앗! 좋아! 이대로 엑스 원(One)으로 간다!≫
≪아니. 여기서는 엑스 투(Two)가 적격이다! 조종을 내게 넘겨라, 유찬!≫
≪뭣이! 지금 리더의 말을 무시하는 거냐! 진!≫
≪넌 지금 유미 씨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고 있어! 분별력을 잃은 너에게 리더의 자리를 맡길 수는 없다!≫
≪네 녀석이!≫
TV에서는 한창 용자전기 엑스카이저가 방영되고 있었다. 오늘의 방영분은 1기에서 클라이맥스라고 칭해지는 ‘47화 죽음, 그리고 분열의 시작!’ 이라는 에피소드였다.
엑스 조종사들이 남 몰래 사모해오던 가 박사의 딸, 가유미가 죽음으로 해서 유찬과 진, 그리고 김유신이 서로에게 불신을 품게 된다는 내용이다.
TV앞에 앉아있던 소녀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엑스 카이져에게 혼이라도 빼앗긴 듯한 모습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리더가 있었지? 유찬! 진! 착각하지마라! 엑스 카이저는 우리 모두의 것! 세 명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 언제부터 우리의 머리 위에 섰다는 거냐? 찬!≫
≪제길! 왜 내 맘을 몰라주는 거야! 유미 씨의 죽음으로 너까지 이성을 잃은 거냐, 유신!≫
≪이성을 잃어버린 건 너겠지!≫
≪싸움을 부추기지 마, 진!≫
세 명의 싸움은 점점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고, 진은 결국 말해서는 안될 금기를 유찬에게 말해버렸다.
≪유미 씨는, 그녀는……너를 지켜내기 위해 그 목숨을 희생하셨다! 정신을 잃은 네 녀석을 위해! 그렇게 그녀의 목숨으로 살아난 주제에! 그녀를 지켜내지도 못한 주제에! 그런 녀석에게 우리의 목숨을 맡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
충격으로 침묵에 휩싸이는 콕피트(Cockpit). 그리고 유찬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 하하. 그래. 모든 건……나의 죄……로군. 그녀를 지키지 못한…….≫
≪……찬.≫
진은 그제야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닫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그리고 유미가 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조종을 너에게 넘기겠다, 진≫
≪…….≫
진은 이를 악물며 레버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일단은 눈앞의 메카 사우르스부터 없애는 게 최우선 사항이었다. 진의 음성 인식 장치와 간단한 수 조작으로 인해 엑스 카이저는 변신을 시작했다.
≪엑스으으 투(Two)!≫
엑스 카이저가 삼단으로 분리되자 맨 앞에 위치하고 있던 1호기가 2호기와 3호기의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지켜 볼 메카 사우르스가 아니었다. 거기다 흔들리는 마음으로 인해 합체 타이밍까지 어긋난 엑스 대원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메카 사우르스의 화염 공격이 그들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아악!≫
불길에 휩싸이며 합체 노선에서 튕겨나가는 기체들. 그렇게 엑스 카이저의 합체가 실패로 끝나자 지켜보던 소녀는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TV에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닥 타닥 타닥
시끄러운 TV소리로 인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니 컴퓨터의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소녀가 돌아본 방향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한 연구복 차림의 여인이 말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긴 금발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있었는데, 모발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아선지 땋은 이음새 사이로 머리칼들이 제멋대로 삐져나와 있었다. TV앞의 소녀는 말없이 그런 여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그랜마(Grandma).”
하지만 소녀의 목소리는 여인에게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TV소리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소녀는 아직 엑스카이저가 끝나지도 않았건만 미련 없이 TV를 꺼버리며 여인을 향해 재차 불렀다.
“그랜마, 나 심심해.”
그제야 들린 것일까. 키보드를 치던 여인의 손길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차 손가락은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여인은 시더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 시더, 착하지?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으렴. 조금만 더…….”
여인은 어딘가 조급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여인의 작업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매진한다면 지난 30여 년간 매달려온 연구가 성과를 보일지도 몰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지만 그 조금만 더란 말을 얼마나 반복해왔던 것일까?
소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심심하다고 말하면 할머니는 매번 기다리라고만 말한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삑
다시 TV를 켰다. 그러자 엑스카이저의 엔딩과 함께 스탭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잠깐의 순간에 47화가 끝났던 모양이다. 이후부터는 재미없는 퀴즈프로그램과 쇼 프로그램이 이어질 것이다. 소녀는 더 이상 TV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계속 TV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녀가 자신을 돌아봐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계속 소녀는 TV만을 바라보았다.
≪안돼! 멈춰!≫
≪바보같은 짓 그만둬라, 유신!≫
절규하는 유찬과 진. 그들의 눈앞에는 엑스 카이저의 세 번째 타입, 엑스 쓰리(Three)가 자신의 배는 될 듯한 메카 사우르스를 끌어안은 채 연푸른 빛의 입자에 둘러싸여 빛나고 있었다. 엑스 쓰리의 조종사 김유신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찬과 진에게 히죽 미소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뭐야. 걱정해주는 거냐, 너희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서로 티격태격 싸워대더니, 이제 와서 무슨 얼굴들로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 소리치는 거야?≫
≪농담할 때가 아니야! 그대로 엑스 카이저의 융합로를 폭주시켰다간 수 십 메가톤에 달하는 에너지의 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면 너까지 무사하지 못한다고!≫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당장 귀환해! 부탁이야!≫
애절한 찬과 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망설임마저 버릴 수 있었다. 내 결정은 틀리지 않았어!
≪헤, 헤헤. 그러고 보니 그때가 생각나는데. 처음 가 박사님의 제의로 연구소에 우리 셋이 모였을 바로 그 때가. 그 때도 우리는 지금처럼 서로 합심하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기에 바빴었지.≫
≪……유신, 너.≫
탄식하는 유찬. 그와 동시에 과거의 영상들이 그의 뒤로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저돌적인 자신과 시니컬한 진, 야수 같은 유신. 이 셋은 너무나 각자의 개성이 강했기에 도저히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날, 사우르스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 시범 운행도 하지 못하고 엑스 카이저에 탑승했던 그 날.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콕피트 안에서 느껴지던 서로의 숨결을. 서로의 생각을. 서로의 투기를!
≪이 녀석들이라면 믿을 만하다! 이 녀석들과 함께라면 해볼 만 하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지금껏 우리 셋은 싸워올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응당 진저리를 칠 법한 사투의 현장들을 뚫고 올 수 있었다. 그것은 서로를 믿고 있었기에!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이었다!
≪난……너희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이……자랑스럽다.≫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자직한 김유신의 목소리. 유찬은 기어코 슬픔을 참지 못하며 눈물을 흘렸고, 냉정하기 짝이 없던 진 마저도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 고집불통 자식은 이미 결정해 버린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내기로. 그러기 위해선 기꺼이 자신의 목숨 마저도 내던져버릴 것이다.
≪유신……!≫
≪헤헤. 미안하게 됐다. 젠장, 나도 이런 역은 사양하고 싶었는데. 큭.≫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지는 콕피트 안에서 유신은 엑스 선 융합로의 열기를 견뎌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연구실의 모니터로 비치는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이만 작별이다. 이 뒤는……너희들에게 맡기겠어.≫
너희들을 믿고, 너희들의 손에 나의 바톤을 넘긴다!
≪으랴아아아아아아압!≫
찢어져 나갈 것 같은 고함 소리. 그와 동시에……유신과 엑스 카이저는 빛과 함께 세계에서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우르스 제국이 준비한 최후의 메카 사우르스를 동반한 채.
“우, 우우우우우.”
그렇게 TV에서 펼쳐지는 영상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피스메이커의 기술부 치프 시더 웰리스. 그 곁으로는 피스메이커의 중축이라 할 수 있는 오라 능력자, 피스 블루 유가인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시더는 옆에 잔뜩 준비해놓은 티슈로 연신 눈물을 닦으며 코를 풀었다.
“훌쩍! 몇 번을 봐도 감동적이야. 동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김유신의 모습이라니! 이건 엑스 카이저의 전 시리즈를 통틀어서 베스트 파이브 안에 들어가는 명장면이라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47화에서 틀어졌던 찬과 진의 관계는 회복되고 엑스카이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지.”
“…….”
울면서 설명할 건 다 하잖아.
가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시더의 말에 대꾸했다.
“새로운 전기라고?”
“그래! 바로 제 4의 엑스 조종사 이순신의 등장이지! 순신은 유신의 빈 자리를 메꾸게 되는데,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특공으로 눈부시게 가버린 선배의 후광에 가려져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돼. 이에 선배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분투하는 순신의 에피소드는 2기의 놓쳐서는 안될 불거리지!”
“……2, 2기? 그러면 방금 전까지가 1기였던 거야?”
“That's right! 자, 어때? 가인? 이쯤 되면 너도 나와 같이 엑스 카이저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겠지!”
“그, 글쎄.”
가인은 대답을 회피하며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뭐, 전보다는 확실히 재미를 느끼게는 되었다지만……그렇다고 시더처럼 열변을 토해낼 정도는 아니라서.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다간 시더를 실망시키게 되겠지.
‘……그나저나 이 방은 전에 왔을 때보다 더 굉장해졌잖아?’
가인은 눈에 들어오는 방의 풍경에 혀를 내둘렀다.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시더의 지하 골방. 그 골방 안에는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가득 쌓여있던 연구 자료들은 예전보다 정확히 2배로 불어나 있었고, 거기다 웬 액션 피규어와 초합금 제품들도 그 사이 사이를 빈 틈 없이 채우고 있었다. 언제봐도 생각하는 거지만, 도깨비 소굴이 따로 없는 방이다.
“자자자! 그렇다면 이제 2기로 넘어가 볼까! 대파된 엑스 카이저를 대신하는 2호기. 그레이트 카이저와 멸망된 사우르스 제국을 대신하는 인베이더들의 사투가 시작된다고!
“아, 저기……지금 2기도 보려고?”
“그럼! 김유신의 죽음으로 텐션(Tension)이 절정에 이르렀잖아! 이 여세를 몰아서 오늘 안에 2기 30화까지 돌파하는 거야!”
“아……으응.”
가인은 힘없이 어깨를 떨구며 대답했다. 그나마 1기를 다 보게 된 것만 해도 틈틈이 시더를 찾아와서 애니메이션(Animation)을 감상한 결과였거늘. 오늘 안에 30화를 돌파한다니……그런 건 절대 무리라고!
‘……애니메이션?’
가인은 문득 자신이 중얼거린 단어를 떠올리며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만화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 어느새 시더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다 보니 그 단어가 입에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은근히 만화 영화 따위, 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뭔가 말도 안 되는 일만 생기면 ‘이런, 만화 같은’ 이라고 중얼거렸지.’
그러던 것이 시더에게 이끌려 이것저것 장르 불문하고 감상하다 보니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애니메이션은 어떤 의미에선 영화를 능가하는 표현 매체였던 것이다. 얼마든지 리얼한 연출이 가능한데다가 애니메이션만의 독창적인 기법은 실사의 그것보다 상당히 감각적이다. 더구나 영화 속 CG도 애니메이션의 한 범주였던 것이다. 가인은 새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만화를 무시해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구를 침략하는~악의 무리들에게는~언제나 우리가 간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과 이렇게 무리한 장시간 관람은 관계가 없단 말이지. 가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DVD를 바꿔 넣는 시더의 등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피식 웃어버린다.
‘뭐, 어때. 오늘 하루쯤은.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주말이었는데.’
그리고 누굴 만나거나 밖에 나갈 기분도 아니었고…….
가인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DVD메뉴 화면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때 막 DVD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던 시더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가인.”
“응?”
“학교에서는……별 일 없었어?”
잠깐의 침묵. 시더는 일부러 가인을 돌아보지 않으며 그의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가인은 앞과 변함없이 느슨한 목소리로 답했다.
“……으응. 별로.”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특별한 말은 없었다. 시더는 그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싫어한다는 걸 느끼고 리모콘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강력한 사운드와 함께 엑스 카이저의 2기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Burning Fire! 마음속에 있는 불꽃을 뿜어내라! 거침없이! 후회 없이!≫
“불꽃은 불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리!”
환호를 내지르며 주제가를 따라 부르는 시더. 그녀는 멍하니 앉아있는 가인을 향해 주먹을 쥐어 올리며 소리쳤다.
“뭐하고 있는 거야, 가인! 엑스 카이저의 명곡 Burning Fire야!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엑스 카이저의 이름이 운다고! 자, 따라 외쳐! Burning Fire에서 주먹을 들어올리며 외치는 거야! 어서 빨리!”
“자, 잠깐만 시더……난 괜찮아. 난 보는 걸로 만족한다고.”
“노! 노! 노! 전혀 괜찮지 않아! 이 정도의 열정도 없이 엑스 카이저를 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건 이미 팬으로서의 자격을 시험당하는 시련의 무대인 거야! 이 순간을 극복해내지 못하면 너에게 미래란 없어! 앞으로도 영원히 제자리에서 머무르게 될 거야!”
아니, 그……머물러도 그다지 상관은 없다만…….
가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에라, 모르겠다!
≪Burning Fire! 하늘 높이 날아라! 두려움 없이! 자신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라!”
“Burning Fire!”
“Burning Fire!”
“Burning Fire!”
가인과 시더의 기합 소리는 오프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학교에서는 그다지 별 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없었다. 단지 예전의 생활과 조금……달라졌을 뿐이다.
2학년 1반.
가인이 속해있는 학급. 그곳에는 지난 1년간 같은 교실 속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온 친구들이 있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과제 걱정으로 고민하고, 연예인 얘기로 웃고 떠드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 너무나도 당연한 풍경. 하지만…….
‘괴물.’
그 사건 이후로 가인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변함없는 풍경 속에서, 변함없는 교실 속에서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도.
단지 그것만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교실은 여전히 평화로웠고 여전히 시끄러웠고, 여전히 활기찼다. 그저 가인만이 그 속에서 떨어져 나왔을 뿐이다. 닺니 그것 뿐. 그 외에는 별 일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없었다.
‘이제는……모르겠어.’
오라 능력자니, 피스메이커니, 몬스터니.
잠시라도 좋으니까 잊고 싶었다. 힘이 있는 이와 없는 이의 차이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면 지금과 같은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지킬 거야.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솔직히 회의감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라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힘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자신은 모두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괴물이란 말은 다른 걸 뜻하는 게 아냐! 자신들과는 다르다! 우리와 넌 틀리다! 그걸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표현한 이기적인 말에 불과해!
문득 카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을 절실히 공감하게 된다.
‘다른……걸까?’
나와 그들은 서로 다른 건가. 난 더 이상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인 건가. 인간이……아닌 걸까?
‘그렇다면 나도 틀리다는 거야? 여기 있는 시민 씨와 유리도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마리의 꾸짖음이 생각났다. 미안해요, 선배.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하지만…….
‘괴물!’
그 말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날 바라보던 모두의 눈빛이 잊혀지질 않아. 그 눈빛 속에서 느껴지던 공포와 두려움! 뒷걸음질 치던 그 모습들! 그 모든 걸 어떻게 잊을 수 있단 거지! 그 후로 모두가 보여주는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모두가 얘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인은 느낄 수 있었다. 괴물. 괴물이라고. 건드리면 잡아먹힐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그 태도들이라니!
‘싫다. 정말…….’
혹시 피해망상증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너무 예민해진 거 아냐? 하지만 분명 뭔가가 바뀌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더 이상 예전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학교도, 친구들도, 괴물 취급을 받는 것도. 그리고 오라 능력에 관한 것도. 이런 마음으로 시민 씨와 마리 선배, 진우 씨와 유리, 브루스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재영과 테레이아, 우석과 지연 선생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를 피하며 오게 된 곳이 다름 아닌 여기였다.
시더의 골방.
오라 능력자가 아니면서도 자신을 친구로 맞이해줬던 그녀. 그렇게 주말 아침부터 시더를 찾아온 가인은 지금 이렇듯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으으으, 으아아악!≫
화면에서는 한 남자가 그레이트 카이저의 조종석에서 얼굴이 일그러진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1호기와 2호기에 답승해 있던 유찬과 진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찬섭 중위! 속도를 너무 냈다!≫
≪계기판을 잘 봐!≫
하지만 그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찬섭 중위는 가혹한 중력의 압박에 몸을 떨고 있었다.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귓청을 때리는 괴물의 비명 소리 같은 굉음이 점점 그의 사고를 마비시킨다.
≪손이……안 움직여……계기판이 보이질 않아…….≫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리는 중위의 목소리에 유찬과 진은 이를 악물었다. 제길! 중지시켜야 해! 이대로 합체했다가는 셋 모두가 다 위험해진다!
≪안돼. 합체는 당장 중지다! 찬섭 중위, 열 분사로 합체 루트에서 빠져 나가! 어서!≫
≪안……돼. 내장이……튀어……나온…….≫
≪진정해!≫
≪우, 우우, 우아아아아아!≫
쿵! 간신히 유찬과 진이 열분사로 루트에서 빠져나갔지만, 3호기의 찬섭 중위는 그대로 기체를 조절하지 못하고 맹렬히 지상으로 낙하했다. 찬과 진은 비통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분명 조종사는 그레이트 카이저의 기체와 함께 공중에서 산화될 것이다.
“으음. 그렇지. 역시 그레이트 카이저는 엑스 카이저의 2배에 달하는 능력인 만큼 평범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기체가 아니지. 고인이 된 김유신과 같은 운동 신경을 겸비한 초인이 아니고서야 무리라고. 절대 무리.”
시더는 안경을 빛내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합체에 웬 운동 신경이 필요하다는 건지.’
애초에 조종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었다는 소리 밖에 안 되잖아. 아니. 그것보다도……과학자로서 저런 설정에 동의 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시더 선생님?
“그러니까 여기서 김유신에 버금가는 육체 능력을 지닌 이순신이 등장해야 하는 거야! 그만이 유신의 비기였던 ‘백두산 메치기’를 계승할 수 있다고!
“……백두산?”
“응! 백두산! 엑스 카이저, 아니. 이제부터는 그레이트 카이저지. G카이저의 세 번째 타입. G쓰리의 기술이야. 길이 조절이 자유로운 그 팔로 상대의 몸을 감싼 채 메치기를 하면 중심 부근에 100미터퍼섹커(100m/s) 이상의 풍속이 일어나며 중심 진로에 있는 상대를 맹렬한 세력으로 감아올리는 기술이지. 김유신이 백두산에서 터득한 기술이라 백두산이란 지명이 붙게 된 거야.”
“…….”
특훈이라니. 로봇 조종과 산속에서 하는 훈련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야? 가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이런 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나만 손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는 이런 로봇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는 시더가 정말 AI 컴플리트 세트를 만든 장본인이란 걸 믿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로봇은 말이야…….
“시더, 내 친구가 말하기를…….”
아니. 정확히는 박재영, 그 인간이 말한 것이지만.
“로봇은 무기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던데.”
“헉!”
순간, 시더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그가 말해서는 안 될 금기를 말해버렸다는 것처럼 기겁했다. 가인은 그녀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 뭐지. 이 기분은? 마치 어린애의 꿈을 부숴뜨린 것만 같은…….
“그, 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 일단 두 발로 서있다는 행위도 상당히 그런데다가……그 조종도 레버를 몇 번 당기기만 하면 되는 터무니없는 구조고, 또 연료 문제에다가, 수리비에다가.”
“으, 으으으으음.”
시더는 신음을 흘리며 말 그대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인은 더더욱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 그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모습을 감춰야 되는 게 일반 상식인데 저렇게 거대한 인간형으로 나타나면 ‘날 쏴 주십쇼’하고 시위하는 것 밖에 안되잖아? 그리고 들은 말이지만. 저 거대한 로봇이 공격당하면 안에 타고 있던 조종사도 무사하지 못한다고…….”
“그만!”
시더는 가인의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인은 그녀의 반응에 움찔 몸을 떨며 입을 다물었다. 시더는 어디선가 가져온 마커와 보드를 그 앞에 내려놓으며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자! 일단 로봇이라는 개념부터 설명해주지! 로봇이란 말은 체코어의 ‘일한다(rovota)’라는 뜻으로,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K, 차페크가 희곡 ‘로성의 인조인간’을 발표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대명사지. 하지만 로봇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어.”
“훨씬……전부터?”
“그래! 바로 고대부터! 그리스, 로마 시대 및 기원전에서 종교 의식의 도구로 만들어졌던 거야! 물론 이때의 인조인간은 엑스 카이저와 같은 거대 로봇이 아니라 단순히 문을 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자동인형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로봇의 역사란 이토록 오래되었다는 거야. 예전부터, 그보다 훨씬 예전부터 사람들은 로봇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거지.”
“……그렇구나.”
가인은 나지막히 감탄했다. 아니. 잠깐. 하지만 그렇다고 로봇의 실용성이 설명되는 건 아니잖아? 시더도 가인이 그 부분을 궁금해 한다는 걸 알았는지 설명을 재개했다.
“그래. 가인, 너의 말대로 사실 로봇이란 건 사람의 일을 대신해주는 기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반드시 인간형일 필요는 없어. 이족보행보다는 사족보행이 훨씬 이동에 용이하고 합리적이지.
시더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TV를 돌아보았다. TV의 엑스 카이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인간형 로봇이라는 건 어쩌면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거야.”
“본능?”
“그래. 사람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후손을 낳고 애정을 쏟아 기르잖아?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 하는 욕구. 성경에서 보면 God은 자신의 모습을 본따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만들었다고 하지? 난 그게 인간의 얘기라고 생각해.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뜬 뭔가를 창조해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 거야. 그 욕구의 발로 중 하나가 로봇인 거고.”
“……아아.”
가인은 시더의 설명보다도 그녀가 보여주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마치 아이를 가진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하, 하하하.
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욕구……인 건가.”
“그래. 아마 인간에게 생식 능력이 없었더라면, 로봇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을 걸? 인간의 번식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바퀴벌레의 생명력만큼이나 경이로우니까.”
……아니. 어째서 잘 나가다가 그 쪽으로 얘기가 가는 건지…….
가인은 혀를 차며 TV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엑스 카이저의 영상에 다시 최초의 의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내가 묻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거대 로봇은 실용성이 없다는 거지?”
“윽.”
시더는 어깨를 움찔 떨며 한껏 초조한 기색을 띄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얼렁뚱땅 넘길 생각이었던가.
“응? 시더? 거대 로봇은 실용성이 없는 거지? 그렇지?”
“우우우우.”
시더는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가인은 그렇게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빙글 빙글 웃기만 했다. 아, 시더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거 너무 재밌잖아? 하하하.
그렇게 가인이 의기양야해 하자 시더는 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난데 없이 눈 앞의 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아니! 거대 로봇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 일류에게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어! 절대로! 반드시 도움이 돼!”
“……어, 어떻게?”
가인은 시더의 박력이 주춤 뒤로 물러나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시더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거대 로봇은!”
바로!
“인류의 꿈이야!”
쿵
순간 할 말을 잊은 가인. 그저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간신히 입술을 열어 맥 없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꿈?”
“그래! 꿈!”
“꿈……이라고?”
“그래! 이쯤 되면 답변이 되었겠지? 꿈이야! 꿈! Dream!”
……전혀 답변이 안되잖아.
가인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과학적인 대답을 기대했었는데 뜬금없이 꿈이라니? 그렇게 가인이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시더는 두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말했다.
“와앗! 그 태도는 도대체 뭐야, 가인! 설마 꿈이라는 말을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예이. 예이. 꿈 말씀이십니까? 잘 알아들었습니다.”
가인은 피식 피식 웃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더더욱 속이 상한 시더는 발까지 동동 굴리면 열변을 토해냈다.
“꿈을 우습게보지 말아! 꿈은! 인간의 상상력은 과학의 원천이야! 상상하지 않으면 모든 일은 시작되지 않는다고! 인류가 우주여행을 하게 된 것도 160년 경의 그리스 작가 루키아노스가 쓴 단편 ‘이카로메니포스’에서 발단이 되었고, 20세기의 하늘을 열 수 있던 것도 하늘을 나는 새들을 꿈꿔왔기에 가능했던 거야!”
“……시더?”
가인은 정색을 하며 소리치는 시더의 반응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이렇듯 뭔가에 분노하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다.
“꿈은 현실 도피가 아니야!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주는 운명의 바람이야! 만약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지금과 같은 문화는 이룩하지 못했을 걸! 꿈을 우습게 여기는 살마은 절대 용서받아서는 안돼! 알았지, 가인? 내 말을 알아듣겠냐고!”
“아, 으응.”
가인은 시더의 기분이 더 상하기 전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그녀가 화를 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인은 자신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 시더. 괜한 소리로 맘 상하게 해서.”
“아……그, 별로 사과를 받고 싶어서 한 소리는……아니었어. 그러니까 나는 단지, 그냥…….”
시더는 그제서야 자신도 이상하게 열을 냈었다는 걸 깨닫고선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빨갛게 상기된 뺨을 손바닥으로 식히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미안해, 가인. 다짜고짜 소리쳐서. 정말……정말 미안해. 갑자기 그랜마 생각이 나서 그만…….”
“그랜마? 할머니?”
가인은 시더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시더에게 할머니가 있었나? 시더는 드물게도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사실 앞에 내가 했던 말은 마이 그랜마가 해줬던 말이었어. 꿈은 과학의 원천이다.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주는 운명의 바람이다. 매일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이거든.”
“그,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화를 냈던 거구나. 가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선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잘 알지도 못하고.”
“으으응! 괜찮다니까! 하지만 꿈은 절대로 무시되어선 안돼, 가인. 네가 사용하는 오라 능력도 이미지 메이킹을 통한 의지의 힘이잖아? 상상을 구현화 시키는 능력! 오라야 말로 꿈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란 말이야.”
“그렇……구나.”
가인은 새삼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놀라워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인의 힘이야말로 꿈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꿈을 이뤄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오라 능력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시더는 그렇게 납득해하는 가인의 모습에 대번에 의기양양해졌다.
가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더는……정말로 할머니를 좋아하는구나?”
“응! 정말 좋아해! 그랜마는 내 자랑이자 우상이라고! 내가 이렇듯 AI슈츠를 발명해내고 피스메이커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랜마가 오리하르콘의 제련법을 찾아냈기 때문이야.”
“뭐?”
가인은 지금껏 피스메이커의 모든 발명품은 다 그녀가 만들어 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 놀람이 더욱 컸다. 저 시더가 발명을 하는 데에 있어서 기초를 쌓아준 사람이라니!
“헤헴. 뭘 그 정도 가지고 놀라시나? 마이 그랜마는 더더욱 굉장하신 분이라고! 나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위대한 과학자야!”
“그 정도란 말이야?”
“응!”
조금도 지체 없이 대답하는 시더. 그 모습에서 가인은 시더가 할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얼마나 존경하는지도.
“그럼 그 위대한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신 거야?”
“어…….”
하지만 가인의 질문에 시더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방금 전까지 기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런 시더의 반응에 가인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아, 혹시……돌아가신 건가?
“마이 그랜마는…….”
시더는 천천히 임을 열었다.
“마이 그랜마는 2020년 대재해 때 실종되셨어. 알고 있지? 그 LA 사건?”
“아, 으응.”
<대재해란 노아가 처음 차원을 넘어오면서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LA의 모든 사람이 사망했다. 생존자는 고작 6명. 그 중 2명을 제외하면 전부 오라 능력자였다. 대재해는 최초로 SA급 몬스터 드래곤이 나타난 때이기도 하다.>
가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시더가 대재해 따 가족을 잃은 피해자였을 줄이야…….
“미, 미안. 나……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으으응. 왜 자꾸 사과하고 그래, 가인? 괜찮아. 괜찮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그때 가족을 잃은 사람이 나 혼자뿐이었던 것도 아니고, 워낙에 옛날 일인지라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아. 가인이 사과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
거짓말.
시더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똑똑히 기억하는 주제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주제에.
‘2020년 3월 9일.’
최초의 게이트가 발생한 날이자. 다른 차원의 존재가 처음으로 삼차원에 모습을 드러낸 날. 21세기 최악의 재앙일이자 세계 각지가 피로 물든 날. 그 사건의 현장에, 최초로 모든 것이 시작된 미국의 LA속에…….
‘나도 있었다.’
그 속에 나도 있었어. 그랜마를 따라서, 그 연구 시설 속에서, 나는…….
‘시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할머니의 비명소리. 그때 할머니는 왜 나에게 소리를 질렀던 걸까? 왜 그렇게 다급한 표정을 지으셨던 걸까? 도대체 왜……그 하얀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머리가 아파.’
분명 기억하고 있는데, 알고 있음이 분명한데, 거기에 생각이 미칠 때면 언제나 지독한 두통과 현기증이 그녀의 사고를 방해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상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마치 테이프를 앞으로 되감는 것처럼. 자신이 대재해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되어버린다.
가인은 갑자기 시더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자 의아함을 느끼며 그녀를 불렀다.
“시더?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응, 어라? 어? 가인? 에……또, 그러니까……어디까지 얘기했었지?”
뭔가 횡설수설하다가 오히려 자시에게 되묻는 시더의 모습에 가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뭘까……? 이 이상한 반응은? 하지만 대재해 때의 안 좋은 기억 때문 일거라 생각하며 가인은 넘겨버렸다.
“아, 그게……꿈 얘기였어. 그래. 꿈 얘기. 그러니까…….”
가인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TV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는 엑스카이저 애니며이션을 바라보았다. 그는 씩 웃으며 TV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시더는 저런 거대 로봇을 만드는 게 꿈인 거야?”
“응?”
시더는 두 눈을 깜빡이며 엑스카이저를 바라보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골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격납고에 위치한 은색의 거인을 떠올려보았다. 만약 그 거인을 보게 된다면 가인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나?
“흐으으음. 뭐, 그것도 꿈이기는 해.”
시더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가장 큰 꿈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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