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여신님-네크로맨서 카이 브릿드(13)
페이지 정보
본문
스쿨드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유롭게 구경을 했다. 대지의 정보를 읽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몇 년간 살면서 일본의 기운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으니 더욱 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에도 조사를 하는 건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현재 세계의 중심지, 이곳에서 옴팔로스라 부르는 곳을 포함한 용맥은 총 여섯 곳. 한국을 맨 마지막 후보지로 두고 울드와 페이오스와 스쿨드가 세 곳을 조사하면 남은 장소는 두 곳.
그들이 한국을 마지막 후보지로 둔 건, 피스메이커의 정보와 그들의 생각이 합쳐진 결과였다. 오라의 주인이라 불리는 피스 대원. 피스 블루 유가인. 그리고 배신자라 불리는 이전의 오라의 주인. 한시영.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한국인이라는 점. 그리고 다른 국가에서는 몬스터의 등장이 점점 뜸해진다고 한다. 반면에 한국은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다. 또한 한국은 정기(正氣)가 모인 곳이 다른 나라보다 많다. 그리고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비해 인재도 많이 나는 나라다. 이런 점들을 살펴보면 한국이 옴팔로스, 즉 세계의 중심지이거나 중심지와 매우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스쿨드가 노는 이유였다.
아무튼 스쿨드는 30여분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원래의 백화점 옥상으로 돌아왔다.
“흐음…어디보자. 이 선이 요기로 오고, 이 붉은 선은 모니터로 오고, 좋아. 다 됐다. 그럼, 스위치 온!”
스쿨드가 손에 들고 있는 컨트롤러의 붉은 색 버튼을 누르자 연결해놓은 3개의 모니터에 일제히 빛이 들어왔다.
왼쪽 화면은 여러 가지 곡선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고 그 옆의 화면은 일본이 나와 있었다. 그 옆의 화면엔 여러 가지 숫자들이 표시되고 있었는데 그 숫자들은 맨 왼쪽 화면의 파장을 수치화 시킨 것이었다.
사실 스쿨드가 30분 전에 날린 미니 로켓들은 도쿄 전역에 퍼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대략 5분정도? 그런데 스쿨드가 돌아오기까지 이렇게 시간이 걸린 건 다 이유가 있다. 단순히 한눈팔다 이제야 온 것이 아니다.
첫째. 스쿨드가 날린 미니 로켓에는 대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지의 힘, 즉 이 곳 식으로 말하면 오라가 어느 정도나 존재하는지 알아내는 것이고 또 하나가 대지의 상태, 즉, 그 대지가 건강한가. 곡식 등이 뿌리내릴 여건이 되는지 등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런 정보를 파악하는데 10분이란 시간이 걸린다.
둘째. 스쿨드는 도쿄에만 미니 로켓을 날린 게 아니다. 오라의 존재여부를 확실히 알려면 그 비교대상이 있어야 하는 법. 따라서 스쿨드는 가까운 한국에도 미니 로켓을 날렸다. 한국으로 날린 것은 입력해 놓은 데이터에 의해서 서울 전역에 설치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스쿨드는 30분 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놀았던 것이다.(차마 놀았다는 것을 부정은 못하겠다.)
타다다닥! 타닥! 타다다다다다!
스쿨드의 손이 마치 피아노 건반 위를 노니는 것처럼 빠르고 경쾌한 속도로 키보드 위를 오갔다. 그로 인해 쉴 새 없이 바뀌는 화면들. 미니 로켓이 읽어 들인 정보를 모니터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모아서 분석하면 그때서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좋아.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제 슬슬 분석을 해볼까.”
타다닥!
스쿨드가 키보드를 잠시 두드리자 왼쪽과 오른쪽 화면에 각각 서울과 도쿄의 오라의 잔여량이 그래프 형식으로 떴고 가운데 화면에는 양쪽 화면의 정보가 전부 수치화 되서 표시되고 있었다.
“역시 짐작이 맞았어. 이 정도나 모여 있으니 대지의 정령들이 움직이질 못하지. 지금 보이는 이 수치는 비정상적이야. 게다가 아직도 늘어나고 있다는 건 결국 모든 에너지가 모이는 곳이 이곳이란 말이지.”
스쿨드가 바라보고 있는 건 서울의 상황을 나타낸 그래프였다. 게이트는 세계의 중심에 제대로 보내주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것을 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들이다.
아니,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어. 아직 늦진 않았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휙
가인은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도 십미터 가까이 도약하여 재영과 지연의 앞으로 내려섰다. 그 허깨비 같은 움직임에 깜짝 놀란 재영 일행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
가인은 그런 그들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테레이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대신하여 몬스터의 공격을 받고 혼절해있었다. 물에 젖은 에메랄드빛 머리카락들이 창백한 얼굴에 엉겨 붙어 있었고, 입술 사이로는 가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인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를 공격하고, 자신의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린 카이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들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나는 뭘 그렇게 망설였던 거지……!’
겨우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방관만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결국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미안, 테레이아…….’
가인은 그녀의 입술에 묻어 나오는 피를 닦아주며 품에서 포션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그녀에게, 하나는 자신에게 주사했다. 전신이 짜릿해지며 두 눈이 맑아지는 포션 특유의 청량함이 느껴졌다.
‘난……깨달았어.’
날 지켜준 너의 모습을 통해서. 테레이아, 너의 보호를 받고 나서야 나는…….
‘지킨다는 것은……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
자기 자신을 먼저 챙기고 있었던 나로서는……누군가를 지킨다는 게 가능 할 리가 없었다. 힘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그런 건 부수적인 문제였다.
가장 커다란 문제. 그것은 지킬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그런 너무나도 당연한 마음가짐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재영아.”
“……!”
가인의 낮은 부름에 재영과 지연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들은 눈 앞의 AI슈츠 복장을 한 남자에게서 가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수업을 받고 있던 학생이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농담을 주고받던 친구였는데…….
그런 그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자신들의 앞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여기…….”
재영과 지연은 가인이 넘겨주는 테레이아를 부축하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AI핼맷이 해제되며 드러난 가인의 얼굴은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테레이아를 부탁할게.”
그렇게 말한 후 가인은 주저없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재영과 지연은 그런 그를 붙잡지 못했다. 미처 이름을 불러주지도 못했다. 여기서 그를 붙잡지 않으면, 이대로 그를 떠나보내면 다시는 그가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끝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큭! 그래! 와라!]
카이는 그런 가인을 네크로맨시 된 괴수의 눈으로 내려다보며 공격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뒷문으로 도망치려던 2학년 1반의 학샐들을 네크로맨시로 다시 붙잡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더 많은 구경꾼들을 끌어 모으는 게 효과적이었다. 지킨다, 믿는다 따위의 말들이 갖는 무의미함을 똑똑히 가르쳐주마!
‘리리스…….’
제길! 쓰러진 그녀의 모습에 카이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 혼란스러움을 이겨낼 정도로 가인에 대한 증오가 강했다. 카이는 냉소적으로 소리치며 괴수의 능력을 개방시켰다.
[자! 어디 한번 능력을 보여주실까!]
그러자 괴물의 꼬리로부터 날카로운 창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독침들이 튀어나왔다. 예전 시민을 빈사 상태에 몰아갔던 길조의 독침과 같은 계열의 능력이었다.
[춤춰라!]
촤촤촤촤촤
순간, 괴물의 꼬리가 번개같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수십개의 찌르기를 가인에게 퍼부었다. 공격의 범위가 넓지 않으면서도 빈틈이 없는 정교한 찌르기! 하지만 가인은 환각지로 독침들을 모조리 피해내며 조금도 물러섬 없이 괴물을 향해 나아갔다.
[이 놈이!]
카이는 노호성을 내지르며 재빨리 꼬리를 수평 방향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콘크리트의 타일들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가인이 있던 자리가 한움큼 뜯겨져 나갔다. 지연과 재영은 걷혀나가는 연기 속에서 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비명을 질렀다.
“안돼!”
“유가인!”
후오오오오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위로부터 거대한 바람의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느샌가 수십미터를 뛰어오른 가인이 수영장의 천장에 발을 내딛으며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지연과 2학년 1반 일동은 할 말을 잊었다.
[아니!]
투아아앙
거센 폭발음과 함께 가인의 AI 슈츠에서 오라의 회오리가 발산되었다. 그러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천장이 폭죽처럼 터져나가며 균열을 일으켰다. 하지만 가인은 오히려 그 반동을 이용하여 마치 내리 꽂히듯 몬스터를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라이징----!!!!!”
아래로 내뻗은 가인의 발에서 오라의 토네이도가 휘날려 올랐다! 가인은 전신을 푸른빛의 토네이도로 휘감으며 하나의 섬광이 되었다.
“킥----------!!!”
쩍!
회오리 그 자체가 된 가인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라이징 킥은 정확히 몬스터의 정수리를 파고들어 뼈와 살로 이루어진 그 육체를 깨부수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몬스터를 꿰뚫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킥은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한 채 풀장의 바닥으로 내리 꽂혔다. 그러자 강렬한 후폭풍이 지연과 재영 일행을 덮쳤다.
[크헉!]
몬스터의 입을 통해서 카이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튕겨지듯 CCTV실의 육체로 돌아와야만 했다. 가인의 라이징 킥은 몬스터의 혼마저 뒤흔들 정도의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카이는 비틀거리는 학생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수영장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몬스터의 거대한 육체가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이, 이런 일이……!”
단 한번의 공격으로 자신이 조종하던 라무의 아이가 전투 불능에 빠진다니! 믿을 수가 없군! 카이는 새삼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인간이 오라의 주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리리스에 대한 감정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 녀석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그때 몬스터의 피를 전신으로 뒤집어쓴 가인이 고개를 들어 CCTV실의 카이를 노려보았다. 그 싸늘한 눈빛에 카이는 마음 한 켠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녀석에게는 아직……뭔가가 있다……?’
채챙!
가인의 양 어깨에서 날카로운 쇳수리와 함께 두개의 오라 소드가 튕겨져 나왔다. 가인은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움켜잡고 두 눈을 감은 채 오라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푸른 바람의 검 날이 두 줄기로 뻗어 나왔다.
위이이이잉!
거칠게 회전하는 오라 소드의 토네이도! 그 회전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리자 토네이도는 마치 새하얀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인은 검을 좌우로 엇갈리게 잡으며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간다!”
우우우웅!
순간 가인의 양 어깨로부터 강한 오라의 회오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한 쌍의 날개처럼 그를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카이는 이를 악물며 들고 있던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삐이이이이이…….
카이 브릿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네크로맨서. 그 호칭은 단순히 타인의 혼을 조종할 수 있다고 해서 부여받은 것이 아니었다. 네크로맨서의 본질적인 능력은 바로 생명 창조. 네크로맨시를 이용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창생(創生)의 술이야말로 그의 특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카이의 피리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가인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CCTV실을 향해 돌진했다.
‘용서 못해!’
내 친구들에게 손을 댄 네 녀석을! 테레이아를 건드리 네 녀석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오라의 주인!’
주제도 모르고 리리스에게 손을 뻗은 녀석! 내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네 놈! 그렇다면 너의 모든 것도 내가 다 빼앗아 주마!
“으아아아아아!!!!”
카이와 가인의 피를 토하는 기합 소리가 서로의 귓청을 두드렸다. 한발 먼저 카이에게 다다를 수 있었던 가인은 들고 있던 오라 소드를 사정없이 교차시켰다. 튀어 오르는 불꽃!
“오라---------베기!”
츠아아아아아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일도양단! 가인은 적을 베어내고도 돌진하던 힘을 이기지 못해 튕겨지듯 바닥을 굴렀다.
“크악! 으윽! 으으으윽!”
가인은 호흡이 타는 것만 같은 격통을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악다문 이빨 사이로 피가 배여 나왔다. 그는 빛을 잃어가는 오라 소드로 몸을 지탱하며 자신이 베어낸 상대를 돌아보았다.
‘놈은?’
카이는? 분명히 손에 베어낸 감촉이 있었는데!
“……!”
하지만 돌아본 곳에는 깨끗하게 절단된 바위 괴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카이는 가인의 오라 베기에 당하기 직전, 창생의 술을 이용하여 주위의 콘크리트를 매질로 삼은 골렘(Golem)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덕분에 골렘을 방패막이로 삼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신 튀어오른 콘트리트의 파편에 아랜배가 꽤뚫리는 중상을 입었다.
“컥! 으악!”
카이는 피로 범벅이 된 아랫바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네크로맨시 된 몸이라고는 하나 본체로 삼은 육신의 고통만큼은 고스란히 그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카이는 두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가인을 노려보았다.
“크, 크크큭. 꽤……하잖아? 역시 대단한 능력이군. 역시 대단한 괴물이야!”
“이 자식이!”
가인은 이를 갈며 카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카이는 출혈이 심해선지 안색이 하얗게 질려있었지만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흐흐흐흐. 지금 기분은 어때? 힘으로 상대를 짓누른 기분이란?”
“웃기지마! 이건 네가 먼저 시작한 싸움이야! 힘으로 상대를 짓누른 건 다름 아닌 너였잖아!”
“하, 하하하. 그래……내가 먼저 시작했었지. 하지만 똑같은 짓을 저지른 너도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어. 크크크. 나와 똑같은……괴물이다.”
“시끄러워! 입 닥치지 못해!”
가인은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애처롭게 소리쳤다. 카이는 그런 그의 모습에 조소를 흘렸다.
“왜 네가 괴물이라는 걸 부정하는 거지? 왜 네가 힘을 가졌다는 걸 부정하는 거야? 너희들은 우리를 괴물(Monster)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너희 자신은 왜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지? 똑같이 힘을 가졌잖아? 똑같이 폭력을 행사하잖아? 너희가 우리를 몬스터라 부른다면 우리도 너희를 몬스터라 부르겠다. 너와 난 영락없는 닮은 꼴, 괴물들이다!”
“닥쳐엇---------!!!”
가인은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타악
하지만 휘둘러진 주먹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야 했다.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를 막은 건 케이였다.
가인은 무어라 항의를 하려 고개를 케이에게 돌렸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케이는 카이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 몇계월동안 같이 지내면서 저렇게 화난 표정을 지은 건 오늘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너구나. 그따위 빌어먹을 짓을 한 놈이…….”
아니다. 그의 힘은 신의 육체를 지배할 정도로 강하지 않다. 그 상황을 만든 건 다른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 케이에겐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때의 그 참담했던 심정을 다시 느끼게 한 존재의 처벌만이 중요할 뿐.
“너 때문에…….”
저벅
“너 때문에…….”
저벅
한번씩 말을 내뱉을 때마다 케이는 카이에게 한걸음씩 다가섰다. 카이는 알지 못할 두려움에 조금씩 뒤로 물러섰지만 케이가 한걸음씩 다가오며 그 거리는 다시 제로가 되었다.
“너 때문에 로이나가!!!!”
투화아아악
외침과 함께 뿜어져 나온 거대한 힘에 의해 주위엔 엄청난 바람에 휩싸였고 그 힘에 정면으로 노출되었던 카이는 고스란히 그 기운을 얻어맞고 말았다. 그러자 힘없는 임간의 몸은 CCTV실의 무너진 벽을 통해 허공을 날았다. 카이는 그대로 지연과 재영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미 그 몸엔 더 이상 카이는 없었다. 케이는 떨어져 내리는 학생을 보면서 그 사실을 알고는 카이의 기운이 느껴지는 진원지를 찾아 다시 순간이동을 했다.
쿵
무력한 인간의 육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가 깨지고 전신이 피로 물들어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에게로 굴러오는 카이의 모습에 지연과 재영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 지연의 발목을 학생이 붙잡으며 힘없이 신음했다.
“사, 살려줘…….”
“……?”
CCTV실에서 내려오던 가인은 갑작스런 카이의 구걸에 어리둥절해졌다. 살려달라니? 저 자식,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카이에게 발을 붙잡힌 지연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려주세요, 선생님…….”
“너, 너…….”
지연은 자신에게 호소하는 이 학생을 본 적이 있었다. 이름은 기억할 수 없었지만 분명 자신의 수업을 받는 다른 반 학생들 중 한명이었다. 재영도 그의 얼굴이 낯익음을 깨닫고선 몸을 떨었다. 도망치던 2학년 1반 학생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차츰차츰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인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불안함을 느끼며 카이에게로 서둘러 다가갔다.
“이 자식! 갑자기 무슨 속셈이야!”
“으, 으아아아!”
가인에게 멱살이 잡힌 카이는 발작처럼 소리 지르며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가인은 이상을 찡그렸다. 이 자식이……연극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뭐야?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이미 카이가 네크로맨시를 풀었다는 걸 아직 몰랐다.)
‘아…….’
그때 가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녀석은 자신의 능력이 상대의 혼을 조종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에게 멱살을 붙잡힌 이 학생도 실은 카이 본인이 아니라…….
“사람 살려! 죽이지 마! 살려줘!”
엉겁결에 가인의 손에서 빠져나온 학생은 땅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학생들의 뒤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기어가는 손에는 예의 검은 피리가 사라져있었다.
가인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위에 몰려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하지연 선생님과 재영이, 그리고 2학년 1반 학생들. 그들은 AI핼맷 사이로 드러난 가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란……힘을 갖니 이를 두려워하지.’
가인은 깨달았다. 카이 브릿드. 그가 무슨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었는지를. 그리고 그가 준비해 놓은 함정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보기 좋게 걸려든 건가?’
아니야! 가인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움켜쥐며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애써 태연한 척 모두에게 말을 걸었다.
“다, 다들……놀랐지? 하하, 그래. 놀랐을 거야. 나도 처음에는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 믿을 수가 없어서……굉장히, 굉장히 놀랐었어.
“…….”
“저 괴물은 몬스터라는 거야. 한번도 본적 없었지? 사실 그동안 피스메이커에서 매스 미디어의 정보를 제한해왔기 때문에 모두들 모르고 있었을 텐데……아, 그러니까 또 피스메이커라는 건…….”
가인은 지금 자신이 피스메이커의 기밀에 해당되는 사항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며 횡설수설했다. 단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친구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그런 말들을 찾고 있었다. 친구들의 침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넌 이들과는 다르잖아?’
그렇지 않아! 가인은 카이가 했던 말을 부정하며 재영에게 손을 뻗었다. 그라면 이해해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해온 재영이라면…….
“……!”
하지만 그는 가인의 기대를 저버렸다. 재영은 마치 가인의 손이 뱀이라도 되는 마냥 반사적으로 몸을 피해버렸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반응을 취했는지 깨닫고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
가인은 뻗었던 손을 내리며 망연자실하게 다른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릴 때 마다 모두들 눈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연 선생님마저……자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아니야……이런 건…….’
뭔가가 잘못된 거야. 나는 단지……단지 모두를 지키려고 했을 뿐인데. 그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인데……가인은 친구들의 반응을 납득하지 못하며 그들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왜, 왜들 그래? 왜 나를…….”
“꺅!”
여학생들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 소리를 시작으로 학생들 사이에선 어두운 그림자가 번져나갔다. 공포라는 그림자. 자신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괴, 괴물…….”
괴물.
가인은 새삼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쓴 채 흉흉한 살기를 띄고 있었다. 거기에다 풀장에 쓰러져 있는 몬스터. 저 거대한 괴물을 쓰러뜨린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해내지 못할 일. 아니, 해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 그런 일을 자신은 해내고야 말았다.
[쿡, 쿠쿠쿠쿡…….]
그때 죽여 버렸다고 생각했던 몬스터의 입에서 낯익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의 웃음소리였다. 가인은 자신을 비웃고 있는 몬스터를 초췌해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어때? 소중한 이들을 지켜낸 소감이란? 보람은 있었어?]
“…….”
가인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그가 입을 다물고만 있자 카이는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카하하하하! 가관이야! 정말 웃기는 꼬락서니야! 그렇게 기를 써가면서 지켜냈더니 기껏 돌아온 것은 멸시와 공포라니! 하지만 너도 알고 있었지? 저런 대접을 받을 걸 알면서도 힘을 사용한 거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야? 칭찬받아 마땅한 일을 했는데 왜 죄인처럼 떨고 있는 거야?]
카이는 웃음을 그치고 지연과 재영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 겁에 질린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욕지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봐라, 오라의 주인. 네가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했던 이들의 얼굴을. 저들의 얼굴에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나? 일말의 애정이라도 느낄 수 있어?]
“…….”
[저들에게는 네가 자신들을 지켜줬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냐. 네가 자신들과 다른 힘을 사용했다는 게, 자신들로서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우리들과는 다르다. 같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자신들의 범주 속에서 널 제외시키려고 기를 쓰지.]
이때만큼은 카이의 눈빛에서도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기색은 나타난 것 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갔다.
[왜냐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능력을 가진 너를! 자신들보다 뛰어난 너를! 무능력한 다수의 횡포지! 동물들도 이런 짓을 하진 않아! 인간들만이 할 수 있는 저열한 짓거리야! 힘을 가진 자는 우대받아야 마땅하건만 오히려 시기당하고 멸시당하며 결국에는 매당 되어 버리지!]
“그, 그만해…….”
가인의 창백한 입술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카이는 그만두지 않았다.
[괴물이란 말은 다른 걸 뜻하는 게 아냐! 자신들과는 다르다! 우리와 넌 틀리다! 그걸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표현한 이기적인 말에 불과해!
“그만해……!”
[결국 너와 난 다를 게 없어! 저들의 눈에는 똑같은 괴물로 비춰질 뿐이다! 그렇게 괴물 취급 받으면서 화도 나지 않아? 회의감은 들지 않아? 이후로도 넌 변함없이 저들을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어?!]
“그만햇!!!”
투카카카칵!!!
순간 괴물의 밑에서부터 천공권의 시작점이 발생하며 그 위로 날카로운 토네이도가 솟아올랐다. 가인은 형체도 알 수 없이 찢겨져 나가는 몬스터를 노려보며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으악!”
괴물의 육편이 튀어 오르자 학생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재영과 지연을 위시한 몇몇의 사람들만이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도 가인에 대한 공포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가인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미소 지었다.
‘괴물……인가.’
슬프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체념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깨끗하게. 실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저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자신이 바보 같았다. 어재까지 저들과 가까운 관계였다고 착각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걸 타인에게 바라는 것 부터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저들의 저런 반응은 카이의 말대로 당연한 것이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반응. 그것을 이해했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어리석음에 비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런 당연한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그래. 당연한 거야…….’
가인은 천천히 뒤돌아서서 부서진 풀장의 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자신이 있을 곳은 없었다.
“유가인!”
아무도 잡지 않을 거라 생각했건만 뜻밖에 자신을 부르는 음성이 있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무서울 텐데도 그것을 참고 자신을 부른 것이다. 가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지연을 위시한 몇몇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김우석이었다. 일진들 사이에서 괴롭힘 당하던 걸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우석인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몸은 무섭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외치고 있는데 무엇이 그를 앞으로 이끄는 것일까.
“고…….”
고?
“…고….”
우석인 몇 번인가 고를 연발하더니 이내 입을 다물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크게 외쳤다.
“고마워! 구해줘서!”
여전히 몸을 덜덜 떨면서도 가인을 위해서 없는 용기까지 쥐어짜낸 결과란 건 너무나 뻔하다. 가인은 그 말에 가슴속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그래. 한명이라도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해주니 그걸로 족했다.
“……응.”
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끼익
문이 열리자 가인의 그림자가 그 뒤로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가 닿는 곳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테레이아가 있었다.
‘가인…….’
혼수상태에서도 작게 그의 이름을 속삭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2033년 4월 13일. 11시 25분. 24구역의 한성 고등학교에 D+급 몬스터 ‘워터 리퍼(Water Leaper)’가 출현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네크로맨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피스 블루를 노린 습격 같습니다.”
“작년 길조 때와 마찬가지로군요. 5대간부에 피스 블루를 노린 습격이라니.”
작전 본부실에서 수정의 보고를 듣던 닥터는 가볍게 한탄했다. 수정은 그의 한탄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 나마 다행인 것은 A+의 상황 임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거에요. 또 습격 장소가 실내 수영장이었던 만큼 2학년 1반의 학생들과 그 담임 교사를 제외하면 목격자가 없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진우를 돌아보았다. 현장 보고는 팔라딘 대를 맡고 있는 그의 몫이었다. 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예.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한 팔라딘 대는 실내 수영장에 몰려드는 학교 관계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다행으로 목격자들의 신병도 빠짐없이 확보할 수 있었고요. 피스 블루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들은 총 39명. 모두 피스메이커의 수중에 있습니다. 정말 정말 다행이죠?”
“……너무 그러지 말아요, 진우 씨. 제가 말실수 했네요. 죄송해요.”
수정은 진우의 비아냥거리는 태도에 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쓴 '다행'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우는 그렇게 그녀가 순순히 사과해오자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아니. 저는 그냥……하아. 죄송합니다.”
그는 수도로 돌아온 이후 내내 신경질 적인 자신의 모습에 고소를 금치 못했다. 자꾸만 왜 이러는 건지……나 답지 않게 말이야.
닥터는 그렇게 침울해 하는 진우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안경을 쓸어 올렸다.
“그건 그렇고, 신병을 확보한 목격자들의 처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느 때와 같이 기억조작입니까?”
“……아, 그에 대한 사항을 지금부터 보고하려 했는데…….”
진우는 잠시 머뭇거리며 상관들의 안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기억 조작은……아직……하지 않았습니다.
“예?”
수정과 닥터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들의 반응에 진우는 입맛을 다시며 보고를 계속했다.
“일단은 각 목격자들에게 감시를 붙여두고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제재를 가하고 있습니다만……아무래도 감식 조에 필요한 인원을 재편성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지금 팔라딘 대의 인원으로는 여러모로 무리거든요.”
“아니! 아니! 감시 조라니요? 그게 지금 무슨 소리입니까, 진우 군? 그리고 기억 조작을 못했다니?”
“아, 그게……목격자들이 한성 고교의 2학년 1반. 그러니까 피스 블루의 클레스메이트들 아닙니까?”
진우는 자신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가인을 떠올리며 작게 한 숨을 쉬었다.
제길, 어쩔 수 없잖아. 정말…….
“그들에게 기억 조작을 행할 경우, 피스메이커에 대한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겠다! ……이상이 피스 블루의 전언입니다. 그 녀석, 어찌나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던지 아무도 못 말리겠더군요.”
“…….”
그 말에 닥터도 수정도 진우와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작년 4월, 박재영이라는 소년의 기억을 지워버렸을 때 가인이 보여준 격한 반응을 생각한다면 이번 반응도 무리가 아니었다. 수정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하지만……그걸로 괜찮을까요, 가인 군? 차라리 괴롭더라도 기억을 지우는 편이 나았을 텐데.”
피스메이커의 관계자들은 가인의 AI헬맷이 전송하는 영상으로 모든 전황을 볼 수 있었다. 몬스터와의 혈투, 그리고 두려워하던 친구들의 모습, 실망한 가인의 모습까지도.
“슈퍼맨 같은……전개로는 갈 수 없나보군요.”
닥터는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받은 것은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진 사령관이었다.
“슈퍼맨은 단지 영화일 뿐이다.”
여느때와 같은 무심한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힘을 가진 이가 영웅 취급을 받는다니……편리한 데로 상상을 해도 정도가 있지.”
사자와 한 우리에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사자가 잘 조련을 받아서 인간을 습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은 태연하게 사자와 살아갈 수 있을까? 태연하게 사자를 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익숙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사자가 온순하게 군다고 하더라도 만의 하나 습격해 올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자에게 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나마 힘을 가진 쪽이 짐승이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을 가진 이가 사람이라면? 자신들과 비슷해 보이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인간은 한 없이 잔인한 동물이다. 이해하기보다 미워하는 쪽이 쉽다면 주저 없이 미워하는 쪽을 택하지.”
힘을 가진 소수는 다수에게 도태된다. 미움 받는다. 멸시 당한다. 이용당한다. 희생을 강요당한다. 그것은 인류의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런 자신들만 하더라도 이계의 침략자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가진 소수, 오라 능력자들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수정은 진 사령관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그런 일이 가능했더라면……그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죠.”
그리고 그가 자신들을 떠나는 일도…….
닥터는 낮게 한탄하며 진우에게 물었다.
“그럼 가인 군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학교는 다니고 있습니까?”
“……아니요. 아무래도 자퇴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진우는 연무장에 있을 가인을 떠올리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퍼억! 텅!
언더 시티의 연무장. 그 안에서는 연신 보호 장벽을 후려치는 타격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몬스터의 홀로그램들. 그 속에서 푸른 AI 슈츠의 남자가 쉼 없이 움직이며 섀도우 배틀(Shdow Battle)을 펼치고 있었다.
“하아아아아.”
가인의 기합에 발 맞춰 몬스터들의 발밑으로부터 수많은 천공권들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는 이미 한번에 다섯 개 이상의 천공권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여기에 심경을 노리는 천공주심권만 응용하게 된다면 그는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연무장의 입구에서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 바로 가인의 동료들인 피스대원들이었다. 마리와 시민과 유리. 그들은 벌써 며칠째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혹독한 훈련만 하고 있는 가인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오빠.’
유리는 며칠 전 자신에게 소리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다그치던 가인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절대로 기억을 조작하지 마! 알겠어? 만약 이 약속을 어기면 다시는 유리, 널 보지 않을 거야!’
억지로 반 친구들의 기억을 지워버리겠다는 자신에게 그는 처음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유리는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처럼 사람들에게 배척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여지 없는 결과라니!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왜!’
신이 있다면 원망하고 싶었다. 가인을 노린 몬스터의 간부가 원망스러웠다. 너무해. 이런 거. 지키려는 마음을 배신당하다니. 믿었던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다니. 그 아픔을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리 역시 오라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은 케이스니까. 그렇기에 가인만은 이런 아픔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그만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기 바랐다.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오빠의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아.’
이제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믿었던 친구들의 외면을 잊어버릴 수 없다. 가인은 반 체념 상태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헉……헉…….”
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AI슈츠의 헷맷과 상의를 벗어던졌다. 슈츠의 안이 땀으로 흠뻑 젖을 것을 대비해서 애초에 옷을 입지 않고 슈츠만 착용한 상태였다. 그가 땅바닥으로 주저앉자 땀들이 굵은 빗줄기처럼 그 자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가인, 받아라.”
그런 그에게 마리가 다가와 묵묵히 수건을 건네주었다. 강인은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다가 수건을 받아들고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마리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고심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괜찮은 거냐?”
“…….”
얼굴을 닦던 수건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리는 그런 가인의 반응만으로도 기분이 우울해졌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학교는……그만둘 셈이야? 결석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일단 하지연 선생님에게 얘기는 해놓았다만 그래도…….”
“쓸데없는 참견하지 말아요.”
차가운 가인의 말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가인은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수건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마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예전의 다정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학교 같은 거……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에요. 어차피 전 피스메이커잖아요? 오라 능력자.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제 임무. 그렇다면 쓸데없이 학교에 가느니 조금이라도 더 훈련을 하는 게 효율적이잖아요.”
“쓸데없다니……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마리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가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의 눈빛을 피하며 그녀를 지나쳤다. 과연 자신이 말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무감각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
“어차피 오라 능력자와 인간은 틀려요. 다른 인종이라고요. 그렇다면 서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하지 않겠어요?”
“유가인!”
마리는 화를 내며 가인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울분이 쌓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다면 나도 틀리다는 거야? 여기 있는 시민 씨와 유리도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가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애써 다 잡은 마음이 흔들릴까봐 이를 악물었다. 이제 학교고 친구고 하나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의 믿음에 금이 가버릴 것 같았기에. 몬스터로부터 그들을 지켜내겠다는 각오가 깨져버릴 것만 같았기에, 그렇기에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들이 자신을 외면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지켜주고 싶었다. 비록 카이에게 어리석은 녀석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기에……만나서는 안되는 거야.’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모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내가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 건지……똑똑히 두 눈으로 응시하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나 혼자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그걸로…….
“가인 씨.”
그때 시민이 가인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혼자서 너무 많은 짐을 지려고 하지 말아요.”
“……!”
가인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민은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인 씨는 언제나 가인 씨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가인 씨요. 가인 씨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아요.”
피스메이커로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이 자리의 누구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들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한 자리에서 서로를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겨줘요. 우리가 당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시민 씨.”
멍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민은 그런 가인에게 웃어보이며 자신의 옆에 있는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계속 학교도 다니세요. 가인 씨가 다니질 않으니 덩달아 유리 양까지 학교를 나가지 않잖아요?”
“……오빠가 없는 학교는 내게 의미가 없어.”
유리는 고집스럽게 시민의 말을 받으며 가인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의 애 닳은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필요하다고. 가인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고. 자신은 절대로 그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가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리가 웃고 있었다. 시민이 웃고 있었다. 유리가 웃고 있었다. 모두에게 외면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자신을 바라봐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그렇다면……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들만 곁에 있다면……난 모두와 함께, 앞으로도 계속…….
“하지만……이제 와서 없었던 일처럼……행동할 순 없잖아요.”
가인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민은 가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괴물.’
아무리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과거의 일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들었던 소리가 잊혀지지를 않는다. 이런 주제에, 그때의 미움, 슬픔, 분노를 가슴에 품어 둔 채 태연자약하게 지금까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그들을 지킬 수 있겠어? 카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괴물 취급 받으면서 화도 나지 않아? 회의감은 들지 않아? 이후로도 넌 변함없이 저들을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어?
난……자신이 없어. 지키겠다는 말……할 수가 없어.
‘브루스, 어떡하면 좋죠?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예? 제발 가르쳐줘요! 언제나처럼, 윽박지르면서 가르쳐달라고요!’
가인은 이 자리에 없는 브루스를 떠올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화난 목소리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의 꾸짖음이 너무나 절실했다. 쌍심지를 켠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브루스!’
그러나 해답을 제시해 줄 피스 그레이는 어언 십여일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제 너희 집에도 찾아왔었냐? 그, 피스메이커에서?”
“아아.”
한성 고등학교 2학년 1반의 교실.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학생들은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며 투덜거렸다.
“대도 너무한 거 아냐? 24시간 감시하고 있다느니, 모든 통화는 도청되고 있다느니……그러면서 여기가 자유 민주주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
“그런 방법으로 지금까지 비밀을 유지해온 거겠지. 어차피 피스메이커라는 것도 정부 기관과 비슷한 거잖아. 윗대가리들이 까라고하면 힘 없는 국민들은 까야지 어떡하겠냐?”
“쳇. 맘에 안 들어.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어디선가 듣고 있을 게 분명해. 그나마 학교에서 그 때의 관계자들끼리 얘기하는 것만은 허용하는 모양이니.”
“하지만……불안하다. 이러다 은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씩 실종되는 거 아냐? 비밀 유지다 뭐다 해서 감옥 같은 데에 가둬두는 거 아니냐고.”
그들은 피스메이커의 팔라딘 대에서 협박이나 다름없는 경고를 받고 분개해 했다. 그들에게는 공권력의 횡포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목격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으니 불만이 쌓일 만도 하다. 어떻게 보면 기억을 지워버리는 피스메이커의 방식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고. 설마 유가인……그녀석이…….”
학생들은 테레이아의 옆에 비어있는 자리들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들은 옆에서 침묵하고 있던 재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야, 박재영. 넌 혹시 알고 있었던 거 아냐? 그 녀석이 피스메이커였다는 거?”
“……아, 아니. 난 전혀…….”
재영은 그들의 시선에 당황하며 손을 내젓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역시 그 녀석과 함께 사는 사람들도 관계가 없지는 않겠지?”
“브루스와 유리 말이야?”
“그렇잖아. 처음부터 이상했다고. 그런 이상한 중국이라든지, 초등학생이라든지. 범상치가 않잖아? 분명 뭔가가 있을 거야.”
“그 애들도……피스메이커일까? 유가인처럼 그 무지막지한?”
“으아, 싫다. 싫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껏 우리 곁에 있었단 말이야? 그것도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선?”
학생들은 키득거리며 농담식으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저번 실내 수영장에서의 이들을 생각하면 단순히 웃고 넘길 일도 아니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괴물을 찢어발기다니……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의 유가인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낯빛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역시……괴물이야.”
우리들과는 달라.
“틀리다고…….”
그들의 중얼거림에 재영은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단지 움켜쥔 주먹 만이 갈 곳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탕!
그때 거세게 탁자를 내려치는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그곳에는 테레이아 민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제멋대로구나, 너희들?”
근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그 한마디에 교실의 소란이 잦아들고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레이아는 그런 시선들 속에서도 여유럽게 책상 사이를 거닐며 교단으로 나아갔다.
“하나만 물어볼게. 가인이가 몬스터를 상대할 때, 너희들은 뭘 했지? 뭘 할 수 있었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테레이아는 비웃음을 띄며 말을 이었다.
“단지 구경만 하고 있었지?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어? 자신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니?”
“그, 그런! 도와야 된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학생들 중 하나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 외침에 발 맞춰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소리 질렀다.
“맞아! 그런 괴물을 상대로 우리가 뭘 할 수 있었다는 거야! 우린 아무런 힘도 없다고!”
“우리가 가인이 녀석처럼 무슨 피스메이커인 줄 알아!”
“우리가 나쁘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마!”
탕!
그때 테레이아가 거세게 교탁을 내리쳤다. 그러자 기세가 꺽이는 학생들. 그들을 향해 테레이아가 한자 한자 또박또박하게 외쳤다.
“그⋅렇⋅다⋅면! 잠자코들 있어! 힘이 없었으니 못 도와줬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능력이 되었으면 도와줬을 거라고? 그렇다면 지금 너희들의 행동은 뭐지? 능력이 되서 도와준 가인이에게 너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테레이아는 치가 떨렸다.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학생들이 새삼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헐뜯고! 불평하고! 험담하고! 단지 그것뿐이잖아? 가인이는 너희를 위해 싸웠는데 뭔가 고마움 같은 건 못 느끼는 거야? 감사를 표하고 싶진 않아? 그러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미워하기만 하는 거야!”
어째서!
“무서워하기만 하는 거지?”
그녀는 재영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 일이 있지 전까지만 해도 같은 친구였으며, 그렇게나 친한 사이인 것처럼 굴었으면서! 어째서 그를 외면하는 거지? 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
고개를 떨구는 재영. 테레이아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테라인? 카이가 말한데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물의 모습인 걸까? 그의 말이 정답이라는 거야?
‘그런 건……인정하고 싶지 않아!’
자신은 이들과 같은 생활을 공유하면서 한 순간이나마 희망을 가졌는지 모른다. 노아에서 실험체로 지내온 생활만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그런 꿈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웃고, 울고, 화내고, 사랑하는. 그런 1년간의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었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진실은 이렇게도 깨지기 쉬웠단 말인가? 이렇게도 부질없는 믿음이었던가?
‘가인…….’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사이에 학교를 떠나버린 그. 그는 떠나기 직전 과연 무슨 심정이었을까? 믿었던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그 기분이란 대체……그것을 상상할 때마다 테레이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교탁을 붙잡은 양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직히 말했다.
“정확히는 그때 아무것도 안했던 건 아니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한 건 바로 우석이었다. 그 날. 유일하게 가인에게 고맙다고 한 단 한사람.
“가인이 괴물과 싸울 때. 우리도 한 일이 있었잖아?”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한 일이 있었다니? 도대체 어떤? 자신들은 분명 가인이 싸우고 있을 때 두려움에 떨며 쳐다보기만 했던 게 다인데…….
“그 괴물에게 조종당해 가인이를 차고 때리고 짓밟고……그리고 뒤에서 험담하고. 제법 한 일이 많네?”
반 아이들은 우석이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렇다. 지금까지 억지로 외면했지만 그 날 분명 아무리 괴물에게 조종당했다고 변명을 해보아도 만신창이었던 가인을 때렸던 건 분명 자신들이었다.
“난 가인이에게 고맙다고 생각해. 가인이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 테니까. 그의 힘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가인이는 가인이니까. 그런데 너희들은 뭐지?”
테레이아가 물었을 때처럼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단지 자신들을 바라보는 우석이의 시선을 피할 뿐. 그 모습이 역겹다. 당장 속에 든 모든 걸 토해버리고 싶을 만큼. 우석인 그들을 경멸어린 시선으로 보며 천천히 말했다.
“정말……역겹군. 마치 쓰레기더미 속에 있는 기분이야. 여기에 더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을 정도로. 내가 이렇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겠지. 잠시 후면 내가 어떤 말을 했든지 너희들은 다시 가인을 욕하고 피스메이커를 욕하고……평생 그렇게 쓰레기인체로 살아가겠지.”
그렇게 말하더니 우석은 가방을 들고 뒷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에게 말했다.
“야! 어디 가?”
우석은 그 말에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경멸과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서 말이야. 난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뒷문을 통해 나가버렸다. 그가 나간 교실엔 싸늘한 정적만이 흘렀다. 그들을 노려보던 테레이아도 같은 생각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더럽고 추악했다.
“너희들은……이기적이야.”
그 말을 끝으로 테레이아는 교단을 내려왔다.
곧장 교실의 앞문으로 향했다. 수많은 회의감과 의문이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과연 자신은 저들에게 이기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인 걸까? 테라도 아닌 노아인 자신이? 누구에게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는 자신이 저들에게 진심을 바랄 입장이나 되는 것인가?
‘……그래. 가장 이기적인 것은 바로 나.’
결국 나도 마찬가지였던 거야…….
테레이아는 그렇게 스스로를 조소하며 교실 문을 열었다.
탁
열려진 문에는 막 교실로 들어오려던 하지연이 서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수업이 체육 수업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교실로 들어오기 직전 테레이아와 우석의 말을 들었던 건지 무섭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 테레이아와 지연은 그렇게 교실 문을 사이에 둔 채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슥
그러던 중 테레이아가 먼저 지연의 곁을 지나쳐 문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간 자리로 차가운 공기가 세차게 지연을 훑고 지나간다. 하지만 지연은 교실을 나가는 테레이아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제자리에 못 박힌 채 서 있었을 뿐이다.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탕
지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 문을 닫고서 교단 위로 올라섰다. 그녀는 출석부를 교탁 위에 내려놓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쥐었다. 학생들이 모두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있자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반장! 인사해!”
“예!”
다급히 일어나며 대답하는 반장. 지연은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꾹
하지만 지연의 손에 쥐어진 담배는 소리 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이렇게 무거웠던가?
가인은 석양으로 붉게 물든 26구역의 거리를 말없이 걷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수십 시간을 혹사당한 그의 육체는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물론 지쳐버린 몸쯤이야 포션 한방이면 금새 회복될 수 있었지만 가인은 일부러 포션을 쓰지 않았다. 육신의 고통이 강하면 강할수록 쓸데 없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무거워.’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늪지대에 몸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일은 이보다 더 발걸음이 무거워질 테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애써 참아 넘겼다.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몸과 마음. 이쯤 되면 다음날이 오는 게 다 두려울 정도였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매일의 연속. 이런 나날이 계속된다면 자신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단지 학교를 가지 않게 된 것 뿐인데, 매일 보던 얼굴들을 보지 않게 된 것 뿐인데……그것이 이정도로 차이가 있었던 건가. 일상의 한 부분을 잘라낸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
‘무거워.’
후회하고 싶지 않아. 그때 오라를 사용했던 건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올바른 선택을 한 거야. 난 틀리지 않았어. 틀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자꾸만 무거워져가는 발걸음. 마치 옛 영화에 나오는 죄수들처럼 다리에 거대한 쇠사슬 추가 묶여 있는 느낌이다. 이 무거움은 대체 뭘까? 후회? 그런 걸까? 내 후회하는 감정인 걸까? 나는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때 모르는 척하고 친구들을 외면했어야 하나? 그럼 지금과 같은 기분은 아니었을까?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
어쩔 수 없는 결과였어. 길든 짧든 언젠가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좀 더 의연하게 행동하자. 슬퍼할 필요 따위는 없이. 좀 더 어깨를 펴고……좀 더 당당히…….
‘계속 모두를 지켜나가는 거야.’
지금과 변함없이 앞으로도 쭉, 피스메이커로서 살아간다면, 몬스터들과 싸워나가면.
‘그걸로 충분해.’
그걸로 만족해. 가인은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공허함을 한가득 끌어안은 채. 껍데기뿐인 감정만 남겨둔 채. 무엇을 지켜야하는지도 모르게 된 채. 그렇게 지킨다라는 말만 의미 없이 되새겼다.
‘가인.’
그런 그의 뒤를 말없이 따르고 있던 네 명의 일행. 마리와 진우, 시민과 유리였다. 그들은 활력을 느낄 수 없는 가인의 등을 향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할 말은 간단했다. 이겨내라. 극복해라. 지켜내라. 그걸로 끝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건 가인의 몫이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인에게 강요할 순 없었다.
‘사부님이 있었더라면…….’
진우는 브루스를 떠올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라면 지금의 가인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줬을 텐데. 자신들처럼 지켜만 보지 않고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해줬을 텐데. 새삼 자신의 무력함을 떠올리게 된다.
“음?”
그때 막 가인에게 말을 걸려던 마리는 전방의 골목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안색을 굳혔다. 누군가가 그곳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걷던 가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
돌아본 그곳에는 의외의 사람이 서있었다. 시민은 손으로 노을빛을 가리며 상대를 확인한 후, 놀라움을 표했다.
“재영 씨?”
그렇다. 가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재영이었다. 그는 멍하니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시민의 부름에 깜짝 놀라 가인 일행을 돌아보았다.
“아, 가인아…….”
일주일 만이었다. 일주일 만에 보게 된 재영이었다. 하지만 가인의 눈에는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인 양 낯설게만 느껴졌다. 팔년도 더 된 친구였는데. 그가 하는 행동이라면 눈을 감고도 알아맞힐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데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
가인은 무표정하게 재영을 노려보았다. 노을빛이 정면에서 비춰져서 그런지 가인의 눈동자가 불길한 붉은빛을 띄었다. 재영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오, 오랜만이다. 야.”
“…….”
“일주일간 연락도 없이……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하여간 핸드폰은 장식품이구만. 전화하면 좀 재깍재깍 받으라고.”
“…….”
묵묵부답. 가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재영음 품에서 시디를 꺼내며 가인에게 다가왔다.
“야, 왜 이
댓글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