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虛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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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虛無)
둘은 서로를 바라본다. 둘 다 얼굴은 바뀌었지만, 어차피 그런 것은 상관없다. 이미 그 둘은 서로를 인식했다. 역시 느낌은 변하지 않았다.
“이거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크리스.”
다른 한쪽은 여전히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그래, 지금 이름은? 나는 ‘카인’인데 말이야.”
“아르논. 초면에 ‘오랜만’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그래도 우린 초면이면서도 오랜만이기도 하잖아.”
“과거를 청산할 뿐이다. 잡담은 그만두고, 시작하지.”
아르논은 허리에 매달려있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깨끗한 검면에 햇살이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카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 말도 없이 싸움은 시작된다. 아르논이 달려와서 검을 허리부분을 노리자 카인은 오른 어깨 근처에 있던 오른손을 빠르게 내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대검이 잡혀있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자 그대로 붉은 땅에 닿아버렸다. 아르논이 조금 뒤로 빠지더니 카인의 왼 어깨를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마저 카인이 양손으로 검을 올려 쳐냈다.
“여전하군.”
“나야 여전하지. 그런데 너, 오래 전부터 써오던 그 검은 어디에 둔 거지?”
“그것은 죽었다.”
대검이 아르논의 가슴부분을 가로로 베어 들어왔다. 그는 검을 세로로 세워 막으면서 대검의 날을 따라 비스듬이 뒤로 물러섰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면으로 막았으면 부러졌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오호. 그런 가냘픈 검으로 잘 막는데?”
확실히 카인의 대검은 아르논의 검보다 훨씬 컸다.
“칭찬이라고. 너도 알다시피 이 검은 너와의 네 번째 싸울 때부터 썼던 검이라고. 네 검들을 꽤 망가뜨렸으니 까먹진 않았겠지?”
“겨우 예전에 두 자루의 검날을 망가뜨린 걸로 즐거워할 줄은 몰랐군.”
아르논은 갑자기 카인 앞으로 깊이 들어가며 목을 노렸다. 하지만 카인은 오른쪽으로 피하면서 대검을 휘둘렀다.
“또 비겼군.”
카인의 왼 어깨와 아르논의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즐겁지 않아?”
카인의 약간 들뜬 목소리가 울리고, 둘은 수차례 더 검격을 교환했다. 이대로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긴 언제나 길었다. 제일 길게 싸운 것이…….
“칫. 기억나지 않는군.”
순식간에 사방을 찔렸다. 갑자기 아르논의 공격이 공격적으로 변한 것이었다. 스친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안 아플 수는 없었다.
“너,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됬는데?”
“너도 마찬가지다. 카인, 아니 케빈.”
“처음의 이름인가. 오랜만이군. 알피온!”
둘은 대화를 마치자마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베고, 찌르고, 둘 다 자신의 상처는 잊은 채로 싸움을 이어갔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싸움. 분명히 처음의 만남은 운명이었던 것 같다.
“난 아직 기억해. 영원히 싸울 상대를 만난다고 들은 후였거든.”
“난 영원한 친구라고 들었다.”
“친구? 싸움 친구도 친구라면 친구지.”
슬슬 몸이 무거워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알피온의 검에 찔려 죽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다.
“여태 싸운 것 중에 가장 어이없을 때는, 둘 다 마법을 익혔을 때였나?”
“그땐 둘이 잠시 쉬기로 약속하고, 음식도 나눠먹었었지.”
둘다 말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말없이 싸운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어재서 일까?
“슬슬 둘 다 마지막인 거 같은데?”
나도 피를 많이 흘렸지만, 케빈 녀석도 비슷할 거였다.
“그래, 마무리를 짓자.”
처음은 케빈 녀석 말대로 운명(運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의 만남, 그 싸움에서 둘 다 죽었다. 하지만 싸움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다시 태어났는데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처음 시작된 장소를.
단지 싸움, 아마도 욕망(慾望)일까? 그것을 위해 힘을 기르고, 그 장소로 간다. 그리고 케빈 녀석을 만나면 옛 기억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미 수십 번을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도…….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이제는 끝이다. 이 허망한 싸움의 끝이 이제야 오는 것이다!
“호오. 둘 다 마지막은 마법(魔法)인가?”
“그렇군.”
나와 케빈, 둘 다 왼손에 마법구(魔法(毬)가 들려있었다. 깨지면서 마법이 발동하는 형식이지만, 대부분 범위가 작아서 쓰지 않는 구식(舊式)이다.
“서로 자신의 마법의 이름을 말하는 거 어때?”
“그럼 3초 뒤에 동시에 말하지.”
3, 2, 1, 지금인가?
“영혼 소멸.”
케빈과 알피온, 둘은 동시에 같은 단어를 말했다. 같은 생각이었던가?
“그럼 마지막으로 할 말은?”
“맨 처음은 아마도 무(無)였겠지?”
“아마도.”
“그런데 우리 맘대로 무(無)로 돌아가면 아무 문제없으려나?”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무로 돌아간다면 서로에게 큰 선물이 될 거라는 사실.”
두 마법구는 각자의 손에서 깨졌다. 그리고 둘 모두 서서히 몸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액체인 피마저도…….
잠시 후에 그 장소에서 둘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 둘은 소멸되기 전까지 웃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둘은 서로를 바라본다. 둘 다 얼굴은 바뀌었지만, 어차피 그런 것은 상관없다. 이미 그 둘은 서로를 인식했다. 역시 느낌은 변하지 않았다.
“이거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크리스.”
다른 한쪽은 여전히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그래, 지금 이름은? 나는 ‘카인’인데 말이야.”
“아르논. 초면에 ‘오랜만’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그래도 우린 초면이면서도 오랜만이기도 하잖아.”
“과거를 청산할 뿐이다. 잡담은 그만두고, 시작하지.”
아르논은 허리에 매달려있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깨끗한 검면에 햇살이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카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 말도 없이 싸움은 시작된다. 아르논이 달려와서 검을 허리부분을 노리자 카인은 오른 어깨 근처에 있던 오른손을 빠르게 내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대검이 잡혀있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자 그대로 붉은 땅에 닿아버렸다. 아르논이 조금 뒤로 빠지더니 카인의 왼 어깨를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마저 카인이 양손으로 검을 올려 쳐냈다.
“여전하군.”
“나야 여전하지. 그런데 너, 오래 전부터 써오던 그 검은 어디에 둔 거지?”
“그것은 죽었다.”
대검이 아르논의 가슴부분을 가로로 베어 들어왔다. 그는 검을 세로로 세워 막으면서 대검의 날을 따라 비스듬이 뒤로 물러섰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면으로 막았으면 부러졌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오호. 그런 가냘픈 검으로 잘 막는데?”
확실히 카인의 대검은 아르논의 검보다 훨씬 컸다.
“칭찬이라고. 너도 알다시피 이 검은 너와의 네 번째 싸울 때부터 썼던 검이라고. 네 검들을 꽤 망가뜨렸으니 까먹진 않았겠지?”
“겨우 예전에 두 자루의 검날을 망가뜨린 걸로 즐거워할 줄은 몰랐군.”
아르논은 갑자기 카인 앞으로 깊이 들어가며 목을 노렸다. 하지만 카인은 오른쪽으로 피하면서 대검을 휘둘렀다.
“또 비겼군.”
카인의 왼 어깨와 아르논의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즐겁지 않아?”
카인의 약간 들뜬 목소리가 울리고, 둘은 수차례 더 검격을 교환했다. 이대로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긴 언제나 길었다. 제일 길게 싸운 것이…….
“칫. 기억나지 않는군.”
순식간에 사방을 찔렸다. 갑자기 아르논의 공격이 공격적으로 변한 것이었다. 스친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안 아플 수는 없었다.
“너,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됬는데?”
“너도 마찬가지다. 카인, 아니 케빈.”
“처음의 이름인가. 오랜만이군. 알피온!”
둘은 대화를 마치자마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베고, 찌르고, 둘 다 자신의 상처는 잊은 채로 싸움을 이어갔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싸움. 분명히 처음의 만남은 운명이었던 것 같다.
“난 아직 기억해. 영원히 싸울 상대를 만난다고 들은 후였거든.”
“난 영원한 친구라고 들었다.”
“친구? 싸움 친구도 친구라면 친구지.”
슬슬 몸이 무거워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알피온의 검에 찔려 죽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다.
“여태 싸운 것 중에 가장 어이없을 때는, 둘 다 마법을 익혔을 때였나?”
“그땐 둘이 잠시 쉬기로 약속하고, 음식도 나눠먹었었지.”
둘다 말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말없이 싸운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어재서 일까?
“슬슬 둘 다 마지막인 거 같은데?”
나도 피를 많이 흘렸지만, 케빈 녀석도 비슷할 거였다.
“그래, 마무리를 짓자.”
처음은 케빈 녀석 말대로 운명(運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의 만남, 그 싸움에서 둘 다 죽었다. 하지만 싸움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다시 태어났는데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처음 시작된 장소를.
단지 싸움, 아마도 욕망(慾望)일까? 그것을 위해 힘을 기르고, 그 장소로 간다. 그리고 케빈 녀석을 만나면 옛 기억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미 수십 번을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도…….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이제는 끝이다. 이 허망한 싸움의 끝이 이제야 오는 것이다!
“호오. 둘 다 마지막은 마법(魔法)인가?”
“그렇군.”
나와 케빈, 둘 다 왼손에 마법구(魔法(毬)가 들려있었다. 깨지면서 마법이 발동하는 형식이지만, 대부분 범위가 작아서 쓰지 않는 구식(舊式)이다.
“서로 자신의 마법의 이름을 말하는 거 어때?”
“그럼 3초 뒤에 동시에 말하지.”
3, 2, 1, 지금인가?
“영혼 소멸.”
케빈과 알피온, 둘은 동시에 같은 단어를 말했다. 같은 생각이었던가?
“그럼 마지막으로 할 말은?”
“맨 처음은 아마도 무(無)였겠지?”
“아마도.”
“그런데 우리 맘대로 무(無)로 돌아가면 아무 문제없으려나?”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무로 돌아간다면 서로에게 큰 선물이 될 거라는 사실.”
두 마법구는 각자의 손에서 깨졌다. 그리고 둘 모두 서서히 몸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액체인 피마저도…….
잠시 후에 그 장소에서 둘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 둘은 소멸되기 전까지 웃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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