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1월,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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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더이상은...함께할수 없겠지만..."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있는지..하늘역시 울고 있었다.
먹구름 낀 하늘은 어둡기만 하다.
그렇게 12월의 마지막날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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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재회
10월의 하늘은 높기만 하다. 바람은 스산하다. 그리고 햇볓은 따갑다.
조용한 방. 유화물감 냄새가 진득히 퍼져나온다.
이리 저리 붓이 종이위를 오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종이위를 수놓던 붓은 조용히 파레트위에 놓여진다.
"하아.....여기까지인가...수고하셨습니다.."
한 사내가 말했다. 검다. 어둡다. 그리고 깊이를 알수없을만큼 깊다.
심연과도 같은 깊은 눈동자를 지닌 사내는 더이상 그곳에 볼일이 없다는듯 자신의 겉옷을 들어올리며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라고 해봤자..아무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으려나.."
다시금 보이는 그의 눈은 슬퍼보였다.
외로워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걷는다. 정처없이,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걸까? 그는 그렇게 아무런 생각을 가지지 않고 걷는다.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도 없는듯이 휘적휘적 걷던 그는...이윽고 한 건물에 도착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얼굴만이라도 보고 돌아갈까..후..."
그는 건물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민한다. 그것도 심각하게. 한참을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보던 건물 수위는 참지 못한듯이 수위실의 문을 열고 그에게 윽박지른다.
"어이 거기 허여멀건한 인간아! 보험회사 신입이지? 이 건물에 당신같은사람 들어올 필요 없으니까
썩 사라져!"
졸지에 보험회사의 신입사원이 되어버린 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굳어 버린다. 아무런 미동없이. 마치 그자리에 서있던 동상과도 같이 조용히 굳어버린다.
.............................
................
.......
..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아직도 그 건물앞에서 걸음을 때지 못하고 있다.
표정엔 조금씩 어둠이 끼어가고 있다. 피곤해서 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문제여서 일까?
시간은 조용히 흘러만 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의 얼굴엔 어둠 이외의 다른것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초조함. 그리고 불안함.
무엇이 초조하고 불안한 것일까
그는 그렇게 또 한참을 기다렸다.
건물의 문이 열렸다.
몇명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걸어나왔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침식하던 그의 몸이 서서히 움직였다.
용기를 내었다.
그동안 부르지 못한 이름.
"......정희야..."
조용히 불러보았다.
그렇게도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이었을까?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있다.
".....병수오빠?"
그의 모습을 본 그녀는 순간 굳어버렸다. 더이상 입을 땔수도 없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그런모습을 본 다른사람들은 그냥 그런일이려니 하고 모두 사라진 뒤였다.
"...정희야..오랜만이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옅게 배어져 나오는 슬픈마음, 그리고 애정.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하는 그녀. 이윽고 그를 바라본다.
뭔가가 복잡한.. 잘 풀리지 않는듯한 표정, 그리고 어느샌가 그녀의 그런표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응...오빠도..좋아 보여서..다행이네.."
말하는 목소리에 습기가 배여있다. 맑던 하늘에 조금씩 어둠이 드리운다. 그를 직시하는 그녀의 눈에도
약간의 습기가 배어져 나온다.
"그동안..왜..그냥 가버린거야..? 나...오빠가 너무 보고싶었는데.."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침묵
그것도 하나의 대답이 될수 있었을까..? 아니면 대답을 바라고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는 조용히 그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이제 만났으니까..이제 다시는..오빨 놓지 않을꺼야...절대로..."
10월의 오후는 점점 깊어져만 간다.
조용히 그리고 으스러지도록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사람을 잠식하듯이, 그렇게 조금씩 시간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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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그녀
"아이참 오빠 문 열라니까~!"
조용했던 그의 공간이 조금은 활발해졌다. 적막으로 가득차있던 공간엔 어느샌가 이것저것 볼수 없었던
꽃과 물건들로 체워져 나갔고 먼지만 쌓여있던 방은 광이 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난다.
"그..그래도..정희야 그러는게 아냐..그러니까 나 혼자 할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전엔 찾아볼수 없던 목소리 하나가 더 들려온다. 활발하다. 그리고 행복하게 들려온다.
"등에 손도 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겠다는건데에 - 내가 해줄께 오빠 -"
얼굴엔 약간 장난기가 묻어 나온다. 그녀다. 병수라고 불리는 사내가 보아왔던 모든것이라고 해도 좋을정도
로 빛나는 그녀, 윤정희다.
그녀의 오른손엔 노란색 타월이, 왼손엔 하얀색 비누가 들려있다.
"자..장난하지말라고! 내 나이를 생각좀 해줬으면해 제발.."
왠지 애처롭게 들리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행복이 흠씬 묻어나온다.
10월엔 볼수 없던 그의 모습이다. 더이상 얼굴엔 초조함과 불안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득한 행복함
많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약간씩 비치는 슬픈눈동자...
"뭐 어때! 예전엔 같이 했었잖아? 볼장 다 본사이에 무슨 부끄럼이냐구!"
"바...바보야..그게 십몇년 된 이야긴데.."
욕실.
문을 한칸두고 둘은 계속 실랑이를 벌인다.
밀어주겠다. 밀어주지 않아도 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리고 악의도 없는 말다툼은 계속 계속 되어간다.
뿌연 수증기가 그의 몸을 조용히 감싸안는다.
그리고 조용히 그렇게 행복은 가속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거겠지.....'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뱉은 한마디.
착잡하다. 애증이 묻어나온다.
그리고 그의 몸은 조용히 수증기속으로 사라져간다.
.................................
.....................
...........
.....
"너~무 좋다...그렇지 오빠?"
11월의 바람이 분다.
차다. 한겨울의 바람만큼은 되지않지만, 그래도 제법 매서운 바람이다.
바람은 대기를 찢는다. 찢고 찢고 더이상 조각날수 없을정도로 갈갈이 찢어놓는다.
실상 시원한 바람이다. 하지만 그에겐 시원하되 시원할수 없었다.
"으..응..시원하네...하아~"
조용히 입김을 내 뱉는다.
어느새 기온이 많이 떨어졋는지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하얀색.
그 어떤 탁한것이 묻어 있지않는 정말 하얀색이다.
그는 하얀색을 좋아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하얀색을, 자신이 하고싶은데로
마음대로 꾸며나갈수 있는 하얀색을 가장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그녀. 빤히 바라다 본다.
하얀색이다.
아무것도 잡티하나 묻어있지 않은 그런색이다.
그녀는 새하얀 천이다. 그는 유화물감이자..붓이다. 그녀에게 자신만의 색을 입히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든다.
"오빠..생각나? 오빠랑 나랑...여기서 처음만났잖아..?"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그는 그녀를 바라본다. 처음본 그때 그모습.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의 그녀의 모습과 겹쳐보인다.
그때 그대로다. 순수한마음역시 그 당시 그대로인것 같다.
"하..그래..여기서 만났었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 본다.
도시의 하늘은 언제나 희뿌연 매연으로 가득하다.
예전엔 보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달 하나만이 덩그러니 홀로 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지독히도 쓸쓸해 보인다.
"예전에 오빠가 말했었지.. 밤하늘에 떠있는 달이 나. 그리고 별이 오빠라고"
그는 회상한다. 확실히 예전에 그런일이 있었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가슴이 아려오는걸까?
조용히 자신의 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다 놓는다. 참을수 없는 아련함이 묻어나온다.
"오빠...."
그녀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또렷하게 눈을 직시한다.
그의 눈은 여전히 어둡다. 그리고 깊다.
아무것도 알아낼수 없다.
자기 자신을 옭아매듯, 아무에게도 접근을 허락치 않는 감춰진 마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의 눈은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때부터 였을까..?"
그녀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연다.
주위는 조용하다.
지나다니는 차소리마저도 나지 않을정도로 정적에 잠겨있다.
"오빠만 보면...가슴이..가슴이 너무 답답해진것도..?"
그녀가 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얼굴엔 홍조를 띄고 있다.
부끄러움
그녀가 내뱉고 싶은말은 무엇일까?
"오빠란사람... 가만히 놔둘수가 없어지게 된것도...그때였던가 같아.."
그는 조용히 그녀의 뒤로 돌아간다.
자신의 겉옷을 벗은 그는 그녀의 어깨에 조용히 걸쳐준다.
11월의 밤은 제법 쌀쌀하기 때문일까?
차가운 바람이 둘 사이를 조용히 훑고 지나간다
"그때 말했지...? 이젠 놓치지 않겠다고..."
조용히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주위는 여전히 정적에 잠겨있다.
이 넓은 강변에 둘만이 있는듯, 그렇게 조용히 시간은 흘러간다.
"....후회할지도 몰라..."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약간씩 떨려온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데 말할수 없는 느낌
"괜찮아...오빠와 함께라면..어떤일이라도..."
밤은 길다.
하늘은 달만이 덩그러이 떠 그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렇게 밤은 지나간다.
.....................
..............
......
...
조용히 눈을 뜬다.
주위는 아직 어스름하다.
그의 옆엔 누군가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자게...놔둘까..?"
조용히 일어난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옷을 갈아입은 그는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걷는다.
발걸음이 익숙하다는건 익숙한 길이기 때문일까?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딸칵-
하얀 입김이 공간을 메운다.
몇번 깜빡이던 전등은 어느새 공간을 빛으로 체우고 있다.
진한 유화물감의 향이 코를 강하게 자극한다.
"읏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않는다.
어느새인가 그의 손엔 작은 목탄 조각이 들려있다.
조용히 하얀 종이위에 목탄을 옮긴다.
화가에게 있어 그림이나 작품은 그가 살았다는 증거.
그는 그 증거를 남기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는 그리고 있다.
자신과 함께 하고싶다고 말해준 그녀를.
그녀의 수줍고 부드러운 미소를...
"젠장...왜이러지..이게 아닌데..."
-탁 타닥-
목탄이 바닥을 구른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감싸안고는 떨고있다.
멈추지 않는 떨림.
"왜...안돼는거지..."
그는 순수히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그녀를
그 사랑스러운 자태를.
그러나 그런 그에게서 나온 그림은..
"아냐...이건 정희가 아니잖아..."
날카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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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결말
그렸다.
계속 그렸다.
자신이 살아왔단 흔적을 남기기 위해 그는 필사적이다.
하지만 안된다.
그가 그리고 싶은건 이런게 아니었다.
사랑스럽다. 순수하다. 라는 느낌
그러나
그의 하얀종이위에 나타난 그녀는
조용히 웃고있었다..그리고 차갑게 웃고있었다.
그모습은 마치..그를 비웃는듯 하다.
조용히 생각한다.
회상에 빠져든다.
..........
.....
..
2달전...
"결국은...얼마나 살수 있단거죠...?"
조용히 묻는다.
그 목소리엔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텅빈 목소리.
"앞으로 길어야 2달에서 3달정도일까요...죄송합니다.."
사형선고
울려퍼진다.
의사의 입에서 뱉어진 그 한마디는 그의 사고를 얼어붙게 한다.
달려왔다.
쉬지않고 계속 달려왔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것은 길어야 3개월인 시한부 인생.
"남은기간을...의미있게 보내시기를..다른사람의 20..30년보다 더욱 의미있게.."
의사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
.......
...
삶의 증거, 그것을 남기고자 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그 자취를, 요 앞의 2개월하고도 약간의 시간이 20년이상의 보람을 느끼게
해준 그녀의 모습을 남기고자 했다.
그는 화가지망생이다.
화가는 자신이 느낀것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법이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순수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나타는 그녀는...
".....후우..그러고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로 이브로구나..."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리곤 불을 끈다.
문을 잠근다.
그의 아틀리에는 아버지가 마련해 주신것이다.
지금은 사고를 당하셔서 계시지 않지만 이 아틀리에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과도 같다.
아틀리에의 위치는 제법 좋은곳에 위치해있다.
"다녀왔어.."
조용히 문을연다.
언제나 적막만이 돌던 그의 집엔 이제는 활기가 넘친다.
"오빠 왔어? 잠시만- "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준비해온 무언가를 자신의 책상위에 조용히 올려놓는다.
크기는 작다.
"오빠 미안- 샤워중이었거든-"
목욕타월을 걸친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가 올려둔 자그마한 물건에게 시선을 두는 그녀.
"오빠? 이게 뭐야 ?"
그녀의 물음에 그는 조용히 대답한다.
"글쎄...이게 뭘까..음.. 이렇게 말해둘까..?"
그는 그녀의 눈을 직시한다.
그녀역시 그의 눈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녀가 본 그의 눈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가지는 말할수 있지..이게...누군가에게 있어 큰 선물이 될 거란 사실."
그리곤 그 조그마한 물체를 서랍에 넣고는 열쇠로 잠궈버린다.
그녀는 갸우뚱 하며 궁금해 했지만 이내 궁금함을 접어버린다.
그의 배에서 퍼져나온 소리때문에
-꼬르륵-
"풋..."
그녀가 조용히 조소한다.
그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는 방을 조용히 나선다.
"기다려-곧 식사준비 할테니까-"
그렇게 시간은 다가와간다.
....................
...........
.........
....
밤이다.
그의 옆엔 여전히 그녀가 잠들어 있다.
시간은 자정을 조금 넘기고 있다.
그는 잠이 오지 않는지 눈을 감곤 있지만 잠들진 않는다.
-부스럭-
갑작스런 기척
그의 옆에 잠들어 있던 그녀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쪽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방을 빠져나갔다.
'화장실가는거겠지..'
깨어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이시간에 갈곳이라곤 화장실뿐이라고 생각해서 였을까.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을 깨어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외문을 여는 소리.
외문이 열린다는것은 그녀가 집을 빠져나갔단 소리가 될터.
영문을 알지 못하지만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급하게 외투만 걸친 그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파트 앞의 공원.
그곳에서 그녀를 볼수 있었다.
다가가 부르려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정원수 뒤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그녀의 옆에 한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이야..?"
낮은 음성.
매우 불쾌하기 짝이없을정도로 낮은 음성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곧 마련할테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확신의 기색이 엿보인다.
"얼마나 기다려야하지..?"
남자는 조용히 되묻는다.
"앞으로 길어야 한달이에요...기다려 주세요.."
순간 피식 하고 웃은 남자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조용히 움켜잡는다.
그리곤 조용히 속삭인다.
"잊지마.. 그에게서 얻어내야 할것을 말이야..쿡..쿡쿡"
그말을 남기고 남자는 조용히 떠나갔다.
멍해진다.
그의 정신이.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
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
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
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
그의 사고엔 그저 '배신당했다.' 라는 다섯글자만이 지배한다.
화가는 자신의 심층에 있는 그대로를 종이에 옮긴다.
종이에 옮겨진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차갑고 비열해 보였다.
그는 그 모습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사실이라고 생각해버려서 일까.
그저 배신당했다는 다섯글자만이 떠오른다.
".....그래...네가 그렇다면..."
그의 사고에 떠오르던 다섯글자는 어느샌가 다른글자로 바뀌어 있었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으로
그녀는 남자를 따라간걸까?
공원엔 아무도 없다.
그는 조용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무겁다.
한없이 무겁다.
늪에 빠져드는것과도 같은 무거움.
하지만 걸었다.
-딸칵-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날짜는 바뀌어 크리스마스가 되어 있었다.
조용히 책상으로 다가간다.
"좋게 생각해야지..그녀가 이것이 필요하다면 말이야..."
펜을든다.
종이를 꺼낸다.
그리곤 무언가를 적어나간다.
펜의 움직임이 끝나고, 그는 조용히 자신의 서랍을 열어 그안에 다른것 몇가지를 넣어둔다.
그리고 다시 서랍을 잠구었다.
다시금 주머니로 돌아가야할 열쇠는 책상위에 두었다.
그는 베란다로 나갔다.
12월말의 겨울의 바람은 매우 차갑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살결을 조금씩 얼려간다.
사고가 얼어간다.
"안녕...."
조용히 읊조렸다.
그리곤 베란다에서 그의 모습을 찾을수 없었다.
.................................
...................
.........
....
새벽 3시경
그녀는 아파트근처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주위가 시끄럽다
어디선가 엠뷸런스의 경적이 들려오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은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딸칵-
문을 열었다.
-휘이잉-
바람이 들어온다.
베란다의 창이 열려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일 오빠에게 부탁해봐야지..."
혼잣말.
조용히 중얼거린 그녀는 그가 있을 침실로 향했다.
"......어?"
없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어야 할 그의 모습이 없다.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오빠?"
그를 찾기위해 다른방을 찾아본다.
없다.
그러던중 서재의 책상위에 못보던 종이쪽지를 하나 발견했다.
"....오...오빠....서..설마..?"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조용히 달싹거린다.
큰 눈망울엔 눈물이 아롱지고 있다.
[정희야 너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사실이라고 믿고 싶어.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이 진실이었단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앞으로 한달도 견디지 못할꺼야.
어차피 가는거 조금 일찍 간다고 해서 다를것 같지도 않고..
훗..
옆에둔 열쇠..로 서랍을 열어봐.
안엔 네가 꼭 필요한게 있을꺼야.
사랑해.
그리고 내 인생에 의미가 되어주어서 정말 고맙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고 있다.
"오빠..대체..무슨생각으로 이런..."
주저 앉는다.
흐느낀다.
엠뷸런스 소리가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
......................
.........
.....
"책상안에서 이런게 나왔더군요"
다음날 그의 집으로 두명의 형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아무것도 대답할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자신때문이었기 때문에.
"유서입니다.. 모든 재산을 정희씨에게 상속한다는 내용과..통장과 인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공허한 시선은 천장만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이런게 나왔군요"
조그마한 상자
형사는 아무생각없이 그 상자를 열었다
-딸칵-
빛난다.
조용히 빛나는 고리형의 물체.
"...아..."
반지다.
중앙에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반지.
문득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그의 모습
'한가지는 말할수 있지..이게...누군가에게 있어 큰 선물이 될 거란 사실.'
다시 눈물이 고인다.
흐느낀다.
그런 그녀를 본 형사들은 아무런 말도 할수 없다.
확실히 그녀는 돈이 필요했다.
어머니의 수술비로 돈을 빌렸기 때문에 갚아야 했다.
그에게 접근한 이유에 약간은 이런 사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아니다.
그런 이유때문이란것만은 아니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서 돈을 빌리려고 생각했다.
꼭 일해서 갚을 생각이었다.
늘어가는 이자때문에 더 기한을 미루었다간 절대 갚을수 없게 될지도 몰랐기에.
그는 대단한 자산가였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자산이 상당했다.
그래서 그에게서 빌리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라면,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면 빌려줄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다.
모순된 사랑은 슬픔만을 남겼다.
.......................
...............
.........
.....
국립묘지.
그의 마지막 쉼터는 이곳으로 정해졌다
아무도 오지않았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눈엔 여전히 이슬이 맺혀있다.
"안녕...더이상은...함께할수 없겠지만..."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있는지..하늘역시 울고 있었다.
먹구름 낀 하늘은 어둡기만 하다.
그렇게 12월의 마지막날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있는지..하늘역시 울고 있었다.
먹구름 낀 하늘은 어둡기만 하다.
그렇게 12월의 마지막날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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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재회
10월의 하늘은 높기만 하다. 바람은 스산하다. 그리고 햇볓은 따갑다.
조용한 방. 유화물감 냄새가 진득히 퍼져나온다.
이리 저리 붓이 종이위를 오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종이위를 수놓던 붓은 조용히 파레트위에 놓여진다.
"하아.....여기까지인가...수고하셨습니다.."
한 사내가 말했다. 검다. 어둡다. 그리고 깊이를 알수없을만큼 깊다.
심연과도 같은 깊은 눈동자를 지닌 사내는 더이상 그곳에 볼일이 없다는듯 자신의 겉옷을 들어올리며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라고 해봤자..아무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으려나.."
다시금 보이는 그의 눈은 슬퍼보였다.
외로워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걷는다. 정처없이,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걸까? 그는 그렇게 아무런 생각을 가지지 않고 걷는다.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도 없는듯이 휘적휘적 걷던 그는...이윽고 한 건물에 도착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얼굴만이라도 보고 돌아갈까..후..."
그는 건물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민한다. 그것도 심각하게. 한참을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보던 건물 수위는 참지 못한듯이 수위실의 문을 열고 그에게 윽박지른다.
"어이 거기 허여멀건한 인간아! 보험회사 신입이지? 이 건물에 당신같은사람 들어올 필요 없으니까
썩 사라져!"
졸지에 보험회사의 신입사원이 되어버린 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굳어 버린다. 아무런 미동없이. 마치 그자리에 서있던 동상과도 같이 조용히 굳어버린다.
.............................
................
.......
..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아직도 그 건물앞에서 걸음을 때지 못하고 있다.
표정엔 조금씩 어둠이 끼어가고 있다. 피곤해서 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문제여서 일까?
시간은 조용히 흘러만 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의 얼굴엔 어둠 이외의 다른것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초조함. 그리고 불안함.
무엇이 초조하고 불안한 것일까
그는 그렇게 또 한참을 기다렸다.
건물의 문이 열렸다.
몇명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걸어나왔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침식하던 그의 몸이 서서히 움직였다.
용기를 내었다.
그동안 부르지 못한 이름.
"......정희야..."
조용히 불러보았다.
그렇게도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이었을까?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있다.
".....병수오빠?"
그의 모습을 본 그녀는 순간 굳어버렸다. 더이상 입을 땔수도 없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그런모습을 본 다른사람들은 그냥 그런일이려니 하고 모두 사라진 뒤였다.
"...정희야..오랜만이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옅게 배어져 나오는 슬픈마음, 그리고 애정.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하는 그녀. 이윽고 그를 바라본다.
뭔가가 복잡한.. 잘 풀리지 않는듯한 표정, 그리고 어느샌가 그녀의 그런표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응...오빠도..좋아 보여서..다행이네.."
말하는 목소리에 습기가 배여있다. 맑던 하늘에 조금씩 어둠이 드리운다. 그를 직시하는 그녀의 눈에도
약간의 습기가 배어져 나온다.
"그동안..왜..그냥 가버린거야..? 나...오빠가 너무 보고싶었는데.."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침묵
그것도 하나의 대답이 될수 있었을까..? 아니면 대답을 바라고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는 조용히 그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이제 만났으니까..이제 다시는..오빨 놓지 않을꺼야...절대로..."
10월의 오후는 점점 깊어져만 간다.
조용히 그리고 으스러지도록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사람을 잠식하듯이, 그렇게 조금씩 시간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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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그녀
"아이참 오빠 문 열라니까~!"
조용했던 그의 공간이 조금은 활발해졌다. 적막으로 가득차있던 공간엔 어느샌가 이것저것 볼수 없었던
꽃과 물건들로 체워져 나갔고 먼지만 쌓여있던 방은 광이 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난다.
"그..그래도..정희야 그러는게 아냐..그러니까 나 혼자 할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전엔 찾아볼수 없던 목소리 하나가 더 들려온다. 활발하다. 그리고 행복하게 들려온다.
"등에 손도 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겠다는건데에 - 내가 해줄께 오빠 -"
얼굴엔 약간 장난기가 묻어 나온다. 그녀다. 병수라고 불리는 사내가 보아왔던 모든것이라고 해도 좋을정도
로 빛나는 그녀, 윤정희다.
그녀의 오른손엔 노란색 타월이, 왼손엔 하얀색 비누가 들려있다.
"자..장난하지말라고! 내 나이를 생각좀 해줬으면해 제발.."
왠지 애처롭게 들리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행복이 흠씬 묻어나온다.
10월엔 볼수 없던 그의 모습이다. 더이상 얼굴엔 초조함과 불안함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득한 행복함
많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약간씩 비치는 슬픈눈동자...
"뭐 어때! 예전엔 같이 했었잖아? 볼장 다 본사이에 무슨 부끄럼이냐구!"
"바...바보야..그게 십몇년 된 이야긴데.."
욕실.
문을 한칸두고 둘은 계속 실랑이를 벌인다.
밀어주겠다. 밀어주지 않아도 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리고 악의도 없는 말다툼은 계속 계속 되어간다.
뿌연 수증기가 그의 몸을 조용히 감싸안는다.
그리고 조용히 그렇게 행복은 가속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거겠지.....'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뱉은 한마디.
착잡하다. 애증이 묻어나온다.
그리고 그의 몸은 조용히 수증기속으로 사라져간다.
.................................
.....................
...........
.....
"너~무 좋다...그렇지 오빠?"
11월의 바람이 분다.
차다. 한겨울의 바람만큼은 되지않지만, 그래도 제법 매서운 바람이다.
바람은 대기를 찢는다. 찢고 찢고 더이상 조각날수 없을정도로 갈갈이 찢어놓는다.
실상 시원한 바람이다. 하지만 그에겐 시원하되 시원할수 없었다.
"으..응..시원하네...하아~"
조용히 입김을 내 뱉는다.
어느새 기온이 많이 떨어졋는지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하얀색.
그 어떤 탁한것이 묻어 있지않는 정말 하얀색이다.
그는 하얀색을 좋아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하얀색을, 자신이 하고싶은데로
마음대로 꾸며나갈수 있는 하얀색을 가장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그녀. 빤히 바라다 본다.
하얀색이다.
아무것도 잡티하나 묻어있지 않은 그런색이다.
그녀는 새하얀 천이다. 그는 유화물감이자..붓이다. 그녀에게 자신만의 색을 입히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든다.
"오빠..생각나? 오빠랑 나랑...여기서 처음만났잖아..?"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그는 그녀를 바라본다. 처음본 그때 그모습.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의 그녀의 모습과 겹쳐보인다.
그때 그대로다. 순수한마음역시 그 당시 그대로인것 같다.
"하..그래..여기서 만났었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 본다.
도시의 하늘은 언제나 희뿌연 매연으로 가득하다.
예전엔 보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달 하나만이 덩그러니 홀로 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지독히도 쓸쓸해 보인다.
"예전에 오빠가 말했었지.. 밤하늘에 떠있는 달이 나. 그리고 별이 오빠라고"
그는 회상한다. 확실히 예전에 그런일이 있었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가슴이 아려오는걸까?
조용히 자신의 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다 놓는다. 참을수 없는 아련함이 묻어나온다.
"오빠...."
그녀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또렷하게 눈을 직시한다.
그의 눈은 여전히 어둡다. 그리고 깊다.
아무것도 알아낼수 없다.
자기 자신을 옭아매듯, 아무에게도 접근을 허락치 않는 감춰진 마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의 눈은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때부터 였을까..?"
그녀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연다.
주위는 조용하다.
지나다니는 차소리마저도 나지 않을정도로 정적에 잠겨있다.
"오빠만 보면...가슴이..가슴이 너무 답답해진것도..?"
그녀가 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얼굴엔 홍조를 띄고 있다.
부끄러움
그녀가 내뱉고 싶은말은 무엇일까?
"오빠란사람... 가만히 놔둘수가 없어지게 된것도...그때였던가 같아.."
그는 조용히 그녀의 뒤로 돌아간다.
자신의 겉옷을 벗은 그는 그녀의 어깨에 조용히 걸쳐준다.
11월의 밤은 제법 쌀쌀하기 때문일까?
차가운 바람이 둘 사이를 조용히 훑고 지나간다
"그때 말했지...? 이젠 놓치지 않겠다고..."
조용히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주위는 여전히 정적에 잠겨있다.
이 넓은 강변에 둘만이 있는듯, 그렇게 조용히 시간은 흘러간다.
"....후회할지도 몰라..."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약간씩 떨려온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데 말할수 없는 느낌
"괜찮아...오빠와 함께라면..어떤일이라도..."
밤은 길다.
하늘은 달만이 덩그러이 떠 그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렇게 밤은 지나간다.
.....................
..............
......
...
조용히 눈을 뜬다.
주위는 아직 어스름하다.
그의 옆엔 누군가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자게...놔둘까..?"
조용히 일어난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옷을 갈아입은 그는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걷는다.
발걸음이 익숙하다는건 익숙한 길이기 때문일까?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딸칵-
하얀 입김이 공간을 메운다.
몇번 깜빡이던 전등은 어느새 공간을 빛으로 체우고 있다.
진한 유화물감의 향이 코를 강하게 자극한다.
"읏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않는다.
어느새인가 그의 손엔 작은 목탄 조각이 들려있다.
조용히 하얀 종이위에 목탄을 옮긴다.
화가에게 있어 그림이나 작품은 그가 살았다는 증거.
그는 그 증거를 남기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는 그리고 있다.
자신과 함께 하고싶다고 말해준 그녀를.
그녀의 수줍고 부드러운 미소를...
"젠장...왜이러지..이게 아닌데..."
-탁 타닥-
목탄이 바닥을 구른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감싸안고는 떨고있다.
멈추지 않는 떨림.
"왜...안돼는거지..."
그는 순수히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그녀를
그 사랑스러운 자태를.
그러나 그런 그에게서 나온 그림은..
"아냐...이건 정희가 아니잖아..."
날카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
..........
....
..
--------------------------------------------------------------------------
12월 결말
그렸다.
계속 그렸다.
자신이 살아왔단 흔적을 남기기 위해 그는 필사적이다.
하지만 안된다.
그가 그리고 싶은건 이런게 아니었다.
사랑스럽다. 순수하다. 라는 느낌
그러나
그의 하얀종이위에 나타난 그녀는
조용히 웃고있었다..그리고 차갑게 웃고있었다.
그모습은 마치..그를 비웃는듯 하다.
조용히 생각한다.
회상에 빠져든다.
..........
.....
..
2달전...
"결국은...얼마나 살수 있단거죠...?"
조용히 묻는다.
그 목소리엔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텅빈 목소리.
"앞으로 길어야 2달에서 3달정도일까요...죄송합니다.."
사형선고
울려퍼진다.
의사의 입에서 뱉어진 그 한마디는 그의 사고를 얼어붙게 한다.
달려왔다.
쉬지않고 계속 달려왔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것은 길어야 3개월인 시한부 인생.
"남은기간을...의미있게 보내시기를..다른사람의 20..30년보다 더욱 의미있게.."
의사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
.......
...
삶의 증거, 그것을 남기고자 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그 자취를, 요 앞의 2개월하고도 약간의 시간이 20년이상의 보람을 느끼게
해준 그녀의 모습을 남기고자 했다.
그는 화가지망생이다.
화가는 자신이 느낀것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법이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순수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나타는 그녀는...
".....후우..그러고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로 이브로구나..."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리곤 불을 끈다.
문을 잠근다.
그의 아틀리에는 아버지가 마련해 주신것이다.
지금은 사고를 당하셔서 계시지 않지만 이 아틀리에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과도 같다.
아틀리에의 위치는 제법 좋은곳에 위치해있다.
"다녀왔어.."
조용히 문을연다.
언제나 적막만이 돌던 그의 집엔 이제는 활기가 넘친다.
"오빠 왔어? 잠시만- "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준비해온 무언가를 자신의 책상위에 조용히 올려놓는다.
크기는 작다.
"오빠 미안- 샤워중이었거든-"
목욕타월을 걸친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가 올려둔 자그마한 물건에게 시선을 두는 그녀.
"오빠? 이게 뭐야 ?"
그녀의 물음에 그는 조용히 대답한다.
"글쎄...이게 뭘까..음.. 이렇게 말해둘까..?"
그는 그녀의 눈을 직시한다.
그녀역시 그의 눈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녀가 본 그의 눈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가지는 말할수 있지..이게...누군가에게 있어 큰 선물이 될 거란 사실."
그리곤 그 조그마한 물체를 서랍에 넣고는 열쇠로 잠궈버린다.
그녀는 갸우뚱 하며 궁금해 했지만 이내 궁금함을 접어버린다.
그의 배에서 퍼져나온 소리때문에
-꼬르륵-
"풋..."
그녀가 조용히 조소한다.
그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는 방을 조용히 나선다.
"기다려-곧 식사준비 할테니까-"
그렇게 시간은 다가와간다.
....................
...........
.........
....
밤이다.
그의 옆엔 여전히 그녀가 잠들어 있다.
시간은 자정을 조금 넘기고 있다.
그는 잠이 오지 않는지 눈을 감곤 있지만 잠들진 않는다.
-부스럭-
갑작스런 기척
그의 옆에 잠들어 있던 그녀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쪽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방을 빠져나갔다.
'화장실가는거겠지..'
깨어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이시간에 갈곳이라곤 화장실뿐이라고 생각해서 였을까.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을 깨어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외문을 여는 소리.
외문이 열린다는것은 그녀가 집을 빠져나갔단 소리가 될터.
영문을 알지 못하지만 그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급하게 외투만 걸친 그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파트 앞의 공원.
그곳에서 그녀를 볼수 있었다.
다가가 부르려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정원수 뒤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그녀의 옆에 한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이야..?"
낮은 음성.
매우 불쾌하기 짝이없을정도로 낮은 음성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곧 마련할테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확신의 기색이 엿보인다.
"얼마나 기다려야하지..?"
남자는 조용히 되묻는다.
"앞으로 길어야 한달이에요...기다려 주세요.."
순간 피식 하고 웃은 남자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조용히 움켜잡는다.
그리곤 조용히 속삭인다.
"잊지마.. 그에게서 얻어내야 할것을 말이야..쿡..쿡쿡"
그말을 남기고 남자는 조용히 떠나갔다.
멍해진다.
그의 정신이.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
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
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
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배신당했다.
그의 사고엔 그저 '배신당했다.' 라는 다섯글자만이 지배한다.
화가는 자신의 심층에 있는 그대로를 종이에 옮긴다.
종이에 옮겨진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차갑고 비열해 보였다.
그는 그 모습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사실이라고 생각해버려서 일까.
그저 배신당했다는 다섯글자만이 떠오른다.
".....그래...네가 그렇다면..."
그의 사고에 떠오르던 다섯글자는 어느샌가 다른글자로 바뀌어 있었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으로
그녀는 남자를 따라간걸까?
공원엔 아무도 없다.
그는 조용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무겁다.
한없이 무겁다.
늪에 빠져드는것과도 같은 무거움.
하지만 걸었다.
-딸칵-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날짜는 바뀌어 크리스마스가 되어 있었다.
조용히 책상으로 다가간다.
"좋게 생각해야지..그녀가 이것이 필요하다면 말이야..."
펜을든다.
종이를 꺼낸다.
그리곤 무언가를 적어나간다.
펜의 움직임이 끝나고, 그는 조용히 자신의 서랍을 열어 그안에 다른것 몇가지를 넣어둔다.
그리고 다시 서랍을 잠구었다.
다시금 주머니로 돌아가야할 열쇠는 책상위에 두었다.
그는 베란다로 나갔다.
12월말의 겨울의 바람은 매우 차갑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살결을 조금씩 얼려간다.
사고가 얼어간다.
"안녕...."
조용히 읊조렸다.
그리곤 베란다에서 그의 모습을 찾을수 없었다.
.................................
...................
.........
....
새벽 3시경
그녀는 아파트근처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주위가 시끄럽다
어디선가 엠뷸런스의 경적이 들려오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은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딸칵-
문을 열었다.
-휘이잉-
바람이 들어온다.
베란다의 창이 열려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일 오빠에게 부탁해봐야지..."
혼잣말.
조용히 중얼거린 그녀는 그가 있을 침실로 향했다.
"......어?"
없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어야 할 그의 모습이 없다.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오빠?"
그를 찾기위해 다른방을 찾아본다.
없다.
그러던중 서재의 책상위에 못보던 종이쪽지를 하나 발견했다.
"....오...오빠....서..설마..?"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조용히 달싹거린다.
큰 눈망울엔 눈물이 아롱지고 있다.
[정희야 너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사실이라고 믿고 싶어.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이 진실이었단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난 앞으로 한달도 견디지 못할꺼야.
어차피 가는거 조금 일찍 간다고 해서 다를것 같지도 않고..
훗..
옆에둔 열쇠..로 서랍을 열어봐.
안엔 네가 꼭 필요한게 있을꺼야.
사랑해.
그리고 내 인생에 의미가 되어주어서 정말 고맙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고 있다.
"오빠..대체..무슨생각으로 이런..."
주저 앉는다.
흐느낀다.
엠뷸런스 소리가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
......................
.........
.....
"책상안에서 이런게 나왔더군요"
다음날 그의 집으로 두명의 형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아무것도 대답할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자신때문이었기 때문에.
"유서입니다.. 모든 재산을 정희씨에게 상속한다는 내용과..통장과 인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공허한 시선은 천장만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이런게 나왔군요"
조그마한 상자
형사는 아무생각없이 그 상자를 열었다
-딸칵-
빛난다.
조용히 빛나는 고리형의 물체.
"...아..."
반지다.
중앙에 자그마한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반지.
문득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그의 모습
'한가지는 말할수 있지..이게...누군가에게 있어 큰 선물이 될 거란 사실.'
다시 눈물이 고인다.
흐느낀다.
그런 그녀를 본 형사들은 아무런 말도 할수 없다.
확실히 그녀는 돈이 필요했다.
어머니의 수술비로 돈을 빌렸기 때문에 갚아야 했다.
그에게 접근한 이유에 약간은 이런 사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아니다.
그런 이유때문이란것만은 아니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서 돈을 빌리려고 생각했다.
꼭 일해서 갚을 생각이었다.
늘어가는 이자때문에 더 기한을 미루었다간 절대 갚을수 없게 될지도 몰랐기에.
그는 대단한 자산가였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자산이 상당했다.
그래서 그에게서 빌리고 싶었다.
사랑하는 그라면,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면 빌려줄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다.
모순된 사랑은 슬픔만을 남겼다.
.......................
...............
.........
.....
국립묘지.
그의 마지막 쉼터는 이곳으로 정해졌다
아무도 오지않았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눈엔 여전히 이슬이 맺혀있다.
"안녕...더이상은...함께할수 없겠지만..."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있는지..하늘역시 울고 있었다.
먹구름 낀 하늘은 어둡기만 하다.
그렇게 12월의 마지막날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댓글목록


아르휘나님의 댓글
아르휘나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태클은 아니구요~ 그냥 취미삼아 유화그리는 사람의 중얼거림....
유화는 종이에 그릴수 없답니다~ 보통 유화용 천(두꺼워요)에다 그려용.
유화물감을 테레핀 오일이나 린시드 오일 (혹은 섞어서)에 개어서 사용하고, 붓에 묻은 색을 씻어 낼때는 휘발유를 사용하는데, 보통 유화작업실에서 나는 냄새는 테레핀+휘발유 냄새가 섞여 나는 거랍니당.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절대 향기로는 냄새는 아니고요. 아, 근데 계속 맡다보면 향기롭게 느껴질수도 있어요 ^^; (중독인가...)
글 평판할 실력이 못되다 보니 이상한 소리만 주절 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