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님팬픽[Always]외전 - Wishing for your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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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갈 준비, 했어?”
“응?”
“학교 갈 준비 말이야. 이름표 달았니?”
“응.”
요즘 들어 유지는 무언가를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일이 많아 진 듯 했다.
“벌써 시간 다 됐어, 가자.”
나는 유지를 바이크의 옆 좌석에 태우고 헬멧을 씌어주고는 시동을 걸었다. 헬멧 아래로 삐져나온, 밀크를 떨어뜨린 다즐링 티 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가는 손목과 흰 목덜미, 남자애 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 날 닮은 것 보단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지를 학교 정문 앞에 데려다주고나서 휠윈드에 도착한 나는 먼저 출근해 있는 지로 선배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도 인사에 답해준다.
“안녕? 몸은 좀 어때?”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너무 무리 하지 말고.”
“네, 고마워요 선배.”
10년 전 작은 컨테이너에서 시작한 가게였지만 이제 종업원도 세 명이나 되는 어엿한 매장의 사장님이 된 선배였다. 그동안 몇 번의 위기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선배를 중심으로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의 후배들인 종업원들은 힘을 합쳐 잘 넘겨 왔다. 이들 중 가장 크게 흔들린 건 분명 나였지만, 사정을 너무도 잘 아는 그들은 나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고, 특히 지로선배는 내가 몇 번이나 근무시간과 일수를 채우지 못해도 월급을 꼬박꼬박 챙겨주었다. 평소에 보아온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건 역시 잘못된 일이다.
9개월 전 베르단디가 병으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된 후 나는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울드와 스쿨는 어떻게든 나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우울증으로 말 수가 줄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론 직장에 제대로 다닐 수조차 없었다. 스쿨드는 나에게 유지를 봐서라도 제발 정신 차리라고 타일렀지만 그때는 그 말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울드와 스쿨드는 천상계의 일 때문에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집을 떠났다. 그게 그녀들을 마지막으로 본 때였다. 나와 유지를 챙겨주던 그녀들이 떠나자 정신적 공황상태는 곧 육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술에 손을 대게 된 나의 건강은 위험한 상태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슬픔에 잠겨 앨범을 보던 나는 문득 유지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지는 정말 비쩍 말라서 보기 애처로울 정도였다. 집안은 온통 먼지가 쌓이고 정리 되지 않은 난장판이었다. 나는 퍼뜩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 그녀를 봐서라도…….
이건 베르단디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그때부터 나는 직장에 다시 나가게 되었고, 병원에서 치료도 꼬박꼬박 받았다. 하지만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은 쉽사리 예전처럼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길가다 갑자기 쓰러져 버리기도 하고, 손이 덜덜 떨려 정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지로선배는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유지가 엄마가 없음을 알고 어디 갔냐고 물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해줬다.
너무도 아름답고 자상한 엄마는 하느님의 부름으로 여신이 되어 천상계에 간 것이라고…….
물론 유지는 베르단디들이 여신인걸 몰랐고, 실제 내가 아는 천상계와 여신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한 말이었지만 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 이제 볼 수 없는 거야?”
“으...응...”
“얼마나? 일주일? 아니면... 한달?”
유지의 물음에 나는 도저히 대답 할 수 없었다. 그저 유지를 끌어안고 울음소리를 꾹 누르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는...
진실을 알기에는 유지는 아직 너무 어렸다. 앞으로도 한참동안 나는 거짓말을 계속할 생각이다. 언젠가는 유지도 사실을 알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후4시, 아직 휠윈드의 일과가 끝날 시간이 아니었지만 학교를 마친 유지를 데리러 가봐야만 했다. 그래서 난 항상 이렇게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퇴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에 눈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죄송해요. 오늘도 먼저 가볼께요.”
“또 그런다, 미안해 할 것 없다니까. 우리가 한두 해 같이 일 해온 사이도 아니고.”
지로 선배 뒤에 있던 하세가와도 거들었다.
“선배, 운전 조심하세요.”
“걱정 마. 이제 괜찮다니까.”
그들을 뒤로 하고 나는 유지를 데리러 가기 위해 초등학교로 방향을 잡았다. 유지를 태우고 집으로 향하니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낮에는 포근한 편이었는데 해가 지자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다. 그래서 나는 잠시 바이크를 세워 유지에게 재킷을 벗어 주고 다시 집을 향래 출발했다. 해안도로에 접어들자 12월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사정없이 몸 안으로 스며들어들었다.
“안 추워?”
“응?”
유지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말을 걸어왔다.
“옷 벗어줬잖아. 괜찮아?”
“응. 이제 거의 다 왔잖아.”
하지만 내 몸 상태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입술은 부들부들 떨렸고, 가슴도 답답해졌다. 집에 도착해서 바이크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제자리에 서 있기 조차 힘들었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서 거칠게 숨을 내쉬는 나에게 유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괜찮아?”
“응, 조금 있으면.”
“그래?”
한동안 바이크에 등을 기대고 있었지만 머리는 깨질 듯 고통스러웠고,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시야도 여전히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유지는 내가 벗어주었던 재킷을 벗더니 다시 나에게 덮어 주었다.
“아빠.”
“응?”
나는 유지의 부름에 힘겹게 대답했다.
“노래 해줄까?”
“응.”
유지는 남자아이였지만 가느다란 목소리로 평소 베르단디가 요리와 빨래를 할 때 흥얼거리던 ‘계란씨, 계란양’ 과 ‘이불을 널어요.’를 불러주었다. 내가 이렇게 힘겨워 하면 간혹 불러 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내 가슴은 그리움에 구멍이 더 넓혀지는 듯 했다.
하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와 가슴의 통증이 사라졌고 호흡하기도 수월해졌다. 겉으로 표시는 나지 않지만, 어쩌면 유지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라?”
“왜?”
“정말이야. 감쪽같이 다 나았어.”
“그치?”
“응.”
“굉장하지?”
“정말 그러네.”
고통이 진정되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유지가 옆에서 작은 손으로 부축해주었다.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겨울의 노을이니 아마 분명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해 지는 거 잠깐 보고 들어갈까?”
“응.”
나와 유지는 나란히 바이크를 기대고 앉아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엄마, 보고 싶다.”
“나도 그래.”
한참 있다가 다시 유지가 말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무언가를 알고 물어본 걸까?
“아냐.”
“정말?”
“정말이지.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다시 한참 지나서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정말로 그런 거 아냐.”
“알고 있어.”
“그럼 됐다.”
“응.”
다음날, 토요일이라 일찍 학교를 끝낸 유지와 함께 숲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주말에는 절 뒤의 산으로 산책을 가는 것이었다. 기온은 전날보다 더 떨어져서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잎이 거의 다 떨어져버린 앙상한 가지가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새들도 지저귀지 않았다. 유지와 나는 서로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었다. 뭔가 말을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우울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요했다. 이따금 생각난 것처럼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투두둑하고 콩을 뿌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어느새 사방은 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유지는 생전 처음 보는 눈을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만져보고 심지어 입안에 넣어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머리위에 앉는 눈은 계속 해서 털어내었다. 감촉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숲 속 깊이 들어가자 날씨가 더 추워지며 하늘은 많이 어두워졌고, 제법 굵은 눈송이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유지에게 말했다.
“자, 돌아가자.”
그러나 유지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과 눈썹을 가까이 붙이고 그로서는 퍽 어른스러운 눈빛으로 오로지 한 지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 끝을 더듬어 따라가 보았다.
사방이 온통 눈 내리는 백색 풍경 속에 단 한 점의 엷은 색채가 있었다. 속눈썹에 들어오는 눈을 손끝으로 뿌리치며 다시 한 번 찬찬히 응시해보았다. 그것은 금세 그것이라고 알 수 있는 너무나 그리운 윤곽이었다.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베르단디다.
그녀가 흰 털실 스웨터를 걸치고 벚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저 그리운 실루엣, 무어라 비유할 수 없어 ‘그 것’ 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은 그녀가 나를 향해 뿜어내는 친밀한 단어 같은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단어. 나는 그것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유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입은 O자로 벌리고 있었다.
쿵...쿵... 심장 박동소리가 머리에 울릴 만큼 요동치고 있었다.
‘올해 첫눈이 오면, 전 반드시 케이와 유지를 보러 올 거예요.’
벚꽃이 쏟아지던 3월. 베르단디가 우리 곁을 떠나기 며칠 전 핏기 없는 입술로 가늘게 속삭이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때는 베르단디를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가 나의 모든 이성과 감정을 지배하고 있어 그 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적어도, 눈이 녹기 전까지는 함께 있을 거예요.’
‘그런 말 하지마. 왜 꼭 떠날 것 같이 말하는 거야?’
그때 나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베르단디의 손을 꼭 잡으며 설마설마 했지만 얼마못가 현실은 가혹하게 찾아 왔다. 나와 울드와 스쿨드가 보는 가운데 베르단디의 형상은 환한 빛의 무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저기... 병을 고치러 천상계에 잠깐 올라간 거지?’
스쿨드는 얼이 빠진 표정을 짓다 곧 펑펑 울기 시작했고 울드는 감정을 억제 하려는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지만 눈물이 새어나오는걸 막을 수 없었는지 볼이 젖어 가고 있었다.
‘울드? 스쿨드? 왜이래? 병만 고쳐지면 다시 같이 지낼 수 있는 거잖아.’
그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도 곧 베르단디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한동안 나는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무너져 간 것이다.
‘올해 첫눈이 오면, 전 반드시 케이와 유지를 보러 올 거예요.’
‘반드시...’
‘만나러 올 거예요...’
“아빠?”
거의 넋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향해 뚫어져라 보고 있던 나에게 유지는 벼르고 별렀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처럼 작디작게 속삭였다.
“큰일 났어.”
그는 몇 번이고 급하게 눈을 깜빡였다.
“엄마가... 엄마가 천상계에서 돌아와버렸어.”
우리는 멈칫멈칫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다. 설사 저것이 베르단디의 유령이라해도 내가 두려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단지 아주 작은 공기의 흔들림조차도 그녀의 존재를 마구 지워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지도 분명 똑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갑자기 뛰어들어 베르단디에게 안기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별하기 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올해 첫눈이 오면 케이와 유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드시 보러 올 거예요.’ 그러니까, 베르단디는 그 약속을 성실히 지키려고 이렇게 우리를 만나러 와준 것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이마와 양 볼에 있는 문장을... 그녀는 베르단디와 꼭 닮은 누군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베르단디 그 자체였다.
가슴속으로 수천수만 번을, 아니 헤아릴 수 없이 외쳤던 그 이름...
“베르단디.”
그녀는 우리의 기척을 느꼈는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베르단디와 눈이 마주치자 막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케이씨?”
가늘고 높은, 말끝이 살짝 떨리는 저 그리운 목소리.
“베르단디... 베르단디 맞는 거야?”
나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유지도 덩달아 울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와 유지를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베르단디의 머리와 어깨에는 하늘에서 내린 눈이 살포시 내려와 앉고 있었다. 분명... 환영은 아니리라.
“저기... 손, 잡아 봐도 될까?”
베르단디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그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날씨 때문인지 차가웠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온기가 전해졌었다. 내 눈 앞에 있는 그녀는 분명 유령도 아니었다. 감촉도 느낄 수 있고, 온기도 가지고 있었다.
유지도 멈칫멈칫 다가가 자그마한 손을 내밀어 베르단디의 분홍색 치맛자락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녀는 유지에게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뭔가 어중간한 표정이 뺨에 맴돌았다.
뭘까? 이 기묘한 위화감.
“엄마?”
유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베르단디를 불렀다.
“내가... 엄마?”
베르단디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유지는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정말 유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재빨리 유지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돌려 세운 후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내가 하는 말에 넌 맞다고 옆에서 거들기만 해. 알았지?”
유지는 무언가 큰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정말이야. 유지는 우리 아들이야.”
“저와... 케이씨의?”
“응.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 거야?
베르단디는 한동안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전 케이씨와 결혼한 건가요?”
“으, 응.”
“그렇군요...”
수긍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 기억이 나서 그렇다기 보다는 남을 의심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냥 그대로 나의 말을 믿어버린 것 같았다.
“그럼 전 여기서 뭘 하고 있었죠?”
“응? 아.... 아 그래, 산책. 산책을 하고 있었어.”
“산책... 인가요?”
“우리는 셋이서 이곳에 왔어. 늘 다니던 주말의 산책이야. 그렇지 유지?”
“응. 산책이야. 맞아.”
나는 말을 재차 확인했고, 유지는 나의 말에 맞장구 쳐주었다.
“그렇군요...”
“아무튼 함께 집에 가자. 그러다 보면 분명 기억도 돌아올 거야.”
“그럴까요?”
“그럼.”
나는 힘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베르단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와 어깨에 앉아 있는 눈이 후드득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자, 서둘러 돌아가자. 이러다 감기 들어.”
숲 속 오솔길을 베르단디와 유지가 나란히 걷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갔다. 처음에는 들썽거리며 어쩔 줄을 모르던 유지가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자신의 손을 그녀를 행해 내밀었다. 그것을 알아본 베르단디가 곧바로 손을 잡아주었다. 손이 맞닿았을 때, 유지가 흠칫 베르단디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만 견디지 못한 유지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하다. 거의 1년 만에 엄마의 손을 잡아 본 것이다.
“이제 곧 베르단디도 다 생각이 나겠지만... 유지는 지독한 울보야.”
나는 말했다.
“그냥 어쩔 줄 몰라서 그래. 베르단디의 기억이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정하게 대해줘. 지금까지도 베르단디는 내내 그렇게 해왔지만.”
베르단디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유지의 가느다란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아주었다. 유지는 한참이나 엄마의 온기를 느끼며 긴 울음 끝의 노곤함과도 같이 기분 좋게 엄마의 존재에 취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손의 온기를 느끼며 그렇게 걸어갔다. 유지는 어느새 흥이 올랐는지 가면서 간간히 눈으로 장난도 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베르단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윽고 셋이서 눈이 쌓이는 숲을 벗어나 집에 도착하자 주위는 이미 어두워져있었다.
“여기가... 우리 집인가요?”
베르단디가 기억하는 집의 모습이 예전의 모습이라면 분명 낯설게 느껴질게 분명했다. 잡초와 깨어진 기왓장은 눈이 쌓여 표시나지 않았지만 먼지가 쌓인 마루, 금이 간 창문...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최근 들어 몸이 어느 정도 회복 된 후로는 집의 복구를 위해 힘썼지만 절까지 포함된 이 넓은 곳을 나와 유지 둘이서 유지해 간다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한번도 이사 따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여기는 베르단디와의 모든 추억이 남겨진 곳이니까.
“미안해, 좀 지저분하지? 자, 일단 이리로 들어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베르단디는 집안 여기저기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베르단디의 기억 속에 있는 집의 풍경과는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집 안은 한 달 전쯤 메구미가 와서 청소를 도와준 덕분에 그나마 바깥보다는 약간 나았지만 그래도 베르단디에게 보이기에는 무안할 정도였다.
“케이씨, 전 집이 이렇게 되도록 청소도 안했었나요?”
“아냐아냐, 베르단디는... 누구보다 솜씨가 좋았어.”
베르단디는 거실을 둘러보다 벽면에 걸려있는 사진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먼지를 슥슥 문질렀다.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나와 베르단디, 울드, 스쿨드 그리고 베르스퍼를 안고 있는 유지였다. 그들은 표정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왜 집이 이렇게 되었나요? 그리고... 울드 언니와 스쿨드는?”
“그게, 베르단디는 몸이 많이 안 좋았어... 몇 달간 그냥 계속 누워있었으니까. 그리고 울드와 스쿨드는 천계에 일이 생겨서 잠시 올라갔어.”
“그렇군요...”
베르단디는 시들어버린 꽃이 꽂혀있는 꽃병을 쓰다듬고 있었다. 꽃은 살아생전의 생기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들어버려 있었다. 메구미가 청소해주며 꽂아 놓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 그냥 방치 해둔 것이다. 베르단디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두 손을 꽃에 대고 법술을 외웠다. 하지만 법술은 시행되지가 않았다.
법술? 법술은 유지가 태어나고부터 사용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녀가 법술을 쓰려고 하는 걸로 보아서는 최소한 최근 6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리고 지금의 베르단디 안색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혼자 눈 내리는 숲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몸은 인간이나 다름없는 베르단디에게 그건 충분히 부담될 수 있었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한 후 나는 베르단디를 방으로 안내했다.
“베르단디, 방으로 가볼래?”
“네, 그래요.”
내가 앞장서서 걸었고 그 뒤를 베르단디와 유지가 따라갔다. 유지는 슬그머니 베르단디의 손을 잡았고, 베르단디도 그런 유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여긴 기억하겠지?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베르단디가 쓰던 방이야. 결혼 후엔 내 방에서 같이 지냈지만.... 지금은 곤란하겠지? 그러니... 여기서 쉬도록 해.”
베르단디는 내 말을 듣고는 볼이 약간 붉어졌다.
“죄송해요... 케이씨.”
“응? 아냐아냐, 그럼 오늘은 이만 푹 쉬도록 해. 유지는 나와 같이 잘 거니까.”
베르단디의 방에서 나온 나와 유지도 방에 와서 누웠지만 둘 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유지도... 잠이 안와?”
“응...”
“잘 들어, 유지”
나는 소리 죽여 말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거야?”
“응. 아빠랑 유지와 같이 살았던 때의 일은 기억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나와 결혼 한 일도...”
게다가, 라고 말하며 나는 작은 헛기침을 했다.
“그것도, 엄마가 봄에 우리랑 이별을 했었다는 것도.”
“응.”
“그러니까 그걸 비밀로 해둘 생각이야.”
“어떤걸?”
“어떤거냐니. 그러니까, 엄마가 어느 곳에도 가지 않았고, 계속 유지랑 아빠랑 셋이서 이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해두겠다고.”
“어제도?”
“그렇지.”
“그 전날도?”
“그래.”
“만약 엄마가 물어보면 뭐라고 해?”
“뭘?”
“여러가지.”
“네가 잘 알아서 대답해.”
“못할지도 몰라.”
“그런 때는 그냥 울면서 넘어가. 갑자기 와앙 울면 돼.”
“그런 거야?”
“응. 기왕 이렇게 엄마가 돌아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슬픈 이별을 했다는 건 모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그리고 만약 엄마가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 천상계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싫어.”
“그게 싫다면 너도 꿋꿋하게 잘해줘, 알겠지?”
“응. 해볼게.”
나는 그녀가 예전에 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고 있었다. ‘올해 첫눈이 오면 돌아올 거예요.’ 라고 다짐하던 그때, 그 다음에 덧붙였던 말이다. ‘적어도 다시 눈이 녹기 전까지는 당신과 유지의 곁에 함께 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유지는 이미 엄마와의 이별을 한 차례 경험한 바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해후한 엄마와도 이윽고 다시 이별하는 날이 온다면 이 재회에는 처음부터 슬픔이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분명한건... 베르단디가 이렇게 돌아와준건 우리에게 큰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눈이 녹을 때 까지’라고 베르단디는 말했었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려 노력하는 유지에게 마음속으로 살그머니 말했다.
‘지금 마음껏 엄마에게 어리광을 피워두렴...’
꿈을 꾸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좋은 꿈이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잠에서 깨어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캄캄한 밤이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자고 있어야 할 유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철렁 했지만 곧 베르단디를 생각하고는 진정이 되었다. 유지가 이 밤중에 갈 곳은 아마 거기 밖에 없을 테니까. 여기에 놀라는걸 보니 난 아직 베르단디가 돌아온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베르단디의 방문 앞까지 왔지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고 있을 텐데 괜히 문 열다가 깨울 수도 있는 일이고, 아내였다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의 방에 밤중에 불쑥 들어가는 거도 좀 그랬다. 한동안 그렇게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데 방안에서 베르단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케이씨.”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 짐작이 맞다는걸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유지는 베르단디의 옆에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잠들어 있는 유지를 바라보고 있던 베르단디는 천천히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머리가 조금... 아파요.”
“열이 있나? 그렇게 추운 날씨에 오래 있었으니 감기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베르단디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불명료한 끄덕임을 보였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쪽으로 가도 돼?”
희미한 미소를 짓는 베르단디.
“물론이죠.”
나는 베르단디의 베갯머리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희미하게 열이 있는 것 같았다.
“열이 있는 것 같아, 미열이지만.”
“괜찮아요. 아마 자고 나면 나을 거예요.”
무척 신기한 기분이었다.
베르단디의 이마에 손을 댔을 때 감촉, 온기, 그녀의 냄새.
언젠가도 분명 서로 나누었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대화들.
그녀가 9개월 전에 죽었다는 게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만 같다. 나는 베르단디가 죽는 내용의 현실과 같이 생생한 꿈을 꾸다 바로 지금 눈을 뜬게 아닐까?
“귀여운 아이네요, 유지군.”
그러나 그녀의 말이 그것을 부정한다. 나는 뭔가 서글퍼져서 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아이야.”
“그렇죠? 그 기억이 얼른 되살아나면 좋겠는데.”
“...괜찮아.”
그리고 찾아온 한동안의 고요함.
“난, 내방으로 다시 돌아갈 테니 베르단디는 이만 쉬도록 해.”
조용히 일어서서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저기, 케이씨?”
“응?”
등 뒤에서 베르단디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베르단디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케이씨와 저, 그리고 유지군... 어제까지만 해도 川자를 그리며 한 방에서 자고 있었겠죠?”
“으... 응.”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어제는 아니지만 베르단디와 헤어지기 전까진 그랬으니까.
“저라면 괜찮아요.”
괜찮다니... 나와 한 방에서 같이 자는 걸 말하는 걸까?
“케이씨의 쓸쓸한 눈동자, 저 때문이지요? 제가 기억을 잃어버려서...”
“......”
“제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케이씨에 대한 감정, 느낌까지 잃은 건 아니니까요.”
잠깐 망설이다가 그렇게 유지를 가운데 두고 베르단디 옆에 나란히 누웠다. 결혼한 지 꽤 되었어도 베르단디와 가까이 있으면 항상 가슴이 설렜는데, 지금은 가슴 뛰는 소리가 베르단디에게 들릴까봐 걱정 될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베르단디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옅은 달빛에 은은하게 비친 베르단디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호흡에 맞추어 그 모습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마지막 나날들이 되살아나서 가슴에 통증이 내달렸다. 다시 한번, 나는 잃어야 하는 걸까?
곁에 있고 싶다. 내내, 앞으로도 계속. 내가 죽을 때까지. 지금 내 옆에 누워있는 베르단디가 설사 유령이라도 상관없다. 우리의 일을 잊어버렸다 해도, 그래도 괜찮다.
곁에 있어만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내가 먼저 죽게 된다면 베르단디가 지금 나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그것도 영원히...
여신과 인간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려질 수 있겠지만, 결국 필연적인 슬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난 과연 포기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만히 그녀에게 밤 인사를 건넸다.
“잘 자.”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베르단디는 벌써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찮아? 몸은 좀 어때?”
“아직 두통이 조금 있지만 괜찮아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아침은 내가 할 거니까.”
“응, 그렇지만 몸을 움직이는 편이 마음도 풀릴 거 같아서요.”
“그래? 그럼 부탁할게.”
나는 베르단디의 방에서 자고 있는 유지를 깨우고는 욕실로 데려 왔다 욕실로 오는 중에 유지는 주방에서 ‘계란씨, 계란양’의 멜로디가 들리자 주방문을 살짝 열고 그 틈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유지를 뒤로 당기고는 작게 말했다.
“유지, 엄마 앞에 깨끗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어떨까?”
“응.”
나는 욕실에서 유지의 머리를 감겨주며 물어보았다.
“엄마가 있으니까 좋아?”
유지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의외의 대답이었기 때문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왜, 좋지 않아?”
“그래도.”
라고 유지는 이마에 떨어진 샴푸 덩어리를 씻어내며 말했다.
“엄마는 천상계에서 사는 여신이잖아.”
“그렇지.”
“그러면 언젠가는 그쪽으로 돌아갈 거지?”
“그래도, 유지. 엄마는 그걸 잊어버린 상태니까.”
유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가 잊어버리고 있어도 틀림없이 누군가가 데리러 올 거야. 어떤 이야기에서나 다 그렇잖아. 다들 마지막에는 돌아가 버려.”
그러니까, 라고 유지는 말했다.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
아직 이토록 어린 나이라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때, 그 그리움에는 반드시 이별의 예감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유지는 이미 그것을 한번 겪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말했다.
“지금 이곳에 엄마가 있어주는 건 역시 행복한 일이야.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하자.”
유지는 ‘응.’ 이라고 대답했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물을 머리부터 끼얹으며 나는 유지에게 말했다.
“한 번 더 다짐해두겠는데, 엄마는 계속 우리와 함께 있었던 거야. 한번도 헤어진 적 없이 내내.”
“알아.” 라고 유지는 말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글쎄... 하지만 앞으로 좀더 신중해지자.”
“알았어.”
“좋아, 이제 그만 나가도 되겠다.”
유지는 목욕탕에서 나가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엄마, 나 나왔어. 닦아줘!”
이런 이런, 웬만한 일은 혼자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는데.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욕실 정리를 하고 거실로 나가보니 베르단디는 어느새 유지의 몸에 묻은 물을 수건으로 닦아주고는 옷의 단추를 채워주고 있었다.
“유지, 그런건 혼자 할 수 있잖아?”
“응?”
“괜찮아요, 케이씨.”
유지는 내 말에 어리숙한척 대답을 했고, 베르단디는 유지를 편들며 겉옷까지 모두 입혀주는 것이었다. 확실히, 엄마가 돌아와서 생긴 퇴행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맛있어.”
유지는 베르단디가 차려준 아침을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계속해서 연발했다. 하긴 그동안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고, 베르단디의 음식이 내가 만든 것 보다 훨씬 낫다는 것에 부정 할 수 없었다.
“흘리지 말고 먹어.”
유지가 음식을 떨어트려 옷에 묻히자 내가 주의를 줬고, 베르단디는 미소 지으며 수건으로 유지를 닦아 주었다.
“괜찮아요, 유지군.”
분명 베르단디가 유지의 편을 들어 주었지만, 베르단디의 말을 들은 유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는 듯 했다. 베르단디는 영문을 몰라 유지와 날 번갈아 볼 뿐이었다. 하지만 유지의 표정은 금방 밝게 돌아왔고 다시 ‘맛있어’를 연발하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조용히 베르단디를 불러 내 방으로 들어왔다.
“베르단디.”
“네, 케이씨.”
“기억은 좀 어때?”
베르단디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아직, 어제와 마찬가지예요.”
“다른 건 천천히 되잡으면 되겠지만, 유지는 아직 어려. 베르단디가 ‘군’으로 부르는 게 아마 서운할지도 모르겠어.”
“아... 죄송해요. 전...”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건강해진 것만 해도 다행이니까.”
“그럴까요?”
“그럼.”
그러면서 나는 옷장의 문을 열어 베르단디에게 손짓했다. 그녀가 법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된 후부터는 직접 옷을 갈아입어야 했기에 그동안 사왔던 옷들을 보여주었다. 그 옷들은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 하나의 즐거움이 이기도 했다. 베르단디와 거리를 지나가다 쇼 윈도우에서 예쁜 옷을 보게 되어도 베르단디는 법술을 사용해서 바로 갈아입을 수 있었기에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베르단디가 내가 사준 옷을 입어 보이며 미소 지을 때,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안하고는 했다. 하지만 결국 자기 위안일 뿐이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베르단디는 법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나서 많이 힘들어 보였으니까...
“이뻐요, 케이씨.”
베르단디는 옷장 안에 걸린 옷 중 하나를 꺼내어 자기 앞에 대보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네.”
활짝 미소 짓는 베르단디.
하지만 나는 같이 미소 지어 주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만이 입가를 맴돌았다. 옷가지들을 꺼내어 보며 좋아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눈물이 나오려 한다.
“케이씨? 어딘가 아픈 거예요?”
“아, 아니야.”
겨우 눈물을 참아 냈다. 나도 유지처럼 울보가 되려 하는 걸까?
“아참, 나 오늘 출근해봐야 할 것 같은데...”
“출근이라면...?”
오늘은 일요일이었지만 지난주 평일에 며칠 못나가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갑자기 날이 추워지며 눈까지 내리니, 아마 일거리가 많이 늘었을 것이다.
“휠윈드야. 계속 거기서 일하고 있어.”
“아, 지로씨의?”
“응, 맞아.”
“그럼 저도 같이 가는 건가요?”
“응?”
주변 사람들 전부 베르단디가 죽은 걸로 알고 있다. 만약 베르단디가 그들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상상 할 수도 없다. 아마 엄청난 혼란이 오겠지? 큰일이 나도 보통 큰일이 아닐 것이다. 원래 오늘 유지와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혼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아냐아냐, 베르단디는 아직 몸이 좋질 않으니... 당분간 집에서 그냥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유지랑 같이 있어줘.”
“그럴까요?”
“으... 응.”
난 당황해서 조금 말을 더듬었지만 다행히 베르단디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궁금해요. 지로씨나... 다른 분들.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
“응, 그러니까... 베르단디가 좀더 건강해지면 그때 만나도록 하자. 그래야 걱정을 하지 않겠지?”
네, 라고 대답한 베르단디는 무언가 생각 난 듯 손바닥을 ‘탁’ 치고는 옷을 다시 옷장안에 걸고는 방문을 나섰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거실로 나와 보니 베르단디와 유지는 주방에 있는 것 같았다. 난 일단 눈이 오니 출근을 위해서 바이크에 체인을 감기위해 밖으로 나왔다. 밤새 눈이 내렸는지 발목까지 푹푹 들어갔다. 아직도 굵은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걸 보니 ‘눈의 날’이 금방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여긴 따뜻한 지방이라 고향처럼 매년 눈이 내리는 곳이 아닌데 올해는 정말 눈이 많이 내린다. 다행이라고 할까...
바이크에 체인을 감고 시동을 걸고 있는데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베르단디와 유지가 마중 나왔다. 베르단디의 손에는 작은 도시락 상자가 들려져 있었다.
“자, 여기요.”
“응... 고마워.”
나는 도시락을 받으며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리고 베르단디쪽으로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예전, 건강이 그렇게 악화 되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때까지 나와 스쿨드가 만류해도 끝까지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 건네주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보여 도저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이토록 가슴이 먹먹해지지는 않았으리라.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아니 이미 흐르고 있었다. 분명 수천 번이 넘도록 들어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베르단디는 그 인사말로 나를 배웅하곤 했다.
부우웅~
“다녀올게.”
바이크가 몇 미터 앞으로 전진하고 나서, 나는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내 눈물이 혹시 보일까봐서 이었다.
‘잘 잤어요?’ 라던가 ‘잘자요’ , ‘괜찮아요?’ , ‘이것 보세요’ 같은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말들 모두에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예전, 그때는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케이~ 오늘 좋아 보이네?”
“네?”
연료 밸브가 동파된 바이크를 수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지로 선배가 말했다.
“힘차 보인다고. 그동안 꼭 김빠진 맥주처럼 비실비실 밋밋거리더니.”
“아하하, 제가 그랬나요?”
내가 머쓱해 하며 웃음소리를 흘리자 하세가와까지 동참했다.
“음~ 확실히 이상해요. 그 어색한 웃음소리. 들어본지 정말 오래 된 것 같은데. 무슨 좋은 일 있는거 맞죠?”
“아니 뭐, 꼭 그렇다고는...”
대강 말을 얼버무리고 나서 다시 바이크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베르단디의 일로 가득했다. 분명... 이건 사랑의 감정과도 같았다. 아니 확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몹시 불안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집을 벗어나 있는 동안 그녀가 사라져버리는건 아닐까, 온종일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 상실의 예감이 사랑의 마음과 겹쳐지면서 가슴 속은 ‘안타까움’과 ‘그리움’과 ‘미안함’과... 그러니까 여러 감정이 온통 뒤 섞이며 쿵쾅거렸다. 당장이라도 집에 달려가 베르단디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달래가며 가까스로 오늘의 일을 마쳤다.
“다녀왔습니다.”
하고 숨을 헐떡이며 집에 들어서자
“잘 다녀오셨어요?”
라는 베르단디와 유지의 목소리가 겹쳐 돌아왔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단디와 유지의 목소리는 꼭 닮았다. 하지만 나와 유지의 목소리도 비슷했다. 나와 베르단디의 목소리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말이다. 정말 신기하다.
집안으로 들어와보니 주방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와 함께 아침에 비해 상당히 정돈되고 깨끗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때? 대단하지? 엄마랑 나랑 둘이서 한거야.”
유지가 자랑하듯 말했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세월을 두고 많이 어긋나버린 음정을 베르단디가 하나씩 조율해나가고 있었다. 기억도, 심지어 목숨조차도 가지지 않은 그녀 쪽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 셋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베르단디는 두통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바람을 쏘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베르단디와 유지에게 두꺼운 옷과 목도리와 장갑을 챙겨주고는 결국 그녀를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우리는 엷은 먹물 빛으로 채색된 담담한 풍경 속을 걸었다. 멀리 숲의 능선 위로 가늘게 여윈 달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눈은 그치고 하늘에는 별도 군데군데 볼수 있었다. 비록 정원을 산책하는 것뿐이었지만 운치가 있었다.
“이야기 해주실래요?”
“응?”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 아니, 어떤 이야기든지요.”
나는 우리가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결혼 후에 어떻게 지냈는지, 즐거웠던 기억들을 하나둘씩 말해주었다. 베르단디는 어떨 땐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떨 땐 소리내어 웃기도 하며 그렇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유지가 졸린다고 해서 등에 업었더니 금세 잠들어버렸다.
“자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요.”
“베르단디를 닮았어. 잠자는 모습은 특히.”
“그럴지도 모르죠. 왠지 그리운 듯한 마음이 들어요.”
“... 아직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
베르단디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무것도요. 그치만 점점 제가 케이씨와 결혼했다는 사실, 그리고 유지...의 엄마라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해요.”
유지‘군’이라 말하려다 가까스로 ‘유지’라 한 것 같았다.
“괴롭지는 않아? 기억이 없다는 것 때문에...”
“답답하기는 한데 그것 때문에 초조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느긋하게 기다리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문득 베르단디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전...”
베르단디가 말했다.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래?”
“네, 케이씨와 인연이 맺어졌고, 이렇게 귀여운 아들을 얻었고,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군...”
베르단디는 행복했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천상계의 여신이 이렇게 인간과 결혼하여, 곧 힘도 잃어버린채 몇 년 못가 병으로 생애를 마쳐버린... 그 사실을 알고도 행복했었다고 말해줄까...
“케이씨는요?”
“으, 응?”
“케이씨는 행복해요? 전 케이씨를 행복하게 해주었나요?”
“행복해.”
나는 말했다.
“몹시...”
한달이 지났다. 추위는 계속 되었고, 눈이 녹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옛날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나나 유지나 베르단디가 결국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냥 잊은 채, (아니, 유지는 알지 못한다.) 베르단디의 미소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신기한점이라면 베르단디의 두통이 그치고 난 후부터 예전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베르단디는 법술을 약간씩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는데 어쩌면 베르단디가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케이짱~”
“메구미?”
휠윈드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절로 가기 위해서는 해안도로를 타야 했는데 해안 도로 입구에서 반대 차선에서 다가오는 메구미를 본 것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메구미가 집에 못 오도록 했는데 어떤 일인지 집에 가본 것 같았다. 나와 메구미는 바이크를 길가에 세워두고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씩을 뽑고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메구미, 혹시...?”
“아~ 케이짱, 얼굴 좋아 보이네?”
“저기 말이야....”
“응?”
다행히 메구미는 못 본 걸까?
“음... 그게...”
“베르단디 말하는거야?”
푸웃~
메구미의 입에서 베르단디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마시던 커피를 다 쏟아버리고 말았다.
“호... 혹시...”
“응, 봤어.”
절망이다.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케이짱, 왜 갑자기 그런 표정 짓는 거야?”
“그, 그게...”
“뭐, 요즘 케이짱 예전처럼 행복해보여서 말이지... 그 때문이었구나.”
메구미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좀 멍해. 귀신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메구미는 손으로 앞머리를 한번 쓰윽 뒤로 넘기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메구미는 한동안 망설이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뭐, 상관없잖아? 베르단디는 베르단디니까. 그걸로 케이랑 유지, 행복하면 되는거잖아?”
“...행복? 나 때문에 불행해진 베르단디는 괜찮고?”
내가 처진 말투로 대꾸하자 메구미는 정색을 했다.
“불행하다니, 누가? 베르짱이 그래?”
“아니, 설사 그렇다 해도 베르단디가 그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
“에휴, 바보같은 우리오빠, 베르짱하고 만난지가 언젠데, 아니 결혼까지 해놓고 아직도 그녈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단디는 날 위해 희생한 것이다. 그 때문에 항상 나는 베르단디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며 지내왔다.
“내가 볼 때마다 케이짱하고 베르단디는... 둘 다 정말 행복해 보였어. 하루하루가 즐겁고 재밌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어.”
“......”
“눈이 언제까지 녹지 않고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항상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만 보여주다 보낼 거야?”
그 순간 메구미의 말에 나는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메구미, 지금 뭐라고 했어?”
“베르단디는... 눈이 녹으면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 언제까지 그런 모습만 보여줄...”
“아니,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냐고!”
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져서 메구미의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
“베르단디도 알고 있던걸, 유지는 모르는 것 같아서 아무 말 안했지만...”
떠난다... 베르단디가 다시 떠난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이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애써 부정하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이 사실을 베르단디는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기억이 되돌아 온걸까?
“미안, 나 먼저 가볼게.”
나는 메구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이크에 올라타서는 시동을 걸었다. 귀를 때리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메구미의 말이 맴돌았다. ‘언제까지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만 보여주다 보낼 거야?’ 그러고 보니 요즘 보여준 베르단디의 행동도 약간 이상했다. 유지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며 내가 많이 아플 때 들려주라며... 아무래도 어딘가 멀리 떠날 사람처럼 이것 저건 준비하고 정리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 준 것이다.
“베르단디~”
집에 도착하자마자 큰 소리로 베르단디를 찾았다. 대답이 들리지 않자 더욱 불안해졌다.
“베르단디~ 어디 있어?”
“케이씨.”
“베르단디.”
난 베르단디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베르단디는 외출복장을 입고 있었다. 어디로 가려 했던 걸까?
“케이씨, 우리 산책이나 할까요?”
“응? ...응.”
사그락, 사그락
눈 덮인 숲길에는 둘이서 걸으며 나는 발자국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베르단디...?”
“네, 케이씨.”
“기억이 돌아온 거야? 어떻게 알았어?”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단지, 케이씨의 방을 정리하다...”
베르단디가 죽고 나서 그리운 마음에 멋대로 휘갈겨 꾸깃꾸깃 처박아둔, 낙서장...
“죄송해요, 왠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아직 눈도 그대로 인데! 하고 싶은 말, 해주고 싶은 것들....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내 곁에 더 있어달라고 하면, 그건 욕심일까? 내 이기심일까?
베르단디는 내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아는 듯 했다.
“느낌이 그래요.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은....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베르단디는 비교적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벚나무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서로 손을 잡은 채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이윽고 잠깐 머무르는 붉은 빛, 겨울의 짧은 노을이 찾아 올 시간에 우리는 벚나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르단디.”
베르단디는 벚나무 앞에 서서 붉어진 눈시울로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거야?
“미안해.”
베르단디에게 내가 꺼낸 첫말이었다.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첫 말이 ‘미안해’ 였다. 베르단디를 처음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같이 지낸 시간들, 그 시간들은 어떻게 보면 날 위해 그녀가 희생한 것이니까. 나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베르단디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베르단디는 손을 뻗어 내 볼을 어루만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상해요. 왜 케이씨나 유지나 저보고 미안하다고 하는지...”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웃어주고 싶었다. 나도 미소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목이 메여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어갔다.
“베르단디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는데...”
눈물이 흘러 볼을 타고 흘러 내려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나는... 베르단디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어. 미안해...”
베르단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행복했었어요, 저는... 항상 행복했었어요. 케이씨를 만난 후로 항상...”
비교적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가던 베르단디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제 행복은 바로 케이씨예요. 당신 곁에 있는 것이 저에게는 행복이었어요.”
말하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또 다시 이렇게 베르단디를 보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다면...가능하다면 항상... 영원히... 케이씨 곁에 있고 싶었어요.“
베르단디도 결국 말끝을 흐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베르단디를 감싸 안았고 베르단디도 그런 나를 안아주었다. 마주댄 두 볼에서 나의 눈물과 베르단디의 눈물이 섞여 흘러 내렸다.
“안되겠지요? 이런 말 하면 케이씨가 더 힘들어 질 텐데.”
아니,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유지, 잘 부탁해요. 제 몫까지 사랑해줘요.”
베르단디의 몸이 서서히 흐릿해지며 빛이 나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윙윙거려 이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사랑해 베르단디, 사랑해...”
베르단디가 내 목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는 정면에서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마도 내게 마지막으로 기억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후 내 입술에 따뜻하고 포근한 무언가가 봄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마워요... 당신 곁에 머물렀던 시간......”
그녀의 몸이 수많은 빛의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너무 행복했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실체 없는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수많은 빛의 무리들이 한동안 내 주변을 감싸 돌다 바람에 흩어져 서서히 하늘로 올라갔다.
베르단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녀의 이름...
안녕...
엄마~
멀리서 유지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이거 봐!”
손에는 색종이로 만든 브로치가 쥐어져 있었다.
“굉장하지! 엄마한테 줄 거야. 엄마 어딨어?”
나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 그저 눈물을 훔치고는 빛의 무리가 올라간 하늘 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있어? 알려줘!”
그래도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유지는 저쪽으로 달려갔다.
“엄마, 어디있어? 이거 엄마 주려고 가지고 왔어.”
“엄마, 어디야?”
엄마?
엄마?
엄마?
2달후.
다시 찾아 온 벚꽃의 계절.
나와 유지는 벚나무 아래 앉아 옛날의 앨범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베르단디와 결혼하기 전의 오래된 앨범이었다.
“앗. 이거.”
유지는 한 사진을 가리켰다. 나와 베르단디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다.
“엄마 손목에 이거. 내가 선물로 준거야.”
베르단디 손목에 있는 오색실로 된 팔찌.
팔찌...?
그러고 보니 어떤 시점 이후의 사진에 있는 베르단디는 오색실 팔찌를 항상 손목에 차고 있었다. 저건...
그 순간 아득히 잊혀져 가던, 10년 전에 베르단디와 나눴던 한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아, 이거요?’
어느 날 베르단디의 손목에 평소 보지 못하던 오색실 팔찌를 보고 내가 물어보자 베르단디가 말했다.
‘선물받은 거예요. 소중한 사람한테서요.’
‘소중한... 사람?’
‘네. 저한테 있어 케이씨 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예요.’
‘그래?’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떠 올렸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 약간 질투 섞인... 그런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훗...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케이씨도 알게 될 거예요.’
팔찌는 바로 지난겨울 베르단디가 돌아가기 전날 유지가 선물한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사진속의 베르단디가 그 팔찌를 차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겨울 나와 유지가 만났던 베르단디는...?
10년 전 베르단디가 내게 말했던 그 소중한 사람이란...?
베르단디는... 나와 함께 했을 때의 자신의 운명을 알고서도 내 곁에 남기를 선택했던 거였다.
“아빠, 울어?”
“아냐.”
“우는 것 같은데?”
“아냐 그런거.”
벚꽃 잎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펼쳐진 앨범의 사진 위로 떨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사진 안의 벤치 위로 떨어졌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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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게시판 용량때문에.... 내용 절반 가까이 잘려버렸습니다....
글에 가위질해서 이것저것 전부 잘라내고 주요 스토리만 연결되게 붙였더니 내용이 완전 이상해져버렸네요...
제가 쓰는 여신님 팬픽 always 본편에서 베르단디의 꿈에 나오는 미래 이야기를 케이의 시점으로 변환해서 외전 형식으로 적은 겁니다. 마감 다되서 글 다 안올라가서 허겁지겁 편집했더니 ㅜ.ㅜ
오나의 여신님외에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팬픽을 써 보고 싶었는데 같이 한 소설 안에 써볼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외전으로 도전한게 바로 이 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신님 팬픽을 쓰는 도중에 영화를 보게 되어서 삽입 하기로 한거고요... 그래서 초기 유지의 설정이 약간 변화가 있었고요. (공교롭게 유지의 이름이 같은데 '유지'란 이름은 여신님팬픽 설정단계에서 지은겁니당 `ㅡ`;)
퇴고가 마무리 되면 자유연재란에 가위질 안한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허접하지만 콘테스트에 참여한다는 것에 의의를 ^^;
“응?”
“학교 갈 준비 말이야. 이름표 달았니?”
“응.”
요즘 들어 유지는 무언가를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일이 많아 진 듯 했다.
“벌써 시간 다 됐어, 가자.”
나는 유지를 바이크의 옆 좌석에 태우고 헬멧을 씌어주고는 시동을 걸었다. 헬멧 아래로 삐져나온, 밀크를 떨어뜨린 다즐링 티 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가는 손목과 흰 목덜미, 남자애 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 날 닮은 것 보단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지를 학교 정문 앞에 데려다주고나서 휠윈드에 도착한 나는 먼저 출근해 있는 지로 선배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도 인사에 답해준다.
“안녕? 몸은 좀 어때?”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너무 무리 하지 말고.”
“네, 고마워요 선배.”
10년 전 작은 컨테이너에서 시작한 가게였지만 이제 종업원도 세 명이나 되는 어엿한 매장의 사장님이 된 선배였다. 그동안 몇 번의 위기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선배를 중심으로 네코미 공대 자동차부의 후배들인 종업원들은 힘을 합쳐 잘 넘겨 왔다. 이들 중 가장 크게 흔들린 건 분명 나였지만, 사정을 너무도 잘 아는 그들은 나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고, 특히 지로선배는 내가 몇 번이나 근무시간과 일수를 채우지 못해도 월급을 꼬박꼬박 챙겨주었다. 평소에 보아온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건 역시 잘못된 일이다.
9개월 전 베르단디가 병으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된 후 나는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울드와 스쿨는 어떻게든 나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우울증으로 말 수가 줄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론 직장에 제대로 다닐 수조차 없었다. 스쿨드는 나에게 유지를 봐서라도 제발 정신 차리라고 타일렀지만 그때는 그 말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울드와 스쿨드는 천상계의 일 때문에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집을 떠났다. 그게 그녀들을 마지막으로 본 때였다. 나와 유지를 챙겨주던 그녀들이 떠나자 정신적 공황상태는 곧 육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술에 손을 대게 된 나의 건강은 위험한 상태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슬픔에 잠겨 앨범을 보던 나는 문득 유지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지는 정말 비쩍 말라서 보기 애처로울 정도였다. 집안은 온통 먼지가 쌓이고 정리 되지 않은 난장판이었다. 나는 퍼뜩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 그녀를 봐서라도…….
이건 베르단디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그때부터 나는 직장에 다시 나가게 되었고, 병원에서 치료도 꼬박꼬박 받았다. 하지만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은 쉽사리 예전처럼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길가다 갑자기 쓰러져 버리기도 하고, 손이 덜덜 떨려 정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지로선배는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유지가 엄마가 없음을 알고 어디 갔냐고 물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해줬다.
너무도 아름답고 자상한 엄마는 하느님의 부름으로 여신이 되어 천상계에 간 것이라고…….
물론 유지는 베르단디들이 여신인걸 몰랐고, 실제 내가 아는 천상계와 여신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한 말이었지만 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 이제 볼 수 없는 거야?”
“으...응...”
“얼마나? 일주일? 아니면... 한달?”
유지의 물음에 나는 도저히 대답 할 수 없었다. 그저 유지를 끌어안고 울음소리를 꾹 누르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일 밖에는...
진실을 알기에는 유지는 아직 너무 어렸다. 앞으로도 한참동안 나는 거짓말을 계속할 생각이다. 언젠가는 유지도 사실을 알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후4시, 아직 휠윈드의 일과가 끝날 시간이 아니었지만 학교를 마친 유지를 데리러 가봐야만 했다. 그래서 난 항상 이렇게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퇴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에 눈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죄송해요. 오늘도 먼저 가볼께요.”
“또 그런다, 미안해 할 것 없다니까. 우리가 한두 해 같이 일 해온 사이도 아니고.”
지로 선배 뒤에 있던 하세가와도 거들었다.
“선배, 운전 조심하세요.”
“걱정 마. 이제 괜찮다니까.”
그들을 뒤로 하고 나는 유지를 데리러 가기 위해 초등학교로 방향을 잡았다. 유지를 태우고 집으로 향하니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낮에는 포근한 편이었는데 해가 지자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다. 그래서 나는 잠시 바이크를 세워 유지에게 재킷을 벗어 주고 다시 집을 향래 출발했다. 해안도로에 접어들자 12월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사정없이 몸 안으로 스며들어들었다.
“안 추워?”
“응?”
유지는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말을 걸어왔다.
“옷 벗어줬잖아. 괜찮아?”
“응. 이제 거의 다 왔잖아.”
하지만 내 몸 상태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입술은 부들부들 떨렸고, 가슴도 답답해졌다. 집에 도착해서 바이크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제자리에 서 있기 조차 힘들었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서 거칠게 숨을 내쉬는 나에게 유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괜찮아?”
“응, 조금 있으면.”
“그래?”
한동안 바이크에 등을 기대고 있었지만 머리는 깨질 듯 고통스러웠고,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시야도 여전히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유지는 내가 벗어주었던 재킷을 벗더니 다시 나에게 덮어 주었다.
“아빠.”
“응?”
나는 유지의 부름에 힘겹게 대답했다.
“노래 해줄까?”
“응.”
유지는 남자아이였지만 가느다란 목소리로 평소 베르단디가 요리와 빨래를 할 때 흥얼거리던 ‘계란씨, 계란양’ 과 ‘이불을 널어요.’를 불러주었다. 내가 이렇게 힘겨워 하면 간혹 불러 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내 가슴은 그리움에 구멍이 더 넓혀지는 듯 했다.
하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머리와 가슴의 통증이 사라졌고 호흡하기도 수월해졌다. 겉으로 표시는 나지 않지만, 어쩌면 유지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라?”
“왜?”
“정말이야. 감쪽같이 다 나았어.”
“그치?”
“응.”
“굉장하지?”
“정말 그러네.”
고통이 진정되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유지가 옆에서 작은 손으로 부축해주었다.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겨울의 노을이니 아마 분명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해 지는 거 잠깐 보고 들어갈까?”
“응.”
나와 유지는 나란히 바이크를 기대고 앉아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엄마, 보고 싶다.”
“나도 그래.”
한참 있다가 다시 유지가 말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어?”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무언가를 알고 물어본 걸까?
“아냐.”
“정말?”
“정말이지.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다시 한참 지나서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정말로 그런 거 아냐.”
“알고 있어.”
“그럼 됐다.”
“응.”
다음날, 토요일이라 일찍 학교를 끝낸 유지와 함께 숲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주말에는 절 뒤의 산으로 산책을 가는 것이었다. 기온은 전날보다 더 떨어져서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잎이 거의 다 떨어져버린 앙상한 가지가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새들도 지저귀지 않았다. 유지와 나는 서로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그냥 걸었다. 뭔가 말을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우울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요했다. 이따금 생각난 것처럼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투두둑하고 콩을 뿌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어느새 사방은 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유지는 생전 처음 보는 눈을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만져보고 심지어 입안에 넣어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머리위에 앉는 눈은 계속 해서 털어내었다. 감촉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숲 속 깊이 들어가자 날씨가 더 추워지며 하늘은 많이 어두워졌고, 제법 굵은 눈송이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유지에게 말했다.
“자, 돌아가자.”
그러나 유지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으로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과 눈썹을 가까이 붙이고 그로서는 퍽 어른스러운 눈빛으로 오로지 한 지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 끝을 더듬어 따라가 보았다.
사방이 온통 눈 내리는 백색 풍경 속에 단 한 점의 엷은 색채가 있었다. 속눈썹에 들어오는 눈을 손끝으로 뿌리치며 다시 한 번 찬찬히 응시해보았다. 그것은 금세 그것이라고 알 수 있는 너무나 그리운 윤곽이었다.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베르단디다.
그녀가 흰 털실 스웨터를 걸치고 벚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저 그리운 실루엣, 무어라 비유할 수 없어 ‘그 것’ 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은 그녀가 나를 향해 뿜어내는 친밀한 단어 같은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단어. 나는 그것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유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입은 O자로 벌리고 있었다.
쿵...쿵... 심장 박동소리가 머리에 울릴 만큼 요동치고 있었다.
‘올해 첫눈이 오면, 전 반드시 케이와 유지를 보러 올 거예요.’
벚꽃이 쏟아지던 3월. 베르단디가 우리 곁을 떠나기 며칠 전 핏기 없는 입술로 가늘게 속삭이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때는 베르단디를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가 나의 모든 이성과 감정을 지배하고 있어 그 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적어도, 눈이 녹기 전까지는 함께 있을 거예요.’
‘그런 말 하지마. 왜 꼭 떠날 것 같이 말하는 거야?’
그때 나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베르단디의 손을 꼭 잡으며 설마설마 했지만 얼마못가 현실은 가혹하게 찾아 왔다. 나와 울드와 스쿨드가 보는 가운데 베르단디의 형상은 환한 빛의 무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저기... 병을 고치러 천상계에 잠깐 올라간 거지?’
스쿨드는 얼이 빠진 표정을 짓다 곧 펑펑 울기 시작했고 울드는 감정을 억제 하려는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지만 눈물이 새어나오는걸 막을 수 없었는지 볼이 젖어 가고 있었다.
‘울드? 스쿨드? 왜이래? 병만 고쳐지면 다시 같이 지낼 수 있는 거잖아.’
그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도 곧 베르단디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한동안 나는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무너져 간 것이다.
‘올해 첫눈이 오면, 전 반드시 케이와 유지를 보러 올 거예요.’
‘반드시...’
‘만나러 올 거예요...’
“아빠?”
거의 넋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향해 뚫어져라 보고 있던 나에게 유지는 벼르고 별렀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처럼 작디작게 속삭였다.
“큰일 났어.”
그는 몇 번이고 급하게 눈을 깜빡였다.
“엄마가... 엄마가 천상계에서 돌아와버렸어.”
우리는 멈칫멈칫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다. 설사 저것이 베르단디의 유령이라해도 내가 두려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단지 아주 작은 공기의 흔들림조차도 그녀의 존재를 마구 지워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지도 분명 똑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갑자기 뛰어들어 베르단디에게 안기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별하기 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올해 첫눈이 오면 케이와 유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드시 보러 올 거예요.’ 그러니까, 베르단디는 그 약속을 성실히 지키려고 이렇게 우리를 만나러 와준 것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이마와 양 볼에 있는 문장을... 그녀는 베르단디와 꼭 닮은 누군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베르단디 그 자체였다.
가슴속으로 수천수만 번을, 아니 헤아릴 수 없이 외쳤던 그 이름...
“베르단디.”
그녀는 우리의 기척을 느꼈는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베르단디와 눈이 마주치자 막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케이씨?”
가늘고 높은, 말끝이 살짝 떨리는 저 그리운 목소리.
“베르단디... 베르단디 맞는 거야?”
나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유지도 덩달아 울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와 유지를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베르단디의 머리와 어깨에는 하늘에서 내린 눈이 살포시 내려와 앉고 있었다. 분명... 환영은 아니리라.
“저기... 손, 잡아 봐도 될까?”
베르단디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그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날씨 때문인지 차가웠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온기가 전해졌었다. 내 눈 앞에 있는 그녀는 분명 유령도 아니었다. 감촉도 느낄 수 있고, 온기도 가지고 있었다.
유지도 멈칫멈칫 다가가 자그마한 손을 내밀어 베르단디의 분홍색 치맛자락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녀는 유지에게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뭔가 어중간한 표정이 뺨에 맴돌았다.
뭘까? 이 기묘한 위화감.
“엄마?”
유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베르단디를 불렀다.
“내가... 엄마?”
베르단디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유지는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정말 유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재빨리 유지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돌려 세운 후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내가 하는 말에 넌 맞다고 옆에서 거들기만 해. 알았지?”
유지는 무언가 큰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정말이야. 유지는 우리 아들이야.”
“저와... 케이씨의?”
“응.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 거야?
베르단디는 한동안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전 케이씨와 결혼한 건가요?”
“으, 응.”
“그렇군요...”
수긍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 기억이 나서 그렇다기 보다는 남을 의심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냥 그대로 나의 말을 믿어버린 것 같았다.
“그럼 전 여기서 뭘 하고 있었죠?”
“응? 아.... 아 그래, 산책. 산책을 하고 있었어.”
“산책... 인가요?”
“우리는 셋이서 이곳에 왔어. 늘 다니던 주말의 산책이야. 그렇지 유지?”
“응. 산책이야. 맞아.”
나는 말을 재차 확인했고, 유지는 나의 말에 맞장구 쳐주었다.
“그렇군요...”
“아무튼 함께 집에 가자. 그러다 보면 분명 기억도 돌아올 거야.”
“그럴까요?”
“그럼.”
나는 힘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베르단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와 어깨에 앉아 있는 눈이 후드득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자, 서둘러 돌아가자. 이러다 감기 들어.”
숲 속 오솔길을 베르단디와 유지가 나란히 걷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갔다. 처음에는 들썽거리며 어쩔 줄을 모르던 유지가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자신의 손을 그녀를 행해 내밀었다. 그것을 알아본 베르단디가 곧바로 손을 잡아주었다. 손이 맞닿았을 때, 유지가 흠칫 베르단디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만 견디지 못한 유지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하다. 거의 1년 만에 엄마의 손을 잡아 본 것이다.
“이제 곧 베르단디도 다 생각이 나겠지만... 유지는 지독한 울보야.”
나는 말했다.
“그냥 어쩔 줄 몰라서 그래. 베르단디의 기억이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정하게 대해줘. 지금까지도 베르단디는 내내 그렇게 해왔지만.”
베르단디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유지의 가느다란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아주었다. 유지는 한참이나 엄마의 온기를 느끼며 긴 울음 끝의 노곤함과도 같이 기분 좋게 엄마의 존재에 취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손의 온기를 느끼며 그렇게 걸어갔다. 유지는 어느새 흥이 올랐는지 가면서 간간히 눈으로 장난도 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베르단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윽고 셋이서 눈이 쌓이는 숲을 벗어나 집에 도착하자 주위는 이미 어두워져있었다.
“여기가... 우리 집인가요?”
베르단디가 기억하는 집의 모습이 예전의 모습이라면 분명 낯설게 느껴질게 분명했다. 잡초와 깨어진 기왓장은 눈이 쌓여 표시나지 않았지만 먼지가 쌓인 마루, 금이 간 창문...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최근 들어 몸이 어느 정도 회복 된 후로는 집의 복구를 위해 힘썼지만 절까지 포함된 이 넓은 곳을 나와 유지 둘이서 유지해 간다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한번도 이사 따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여기는 베르단디와의 모든 추억이 남겨진 곳이니까.
“미안해, 좀 지저분하지? 자, 일단 이리로 들어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베르단디는 집안 여기저기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베르단디의 기억 속에 있는 집의 풍경과는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집 안은 한 달 전쯤 메구미가 와서 청소를 도와준 덕분에 그나마 바깥보다는 약간 나았지만 그래도 베르단디에게 보이기에는 무안할 정도였다.
“케이씨, 전 집이 이렇게 되도록 청소도 안했었나요?”
“아냐아냐, 베르단디는... 누구보다 솜씨가 좋았어.”
베르단디는 거실을 둘러보다 벽면에 걸려있는 사진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먼지를 슥슥 문질렀다.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나와 베르단디, 울드, 스쿨드 그리고 베르스퍼를 안고 있는 유지였다. 그들은 표정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왜 집이 이렇게 되었나요? 그리고... 울드 언니와 스쿨드는?”
“그게, 베르단디는 몸이 많이 안 좋았어... 몇 달간 그냥 계속 누워있었으니까. 그리고 울드와 스쿨드는 천계에 일이 생겨서 잠시 올라갔어.”
“그렇군요...”
베르단디는 시들어버린 꽃이 꽂혀있는 꽃병을 쓰다듬고 있었다. 꽃은 살아생전의 생기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들어버려 있었다. 메구미가 청소해주며 꽂아 놓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 그냥 방치 해둔 것이다. 베르단디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두 손을 꽃에 대고 법술을 외웠다. 하지만 법술은 시행되지가 않았다.
법술? 법술은 유지가 태어나고부터 사용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녀가 법술을 쓰려고 하는 걸로 보아서는 최소한 최근 6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리고 지금의 베르단디 안색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혼자 눈 내리는 숲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몸은 인간이나 다름없는 베르단디에게 그건 충분히 부담될 수 있었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한 후 나는 베르단디를 방으로 안내했다.
“베르단디, 방으로 가볼래?”
“네, 그래요.”
내가 앞장서서 걸었고 그 뒤를 베르단디와 유지가 따라갔다. 유지는 슬그머니 베르단디의 손을 잡았고, 베르단디도 그런 유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여긴 기억하겠지?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베르단디가 쓰던 방이야. 결혼 후엔 내 방에서 같이 지냈지만.... 지금은 곤란하겠지? 그러니... 여기서 쉬도록 해.”
베르단디는 내 말을 듣고는 볼이 약간 붉어졌다.
“죄송해요... 케이씨.”
“응? 아냐아냐, 그럼 오늘은 이만 푹 쉬도록 해. 유지는 나와 같이 잘 거니까.”
베르단디의 방에서 나온 나와 유지도 방에 와서 누웠지만 둘 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유지도... 잠이 안와?”
“응...”
“잘 들어, 유지”
나는 소리 죽여 말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거야?”
“응. 아빠랑 유지와 같이 살았던 때의 일은 기억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나와 결혼 한 일도...”
게다가, 라고 말하며 나는 작은 헛기침을 했다.
“그것도, 엄마가 봄에 우리랑 이별을 했었다는 것도.”
“응.”
“그러니까 그걸 비밀로 해둘 생각이야.”
“어떤걸?”
“어떤거냐니. 그러니까, 엄마가 어느 곳에도 가지 않았고, 계속 유지랑 아빠랑 셋이서 이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해두겠다고.”
“어제도?”
“그렇지.”
“그 전날도?”
“그래.”
“만약 엄마가 물어보면 뭐라고 해?”
“뭘?”
“여러가지.”
“네가 잘 알아서 대답해.”
“못할지도 몰라.”
“그런 때는 그냥 울면서 넘어가. 갑자기 와앙 울면 돼.”
“그런 거야?”
“응. 기왕 이렇게 엄마가 돌아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슬픈 이별을 했다는 건 모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그리고 만약 엄마가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 천상계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싫어.”
“그게 싫다면 너도 꿋꿋하게 잘해줘, 알겠지?”
“응. 해볼게.”
나는 그녀가 예전에 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고 있었다. ‘올해 첫눈이 오면 돌아올 거예요.’ 라고 다짐하던 그때, 그 다음에 덧붙였던 말이다. ‘적어도 다시 눈이 녹기 전까지는 당신과 유지의 곁에 함께 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유지는 이미 엄마와의 이별을 한 차례 경험한 바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해후한 엄마와도 이윽고 다시 이별하는 날이 온다면 이 재회에는 처음부터 슬픔이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분명한건... 베르단디가 이렇게 돌아와준건 우리에게 큰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눈이 녹을 때 까지’라고 베르단디는 말했었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려 노력하는 유지에게 마음속으로 살그머니 말했다.
‘지금 마음껏 엄마에게 어리광을 피워두렴...’
꿈을 꾸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좋은 꿈이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잠에서 깨어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캄캄한 밤이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자고 있어야 할 유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철렁 했지만 곧 베르단디를 생각하고는 진정이 되었다. 유지가 이 밤중에 갈 곳은 아마 거기 밖에 없을 테니까. 여기에 놀라는걸 보니 난 아직 베르단디가 돌아온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베르단디의 방문 앞까지 왔지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고 있을 텐데 괜히 문 열다가 깨울 수도 있는 일이고, 아내였다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의 방에 밤중에 불쑥 들어가는 거도 좀 그랬다. 한동안 그렇게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데 방안에서 베르단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케이씨.”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 짐작이 맞다는걸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유지는 베르단디의 옆에 행복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잠들어 있는 유지를 바라보고 있던 베르단디는 천천히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머리가 조금... 아파요.”
“열이 있나? 그렇게 추운 날씨에 오래 있었으니 감기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베르단디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불명료한 끄덕임을 보였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쪽으로 가도 돼?”
희미한 미소를 짓는 베르단디.
“물론이죠.”
나는 베르단디의 베갯머리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희미하게 열이 있는 것 같았다.
“열이 있는 것 같아, 미열이지만.”
“괜찮아요. 아마 자고 나면 나을 거예요.”
무척 신기한 기분이었다.
베르단디의 이마에 손을 댔을 때 감촉, 온기, 그녀의 냄새.
언젠가도 분명 서로 나누었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대화들.
그녀가 9개월 전에 죽었다는 게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만 같다. 나는 베르단디가 죽는 내용의 현실과 같이 생생한 꿈을 꾸다 바로 지금 눈을 뜬게 아닐까?
“귀여운 아이네요, 유지군.”
그러나 그녀의 말이 그것을 부정한다. 나는 뭔가 서글퍼져서 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아이야.”
“그렇죠? 그 기억이 얼른 되살아나면 좋겠는데.”
“...괜찮아.”
그리고 찾아온 한동안의 고요함.
“난, 내방으로 다시 돌아갈 테니 베르단디는 이만 쉬도록 해.”
조용히 일어서서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저기, 케이씨?”
“응?”
등 뒤에서 베르단디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베르단디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케이씨와 저, 그리고 유지군... 어제까지만 해도 川자를 그리며 한 방에서 자고 있었겠죠?”
“으... 응.”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어제는 아니지만 베르단디와 헤어지기 전까진 그랬으니까.
“저라면 괜찮아요.”
괜찮다니... 나와 한 방에서 같이 자는 걸 말하는 걸까?
“케이씨의 쓸쓸한 눈동자, 저 때문이지요? 제가 기억을 잃어버려서...”
“......”
“제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케이씨에 대한 감정, 느낌까지 잃은 건 아니니까요.”
잠깐 망설이다가 그렇게 유지를 가운데 두고 베르단디 옆에 나란히 누웠다. 결혼한 지 꽤 되었어도 베르단디와 가까이 있으면 항상 가슴이 설렜는데, 지금은 가슴 뛰는 소리가 베르단디에게 들릴까봐 걱정 될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베르단디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옅은 달빛에 은은하게 비친 베르단디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호흡에 맞추어 그 모습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마지막 나날들이 되살아나서 가슴에 통증이 내달렸다. 다시 한번, 나는 잃어야 하는 걸까?
곁에 있고 싶다. 내내, 앞으로도 계속. 내가 죽을 때까지. 지금 내 옆에 누워있는 베르단디가 설사 유령이라도 상관없다. 우리의 일을 잊어버렸다 해도, 그래도 괜찮다.
곁에 있어만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내가 먼저 죽게 된다면 베르단디가 지금 나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그것도 영원히...
여신과 인간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려질 수 있겠지만, 결국 필연적인 슬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난 과연 포기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만히 그녀에게 밤 인사를 건넸다.
“잘 자.”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베르단디는 벌써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찮아? 몸은 좀 어때?”
“아직 두통이 조금 있지만 괜찮아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아침은 내가 할 거니까.”
“응, 그렇지만 몸을 움직이는 편이 마음도 풀릴 거 같아서요.”
“그래? 그럼 부탁할게.”
나는 베르단디의 방에서 자고 있는 유지를 깨우고는 욕실로 데려 왔다 욕실로 오는 중에 유지는 주방에서 ‘계란씨, 계란양’의 멜로디가 들리자 주방문을 살짝 열고 그 틈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유지를 뒤로 당기고는 작게 말했다.
“유지, 엄마 앞에 깨끗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어떨까?”
“응.”
나는 욕실에서 유지의 머리를 감겨주며 물어보았다.
“엄마가 있으니까 좋아?”
유지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의외의 대답이었기 때문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왜, 좋지 않아?”
“그래도.”
라고 유지는 이마에 떨어진 샴푸 덩어리를 씻어내며 말했다.
“엄마는 천상계에서 사는 여신이잖아.”
“그렇지.”
“그러면 언젠가는 그쪽으로 돌아갈 거지?”
“그래도, 유지. 엄마는 그걸 잊어버린 상태니까.”
유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가 잊어버리고 있어도 틀림없이 누군가가 데리러 올 거야. 어떤 이야기에서나 다 그렇잖아. 다들 마지막에는 돌아가 버려.”
그러니까, 라고 유지는 말했다.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
아직 이토록 어린 나이라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때, 그 그리움에는 반드시 이별의 예감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유지는 이미 그것을 한번 겪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말했다.
“지금 이곳에 엄마가 있어주는 건 역시 행복한 일이야.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하자.”
유지는 ‘응.’ 이라고 대답했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물을 머리부터 끼얹으며 나는 유지에게 말했다.
“한 번 더 다짐해두겠는데, 엄마는 계속 우리와 함께 있었던 거야. 한번도 헤어진 적 없이 내내.”
“알아.” 라고 유지는 말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글쎄... 하지만 앞으로 좀더 신중해지자.”
“알았어.”
“좋아, 이제 그만 나가도 되겠다.”
유지는 목욕탕에서 나가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엄마, 나 나왔어. 닦아줘!”
이런 이런, 웬만한 일은 혼자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는데.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욕실 정리를 하고 거실로 나가보니 베르단디는 어느새 유지의 몸에 묻은 물을 수건으로 닦아주고는 옷의 단추를 채워주고 있었다.
“유지, 그런건 혼자 할 수 있잖아?”
“응?”
“괜찮아요, 케이씨.”
유지는 내 말에 어리숙한척 대답을 했고, 베르단디는 유지를 편들며 겉옷까지 모두 입혀주는 것이었다. 확실히, 엄마가 돌아와서 생긴 퇴행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맛있어.”
유지는 베르단디가 차려준 아침을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계속해서 연발했다. 하긴 그동안 내가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고, 베르단디의 음식이 내가 만든 것 보다 훨씬 낫다는 것에 부정 할 수 없었다.
“흘리지 말고 먹어.”
유지가 음식을 떨어트려 옷에 묻히자 내가 주의를 줬고, 베르단디는 미소 지으며 수건으로 유지를 닦아 주었다.
“괜찮아요, 유지군.”
분명 베르단디가 유지의 편을 들어 주었지만, 베르단디의 말을 들은 유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는 듯 했다. 베르단디는 영문을 몰라 유지와 날 번갈아 볼 뿐이었다. 하지만 유지의 표정은 금방 밝게 돌아왔고 다시 ‘맛있어’를 연발하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조용히 베르단디를 불러 내 방으로 들어왔다.
“베르단디.”
“네, 케이씨.”
“기억은 좀 어때?”
베르단디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아직, 어제와 마찬가지예요.”
“다른 건 천천히 되잡으면 되겠지만, 유지는 아직 어려. 베르단디가 ‘군’으로 부르는 게 아마 서운할지도 모르겠어.”
“아... 죄송해요. 전...”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건강해진 것만 해도 다행이니까.”
“그럴까요?”
“그럼.”
그러면서 나는 옷장의 문을 열어 베르단디에게 손짓했다. 그녀가 법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된 후부터는 직접 옷을 갈아입어야 했기에 그동안 사왔던 옷들을 보여주었다. 그 옷들은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 하나의 즐거움이 이기도 했다. 베르단디와 거리를 지나가다 쇼 윈도우에서 예쁜 옷을 보게 되어도 베르단디는 법술을 사용해서 바로 갈아입을 수 있었기에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베르단디가 내가 사준 옷을 입어 보이며 미소 지을 때,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안하고는 했다. 하지만 결국 자기 위안일 뿐이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베르단디는 법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나서 많이 힘들어 보였으니까...
“이뻐요, 케이씨.”
베르단디는 옷장 안에 걸린 옷 중 하나를 꺼내어 자기 앞에 대보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
“네.”
활짝 미소 짓는 베르단디.
하지만 나는 같이 미소 지어 주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만이 입가를 맴돌았다. 옷가지들을 꺼내어 보며 좋아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눈물이 나오려 한다.
“케이씨? 어딘가 아픈 거예요?”
“아, 아니야.”
겨우 눈물을 참아 냈다. 나도 유지처럼 울보가 되려 하는 걸까?
“아참, 나 오늘 출근해봐야 할 것 같은데...”
“출근이라면...?”
오늘은 일요일이었지만 지난주 평일에 며칠 못나가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갑자기 날이 추워지며 눈까지 내리니, 아마 일거리가 많이 늘었을 것이다.
“휠윈드야. 계속 거기서 일하고 있어.”
“아, 지로씨의?”
“응, 맞아.”
“그럼 저도 같이 가는 건가요?”
“응?”
주변 사람들 전부 베르단디가 죽은 걸로 알고 있다. 만약 베르단디가 그들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상상 할 수도 없다. 아마 엄청난 혼란이 오겠지? 큰일이 나도 보통 큰일이 아닐 것이다. 원래 오늘 유지와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혼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아냐아냐, 베르단디는 아직 몸이 좋질 않으니... 당분간 집에서 그냥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유지랑 같이 있어줘.”
“그럴까요?”
“으... 응.”
난 당황해서 조금 말을 더듬었지만 다행히 베르단디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궁금해요. 지로씨나... 다른 분들.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
“응, 그러니까... 베르단디가 좀더 건강해지면 그때 만나도록 하자. 그래야 걱정을 하지 않겠지?”
네, 라고 대답한 베르단디는 무언가 생각 난 듯 손바닥을 ‘탁’ 치고는 옷을 다시 옷장안에 걸고는 방문을 나섰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거실로 나와 보니 베르단디와 유지는 주방에 있는 것 같았다. 난 일단 눈이 오니 출근을 위해서 바이크에 체인을 감기위해 밖으로 나왔다. 밤새 눈이 내렸는지 발목까지 푹푹 들어갔다. 아직도 굵은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걸 보니 ‘눈의 날’이 금방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여긴 따뜻한 지방이라 고향처럼 매년 눈이 내리는 곳이 아닌데 올해는 정말 눈이 많이 내린다. 다행이라고 할까...
바이크에 체인을 감고 시동을 걸고 있는데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베르단디와 유지가 마중 나왔다. 베르단디의 손에는 작은 도시락 상자가 들려져 있었다.
“자, 여기요.”
“응... 고마워.”
나는 도시락을 받으며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리고 베르단디쪽으로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예전, 건강이 그렇게 악화 되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때까지 나와 스쿨드가 만류해도 끝까지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 건네주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보여 도저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어도 이토록 가슴이 먹먹해지지는 않았으리라.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아니 이미 흐르고 있었다. 분명 수천 번이 넘도록 들어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베르단디는 그 인사말로 나를 배웅하곤 했다.
부우웅~
“다녀올게.”
바이크가 몇 미터 앞으로 전진하고 나서, 나는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내 눈물이 혹시 보일까봐서 이었다.
‘잘 잤어요?’ 라던가 ‘잘자요’ , ‘괜찮아요?’ , ‘이것 보세요’ 같은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말들 모두에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예전, 그때는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케이~ 오늘 좋아 보이네?”
“네?”
연료 밸브가 동파된 바이크를 수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지로 선배가 말했다.
“힘차 보인다고. 그동안 꼭 김빠진 맥주처럼 비실비실 밋밋거리더니.”
“아하하, 제가 그랬나요?”
내가 머쓱해 하며 웃음소리를 흘리자 하세가와까지 동참했다.
“음~ 확실히 이상해요. 그 어색한 웃음소리. 들어본지 정말 오래 된 것 같은데. 무슨 좋은 일 있는거 맞죠?”
“아니 뭐, 꼭 그렇다고는...”
대강 말을 얼버무리고 나서 다시 바이크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베르단디의 일로 가득했다. 분명... 이건 사랑의 감정과도 같았다. 아니 확실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몹시 불안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집을 벗어나 있는 동안 그녀가 사라져버리는건 아닐까, 온종일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 상실의 예감이 사랑의 마음과 겹쳐지면서 가슴 속은 ‘안타까움’과 ‘그리움’과 ‘미안함’과... 그러니까 여러 감정이 온통 뒤 섞이며 쿵쾅거렸다. 당장이라도 집에 달려가 베르단디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달래가며 가까스로 오늘의 일을 마쳤다.
“다녀왔습니다.”
하고 숨을 헐떡이며 집에 들어서자
“잘 다녀오셨어요?”
라는 베르단디와 유지의 목소리가 겹쳐 돌아왔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단디와 유지의 목소리는 꼭 닮았다. 하지만 나와 유지의 목소리도 비슷했다. 나와 베르단디의 목소리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말이다. 정말 신기하다.
집안으로 들어와보니 주방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와 함께 아침에 비해 상당히 정돈되고 깨끗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때? 대단하지? 엄마랑 나랑 둘이서 한거야.”
유지가 자랑하듯 말했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세월을 두고 많이 어긋나버린 음정을 베르단디가 하나씩 조율해나가고 있었다. 기억도, 심지어 목숨조차도 가지지 않은 그녀 쪽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 셋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베르단디는 두통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바람을 쏘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베르단디와 유지에게 두꺼운 옷과 목도리와 장갑을 챙겨주고는 결국 그녀를 데리고 나가기로 했다.
우리는 엷은 먹물 빛으로 채색된 담담한 풍경 속을 걸었다. 멀리 숲의 능선 위로 가늘게 여윈 달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눈은 그치고 하늘에는 별도 군데군데 볼수 있었다. 비록 정원을 산책하는 것뿐이었지만 운치가 있었다.
“이야기 해주실래요?”
“응?”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 아니, 어떤 이야기든지요.”
나는 우리가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결혼 후에 어떻게 지냈는지, 즐거웠던 기억들을 하나둘씩 말해주었다. 베르단디는 어떨 땐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떨 땐 소리내어 웃기도 하며 그렇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유지가 졸린다고 해서 등에 업었더니 금세 잠들어버렸다.
“자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요.”
“베르단디를 닮았어. 잠자는 모습은 특히.”
“그럴지도 모르죠. 왠지 그리운 듯한 마음이 들어요.”
“... 아직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
베르단디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무것도요. 그치만 점점 제가 케이씨와 결혼했다는 사실, 그리고 유지...의 엄마라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해요.”
유지‘군’이라 말하려다 가까스로 ‘유지’라 한 것 같았다.
“괴롭지는 않아? 기억이 없다는 것 때문에...”
“답답하기는 한데 그것 때문에 초조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느긋하게 기다리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문득 베르단디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전...”
베르단디가 말했다.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래?”
“네, 케이씨와 인연이 맺어졌고, 이렇게 귀여운 아들을 얻었고,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군...”
베르단디는 행복했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천상계의 여신이 이렇게 인간과 결혼하여, 곧 힘도 잃어버린채 몇 년 못가 병으로 생애를 마쳐버린... 그 사실을 알고도 행복했었다고 말해줄까...
“케이씨는요?”
“으, 응?”
“케이씨는 행복해요? 전 케이씨를 행복하게 해주었나요?”
“행복해.”
나는 말했다.
“몹시...”
한달이 지났다. 추위는 계속 되었고, 눈이 녹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옛날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나나 유지나 베르단디가 결국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냥 잊은 채, (아니, 유지는 알지 못한다.) 베르단디의 미소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신기한점이라면 베르단디의 두통이 그치고 난 후부터 예전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베르단디는 법술을 약간씩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는데 어쩌면 베르단디가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케이짱~”
“메구미?”
휠윈드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절로 가기 위해서는 해안도로를 타야 했는데 해안 도로 입구에서 반대 차선에서 다가오는 메구미를 본 것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메구미가 집에 못 오도록 했는데 어떤 일인지 집에 가본 것 같았다. 나와 메구미는 바이크를 길가에 세워두고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씩을 뽑고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메구미, 혹시...?”
“아~ 케이짱, 얼굴 좋아 보이네?”
“저기 말이야....”
“응?”
다행히 메구미는 못 본 걸까?
“음... 그게...”
“베르단디 말하는거야?”
푸웃~
메구미의 입에서 베르단디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마시던 커피를 다 쏟아버리고 말았다.
“호... 혹시...”
“응, 봤어.”
절망이다.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케이짱, 왜 갑자기 그런 표정 짓는 거야?”
“그, 그게...”
“뭐, 요즘 케이짱 예전처럼 행복해보여서 말이지... 그 때문이었구나.”
메구미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좀 멍해. 귀신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메구미는 손으로 앞머리를 한번 쓰윽 뒤로 넘기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메구미는 한동안 망설이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뭐, 상관없잖아? 베르단디는 베르단디니까. 그걸로 케이랑 유지, 행복하면 되는거잖아?”
“...행복? 나 때문에 불행해진 베르단디는 괜찮고?”
내가 처진 말투로 대꾸하자 메구미는 정색을 했다.
“불행하다니, 누가? 베르짱이 그래?”
“아니, 설사 그렇다 해도 베르단디가 그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
“에휴, 바보같은 우리오빠, 베르짱하고 만난지가 언젠데, 아니 결혼까지 해놓고 아직도 그녈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단디는 날 위해 희생한 것이다. 그 때문에 항상 나는 베르단디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며 지내왔다.
“내가 볼 때마다 케이짱하고 베르단디는... 둘 다 정말 행복해 보였어. 하루하루가 즐겁고 재밌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어.”
“......”
“눈이 언제까지 녹지 않고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항상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만 보여주다 보낼 거야?”
그 순간 메구미의 말에 나는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메구미, 지금 뭐라고 했어?”
“베르단디는... 눈이 녹으면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 언제까지 그런 모습만 보여줄...”
“아니,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냐고!”
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져서 메구미의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
“베르단디도 알고 있던걸, 유지는 모르는 것 같아서 아무 말 안했지만...”
떠난다... 베르단디가 다시 떠난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이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애써 부정하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이 사실을 베르단디는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기억이 되돌아 온걸까?
“미안, 나 먼저 가볼게.”
나는 메구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이크에 올라타서는 시동을 걸었다. 귀를 때리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메구미의 말이 맴돌았다. ‘언제까지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만 보여주다 보낼 거야?’ 그러고 보니 요즘 보여준 베르단디의 행동도 약간 이상했다. 유지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며 내가 많이 아플 때 들려주라며... 아무래도 어딘가 멀리 떠날 사람처럼 이것 저건 준비하고 정리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 준 것이다.
“베르단디~”
집에 도착하자마자 큰 소리로 베르단디를 찾았다. 대답이 들리지 않자 더욱 불안해졌다.
“베르단디~ 어디 있어?”
“케이씨.”
“베르단디.”
난 베르단디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베르단디는 외출복장을 입고 있었다. 어디로 가려 했던 걸까?
“케이씨, 우리 산책이나 할까요?”
“응? ...응.”
사그락, 사그락
눈 덮인 숲길에는 둘이서 걸으며 나는 발자국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베르단디...?”
“네, 케이씨.”
“기억이 돌아온 거야? 어떻게 알았어?”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단지, 케이씨의 방을 정리하다...”
베르단디가 죽고 나서 그리운 마음에 멋대로 휘갈겨 꾸깃꾸깃 처박아둔, 낙서장...
“죄송해요, 왠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아직 눈도 그대로 인데! 하고 싶은 말, 해주고 싶은 것들....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내 곁에 더 있어달라고 하면, 그건 욕심일까? 내 이기심일까?
베르단디는 내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아는 듯 했다.
“느낌이 그래요.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은....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베르단디는 비교적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벚나무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서로 손을 잡은 채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이윽고 잠깐 머무르는 붉은 빛, 겨울의 짧은 노을이 찾아 올 시간에 우리는 벚나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르단디.”
베르단디는 벚나무 앞에 서서 붉어진 눈시울로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거야?
“미안해.”
베르단디에게 내가 꺼낸 첫말이었다.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첫 말이 ‘미안해’ 였다. 베르단디를 처음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같이 지낸 시간들, 그 시간들은 어떻게 보면 날 위해 그녀가 희생한 것이니까. 나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베르단디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베르단디는 손을 뻗어 내 볼을 어루만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상해요. 왜 케이씨나 유지나 저보고 미안하다고 하는지...”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웃어주고 싶었다. 나도 미소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목이 메여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어갔다.
“베르단디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는데...”
눈물이 흘러 볼을 타고 흘러 내려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나는... 베르단디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어. 미안해...”
베르단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행복했었어요, 저는... 항상 행복했었어요. 케이씨를 만난 후로 항상...”
비교적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가던 베르단디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제 행복은 바로 케이씨예요. 당신 곁에 있는 것이 저에게는 행복이었어요.”
말하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또 다시 이렇게 베르단디를 보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다면...가능하다면 항상... 영원히... 케이씨 곁에 있고 싶었어요.“
베르단디도 결국 말끝을 흐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베르단디를 감싸 안았고 베르단디도 그런 나를 안아주었다. 마주댄 두 볼에서 나의 눈물과 베르단디의 눈물이 섞여 흘러 내렸다.
“안되겠지요? 이런 말 하면 케이씨가 더 힘들어 질 텐데.”
아니,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유지, 잘 부탁해요. 제 몫까지 사랑해줘요.”
베르단디의 몸이 서서히 흐릿해지며 빛이 나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이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윙윙거려 이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사랑해 베르단디, 사랑해...”
베르단디가 내 목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는 정면에서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마도 내게 마지막으로 기억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후 내 입술에 따뜻하고 포근한 무언가가 봄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마워요... 당신 곁에 머물렀던 시간......”
그녀의 몸이 수많은 빛의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너무 행복했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실체 없는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수많은 빛의 무리들이 한동안 내 주변을 감싸 돌다 바람에 흩어져 서서히 하늘로 올라갔다.
베르단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녀의 이름...
안녕...
엄마~
멀리서 유지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이거 봐!”
손에는 색종이로 만든 브로치가 쥐어져 있었다.
“굉장하지! 엄마한테 줄 거야. 엄마 어딨어?”
나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 그저 눈물을 훔치고는 빛의 무리가 올라간 하늘 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있어? 알려줘!”
그래도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유지는 저쪽으로 달려갔다.
“엄마, 어디있어? 이거 엄마 주려고 가지고 왔어.”
“엄마, 어디야?”
엄마?
엄마?
엄마?
2달후.
다시 찾아 온 벚꽃의 계절.
나와 유지는 벚나무 아래 앉아 옛날의 앨범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베르단디와 결혼하기 전의 오래된 앨범이었다.
“앗. 이거.”
유지는 한 사진을 가리켰다. 나와 베르단디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다.
“엄마 손목에 이거. 내가 선물로 준거야.”
베르단디 손목에 있는 오색실로 된 팔찌.
팔찌...?
그러고 보니 어떤 시점 이후의 사진에 있는 베르단디는 오색실 팔찌를 항상 손목에 차고 있었다. 저건...
그 순간 아득히 잊혀져 가던, 10년 전에 베르단디와 나눴던 한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아, 이거요?’
어느 날 베르단디의 손목에 평소 보지 못하던 오색실 팔찌를 보고 내가 물어보자 베르단디가 말했다.
‘선물받은 거예요. 소중한 사람한테서요.’
‘소중한... 사람?’
‘네. 저한테 있어 케이씨 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예요.’
‘그래?’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떠 올렸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 약간 질투 섞인... 그런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훗...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케이씨도 알게 될 거예요.’
팔찌는 바로 지난겨울 베르단디가 돌아가기 전날 유지가 선물한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사진속의 베르단디가 그 팔찌를 차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겨울 나와 유지가 만났던 베르단디는...?
10년 전 베르단디가 내게 말했던 그 소중한 사람이란...?
베르단디는... 나와 함께 했을 때의 자신의 운명을 알고서도 내 곁에 남기를 선택했던 거였다.
“아빠, 울어?”
“아냐.”
“우는 것 같은데?”
“아냐 그런거.”
벚꽃 잎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펼쳐진 앨범의 사진 위로 떨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사진 안의 벤치 위로 떨어졌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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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게시판 용량때문에.... 내용 절반 가까이 잘려버렸습니다....
글에 가위질해서 이것저것 전부 잘라내고 주요 스토리만 연결되게 붙였더니 내용이 완전 이상해져버렸네요...
제가 쓰는 여신님 팬픽 always 본편에서 베르단디의 꿈에 나오는 미래 이야기를 케이의 시점으로 변환해서 외전 형식으로 적은 겁니다. 마감 다되서 글 다 안올라가서 허겁지겁 편집했더니 ㅜ.ㅜ
오나의 여신님외에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팬픽을 써 보고 싶었는데 같이 한 소설 안에 써볼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외전으로 도전한게 바로 이 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신님 팬픽을 쓰는 도중에 영화를 보게 되어서 삽입 하기로 한거고요... 그래서 초기 유지의 설정이 약간 변화가 있었고요. (공교롭게 유지의 이름이 같은데 '유지'란 이름은 여신님팬픽 설정단계에서 지은겁니당 `ㅡ`;)
퇴고가 마무리 되면 자유연재란에 가위질 안한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허접하지만 콘테스트에 참여한다는 것에 의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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